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신대륙 발견, 세계일주 이후 황금세기(Siglo del Oro)를 일군 수도(首都)
스페인 -마드리드(Madrid)
沙月 李 盛 永(2017.6.17)
이번 여행 스케줄에는 오늘 콘수에그라에 이어 똘레도까지 관광을 끝내고,
내일 오전 마드리드를 관광하고 중식후 공항으로 나가
귀국 항공기를 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조가이드가 알아 본 결과 내일 이곳 스페인에서는 '박물관의 날'로 많은 행사가 있기 때문에
마드리드 관광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프라도 미술관' 관광이 어려울 것이라는 정보다.

그래서 오늘은 콘수에그라만 관광하고, 바로 마드리드로 가서
오후에 프라도 미술관을 우선으로 관광하고,
기타는 시간에 따라 진행하는 것으로 변경되어
콘수에그라에서 중식후 풍차 등 소설 돈키호테 유적들을 서둘러 구경하고,
허급지급 마드리도로 달려와서 오늘 프라도미술관을 관광하였다.
석식후 계획에 있는 마요르광장과 스페인광장은 구경을 하고,
계획에 있던 푸에르타 델 솔(태양의문 광장)은
버스로 지나치며 설명만 하고 호텔로 가서 마지막 숙박을 하였다.

마드리드의 역사
면적 605.8 평방 Km, 인구326.5만명,
이베리아반도의 중앙부,
해발 635m 고원지대 연강수량 419 mm로 건조하고, 큰 일교차

마드리드에 대한 첫 기록으로는 8세기 이후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하기 시작한
이슬람 왕국이 9세기에 똘레도와 마드리드를 포함한
중부지방을 차지하여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술탄 모하메드 1세 때인 873년에 현재 마드리드의 왕궁이 있는 언덕에
똘레도를 수비하기 위한 요새를 만들에
이를 '물의 원천'이란 뜻으로 마헤리트(Mayit)라 불렀는데
이것이 '마드리드' 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당시는 아랍인들은 주로 요새와 회교 사원이 있던 강 언덕 위에 주로 살았고,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들을 포함하여 인구가 1,500명 정도의 작은 촌락이었다.

1083년 알폰소 6세가 아랍인들로부터 마드리드를 탈환하고,
그 후 여러 왕들이 이곳에 머물었지만 주로 사냥을 하기 위해서 였으며
12, 13, 14세기까지도 마드리드는
까스띠아 레온(Castilla y Leon)이라는 이름의 작은 도시였다.

1492년 카돌릭 국왕부처(Los Reyes Catolicos)가 이슬람왕국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그라나다(Granada)를 함락시키고,
같은 해 신대륙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함으로서
스페인의 황금세기(Siglo del Oro)라 불리는 전성기 16세기를 맞아
1556년 왕으로 등극한 펠리페 2세가 당시 수도였던 똘레도가 요새 도시로서
외적으로 팽창이 어려운 지역이라 대제국의 수도로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1561년 수도를 마드리드로 천도(遷都)하게 된다.
그 후 마드리드는 빠른 성장을 거듭하여
스페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여러 성당과 수도원, 마요르광장(Plaza de Mayor),
부엔레티로궁(Palacio de Buen Retrio) 등을 건설하였다.

1616년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던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가 사망하고,
17세기에 화가 벨라스께스(VelazQuez),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
작가 께베도(Quevedo), 곤고라(Gongora) 등이 마드리드에 살면서
많은 작품활동을 하여 문화적으로도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스페인의 왕위계승전쟁(1701-14) 당시
마드리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왕가 대신
프랑스 부르봉왕가를 지지해 부르봉 왕가가 집권함으로써
다시 성장의 시기를 맞게되어 이 시기 1734년 펠리페 5세는
크리스마스 밤에 대화재로 불탄 알까사르(왕성)을 재건하도록 명했고,
마드리드 시장 마르께스 데 바디요는 비르헨 델 뿌에르또거리,
똘래또다리(Pedro de Riverra) 등을 건설했다.

