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동부 여행

沙月 李 盛 永(2006.5.1)

    6(4/3 ) 아테네공항에 내린 그 길로 오전에는 파라태논신전 등 아테네 시내 관광을 하였다.
(
오후에 발칸반도의 ‘땅끝’ 수니온곶으로 이동하여 포세이돈신전 관광후 아테네로 귀환하여 팰리스호텔에 투숙 )

그리스(Greece)(1)

< 아테네(Athina) >

그리스 지도


◆ 마라톤(Marathon)

    지금부터 2496년 전, BC490년에 그리스 아테네에 침공한 10만의 페르시아군을 맞아 그 1/5에 불과한 병력의 아테네시민군은 국운을 걸고 일전을 벌려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병력을 이기는 전사상(戰史上) 최초의 전투를 치루었던 ‘마라톤전투’ 현장에 지금은 현대식 아테네공항에 세워져 있다.

    마라톤전투는 그 자체로서 전사에 큰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승전의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하고자 한 병사가 마라톤전투 현장에서 아테네 광장까지 42.195Km를 달려와 승전소식을 전하고 병사는 숨을 거두어 후세에 올림픽경기의 꽃이 된 마라톤경기의 기원을 만들어 낸 데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마라톤 해안들판에 건설된 아테네공항

< 마라톤(Marathon) 회전(會戰) (전사) >

    BC 6세기 중엽부터 소아시아(터키의 아시아쪽) 서해안의 여러 그리스인 도시는 아케네왕조의 페르시아 지배아래 있었는데 BC 5세기가 되자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자 아테네는 해군을 보내 반란군을 지원했으나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아테네가 반란군을 지원한 것을 응징하기 위하여 BC 490 10만의 원정군을 보내 마라톤에 상륙하였다.

    밀티아데스(Miltiades)가 지휘하는 2만의 아테네시민군이 침공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승리하였는데 이를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라톤회전라 부르며, 수적으로 우세한 적도 전술운용(戰術運用)으로 제압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세계 전사상(戰史上) 최초의 전투였다.

    페르시아군은 마라톤에 상륙을 완료하고, 해상함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전면 해안에 진을 쳤다. 수적으로 매우 열세한 아테네시민군은 그 북방의 고지를 점령했다.
    아테네군의 밀티아데스는 숫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페르시아군에게 측면을 포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양 측면을 바다 쪽을 향해 나란히 흐르는 두 개천의 물가 언덕을 점령하게 하였다.

    또 부가적인 경계대책으로 중위(中衛: 중앙)를 비교적 약하게 하는 반면, 측위(側衛: 측면)를 보다 강하게 하였다.
    아테네시민군 중위는 신속히 전진 공격하였다. 그러나 첫 대전에서 약한 중위는 곧바로 저지당했는데, 페르시아군은 이를 즉각 기회로 이용하여 아테네군의 중위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그러나 에테네군 양익(兩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지휘관의 명령을 받자 페르시아군의 양 측면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이에 페르시아군은 기동범위(병사들 간의 간격)가 좁아지고, 예기치 못한 아테네군의 공격에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Marathon 회전(會戰)에서 처음으로 전술적(戰術的) 양익포위(兩翼包圍, Double envelopmen)를 선 보였고, 전사상(戰史上) 최초로 전술을 잘 운용하여 적은 병력으로써 많은 적을 포위하여 승리한 첫 전투사례가 되었다.

마라톤회전 요도

(내가 배웠던 1961년 육사 고대전사 교재에서)

<첨부 1>『군대의 첫 戰場, 마라톤』


◆ 제1회 근대올림픽경기장

1892년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렸던 스타디움

BC 770년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자리에 말발굽형으로 건설.
고대올림픽경기 종목은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175m 경주 등 3종목, 남자 선수만 출전,
출전선수는 나체로 경기, 관객은 남자와 미혼녀, 기혼녀가 입장했다가 발각되면 사형.

< 마라톤(Marathon) 경기 >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Marathon 회전(會戰)에서 승리의 기쁜 소식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신속히 전하고자 한 병사가 전장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려와 승전소식을 전하고 그 병사는 곧 쓰러져 죽었는데 이것이 그 후 올림픽에서 마라톤경기의 기원이 되었다.

    서기 1892쿠베르탱경의 제안으로 시작된 1회 근대올림픽대회아테네 고대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릴 때부터 이 병사기 뛰었던 거리 42.195Km를 마라톤경기 코스에 그대로 적용하여 뛰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답습되고 있는 것이다.

      * 이번 여행에서 가이드의 설명으로 안 일화(逸話)인데 원래 병사가 뛴 거리는 이보다 조금 짧았는데,(거리?, 들었는데 잊어버렸음) 근대 올림픽 제1회대회 때 기혼녀는 경기장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경기장에 못가는 그리스 왕후(이름?, 들었는데 잊어버렸음)가 마라톤 경기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싶다 하여 마라톤 코스를 왕궁을 돌아가도록 변경하였기 때문에 거리가 증가하여 42.195Km가 되었다고 한다.


