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향 사드래(沙月)
沙月 李 盛 永(2003.1.1)
< 사드래(沙月)의 내력 >
나의 고향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부항면 (釜項面) 사등리(沙等里)이다. 조선 태종 14년(서기 1414년) 전국이 8도(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나누어지면서 삼남(三南: 충청, 전라, 경상)의 지경이 된 민주지산(岷周之山: 민두름산) 삼도봉(三道峰)에서 동남쪽으로 약 8Km 거리에 있는 산촌 마을이다. 자연부락 이름으로 '사드래'이고, 한자어로 '사월(沙月)'이다.

'사드래''사달'이 보통 말하기 편하도록 변한 말이고, '사달'을 한역(漢譯)하면 '사월(沙月)'이다. 그런데 '사드래''사월' 중 어느 이름이 먼저 생겼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어른들이 전하는 마을 이름의 내력으로 보면 한자어의 사월(沙月)이 먼저 생긴 것 같다.

시루봉 산불감시초소에서 내려다 본 사드래 마을
왼쪽이 윗사드레, 오른쪽이 아랫사드레.
가운데 보이는 산이 활인산(活人山)이고 그 왼쪽에 갈계재, 오른쪽이 말미재다.
활인산 2002년 태풍루사가 할킨 자국이 두 개 보인다. 그 아래 기슭에 옛날에 산제당(山祭堂)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앞 멀리 바라보이는 시루봉 (甑峰: 해발 631m))에서 벋어 내린 앞산에 올라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삼도봉에서 발원 한 부항천 냇물을 가운데로 하여 양 쪽에 옷섶처럼 불은 계단식 논밭들이 마치 서산에 떨어지는 눈썹달처럼 갸름하게 생겼다. 그런데 그 눈썹달이 마을 쪽에서 보면 상현(上弦)이 아니라 하현(下弦)이다. 즉 초생달 같이 위로 휜 달이 아니라 그믐달 같이 아래로 휜 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하현 눈썹달 같은 마을의 이름을 '斜月(사월)'이라 했다고 한다. '기울어진 달'즉 보름을 지나 그믐으로 다가가면서 만월(滿月)에서 기울어 지는 달이라는 뜻이다.
내고향 사월에 뜬 2009년 음력 11월 25일, 아래로 휜 하현 달
그런데 마을 이름에 '斜(사)'자를 쓴다면 '마을이 기울어진다 즉 마을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망한다'는 뜻이 되니 한문의 뜻에 민감했던 식자들이 그대로 받아 들일 리가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斜(사)'자를 '모래'라는 뜻의 '沙(사)'자로 바꾸어 '沙月(사월)'이라 했다는 것이다.

한 없이 넓게 펼쳐진 모래펄에 휘영청 밝은 달이 비치니 달빛이 반사하여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 반짝 빛나면서 황홀하고, 낭만이 넘쳐흐르는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아주 아름다운 이름이다.

