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귀주성 관광
구이양(貴陽) 시내
沙月 李 盛 永(2015, 10, 29)
2015. 10. 17-22일 4박6일(기내 1박) 일정으로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 8명과 우리부부 계 10명이 중국 서남부에 있는 귀주성 관광을 다녀왔다. 귀주성 성도 구이양(貴陽), 첸난푸이족먀오족자치주(黔南布依族苗族自治州금남포의묘족자치주)에 있는 안순(安順), 첸시난부이족먀오족자치주(黔西南布依族苗族自治州)에 있는 싱이(興義) 3개 지역에서 수억년에 걸쳐 석회질 지질이 만들어낸 묘한 산봉들, 폭포들, 동굴들, 수석같은 바위들을 많이 보고 왔다.

중국 귀주성 관광에 참여한 사람은 김연종, 김정호, 박창모, 서태경, 손황, 이학종, 이성영, 박옥자, 정영상(아산회 친구), 강정구(여행친구) 계 10명이 참좋은 여행사편으로 예약하였고, 온누리여행사 편으로 8명팀과 7명팀이 있어 합계 27명이 한 버스로 시종 같이 하면서 환자발생이나 낙오자 없이 잘 끝내고 돌아다.
중국 귀주성 위치와 여행일정 도표
인천-귀양 아시아나항공편 비행로
귀양-인천 아시아나항공편 비행로
위는 출발 초 귀양-인천 직선항로이고, 아래는 실제 비행한 항로
구이저우성(貴州省)
약칭 '첸(黔)' 또는 '구이(貴)', 성도(省都) 구이양(貴陽). 중국 남서부의 원구이고원(雲貴高原: 운남성과 귀주성에 걸쳐있는 고원) 동쪽에 위치하며, 북 스촨성(四川城), 동 후이난성(湖南城), 남 광시성(廣西城), 서 원난성(雲南城)에 둘러싸여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03년-BC221년)에는 초(楚) 나라의 검중(黔中)과 차란(且?), 야랑(夜郞)의 영토,
한(漢) 나라 때는 형주(刑州)와 익주(益州)에 소속,
당(唐) 나라 때 검중도(黔中道)가 설치,
송(宋) 나라 개보(開寶) 연간에 토착민 지도자가 구주(矩州)를 이끌고 귀순하자 '구(矩)'를 '귀(貴)'로 고쳐 '구이저우(貴州)'라고 부르기 시작.
명(明) 나라 때는 귀주포정사사(貴州布政使司),
청(靑) 나라에 이르러 구이저우성(貴州省)이 되었다.
귀주성 주요 행정자치구역
자치주(自治州), 지구(地區), 지구급시(地區級市)만 표시
면적은 17.6,만여㎢, 인구 3,474만여명.
행정구역
자치주(自治州) 3개: 첸둥난먀오족둥족(黔東南苗族 同族), 첸난부이족먀오족(黔南布依族苗族),·첸시난부이족먀오족[黔西南布依族苗族]
지구(地區) 2개: 비제(비芩),·퉁런(銅仁)
지구급시(地區給市) 4개: 구이양(貴陽), 류판수이(六盤水), 쭌이(遵義),·안순(安順).
현급시(縣級市) 9개, 현(縣) 56개, 자치현(自治州) 11개, 2개 특구(特區) 2개.

고대문화의 유적지와 동굴이 많이 남아 있지만, 전면적인 개발은 비교적 늦게 이루어져 명(明) 나라 가정(嘉靖: 1523-1566)) 연간 성 인구가 150만에 불과.
명나라 이후 개간과 더불어 전입된 사람들로 인하여 인구가 급증하였고,
특히 항일전쟁 때 인구가 대량 유입.
청나라 때 쭌이(遵義) 출신의 애국시인이자 학자인 정진(?珍)을 비롯한 역사적 인물을 배출.

