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산(武夷山)-삼청산(三淸山) 관광
  아사달 동기생7명과 3인의 외부 친구, 계10명이 2012년 11월 22일-26일, 4박 5일로 항주(杭州)(절강성)-무이산(武夷山)(복건성)- 삼청산(三淸山)(강서성)-황산시(黃山市)(안휘성)-항주, 4개 성을 일주하면서 관광을 하였다.
 관광 중에 안개, 비 등으로 찍은 사진들이 선명하지 않은 것이 많다. 특히 삼청산은 안개와 구름이 너무 짙어 통로 잔도(棧道)만 보일 뿐 가까이 있는 경관도 구경 할 수 없어 사진도 별로 찍지 못하고, 코스도 단축하여 하산하였다. 아쉬운 마음에 찍지 못한 경관은 구입해 온 사진 첩의 그림으로 보완하여 앨범을 꾸몄다.
관광코스 圖示
  무이산(武夷山)은 중국 동남쪽 복건성(福建省) 북쪽에 위치하며, 1999년에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자연유산 보호구와 세계문화유산보호구 로서 쌍유산보호구로 지정한 예로부터 동남쪽 최고의 명승지로 손꼽혀 왔다

  전설에 따르면, 요(堯)임금 시대에 팽조(彭祖)가 이 산의 만정봉(慢亭峰)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팽조의 큰아들 팽무(彭武)와 둘째 아들 팽이(彭夷) 두 사람은 당시 홍수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걱정하여 아홉 굽이의 강을 파서 물길을 냈는데, 이를 구곡계(九曲溪)라고 부른다. 무이산(武夷山)이란 명칭도 팽무팽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한다. 무이산 천유봉 정상 동편에 있는 천유각(天遊閣)에는 팽조, 팽무, 팽이 세 신선의 조각상을 모셔놓고, 찬미하는 글을 새겨놓았다.

  풍치구역은 사면이 모두 계곡이고 다른 산맥과 이어지지 않는다. 밖으로는 작은 산들이 무이산을 한 바퀴 에워싸고 있다. 구곡계에는 36개의 연봉이 배합되어 있으며, 하천과 산이 서로 어울려 기묘한 변화를 끊임없이 빚어내면서 '벽수단산(璧水丹山)' 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길이 7.5㎞의 구곡계는 삼보산(三保山)에서 시작하여 숭양계(崇陽溪)에서 끝난다. 무이산의 아름다운 경관들은 거의 구곡계와 인접하여 있다.

  무이산(武夷山)은 고래로부터 풍경이 아름다워 중국의 역대 문인 학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왔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寺), 묘(廟). 사(祠). 원(院), 장(莊), 실(室)이 모두 187개, 정(亭), 대(臺), 루(樓), 각(閣)이 모두 117개 축조되었다. 이로 인하여 무이산을 찾는 관광객들은 걸음마다 새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무이산 지역 요도
무이산-天遊峰(천유봉) 트레킹
沙月 李盛永 (2012.11. 28)
  천유봉(天遊峰)은 무이산 관광에서 “천유봉을 오르지 않으면 무이에 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이산의 진수를 볼 수 있는 해발408.8m의 봉우리이다.

