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옥상(起馬玉像)
沙月 李 盛 永(2007.2.23)
뒤의 친구를 독려하며 ‘힘차게 일어서려는 말 상’
길이 28Cm, 폭 8Cm, 높이 19Cm, 밑바닥에 붙여놓은 것은 증정자(왕약우)의 명함.

    나에게 말 한 마리를 조각한 옥조각(玉彫刻)이 하나 있다. 위 사진이다.
    내 스스로 ‘기마옥상(起馬玉像)’이라 이름 지었는데 마치 뒤의 친구를 독려하며 '힘차게 일어서려는 말 형상'이라 그렇게 명명하였다.
    18년 전에 얻은 것인데 옥의 질이나, 예술적 가치나, 값으로 따지면 별로 신통치 않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내가 얻게 된 그 때의 여러 가지 추억 때문에 곱게 간직하고 있다.

    조선조 세종 때에 팔준도(八駿圖)라는 말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여덟마리 준마 그림'이라는 뜻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고려 장수로 있는 동안 북으로는 야인, 남으로는 왜구의 노략질을 토벌하면서 평생 동안 타고 다닌 말이 모두 여덟 필인데, 세종 임금이 착안하여 그 말들을 화공을 시켜 한 장에 그려놓은 그림이라 한다.

    세종29년(1447)에 문과(文科) 중시(重試)를 치렀는데 고관(考官: 시험관)들이 급제자 19인을 뽑아 9위에서 19위까지는 석차를 정했는데 1위에서 8위는 서열의 고하를 정할 수가 없어서 임금에게 과차(科次: 서열)를 정하는 문제를 고하였더니 임금이 몹시 기뻐하면서 8인을 대상으로 재시험을 치게 하면서 팔준도(八駿圖) 그림을 놓고 여기에 병서(竝書) 할 글을 전(箋), 부(賦), 시(詩), 명(銘), 송(訟) 중에서 취향대로 글을 짓도록 하는 것을 시험문제로 출제하였다.

    재시험 후 최종적으로 방목(榜目)에 발표된 것을 보면
      을과 1등 3인으로 성삼문(成三問), 김담(金淡), 이개(李塏) 등이고,
      을과 2등 7인으로 신숙주(申叔舟),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 이석형(李石亨), 송처관(宋處寬), 유성원(柳誠源), 이극감(李克堪) 등이며,
      을과 3등 9인으로 정종운(鄭從韻), 이예(李芮), 김증(金曾), 조섭융(曺燮隆), 이승소(李承召), 이극효(李克孝), 정창손(鄭昌孫), 김예몽(金禮蒙), 김통(金統) 등이다.

    이에 앞서 세종 24년(1442)에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이석형 등 여섯 사람이 제2회 호당(湖堂)에 뽑혀 삼각산 진관사에서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한 친구들이었다.

    이 중시 때의 일화 하나가 전해지고 있다.
    백옥 이석형은 전(箋)의 형식으로 天佑作之君聖人應千齡之運(천우작지군성인응천령지운) 地用莫如馬神物效一時之能(지용막여마심물효일시지능) 즉 “하늘이 도우사 임금을 내셨으니 성인(聖人: 태조 이성계를 말함)은 천년의 운수에 응했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보다 더 한 것이 없으니 신물(神物: 말)이 일시에 그 재능을 바치도다”(좀 더 해설을 븥인다면 '천년의 운수에 응하도록 이성계를 장차 임금으로 하늘이 내렸고, 이 여덟마리 말이 곧 그 신물로 나타나 재능을 다하여 이성계를 도왔다')는 뜻으로 두련(頭聯: 聯句 글에서 첫머리 글귀)을 쓰고, 다음 구절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근보 성삼문이 다가와서 보고는
    “대(對)는 잘 되었지만, 임금과 말을 대(對)로 하여 지었으니 너무 체모가 없지 않은가? 신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남에게 전해져서는 안 될 듯 하네” 하고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이석형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다시 장률(長律: 詩)로 바꾸어 지었다. 이석형이 답안을 바꾸는 것을 곁눈질로 본 성삼문은 이석형의 그 두련을 사용하여 전(箋)을 지어 제출하였다. 다음날 중시방(重試房)이 나붙었는데 성삼문이 장원이고 이석형은 일곱번째였다.

