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산(武夷山)-삼청산(三淸山) 관광
  아사달 동기생7명과 3인의 외부 친구, 계10명이 2012년 11월 22일-26일, 4박 5일로 항주(杭州)(절강성)-무이산(武夷山)(복건성)- 삼청산(三淸山)(강서성)-황산시(黃山市)(안휘성)-항주, 4개 성을 일주하면서 관광을 하였다.
 관광 중에 안개, 비 등으로 찍은 사진들이 선명하지 않은 것이 많다. 특히 삼청산은 안개와 구름이 너무 짙어 통로 잔도(棧道)만 보일 뿐 가까이 있는 경관도 구경 할 수 없어 사진도 별로 찍지 못하고, 코스도 단축하여 하산하였다. 아쉬운 마음에 찍지 못한 경관은 구입해 온 사진 첩의 그림으로 보완하여 앨범을 꾸몄다.
관광코스 圖示
황산(黃山)-항주(杭州) 구경
< 황산 민속촌 광촌(廣村: 훈춘), 항주 용정차(龍井茶), 송성가무(宋城歌舞)쑈, 서호(西湖) >
沙月 李盛永 (2013.1.5)
  삼청산 트레킹이 끝난 후 황산시에도착하여 발맛사지도 하고, 황산에는 2001년에 갔었기 때문에 이번여행에는 가지않고 다음날(25일) 황산시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민속촌 광촌(廣村)을 구경하고 오후에 항주로 떠났다.
* 황산(黃山) 추억 바로가기(클릭): 황산(黃山) 추억
◆ 황산(黃山) 민속마을 광촌(廣村)
광촌 입구
마을 남쪽편을 둘러싼 반월형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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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
마을 복판에도 연못
유사시 방화수로 쓴다고 한다.
이 마을 부호 왕씨(汪氏) 집 앞 광장
왕씨(汪氏) 종사당(宗祠堂)
낙서당(樂敍堂)과 사재공(思齋公)의 약식(略式) 낙서당기(樂敍堂記)판
주희(朱熹: 朱子) 가훈(家訓)판
남쪽 연못쪽에서 본 마을 풍경과
북극성을 중심으로한 별들의 공전을 찍은 사진
그림을 조각한 문
주인이 자손들과 하인들의 인사를 받는 자리인득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는 고목 두 그루
다시 보는 마을앞 연못과 마을로 들어가는 길
황산에서 만나는 한식점 '진달래'
◆ 항주(抗州) 용정차(龍井茶)
용정차 생산판매 회사 매오춘조(梅塢春早) 입구
당(唐) 시대 차신(茶神)으로 불린 육유(陸羽)의 흉상과
그가 쓴 다경(茶經)
육유(陸羽)는 당(唐) 나라의 은사(隱士).
자 홍점(鴻漸). 경릉(竟陵) 사람으로 다경(茶經) 3편을 지었는데
차의 기원, 달이는 법, 맛, 그릇 등에 관하여 자세히 서술하여
다풍(茶風)을 일으켰으며 다신(茶神)이라 불리었다함.
육유(陸羽)의 초상화와 다경(茶經)을 쓰고 있는 그림
한국 차의 아버지 초의선사(草衣禪師)
다선여일(茶禪如一)을 깨친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새로운 정신문화를 형성하는데 공헌하였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소재)
현관 안쪽에 비치된 포태화상
◆ 항주(抗州) 송성가무(宋城歌舞)쑈
  항주(杭州)는 서기1127년 부터 시작되는 남송(南宋)의 수도(首都). (중국에는 7개의 옛서울 고도(古都)가 있는데 西安, 洛陽, 成都, 北京, 南京, 杭州, ?)
  옛 송나라 성(城)을 복원하여 그 안에 가무장(歌舞場: 쑈장)을 지어 주로 송나라 때의 사건을 쑈로 꾸민다. 우리가 갔을 때는 남송 장수 악비(岳飛)가 금나라군을 쳐부수는 내용의 가무쑈를 하였고, 쑈장 밖에는 송나라 거리, 풍경, 풍습 등을 재현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쑈장에 입장하기 전에 송대 거리를 구경할 때와 입장하여 쑈 장면을 찍으려고 셧터를 많이 눌렀는데 야간에 조명빛 때문에 사진이 잘 안나와 겨우 볼 수 있는 것만 골라 앨범을 꾸몄다.
송성천고정연출장(宋城千古情演出場) 입구에서 입장을 대기
송대(宋代) 거리 풍경과 풍물 구경
아래 두 사진은 수급(首級 : 자른 머리)을 연출하는 곳인데 무릎과 손이 밖으로 나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중국 송대 의상과 춤
조선족 고유의 장고춤과 부채춤
악비(岳飛)가 금군(金軍)을 처부수는 활약상을 그린 가극
악비(岳飛)
  자는 붕거(鵬擧)이며 상주 탕음현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지만 금(金)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이 다시 일으나자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岳家軍)이라는 정병(精兵)으로,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 등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강[淮河], 친링[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하지만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간신(奸臣) 진회(秦檜)에 의해 '막수유(莫須有)''틀림없이 뭔가 있다'는 애매한 죄목으로 투옥된 뒤 39세의 나이에 독살당했다.
