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동부 여행
沙月 李 盛 永(2006.4.18)
    제3일(3/31 금) 2개팀 합동으로 전세기로 룩소로 이동하여 룩소지역의 카르닉신전, 왕가의계곡, 장제전, 룩소신전 등을 관광하고 카이로로 귀환하여 동일 호탤에 투숙
이집트(Egypt)(2)
< 룩소(LUXOR) >
    이집트의 신전, 피라믿, 왕가의 계곡, 장제전 등 고대유적을 이해하려면 이집트 태양신 신화를 먼저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들 유적의 석상, 벽과 천정 그리고 돌기둥의 벽화 등에 그려진 내용의 출발은 곧 이집트 태양신 신앙이요 끝도 태양신이기 때문이다.
< 이집트 태양신 신화(九神) >
    ‘눈(Nun)’이라는 어두운 바다에서 태양신 ① 아툼(Atum)‘라’(매의 머리) 가 태어나, 스스로 잉태하여 남신 ② ‘개브(Geb)’가 태어나 땅을 다스리고, 또 여신 ③ ‘누터(Nut)’가 태어나 하늘을 다스린다.

    개브와 누터는 결혼하여 장남 ④ 오시리스(Osiris), 장녀 ⑤ 이시스(Isis). 차남 ⑥ 세트(Seth)(붉은 색을 한 악의 신), 차녀 ⑦ 네프티스(Nephthys)를 낳는데, 당시 이집트는 모계사회로서 딸에게 승계하는 율법에 따라 장남 오시리스는 장녀 이시스와 결혼하여 상(上)이집트를 다스리고, 차남 세트는 차녀 네프티스와 결혼하여 하(下)이집트를 다스린다.

    그런데 장남 오시리스는 성실하고 상이집트를 선정으로 다스리지만, 세트는 말썽 꾸러기로 하이집트를 포악하게 다스린다.

    세트의 아내 차녀 네프티스가 속상해 하면서, 큰오빠 장남 오시리스를 연모하면서 유혹하여 동침하고, ⑧ 아누비스(Anubis, 검은 쟈칼의 머리)를 낳는다. 아누비스는 이승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신(저승사자)이 된다.

    장녀 이시스가 이 사실을 알고 차녀 네프티스에게 힐책하자 네프티스가 잘못했다고 빌지만 분이 풀리지 않아 네프티스의 남편 세트에게 말한다.

    세트는 오시리스가 자기 아네 네프티스와 동침한 사실을 알게 되어 네프티스에게 따지자 네프티스는 사실을 시인하고, 그래서 세트는 오시리스를 죽일 생각을 한다.

    세트는 오시리스를 포함한 모든 신들을 모아 진수성찬으로 대접하고 선물까지 주니 모든 신들이 흐뭇해 한다. 모든 신들에게 만들어 놓는 멋진 관을 구경시키면서 한번씩 들어가게 한다.
    마지막 오시리스 차례가 되자 오시리스는 맘이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신들이 다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에 마지못해 들어간다. 이때 네트는 관 뚜껑의 못을 박아버려 오시리스가 나오지 못하게 하고, 14토막으로 잘라 이집트 각 지방에다 버리고, 성기는 나일강에 던졌는데 나일강 물고기가 삼켜버렸다.

    이를 안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몹시 슬퍼하면서 이집트 곳곳을 찾아 오시리스의 14토막을 다 찾아내서 태양신 아툼‘라’에게 부활을 간곡히 애원하지만 성기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승으로 부활 시킬 수는 없고, 오시리스는 저승을 다스리는 신(염라대왕)이 된다.

    한편 오시리스의 아내 장녀 이지스는 궁리 끝에 밀랍으로 오시리스의 남근을 만들어 수습된 시신에 붙이고, 마법의 힘을 빌려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 아들 ⑨ 호루스(Horus)를 낳는다.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 난 아들 호루스는 아버지 오시리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세트와 여러 차례 싸움을 하여 결국 하이집트를 정복하고, 상하이집트를 통일한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저승을 다스리는 오시리스신과 상하이집트를 통일한 호루스신을 가장 숭상하였다. 호루스신은 이집트의 심볼인 독수리형상을 하고있다.