    그 후 두 사람이 만나자 이석형이
    “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지 오래 되었는데---” 하니, 성삼문이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남에게 굽히지 않던 자네의 무릎을 내가 굽히게 했지” 하면서 둘이서 한바탕 웃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이들이 과거시험의 등수와 같은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대범했던 사람들이라는 것과 이석형이 성삼문을 비롯한 호당에서 우정을 맺은 사람들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이야기는 다시 기마옥상으로 돌아가자.
    나는 원래부터 외국어에는 소질이 없었고, 이방면으로 자기개발을 할 생각을 못했다. 그저 맡은 직책에 따른 고유 업무와 부여 받은 과제는 밤을 새우더라도 완성해 놓는 것이 '임무에 충실한 것' 으로만 알고 이런 저런 생각 없이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일만 했다.
    그 결과 어느 보직에서도 ‘별볼일 없는 놈’ 으로 평가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28년 군 장교 생활 중에 외국 유학은 커녕 출장도 한 번 못하는 ‘재주 없는 놈’ 이 되었다.(실제 합참과 국방부에서 전력증강계획과 평가분석 업무 수행에는 해외에 출장할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대령으로 예편을 두 달 반 정도 남겨놓은 1989년 11월 초,「국방부본부실무요원동남아시찰단」 단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대령, 중령급 현역 15명, 서기관, 사무관급 공무원 8명 계 23명을 인솔하고 싱가폴, 태국, 자유중국 3개국을 순방하는 기회를 주었다.
    그 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두 달 반 후에 군대를 떠날 사람에게 시찰단장을 맡긴 것은 ‘그간 고생했으니 며칠간 외국 구경이나 하라’ 는 뜻이었던 것 같다. 월남에서 중대장 끝날 때 사이공에 ‘전투관광’ 보내는 것과 같은 배려로 생각이 된다.

    어쨋던 28년 군 장교생활 중에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는 말은 듣지 않게 되었고, 가까운 아세아 지역의 나라지만 듣고 배운 것보다 현지에서 사람과 문물은 직접 대하니 신기한 것도 많았다.

    각 나라의 국방부 방문은 의례적인 것이기 때문에 브리핑을 듣고, 고맙다는 인사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큰 부담 없이 지났다. 나머지 시간은 시내와 가까운 관광지를 찾아 구경하였다. 싱가폴에서는 식물원과 쌘토사섬의 전쟁기념관을 구경했고, 태국에서는 방콕 시내 구경을 하고, 파타야 관광지를 1박하며 구경했고, 대만에서는 박물관과 우라이(烏來)족 민속촌을 구경했다.

    싱가폴은 열대지방이니 당연히 식물원은 열대 식물로 왕성했고, 샌토사섬은 2차대전 때 일본군에게 항복할 때까지 영국군 1개 사단이 주둔했던 막사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잘 정비하여 기념관으로 꾸며 관광객을 유치하는 싱가폴 사람들의 지혜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섬에 들어가고 나오는 주 교통수단은 케이불카였다.
싱가폴 식물원
샌토사 전쟁기념관 입장표와 케이불카 티켓

    태국은 관광자원이 많은 나라라 볼 거리가 많았다. 방콕 시내는 태국관광의 표상 새벽의 사원, 왕궁과 함께 있는 에메랄드사원 등을 구경한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방콕의 ‘새벽의 사원’
방콕의 에메랄드사원

    태국에서 제비와 얽힌 이야기가 생각난다. 태국 국방부에 들어가기 전날 방콕 시내 어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로 출발하면서 가이드가 느닷없이 “방콕에 제비족 구경 하시겠습니까?” 한다.
    우리는 가이드의 ‘제비족’ 이라면 당연히 불법 땐스홀에서 머릿기름을 반지르 하게 바르고, 반짝 반짝 빛나게 닦은 백구두를 신고,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슬그머니 춤바람 난 아줌마 곁으로 다가와 춤 가르쳐 준다는 구실로 꼬셔서 두고 두고 돈을 우려내는 족속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방콕의 제비족은 어떤 모양을 하고 여자를 후려낼까? 궁금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사실 한국에서도 제비족이란 말만 들었지 실제로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장교와 공무원들인지라 호기심이 부쩍 동했고, 어차피 잘 시간까지는 다른 계획도 없으니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했다.
    시내 밤길을 얼마쯤 가더니 사람이 좀 뜸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다 왔다며 버스에서 내려서 눈 여겨 보면 제비족들이 보일 것이라 했다.