사월은 글로 쓸 데는 글자의 뜻도 좋고, 쓰기도 쉽고, 모양도 예쁘지만 말로 할 때는 좀 어색하다. 그래서 '사월'을'사달'이라 하다가 또 변하여 '사드래'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한들보, 끝들보, 건넌들보, 작은방내보, 씨목보, 방내보 등 논에 물을 대는 물 막이 보의 가장자리에나 조금씩 모래톱이 나와 있을 뿐 마을 이름에 걸 맞는 모래판은 아무데를 찾아봐도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 고향마을을 한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명사십리 모래판 보다도 더 넓은 모래펄에 휘영청 밝은 달 빛이 비치는 풍경을 마음 속에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 앞에 '沙月(사월)'이라는 두 글자를 꼭 붙이고 있다. 뭐 호(號)라고 하면 좀 쑥스럽고, 그저 '고향사랑 징표' 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 '사드래 무리'사등(沙等) >
동구밖에 자연석으로 세운 마을 표석은 앞면에 큰 글씨로 '沙等'이라 새기고, 뒷면에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마을의 내력을 새겨 놓았다.
사등리 표석 앞과 뒤
사등리 마을 내력(표석 후면)
우리마을은 1911년 10월 1일 까지는 上西面(상서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3월 15일 상서(上西)下西面(하서면)이 合倂(합병)되어 釜項面(부항면) 沙等里(사등리)로 洞名(동명)이 改稱(개칭)되었음.
옛날부터 우리마을은 沙月(사월) 長子洞(장자동) 閒笛洞(한적동)으로 自然部落(자연부락)이 形成(형성)되어 있으나 1914년 법적 行政(행정) 里洞(리동)인 沙等里(사등리)로 統合(통합)되었음.
마을 앞은 鏡湖水(경호수)가 흐르며 後山(후산)은 半月形(반월형)을 이루었고 옛부터 儒敎的(유교적)인 班村(반촌)으로 賢士(현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959년 12월 30일 면사무소가 移轉(이전)되었고, 그 後(후) 면의 機關(기관)이 우리마을로 유치되었으며 面(면) 中心(중심)마을로서 全(전) 住民(주민)이 和合(화합)하여 발전을 계속하고 있음.
1967년 12월 建立(건립)
지금은 작고하고 안계시지만 선친과 동년배이면서 생일이 늦어서 선친을 형님이라 부르던 현재(鉉宰) 아저씨가 이따금 우리 집에 오시면 "저 숲 밖에 세워 논 마을 표석을 부수어 버리고 우리 마을 이름 '사월'을 찾아야 해"하고 열변을 토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지만 그 때 마다 속으로 "마을 이름이 사등이면 어떻고, 사월이면 어때, 마을 이름을 고치면 호적(戶籍), 지적(地籍), 주민등록(住民登錄), 그 외에도 많은 행정서류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 손실이 얼마야?'하고 세상 좀 안다는 식으로 귓전으로 흘려버렸었다.

위 마을 표석 뒷면에 새겨 논 마을 내력에서 보는 것처럼 1911년 10월 1일부로 행정구역이 통폐합이 되면서 상, 하면이 합쳐서 부항면(釜項面)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신옥, 유촌, 희곡, 지좌리가 하면(下面)이었고, 사등, 두산, 안간, 어전, 월곡, 하대, 해인, 파천, 대야가 상면(上面)이었기 때문에 통합된 후에도 사람들은 이렇게 나누어 '웃면', '아랫면'이라 불렀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합쳐 놓아도 아래, 윗면은 거리감이 없어지지 않고 융화가 안 돼더니 결국 1961년 4.19 직후에는 면사무소 이전 문제를 놓고 상,하면이 이른바 '죽창전쟁'이 벌어졌었다. 대나무 창으로 무장한 양 쪽 주민들이 몇 날 몇 일 간 전쟁을 벌려서 경찰의 치안 능력으로 안돼서 당시 계엄령 치하에서 대구에서 계엄군이 출동하고서야 겨우 진압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었다. 계엄군이 압수한 죽창을 논바닥에 쌓아 놓고 기름을 뿌려 태우느라고 밤 새도록 대나무 마디 튀는 소리가 또한 전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말이 죽창전쟁이지 사실은 윗면의 지서(사등에 있었음)와 아래면의 파견소(유촌에 있었음)의 무기고에 6.25 전후하여 공비토벌용으로 확보된 무기들이 양측의 손에 넘어가서 원시의 죽창과 현대의 소총과 기관총이 혼용된 복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인명피해는 없었다는 것이 큰 다행이었다. 이러한 혼란의 동기와 과정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쓰기로 하고 지금은 마을 이름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고 오늘은 마을 이름에 관한 이야기만 쓰기로 한다.

현재(鉉宰) 아저씨가 흥분하며 우리마을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내막은 이러하다. 우리 사드래 즉 사월(沙月)에는 200년 이상 연안이씨(부사공파, 직강공 후손)가 집성촌을 이루며 중앙 관직에도 진출하였고, 서당을 세워 일찍부터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쳐 근동에서는 따를 수 없는 양반 집안으로 자타가 인정하면서 그 명성의 위세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주눅 들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일제 강점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사드레 연안이씨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인근의 단산(丹山: 갯절)의 김OO이 신식 교육을 받고, 일본의 식민정치에 협조적인 것이 인정되어 통합 후 초대부항면장으로 임명되면서 노골적인 자기 감정을 들어냈다는 것이다.