◆ 사도 바울이 설교한 곳‘바울 언덕’

가이드 엄명숙씨의 설명 경청

예수 크리스도의 12사도중의 한 사람인 바울이 이곳에서 아테네 시민을 모아놓고 설교한곳

사도 바울의 행적비(성경 귀절 ?)

‘바울언덕’에서 아크로폴리스를 배경으로

다른 일행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찍사 흉내

바울 언덕에서 바라본 '리까비또스언덕'

민주주의의 탄생지, 아테네의 '프닉스'(增補)

아테네가 현인(賢人) 솔론에게 권력을 주자, 그는 (아테네 시민에게) 민주주의를 줬다.
(2019년 11월 6일자 조선일보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에서)

그리스 아테네는 서구 문명의 모태(母胎)다. 그 절정에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누가 감히 이 신성한 언덕의 가치에 시비를 걸 수 있을까? 나 역시 아크로폴리스 앞에서는 언제나 옷깃을 여민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만 중요하다거나 아크로폴리스만 보면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테네에는 그만큼 가치를 가진 유적이 더 있다. 그중 하나가 프닉스(Pnyx)다.
프닉스는 아크로폴리스, 아고라와 더불어 삼각형의 한 꼭짓점을 이룬다. 지리적으로도, 가치적으로도 그렇다.
프닉스는 아크로폴리스, 아고라와 인접한 숲 한가운데 있다. 탁 트인 너른 공터다. 고요하고 여유롭다.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를 바삐 오가는 수많은 관광객에게 이곳은 잊힌 공간이다. 씁쓸하다.
한편으론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비밀 장소를 알고 있다는 뿌듯함에 들뜬다. 프닉스를 건너뛴 아테네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테네가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 엄청난 위상, 세상 사람들을 아테네로 불러들이는 그 황홀한 마력은 모두 이곳에서 비롯됐다.
먼 옛날 아테네 시민은 이곳 프닉스에 모여 민회를 열었다. 국가 대소사를 자기 손으로 직접 결정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사람들은 말한다. 아테네가 민주주의의 요람이라고. 그렇다면 프닉스는 어떤 곳인가? 민주주의 탄생지다.
언제나 궁금했다. 2500년도 더 전에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만들고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라는 착각 속에서, 아니 무지 속에서 살아간다.
사실은 정반대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작위적인 제도다. 그리고 언제나 희귀한 현상이었다.
심지어 오늘날조차 보편적 제도가 아니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그 옛날,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답은 위대한 한 선구자에게 있었다. 그의 이름은 솔론이었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아테네>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세계의 폴리스들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폴리스 내부의 빈익빈 부익부가 너무나 심해져 공동체의 안정적 발전과 번영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사태가 최악 상황으로 내몰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의 반대가 격렬했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 상황에 불만을 품은 세력과 현 상황을 유지하려는 세력 사이에 투쟁이 되풀이됐다.
그렇게 유혈이 낭자해지면 질서와 안정을 구실로 뛰어난 독재자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는 참주(僭主) 정치가 유행했다.

솔론(Solon·기원전 640~560)은 유명한 상인이었다. 아테네 왕족의 후손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몰락했다.
자기 힘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솔론은 상인의 길을 선택했다. 밥벌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돌며 경험과 지식을 쌓고자 했기 때문이다.
선택은 탁월했다. 솔론은 상인으로도 성공했고, 그리스 세계를 대표하는 일곱 현인에 꼽힐 정도로 지혜도 인정받았다.
문학적 소양도 탁월했던 그는 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솔론의 시는 사회 정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 삶의 주체로서 개인의 탁월함을 노래했다.
한마디로 솔론은 아테네 모든 계급의 지지를 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역사에는 아주 드물게 어떤 상황에 안성맞춤인 리더가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아테네와 솔론이 그랬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는 솔론에게 개혁의 전권(全權)을 위임했다. 개혁은 전광석화로 진행됐다.
빚 때문에 노예로 전락한 시민은 해방했고, 시민의 과도한 부채는 탕감하고, 잃어버린 토지는 되찾아줬다. 가혹한 법은 폐지했다.
정치 개혁은 더욱 혁명적이었다. 당시 아테네는 1년 임기의 아르콘이 통치하고 있었다.
아르콘 출마 자격은 귀족에게만 주어졌고, 일정 자산을 갖춘 시민의 모임인 민회에서 선출했다.
한마디로 아테네의 정치는 소수 귀족이 주도하고 돈 많은 일부 시민이 보조하는 형태였다.
솔론은 이 틀을 깼다. 아르콘 출마 자격 기준을 혈통에서 재산으로 대체했다. 귀족과 더불어 상인에게도 최고 권력에 도전할 기회를 준 것이다. 민회 참가 자격도 아테네 시민 전체로 확대했다.
솔론의 이런 조치야말로 아테네가 장차 민주주의 혁명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제도 개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언덕>
이 모든 대업을 이른 후 솔론은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10년을 목표로 외유에 나섰다.
대부분 정치인이 한번 잡은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 괜히 현인(賢人)으로 칭송받은 것이 아니었다.