    그곳 가로수와 전깃줄에는 새까맣게 제비가 열려 있었다. 일부는 공중으로 날기도 했다. 그 수를 감히 말 할 수 없는 정도로 많았다. 저것들이 일시에 공중으로 날면 정말 하늘이 완전히 가릴 것만 같았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봄에 와서 집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알을 낳아 품어서 부화시켜 새끼를 길러 가을이 되면 소위 ‘강남’ 으로 가는데, 여기 태국도 그 강남의 범주에 들어 한국에서 강남 간다고 출발한 제비가 이곳까지도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새끼를 치지 않기 때문에 집을 지을 필요도 없고,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 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곳에 한데 모여서 떼를 지어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콕에는 이곳에 전부 몰려 살기 때문에 저녁 때면 여기에서만 제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날 태국 국방부에 들어가 회의실에서 서로 인사가 끝나고, 현황브리핑을 준비하는 동안 차 한잔 마시면서 환담이 오가는데 내가 “어제 저녁에 고향친구를 많이 만났노라. ○○거리에 가니까 제비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자세히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라서 지난 10월에 강남을 간다며 떠났는데 여기에 와 있더라. 무척 반가웠다” 하였다.

    물론 내가 마이크를 잡고 말 할 때는 무슨 소리인지도 몰랐다가 통역이 나가니까 신기한 듯 하더니, 어느 장교가
    “한국에도 제비가 있느냐?” 묻기에 “여기에 와 있는 제비가 모두 한국에서 온 것 같다” 고 하니까, 또 “거기서도 한데 몰려서 사느냐?” 하고 다시 묻는다. “그렇지 않고 전국에 퍼져 살면서 집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면서 사람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고, 벌레들을 잡아먹어 ‘이로운 새’ 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친하게 지낸다” 했더니, 그 태국 장교가 그러냐면서 말 끝을 흐린다.

    나중에 가이드가 말 해서 안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제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벌레들을 잡아먹는 것은 좋은데 밤에 집단으로 가로수나 전깃줄에 몰려 제비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그 밑을 지나가다가는 '제비똥 폭격'을 당하기 십상이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새끼를 치지 않고 월동만 하면 떠나기 때문에 별로 정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비가 많은 거리에 사람이 뜸 한 것도, 나와 제비에 관한 대화를 하던 장교가 말끝을 흐리는 것도 이 때문이란다.

    자유중국 국방부에서 느낀 것은 ‘고독(孤獨)’ 그것이었다. 2차세계대전의 태평양전쟁에서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의 끈질긴 공격과 만행을 이기고 당당히 전승국이 되었는데, 전쟁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안 공산당이 싹트고, 자라나서 전후 복구도 하기 전에 국공내전을 겪고, 결국 공산당에게 본토를 고스란히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와 꿈에도 ‘본토수복(本土收復)’ 을 외치며 살았는데 세계 인심은 비정하여 이제 겨우 26개국이 수교국으로 남아있다. 그 중 한국이 가장 큰 나라다.

    비록 대령을 단장으로 한 시찰단, 정확히 말하면 관광팀인데 그토록 신경을 썼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국방부 총참모부(함참) 인사참모차장(부장) 육군중장(소장)이 시종 시찰을 안내하는가 하면, 공식행사가 다 끝난 후에도 전형적인 중국식으로 저녁 식사대접을 하였다. 그리고 이 ‘기마옥상(起馬玉像)’ 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나에게 기마옥상을 증정하는 왕약우(王若愚)중장(소장)

