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의 스페인 옛 수도, 지금도 똘레도대성당이 스페인 카톨릭의 총본산
스페인- 똘레도(Toledo)
沙月 李 盛 永(2017.6.17)
똘레도 전경

똘레도의 역사
똘레도는 마드리드 남쪽 70Km 타호강(Lio Tajo)이 천연 요새를 형성하는
북안에 위치하는똘레도주의 고도(古都). 면적232평방Km, 인구 7.6만명.

역사상 똘레도의 첫번째 주인은 이베로(Ibero)족의 한 갈래로
까르뻬따노(Caepetano)라는 민족이였는데,
BC192년 로마인 마르코 풀비오가 집정관으로 와서 이 지역을
로마제국의 변방지역으로 합병시켰다.
이 당시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똘레툼(Toletum)'이라 불렀다.
이 것이 지금 똘레도 이름의 기원이다.

로마제국의 힘과 권력이 점차 쇠퇴는 5세기부터 스페인반도에는
비시고도(Visigodo)족이 들어와 세력을 넓여가
418년에는 똘레도를 중심으로 비시고도 왕조를 형성하여
579년 레오비힐도(Leovigildo)왕은 똘레도를
비시고도왕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똘레도는 스페인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가 된다.

특히 똘레도에서 여러차례 종교회의를 갖는데
400년에 제1차종교회의(Concilio Toledano)가 개최되었으며,
589년 제3차 종교회의 때는 비시고도왕국의
레까레도(Recaredo)왕은 공식적으로 카톨릭을 국교로 정한다.

8세기에 들면서 스페인반도는 이슬람제국과 전쟁국면으로 들어가
711년 아랍왕 타릭(Taiq)이 똘레도를 점령하여
400년간 통치하지만 똘레도 저항군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특히 797년 알하캄 1세(Alhakam I) 때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고,
10세기 초 압데라만 3세(Abderraman III, 912-961)는 똘레도 저항군을
대부분 진압하고 이슬람제국의 변방으로 합병하였다.
이렇게 이슬람제국은 스페인반도는 대부분 정복했지만
이에 대항하는 비시고도족의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 718-1492)은
끊이지 않았는데 1085년 까스띠아(Casttilla)왕국의 알폰소 6세(Alfonso VI)는
똘레도를 수복하였으며, 1087년에는 까스띠아왕국의 수도가 되어
스페인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13세기에 또레도의 발전은 절정을 이루는데
산 페르난도 3세(San Fernado III, 1217-1252),
알폰소 10세(Alfonso X, 1252-1284) 때 킅 발전이 있었고,
카톨릭국왕 부처(夫妻: Los Reyes Catolicos) 때에 똘레도는
더욱더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외적으로 팽창하였다.

1492년 카톨릭국왕 부처는 남아있던 유일한 이슬람국가인 그라나다를 정복하고,
스페인 반도내 유대인 추방령을 내려 아랍인들과 함께 추방하였는데
당시 똘레도의 공업과 상권을 유대인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똘레도의 경제가 쇠퇴하였다.
1561년 펠리페 2세(Ffelipe II)는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시작되는
이른바 '황금세기'에는 똘레도가 수도로서 부적합 하다면서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므로써
똘레도는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적으로도 중요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변함없이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위상이다.
똘레도대성당은 지금도 스페인의 수석성당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
19세기 말 군 사관학교(Academia General Militar)가 이곳에 설치될 만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스페인내전(1936-39) 때는 똘레도의 알까사르(Alcazar)를 놓고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똘레도는 철제 생산, 특별히 검(劍) 제작으로 유명하며,
지금도 칼 등 철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똘레도 근교
마드리드에서 출발 할 때는 부슬비가 내렸는데 또레도에 이르니 날씨가 완전히 개였다.
똘레또의 명물 하나 알까사르(Alcazar)

알까사르(Alcazar)
세르반테스 언덕위에 4각의 육중한 건물을 '알까사르"라고 한다.
이 알까사르의 기원은 로마시대 부터인데,
당시 성(城) 수비대까지 거느린 로마인들의 관아(官衙)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알까사르는 '똘레툼(Tpoletum)'이라 불리던 로마인들의
군사 목적의 성벽이 시작되는 곳이다.
비시고도시대(Epoca Visigotica)나 이슬람 점령시기에도 변함없이
군사적 요새로 사용되었다.