솔론은 그렇게 아테네를 죽음 직전에서 구해냈다. 그가 없었다면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피의 난장(亂場)을 계속하다 자멸했을 것이다.
솔론 덕분에 아테네는 최악 상황을 면했다. 농민들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정치적으로도 민회에 참여할 권한을 획득했다. 상인들은 최고 권력을 넘볼 수 있게 됐다.
귀족들은 공멸 위험에서 벗어나 여전히 아테네 상류층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됐다.
이렇게 솔론은 과감하게 아테네가 민주주의로 나아갈 초석을 놓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어떻게 이 위대한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을까?
사람을 사랑하고 정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불의와 탐욕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600여 년이 지났다. 이제 프닉스는 잊힌 언덕일 뿐이다. 그러나 인생에 한 번은 찾아볼 만한 가치가 넘치는 곳이다.
만약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봄이 좋다. 4월이 오면 이곳에는 아름다운 들꽃이 가득 핀다.
비록 보잘것없는 들꽃일진 모르나 수만 송이가 모여 화려한 융단 한 폭을 이룬다. 그 어떤 화려한 꽃보다 아름답고 향기롭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참모습 아닐까? 이름 없는 다수의 합(合)이 뛰어난 소수보다 아름답다는 생각.
이름 없는 시민이 모여 그 어떤 철인(哲人)보다도 현명한 결정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생각과 믿음이 태어난 곳. 이곳은 프닉스다.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시한 솔론

미국 워싱턴 의회도서관의 솔론 동상. 그가 자신의 개혁 내용이 담긴 문건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제시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파르테논 신전을 오르는 도중 내려다 본 원형극장 유적

AD168년에 건립된 로마식 아치형 야외음악당


아크로폴리스의 파라테논신전

    그리스의 고대 유적 중에는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신()들을 모시는 신전(神殿)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들 신전을 이해하려면 그리스 신화(神話)를 알아야 할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올림포스의 신들’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 본다.

<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 >

    그리스인들은 태초에 신()보다 하늘과 땅이 먼저 있었고, 이 곳에 거인족이 태어났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은 이 거인족의 후예라고 생각하였다. 거인족의 후예인 신들은 이 세상 어떤 산보다 높은 올림포스산에서 살았는데 언제나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 아래 항상 행복이 넘치는 곳이다.

    올림포스산에 사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신을 비롯한 여러 신들은 다음과 같다.
    ○ 신들의 왕 제우스 : 신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세고, 존경 받는 신이다.
        제우스의 가장 큰 무기는 번개와 천둥. 제우스는 항상 번개와 천둥에 둘러 쌓인 마차를 타고 다닌다.
        제우스가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줄 때는 창 모양의 무서운 번개를 쳐서 혼내 준다.
        제우스는 동물 중에서 독수리를 좋아하는데, 그의 지팡이에는 늘 독수리가 앉아 있다.
        제우스는 신과 인간의 왕으로서 법을 만들어 선포하고, 사람의 미래를 예언하는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제우스는 자기가 신들의 왕이라는 것을 뽐내기를 좋아했다.
        신들의 여왕 헤라와 결혼 하고도 다른 여신이나 사람을 사랑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많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신들 특히 헤라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

    ○ 신들의 여왕 헤라 : 헤라는 신들의 여왕이자 제우스의 아내.
        우아한 공작새를 무척 좋아했고, 무지개의 여신인 이리스를 시녀로 거느렸다.
        헤라는 남편 제우스의 바람기 때문에 속을 많이 썩히고, 제우스와 다투는 일이 많았다.
        헤라와 제우스가 다툰 후 그 분풀이를 다른 신들과 사람들한테 하기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

    ○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 :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 난 자식이다.
        제우스와 헤라의 부부싸움 때문에 가장 많이 피해를 입는다.
        처음 태어났을 때 하도 못생겨 헤라의 버림을 받고 올림포스산 밑 바다 속에 버려졌다.
        다행이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구해서 키워주었다.
        그는 바다 속에서 대장간간 일을 배워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대장장이가 되었다.
        그 예술적인 재능을 헤라가 인정하여 어른이 되어 올림포스산으로 다시 올라온다.
        그러나 제우스와 헤라가 어느날 크게 다툴 때 그는 헤라편에 서자 제우스는 그를 올림포스산 밑으로 던져버렸다.
        꼬박 하루 동안 떨어지다가 레노스섬에 떨어지면서 땅에 부딪치면서 충격으로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다.

    ○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스(비너스) : 사랑과 이름다움을 간직하여 신들과 사람들의 감탄을 받았다.
        모습이 볼 품 없고, 절름발이인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하였다.
        헤파이스토스가 어느날 멋진 번개를 만들어 제우스에게 바쳤다.
        이를 보고 감탄한 제우스가 그 보답으로 아름다운 그녀를 헤파이스토스의 짝으로 만들어 주었고,
        황금허리띠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래서 항상 황금허리띠를 두르고 다녔다.
        이 황금허리띠는 모든 신들과 사람들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신기한 힘을 지녔다.

    ○ 지혜의 여신 아테나(미네르바) : 어머니가 없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곧바로 태어났다.
        그녀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영웅들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여신이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는 이 아테나여신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아테네 이름을 갖기 전에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이 도시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는데
        그리스인들이 힘으로 억누르려는 포세이돈을 거부하고, 올리브를 선물한 아테나를 수호신으로 선택하였다.
        이 때부터 그리스 수도도 여신의 이름을 따서 아테네가 되었다.

