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지중해 크루즈>
스페인 바르셀로나
沙月 李盛永(2016. 11. 17)
서부지중해 크루즈여행코스와 일정표

바르셀로나[Barcelona]
면적 : 100.4㎢
인구 : 159.5만명

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지역부터 프랑스 남쪽 피레네산맥과
접경지역까지 걸친 넓은 카탈루냐지방의 중심 항구도시,
카탈루냐자치지방 바르셀로나주 주도(州都)이다.
인구 면에서는 스페인의 두 번 째지만
항만규모와 상공업 활동에 있어서는 스페인 제1의 도시이다.

BC 3세기에 페니키아인들이 이 곳을 지배하면서
스페인 식민지로 개척, 건설한 도시가 그 기원 이며,
‘바르셀로나’ 라는 이름은 하밀카르 바르카 장군(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 가문의 성
‘바르카’에서 유래된 페니키아어 ‘바르케노(Barkeno)’에서 유래되었다.

BC 201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아직 도 구(舊)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고딕가(Gothic街:바리오·고티코스)에는
그 당시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大帝)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였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大帝)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였다.
12세기에는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이 되었고,
바르셀로나는 그 수도로서,
해운·수공업·금융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여 14세기에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무렵에 지어진 고딕식 성 가족성당(13세기 말)을 비롯하여
역사적 건조물들이 구시가 중앙에 많이 남아 있으며,
당시의 바르셀로나의 해양법(海洋法)인 콘술라도 데 마르는
오랫동안 그 권위를 유지하였다.

1469년에 아라곤과 카스틸랴의 통일로 지방도시가 되었으나,
고유의 카탈루냐어(語)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1550년에 창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의 선진지역으로서,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자치의 전통 및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7∼19세기에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북부 카탈루냐 지방을 프랑스에 빼앗기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 바로셀로나는 스페인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당시에는
공화정부(인민전선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가
1939년 1월에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영화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는 이시대가 그 배경)

시가의 중심인 람블라로(路)에는 은행·상사(商社), 고급상품점이 줄지어 서 있고,
이 거리의 남단인 항구 부근의 푸에르타데라파스에는 콜럼버스의 기념상이 있다.

이 거리의 서쪽은 19세기까지 건물이 들어찼으며,
동쪽에 있는 중세까지의 도시지역을 포함하여 구시가라 부르는데,
그 주위를 론다스라고 하는 성벽 터전의 대로가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바깥쪽의 직교상(直交狀)의 시가는
1860년의 도시계획으로 건설된 신시가지이다.

바르셀로나의 공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섬유공업(방적업)인데,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 영향으로
1845년에 14∼15만 명에 지나지 않던 인구가 1931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화학·금속공업도 가세하여 이베리아반도 제1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내란 후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한때 산업도시의 이름을 마드리드에 빼앗겼으나,
그 후 관개시설이 갖추어진 에브로강(江) 서부의 풍부한 농산물과
피레네의 수력(水力)으로 자동차·항공기 공업, 식품가공업 등이
활발해지면서 번영을 되찾고 있다.

카탈루냐 문화의 중심지답게 인쇄업도 활발하며,
지금도 문화·경제의 모든 면에서
카스틸랴의 중심인 마드리드에 대한 대항의식이 강하다.

근대에와서 스페인의 천재건축가 가우디
일생을 바쳐 성 가족성당, 귀족저택 까사 바요트 등 건축 작품을 남겼다.

1992년 제25회 하계올림픽대회가 개최되었으며,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12개를 획득, 종합순위 제7위에 올랐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르셀로나 [Barcelona] (두산백과)

마르세이유에서 바로셀로나로 항해하는 밤바다
지중해 바다 치고는 물결이 거센 편인데 배가 워낙 크다보니 흔들림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바로셀로나항에 접근
해안의 불빛이 가까워지고 밝은 것을 보니 바로셀로나 항이 가까워진 것을 알 수 있다.
갑판에 올라 맞은 바르셀로나항 아침해
조식 끝나고 하선하여 바로셀로나 시내 관광 출발
버스 차창으로 내다보는 바다, 건물, 거리 풍경
큰 길을 건너 가우디 작품 까사 바요트를 보러 가고 있다.
동행가이더와 현지가이더
현지가이더는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 들고 있는 7번은 우리 버스 번호다.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

1852년 6월 25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출생 - 1926년 6월 10일 사망,
스페인의 건축가. 벽과 천장의 곡선미를 살리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를 사용하는 건축가였다.
미로와 같은 구엘공원, 구엘성당의 제실 등이 유명한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성 가족성당)은 그의 역작이다.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는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예술가이며
인생의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면서 개성 넘치는
창의적인 새로운 건축 양식을 창조한 건축가다.

최초의 작품인 가로등부터 공동 주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카사 밀라,
자연 친화적인 주택 단지 구엘 공원, 빛의 질서를 보여 준 구엘 저택,
그리고 아직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성 가족성당에 이르기까지
가우디의 대표 작품은 대부분 바르셀로나에 남아 있다.

가우디는 1852년 바르셀로나 남서쪽에 위치한 레우스라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가우디의 아버지는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구리 세공에 종사하였다.
가우디의 건축물에 구리와 철을 이용한 독특한 조각과 장식이 많은데,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1869년 바르셀로나에 와서 바르셀로나대학 이공학부 공부를 마친 뒤
1874년에 다시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 학교에 입학하여 건축을 공부하면서
1878년 건축사 자격증을 받아 이후부터 는 독창적인 가우디의
건축세계를 펼쳐 나갔다

가우디의 대표작품이라 할 수 있는 성 가족성당
1883년 11월 3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1926년까지
작업이 진행되었고 지금까지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공사를 시작한 지 10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앞으로도
100년은 더 걸려야 완성할 수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가우디의 대표작으로 건축 학자들이 꽈드랏 도오르(황금의 광장)
지역에 세워진 까사 바요트를 선택하는데
가우디의 예술적인 독창성이 모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가우디 작품 귀족저택 까사 바요트 현관 문패와 앞면
입장 순서를 한 참 기다렸다.
계단, 창문 등의 모양과 구조
3층 뒤켠에 만들어 놓은 정원 모습
>
거실과 벽난로
천정
옥상 구조물
옥상에서 바라보는 특이한 건물 침탑
우리가 탄 7번 버스
성 가족성당을 향하여 출발
우리가 보고 떠난 까사 바요트, 다른 손님들이 인산인해
버스에서 내다보는 시가지 건물과 거리
버스 정류장에 반가운 광고판 하나
'이게 바로 TV다'
성 가족성당을 가리키는 이정표
건물 사이로 보이는 성당 침탑
성당 앞의 인산인해
성 가족성당의 앞모습
성당 내부 모습
가이더 이승신씨가 이어폰 낀 우리조 관광객을 위하여 마이크에 대고 설명을 하고 있다.
각 나라 말로 된 주기도문
대한민국: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성당 뒷면 모습
성당 건립 역사와 2026년 때의 모습
지금부터 127년전인 1883년 착공, 앞으로 10년후 2026년이 되면 아래 그림의 모습이 된단다.
그림에 4개의 성당 침탑과 함께 3개의 높은 크랜이 보이는 것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고 계속 건축 중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개관식(연도?) 때 운집한 신도들과 참석한 교황(?)
귀선 버스에서 내다보는 발로셀로나 건축물
콜롬버스 기념관과 침봉 위의 콜롬버스 동상
바로셀로나 항구 모습과 만가운 디아데모호 모습
맨 아래 그림 세척의 크루즈선 중 맨 뒤가 디아데모호
끝(다음은 스패인 말료르카섬 팔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