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바르셀로나(Barcelona)(Dubai
沙月 李 盛 永(2017.5.23)

바르셀로나[Barcelona]
면적 : 100.4㎢, 인구 : 159.5만명

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지역부터 프랑스 남쪽 피레네산맥과
접경지역까지 걸친 넓은 카탈루냐지방의 중심 항구도시,
카탈루냐자치지방 바르셀로나주 주도(州都)이다.
인구 면에서는 스페인의 두 번 째지만
항만규모와 상공업 활동에 있어서는 스페인 제1의 도시이다.

BC 3세기에 페니키아인들이 이 곳을 지배하면서
스페인 식민지로 개척, 건설한 도시가 그 기원 이며,
‘바르셀로나’ 라는 이름은 하밀카르 바르카 장군(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 가문의 성
‘바르카’에서 유래된 페니키아어 ‘바르케노(Barkeno)’에서 유래되었다.

BC 201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아직 도 구(舊)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고딕가(Gothic街:바리오·고티코스)에는
그 당시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大帝)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였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大帝)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였다.
12세기에는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이 되었고,
바르셀로나는 그 수도로서,
해운·수공업·금융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여 14세기에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무렵에 지어진 고딕식 성 가족성당(13세기 말)을 비롯하여
역사적 건조물들이 구시가 중앙에 많이 남아 있으며,
당시의 바르셀로나의 해양법(海洋法)인 콘술라도 데 마르는
오랫동안 그 권위를 유지하였다.

1469년에 아라곤과 카스틸랴의 통일로 지방도시가 되었으나,
고유의 카탈루냐어(語)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1550년에 창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의 선진지역으로서,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자치의 전통 및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7∼19세기에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북부 카탈루냐 지방을 프랑스에 빼앗기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 바로셀로나는 스페인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당시에는
공화정부(인민전선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가
1939년 1월에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영화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는 이시대가 그 배경)

시가의 중심인 람블라로(路)에는 은행·상사(商社), 고급상품점이 줄지어 서 있고,
이 거리의 남단인 항구 부근의 푸에르타데라파스에는 콜럼버스의 기념상이 있다.

이 거리의 서쪽은 19세기까지 건물이 들어찼으며,
동쪽에 있는 중세까지의 도시지역을 포함하여 구시가라 부르는데,
그 주위를 론다스라고 하는 성벽 터전의 대로가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바깥쪽의 직교상(直交狀)의 시가는
1860년의 도시계획으로 건설된 신시가지이다.

바르셀로나의 공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섬유공업(방적업)인데,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 영향으로
1845년에 14∼15만 명에 지나지 않던 인구가 1931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화학·금속공업도 가세하여 이베리아반도 제1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내란 후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한때 산업도시의 이름을 마드리드에 빼앗겼으나,
그 후 관개시설이 갖추어진 에브로강(江) 서부의 풍부한 농산물과
피레네의 수력(水力)으로 자동차·항공기 공업, 식품가공업 등이
활발해지면서 번영을 되찾고 있다.

카탈루냐 문화의 중심지답게 인쇄업도 활발하며,
지금도 문화·경제의 모든 면에서
카스틸랴의 중심인 마드리드에 대한 대항의식이 강하다.

근대에와서 스페인의 천재건축가 가우디
일생을 바쳐 성 가족성당, 귀족저택 까사 바요트, 구엘공원 등 많은 건축 작품을 남겼다.

1992년 제25회 하계올림픽대회가 개최되었으며,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12개를 획득, 종합순위 제7위에 올랐다.
● 구엘공원[Park Guell]
구엘공원 조감도

구엘공원[Barcelona]
바르셀로나 북쪽에 얕은 산 중턱에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전만 좋은 곳에
구엘백작의 경제적 후원 하에 천재건축가 가우디가 역작으로 완성한 공원이다.

두 갈래의 계단 사이에 화려한 채색 타일로 덮인 도마뱀 조각이 이 공원의 심볼이며,
멀리 남쪽으로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교외 언덕에
공원이라기 보다는 마치 동화 속 나라에 들어온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가우디 특유의 형형색색 모자이크로 장식된 건축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초현실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마치 과자의 집처럼 생긴 건물, 반쯤 기울어져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인공석굴,
꾸불꾸불한 산 길 어디에선가 요정이라도 만날 것 같은 느낌이다.

구엘 공원은 원래는 구엘 백작이 평소 동경하던 영국의 전원 도시를 모델로
이상적인 전원 도시를 만들 목적으로 설계된 곳이다.
구엘 백작과 가우디는 이 곳에 60호 이상의 전원 주택을 지어서
스페인의 부유 층에게 분양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계획 당시는 매우 혁신적인 발상이었지만 실패하였다.

공원 부지는 돌이 많은 데다 경사진 비탈이어서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도 가우디는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서
땅을 고르는 것도 반대했다고 한다.
1900년부터 1914년까지 14년에 걸쳐서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자금난까지 겹치면서 몇 개의 건물과 광장, 유명한 벤치 등을 남긴 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가 구엘 백작 소유의 이 땅을 사들였고,
이듬해 시영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애초의 원대했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공원은 여전히 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가장 훌륭한 작품 중에 하나로 남아
많은 시민들의 쉼터로 사랑 받고 있다.
소수 부유층의 전원 도시보다는 수많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으니
오히려 그 생명력과 효용 면에서는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공원 설계는 가우디 건축 스타일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직선이 아닌 곡선을 위주로 한 건물들,
어디서나 시선을 잡아 끄는 화려하고 독특한 모자이크 장식과 타일,
위태 롭게 기울어져 있는 나선형의 층계,
깨진 도기 조각으로 사치스럽게 장식해 불협 화음 속의 묘한 조화를 느끼게 하는
난간 장식, 자연미를 살려 꾸불꾸불한 길, 인공 석굴들,
어느 것 하나 ‘가우디답지’ 않은 것이 없다.
공원에는 과거 가우디가 살았으며,
지금은 가우디 기념 박물관으로 쓰이는 건물 도 있다.
가우디가 사용했던 침대, 책상 등 유품과 데드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한 독특한 가구들이 감상의 포인트다.
공원 입장은 무료지만 이 건물만큼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시간상 구경하지 못했음)

