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간 수안보 1박
沙月 李 盛 永(2015, 2, 3)
지금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3매(妹) 석희 딸 김나정이 수안보 서울시공무원 연수원에 예약을 했다며 1월 말일에 동기간들이 1박2일로 수안보에 가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시골집에 있어서 대구 남실이 내외와 김천에서 만나 함께 가고, 서울서는 진화네, 철호네가 나정이네 차로 함께 오고, 준화네는 인근 아파트 재개발 결정으로 모처럼 경기를 만나 이번에 빠지기로 했다며 오지 않았다.

공무원 연수원도 일반 콘도와 다를바가 없어 저녁먹고 1시간 예약됐다는 노래방에 30분이 지난 시간에 간 것 외에는 대한민국 국민게임이 된 고스톱으로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은 아침 먹고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사지(정식명칭: 충주미륵대원지)를 구경하고, 제천시 한수면 덕주사 구경을 한 후 덕주사 입구 음식점촌에서 두부전골로 점심을 먹고, 송계계곡을 거쳐 괴산IC로 중부내륙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남실이네는 대구로, 나머지는 서을로 올라왔다.

몇 컷 찍은 사진과 이곳이 마이태자, 덕주공주 이야기가 얽힌 곳이기에 그들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로 앨범을 꾸몄다.
◆ 미륵대원지
중주 미륵리 석불 입상과 설명
일동 증명사진
진화 아바이가 몸이 안좋아 내외는 차에서 쉬려고 내려가서 빠졌다.
5층 석탑과 석등
5층석탑과 설명
석등과 설명
석등 구멍을 통해 본 미륵불 얼굴 모습
사각석등과 설명
비석 귀부(龜部)의 뒤와 옆모습과 설명
온달장군 공깃돌 진짜와 가짜
미륵사지에서 바라보는 월악산
◆ 하덕주사
덕주사(하) 전경과 덕주사 연혁 설명판
관음전(觀音殿)
석불입상
애기부처
월악산 영봉 이정표
덕주사 남근석(男根石) 3개와 유래 설명문
월악산이 여인의 얼굴로 보이는 곳-월악도토리묵밥집
충주시 살미면 신매리
이곳 옥상에서 바라보는 월악산 정상
월악산 정상을 여인의 얼굴로 설명한 간판
점심 먹은 덕주사 식당촌 두부전골이 맛있는 집
식당촌에서 바라보는 월악산 정상
황악산(위)과 연안이씨 부호군공 (巖)의 묘소가 있는곳(아래)
나무들 때문에 여기서 묘는 보이지 않는다.
충주호 수면에 솟아오른 모래톱 섬
지금이 갈수기인가 보다.
◆ 마이태자와 덕주공주 이야기
○대중가요 [월악산]
<이종학 작사, 백봉 작곡, 주현미 노래>
1. 월악산 난간머리 희미- 한 저- 달아
2. 금강산 천리먼길 흘러가는 저구름아

천년사직 한이서린 일천삼백리 너는 아느냐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많은사연 너는 아느냐

아바마마 그리움을 마애불에 심어놓고 떠나신 우리님을
하늘- 도 부끄러워 짚신- 에 삿갓쓰고 걸어온 하늘재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좀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충주설화] 이야기 내용
수안보면 최동단에 미륵리가 있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신라의 부활을 꿈꾸며 양병을 위한 장소로 오대산을 정하였다. 마의태자가 오대산으로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날 밤 왕자의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한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건조하고,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라. 포덕함을 잊지 말아라.”고 현몽하였다.

같은 시각에 덕주공주도 같은 현몽을 받았다. 두 남매는 고개를 넘어 왕자(마의태자)는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곳에 석불입상(미륵불)을 세우고, 덕주공주는 이와 마주 보이는 월악산 영봉 밑에 마애불상을 조각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마의태자오대산으로 떠났고, 덕주공주는 이곳에 머물다 입적했다.

그 후 미륵사 미륵불상덕주사 마애불상이 북두칠성의 빛을 받아 서로 상서로운 기운이 상통한다고 하며, 그를 통해 나라의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다고 한다.