    (가이드 설명을 급히 메모한 것이라 명칭과 내용이 틀린 부분도 있을 것 같다)

◆ 카이로-룩소
카이로공항 대기
투어리더 이인숙양, 이집트 현지가이더 장택근군,
전세기를 함께 타는 다른 팀의 도착이 늦어 약 30분 늦게 출발했다.
보이는 것 오직 사막과 나일 젖줄에 옷섭처럼 붙은 푸른 들판
룩소공항에 내려서
룩소공항 건물
알랙산드리아 공항에 비해 훨씬 아담하다.
이집트 상형문자를 본 딴 듯한 건물 벽이 인상적이다.

◆ 카르닉신전
    신왕국시대부터 룩소는 계획된 도시로 개발되었다. 나일강 동쪽은 ‘산자의 땅’으로 주민의 거주지와 신전을 건설하고, 나일강 서쪽은 ‘죽은자의 땅’으로 암굴무덤(왕가의 계곡), 장제전(제각) 등을 건설하였다.

    카르닉 신전은 역대 파라오(왕)들이 태양신 아툼 ‘라’를 모시기 위한 신전을 1300년 동안 증축해 온 세계 최대의 신전이다.
카르닉신전 발굴 요도
장택근 현지가이드가 카르닉 신전의 규모를 설명하고 있다.
총규모 약 8만평, 현재 가운데 정4각형 부분이 주민의 입주를 금하고 개발 중이며,
관광객은 그 중에서 중앙의 직4각형 부분을 보고 간단다.
까만 직4각형은 나일강물을 끌어들인‘신성한호수’
입구의 주신전 원경
누가 최초 건축했다고 들었는데 잊어버렸다.
신전의 조건: ①창문, ②광장, ③기둥, ④오밸리스크
입장
양머리 스핑크스
태양신 아물 ' 라’가 양(羊)으로 부활하였다는 믿음에서 머리는 , 몸통은 사자
?
파라오의 석상
산자는 팔을 내리고, 왼발을 앞으로 낸단다
신들의 석상
죽은자는 발을 모으고 팔을 기슴 위에 올려 X자로
십주실(十柱室)의 거대한 많은 기둥들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요즈음의 뾰족한 교회탑과 같은 것.
태양신 ‘라’에게 가깝게 접근하고,
꼭대기는 피라믿과 같은 4각뿔 형상,
룩소지역에 나지 않은 1개의 돌로 만든 1000톤 가량의 화강암.
남쪽으로 600Km 떨어진 아스완 지역에서 운반해 온 것이란다.
어떻게 운반하고 세웠는지 감탄스럽다.
오밸리스크는 세계에 12개가 보존되고 있으며,
로마 바디칸의 베드로성당광장,
프랑스 파리의 상제리제거리의 한쪽 끝 콩코드광장,
터키 이스탄불의 전차경기장
등에 있는 오밸리스크도 모두 이집트에서 탈취해 갔거나 선물로 받아 간 것이란다.
지성소(至誠所)에 관을 올려 놓던 대
나폴레온의 흔적을 말하는 불어 4줄
< 나폴레옹과 이집트 >
    고대 이집트문명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27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집트 방문이 유행처럼 되어 솔론(BC640-560), 헤카타이오스BC550-475), 헤로도토스(BC484-442)등이 이집트에 관한 기록들을 남겼다.

    본격적인 이집트열풍을 일으킨 것은 알랙산더대왕이다. 알래산더대왕과 그 후예들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알랙산드리아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짓고, 이 도서관을 통해 방대한 이집트문명의 흔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집트열풍은 로마시대로 이어졌다. 씨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정복 또는 망명지로 이집트를 오갔고, BC30년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크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전투 패전 후 자살 함으로서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곡식창고’가 되었다.

    이집트에서 옮겨 온 오벨리스크가 로마의 성베드로성당 광장의 중앙에 세워졌고, 로마 황제의 무덤은 피라미드의 형태를 본 따 거대한 마우솔래움으로 지어졌다.