주민은 한족(漢族)은 명나라 때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여 청나라 때는 한족 남방 이주정책 이후 지금은 성 전체 인구의 약62%,
49개(중국 전체 56개) 소수민족이 약 38%.
주요 소수민족은 먀오족(苗族), 부이족(布依族), 둥족(同 族), 투자족(土家族), 이족(彛族), 거라오족(老 族), 수이족(水族), 후이족(回族), 바이족(白族), 좡족(壯族), 야오족(瑤族) 등.
특히 먀오족은·중국 전체의 절반 가까이, 둥족은 절반 이상, 부이족거라오족은 거의 전부가 이 성의 중남부에 거주한다.
◆ 구이양(貴陽) 시내 풍경(10월18, 21일)
17일과 18일 2박한 금강선화대주점
18일 아침에 호텔에서 내다 본 풍경
마천루 사이 공동 공간에 아침 운동 나온 주민들
신흥 귀양시 솟아오르는 마천루들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우대정책과 귀주 지하자원 개발 등에 힘입어 귀양시가지에 건설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시내 곳곳에 옛 집들을 헐고 높은 빌딩이나 아파트로 재개발하느라고 기중기들이 설치되어 있다.
18일 석식 장소 아가주방(我家廚房)
귀양 남쪽 꽤 먼 거리에서 진우포의먀오족자치현(鎭宇布依族苗族自治縣)인 화계(花溪)지역에서
청암고진(靑岩古鎭)과 천하담(天河潭)을 구경하고 늦게 온데다가
또 뭐부터 하느라고 저녁10시나 돼서 저녁 식사가 끝났다.
21일 오후 귀양 시가지 고층빌딩 모습
안순(安順), 싱의(興義)지역 관광 끝내고 귀양으로 돌아왔다.
귀양박물관 앞 쌍둥이 고층건물
왼쪽 건물이 오른쪽 버스 앞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
관산호공원 입구와 시내 중심가 거리 풍경
◆ 귀주박물관(10월/21일)
귀주박물관은 이 지역에 한족이 들어 온 것이 명나라 대부터이기 때문에 한족 문화에 관한 것은 안보이고,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묘족(苗族) 등 소수민족의 문화유산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전경-爲民, 務實, 淸廉
소수민족 복식, 폐물 등 문화유산 전시관임을 말하는 간판
복무지침인 모양인데.
엄이수심(嚴以修身): 수신을 엄하게 하라
엄이용권(嚴以用權): 권력 사용을 엄하게 하라
엄이율기(嚴以律己): 자기를 단속함을 엄하게 하라
모사요실(謀事要實): 일을 모색할 때는 실용적으로 하라
창업요실(創業要實): 창업은 실용적으로 하라
주인요실(做人要實): 인재를 기르는것은(교육) 실용적으로 하라
박물관 직원이 설명
묘족 의상, 패물 등과 이를 착용한 묘족 여인 그림과 인형
위 복식과 패물을 착용한 광고모델과 인형
* 묘족(苗族)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많이 살게 되었으며 우리민족(조선족)과는 어떤 관계인가?

묘족은 이곳 귀주성, 호남성 등 남부 각성에 흩어져 살고 있는 중국 56개 소수민족중의 하나인데, 원래 동이족(東夷族)의 한 갈래로 오랜 옛날(동이의 치우천왕의 직게 후손)부터 황하 하류에 살면서 고대 황하문화를 일으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던 족속이다.

긴 세월 동안 기름진 황하유역과 동부 지역을 놓고 하화족(夏華族: 漢族)과 동이족의 쟁탈전 때 끝까지 하화족에게 항거하였던 족속으로 진시황의 중국 대륙통일 후에는 대부분의 묘족이 환경에 열악한 남쪽지방, 특히 산악으로 강제 이주 되어 지금도 대부분 문맹으로 원시적으로 살고있다.

이곳 귀주성 곳곳에 많이 살면서 귀주박물관을 묘족이 장식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묘족과 우리 민족은 같은 동이족(東夷族)으로 중국의 한족(한족) 보타는 훨씬 가까운 갈래의 민족인 것이다.
귀주공룡화석
3억년전(?)에 살았다는 공룡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 관산호공원(관산호공원, 10월/21일)
관산호공원 입구 정문과 바위에 새긴 공원 이름
요도와 설면
설명 아래 한국어로 번역해 놓았는데 식별하기가 힘들다.