 실제는 천 길의 절벽 위에 바위 봉우리가 우뚝 솟은 것으로, 838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마치 천궁(天宮)속을 유람(遊覽)하는 듯하다 하여 천유(天遊)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천유봉은 높이로 말하면 삼앙봉(三仰峰)만 못하고, 깎아지르기는 대왕봉(大王峰)만 못하고, 수려하기로는 옥녀봉(玉女峰)만 못하고, 험하기로는 접순봉(接筍峰)만 못하다. 그 자체로 봤을 때는 그저 하나의 큰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칭송의 대상으로 독보적인 것은 그 위치와 각도 때문이다. 그 위치와 각도가 훌륭한 경관을 만드는 것이다"
22일 10: 00시 인천국제공항 3층 19번 여행사테이블 앞 집합
산수국제여행사 이광식씨 미팅
이광식씨는 출국수속만 처리하고 동행하지 않는다.
항주 국제공항 출구에 웬 로마 유물 ‘해신(海神)’
5일간 우리를 태우고 다닐 황산에서 온 버스와 기사
5일간 함께할 가이드 한기호(조선족4세)
무이산 관광지 시내 밤 풍경
저녁식사 할 노감반점
식당도 늙은이들을 알아 보나 이름 마저---밤 우중에 6시간 반 오니 저녁식사는 21시경 찬밥으로
저녁 먹고 호텔로 가는 길가 목공예 집 대형 나무조각품
360만위안= 6억4천8백만원
무이산시 깊은 밤풍경
22일 1박할 호텔 화남세신대주점
호텔로비 이색적이 종유석형 조형물
채크인 대기
23일 무이산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내다보는 강 건너 무이산쪽 풍경
무이산 관광지 입구
트레킹 출발점까지 타고 가는 관광 열차들
천유산행 열차 타는 홈
종점 천유참(역)과 돌아가는 열차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제1곡의 대왕봉(大王峰)
하차해서 트레킹 준비
목표 천유봉정상 출발!
앞에 녹색 깃발을 든 젊은이가 현지 가이드. 한국말은 한 마디도---
덥고 습한 지방이라 대나무가 잘 자라는 모양
무슨 봉인가?
첫번째로 보는 대나무 뎃목(竹筏,주파이)
평지니까 힘들지 않고 여유작작
< 5곡교에서 바라보는 풍경 >
하류쪽
상류쪽
일동 한 장
우리 부부
이름?
가칭 주전자바위
주희원 표석
주희원 내부는 나올 때 구경
등산 가마
조금 힘드네
기가 꺾인 것 같애
처음으로 보이는 천유봉 쇄포암(西 布岩)과 관폭정(觀瀑亭)
바위를 뚫어 만든 문
구름굴
굴 속에서 하얀 구름이 피어 올라 모이고, 흩어지면서 산에 퍼진다고 한다.
무이산 구름은 천태만상이라 운해(雲海), 운룡(雲龍), 불광(佛光), 탄운(呑雲), 와운(臥雲)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천유봉 등정길과 주변 요도
중국관광객들은 남쪽의 급경사 험한 길을 ‘공산당길’, 북쪽의 완만하고 순한 길을 ‘국민당길’이라 한단다.
그러나 국민당길은 순하지만 볼 것이 없어, 가마 타는 노약자들만 오르고 대부분 힘든 공산당길을 택한다고 한다.
우리 노동(老童: 어른이)들도 당연히 공산당길---
올려다 보는 천유봉 정상과 관폭정(觀瀑亭)
숙규정사?
천유봉 아래 6곡의 뗏목(竹筏,주파이) 행렬
석소정(石沼亭)
6곡 계류
천유봉 서쪽 수직절벽의 쇄포암(西 布岩)
수없이 많은 물줄기 자국이 내리 벋어 생긴 홈이 마치 무명베(布)를 널어 말리(西)는 모습이라 하여 붙은 이름
천유봉 정상을 향하여 출발!(공산당길)
쇄포암 남쪽 끝부분 복호(伏虎)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
암벽 낙서장?
내 노라 하는 문사들이 저마다 글 한 수씩 새겨놓았다.
올려다보는 관폭정 처마끝 모습
접순봉(接筍峰)과 은병봉(隱屛峰) 표석
접순봉(接筍峰) 독수리바위(가칭)
수직으로 솟은 바위산이 세 갈래 균열이 생겨 마치 대나무 순(筍)이 붙어있는(接)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독수리가 양 날개를 펴고 있는 듯 하다 하여 '독수리바위’라고 말한단다.
은병(隱屛)협곡의 다동(茶洞)으로 들어서는 문과 무이다가무(武夷茶歌舞)
천유봉과 은병봉의 사이 좁은 골짜기가 다동(茶洞) 일면 옥화동(玉華洞)이고, 그 북쪽이 선곡동(仙谷洞)이다.
협곡에 차 밭이 있다. 아래 여인들은 찻잔을 들고 춤추고 노래하는 무이차가무 한 장면.
무이산 4대 명차(名茶) : 대홍포(大紅袍), 철라한(鐵라漢), 백계관(白鷄冠), 수금귀(水金龜)
천유봉 급경사길 시작과 폭포
본격적인 천유봉 등산
건너다 보이는 은병봉과 접순봉
맨 위 그림에 다동의 차밭이 보이고, 맨 아래 접순봉과 은병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선혁정(仙奕亭)이 보인다.
천유봉 중턱의 관폭정(觀瀑亭)
관폭정에서 내려다 보는 6곡 강물과 주변 산봉
이 좋은 경치를 배경으로
관폭정에서 바라보는 천유봉 폭포
관폭정 너머로 은병봉과 접순봉
경사는 다소 완만하나 이리 저리 구불거리는 등산로
막바지 올려다 보는 천유봉 정상
완전히 내려다 보이는 은병봉과 접순봉
뒤돌아 보는 관폭정과 올라온 길
올라갈 길
윗부분만 보이는 은병봉(왼쪽 1개)과 접순봉(오른쪽 2개)
무이정사(武夷精舍)는 왼쪽 은병봉 뒤에 있다.
낭만이 흐르는 6곡 강산
올라온 길과 올라갈 길
6곡 건너 구름에 쌓인 산봉들
6곡 건너 산 배경
완전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은병봉과 접순봉 정상
천유봉 동편 천유각(天遊閣)
< 천유각에 모셔진 팽조(彭祖)와 장자 팽무(彭武), 차자 팽이(彭夷) 형제 동상 >
팽조(彭祖) 동상과 공덕명(功德銘)