    ○ 바다의 신 포세이돈 : 제우스, 지옥의 신 하데스와 형제간이다.
        제우스 보다는 힘이 약했지만 제우스 못지 않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물 속에 왕궁을 짓고 살면서 바다만을 지배해야 하였다.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 땅 위에 왕궁을 지으려고 기회를 엿보던 중
        한번은 큰 파도와 해일을 몰고와 아테네 땅을 뒤덮고, 강제로 그의 왕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올리브를 선택한 그리스인들의 저항으로 부득이 아테나여신에게 왕국을 넘겨주어야 했다.

    ○ 태양의 신 아폴론 : 제우스의 아들이며 화살과 음악과 태양의 신이다.
        그래서 항상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녔다. 젊고 아름다운 신이었지만 아버지 제우스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헤라와 짜고 제우스를 쫓아내려 했다가 오히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라오메돈왕의 하인이 된 적도 있다.

    ○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 아폴론의 여동생으로 역시 늘 활과 화살을 들고 다닌다.

    ○ 학문과 상업의 신 헤르메스 : 제우스와 거인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 간에 태어난 아들이다.
        여러 신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면서 학문, 상업 등을 지배하였다.
        아폴론이 키우는 멋진 암소를 훔친 일로 ‘도둑의 신’으로도 알려졌다.

    ○ 난로의 신 헤스티아 : 난로의 신으로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깨끗하고, 정이 많은 신이다.

    ○ 곡식의 신 데메테르 : 곡식의 신으로 인간을 사랑하며, 인간의 땅에 항상 곡식, 과일, 야채를 풍성하게 자라게 한다.

    ○ 술의 신 디오니소스 :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러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술의 신이다.

    ○ 사랑의 신 에로스 :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스(비너스)의 아들이다.
        사랑의 신으로 그가 가지고 다니는 화살에 맞으면 사랑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 지옥의 신 하데스 : 제우스, 포세이돈과 형제로 지옥의 신 또는 저승의 신이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신전


아테네 중심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 바위동굴에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주거 흔적이 있고,
미케네문명시대에는 군주의 왕궁과 유력자의 거주지를 보호하는 키클로피아성벽으로 요새화되었으며,
역사시대 초기에는 포세이돈신과 아테나신을 함께 모시는 신전이 있었는데 모두 파괴되었다.
BC480
년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을 사라미스해전으로 물리친 후 그리스 각 도시 국가들이 델로스동맹을 채결하고,
승전 기념으로 BC 447- BC 437년간에 조각가 페이스디아스 감독, 이크티노스 설계,
칼리크라테스 시공으로 아테나여신 단독으로 모시는 2차의 파르테논신전이 건축되었는데,
내부에는 피이스디아스의 조각으로 알려진 황금과 상아로 장식된 아테나여신의 신상이 놓여졌으며,
이 아테나여신상은 그후 비잔틴시대인 BC 426년 콘스탄티노풀의 하기아 소피아성당 개수 때 거기로 옮겨졌다.
오스만터키 점령시대(1458-1833)에는 이스람사원 모스크로 개조되었는데,
터키가 지배하던 1687 9월에 베네치아군이 래습하여 포격하자
터키군이 이곳에 보관했던 화약이 폭발하여 지금과 같이 파괴되었다.


<
크레타문명과 미케네문명 >

 그리스 에게문명은 크게 2가지 계통의 문화로 나누어지는데, 크레타섬으로 대표되는 남방계 문화미케네로 대표되는 북방계 문화이다.

    BC 3000년 신석기 말부터 비()아라아계 소아시아인들이 정착하였고,
    BC 2600년 경에는 크레타섬, 키클라데스제도, 미케네를 비롯한 그리스 본토 남부에 초기청동기문화가 발달하였다.
    BC 1600년 말부터 BC 1400년에 크레타문명(남방계문화)의 절정기를 이루었으나,
    BC 1200년 경 북방에서 남하한 도리스인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그 후 그리스는 암흑의 시대로 들어 갔다.

    BC 8세기 경에 그리스 역사시대가 시작되면서 곳곳에 각종 신전들이 세워지면서 미케네문명(북방계문화)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케네문명 19세기 중엽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지게 되었다.
      H. 슐리만에 의한 트로이·미케네 발굴,
      A. 에번스에 의한 크레타섬 크노소스 발굴.
      1967년에 시작된 S.N. 마리나토스에 의한 산토리니(또는 Thera)섬 발굴 등 각지의 발굴로 그 모습이 점차 밝혀졌고,
    이후에도 그리스를 비롯하여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의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과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첨부 2>>『페라클레스와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정문, 불레의 문

성벽문으로 설계, 안쪽에서 찍은 것이다.

석상을 올려 놓았던 사각기둥

최초 전차경주의 우승자상을 올려 놓았다가 다음은 안토니우스상을 올려 놓았고, 실각 ?

도리아식 기둥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제1, 동서 8기둥, 남북 17기둥, 도리스식 주주식(周柱式) 건물.
토막돌을 요철식으로 연결한 최초의 볼트 방식 기둥. 표면에 20개의 새로 홈이 특징.
내부 기둥과 들보는 바깥의 장중한 도리스 양식과는 대조적으로 우아한 이오니아 양식.