관산호공원 소개
구이양시 관산후구역의 중심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관산호공원은
구이양시 행정중심과 인접해 있으며상업중심구역에서 12Km 떨어져 있다.
2008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2010년12월 31일에 시소유를 대상으로 정식 개발하였는데
총비용은 12.55억위안(2064억원)이다.
약 3.7평방Km의 면적 중 삼림 면적은 2.77평방Km에 달하고, 공원 내의 주간도와 부간도는 총 21Km, 수역 면적은 0.4평방Km이며,
7개의 지하 분수로 형성되어 오랜시간 동안 수위를 보존하고있는바
일년 내내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관산호 구역은 '녹지대로 불리우고 있다.
공원은 풀, 언덕, 임수, 야생동물자원 등 우월한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 생태, 공공, 조화"를 설계이념으로 하여---이하 식별 불가k---
관산호 공원 요도와 세부시설 이름
식별 불가
수석 하나
주간도(主幹道) 걷기
공원 중심 3인의 동상
인증샷
여기서 뒤로 돌아
주어진 시간이 바쁘다.
공원 내에서 둘러보는 주변 경치
잎이 말린듯한 나무
특이한 모양의 대나무
예쁜 노랑꽃 봉우리와 만개한 한송이
◆ 갑수루(甲秀樓, 10월/21일)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1573-1619) 때인 1579년 건립된 뒤 구이저우성의 순무(巡撫)이자 시인이던 강동지(江東之)의 주관으로 구이양 시가지 중심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남명하상의 거북 모양의 자위위에 3층의 누각을 개수하였다.
갑수루의 목적은 미려한 경관 조성 외에 문학적 기풍을 진작하고 교육을 장려하여 인재를 많이 배출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자슈러우(甲秀樓)라는 명칭에는 장원급제나 출중한 인재를 뜻하는 '과갑정수(科甲挺秀)', '수갑검남(秀甲黔南)'의 바람이 담겨 있다.

명나라 천계제(天啓帝: 1620-1627) 때인 1621년 화재로 훼손되었으나 얼마 뒤 재건된 뒤 라이펑거(來風閣)로 개칭되었다.
이후 다시 훼손되어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662-1722) 때인 1689년 재건되었으며, 원래의 명칭을 되찾았다.
건륭제(乾隆帝: 1737-1795)와 광서제(光緖帝: 1875-1908) 때도 증축 및 개축되었ek.
현존하는 누각은 선통제(宣統帝: 1909-1911) 때인 1909년 개수된 것이다.

목조 누각식(樓閣式)의 3층 건물이며, 사각찬첨식(四角?尖式) 지붕은 그 모양이 정교하고 매우 단아하다.
노란색 담장과 파란색 기와가 매우 잘 어울려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문창과 돌난간에 조각한 인물화와 화초들도 도안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평면은 정사각형이며, 기단에서 꼭대기까지 높이는 22m이다.
1층은 정면 3칸, 높이 3.6m이며, 돌난간과 처마기둥 그리고 회랑이 설치되어 있다.
2층에는 높이 3.6m인 칸막이 문과 창문이 있으며, 2m 정도 안으로 들여 설치되어 있다.
3층에도 높이 3m의 칸막이 문과 창문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에는 파란색 반원형의 유리기와를 얹었고, 용마루에는 노란색의 유리 소재를 사용하였다.
꼭대기는 세라믹 소재를 사용한 것이 이채를 띠며,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이밖에 누각 안에는 강동지의 시문을 새긴 비석과 유옥산(劉玉山)이 남긴 주련(柱聯)을 비롯한 편액과 비각 등 소중한 가치를 지닌 주련과 편액, 비각 등이 보존되어 있다.
갑수루 정문 적몽남성(蹟朦南城)
위는 야간 무조명으로 내가 찍은 것이고, 아래는 네이버에서 퍼 온 것.
蹟朦은 확실치 않다. 맞다면 '꿈의 발자취"(?)
함벽정(涵碧亭)
갑수루의 이모저모
맨 아래는 현제의 다원(茶苑) 간판
취미각(翠微閣)
취미각 앞을 지나 걷는 강면길
일동사진 한장
라이트를 킬 걸, 배경 야경이 죽을 가봐 무조명으로 찍었더니---
강변길 지하도
갑수루 뒷면 배경 두 방
갑수루와 강변 불이 밝아 이건 좀 낫다
갑수루 주변의 남명하 야경
수양버들을 덩굴나무가 싸 안고 있다.
갑수루 앞 관장 돌바닥에 붓글씨 쓰는 두사람
글씨도 명필 같지만 금방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곧 지워지는데 아랑곳 하지않고 꾸준히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