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편지
沙月 李盛永(2011. 3. 27)
  여기 공개하는 아버지의 편지는 지금부터 47년 전인 1964년 5월 서울에서 나와 집사람의 약혼식을 끝내고 고향에 내려가셔서 보내온 서신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1980년 아버지 65세, 어머니 61세 때 모습, 아버지는 그해 작고하셨다.

  나의 선친(善哉諱鉉玉)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16년 6월 5일(음)에 출생하여 어린 시절 가난해서 서당을 갈 수 없었다. 오전에 나무 한 짐을 얼른 해다 놓고 서당으로 달려가 학동들이 점심 먹으러 간 사이에 학동들이 쓰고 버린 신문지 위에 글을 쓰고 또 쓰고 하여 흰 종이가 까맣게 될 때까지 반복하면서 한문 글을 익혔다.

  젊은 시절 대야동, 해인동 금점(金鑛)으로 다니면서 날품을 팔다가 내가 태어나던 해(1939년, 24세) 동네 여러사람들 틈에 끼어 일본 규슈 야하다 철공소에 가서 노동으로 돈을 벌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번 돈을 땅달구(놀음)로 탕진하고 빈 손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적지만 가족 생활비를 매달(每月) 부치고 나머지를 한 푼도 허비하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와서 건넌들 열마지기 논을 샀다.

  그러는 중에도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익힌 글이 50대 이후에는 향교 대제전 집례를 맡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고, 봄이 오면 온 동네 집집이 ‘立春大吉’, ‘建陽多慶’ 글씨를 써주었고, 바위에 새긴 동갑계 금난계(金蘭契) 금석문 '金蘭臺''投竿臺' 를 직접 쓴 명필로 소문이 나 있었다.
동네 집집이 써 준 아버지 글씨
이웃마을 다래실(月谷)에 있는 金蘭臺(금난대) 글씨
1978년 무오년에 동갑네들이 금난계(金蘭契)를 결성하고 명단을 바위에 새긴 금석문.
선친의 성함(李鉉玉)과 본관(延安人)은 오른쪽에서 9번째에 있다.
선왕당(仙王堂) 개울 배장수(培正沼) 위에 있는 投竿臺(투간대) 글씨

  우리 시골에 국민학교가 생긴 것이 광복 7년전 1938년에 생겼기 때문에 이 때 22세로 학령이 지나서 학교공부를 할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한글 서신은 철자법과 표준어에 서툴러 소리 나는 대로 쓰고, 고향 방언이 주를 이룬다.
아버지 편지 원본
< 청색 글씨는 원문이고, 흑색 글씨는 한자음과 철자법 교정 및 표준말로 해역한 것이다. >
家兒答書(가아답서: 아들에게 답장)

  日前(일전)에 너의 片紙(편지) 바다보왓고, 어제 너의 片紙(편지) 바다보왓다. 그간에 몸 健康(건강)히 무사히 勤務(근무)하고 있다고 하니 반갑기 요량없다.
  부
(父)는 別故(별고) 없으며 大小諸節(대소제절)이 周 ”(주주) 平安(평안)하다 安心(안심)하여라.
  [며칠 전에 너의 편지 받아보았고, 또 어제 너의 편지 받아보았다. 그 동안 몸 건강히 무사히 근무하고 있다고 하니 반갑기 그지없다. 부는 별고 없으며 크고 작은 일들이 두루 두루 평안하다 안심하여라.]

  그러나 敦岩洞(돈암동) 妹氏宅(매씨댁)의 借用金(차용금)을 먼저 片紙(편지) 바다보고 卽時(즉시) 二十五日字(25일자)로 金泉朝興銀行便(김천조흥은행편)으로 一金(일금) 四仟五百(사천오백)원을 送付(송부)하였는데 아직 回答(회답)이 없구나. 不可不(불가불) 急錢(급전)을 변통해와 送付(송부)하였다.
  [그러나 돈암동 네 매씨댁(종헌 누나집)의 차용금을 먼저 편지 받아보고 즉시 25일자로 김천 조흥은행편으로 일금 4,500원을 송부하였는데 아직 회답이 없구나. 할 수 없이 급한 돈을 빌려와서 송부하였다.]