    로마시대에 최고조에 달했던 이집트 열풍을 이어받은 사람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다. 1798년 5월 38,000명의 군대를 실은 328척의 함대가 프랑스 남부의 툴롱항을 출발해서 이집트로 떠날 때도 나폴레옹을 비롯한 몇몇 고위층 인사를 제외하고는 이 함대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고 한다.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불란서 육군 포병장교였다.
이태리를 정복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이 함대에는 무려 167명의 학자들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동참했다. 고고학자, 언어학자, 지리학자, 수학자 등 전문가 뿐만 아니라 화가, 시인, 음악가 등 예술가들도 끼어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프랑스가 자랑하던 국립학술원 정예 멤버들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 앞서 이집트가 기진 잠재적 가치를 철저히 탐구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유적 뿐만 아니라 지질, 농작물, 동식물, 주민들의 동향 등을 분석해 낼 수 있는 학자들을 참여 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함대는 ‘원정대’라기 보다는 ‘지중해에 떠다니는 연구소’란 표현이 더 실감 났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계획할 때 알렉산드대왕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대왕의 군사원정에는 항상 학자들을 대동하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폴레옹 원정의 최종 목표는 당시 유럽의 라이벌이었던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빼앗는 것이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대왕처럼 이집트에 확고한 교두보를 설치하고, 수에즈운하를 뚫어 인도와의 최단거리 무역로를 개설하는 것이 그의 원대한 꿈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대한 꿈을 안고 영국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한 달 내내 지키고 있는 길목을 안개를 틈 타 교묘히 감시망을 피해 일단 이집트를 점령하기 위하여 1798년 7월 1일 알렉산드리어 항구의 서쪽 해변에 도착하였다.

    나폴레옹군은 7월 2일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전진하는 가운데 도중에 2-3회의 조우전이 있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고, 21일부터 카이로 공략에 나섰다. 이 때 이집트는 오스만터키 지배 하에 있으면서 주로 기병으로 편성된 Namaiukes군이 카이로를 지키고 있었다. 카이로 성문 앞에서 벌어진 피라미드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은 대승을 하여 24일 카이로를 탈취하고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알랙산드리아 동쪽 아부키르항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배들을 영국 함대가 한 달간 추적 끝에 발견하고 기습 공격하여 328척 중 2척만 탈출하고 나머지는 모두 나포되거나 파선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학자들이 싣고 온 서적과 탐사 장비들도 모두 침몰된 배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고 한다.

    영국 해군이 지중해를 장악하여 나폴레옹군이 이집트에 고립된 후에도 나폴레옹의 이집트 연구 열정은 식지 않았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1798년 8월 23일 카이로에 프랑스학술원을 개원하고, 본격적인 이집트탐사와 개발에 들어갔다.

    피라미드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나폴레옹은 학자들에게 대피라미드의 비밀을 밝혀낼 것을 지시했다. 원정에 참여했던 수학자 몽즈는 대피라미드의 체적이 2,600,000 입방m나 되며 이것만 가지고도 프랑스 국경을 3m의 높이 0.3m의 폭으로 쌀 수 있는 양이라고 계산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업무에 지친 피곤한 몸으로도 밤 늦게까지 학자들과 이집트 문명에 관한 토론을 벌렸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이집트 문명에 심취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문명이 햇빛을 보게 하는데 가장 큰 공로는 로제타석의 발견과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이다. 1999년 7월, 프랑스 나폴레옹군 공병대가 지중해 연안 로제타 근처에서 줄리앙요새를 건설하기 위하여 오래된 석조건물을 헐던 중 한 병사가 높이 1.25m의 단단하고 새까만 현무암 돌비석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이 비석에는 상형문자와 흘림체 민용 문자, 그리고 그리스어 등 세 종류의 문자가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었다.(이 돌은 로제타석이라 명명되어 지금 정품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있고, 이집트박물관에는 모조품이 전시되어있음)
로제타석
'로제타'는 알랙산드리아 동쪽 해안 도시 이름이다.
그러니까 '로제타석'은 '로제타에서 출토된 돌'이란 뜻이다.
    비문의 그리스어를 해독한 학자들은 이 비가 프톨레마이오스5세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적비로 BC196년 경 당시 북부 이집트의 중심도시 사이스(Sais)의 한 궁전 광장에 세워졌던 것임을 밝혀냈다.

    로제타석의 비문으로 새겨진 이집트 상형문자를 완전하게 해독해 내고, 이를 토대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완전히 해독해내 고대이집트문명이 세상에 빛을 보게 한 사람은 프랑스 언어학자 샹폴리옹(Champolion, 1790-1832년)이었다.
샹폴리옹
어릴 때부터 고대어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던 그는 17세에 이집트 파라오들의 연대기를 재구성하였고,
1822년에는 로제타석비를 토대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완전히 해독하는데 성공하였다.
    로제타석의 그리스어를 분석하던 샹폴리옹은 카르투슈(타원형 모양의 고대 이집트 왕과 신의 명찰) 안에 이집트 상형문자로 새겨진 것이 프톨레마이오스라는 것을 확인했고, 이집트 필레섬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에서 크레오파트라 이름의 상형문자를 알아내고, 이들 두 왕의 이름을 비교하여 중복되는 몇 개의 글자를 확인하였다.