그 첫번째 일이 행정구역 리(里) 단위의 명칭을 정하는 것이었는데 몇 개 자연 부락을 묶어서 리(里)가 되는데 예외는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몇 개 마을 중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마을 이름으로 리(里)의 명칭을 정했다 한다.

상면의 경우 다래실(달의실,月谷),학동, 몽고동을 묶어서 월곡리(月谷里), 어전(魚田)과 가목(釜項)을 묶어서 어전리(魚田里: 가목이 더 크지만 한자어 釜項이 면의 명칭이 됨), 조산동(造山洞), 뱃들(丹坪), 아래두대(下垈)를 묶어서 하대리(下垈里), 윗두대, 해인동(海印洞)을 묶어서 해인리(海印里), 갈불, 숲실, 대야동(大也洞)을 묶어서 대야리(大也里), 대평동(大平洞), 안간(安間)을 묶어서 안간리(安間里)라 하였다. 그러나 봄내(春川), 까마골을 묶어서 파천리(把川里), 갈계와 말미를 묶어서 두산리(斗山里)라 하였고, 갯절(丹山), 장자동(長子洞), 한적동(閒笛洞), 사드래(沙月)을 묶어서 사등리(沙等里)라 하였다.

예외가 된 3개 리 중에서 춘천(春川)은 강원도 도청소재지 춘천과 동일하므로 혼돈을 피한다는 이유가 있었고, 갈계와 말미는 한자어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서 작명한 것인데 사드래(沙月)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뿐만 아니라 사등(沙等)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이 곳 사람들에게 더 분통 터지게 한다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하면 '모래 무리'로 모래판을 뜻하지만 '사드레 무리들', '사드레 놈들', '사드레 떼거지들'등으로 해석 할 수 있으니 이는 완전히 사드래 사람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여 사드래를 비하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를 듯도 하고, 어쩌면 과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행정구역 면(面)과 리(里)의 이름을 짓는 데 아주 감탄 할 일과 통탄할 일이 함께 있다.면(面)과 리(里)의 이름을 작명하면서 우리나라 각 지방의 지리와 역사 종합서라고 할 수 있는 고전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아주 꿰뚫고 있다는 것이 감탄할 일이고, 마을 이름 중에 가장 꺼리는 옛날 부곡(部曲) 이름을 찾아내서 리(里)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우선 면 이름에서 지례면(知禮面)은 지례현(知禮縣)에서 따왔고, 구성면(龜城面)은 구산(龜山)에 있던 성(城) 구성(龜城)을 취했고, 대덕면(大德面)은 경북, 경남, 전북 삼도 지경 거창삼도봉이 있는 대덕산(大德山)에서 따왔고, 부항면(釜項面)은 가목재(가마목재의 준말, 동쪽 가장 가까운 자연부락 가목에서 따 온 이름)의 한자어 부항령(釜項嶺)에서 취하였다. 이 모두 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이름들이다.

리(里) 이름도 그렇다. 월곡리(月谷里)는 '월이곡부곡(月伊谷部曲) 현서(縣西) 삼십리(三十里)'에서 뜻이 없는 이(伊)자와 부락을 말하는 부곡(部曲)은 빼고 월곡(月谷) 두 자를 취하였고, 사등리(沙等里)는 '사등량부곡(沙等良部曲) 현서(縣西) 이십오리(二十五里)'에서 량(良)자와 부곡(部曲)을 빼고 사등(沙等) 두 자를 취한 것이다. 이 두 마을 이름은 동국여지승람에 올라 있는 오직 둘 뿐인 마을 이름이다. 부곡(部曲)은 신라 때부터 고려 때까지 있었던 천민집단부락이었다. 특히 고려 때는 범죄자나 행실이 천박한 사람들을 변경지역에 이주시켜 통제하기 위한 특수 행정구역을 말한다.