구엘공원은 성가족성당(파밀리아 성당)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방문해 봐야 하는 곳으로 손꼽힌다..
이준성 현지가이드의 이어폰 설명을 들으며
공원 산책로를 따라 관광
구엘백작 별장, 가우디 침소 등 건물과 광장 둘레 담에 설치된 의자
맨 아래 그림 오른쪽 두 남녀가 좀 수상해!
아래쪽 인공산책교 아래 교각
구엘공원의 심볼 도마뱀의 위치와 실물
작은 물웅덩이와 꽃을 피운 수초
광장으로 오른는 계단
광장을 떠 받치는 기둥
광장에서 내려다 보는 입구 양쪽 조형물
그 너머로 바로셀로나 시가지가 살짝 보인다.
반대편 광장 담장 의자와 일동 인증샷
작품 구상 및 열중 중인 여행친구 강정구씨
● 람블라스 거리[Ramblas Street]
플라타너스(버즘나무) 그늘 아래 붐비는 람블라스 거리

람블라스 거리
카탈루냐광장에서 남쪽으로 항구의 포르탈 데 라 파우 광장 까지
1km에 이르는 거리에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어
도심의 삭막함을 덜어 준다.

시민들의 영원한 산책로,
서머셋 모옴'세계에서 가장 매력 있는 거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람블라스(Ramblas)'의 뜻은
아랍어로 'Raml(강바닥)'을 의미한단다.
피카소, 달리, 미로가 이 길을 자주 거닐었고,
파블라스 카잘스가 이곳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의 악보를 발견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 거리는 하루 종일 끊임없이 몰려드는 인파로 생동감이 넘쳐 난단다.
특히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곳을 거쳐 가게 된다.
람블라스 거리를 가로지르면
바르셀로나의 중심지인 카테드랄을 비롯해 중세풍의 건축물과 미술관, 박물관,
시민의 휴식처인 시우타데야 공원 등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서민적인 잡화점과 카페, 거리 예술가 등 우리가 연상하는
유럽의 거리 풍경이 그대로 펼쳐지는 곳이란다.

람블라스 거리 찾아가는 길에 만난 요상한 건물과 골목
카탈루냐광장
길 잃으면 아무나 잡고 이 사진 보이고 길을 물어라.
이어폰 안가져 온 사람 이곳으로 집합
더 붐비는 시장과 진열된 상품들
람블라스거리 인증샷
집합시간 아직 남았다. 좀 앉아 쉬자.
● 성 가족성당[Sagada Familia]
멀리서 바라보는 성 가족성당 모습

성 가족성당과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
성 가족성당도 가우디의 역작 건축의 하나다.
특히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은 가우디 건축의 백미로서
건축양식은 입체 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 딕식이다.
1882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미완성으로 공사중이다.

안토니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출생해서
1926년 6월 10일 사망했으니까 85세를 살았다.
가우디는 스페인의 건축가로 벽과 천장의 곡선미를 살리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를 사용하는 건축가였다.
미로와 같은 구엘공원, 구엘성당의 제실 등이 유명한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성 가족성당)은 그의 역작이다.

가우디는 건축가이면서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예술가이며
인생의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면서 개성 넘치는
창의적인 새로운 건축 양식을 창조한 건축가다.

최초의 작품인 가로등부터 공동 주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카사 밀라,
자연 친화적인 주택 단지 구엘 공원, 빛의 질서를 보여 준 구엘 저택,
그리고 아직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성 가족성당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우디의 대표작이 대부분 바르셀로나에 남아 있고,
지중해 서부 팔마 대성당에도 남아 있다.

가우디는 1852년 바르셀로나 남서쪽에 위치한 레우스라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가우디의 아버지는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구리 세공에 종사하였다.
가우디의 건축물에 구리와 철을 이용한 독특한 조각과 장식이 많은데,
1869년 바르셀로나에 와서 바르셀로나대학 이공학부 공부를 마친 뒤
1874년에 다시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 학교에 입학하여 건축을 공부하면서
1878년 건축사 자격증을 받아 이후부터 는 독창적인 가우디의 건축세계를 펼쳐 나갔다

가우디의 대표작품이라 할 수 있는 성 가족성당은
1883년 11월 3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1926년까지
작업이 진행되었고 지금까지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공사를 시작한 지 10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앞으로도
100년은 더 걸려야 완성할 수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가우디의 대표작으로 건축 학자들이 꽈드랏 도오르(황금의 광장)
지역에 세워진 까사 바요트를 선택하는데
가우디의 예술적인 독창성이 모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전면 외관과 조각들
후면 외관과 조각들
중간 완성 모형(왼쪽)과 2016년 완성 모형(오른쪽)
성당 내부 앞 성체
성당 천정
창문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교황 내방, 인산인해 인파
성 가족성당 건축 역사와 계획
2026년 완성계획
바로셀로나 항구 가까이 우뚝 선 콜롬버스 동상
바다, 아메리카대륙(인도로 생각)을 가리키고 있다.
중식후 바로셀로나를 떠나기 직전 찍은 것
끝(다음은 몬세라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