이 시기에 가장 위대한 건축사업을 벌렸던 왕은 까를로스 3세로서
마드리드는 동쪽으로 지금의 독립광장까지 팽창했는데,
1778년에 건설된 알라까문(Puerta de Alcala), 마드리드식물원,
태양의문 광장(Plaza de la Puerta del Sol)에 있는 시청 건물 등이
이 때 만들어진 유명한 유적들이다.
나폴레온 전쟁 때 마드리드는 프랑스군에 점령당해
그 동생 호세 보나파르데 1세(Jose I Bonaparte)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였는데,
1801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시민전쟁이 일어나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발전되었다.
나폴레온에게 구금도었던 페르난도 7세는 풀려나 마드리드로 돌아와
까를로스 3세가 완성하지 못한 자연과학연구소를 만들어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역대 왕족들의 소장품을 여기로 모았는데
이것이 프라도미술관의 시작이다.
이사벨 2세도 마드리드에 궁전과 공원, 거리들을 만들었는데
장관이던 마르께스 데 살라망까는 마드리드를 북쪽이로 팽창시켜
까스떼야나대로, 챰베리, 알구에예스와 같은 지역들을 만들었다.
알폰소 12세 때에는 스페인은행, 시벨레스광장의 중앙우체국,
알무데나성당등을 건축하였고,
알폰소13세 때는 태양의믄광장과 꾸아뜨로 까미노스를 연결하는
첫 지하철을 개통하였으며,
1910년 그란비아 공사 시작, 1727년 마드리드 북쪽 대학촌을 완성하였다.
1936-75년 간에 있었던 스페인 내전 때 마드리드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코장군 집권기간(1940-75 거의 복구되었으며,
교외지역을 흡수하여 마드리드는 300만대에 이르는 대도시가 되었다.

콘수에그라 파일에 이어 마드리드로 향하는 연도 풍경(계속)
똘레도를 지나며 똘레도의 명물 하나 '알까사르(Alcazar)'
알까사르는 로마시대 똘레도성(城) 수비대까지 거느렸던 관아(官衙)이다.
똘레도를 지나서 마드리드로 향하는 고속도로
노비스(Nobis)올리브유 판매점
이 상점에서 오늘의 인기품목은 다분히 아르간 오일,
먹는 오일이 아니고 몸에 바르는 오일.
쇼핑은 여자들이 하는 거니
남자들은 앉아 쉬자.
마드리드에 다 온 것 같군
웬 오벨리스크 ?
● 프라도미술관(Museo del Prado)

프라도미술관
프라도미술관(또는 박물관)은 까를로스3세 시대인
1785년 환 데 비야누에바 라는 건축가가 지은
당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다.

원래 이 건물은 마드리드식물원 가까이에 자연과학연구소 용도로 지은 것인데
반나폴레온 독립전쟁기간인 1808년 건물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이후 페르난도 7세의 명령으로 복구하여 1819년 왕립미술박물관으로 거듭 태어났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회화, 삽화, 조각 등 5,000여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 3대 미술관 중의 하나로 알려졌으며,
18세기 이후 거의 모든 미술학파들의 작품이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3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정문은 단체입장 문으로 마드리드(Madrid) 출신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de Velazquez)의 동상이 있고,

북문은 개인입장 문으로 사라고자(Zaragoza)출신의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의 동상이 있으며,
우리는 이 북문으로 입출하였다.

남문은 교육단체입장 문으로 세비야(Sevilla) 출신의
바로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의 동상이 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이라 16세기의 스페인 대표화가 엘 그레꼬(El Greco),
17세기 스페인 대표화가 디에고 데 벨라스께(Diego de Velazquez),
18세기 스페인의 대표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를 위주로
둘러보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모든 촬영이 금지되어 실내 전시장에서는 영상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다행이 다음날 똘레도 노점상에서 산
『똘레도-마드리드 역사와 예술』이라는 책에
이들의 그림이 몇점씩 실려 있어 스캔해서 올린다.