11세기 알폰소 6세가 똘레도를 수복한 후 알까사스를 재건축하였는데
엘 시드(El Cid)장군이 이 요새의 첫 주인이 되었다.
이후 알까사스는 역대 많은 왕들의 거처로 사용하였고,
까를로스 5세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꼬바루비아스, 베르가라, 베가,
비얄판도, 환 데 에레라)을 모두 채용하여 왕성으로 변모시켰다.
1561년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긴 후에는
왕실 가족의 비정규적인 숙소로 사용되었다.
알까사르는1710년 왕위 계승전쟁과 이로부터 100년 후인
1810년 나폴레옹 군대가 똘레또를 떠날 때 불을 질러 폐허가 되었다가
1867년 보수공사로 회복되는 등 여러차례 화재를 격고 수복되었고,
스페인 내란(1936-39) 때는 공화파의 많은 폴탄세례를 받아
잿더미가 되었다가 다행히 건축도면을 구할 수 있어서
전후에 다시 원상복구하여 지금에 이른다.

알까사르 13세기 똘레도 출신의 알폰소 10세가 세운
톱니 모양의 거벽(鋸壁, 요철의 흉벽)과 원형탑의 흔적이 남아 있고,
빼드로 1세 왕의 왕비였지만 마리아 데 빼디아(Maria de Padilla)라는
왕의 정부(情婦) 때문에 비운의 왕비가 된 도냐 블랑까(Doda Blanca)가
지하에서 감옥생활을 했던 방도 있다고 한다.

알까사르와 알깐따라 다리 야경(
알깐따라 다리(Puente Alcantara)

알깐따라 다리(Puente Alcantara)
똘레도 시가지 남쪽 절벽 아래 동에서 서로 반원형으로 감싸고 흐르는
타호강(Rio Tajo)의 시가지 동편 강폭이 가장 좁아지는 곳에
놓인 다리가 알깐다라(Alcantara) 다리인데,
'알 깐따라'는 아랍어로 '교량'을 뜻하는아랍어이기 때문에
이 다리가 이슬람 정복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
다리의 기초공사에 쓰인 재료와 건축 양식으로 보아
로마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알깐다라(Alcantara) 다리는 이슬람제국시대에도
부서지지는 않았으나 아랍군과 똘레도 저항군 사이에 수차에 걸친 전투로
많은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압달라만 3세(Abd al Rahman III)가
보수하여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257년 대 홍수로 다리가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이듬해 알폰소 10세가 보수토록 하고,
교각에 거대한 보호장치를 함으로써 더욱 굳건한 모습이 되었다.

알깐다라(Alcantara) 다리에는 양쪽 끝에 마주보는
두 개의 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는 1721년 마차들이 쉽게 통행하도록 헐고,
그대신 아치문이 설치하였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다른 하나의 탑은
1484년 고메스 만리께라는 건축가가 재건하였는데
카톨릭 국왕부처(Los Reyes Catolicos)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타호강(Rio Tajo) 절벽으로 둘러싸인 똘레도 남쪽 요새지역
서-동 파노라마와 인증샷
되돌아와 똘레도 시가지로 가기 위해 하차한 지점에
옛 성벽 유적
똘레도 요새지역으로 오르는 에스카레이트
똘레도 요새지역에 올라와 내려다 보는 북쪽 구 시가지
골목길 지나 똘레도 대성당으로
똘레도 대성당

똘레도대성당
지금까지 스페인의 수석성당으로 인정받고 있는 똘레도대성당은
이슬란앙국 시절에 이슬람교 사원이었다.
1086년 알폰소 6세(Alfonso VI)가 똘레도를 수복하고
카톨릭사원으로 개조하였다.

1212년 나바라(Navarra), 아라곤(Aragon)왕과 연합한
까스띠야(Casttilla) 왕국의 알폰소 8세(Alfonso VIII) 군대가
나바스 데 똘로사 젙투(Batalla de las Navas de Tolosa)에서
아랍군(그라나다군)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이제 똘레도는 아랍세력과 대치하면서 위협을 받던 변방도시가 아니었다.

이에 알폰소 8세와 메네스 데 라다 대주교(Arzobispo Ximenes de Rada)는
역사적인 나바스 데 똘로사 전투의 승전을 기념을 기념하기 위해
똘레도대성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1221년 기초공사 시작하여 이듬해 교황 호노리오 3세(Papa Honorio III)가
공사를 승인하는 교서를 내리고,
1226년 성당 건축의 초석을 놓는 공식행사거 거행되었다.