    그래서 이 기마옥상을 볼 때마다 그들의 애틋한 심경을 보는 듯하다. 민망스럽도록 관심과 대접을 받았던 그 때 그들의 속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귀국후 시찰결과보고에서
    「이상의 관점에서 전반적인 대중(對中)관계 방향은
      (1) 중공에 대해서는 북괴에 대한 영향력에 주안을 두고 안보외교에 역점을 두고, 경제적인 면은 단기적인 이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며,
      (2) 자유중국에 대해서는 그들의 축적된 부(富)에 착안하여 현실적 실리 추구에 주안을 두고, 전통적 우호관계를 적절히 회복하여 경제적 실리추구에 활용하여야 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내 딴은 힘주어 설명했지만 얼마가지 못해서 정부는 무역대표부 정도만 남기고 자유중국과의 정식 외교관계는 단절하는 조치를 취했다. 중공과의 국교정상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기마옥상(起馬玉像)’ 이 내 손에 들어와 우리집 거실에 놓고 있지만 이 조각품을 볼 때마다 애처롭게 보이던,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던 자유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신의(信義) 없는 나라’ 로 비웃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뭐니뭐니 해도 국가는 국력을 키워놓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자유중국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박물관오라이(烏來)족 민속촌이었다.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하는 짐 속에 가장 우선적이고, 신중을 기한 것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보물의 수송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북의 국립박물관에는 내 기억으로는 20년을 진열해도 다 진열할 수 없는 양의 보물이 창고에 보관되어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때의 일화가 하나가 생각나는데 운반할 수 있는 중국 본토의 엄청난 보물을 함정에 싣고, 천진항을 떠나 대만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중공군 정보부가 이를 모택동 주석에게 보고하고, 무력으로 뺏는 작전을 전개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모택동은
    “그러다 바다 속으로 빠져버리면 영영 없어져 버리지만, 저들이 대만으로 가져가면 잘 보관될 것이므로 언젠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거기 있는게 어딜 가겠느냐?” 하면서 작전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보물들이 이곳에 보관되고, 전시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속 깊은 말이다
대북 국립박물관 장개석총통 동상 앞
우라이(烏來)족 민속촌 상징과 전사상(戰士像)


시찰결과 보고
(브리핑 차트와 시나리오)

    시찰 결과보고는 1989년 11월 15일 귀국하여 12월 13일 장관주제 국방부 주간회의 때 15분의 시간을 할당 받아 오버해드 스라이드 10매를 준비하여 장관 이하 70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하였다.
(차트 #1)

    지난 11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실시한 국방부본부 실무요원의 동남아시찰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차트 #2)

    시찰 인원은 대령, 중령급 현역 15명과 서기관, 사무관급 공무원 8명, 계23명으로 편성되었으며
    경로는 싱가폴, 태국, 자유중국 순으로 3개국을 순방하였습니다.
    시찰은 각국의 국방부 및 예하 사령부 방문과 만찬초대 참석 그리고 박물관, 민속촌 등의 견학을 실시하였습니다.
    보고 순서는 일반현황과 싱가폴, 태국, 자유중국 순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차트 #3)

    싱가폴은 서울 정도의 크기에 인구는 270만도시국가로써 국민소득은 7,700불이나 되어 아세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 입니다.
    국민은 중국계와 말레이계가 잘 화합하여 스스로 ‘싱가폴민족’이라고 부르며, 불교와 회교가 주류를 이루고, 힌두교와 기독교도 있으며, 언어는 영어와 말레지아어가 혼용되고 있습니다.

    태국은 한반도의 2.3배나 되는 국토와 5,200여만의 인구를 가진 큰 나라입니다.
    민족화합의 구심점으로 국왕을 두고, 수상이 국정의 책임을 지는 입헌군주국이며, 아직 국민소득은 낮은 편이며, 샴족이 주류를 이루고, 화교가 인구의 8%나 되며, 세계 최대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 최대 불교국가로서 언어는 태국어와 중국어가 혼용되고 있습니다.

    자유중국은 경상북도 보다 약간 큰 면적에 인구는 1,900여만으로 한국보다 인구밀도가 높으며, 국민소득도 6,500불로서 우리의 1.5배로 높습니다.
    30여만의 고산족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전부 한족이며, 민속신앙으로 도교가 성행하고, 불교, 기독교, 회교가 자유롭게 신봉되고 있습니다.
    언어는 중국어를 쓰고 있으나 발음이 본토와 달라서 텔레비젼 방송 때는 본토발음으로 말하고, 한자 자막이 나오고 있습니다.
(차트 #4)