    샹폴리옹은 이런 방식으로 이집트 신전 벽에 자주 등장하는 파라오들의 이름들을 차례로 읽어서 1822년 <소리글자로서의 이집트 상형문자>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비쟌틴(동로마)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47-395년) 황제에 칙령으로 ‘이집트 신전 폐쇄’ 이후 1400여년 동안 인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던 이집트 상형문자가 그 비밀을 드러낸 것이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결국 정치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이집트문명에 대한 연구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게 컸다. 프랑스로 돌아 온 나폴레옹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집트 탐사 성과를 집대성 했다. 즉 20여년에 걸쳐 총 24권에 이르는 <이집트(Description de l’ Egypte)>를 출간한 것이다. 이집트의 유적과 유물 뿐만 아니라 지질, 동식물, 원주민들의 풍습, 종교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에 관한 방대한 분량의 지식이 담겨져 있는 이집트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나폴레옹과 프랑스 학자들의 열정을 담은 <이집트>가 발간되자 유럽사회에 이집트 신드롬이 몰아쳤다. 미라, 오벨리스크, 피라미드 등에 관한 고고학자들의 논설이 그치지 않았고, 화가들은 이집트 각종 풍물을 화폭에 담았다.
    (1961년 내가 배운 ‘나폴레온전쟁사’ 교재와 인문잡지 안띠꾸스(ANTIQUUS) 통권6호 협성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김성의 ‘나폴레옹과 이집트 열광의 역사-피라미드의 예언을 들은 사나이’ 중에서)
기둥에 상형문자로 업적을 기록한 십주실(十柱室)
3200년 전의 건축, 태양신 아문 ‘라’에게 바친 내용을 기록한 134개의 기둥.
람세스II세의 과시욕의 산물.
기독인들이 십자가로 개조하면서 훼손한 신상
파괴된 유물 조각들, 복원을 시도하지만 요원
가운데 호수가 나일강물을 끌어들인 ‘신성한호수’
나일강 수위 측정장치
나일강의 수위는 세금징수의 기본 자료란다.
수위가 올라가면 범람이 심하여 흉년이 되므로 세금을 낮게 매긴단다.
쇠똥구리 석상(위)과 ‘탑돌이’군중
쇠똥구리는 부활을 의미한단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미라를 만들 때 다른 내장들은 다 꺼내지만
심장은 그냥 두는데 심장 속에 쇠똥구리를 넣는단다. 빨리 부활하라는 뜻.
쇠동구리석상을 탑돌이 하며 많이 돌면 죽어서 빨리 부활한다고 믿는단다.
무슨 상형문자 기록의 화강암 기둥

◆ 룩소 시내
나일강 선상 레스또랑에서 점심
룩소의 나일강
건너편 산 뒤쪽이 오후에 구경할 왕가의 계곡
나일강물의 끌어들이는 인공수로
나일강물이 일궈 낸 옥토

◆ 왕가의 계곡
‘왕가의 계곡’을 품고 있는 나일강 서편의 무명산
룩소르 시내서 서쪽으로 나일강 건너에 보이는 산 너머에 왕가의 계곡이 있다.
역사성으로 보나 이지역에서 크기로 보나 이름이 있을 법 한데---
왕가의계곡’ 암굴무덤 총괄요도