그후 대성당 건축가에 대한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고
1227년 마르틴선생(Masestro Martin) 정도로 언급된 역사자료가 있다.
그는 프랑스 성당 건축 양식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상부의 아치형 지지대와 신랑(身廊)에 적용된
건축 양식은 독창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트리포리움(Triforium, 내부 아치와 높은 창 사이 3개의 창문) 에
무데하르(MudeJar) 양식으로 보아 이 성당이
똘레도 고유의 지역적 영감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똘레도 대성당 전면 외관과 인증샷
똘레도-마드리드 역사와 예술
여기서 조가이드가 부탁한 것 실습?
조가이드 왈 "이곳 스페인에 오거든 서점이나 책 노상 가판대를 만나면
무조건 'Korean ?' 하고 말을 거십시요"
이것이 외국 여행에서 한국의 위상을 Up시키는 애국 활동입니다"

이곳 노상가판대에 실습했더니 바로 이 책을 8유로에 샀다.
그림도 좋고, 내용도 좋고 잘 산 것 같다.
그리고 애국활동도 하고---
똘레도 대성당 대제단(大祭壇: Capiiia Mayor)
대제단병풍(大祭壇屛風)


시스네로 추기경(Cardenal Cisnero)이 원래의 대제단이
성당의 규모에 비하여 좁다고 판단하고
1498-1504 간에 확장공사를 통해 거대한
제단병풍(祭壇屛風, Retablo Mayor)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작업은 페티-진(Petit-Jean)이 맡았는데
나무 재질은 아빌라(Avila) 지역의 낙엽송을 사용하였으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물들은 화려한 후기 고딕 양식에
당시 스페인에 유행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제단병풍은 세로로 7열의 조각물이 나열되었는데
정 중앙열(4열)의 조각은 가장 크게 하여
아래서 위로 성모상(聖母像),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예수의 탄생, 성모승천(聖母昇天), 예수님의 십자가상으로 되어 있으며,
주변 열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을 묘사하고 있다.

대제단병풍 주요 세부 조각
上左(예수님의 십자가상, 4열 맨 위), 上右(예수탄생, 4열 아레서 세 번째),
中左(3열 아래서두 번째), 中右(6열 아래서 두 번째),
下左(2열 아래서 세 번째), 下右(성모상, 4열 맨 아래)
성가대실(聖歌隊室) 출입문
성가대실 정면
성가대실 양측면 파이프오르간
성가대실 좌우측 상부에 설치된 두 대의 파이프 오르간은
그 제작 양식이 서로 다른데,
좌측(위 그림)의 화려한 오르간은 바로크 양식으로 만든 것이고,
우측(아래 그림) 오르간은 신 고전주의 양식이다.
호두나무로 만든 성가대실 의자와 조각
성가대실 백성모상(白聖母像, Virgen Blanca)
출입구 가까이 서있는 흰 대리석 성모상은 일명' 백성모상'이라 부르는데,
14세기 초 프랑스에서 조각한 것이다
성물실(聖物室, Sacristfa) 대형 천정화(天井畵)

성물실은 대제단 왼쪽에 위치하고있다.
그 실내는 하나의 커다런 둥근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대형 천정화(天井畵)가 있는데,
17세기 이태리 나폴리 출신의
화가 루카 지오르다노(Luca Giordano)의 그림이다.

그림 내용은 일데폰소 성인(San Ildefonso)에게
제의(祭衣)를 내리는 모습을 주제로하고 있다.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색상, 수 많은 천사들이
약 250평방m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성물실 전면
엘 엑스폴리오(El Expolio)
16세기 스페인의 대표화가 엘 그레꼬(El Greco)의 똘레도 초기 작품 중에서
대작으로 꼽히는 그림으로 1579년에 완성하였다.
주변의 사악한 얼굴들과 대조적으로 평온과 엄숙함을 간직한
예수님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붉은 성의 위에 얹혀진 손의 손가락 모양은 엘 그레꼬 특유의 기법이다.
베드로의 눈물(Lagrimas de San Pedro)
역시 엘 그레꼬(El Greco)의 작품이다.
보물실(寶物室, Puerta del Tesoro) 입구
문 위쪽 벽감(壁龕: 벽면에 쑥 들어가게 파여진곳)
알폰소 데꼬바루비아스(Alfonso de Covarrubias) 작품의
'쿠오 바디스(Quo Vadis)'라는 제목의 조각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일명 '쿠오 바디스 예배실'이라고 부른다.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1517-1524년 에 독일 작가 엔리께 데 아르페(Enrique de Arfe)가 만든 것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 온 약 18Kg의 순금으로 제작되었으며,
금으로 만든 나사만도 12,000개가 넘게 사용되었다 한다.
뜨란스빠렌떼(El Trasparente)

일종의 대제단 성체현시대의 조명시설,
이 작품은 천재 작가 나르시소 또메(Narciso Tome)가 만들었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항상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어왔다.

대제단 의 모양을 일반적인 것과 달리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게 하여
역동성을 강조하고 중심부에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 되었다.
아래쪽에 금색으로 장식된 섬광(閃光) 조각물과
라파엘(Rafael), 가브리엘(Gabriel), 미겔(Miguel), 우리엘(Uriel)
네 대천사(大天使)를 조각하고,
상부에 '최후의 만찬'을 상징하는 희색의 대리석 조각물들을
아래서 올려다 보는 각도를 고려하여 배치하였다.