파르테논 신전에 관한 가이드 설명 경청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서쪽)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동쪽)

파르테논 신전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

박물관 입구를 지키는 올빼미상

전시된 유물

이 사진 한 장 찍고 못 찍게 해서 유일한 유물사진이 되었다.

파르테논신전에서 내려다 본 시내 제우스신전

지나치며 본 제우스신전 정문

파라테논 신전에서 내려다 본 또 하나의 원형극장 자리


◆ 소크라테스 감옥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할 때까지 갇혔던 감옥

소크라테스는 이 감옥에 갇혔다가 68세 때 사형 당했는데 죄명은 ‘청소년 타락죄’였단다.

소크라테스감옥 앞 송충이(?)의 강강수월레


◆ 기타 시내 풍경

싼타그마광장의 국회의사당과 무명용사 기념비

무명용사 기념비를 지키는 초병

초병이 혼자 있을 때는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는데--- 내 키(165Cm)가 초병의 어깨 밖에 못 미치는군.

‘달리는 사람’ 조각

아테네에서 1박한 펠리스호텔

호텔 앞을 지나가는 교외선 전철

호텔 앞 바다가 풍경

바다가의 여름용 야외 교회인듯

여름철에 대비하여 보관중인 욧트들

그리스 아테네 끝, 다음은 수니온곶

수니온곶(클릭): 그리스-2(수니온곶)


애기나섬(클릭): 그리스-3(애기나섬)

 

<첨부 1> 2019. 12. 4. 조선일보 송운동의 세계 문명 기행
『민주주의 군대의 첫 戰場, 마라톤』
2019.12.5 沙月 李盛永 옮김
<부제>
아테네, 페르시아 제국과 충돌 - 現터키 지역 親그리스 폴리스들
페르시아의 폭정에 맞서 봉기, 아테네가 원군 보냈지만 진압돼

보복 나선 페르시아군 - 최후통첩 사절단 처형되자
2만5000명 대군 마라톤 상륙… 아테네는 1만명으로 맞서

민주주의 군대는 강했다 - 왕이 아닌 자유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된 대열로 진군… 페르시아군 6400명 사살


2019년 12월 4일자 조선일보 오피니언/인문기행 페이지
송동훈 세계 문명 기행 난에
왕릉같은 큼직한 무덤과 고대 유럽 무장의 복장을 한 장군의 동상 사진과 함께
『민주주의 군대의 첫 戰場, 마라톤』이란 글이 올랐다.
2006년 지중해 일대를 여행하면서 그리스 아데네에 갔을 때 본
마라톤 전투에 관한 이야기 들이다. 내용이 길어서 첨부로 올린다.

마라톤 평원의 왕릉?
최초의 민주주의 전사 192명이 묻혀있다
치열했던 마라톤 전투의 현장을 2500년 넘는 세월동안 지켜온 고분,
이곳에 함끼 묻힌 192명은 민즈즈의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첫 번째 순교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무덤의 크기는 거대하지 않ㅎ지만,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마라톤으로 가는 길은 평온하다.
마라톤! 세상에는 모두가 알지만, 대부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마라톤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마라톤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42.195㎞를 달리는 육상경기'란 답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올림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육상경기'란 답도 예상할 수 있다. 마라톤이 우리에게 그런 의미로 다가온 건 1896년, 근대 올림픽이 시작되고부터다.
그전의 마라톤은 다른 의미였다.
아테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만(灣)인 동시에 해변이며 평원의 이름이었다.
2500년도 더 전에 마라톤 해변과 평원에서 벌어졌던 한 전투를 뜻했다.