16세기의 스페인 대표화가
엘 그레꼬(El Greco)


엘 그레꼬는 1541년 그리스 크레타 섬 간디아라는 마을에서 출생,
본명은 도메니코스 데오토코포울로스라는 긴 이름이다.
1567년 베네치아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당대 미술의 거장 티치아노(Tiziano)의 제자가 되어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精髓)를 배워 작품 구성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1576년부터 약 1년간 로마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는 주로 특정 고객의들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활하였다.
1577년 스페인에 와서 엘 에스꼬리알(El Escorial)궁을 장식할 그림

'마우리시오 성인의 순교(Martirio de San Mauricio, 1580)을 그렸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 그림에 불만족을 표시하여
궁중화가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주로 똘레도 지역에 국한된 활동을 하였다.

그의 프라도미술관 소장 작품으로는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삼위일체>, <목동들의 경배> 등 30여점이 있고,
똘레도에 남은 작품으로는 < 베드로의 눈물>,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의 한 특징은 작품 속의 인물들이 길게 그려진 것으로
그림에 투영된 그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인데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의 모습을 표현한 부분이다.
그 밖에도 '가느다랗고 긴 여성스러운 손가락',
'서로 붙어있는 중지와 검지손가락'등이다.

엘 그레꼬 작품,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엘 그레꼬 작품, <목동들의 경배>와<삼위일체>
< 베드로의 눈물>,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엘 엑스폴리오>는
똘레도파일에서 올릴 것임.

17세기 스페인 대표화가
디에고 데 벨라스께(Diego de Velazquez)
프라도미술관 정면 전경과 벨라스께스 동상


벨라스께스는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으로
17세기 스페인 화단의 최고 작가로 손꼽히는 화가이이며,
1599년 세비아(Sevilla) 출생, 1660년 맏리드에서 사망했다.

세비야시절 후에 장인이 된 빠체코(Pacheco) 문하에서 수학하여
24세 때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는데
그 기간동안 펠리페 4세의 명으로 두 번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왕궁 내부를 장식할 작품을 사왔다.

벨라스께스의 작품 중에는 실제의 사진을 방불케 할만한
탁월한 리얼리즘의 그림들이 많은데
특히 빛을 이용한 테네브리즘(Tenebrismo: 명암대조를 강조하는 경향) 풍의 그림들이다.
프라도미술관에는 약 50점의 벨라스께스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대부분 펠리페 4세와 그의 가족들을 그린 작품이 많은데
<시녀들(Las Meninas)>이 대표작이다.
이들 작품 중에는 20세기 최고의 작가 피카소가
입체파(Cubismo)적 관점에서 다시 그리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자연주의와 테네브리즘의
<불카노의 대장간(La Pragua de Vulcano)>,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브레다의 항복(La Rendicion de Breda)> 등이 있고,
<실짓는 여인들>,<어릿광대 돈 디에고 대 아세도 '엘 프리모'>등도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벨라스께스의 작품,<시녀들(Las Meninas)>
벨라스께스의 작품,<불카노의 대장간(La Pragua de Vulcano)>
벨라스께스의 작품,<브레다의 항복(La Rendicion de Breda)>

18세기 스페인의 대표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프라도미술관 북문과 고야 동상

고야의 진영과 초상화

고야는 1746년 사라고사(Zaragoza: 스페인 동북부 인구65만의 도시,
예날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聖母 發顯地 사라고자필라스 성모대성당이 있다
)에서 출생,
1828년 마드리드에서 사망.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회화의 기본기를 익혀 젊은 나이에 마드리드에 와서
산 페르난도 예술문화원에 들어가려 했으나
1763년과 1766년 두 번씩이나 거듭 낙방하여 화가로서 실패를 격고,
1771년 이탈리아 파르마(Parma)라는 곳에 가서
프레스코화(소석회(消石灰)에 모래를 섞은
몰탈을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회화
)를 공부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고야는 당시 스페인에서 영향력이 큰
바예우가문의 호세파 바예우(Josefa Bayeu)와 결혼하고,
1774년부터 작가로서중요한 출발하는데
이는 당시 까를로스 3세의 예술고문이었던 안또니오 라파엘 멩스가
고야에게 왕립 태피스트리(박물관)의 밑그림 카스톤을 그리게 해서
1792년까지 고야의 작품을 카스톤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때 그 대표작으로는 <눈먼 닭(La Gallina Ciega)>,
<결혼식(la boda)>, 그리고 4개의 연작으로 스페인의 4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결혼식> 작품은 고야 특유의 유머와 당시 사회에 대한
풍자적 시각을 함께 엿 볼수 있는 작품이다.