전술한 바와 같아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연안이씨 집성촌이 되면서 당당한 반촌으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마을인데 먼 옛날 천민부락일 때의 이름을 찾자내서 붙였으니 이 이름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례현편
古跡(고적)난에 月伊谷部曲(월이곡부곡)과 함께 沙等良部曲(사등량부곡)이 있어 '沙等'이란 낱말이 수록되어 있다.
구성의 하원리(下院里)가 잃었던 옛 이름 상좌원리(上佐院里)를 다시 찾은 예는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 와서 행정구역의 이름을 바꾸어 여러 가지 행적적 부담과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방안은 행정구역 이름 '사등리(沙等里)'는 그대로 사용하되 숲에 세워 놓은 '沙等'이라고 새겨진 표석은 사등리가 시작되는 초입 즉 갯절 입구로 옮기고, 丹山洞(갯절), 長子洞, 閒笛洞의 마을 표지판 처럼 동구 밖 숲에나 마을 입구로 더 올라 와서 '沙月(사드래)'라는 자연부락 마을 표석(表石)이나 표지판(標識板)을 새로 세우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만 같다.

< 우리집은 언제부터 사드래에서 살았나? >
지금은 주민의 거주지에 관한 사항이 많은 국가 정책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주민등록제도에 의하여 거주지에 관한 사항이 확실히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거주지에 관 한 파악도 아니하였거니와 한 씨족의 제반사항이 기록되는 족보에도 거주지 기록은 없다. 족보를 비롯한 보학 서적, 등과(登科) 방목(榜目), 현판(懸板), 기타 문서에 이름 밑에 'OO人'이라 한 것은 그 사람의 고향이나 거주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관(本貫: 貫鄕)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李OO 延安人'이라 말하는 것은 '연안에 사는 李OO' 또는 '연안이 고향인 李OO'이란 뜻이 아니라 '延安李氏 OO'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별도로 전해져 오는 기록이 없으면 족보 기록으로도 선조들이 어디에 살았는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족보에는 묘소(墓所)의 위치가 철저히 기록되어 왔기 때문에 묘소의 위치를 기초로 하여 선조들이 어디에서 살았는지 추정 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고관을 지냈거나 부유한 집안은 반드시 살던 곳 인근에다 유택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비를 들여서라도 먼 지역, 경우에 따라서는 전국을 대상으로 풍수적인 명당을 찾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묘소의 위치가 반드시 거주지였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고, 연고지를 선호했던 그 때는 대부분 살던 그 이웃 산야에 묻히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묘의 위치를 가지고 살 던 곳을 추정해도 될 것이다.

                    직계 조고비(祖考 女比)의 묘소 위치

세(世)

호칭

조고비 휘

묘소위치

비고

1세

副使公(부사공)

(지)

全義李氏

경기 양평군 옥천면 신애리

합분

壇所

2세

文昌公(문창공)

係孫(계손)

慶州李氏

경기 양평군 옥천면 신애리

합분

壇所

3세

監正公(감정공)

(양)

永川崔氏

경기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향교후

경기 양평군 옥천면 신애리

墓所

4세

甫州公(보주공)

伯謙(백겸)

溫陽方氏

경기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사나사곡

상하분

墓所

5세

延城君(연성군)

末丁(말정)

谷山韓氏

경북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상하분

墓所

6세

直講公(직강공)

淑璜(숙황)

錦山金氏

경북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쌍분

墓所

7세

縣監公(현감공)

元禮(원예)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상도평

  쌍분

墓所

8세

縣監公(현감공)

 

國權(국권)

昌寧張氏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상도평

  상하분

墓所

9세

部將公(부장공)

小白(소백)

河濱李氏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상도평

  상하분

墓所

10세

通德郞公

(통덕랑공)

應慶(응경)

城山李氏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상도평

  상하분

墓所

11세

參奉公(참봉공)

成材(성재)

瑞山鄭氏

경남 거창군 주상면 거기리 고대

합분

墓所

12세

眉叔公(미숙공)

壽崗(수강)

南平文氏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 죽동

쌍분

墓所

13세

君重公(군중공)

安亨(안형)

安東金氏

江陽李氏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 죽동

경북 김천시 부항면 파천리 구목동

乾位 階下

墓所

墓所

14세

汝貞公(여정공)