오늘날 마라톤 해변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휴양지다. 여름이면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 옛날의 치열했던 전투는 사람들에게서 잊힌 지 오래다.
마라톤에서 싸우다 죽은 아테네인들을 위해 만든 옛 무덤 정도만이 남아 있다.
찾는 이가 거의 없어 1㎞ 남짓 떨어진 해변과 대조를 이룬다.
무덤은 친숙하다. 나뿐 아니라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경주 고분을 닮았기 때문이다.
거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적당한 크기의 흙무덤이다.
그러나 역사적 중요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마라톤 고분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 고분 안에는 세계 제국 페르시아에 맞서 싸운 최초의 시민 병사들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대제국 페르시아가 달려 오다.
밀티아데스 동상
마라톤 전사자들의 고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밀티아데스 동상,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아테네로 향해 진군하는 페르시아 군대를 향해
'멈춰' 란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아테네와 페르시아. 다윗과 골리앗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체급이 다른 두 나라는 왜 충돌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필연(必然)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6세기 중반, 오늘날의 이란 남부에서 건국됐다.
위대한 정복왕 키루스(Cyrus, 재위 기원전 559~529년)의 영도 아래 서아시아의 대제국이었던 메디아를 무너뜨리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기원전 546년).
키루스는 메디아에 이어 리디아 왕국마저 정복함으로써 세력권을 오늘날의 터키 서부 지역까지 넓혔다.
이때부터 '이오니아'라 불리던 터키 서해안 일대의 그리스 폴리스들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됐다.
키루스 사후에도 정복은 계속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기원전 525년)가 차례로 페르시아 손에 떨어졌다.
페르시아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걸쳐 역사상 최대 제국으로 우뚝 섰다.
그리스 세계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이전에 이오니아를 지배하던 리디아는 친(親)그리스 왕국이었다.
페르시아는 달랐다. 그리스 세계에 대해 무지했고, 애정도 없었다.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에 있는 그리스계 폴리스에 참주를 대리인으로 앉혀 통치했고, 막대한 세금을 걷어갔다.
정치적 참여를 중시했던 폴리스들은 봉기로 맞섰다.
봉기에 앞서 폴리스들은 본토의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도움을 청했다. 스파르타는 거절했고, 아테네는 전함 20척을 보내 도왔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이오니아의 거사는 결국 처절하게 진압됐다(기원전 494년).
이오니아를 다시 장악한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Darius, 재위 기원전 522~486년)는 아테네의 행위에 격분했다.
그리스는 보잘것없고, 아테네는 미미한 존재였지만 정의와 질서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었다.
다리우스는 응징을 맹세했다. 다리우스는 제국의 다른 업무에 집중하다
아테네 징벌을 잊을까 우려해 시종이 식사 때마다 세 번씩 이렇게 말하도록 시켰다.
"폐하, 아테네인들을 기억하소서."(헤로도토스, 역사)
자유를 위해 전쟁을 대비하다.
이테네, 마라톤 위치 요도
아테네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항복이냐, 전쟁이냐?
수립된 지 20년도 안 된 민주정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때 한 군인이 아테네에 도착했다. 밀티아데스(Miltiades, 기원전 554~489년). 아테네의 귀족으로 케르소네소스(오늘날 터키의 겔리볼루 반도)의 참주였다.
케르소네소스는 흑해를 통해 곡물을 수입하는 아테네 입장에서는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밀티아데스의 가문은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부터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아테네의 생명선을 지켜왔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북부를 장악하면서 밀티아데스는 참주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오니아 반란을 틈타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고향 아테네로 돌아온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밀티아데스를 장군으로 선출했다.
비록 민주주의의 적(敵)인 참주였음에도 밀티아데스가 페르시아와 싸워본 경험 있는 유능한 장군임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 것이다.
항복 대신 항전을 선택한 아테네는 최후통첩을 가져온 페르시아 사절단을 처형함으로써 배수진을 쳤다(기원전 491년).

페르시아군을 실은 대규모 선단은 기원전 490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 왔다.
해안선이 길어 대함대가 정박하기 좋고, 바로 옆에 평원이 있어 대군이 진을 치기에 적합한 마라톤에 상륙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로 한때 아테네의 참주로 군림하다 쫓겨난 히피아스가 길 안내자로 나섰기에 가능했던 탁월한 선택이었다.
페르시아 원정군은 보병 2만5000명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군이었다. 그리스 세계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규모였다.
아테네는 가능한 한 모든 시민을 동원했지만 9000명에 불과했다.
이웃 동맹인 플라타이아인을 합쳐도 1만명 정도였다.
아테네 입장에서는 열세였지만 물러설 수 없는, 자유와 고향 모두를 건 싸움이었다.
역사는 마라톤을 기억하리라.
사실상 전쟁 국면을 주도했던 밀티아데스는 마라톤으로 나아가 아테네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했다.
전투에 앞서 밀티아데스는 아테네군의 진형에 변화를 줬다. 중앙군의 수를 줄이는 대신, 좌익과 우익의 수를 늘린 것이다.
중앙군이 페르시아의 중앙을 상대로 버텨주는 동안 수적 우위를 앞세운 좌·우익이 페르시아의 좌·우익을 격파한 후 중앙군을 사방에서 포위 공격하겠다는 전술이었다.
전투는 아테네군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아테네의 중장보병들은 방진을 유지한 채 빠르게 진격했다.
역사적 순간이었다. 민주주의 시민들로 구성된 군대가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려고 처음으로 전진한 것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은 그런 아테네인들을 보면서 '전멸하고 싶어 발광한다'고 비웃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페르시아 경장보병은 온 힘으로 내달려 부딪는 아테네 중장보병의 압력을 버텨내지 못했다.
페르시아의 전열은 무너졌고, 해안가에 정박한 함대를 향해 무질서하게 도망쳤다.
페르시아는 6400명을 잃었다.
아테네의 전사자는 192명에 불과했다. 미미했던 아테네의 일방적 승리였다. 기원전 490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이때 전사한 192명의 시신을 모아 하나의 무덤에 합장했다. 바로 내 눈앞에 있는 마라톤 고분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무덤 중 하나다.
이곳에 묻힌 용사들은 마라톤 전투 이전에 그 어떤 군대도 가져보지 못한 일체감에 한껏 고양됐던 군대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마라톤 전투에 임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명령이 아니라 나의 의지로, 왕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다.
' 그렇다. 그들 모두는 군인인 동시에 시민이었다. 무엇보다 자유인이었다.
이들 덕분에 태어난 지 20년밖에 안 된 민주주의가 살아남았다.
이들 덕분에 민주주의 군대가 그 어떤 전체주의의 군대보다 강할 수 있다는 첫 번째 선례가 남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이 마라톤 고분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크고 높다.
[마라톤 전투 참전은 아테네인의 최고 영광]
3대 비극의 작가 아이스킬로스 묘비명에 참전 사실만 기록
'이 무덤 속에 에우리포리온의 아들인 아테네인이 누워 있네. 마라톤의 숲과 거기에 진군한 페르시아의 군대가 그의 용기를 증언하리라.'