1789년 까를로스 4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이때부터 고야는 궁정화가로서
왕의 가족들과 귀족들의 초상을 그리게 된다.
이 때 대표작으로는 ,까를로스 4세 가족(La Familia de Carlos IV)>,
오수나백작 가족(La Familia de los Duques de Osuna)>등이 있다.

일명 '마야부인'으로 알려진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la Maja vestida)>과
<옷을 벗은 아름다운 여인(La Maja desnuda)>
도 같은 부류의 작품인데
너무도 유명해세를 타서 작품 자체의 예술성보다
외설(猥褻)성으로 인해 종교재판에 회부된 적도 있고,
작품 속의 젊은 여인의 정체를 둘러싼 추측과 가설이 난무하여
그림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19세기초(1808-14)의 나폴레옹에 대한 스페인의 독립전쟁은
고야의 작품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전쟁은 노년이 된 고야에게 조국과 민중의 현실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리도록 했는데
이 때 작품이 <5월2일(Dos de Mayo>와
<몽끌로아의 총살(Dos Fusilmientos de Moncloa)> 등이다.
이들은 나폴레온 군대의 만행을 생생한 필치로 고발하고 있는데
특히 <몽끌로아의 총살>은 20세기에 등장한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림이다.

고야의 말년이 폭력적인 역사에 대한 저항과 투쟁으로 시작되어
그는 또다시 모순된 사회와 그의 생을 포장했던
껍질들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을 대부분 검은색 톤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검은 그림(Pintura Negra)'이라 한다.

고야는 1792년 병으로 귀머거리가 된다.
1819년에 '귀머거리 별장'이라는 2층 집을 샀는데
1층과 2층 벽면의 많은 그림들이
'고야의 검은그림'으로 알려진 작품들의 원본이다.
지금 프라도미술관에 남아있는 검은그림들은
1873년 에밀남작의 명으로 캔버스에 옮겨진(轉寫)된 작품들이다.
고야는 검은색 속에서 사회적 모순, 음모, 잔인함을 고발한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해 냈다.
시간의 신 사투리우스의 앞에서 자신의 죽음보고 그린 작품이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리우스(Saturno devorando a un jijo)>이고,
<반쯤 빠개진 개(Perro semihundido)>가
곧 죽음앞에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그린 것이다.