< 왕가의 계곡 >
    나일강 서편(죽은 자의 땅)에 신왕국시대 왕들의 암굴무덤이 있는 ‘왕가의 계곡’에는 총 62개의 무덤이 있는데 그 중 25개가 파라오(왕)의 무덤이다.
    동쪽 계곡과 서쪽계곡으로 나누어지는데 동쪽 계곡에 집중되어 있다.
    이곳에 처음 무덤을 만든 것은 18왕조 제3대 왕 투트머스(THOUMES) I세인데, 구왕국시대의 피라미드 건설은 너무나 큰 국력이 낭비되므로 피라미드의 효과를 보면서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할 수 있는 방안으로 고안된 것이 암굴무덤이다.
      * 실제 구왕국시대 왕조들이 피라미드 건설에 따른 국력소모 때문에 쇠퇴함.
    '왕가의 계곡'이 암굴무덤지로 선택된 조건:
        ① 나일강의 범람을 피할 수 있고,
        ② 요새형의 지형으로 방호가 용이하고,
        ③석회암산으로 암굴을 파기가 쉽고,
        ④ 무명산 정상이 피라미드 꼭대기를 꼭 닮았다.
주차장에서 열차를 타는 곳까지
중간지점까지 열차를 타고
정상이 피라미드 꼭대기를 닮은 무명산
직접 들어가 본 투트머스(THOUMES) III세의 암굴무덤의 구조와 가는길, 입구표지
투트머스(THOUMES) III세 암굴무덤은 왕(王)의 현실(玄室)과 왕비(王妃)의 현실이 따로 있고,
벽에 많은 상형문자 기록과 벽화가 그려져 있다.
투트머스(THOUMES) III세 암굴무덤의 왕 현실(玄室)의 관(管)
관리인이 절대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엽서를 사와서 스캔한 것이다.
직접 들어가 본 람메스스(RAMESES) III세의 암굴무덤의 구조와 입구
왕가의 계곡 요도와 입구에서 바라본 동쪽계곡
입구에서 바라본 서쪽계곡
왕가의 계곡 구경을 마치고 열차
< 투탕카멘(TUTANKHAMUN)의 암굴무덤 >
    왕가의 계곡 암굴무덤도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도굴꾼들을 피할 수 없어 19세기 고고학자들이 무덤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도굴 당한 뒤였다.
    그러나 10세의 소년으로 왕위에 올라 10년간 재위에 있었던 투탕카멘(TUTANKHAMUN)의 암굴무덤은 도굴되지 않아 수 천점의 유물이 나와서 현재 카이로 이집트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이집트박물관프랑스 루불박물관, 런던의 대영제국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것도 도굴 당하지 않은 투탕크아문 암굴무덤에서 나온 유물들 때문이라 한다.
    투탕카멘(TUTANKHAMUN)은 재위 기간도 짧고, 치적도 별로 없지만 유물 때문에 유명해졌다.
* 투캉카멘의 유물(2013.1.20. 補) 바로가기(클릭): 투탕카멘의 유물

◆ 장제전
사체추스여왕의 장제전의 원경
장제전은 왕이 죽은 후 장례 예식을 베푸는 신전이다.
사체추스여왕의 장제전 뒤의 병풍 같은 암벽이 마치 독수리(이집트 상징 포르스신)가
양 날개를 쭉 펼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화제.
장제전은 3층으로 1층은 파라오(왕)의 당위성(當爲性), 2층은 업적(業績),
3층은 지성소(至誠所)의 구조로 되어있다.
장제전에 들어가는데도 열차 타고
신상들
신상의 얼굴은 파라오(왕)의 얼굴로 표현
장제전에서 바라보는 룩소시내 전경
지성소 앞
지성소 즉 신들이 있는 곳은 어두운 것이 특징
코부라와 독수리(이집트 상징 포르스신)를 합성한 장제전 계단 난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상
높이 23m, 아메르트III세 장제전이 있던 자리로 추정

◆ 룩소신전
    룩소신전은 18왕조의 아멘호테프 III세가 처음 건축하였고, 19왕조 람세스 II세 등이 증축한 것으로 카르닉의 아문대신전의 아문신(태양신)이 오페트제(祭)에 임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곳으로 건축한 신전이다.
룩소신전 입구 원경
룩소신전 입구의 오밸리스크와 앉아있는 신상
룩소신전의 오벨리스크는 양쪽에 쌍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오른쪽 것은 프랑스에서 가져가 콩코드관장에 세웠기 때문에
여기는 오밸리스크를 세웠던 대만 남아 있다.
광장과 높이 16m의 원주열(圓柱列)
이집트신전에 이스람의 흔적
이집트 신전에 도리아식 기둥 2개
이집트신전에 그리스도교 흔적
성기(性器)의 신-아문밋신 벽화 2개
만지면 뭣한다더라--- 하두 만져서 때가 새까맣게 끼었다.
인면수신(人面獸身)의 스핑크스
얼굴은 지혜를 뜻하는 인간, 몸은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이다
화강암 비석하나
후대에 룩소신전의 내력을 기록한 비석이란다.
    * 룩소지역에 별로 단단하지도 않은 석회석 유물들이 자연(비, 바람)에 의하여 훼손되지 않고 수 천년 유지되어 온 것은 이곳 연간 강우량이 3mm에 불과하여 연중 비가오지 않기 때문에 석회석이 녹아 흘러내리거나 풍화되지 않기 때문이란다.

룩소 끝

다음은 카이로(클릭): 이집트-3(카이로)

사카라-맴피스(클릭): 이집트-4(사카라-맴피스)

알랙산드리아(클릭): 이집트-1 (알랙산드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