2세기에 활약한 그리스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자신의 책 '그리스 안내'에 남긴 한 아테네인의 묘비명이다.
묘비명은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총체적 평가다. 이 사람은 마라톤 전투 참전을 자신의 일생 중 가장 가치 있고 영광스러웠던 순간으로 꼽았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아이스킬로스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이며, 비극의 창시자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살아생전에 온 그리스 세계에 엄청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묘비명에는 아테네의 시민으로 마라톤에서 싸워 폴리스에 기여했음만을 간단히 적고 있다.
그만큼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는 아테네인들에게 자부심이었다.
또한 10년 뒤에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 다시 싸울 결심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첨부 2>2020. 2. 19. 조선일보 송운동의 세계 문명 기행
『페라클레스와 아크로폴리스』
<송동훈의 세계문명 기행> 2020.2.21 沙月 李盛永 옮김

파르테논신전의 야경
아크로폴리스와 그 위의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명의 금자탑으로 오늘날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다.
페리크래스는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아크로폴리스를 새롭게 재건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높은 이상과 탁월한 가치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더 나아가서는 미래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 계획은 성공했다.
부제

- 민주파의 리더 페리클레스 -
보수적 자영농 중심의 정치와 대립
모든 시민이 권력 행사하도록
민회 법정 참석하면 수당 지급

- 민주화 되자 민중의 잠재력 발산-
소수가 권력 쥔 폴리스들과 달리
시민들 수준 향상 평준화 돼
자발적으로 공동체에 기여

-아크로폴리스가 생생한 증거-
아테네 복원 미래 전망 제시
최고 예술가들이 참여해
파르테논 등 혁신적 건축 완성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그리스 문명의 정수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바깥 세계와 성스러운 언덕을 이어주는 웅장한 프로필라이온(Propylaeon)을 지나면 바로 아크로폴리스다. 예상외로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파르테논 신전과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니케의 신전만이 단출해서 아쉽다. 아직까지 제자리를 찾지 못한 대리석 조각들은 바닥에 놓여 언제가 될지 모를 재건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 순간이 오기는 할까? 사람들은 무심히 대리석들을 지나 아크로폴리스의 중앙을 향한다. 이 공간에서 가장 유명하고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을 향해서!
그러나 파르테논마저도 막상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 실망할 수 있다. 뼈대만 남아 있다. 신전 내외는 보수공사를 위한 기계장치로 덮여 있다.
허무함을 견디며 요기조기를 살펴보다 보면, 이토록 허물어지고 파괴됐지만 묘하게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사실에 감탄하게 된다. 이 불완전함에 2400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과 상상력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1세기의 위대한 저술가 플루타르코스가 표현했던 그 아크로폴리스를, 그 파르테논을 만나게 될 것이다.

"각각의 건축물은 완성된 순간 이미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이제 막 완성됐을 때와 같은 활력을 뿜어낸다. 그리하여 건축물들에는 영원한 싱그러움이 꽃피어 마치 시들지 않는 젊음과 나이를 모르는 활력을 들이마신 듯 세월을 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과 활력! 플루타르코스는 아크로폴리스의 본질을 제대로 짚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속도'다.
이 위대한 공간은 여러 세대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대부분 한 시대에, 그것도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됐다.
그의 이름은 페리클레스. 그가 리더로 있을 때 아테네 민주정은 절정에 도달했다. 아테네 제국은 에게해를 지배했다. 아테네 문명은 불멸의 영광을 얻었다.
그 증거로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을 남겼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때의 아테네는 어떤 공동체였을까?

아크로폴리스 주요 유적들 위치
위대한 민주주의의 리더
페리클레스(Pericles·기원전 495~429년)는 페르시아 전쟁 영웅 크산티푸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아테네 최고의 명문 귀족인 알크마이온 가문의 일원으로 아테네에 민주정을 도입한 클레이스테네스의 조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민주파의 리더로 성장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의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의 승전 장군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이 이끌었다.
키몬은 해군으로 바다에서 페르시아와 싸우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에 찬성했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웠던 애국자였지만 기본적으로 보수파였다.

