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속의 韓民族史 탐방
沙月 李 盛 永(2009.5.17)
-제2부 후쿠오카(福岡)에서 아소산(阿蘇山)까지-
규슈지역 탐방코스
  ▶ 후쿠오카 하선
규슈여행의 발 Yutoku버스
일본의 차들은 좌측통행을 하고,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승강 출입구가 왼쪽에 있다.
10호차 가이드 이민정양 업무개시
  ▶ 다이자이후(大宰府)
    - 규슈 일원에는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많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사람들이 건너와 흩어져 살았는데 그 중에 백제인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662년에 약 2만명의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이 출병하였으나 백촌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실제로는 신라군)에 대패하고, 패잔병만 돌아왔다.

    - 이후 이곳 백제인들은 신라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이곳에 규슈 전체를 관할하는 지방관청을 두고, 대규모 성(城: 구마모토성)을 쌓아 대비하였으나, 신라는 당과 함께 고구려 침공에 몰두하여 이곳을 침공할 여력도 없었고, 침공할 생각도 하지 않아 평화가 유지되었다.(구마모토성은 오사카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 3대성으로 꼽힌다)

    - 7세기후반부터 다자이후는 규슈를 다스리고, 일본 서부지역 방위와 한, 중 등 외교 교섭 창구로 활용하게 되어 해이안(平安: 794년-1185년)시대까지 일본의 행정수도 역할, 특히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 서기905년 창건된 다자이후 텐만구(天滿宮)에는 이 지방 출신의 스기와라 미치네(菅原道眞)가 중앙에 진출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다가 만년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주민들에게 학문을 권하고 제자를 많이 육성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그를 ‘학문의 신(神)’으로 모시게 되었다. 지금도 사당에 참배하거나 자녀의 합격을 기원하는 인파가 줄을 잇는다고 한다.
다이자이후(大宰府) 터
배경의 산에는 일본 삼대(三大) 성(城)의 하나인 구마모토성이 유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손승철교수 설명
다이자이후 표석과 비석
표석 앞(왼쪽)과 뒤(오른쪽)
앞서 세운 비석 앞(왼쪽)과 뒤(오른쪽)
뒤에 세운 비석 앞(왼쪽)과 뒤(오른쪽)
발굴전(위)과 후(아래)
昭和40年: 서기 1965년
거대했던 관청 건물 초석(주추돌)
기념사진
주변 풍경
  ▶ 후나야마(船上)고분
    -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길 다마나(玉名)에 있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앞은 사각이고, 뒤는 둥근 무덤), 전장(全長) 46m, 전방(前方) 폭23m, 높이6m. 후원(後圓) 직경26m, 높이7.9m,

    - 고분 안에 집 모양의 석관, 내부길이 2.2m, 폭 1.1m, 높이1.45m, 내부 단청, 아소(阿蘇)화산 용암재를 쪼개 만든 조합식으로 관뚜껑은 좌우로 개패가능하다.

    - 출토된 은상감(銀象嵌: 은박이로 새긴것)의 글자 중에 핵심적인 글자가 마모되어 X-선 판독불가로 발표되면서 발표시기를 늦춘 것과 함께 석산신궁(石山神宮)의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처럼 고의 훼손을 의심받고 있다.
석산신궁의 칠지도(七枝刀)
인터넷에서 퍼 온 그림

칠지도 명문 해석(클릭): :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 금동제 신발과 금동관 변관(邊冠)이 출토되었는데 공주 백제 무령왕릉과 익산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고 한다.

    - 백제가 멸망하자 약 2만 여명의 대병을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으로 출병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즉 그들은 자기 조상의 나라를 복국(復國)하는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나야마고분 가는 연도 풍경
후나야마고분 앞과 좌우
전방(前方: 앞은 사각)
후원(後圓: 뒤는 원형)
해자
서정석 교수(오른쪽) 소개
탐사단원들 청강 자리잡고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모형
증명사진
유물 진열관 和水町歷史民俗資料館(화수정역사민속자료관)
은상감대도(銀象嵌大刀: 모조품)
앞뒤를 동시에 볼 수 있도록 거울 앞에 놓았다.

