2013년 고향집 봄
沙月 李盛永(2013.4.10 - )
  지난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는데 그래도 봄은 온다. 2013년 용인 아파트와 시골집을 오가며 시골집에 갔을 때 잊지않고 가지고간 카메라에 담아온 영상들을 계속 모아 '2013년 고향의 봄' 파일을 꾸밀 생각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그럴런지 몰라도 나와 집사람은 볼 때마다 감회가 다른 고향의 풍경이다. 아마 '고향'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 보다.
  2013년 봄에는 3월3일, 3월25일-4월1일, 찍은 영상들이다. 앞으로도 몇 번 더 갈 것이기 때문에 가서 찍어오는 족족 이어 올릴 계획이다.
시골집 일출
눈 덮인 대덕산(大德山: 1290m)
앞산 시루봉(甑峰)
보통 선산날맹이라고 불렀다.
가난했던 어린시절 저 선산날맹이는 우리 어린이 들에게 희망의 봉우리였다.
농가월령가'북두성 자루 돌아 서천을 가르키니---'가 가을 절후를 말 하듯이
우리들에게는 '은하수 선산날맹이 걸리면---'
'풍요한 가을이 와서 쌀밥 먹는 계절'을 말했기 때문이다.
뒷밭 배나무와 복숭아나무
갓 전지(剪枝)한 모습이다.
내고향 마을 사월(沙月: 사드래)과 앞 들
시골집 상주(常住) 주인 야생고양이
위 영상의 녹색 꽃나무는 예라이샹(夜來香)인데
2002년 한 그루를 사다가 아파트에서 꽃을 보다가
이곳 시골집에 옮겨 심어서 매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를 온 집안에 퍼트렸는데 몇년 전 봄에 죽어버렸다.
다시 한포기 사다가 화분에 심어 봄에는 꽃밭에 심고 가을에는 실내로 옮기는데,
화원집에서 봄에는 5월 중순 지나서 밖으로 내놓으라 해서 아직 월동 중이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때 예라이샹
꽃향기는 영상으로 나타낼 수 없으니---
백합, 생강나무, 라일락, 천리향---
내가 아는 향기 좋은 꽃 다 둘러대도 이꽃만은 못한 것 같다.
* 전번 예라이샹(夜來香) 이야기 바로가기(클릭): 예라이샹(夜來香)
가장 먼저 피는 생강나무 한그루
다음 따라 피는 울타리 개나리
뒷밭 배나무
꽃눈이 많이 나왔다. 꽃피기 전 줄기와 가지에 소독약을 친 후 모습이다.
물까치들의 음수장
내가 어린 시절에는 없던 새인데 10여년 전부터 겨울철에만 보이더니
지금은 사철 텃새가 되었다.
이 새들은 신경이 너무 예민헤서 창문을 열고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
창문 안에서 찍다보니 영상에 좀 흐리다.
앞쪽 담과 둔덕위의 상사화
내가 어린시절에는 '상사화' 이름을 모르고 그냥 '난초'라고 불렀었다.
이 식물은 '잎과 꽃이 서로 보지 못하고 그리워만 한다'고 하여
상사화(想思花)란 이름이 붙었단다.이름 그대로 6월중순께까지 왕성하던 잎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 참 후에 맨 아래 영상처럼
한포기에 외줄기 꽃대가 돋아나 끝에 연분홍색 백합꽃 닮은 꽃송이들을 한데 모아 피운다.
왕벚나무 키재기
왕벚나무 한그루를 사다 심은지 3년쯤 됐는데 이제 뿌리를 박았는지 잘 큰다.
올 한해 얼마나 크나 보려고 키와 똑 같은 대나무 장대 하나를 세워 두었다.
텅 빈 연못과 옛날 금붕어(?)가 왕성했던 시절
맨 아래 영상처럼 그 왕성하던 금붕어가 한꺼번에 동사하여 멸종 된 후
너무 허탈해서 다른 고기를 사다넣지 않고 3년이 지났다.
새집 지어 이사온 젊은 교사부부의 언덕위에 새집
봄볕 쐬러 밖으로 나온 '천사의 나팔(?)'과
힘차게 돋아나는 모란꽃나무
미리 보는 만개한 모란꽃
우리 시골집
지은지 13년이 지나니 손질 할 곳이 많은데 차일피일하고 있다.
맨 아래 영상은 우리가 귀경할 때 상태다.
2008년 수비(竪碑)한 직강공(直講公諱淑璜) 추모비
가운데 오석(烏石)이 원문(漢字) 비석이고, 왼쪽 화강석이 해설문비(國漢文)이고,
오른쪽 화강석 비가 직강공이 찬(撰)한 지례향교 중건기문 『명륜당기(明倫堂記)』비다.

< 직강공 추모비(追慕碑) 수비(竪碑) 내력 >
  직강공은 나의 16대조 모헌(茅軒) 이숙황(李淑璜)이다. 일찌기 거창 모곡(茅谷) 세칭 오자암(五子巖)으로 불리는 다섯개의 반타석(盤陀石: 낙타등처럼 생긴 점잖게 앉기 불편한 돌) 위에서 5형제가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세종23년(1441)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는 문과(文과)에는 응시하지않았다.

  부모님 산소를 돌보고, 맞형으로서 동생들의 과거시험과 관직진출을 뒷바라지 하다가 막내동생(淑 咸)이 사마시, 문과, 중시, 발영시까지 급제한 후인 27년 지난 세조14년(1468) 문과 춘장시(春場試) 급제하여 용궁(龍宮:
현 문경 용궁면) 현감으로 시작하였으나 너무 늦게 진출하였기 때문에 빨리 연로(年老)하여 관직은 성균관 직강(直講: 정5품)에 그치고 퇴관하였는데 선친의 묘소가 있는 당시 지례현(知禮縣)의 나의 고향 마을로 낙향하였다.

  성균관 사마(司馬:
유생)로 있을 때 동료및 후진들로부터 '사문골육(斯文骨肉)'이라 칭송을 받았고, 성균관 직강으로 있을 때 선배격인 후에 사육신(四六臣)의 한 사람이 된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가 공을 '일대종사지수(一代宗師之首)'라 평가했고, 졸후(卒後) 교린문(交隣文: 외교문서)을 전담하는 관청인 승문원(承文院)의 수장인 판교(判校: 정3품)와 의정부 찬성(贊成: 종1품)에 증직(贈職)되었다.

  나의 고향 마을은 신라시대에 백제와의 접경지역으로 5리쯤 서쪽에 있는 월이곡부곡(月伊谷部曲)과 함께 전과자 등 천민들을 집단 이주시켜 통제하던 사등량부곡(沙等良部曲)으로 고려 때까지 계속된 천민 마을이었다.

  직강공이 이곳으로 낙향한 후 서당을 차리고 여러 곳에 흐트져 살던 그 후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집성촌을 이루면서 양반마을로 탈바꿈하였다.

  직강공의 묘소는 나의 고향마을에서 동쪽 김천(金泉) 방향으로 2십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고, 묘갈(墓碣)비가 있는데 오래되어 글자를 전혀 알아볼 수 없도록 마모되어 다시 세우기로 하면서 직강공이 일군 나의 고향 마을 사월(沙月)에 묘갈문을 보완하여 현대식 이름으로 추모비(追慕碑)를 세우게 되었다.
귀경길 청원휴게소 테마파크 앞에서
앵무새를 어깨에 올려놔 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