비록 아테네의 미래는 바다에 있지만, 보수적인 자영 농민이 사회의 중심이어야 한다고 키몬은 생각했다.
페리클레스는 그렇지 않았다. 노잡이를 비롯한 모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공무(公務)에 참여하고, 전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페리클레스는 민회와 법정에 참석하는 모든 시민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이로써 아테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도 생업에 대한 걱정 없이 적극적으로 공동체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페리클레스가 행한 여러 민주주의 개혁 조치는 대다수 민중에게 잠재돼 있던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아테네는 더욱 과감하게 바다로 나아갔고, 바다를 지배하는 제국의 길로 나아갔다.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이 과두제를 엄격하게 유지함으로써 내부의 잠재력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페라클레스가 계획하고 진행하고 완성

페라클레스가 아크로폴리스를 설명하는 연설 상상화
민회가 열리는 프닉스 언덕에서 페라클레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재건된 아크로폴리스를 가리키며 연설하는 상상화.
페라크레스는 시민들에게 스스로의 업적에 자부심을 갖고, 연인을 대하듯 아테네를 사랑하라고 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무절제한 열정과 죽 끓는 변덕으로 유명했다. 그들의 위대한 리더들은 순식간에 버림받거나 쫓겨나거나 잊혀야 했다.
페리클레스만은 예외적으로 30년이란 세월 동안 변함없이 그들로부터 지지받았다. 전쟁도 평화도, 파괴도 재건도 페리클레스는 선택할 수 있었다.
가능했을까? 스스로 높은 전망을 제시하고, 그것을 충족시킴으로써 모두의 모범이 됐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를 이끌어 갈 지도자의 덕목으로 통찰력, 설득력, 애국심, 청렴의 네 가지를 꼽았다.
자신이 정한 덕목을 달성하기 위해 페리클레스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의 존재는 덩달아 아테네의 민회를 탁월하게 만들었다.
비전 없이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단견(短見), 실체 없는 감언이설, 애국심으로 포장된 사익 추구, 청렴한 척하면서 뒤로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위선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런 페리클레스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진행하고 완성한 것이 새로운 아크로폴리스였다. 이를 위해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페르시아, 스파르타와 평화를 맺도록 설득했다. 평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재건은 페르시아와의 오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것 이상이어야 했다. 과거의 아테네를 복원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야 했다.
파르테논을 비롯한 우리가 알고, 아직도 찾아오는 아크로폴리스는 그런 원대한 목적하에서 재건되기 시작했다. 전설적인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총감독을 맡았고,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두 동원됐다.
특히 길이 70m, 너비 30m에 이르는 파르테논 신전은 건물 곳곳에 미묘한 굴곡을 가함으로써 인간의 눈에는 완벽한 직선 건물인 듯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혁신적인 건물로 지어졌다.
모든 작업이 끝났을 때 민주주의와 제국을 양대 축으로 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생각대로 그리스 문명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생생한 기념비가 됐다.
필멸의 인간으로 불멸의 영광을 추구
아테네는 그렇게 업적을 남겼다. 그들의 성취는 장차 알렉산더의 정복로를 따라 헬레니즘이란 이름으로 멀리 인도까지 전해질 터였다.
로마제국을 사로잡아 유럽 문명의 토대가 될 터였다. 단지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몇몇 리더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아테네의 수많은 사람이 함께 피와 땀을 흘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로. 2400년도 더 전에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자유로운 사회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국가와 사회에 물어볼 수 있다. 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지, 왜 사회를 위해 희생하고 기여해야 하는지. 페리클레스는 여기에 답을 내놓았다.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행복이, 행복을 위해서는 자유가, 자유를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데, 오직 자유롭고 민주적인 공동체 아테네만이 그 모든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시민들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자신의 탁월함을 추구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서 불멸의 영광을 얻게 된다고 페리클레스는 얘기했다. 경쟁, 탁월함, 불멸의 영광이라는 가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안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같은 영웅이 추구하던 것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소수의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여겼던 그리스의 전통적인 가치를 민주 사회의 자유로운 시민 모두에게 개방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이 민주주의에 퍼부었던 비난, 즉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생각을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페리클레스에게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을 상향 평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재건된 아크로폴리스는 그 생생한 증거였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탁월한 왕이 계속 배출되지 않는 것처럼, 민주주의 지도자도 연이어 훌륭한 사람이 등장하기는 쉽지 않다. 페리클레스를 잃은 다음 날부터 아테네 민주주의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파르테논 신전과 아크로폴리스를 수많은 사람에 치이며 급하게 구경하고 끝내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노을이 질 무렵 아크로폴리스 건너편 필리포스 언덕을 오른다.
언덕 곳곳에는 극소수의 사람이 아크로폴리스의 야경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의 가치는 충분하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펼쳐지고, 그 속에서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시민들과 함께 추구했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필멸의 인간으로 태어나 불멸의 영광을 추구했던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2400년도 더 전의 일이란 게 놀랍다.
[뼈대만 남은 건축물…조각상 등 내용물은 아크로폴리스 뮤지엄에]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소장된 에레크테이온의 여성상 열주 진품/서경석 사진작가
아크로폴리스에서의 아쉬움을 달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이 현대식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출품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품이 구성돼 있다.
유물의 수준은 아테네국립고고학박물관 다음으로 높다. 에레크테이온을 떠받치고 있는 여신상 형태의 열주 진품과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들이 압권이다.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했던 대리석 조각들은 신전과 똑같은 크기의 전시실에 전시돼 있어서 당시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파르테논 신전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영박물관에 전시 중인 엘긴 대리석(Elgin Marbles)이라 불리는 파르테논 조각들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테네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동맹국들과 맺은 각종 조약을 새겨놓은 표지판들도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