    싱가폴은 완전하게 계획적으로 건설된 인공적 도시국가로서 도시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잘 정비되어 유지되고 있으며, 강력한 법치주의로서 질서가 확립되고, 범죄가 예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연 장소에서 흡연시는 우리 돈으로 약 17만원의 벌금이 부과되며, 범죄 예방책의 하나로 지금도 곤장을 치는 태형제도(笞刑制度)가 시행되고 있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 나라는 홍콩과 함께 자유항으로 개방되어 중계무역과 관광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데 금년도 관광객은 450만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광요수상의 청렴하고 강력한 통치력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 왔으나, 이광요수상이 명년에는 하야 할 것을 천명한 바 있기 때문에 후계문제가 대두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나라는 주변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군사적 위협은 극히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인구전반적인 국력에 비하여 상당한 상비전력을 유지하면서 장비현대화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GNP의 5% 수준을 국방비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방위전략으로는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 시민적 그리고 군사적 제 요소를 망라한 총체적 전력으로서 좁은 국토를 사수한다는 총력방위 전략개념을 정립하고, 특히 국방의식에 대한 국민계도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싱가폴이 오일루-트인 마라카해협 상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중동산 원유에 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관심을 가져야 할 지역입니다.
    또한 그들의 총력방위개념과 국방의식에 대한 국민계도 방법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차트 #5)

    태국의 국민들은 비교적 정치에 덜 민감하기 때문에 현 군사정권체제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군의 영향력이 매우 크며,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2개 텔레비전 방송국과 126개 라디오 방송을 포함한 모든 매스컴 조직을 군이 운영하면서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으며, 군은 4개 개발사단과 7개 공병사단을 확보하고 있으면서 국토개발을 적극적으로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경제권은 금융은 화교(華僑)가, 일반상권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이 나라의 주산물은 쌀과 과일에 불과하였지만 현재는 천연까스와 석유 등 풍부한 에너지자원이 탐사되어 방콕 시내는 주연료가 이미 가스화 하였고, 석유는 막대한 매장량이 판명되어 잠재적 자원부국으로 각광을 받을 것이라 합니다.

    이 나라에서 국민들이 가장 숭배하는 대상은 부처국왕 그리고 승려 순이라 합니다. 국왕은 비록 정치적 실권은 없지만 국민단합구심점으로서 국민들이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군부도 왕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과의 역사적 관계는 한국전 참전 후 미군을 제외하고는 가장 늦게까지 태국군부대가 남아 있다가 철수하였고, 전후복구의 어려운 시절에 ‘안남미’를 원조하여 기근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1974년에는 우리가 유치했다가 반환한 ‘아시안게임’을 인수하여 무사히 치루므로서 국제적 비난을 면할 수 있게 하는 등 우리에게는 한결같이 도움을 준 나라입니다.
    북괴와는 KAL기 폭파사건을 계기로 정식 외교관계는 단절하였지만 통상대표부에 6명이 남이 있으면서 대사급 외교관계 부활을 위하여 다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차트 #6)

    한-태간의 긴밀했던 역사적 관계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대사급 외교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양국간의 실질적인 관계증진을 위한 노력이 다소 소홀하다는 감을 현지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태국의 군과 정부의 고위직에는 한국전 참전 또는 전후 한국 근로자들이 다수 있어서 한국에 대한 관심과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태국 육군은 방콕 근교에 위치한 보병제21연대를 ‘한국전참전부대’로 지정하여 특별관리하고 있는데, 이 부대는 1981년에 「왕비근위연대」로 지정되어 왕비가 이 부대의 명예연대장이 되고, 연대장 부인이 왕비의 전속부관으로 임명되기 때문에 언제라도 왕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지난 8월에는 연대 내에 한국전참전기년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에 각국의 민속예술단을 초청하여 공연을 하였고, 11월 7일에는 연대의 공식 무술을 유도에서 태권도로 변경함으로써 도장에는 일장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군부와 정부가 이 연대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도 국민이 숭배하는 왕실을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군이 국토개발의 선봉이 되고 있는 만큼 군의 국토개발 임무에 대한 작은 지원도 큰 효과를 걷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예로서 중공이 크메르 내의 친중공파 지원 루-트로 태국을 이용하기 위하여 약간의 건설장비를 군에 지원한 바 있는데 태국측은 지원 루-트의 협조는 물론 상당량의 중공제 무기까지 구매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태국군의 기본적인 무기체계가 미국계 무기이고, 군장비 현대화 특히 기계화를 추진중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방산장비의 수출도 고려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방콕은 공산국가를 포함한 많은 정부요원과 관광객이 왕래하기 때문에 정보활돌과 홍보활동의 적지로도 꼽히고 있습니다.
(차트 #7)