‘팽조는 중국사람들에게 장수(長壽)의 표상이다.’

  팽조(彭祖)가 실제로 800년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고증할 수 없으나, 중국 다수의 역사서에 팽조에 대한 언급이 있다. 《사기 초세가(史紀 楚世家)》에는 팽조(彭祖)가 오제(五帝) 중 한사람인 전욱(顫頊)의 손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夏)왕조부터 상(商)왕조에 걸쳐 그는 약 800년을 살았는데, 그의 장수 이야기에 관한 것은 일찍이 진한(秦漢) 이전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사천성[四川省] 미산[眉山]시 팽산전[彭山傳]이 팽조(彭祖)의 고향이라 기재되어 있다. 굴원 (屈原)의 장편시인《천문(天問)》 및 공자(孔子)와 장주(庄周)의 저서에서도 모두 팽조를 장수(長壽)의 모범으로 들고 있으며, 진(晋)나라의 의학자 갈홍(葛洪)이 쓴 《신선전(神仙傳)》은 팽조(彭祖)를 위하여 지은 저서이다.

  사람들은 그가 보양(保養)의 방법을 손에 넣어 불로장생의 비결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 여겼고, 이러한 부분이 그를 장수 노인의 표상으로 삼게 된 이유가 되었다.

  팽조(彭祖)의 장수비결은 대체로 네 개로 나뉜다.
  첫째는, 수신(修身)이다. 그가 기공(氣功)의 최초 창시자이고, 후손들은 이것을 '팽조인도법(彭祖引導法)'이라고 부르고 있다.
  둘째는 양성(養性)이다.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물질적 향락을 추구하지 않으며, 마음을 편안하고 차분하게 하여 달관하는 것이다.
  셋째는 좋은 생활습관이다. 모든 것은 자연에 따르고, 절기에 순응하며, 일과 휴식을 결합시키는 것을 중시해야 하고, 머리를 지나치게 쓰는 것은 절대로 삼가는 것이다.
  마지막 항목은 절제이다. 부부는 조화를 이뤄나가면서 절제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수 노인의 전설은 도교의 양생(養生) 관념과 융합되어 탄생되었다.
팽무(彭武), 팽이(彭夷)의 동상과 찬팽무(贊彭夷), 찬팽무(贊彭武)