道元(도원)

瑞山鄭氏

경북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절터골 상

경북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청국날

墓所

墓所

15세

學魯公(학노공)

寅述(인술)

固城李氏

文化柳氏

淸州慶氏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 죽동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 암마 상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 암마 하

경북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한적동

墓所

墓所

墓所

墓所

16세

允直公(윤직공)

宜人(의인)

金海金氏

경북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뒷골

경북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청국날

墓所

墓所

17세

魯瑞公(노서공)

相奎(상규)

豊德金氏

慶州金氏

경북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 장터골 상

경북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뒷골

경북 김천시 부항면 하대리 석문걸 상

墓所

墓所

墓所

18세

仁叟公(인수공)

東求(동구)

碧珍李氏

경북 김천시 부항면 하대리 뱃들

  합분

墓所

19세

殷重公(은중공)

懃性(근성)

晉州河氏

경북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 장터골 하

  합분

墓所

20세

明淑公(명숙공)

義均(의균)

碧珍李氏

경북 김천시 부항면 하대리 석문걸 하

경북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선왕당 중

墓所

21세

善哉公(선재공)

鉉玉(현옥)

靈山辛氏

경북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선왕당 하

  쌍분

墓所

1세 부사공과 2세 문창공은 묘소가 실전되어 단소를 설치하였으나 3세 감정공내외와 4세 보주공 내외의 묘소가 양평 옥천면에 있는 것을 보면 부사공과 문창공의 묘소도 이 곳이 연고지가 아닌가 싶다.

특히 보주공의 묘소가 있는 옥천면 용천리 사나사 계곡 일대가 후에 충간공(忠簡公 諱 崇元)의 사패지(賜牌地)가 된 것을 보면 이 지역은 고려조 때부터 우리 집안과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5세 연성군과 6세 직강공의 묘소가 경북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에 있고 감천 건너편이 지품(知品)인데 '公以學行 累薦爲小尹 不仕退去知禮知品'(공이학행 누천위소윤 불사퇴거지례지품: 공은 학행 때문에 여러 번 예빈시 소윤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고 지례 지품촌으로 물러났다)는 족보 기록으로 보아 실제로 이 곳에 낙향하여 산 것이 확실하다.

또 이어서 '又移居居昌茅谷 庭植數梅優有盤石 使五子肄業其上 世稱五子巖'(우이거거창모곡 정식수매 우유반석 사오자 이업기상 세칭오자암: 또 거창 모곡동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정원에 여러 그루 매화를 심고 반석에서 소요하면서 다섯 아들로 하여금 그 위에서 학업을 익혀 출세하니 사람들이 오자암이라 불렀다) 이란 기록으로 보아 거창으로 이사하였는데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큰 수해 때문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상원 앞의 감천이 마을 앞 방초정을 스쳐 흐르고 지품 앞 들이 넓었다는데 지금은 감천이 지품 마을 앞을 스쳐 흐르면서 상원 앞들이 넓어졌고 지품 앞에는 들이 거의 없다 싶이 한데서 추정할 수 있다.

연성군께서 왜 이 곳 경상도로 낙향하였을까? 하는 문제인데 이 역시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연성군의 장인 평절공(平節公) 한옹(韓雍)이 조선 초대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것에서 그 이유를 찾는 사람도 있다.

또 하나는 거창 모곡동으로 이사하여 거기서 '오자암'의 전설이 생길 정도로 자식교육에 성공하였는데 왜 이 곳으로 돌아 와 묻혔는가? 하는 문제다.

아마 이 곳에 명당의 묘 터가 있어서 졸한 후에 모셨거나 노후에 이 곳 옛집에 와 살다가 졸하여 묻힌 것일 것이다. 아마 후자가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장자 직강공(直講公 휘 淑璜)이 세종23년(1441)에 사마시(司馬試)에 일찍 등과 해 놓고도 문과에는 세조14년(1468)에야 뒤늦게 등과 하여 관직(용궁현감)에 늦게 나간 것이나, 일찍이 관직(성균관 직강)을 버리고 이 곳(지례현)에 물러나 살면서 지례향교 중건 기문을 쓴 것을 보면 장자로서 연로한 부친을 모시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거창 모곡동에서는 7세부터 11세까지 오랫동안 살았는데 여기도 직강공의 5자 중 장자가 고택을 지킨 것 같다. 장자 현감공(휘 元禮)은 개령현감을 지내면서 진주 촉석루 금난계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일부 내직에 있는 사람과 영남 일원의 문인들이 자주 만나 교유하면서 풍월에 심취했던 것 같다.