    이상과 같은 태국의 특수상황과 여건을 감안하여 한-태 군사관계 발전방향과 방안을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합니다. 한-태 군사관계의 발전은 먼저 제1선에서 이를 실무할 태국주재 대사관 무관부를 강화하여 태국 군부 접근의 창구로 활용하여야 하겠으며,

    군 간부의 동남아 순방시에는 필히 태국을 포함하여 자주 방문하고, 또 초청외교도 강화하는 것이 좋겠으며,

    또한 한-태군사관계발전의 유리한 매개체가 될 ‘한국전참전부대’ 즉 보병제 21연대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을 가는 것인데 몇 가지 방안을 들어보면,
      (1) 군 간부의 태국 방문 시는 필히 이 부대를 순시하는 것이 큰 효과를 걷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예로써 지난 9월 하순에 육군참모총장께서 이 부대를 방문함으로써 그간 소홀했던 점과 참전기념비 제막식 때 민속예술단을 보내지 못하여 난처해진 입장을 해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2) 또 이 부대의 공식 무술을 태권도가 지정된 만큼 태권도의 발전을 위하여 최대한 지원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유도가 공식무술로 지정될 당시 일본은 전 부대원의 도복과 맷트 그리고 실내 운동기구 일체를 지원했다고 합니다. 현재 태국주재 대사관의 무관이 가용한 예산 범위 내애서 도복 십여착을 우선 지원했다고 하므로 조속한 후속조치가 요망됩니다.
      (3) 그 외에도 이 부대의 각종 행사에는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적절히 조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음은 태국군이 역점을 두고 있는 국토개발 임무를 지원하는 것인데 국산 건설장비와 기술을 지원한다면 장차 석유개발 등 큰 건설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방산장비의 수출은 전차, 장갑차, 자주포 등 기동장비와 함정 그리고 공병장비를 고려할 수 있으며, 현재의 태국 정부의 재정과 외화 보유 등을 고려할 때 현금 거래는 어렵다고 보며, 차관제공, 자원 현물지급, 등과 연계하여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태국의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일본의 아성에 도전하여 경제적 진출을 꾀하려면 태국 군부의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국방, 외무, 경제 부처 그리고 기업이 완전 합동하여 군부, 정부, 재계 순으로 접근한다면 우리에게 유리한 여건도 많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차트 #8)

    끝으로 자유중국에 대하여 보고 드리겠습니다. 자유중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나라라는 것은 이미 일고 있었지만 현지 방문을 통하여 더욱 실감하였습니다.
    현재 수교국은 26개국에 불과한데 그 중에서도 한국을 가장 큰 우방으로 간주하고 있어서 저희 실무 시찰단을 맞는데도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자유중국은 10%에 불과한 본토출신이 정계, 경제계, 군부 등 각계를 장악하고 있는데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본토출신의 노쇠와 대만출신의 성장으로 세대교체의 진통이 다가오고 있는 듯 합니다.

    1987년 계엄령 해제 후 발족한 대만출신 중심의 야당들이 점차 정치세력화 하여 이념분쟁의 분위기가 성숙되고 있다고 합니다. 즉 본토출신은 삼민주의에 바탕을 둔 국민당 중심의 현 체제를 고수하면서 ‘본토수복’을 최고의 이념으로 삼고 있는데 반하여

    대만출신들은 국민당 독제체제를 타파하여 민주화 하며, 중국으로부터의 ‘대만독립’을 주장하고 나서는데 지난 12월 3일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와 명년 3월에 있을 총통 선출을 계기로 더욱 가속화 될 조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본토에서 철수할 때 많은 보물과 함께 수송한 다수의 금(金)과 세계 각국의 화교들의 송금을 자본으로 대를 잇는 전문화된 중소기업을 확고히 육성하였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노사분규의 위험이 없는 가운데 선진국들의 각종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되지 않고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국에 와 있는 화교들을 통하여 중국인들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하여 자존심이 강하고, ‘신의(信義)’를 존중하며, 돈을 철저히 간직하는 지금성(持金性)’이 강한 민족이라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차트 #9)