팽무(彭武)팽이(彭夷)의 이름에서 ‘무이산(武夷山)’ 이름에 유래되었다.
천유각에서 일동
기념품 상의 콩으로 만들었다는 노리개
하산 출발(국민당길)
낙서장
乾隆 癸未: 淸 高宗 28년(조선 영조 39년, 서기 1763년)
무현장군(武顯將軍: 徐慶超)의 명필
지나가다 찍힌 늘씬하고 예쁜 미인, 팔이 흔들렸네요. 미안합니다.
장개석총통의 유적, 中正公園(중정공원) 문패
대만 臺北市 中正기념관 광장
중정(中正)은 장개석총통의 아호로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1989년 11월, 동남아 3국(싱가폴, 태국, 대만) 순방팀 단장으로 갔을 때 찍은 것
6곡 강물이 보이는 곳
가마군들의 전용하는 등산로
♪또 만났네 또 만났어 ♬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또 만났네 ♪
차 밭 위로 강물이 보이는 곳
천유봉 쇄포암 앞 광장과 접순봉 독수리비위
독수리 머리가 뚜렸하지 않네
광장에서 바라보는 6곡 계류
천유봉 쇄포암의 위용
벽이 엄청 높이 솟아 있네(萬 刃: 만인, 아주 높음, 아주 깊음)
광장의 낙서
武夷昇眞元化之洞天(무이승진원화지동천) 무이야말로 진정 으뜸가는 동천이다.
동천(洞天): 동학(洞壑), 산과 내에 둘러 쌓인 경치가 좋은 곳
5곡계로 퇴장
5곡계 뎃목(竹筏,주파이) 행렬
< 무이정사(武夷精舍)>
주희상(朱熹像)
서기1130년(北宋 建炎4년, 고려 仁宗8년)-서기1200년(南宋 慶元6년, 고려 神宗3년)

  주희(朱熹: 朱子)는 오경(五經: 詩經, 書經, 禮記, 春秋, 易經) 중심의 유학(儒學)을 사서(四書: 大學, 論語, 孟子, 中庸) 중심의 유학으로 바꾼 혁신적인 유학의 개혁자 이다.
  즉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1190년에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간행하였다.
  한당(漢唐) 시대 유학은 오경 중심의 유학, 송대(宋代) 이후 유학을 사서 중심의 유학이라 하는 데, 이는 주희의 개혁에 따른 것이다. 주희는 사서를 집주(集注)하면서 자연적인 올바른 이치(理)와 그것이 인간 본성으로 내면화된 성(性)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성리학(性理學)의 기반을 다졌다. 1313년부터 1912년까지 사서는 중국의 학교 교육과 관료 선발시험에서 공식적인 기본 교재였다.

  주희는 이들 문헌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대학]이 근본적인 큰 틀을 제시해 주고 [논어]가 견실한 기반이 되며, [맹자]가 보다 세세한 부분들에 이르기까지 지도해 주고 [중용]이 미묘하고 심원한 철학성을 제공해 준다고 보았다. 주희는 사서 주석을 집필하는 작업에 40년 동안 몰두했다.
  [맹자]의 양혜왕상(梁惠王上)의 첫 부분에서 올바름(義)과 이익(利)의 차이에 관해 말한 것을 주희는 올바름(義)을 하늘의 이치(天理)와 동일한 것으로, 이익(利)을 사사로운 인간의 욕구(人欲)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성리학적 해석이었다.
안휘성 황산 남사(男祠)에 있다는 주희의 글씨
무이산 무이정사 학당에도 같은 글씨가 있다

  주희의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 둔옹(遯翁) 등이 있다. 선조는 대대로 안휘성(安徽省)의 휘주무원(徽州?源)의 호족으로 아버지 주송은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 우거(寓居)하면서 주희는 여기서 출생했다.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었다.

  주희는 24세 때 연평(延平) 이통(李?)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게 된다. 다시 1158년에 주희는 이통을 찾아갔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송대의 성리학자들 가운데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철학 이론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 동안 사상의 주도적 위치를 상실하였던 유학의 학문적, 사상적인 위상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었는데, 주희는 이통의 영향을 받은 이후 그 방면의 일에 전념할 결심을 하게 된다.

  주희의 학문 토론 친구로는 장남헌(張南軒), 여동래(呂東萊)가 있고, 또 논적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었는데,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학문을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시켰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1179-1181년 사이 강서성(江西省) 남강(南康)의 관리로 근무할 때 주희는 그 기회를 이용,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으나 그 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주희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 이 서원은 그 후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했다. 그런 서원들이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 제도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도덕수양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주희는 철학뿐 아니라,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이 무원칙 하다 고 여겨 그것을 다시 재편집하여, 1172년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다. 또한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인 『중국통사』(1777~85)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초청을 받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직언을 하고, 늘 소신 있는 의견을 펼쳤으며, 부패와 사욕이 지배하는 정치판을 비타협적으로 공격하다가 파면되거나 외진 지방의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 정적(政敵)인 한탁주가 주희의 학설과 행실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그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저서의 간행과 유포가 금지되었고 정치활동을 비롯한 모든 공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다가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년과 1230년에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주희의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고, 사서에 대한 그의 주석서는 과거에 합격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책이 과거 교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예컨대 송시열은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만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고 하면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일 뿐이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또 주희의 철학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져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주희는 조선조는 물론 지금도 우리나라 성균관 문묘(文廟: 공자를 모시는 유교 사당)에 송조육현(宋朝六賢)의 하나로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 성균관 문묘에 모신 사람들