    * <은상감대도(銀象嵌大刀)에 새겨진 글> :
      治天下獲□□□鹵大王世奉事典曹人名无利弓八月中用大□釜幷四尺延刀八十練六十裙□其(□안)上好□刀服此刀者長壽子孫注注得□恩也不失其所統作刀者名伊太加(□안)書者張安也(치천하획□□□로대왕세봉사전조인명무리궁팔월중용대□부병사척연도팔십연육십군□其(□안)상호□도복차도자장수자손주주득□은야불실기소통작도자명이태가(□안)서자장안야)(조선일보사 제작 DVD '日本속의 韓民族史'(1987-2009) 중에서)

    * <이 부분에 대한 서희건(徐熙乾) 조선일보 논설위원 설명> :
      「이 고분에서는 14개의 큰 칼이 나왔다. 이 가운데 은상감으로 글자를 새겨넣은 칼이 발견됐다. 은상감대도는 손잡이가 없으나 길이는 85Cm나 된다. 12개의 국화무늬와 말이 상감되어 있고, 칼을 만든 사람(刀工)의 이름, 글을 쓴 이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는 명품인 것이다.

        그 내용은 서치대왕(瑞齒大王
: 이는 일본학자들의 해석이고, 한국과 북한 학자들은 '百濟 盖鹵大王'으로 해석) 때 아구(牙口)라는 사람이 8월 중순께 큰 솥 넉자 정도의 대도(大刀)를 수십번 두들겨서 좋은 칼을 만들게 했다. 이 칼을 차는 자는 자손 대대로 그 은혜를 입을 것이다. 칼을 만든 도공은 이태가(伊太加), 글자를 쓴 이는 장안(張安)이다.

      이 글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金石文)이라고 하여 교과서에까지 소개되어 있다. 이 칼이 제작된 연대는 5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다른 명문은 잘 보이나 결정적인 부분은 X선으로도 판독이 어렵다는 점이다. 일부러 글자를 마모시켰다고 의심을 받는 석산신궁(石山神宮)의 칠지도(七枝刀)와도 같은 현상이 이 고분에서 출토된 은상감 칼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2008년 11월 21일 조선일보사 간행 '일본속의 한민족사' 1987-2008 중에서)
철제검(모조품)
금동제 신발(모조품)
공주 무령왕릉과 익산고분 출품과 유사
금동관 변관(邊冠)(모조품)
공주 무령왕릉 출품과 유사
금동제 구갑문관(龜甲文冠)(모조품)
출토된 토기
죽공방(竹工房)
너와집
물레방아
중식장소
  ▶ 아소산(阿蘇山)
    - 해발 1592m, 세계 최대 칼데라(분화구, 둘레4Km, 깊이100m)가 있는 세계 최대 복식화산으로 큐슈의 얼굴이다.
    칼데라 안에 네코다케(根子岳), 다카다케(高岳), 나카다케(中岳), 에보시다케(鳥帽子岳), 기네지마다케(杵島岳) 등 5개 산(오름)이 있는데 이를 통칭해 아소산이라 부른다.

    - 동서18Km, 남북24Km, 남북128Km, 면적 380평방Km로 현 모습은 10만년전 대폭발로 생긴 모양. 현재 용암유출이나 대폭발은 없으나 중소규모 폭발은 자주 있어 간혹 하늘 높이 분연을 내뿜는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한다.

    - 북사면은 완만한 경사의 광활한 대초원지대를 쿠사센리(草千里)라 하는데 웅대한 산, 내뿜는 연기, 2개의 연못, 풀을 뜯는 소,말 무리, 인공스키장 등 경치가 아름다운 일본 최고의 국립공원이다.

    - 화산박물관에는 200만년전 대폭발, 수많은 폭발과분화, 화구주변 함몰, 비물이고인 큰호수 등 아소화산의역사를 움직이는 모형으로 전시하면서 스크린으로 다각도에서 보여준다고 한다(관람 못함)

    * 지금은 사화산이 됐지만 우리나라 최남단의 제주도 한라산의 탄생비밀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아 연결합니다.
한라산의 탄생 비밀(클릭): 제주도여행 알고가면---
아소산 가는 길 풍경
산은 완만한데 버스가 꼬불꼬불한 길을 돌고 돌면서 오른다
미창(米倉: 쌀 창고) 오름, 서, 남, 동
아소산분화구내 휴게소
북쪽봉우리
남쪽봉우리와 분화구호
복식화산의 2차오름
동쪽의 활화산이 약한 연기를 뿜고 있다.
북사면 대초원
물 논
초원 구능
뱃부로 가는 연도 풍경
휴게소에서 바라보는 풍경

제2부 후쿠오카에서 아소산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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