    최근 몇 년간 자유중국 사람들이 한국을 보는 시각은 매우 소원(疏遠)한 관계라고 합니다. 그 원인은 우리의 북방정책 추진에 따른 중공 접근 열기에 반하여 자유중국에 대한 관심 소홀과

    세계 각국의 화교들이 성공하여 현지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비하여 한국 거류 화교들은 성공율이 저조하고 오히려 귀국하는 현상까지 속출하고 있으며, 1984년 이후 중공 민항기, 어뢰정 등 현안처리에 대한 불만 누적, 그리고 전통적인 우방관념과 의리 중시에 입각한 배신감 등이 혼합되어 이러한 대한관(對韓觀)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특수상황과 그들의 대한관을 기초로 한 한-중관계 방향과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과거 독립 운동 기간 중의 한-중관계와 현재 그리고 장래의 실리를 고려할 때 현재와 같은 ‘소원한 관계’ 가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적정수준으로 회복하여 유지한다면 중국 사람들이 중시하는 ‘신의(信義)’를 인정 받아서 중공 접근 정책 추진에도 오히려 기여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반적인 대중관계 방향은
      (1) 중공에 대해서는 북괴에 대한 영향력에 주안을 두고 안보외교에 역점을 두고, 경제적인 면은 단기적인 이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며,
      (2) 자유중국에 대해서는 그들의 축적된 부(富)에 착안하여 현실적 실리 추구에 주안을 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 시점에서 자유중국에 대해서는 그들의 국제적 고립을 위무(慰撫)하는 의례적 방문과 초청을 통하여 전통적안 우호관계 회복을 서둘러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차트 #10)

    이상의 보고 내용을 간추려 결론을 내리면
    금번 동남아 3국의 시찰은 국방부 본부 실무 요원들로 하여금 견문을 넓히고, 국제관계와 각국의 사정에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어 앞으로 보다 높은 차원의 국방정책 수립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하며 사기 진작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되므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시행할 것을 건이 드립니다.

    방문한 각국들은 저마다의 천부적인 입지조건과 환경여건을 잘 활용하거나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번역과 복지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방문한 각국 중에서
      (1) 싱가폴에서는 국방의식에 대한 국민계도 방법에 대하여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2) 태국에서는 경제진출의 가능성과 이를 위하여 군사외교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으며
      (3) 자유중국에서는 전통적 우호관계를 적절히 회복하여 경제적 실리추구에 활용하여야 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 해외 시찰계획을 추진해 주신 장, 차관님께 감사 드리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근무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동남아시찰결과보고를 마치겠습니다.
東南亞視察에 참여한 여러분께
    출국 직전에 장관님께서 지시하신 시찰결과보고 발표는 1989년 12월 13일 국방부 주간회의에서 장, 차관님과 합참의장, 각 國直(국직) 부대 및 기관장을 비롯하여 과장급 이상 약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하였습니다.

    예산국회 때문에 2주나 지연되었지만 귀국 후 빠른 기일내에 짐을 벗기 위하여 서둘다 보니 여러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발표한 스라이드 원고와 시나리오를 복사하여 분배하니 업무에 참고하기 바라며 특히 결론에서 장, 차관님께 '앞으로 더욱 열심히 근무할 것을 약속' 드린 바 있음을 명심하여 각자 맡은 바 직무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해외시찰계획을 추진하는데 수고하신 분들에게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佛家(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쳐 지나가는 것도 因緣(인연)이라고 했는데 우리들은 매일 청사현관 위의 '자주국방'을 보면서 출근하고, 이를 위한 한 분야를 맡아서 일하고 있는 '國防家族(국방가족)'인데, 더구나 이번에 해외시찰 第一期生(제1기생)으로 편성되어 때로는 나라의 使節(사절)로서, 때로는 신기한 風物(풍물)을 보면서 즐거워 하는 觀光客(관광객)으로서 열흘 동안을 같이 지냈습니다.
    이 어찌 가벼운 因緣(인연)이라 하겠습니까? 앞으로 相扶相助(상부상조)하면서 맺어진 인연을 지속하기 바랍니다.