  주향(主享):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공자)
  배향(配享): 주사성(周四聖)-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송조육현(宋朝六賢)-주자(周子), 정백자(程伯子), 정숙자(程叔子), 소자(?子), 장자(張子), 주자(朱子)
        신라-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고려-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
        조선-(東)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송준길(宋浚吉)
                (西) 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김인후(金麟厚),성혼(成渾), 조헌(趙憲),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

  주희의 저서로는
  『논어요의(論語要義)』,『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정씨유서(程氏遺書)』,『논맹정의(論孟精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서명해의(西銘解義)』,『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통서해(通書解)』,『정씨외서(程氏外書)』,『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근사록(近思錄)』,『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주역본의(周易本義)』,『시집전(詩集傳)』,『초사집주(楚辭集注)』등이 있다.
  나중에 그의 글은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으로 편집되었고, 제자들과 학문하면서 토론할 때 남긴 주희의 말은 『주자어류(朱子語類)』로 편찬되었다.

  주희시 한편
半畝方塘一鑑開(반묘방당일감개) 반묘의 연못이 거울처럼 맑아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연못 속에)하늘의 구름이 떠돈다.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묻나니 어찌하여 그렇게 맑단 말인가?
爲有源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위에서 활수가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네.

  (해석)'반묘방당(半畝方塘)'의 물이 거울처럼 맑아 하늘의 구름이 물 속에 떠 있는 것만 같다. 만일 물이 얕고 맑지 못하면, 경물은 잘 반영되지 못할 것이다.
  이에 주희는 "문거나득청여허(問渠那得淸如許)"하고 반문의 수법으로 문제를 제시한다.
  못은 본래 물의 근원이 없는 것이지만, 이 작은 못은 영원히 고갈하지 않는 원두(源頭)가 있어서 끊임없이 활수(活水)가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독서, 수양에 비유하여,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받아들여야 맑은 못물처럼 사상이 맑아진다고 하는 것이다.
  앞의 시는 이와 같은 철학적 이치를 내포하고 있으나, 이취(理趣)가 풍부하여 설리(說理)의 아무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주희는 누구보다도 설리시(說理詩: 이치를 설명하는 시)를 많이 썼으며, 시를 통하여 철학 사상, 학문적인 논변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이정사 정문
무이정사 뒤 암봉이 은병봉(隱屛峰)이다.
무이정사 주희 생애 전시관
무이정사 모형 조각
주희 생애 전시실(生涯展示室)
도산서원과 퇴계 이황(李滉) 선생의 저서 소개

주희의 연비어약(鳶飛魚躍)을 인용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시 한 수
贈 楓岳小庵老僧(증 풍악소암노승)
金剛山(금강산)摩訶衍(마가연)에서 栗谷 李珥(19세)
鳶飛魚躍上下同(연비어약상하동)
這般非色亦非空(저반비색역비공)
等閑一笑看身世(등한일소간신세)
獨立斜陽萬木中(독립사양만목중)

금강산 소암자 노 스님에게 드림
솔개 하늘을 날고 물고기 물에서 뛰는 이치, 위나 아래나 똑 같아
이는 색(色)도 아니오 또한 공(空)도 아니라네
실없이 한번 웃고 내 신세 살피니
석양에 나무 빽빽한 수풀 속에 나 홀로 서 있네
* 해설이 필요하면(클릭): 연비어약(鳶飛魚躍)

* 주희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는 무이구곡계 뎃목(주파이) 레프팅에서 언급 함
무이정사 학당(學堂)
당훈(堂訓) : 충성과 효도와 염치와 절개
주희 비석
세월이 흘러 백비(白碑)처럼 글씨가 전혀 안 보인다
내가 산 책 한 권
22.80위안(5,040원)
가야혀
< 5곡교 경치 한 번 더 >
상류
하류
9곡 뎃목(주파이) 타러 가는 셔틀버스 기다리면서
무이산 천유봉 트레킹 끝
다음은 구곡계 주파이 리프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