  그리고 歸鄕(귀향) 卽時(즉시) 安候(안후) 片紙(편지)로 敦岩洞(돈암동)과 麻浦區(마포구)와 仁川(인천)으로 片紙(편지)를 하였드니 麻浦區(마포구) 金準熙氏(김준희씨)로부터 回答(회답)과 아울러 寫眞(사진)이 同封(동봉)하여 왔드라.
  約婚寫眞
(약혼사진)과 南山公園寫眞(남산공원사진) 이 모두 잘 되었구나
  그리고 朴大尉
(박대위)와 沃川(옥천) 伊院(이원)으로는 問安片紙(문안편지)도 못하였는데 朴大尉(박대위)에게는 今日(금일) 片紙(편지)를 너와 함께 써 부친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오자 즉시 안부 편지로 돈암동(종헌 누나 댁)과 마포구(처 고모 댁)와 인천(외5촌 댁)으로 편지를 하였더니 마포구 김준희씨(처고모부)로부터 회답과 아울러 사진이 동봉하여 왔더라. 사진은 약혼사진과 남산공원사진이 모두 잘 되었구나. 그리고 박대위(처3촌))와 옥천 이원(처가)으로는 문안편지도 못하였는데 박대위에게는 오늘 편지를 너의 것과 함께 써서 부친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至今(지금)도 각금 이상하다는 이약이를 가족끼리 하고 잇다.
  새사람 말이다 約婚式
(약혼식) 껕나자마자 나를 겨더랑에 끼어안고 부축을 하며 안내를 하고 인졍이 때묻은 사람 같치 대졉을 하니 참 인졍실읍기는 할양(限量) 업겠다고 칭찬을 하는구나. 여하튼 사람이 거만하고나 정서러울것 갓드라. 다행이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가족끼리 하고 있다. 새 사람 말이다. 약혼식을 끝나자마자 너의 어머니를 겨드랑이에 껴안고 부축하며 안내를 하고, 인정이 오래된 사람같이 대접을 하니 참 인정스럽기 그지없겠다고 칭찬을 하는구나. 여하튼 사람이 그만하구나 정스러울 것 같더라. 다행이다.]

  結婚問題(결혼문제)는 相互間(상호간) 차차 隨意(수의)하여 形便(형편)대로 하겟다.
  歲內
(세내)로 해야지 부지러니 알들이 하여서 家庭債金(가정채금)도 갑고 禮費(예비)도 써도록 해야지
  [결혼문제는 상호간에 차차 의논하여 형편대로 하겠다. 연내에 해야지. 부지런히 알뜰히 하여 집의 빚도 갚고, 결혼 예식비용도 쓰도록 해야지.]

  家庭債金(가정채금)도 또 만아젔구나 石姬(석희) 入學金(입학금) 五仟(오천)원과 敦岩洞(돈암동) 送金(송금) 五仟(오천)원과 외에 肥料代(비료대) 家用金(가용금)이 約(약) 四仟(사천)원 가량 되니 秋后(추후)면 利子(이자) (합)하면 莫大(막대)한 金額(금액)이 되겠구나
  그러나 金錢
(금전)이라는 것은 效果(효과)잇게 썬다면 債金(채금)이라도 써야지
  [집의 빚도 또 많아졌구나. 석희 중학 입학금이 5천원과 돈암동 송금 5천원과 이 외에 비료대 등 집에서 쓴 돈이 약 4천원 가량 되니 가을 지나면 이지 합하면 막대한 금액이 되겠구나.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효과 있게 쓴다면 빌려서라도 써야지.]