    결과보고 준비에 김정현 중령과 강진훈중령이 수고하였으며, 발표후 참석했던 여러사람으로부터 好評(호평)을 받았음을 알려드립니다.
1989. 12. 15.
視察團長 大領 李 盛 永
東南亞視察團 명단
                                계    급    성    명            직    책
                                대    령    이성영    평가분석관실 평가계획 담당관(과장급) (시찰단장)
                                대    령    김동길    정책기획관실 자원관리 담당관(과장급)(시찰단부단장)
                                대    령    강순관    의무관리관실 의무보급 담당관(과장급)
                                대    령    이경원    총무과 보좌관
                                대    령    허상태    국방부 비서실 의전담당관

                                중    령    이형필    700보안부대 인사반장
                                중    령    강진훈    인사국 위탁교육 담당
                                중    령    유철수    전력계획관실 전력계획종합 담당
                                중    령    장해성    전력계획관실 지상전력 담당
                                중    령    윤종화    동원예비군국 조직편성 담당
                                중    령    김정현    정책기획관실 조직제도 담당(시찰단 총무)
                                중    령    김문기    정훈국 이념교육 담당
                                중    령    배종균    군수국 전시계획 담당
                                중    령    임명용    시설국 설계심사 담당
                                중    령    신명연    방산국 획득계획 담당

                                서기관    전왕식    법무관리관실 법무 담당관(과장급)
                                서기관    정하식    정훈국 전신전력과장
                                서기관    박원봉    군수국 총괄과장

                                사무관    이종철    재정국 국고 담당
                                사무관    정형기    예산편성관실 국직예산 담당
                                사무관    정기영    총무과 경리 담당
                                사무관    이동섭    인사국 복지 담당
                                사무관    김화연    방산국 기술장비 담당

                                안    내    정태원    중앙고속 기획관리실 차장

시찰 및 관광 앨범
◆ 싱가폴
싱가폴 국방부 현관에서 일동
싱가폴 남군인: Lt Connel CHEAH PHEE BOK, 여군인: Captain LUCY CHUA
기념패 주고, 받고
쌍용건설이 건립한 싱가폴 최고층 빌딩
일본 어느 건설회사와 경합하여 이기고 낙찰되었다 하며, 당시 싱가폴에서 한국의 자존심이었다
싱가폴 식물원 구경
샌토사섬으로 들어가는 케이불카 속에서
샌토사 전쟁기념관 마당 야자가 주렁주렁 열린 야자나무 아래서
◆ 테국
태국 국방부 회의실에서 브리핑 및 환담
기념패 증정
새벽의 사원
에메랄드사원
방콕 근교 코끼리쇼 구경
파타야 관광
파타야 알카자쇼 구경
(앞 좌석에 앉은 덕에 무대에 끌려나가)
그날 주력관객 한국관광객을 의식한 배려
기모노는 못생긴 배우, 한복은 예쁜 배우로 분장하고, 더하여 부채춤까지
1인 남,녀 2역
이 남자가 돌아서면 관객석에서는 여자가 된다.
쌕시한 배우
뒤에 안 일이지만 여기 출연하는 모든 배우는 남자가 여자로 성전환 한 사람들이란다.
◆ 자유중국
자유중국 주재 한국대사관 현관에서 한철수 대사와 기념촬영
한철수대사와 환담
자유중국 국방부 회의실에서 브리핑 및 환담
기념패 주고 받고
숙소 ○○대반점
대북시내야경 및 취호 구경
중정(中正)기념관 광장
충렬사
대북시내 어느 쇼핑점에서 만난 농구선수 박찬숙 모녀
박물관 전시품 중 인상 깊은 옥조각 작품 ‘전화위복’(가칭)
옥으로 배추를 조각하는 막바지에 앗차 실수하여 옥 한 쪼각이 떨어져 나갔다.
칼을 놓고 폐기처분 하려다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어 다시 칼을 들었다.
궁여지책으로 그 자리에 메뚜기를 조각했는데 이것이 이 작품을 수작으로 평가 받게 했단다,
당시 자유중국 국립박물관 선전 팜프렛과 엽서 표지 사진이 되고 있었다.
고산족 우라이(烏來)족 민속촌 구경
강강술래 같은 민속춤
우라이족 전사상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