  진회가 죽은 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關羽)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문학에서도 뛰어났으며 저서《岳忠武王集》이 있다.
  시호(諡號) 무목(武穆), 이칭(異稱) 악무목(岳武穆), 악왕(岳王)에 추봉(追封)됨과 동시에 시호도 충무(忠武)로 고쳐졌다.

  우리나라 작자미상의 고시조 중에 삼학사(三學士)를 찬양하면서 중국의 충신의사들을 열거한 것이 있는데 악비(岳飛)도 伯夷叔齊(백이숙제), 龍逢比干(용봉비간), 魯連(노련), 朱雲(주운), 晉處士(진처사: 陶淵明), 南齊雲(남제운) 등과 함께 악무목(岳武穆)이란 호칭으로 들어있다.
항주에서 일박한 개원숙산빈관(開元肅山賓館)
◆ 항주(抗州) 서호(西湖) 유람선
  항주 서편에 있는 큰 호수 서호는 춘추전국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서시(西施)를 위해 팠다고 하며, 이름도 서시의 이름에서 땄다고 하는데 좀 과장된 말 같기도 하다. 항주 서편에 있으니 서호(西湖)라 하지 않았겠는가.
  서호에는 2001.9.12.황산 관광을 하고, 13일 이곳에서 유람선을 탄 적이 있으나 그 때는 디카가 없던 시절이라 필림 카메라로 몇 장 찍은 적이 있다.
항주 시내를 서-동으로 가로지르는 전단강(錢塘江) 다리
황산(黃山)에서 발원한 신안강(新安江)이 항주에 이르러 전당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항주만(杭州灣)에서 황해로 흘러든다.
송(宋)나라 옛 거리를 재현했다는 '청하방거리' 풍경
2001.9.13. 황산 관광후 소주, 항주 관광시 서호에서 찍은 사진 2장
소동파(蘇東坡)(1036-1101) 기념관 표지와 석상과 송항주진사시(送杭州進士詩)
소동파(蘇東坡)
  1036년 12월 19일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메이산(眉山)에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명이 식(軾)이고 호가 동파이다. 아버지와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삼소)라 불리었으며 모두 당송팔대가(당송팔대가)에 들었다.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057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여 스물여섯 살 되던 해인 1061년에는 제과(制科)에 합격했다.
  그러나 신법파의 모함으로 그의 관직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생활과 각지의 지방관 생활로 보내다가 1101년 7월 28일 딴쪼우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얻은 병으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예순여섯 살이었다.
  그는 사상의 폭이 매우 넓어서 유가사상을 근간으로 했지만 도가사상(道家思想)과 불가사상(佛家思想)에도 심취해 있었다.
  유가사상은 그로 하여금 끝까지 관직을 지키며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도가사상과 불가사상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쓰러지지 않도록 그를 붙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폭넓은 사상은 다양한 작풍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 중국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때의 대 문장가 8인을 말하며, 당(唐)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2인, 송(宋)의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삼부자,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6인, 계 8인.

  * 서호의 소동파 유적 소제(蘇堤) : 소동파는 조정에 근무하면서 신법(新法)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상부로부터 눈 밖에 벗어나 한직인 감관고원(監官告院)으로 발령이 나자 지방근무를 자청하여 항주(杭州) 자사(刺使)로 내려와 서호(西湖)의 약한 제방을 다시 쌓아 '소동파가 쌓은 제방'이라 하여 '소제(蘇堤)'라 명명된 제방이 지금도 볼 수 있다고한다. 소동파의 석상이 이곳에 세워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람선 타기전 수양버들 아래서
선착장에서 바라보는 남쪽 탑(이름?) 방향 경치
유람선에 승선
북쪽으로 가면서 서쪽 풍경
북쪽 호안(湖岸)풍경
남쪽으로 가면서 동쪽 항주시가지 방향 풍경
남쪽 처음 보았던 탑과 풍경
내려서도 수양버들 아래서 한 장
* 수양버들과 능수버들 이야기 바로가기(클릭): 버드나무
소식이 친구와 함께 일동 기념사진
작촌골 이진사가 소식이하고 똑같은 포즈를 취했군.
소식이 작품 송항주진사시(送杭州進士詩)의 내용을 구하지 못했는데
혹시 여기 진사가 바로 작촌골 이진사 아닌가?
주차장으로 가는 길
대나무가 특이하고 예쁘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 한라원
식당 이름에 걸맞게 벽에 제주 중문단지 대포동 주상절리 사진 한 장이 걸려있다.
항주공항 청사 모습
26일 18:00경에 인천국제공항에 내렸는데 바깥은 어름이 얼 정도로 추워서
장기주차장까지 가는 셔틀버스 기다리는데 혼이났다.
무이산 관광 모두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