12세부터 15세까지는 다시 김천쪽으로 넘어와 지금의 대덕면 대리 죽동에 살았는데 이사를 하게 된 동기는 잘 모르겠다. 일설에는 청주에서 이인좌가 모반 했을 때 거창에서도 정희량이 호응하여 민란이 일어나자 이를 피하기 위하여 이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 곳에는 12세 수강(壽崗) 내외, 13세 안형(安亨) 내외, 15세 인술(寅述)과 고성이씨, 문화유씨의 묘소가 있다.

대덕면 대리 죽동에서 부항면 사월로 이사하였는데 15세 학노공(휘 寅述)은 조졸하여 죽동에 묘소가 있는 반면 14세 여정공(휘 道元)은 셋째 며느리(인술의 三配 청주경씨), 손자 16세 윤직공(휘 宜人) 내외와 함께 사월로 이사 한 것이다.

죽동에서 사월로 이사 한 시기를 추정해 보기 위하여 이를 전후한 시기의 생, 졸 연도와 묘의 위치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사월(沙月)로 이사한 선조(14세, 15세, 16세)의 생졸년(生卒年)

왕조

14세 도원(道元)

15세 인술(寅述)

16세 의인(宜人)

道元

瑞山鄭

寅述

固城李

文化柳

淸州慶

宜人

金海金

영조 9년

癸丑 1733

(生)

생년

미상

 

 

 

 

 

 

영조 31년

 乙亥 1755

 

 

(生)

생년

미상

생년

미상

생년

미상

 

 

정조 2년

 戊戌 1778

 

 

 

 

 

 

(生)

생년

미상

정조 23년 己未 1799

 

 

(卒)

:竹洞

 

 

 

 

 

순조 1년 辛酉 1801

 

 

 

(卒)

:竹洞

졸년미상

:竹洞

 

 

 

 

순조 7년 丁卯 1807

(生)

:沙月

(丁卯譜)

(生)

 

 

순조 9년 己巳 18 09

(卒)

:沙月

 

 

 

 

졸년:미상

:沙月

 

 

순조18년 戊寅 1818

 

 

 

 

 

 

(卒)

:沙月

 

순조 33년 癸巳 1833

 

 

 

 

 

 

 

(卒)

:沙月


위 표에서 보면 대덕면 대리 죽동에서 부항면 사등리 사월로 이사한 정확한 시기는 15세 고성이씨가 죽동에서 졸 한 순조1년 신유(서기1801년) 이후 14세 서산정씨 의 묘가 '沙月左麓'(사월좌록)으로 기록된 족보 정묘보(丁卯譜)의 초간의 해 인 순조7년 정묘년(서기1807년) 사이가 되는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정확한 이사 연도는 여러 가지 부정확한 요소가 있지만 굳이 추정 해 본다면 고성이씨 졸하고(서기1801년) 삼년상(서기1804년 9월)을 치른 후로 보아야 하고, 또 당시 족보를 발간 하는데 2년은 걸렸을 것으로 보아 丁卯譜 족보 초간(서기1807년 秋) 보다 2년 전(서기1805년)에 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사연도는 순조 4년(서기1804년) 9월 에서 순조 5년(서기 1805년) 사이로 추정된다. 확실한 것은 더 자료를 찾고, 연구하여야겠다.

이렇게 우리 집안이 사드래로 이사 한 것을 1805년으로 볼 때 지금으로부터 198년이다. 우리 고향 사월이 우리 집안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년에 가까운 긴 세월이다. 선조들의 뼈가 이 곳에 묻혀있고, 우리 또한 돌아갈 흙이다. 고향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가꾸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