  그리고 正永(정영)이가 約(약) 四日間(4일간) 남앗구나 六月四日(육월사일) 出發(출발)이니까. 日氣(일기)는 甚히(심히) 炎熱(염열) 한대 訓練(훈련)을 어떠케 할고.
  그리고 아직 社會
(사회)와 軍(군)의 經驗(경험)이라고는 아무것도 업고 十歲未前(십세미전)의 幼兒(유아)의 행동이니 極情(극정)이다. 너의 동창생에게 혹 부탁을 하여서 대소간의 도움이 잇도록 부탁하여라
  [그리고 정영(바로 밑 동생)이가 (집에 있을 날이) 약 4일간 남았구나. 6월 4일 군 입대 출발이니까. 날씨는 몹시 더운데 훈련을 어떻게 할고.
  그리고 아직 사회와 군의 경험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열 살도 안 되는 어린이 행동을 하니 걱정이다. 너의 동창에게 혹 부탁하여 크건 적건 도움이 있도록 부탁하여라]

  그리고 새사람에게서 서울 記念(기념) 선물이 高級(고급) 鉛筆(연필) 二打(이타)와 高級(고급) 커룡 一介(일개) 또 中學生(중학생) 노-터 二十卷(이십권)이드라
  그래서 鉛筆
(연필)과 노-터는 石姬(석희)와 福壽(복수)와 茂永(무영)이 明淑(명숙)이 各各(각각) 노누와 주고, 커룡 茂永(무영)이가 차지하여 서울 記念(기념)이라고 반겨워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새사람이 (준) 서울 기념 선물이 고급 연필 2타-스(24자루)와 고급 크레용 1통, 또 중학생 노-트 20권이더라.
  그래서 연필과 노-트는 석희(셋째 여동생)와 복수(이종4촌)와 무영이(막냇동생) 명숙이(외4촌)에게 각각 나누어 주고 크레용은 무영이가 찾이하여 서울 기념이라고 반기며 가지고 다닌다.]

  금년 麥農(맥농)은 어수 잘 지엇드니 再昨日(재작일)에 쏘낙비와 暴風(폭풍)이 부러서 전혀 업드러젓스니 失敗(실패)가 만켓구나.
  折草
(절초)는 어제사 맏친 시음이다. 날이 드워서 고만 두겟다. 마음도 쑤세하고 석희도 어제 土曜日(토요일)이라서 더러왓구나. 저의 오래비 갈 때 못 본다고 하면서. 남어지 부탁은 다음으로 밀우고 오늘은 이만 두겟다.
  [금년 보리농사는 제법 잘 지었더니 엊그제 소나기와 폭풍이 불어서 전부 쓰러졌으니 실패가 많겠구나.
  풀베기는 어제서야 마친 셈이다. 날씨가 더워서 그만 두겠다. 마음도 어수선하고 석희도 어제 토요일이라서 들어왔구나, 제 오라버니 (군대) 갈 때 못 본다고 하면서--- 나머지 부탁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이만 그치겠다.]

  學而不時習(학이불시습)이면 不亦設手(불역설수)이라는 訓句(훈구)가 잇지 안느냐 배우고 일거야 한다.
  [‘학문을 때 맞춰 익히지 않으면 다시는 손을 쓸 수가 없다' 라는 가르침의 구절이 있지 않으냐 배우고 읽어야 한다.]
五月三十日 父書(부서)
< 편지에 나오는 약혼사진과 남산공원사진 >
약혼기념 사진
남산공원 사진
(이하는 아버지의 살아계실 때 찍은 사진들을 앨범에서 찾아 올린다)
< 양평 중시조 부사공(副使公諱漬)과 2세 문창공(文昌公諱係孫)의 시제 참석>
< 1973. 4. 12. 경주여행, 계림비각 >
< 1976년 6월 5일(음) 선친 회갑연 >
< 1979년 3월 1일 용인 한국민속촌 >
내가 서울 신림동에 살 때 오셨다가 한국민속촌을 관광하면서 고향 아래마을(寒松亭: 지좌리)에서 오신 친구분들을 만났다.
< 1980년 2월 20일(음) 제주도여행, 만장굴 >
< 1980년 3월 20일(음) 어머니 회갑연 >
일동
누님1, 동생1, 아들3, 며느리2, 딸3, 사위3, 친외손자5(불참1), 친외손녀5(불참1)
형제
처남, 처제
며느리, 처생질, 딸
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