우리가 출입한 북문의 모습
프라도미술관 북문에 서있는 고야의 동상
동상 아래 '옷을 벗은 마야'가 흰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다.
고야 작품, ,<옷을 벗은 마야(La Maja desnuda)>
고야 작품, <옷을 입은 마야(la Maja vestida)>
고야 작품, <까를로스 4세 가족(Familia de Carlos IV)>
고야 작품, <오수나백작 가족(La Familia de los Duques de Osuna)>
고야 작품, <몽끌로아의 총살(Dos Fusilmientos de Moncloa)>
고야 작품, <양산(Parasol)>
왕립 태피스트리(박물관)를 위한 밑그림
고야 작품, <결혼식(la boda)>
고야 작품, <눈먼 닭(La Gallina Ciega, 눈먼 겁쟁이)>,
고야 작품, <검은 그림(Black)>
고야 작품,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리우스(Saturno devorando a un jijo)>
고야 작품, <반쯤 빠개진 개(Perro semihundido)>
<이 그림을 보고 쓴 어떤 이의 감상문>
프라도 미술관 갔을 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그림이다.
예전에 갔을 때에는 이 그림을 봤던 기억이 없었다. 그 때는 처음이라 주로 유명한 그림들만 주의깊게 봐서 그랬는지..
작년 여름에 두 번째 갔을 때에는 열차시간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아서 몇몇 방만 골라서 봤다.
각 방마다 사람들이 꽤 있었고, 유명한 그림들 앞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한 명도 없이 텅 비어있던 방이 있었다. Goya의 Pinturas negras(black paintings) 그림들을 전시해 놓은 방이었다.
들어가보니, 벽 색깔도 어둡게 칠해져 있고, 이전까지는 각 그림 옆에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그림 설명이 쓰여 있었는데, 이 곳에는 스페인어 설명만 붙어 있었다.
감상하는 다른 사람들도 없고, 안내하는 사람도 없고, 이런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그곳의 그림들을 오랫동안 둘러봤다.
왼쪽부터 쭉 보며 몇몇 유명한 그림들도 봤고, 예전에도 본 기억이 나는 Saturno도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 바로 옆에, 이 그림이 있었다. 그 때 이 그림을 처음 봤는데, 이 그림이 뿜어내는 분위기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윗부분에 넓게 깔린 황토색 빛은 뭔가 우울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주었고, 아래쪽의 짙은 갈색 무더기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며,
그림의 제목(주제)임에도(불구하고) 그림 전체의 1%정도밖에 차지하지 않는 개의 반쯤만 보이는 표정은 뭔가에 꽉 붙잡혀 저항할 수 없어 절망적이면서도 공허한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돌아와서 책들을 찾아보니, 아래의 짙은 더미는 개를 집어삼키는 모래무덤같은 것이라고 했다.
즉 이 개는 모래더미에 휩쓸리며 파묻혀 죽어가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힘에 의해 다가오는 죽음은 이런 느낌일 것 같기도 하다.
개의 반쪽 머리는 위를 향하고 있는데, 그가 바라보는 위의 누런 빛은 더할나위 없이 무기력하게만 보인다.
이 그림을 그 방에서 본 그 순간은, 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였다.
이 그림을 다시 오랫동안 감상하고 싶기도 하고, 내가 기억에 남기지 못한 많은 그림들을 보러 다시 프라도 미술관에 가보고 싶다.

세비아 대표화가로서 남문을 지키는
바로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프라도미술관 남문과 무리요 동상

무리요는 안달루시아 세비야 근교에서 출생해서
세비야에서 사망. 평생 세비야를 중심으로 활약 하면서
17세기 플랑드르 미술과 16세기 베네치아 파의 작품에 자극되어,
스페인 바로크에서 가장 화려한 화풍을 확립했다.

감미롭고 감상적인 화면을 즐겨 그렸다.
<무원죄의 머무름> (1678경, 프라도 미술관등), <원로원 의원의 꿈>,
<원죄없이 잉태한 성모> 등이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고,
『성모자상』(피렌체 피티 미술관) 등의 걸작을 남긴
반종교개혁운동의 대표적 화가이다.
그러나 사실적 경향이 두드러지며,
그 경향은 거지소년과 거리의 소녀 등을 그린 것에서 현저히 나타난다.

무리요 작품, <무원죄의 머무름>
프라도미술관 소장
● 태양의 문 광장(Plaza de La Puerta del Sol)
콘수에그라에서 점심먹고 그 먼 길을 허급지급 이곳 마드리드로 달려와
운좋게도 탈 없이 노루걸음으로나마 프라도 미술관 관광을 하고 나니
해는 지고 저녁 식사 때다.
석식장소 '사랑방'에서 식사를 하고
호텔로 가기전까지 마드리드 중심부 시가지를 구경했다

태양의 문 광장 등
'태양의문 광장'이란 이름은 중세 때 이곳에 아랍 성벽을
'태양의 문(Puerta del Sol)'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태양의 문 광장은 마드리드 시가지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외부지역과의 거리 측정이 이 광장의 표준지점을 기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드리드 쇼핑가의 중심인 까르멘(Carmen)rjfl,
쁘레시아도스(Preciados)거리, 알깔라(Alcala)거리, 마요르( Mayor)거리 등
주요 길들이 이 광장에서 갈라져 나가고 있다.

현재의 이 광장의 모습은 1861년 환 바우띠스따 빼이로네뜨가 설계한 것이지만
구 우체국(Casa de Correos) 건물만 옛 것이고
나머지는 주변 낡은 건물을 철거하거나 개조해서 만든 것이다.
구 우체국 건물은 1768년 프랑스 건축가 마르케트가 건축한 것으로
내무부, 경찰본부 등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마드리드 시청으로 쓰이고 있다.
시청건물 종탑은 우리나라 종로2가 종각처럼
12월 31일 스페인의 '제야의 종소리'를 울려퍼지게 히는 것이란다.