뜨란스빠렌떼의 진면목은 맞은편 돔(Dome)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어울어질 때 그 환상적인 자태가 나타나는데,
복잡하게 얽혀있는 대리석 기둥과 조각들이 빛을 받을 때면
마치 살아서 움직이 듯 다가온다.
천재작가의 바로크에 대한 열정이 아직도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다음 것들은 찍기는 했는데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산또 또메 성당(Iglesia de Santo Tome)과 오르가스백작 예배실 입구
엘 그레꼬 작품,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El Entierro del Conde de Orgaz)>

원래 이름은 곤잘로 루이스(Gonzalo Ruiz)인데,
일명 오르가스백작(Conde de Orgaz)으로 잘 알려져 왔다.

오르가스백작은 똘레도 지방의 귀족으로
까스띠아 왕국의 공증인(公證人)이었다.
1323년 사망했는데 일생동안 성당 기관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했으며,
신실(信實)하면서도 동정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그가 죽은 이후에 그의 장례식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 날 하늘에서
어거스틴 성인(San Augustin)과
스테반 성인(San Esteban)이 내려와
시신을 친히 매장하였으며,
이 때 주변 사람들은
"하느님과 성인을 장 섬기는 이는 이처럼 포상을 받느니라"
라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고 전해진다.

오르가스백작은 자신의 유산을 산또 또메 성당의 가난한 성도들과
승려단의 빚진 돈을 매년 갚을 수 있도록 유언장에 명시하여
사후에도 자신의 재산이 하느님을 섬기는데 쓰이도록 배려하였다.

백작이 죽고 시간이 흐른 뒤에 성당측은
오르가스백작의 무덤 위에 장례식에 얽힌 전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하고,
당시 스페인의 대표화가로 알려진 엘 그레꼬(El Grego)와
계약을 맺어 약 9개월 만에 완성하였으나,
대금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림은 장례식 참석자들 얼굴을 경계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아래는 백작의 시신을 매장하는 장면이고,
윗쪽은 백작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장면이다.

아랫쪽 부분에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표정은
고요하면서도 사색에 잠긴 듯 심각하하다.
시신을 받치고 있는 어거스틴 성인(오른쪽) 모습에서
작가의 노년의 완숙미를 보여주고,
손으로 부드럽게 다리를 감싸고 있는 스테반 성인(왼쪽)의 얼굴은
젊은이의 다정스런 얼굴로 표현했다.

이 그림 속에서 작가 엘 그레꼬의 자화상을 볼 수 있는데
스테반 성인(왼쪽)의 머리 뒤통수 위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앞쪽을 보는 시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의 손가락으로 엘 그레꼬 임을 표시하고 있다.
또 이 그림 왼쪽 아래 횃불을 들고 있는 미소년은
엘 그레꼬 작가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Jorge Manuel)인데
검지손가락으로 매장하는 백작의 시신을 가리키고 있으며,
작은 손수건에는 그리스어로 된 서명과 1578년 생년원일이 적혀 있다.

윗쪽 부분에서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 머리 위로 영적세계(靈的世界)가 펼쳐지는데
구름 사이로 금발의 천사가 죽은 백작의 영혼을 팔로 감싸면서 하느님께로 오려주고 있다.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그리면서 갓난아기 모습으로 그렸는데
이는 영혼이 하느님 품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왼쪽에 성모 마리아,
오른쪽에 세례 요한이 완벽하게 삼각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조형진 가이드 작별인사
(유럽 스페인)그라나다-론다-미하스-타리파-
(아프리카 모로코)탕헤르-리바트-카사블랑카-패스-탕헤르-
(유럽 스페인)타리파-세비야-
(유럽 포르투갈)리스본-까보다로까-파티마-
(유럽 스페인)콘수에그라-마드리드-똘레도

참 먼 길을 돌고 돌았는데 사고없이 볼것 다 본 것은 조 가이드 덕분
감사합니다.
똘레도-마드리드공항 간 고속도로 연변 풍경
마드리드공항 원경
마드리드- 두바이 항로
두바이-인천공항 항로
갈 때도 찍었는데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비교해서 올릴 생각이었는데---
갈 때 항로는 올 때보다 더 북쪽이었음
우리 땅 대한민국(인천공항-인천대교)
모두 끝

(후기)
초기 두바이, 바로셀로나, 몬세라트 세 곳의 사진이 담긴 카메라 칩을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정에서 복잡한 행렬 속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걸어가면서 교채하다 분실한 것 같다.
마침 서태경동기가 찍은 모든 사진을 USB에 담아 넘겨 줘서
이부분도 그런데로 완성했고,
다른 부분도 내사진과 합하여 알차게 엮을 수 있었다는 것을 전하며
서태경 동기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