알깔라거리는 가장 긴 10Km의 길이 벋어나가는데
이 거리 주변에는 리베라의 산호세 데 빼드로성당 같은
큰 성당, 수도원 등이 있고, 산 페르난도 예술문화원,
시벨레스 광장, 독립광장, 빌바오 비즈까야은행, 뽀뿔라르은행, 스페인은행등
은행가도 이 거리에 밀집해 있다.

마드리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인 시벨레스광장에는
분수대 중앙에 사자 두 마리가 끄는 수레 위에는
1772년에 만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농경의 신이자 제우스신의 어머니이며
'풍요'의 상징하는 '시벨레스 여신'이 앉아 있는데
그녀의 시선은 태양의 광장을 향하고 있다. (네이버 고야 중에서 퍼옴)

구 우체국 건물
알깔라거리의 야경
시벨레스 광장 분수와 알깔라 문 야경
위 세 야경 형상은 실제 보지 못하고 '똘레도-마드리드 역사와 예술' 책에서 스캔 한 것이다.
● 마요르광장(Plaza Mayor)

마요르광장(Plaza Mayor)
마요르광장은 옛날 낡은 집들이 불규칙하게 광장을 둘러 싼 곳이었는데
펠리페 2세 때 이곳에 대한 확장, 정리 공사를 하고,
펠리페 3세 때 정식으로 의회에 '고메스 데 모라' 광장을 만들 것을 요구하여
토목과 건축공사가 시작되어 1620년 이시드로 성인의 축체 때 준공이 되었다.

그러나 1631년, 1672년, 1790년 세 번에 걸친 화재와 재 건축으로
원래의 모습이 많이 변하게 되었는데 보수공사는 1854년에 종결되었다.

마요르광장의 주 건물은 9개의 아치를 갖춘 직4각형(120m x 94m) 모양인데
왕실 접견식, 사형식, 투우경기, 승마경기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행사를 여기서 열었다.

광장 중앙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환 데 봉오니아(Juan de Bolonia) 작품으로
이 광장을 '마요르광장'으로 이름을 부여한 왕인 펠리페 3세의 동상이 있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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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식장소 한식 사랑방
석식후 마요르광장 구경 나서면 거 본 거리 풍경
마요르광장과 펠리페 3세 동상
마료르광장 건물과 인증샷
따라오는 얼굴없는 경찰관(?)
● 스페인광장(Plaza de Espana)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석상과 돈키호테(Don QuiJote)/샨쵸(Sanncho Panza) 동상>

스페인광장
스페인 아스까(Azca)에 피카소 건물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스페인에서 가장 높았던 117m의 스페인 빌딩(Edificio de Espana)으로
1940년대 후반 오따멘디 형제 건축가가 건축하여
현재 호텔, 사무실, 주거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는 쁘린세사거리와 만나는 부분에 위치한
마드리드빌딩(Torre de Madrid)으로
동일 건축가가 지었으며 32층 130m로 아파트와 사무실로 쓰인다.

광장 중앙에 1616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한
<돈키호테(Don Quijote de la Mancha)>의 저자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석상이 있고,
그 앞쪽에 소설 속의 주인공 돈키호테(Don Quijote)와
샨쵸 빤싸(Sanncho Panza)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 석상과 동상 주변에는 라 만차(la Mancha)지방에서
가져 온 올리브나무를 둘려 심었다.
세르반테스 석상은 꼬야우뜨 발레라(Coullaut Valera) 작품으로
삭상 뒤 탑 꼭대기에는 세계 여러 민족을 대표라는 사람들이
지구를 이고 독서에 열중하는 모습의 조각인데
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전 세계 민족들이
애독해 왔음을 의미하는 조각이다.

세르반테서 석상과 돈키호테/사쵸 동상과 인증샷
마지막 숙박한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
아침 일찍 최종일(18일 목) 관광지 똘레도로 출발
부슬비가 내린다. 그러나 똘레도에 도착하니 확 개였다.
끝(다음은 스페인 똘레도, 귀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