*(補) 오대산에는 마의태자 관련 유적이나 흔적이 없고, 홍천의 공작산 인근의 지명은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관련된 곳이 많다 . 마의태자금강산으로 가던중 머물다 간곳이 공작산이다. 화촌면 군업리(君業里)와 동면 덕치리(德峙里)의 지명은 당시 공작산 인근이 마의태자의 지배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인제군 상남면에서는 매년 경순왕과 함께 마의태자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있다.

금강산 비로봉은 해발 1천638m로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인근에는 장안사, 명경대, 표훈사, 정양사, 마의태자묘 등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신라시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는 국운이 쇠퇴하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이를 치욕으로 생각하여 멀리 금강산까지 와서 숨어살다가 재기에 실패하여,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내다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태자가 죽자 태자의 역시 옆에서 함께 순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용마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용마바위는 높이 58m의 거대한 바위로 말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용마바위의 왼쪽 앞에 있는 비석에는 '신라마의태자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무덤의 크기는 둘레 10m, 높이 1.5m이고 무덤의 구조는 돌로 2층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들었다.
금강산 비로봉 북록에 있다는 마의태자묘 위치
鄭亢敎 저, 梨花文化社 발행「栗谷先生의 詩文學」에 게재된 금강산 안내도
이 이야기들 중의 마의태자묘를 비롯하여 장안사, 명경대, 표훈사, 정양사 등이 표기되어 있다.
마의태자가 조성했다는 미륵불
덕주공주가 조성했다는 마애불
○이광수 소설[마의태자] 이야기 줄거리
신라 서울에서 백 리 정도 떨어진 개목이라는 곳에 사는 미륵은 애꾸눈이지만 그 태도와 기상만큼은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 칠월 초여드렛날, 국상을 알리는 소리가 신라의 서울에 울려 퍼졌을 때 미륵은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출생을 듣게 되었다.

이 애꾸눈의 미륵이 바로 승하하신 경문대왕의 아드님인 용덕 아기였다. 용덕 아기의 어머니이자 상감님의 귀애를 받던 설부인은 그녀를 질투한 영화, 정화 두 왕후의 음모에 의해 결국 목숨을 잃었고, 용덕 아기만은 간신히 유모의 손에 의해 살아날 수 있었다. 어머니로 알고 있던 유모에게서 이런 모든 사실을 듣게된 미륵은 복수할 것을 결심하고 집을 떠났다.

미륵이 천신만고로 서울을 빠져 나와 숲을 헤메고 있을 때, 늙은 스님 한 분이 미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으니 그가 곧 세달사 허담스님이었다. 스님은 미륵을 절로 데려가 자신의 일을 돕도록 하고 미륵선종이라 부르게 하였다.
세달사에는 선종과 같은 또래의 소허란 아이가 있었는데, 워낙 말수가 적어 선종과는 몇 해를 같이 보냈어도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하루는 소허가 밤마다 어디론가 나가는 것을 알고 그 뒤를 밟으니 폭포수 아래에서 백의국선이라는 이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소허의 비범함도 다른 이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신라 조정에서는 헌강대왕이 승하하시고 만공주가 즉위하였으나 민생은 살피지 아니하고 밤마다 젊은이들만 맞아들여 또다시 서울 장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와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는 소리가 백성들 사이에서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하자 소허는 절을 떠나 자취를 감춰 버렸다. 소허가 없어진 뒤에 선종의 마음에는 큰 괴로움이 생겼다. '고놈이 마침내 녹록한 놈이 아니로구나' 선종소허가 도리어 자기보다 뜻이 큰 듯함을 깨달았다.
선종의 나이 벌써 삼십이 다 되었다. 결국 선종은 절을 떠나 기훤의 휘하에서 중의 이름인 선종을 버리고 궁예란 이름으로 지냈다. 기훤북원 대장군 양길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죽고, 궁예양길의 딸 난영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나 양길의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궁예는 날이 갈수록 그 이름을 떨치게 되니 양길의 명성보다도 더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소허견훤이란 이름으로 후백제를 세웠다. 궁예도 점차 영토를 넓혀 갔고 그를 따라온 난영을 아내로 맞아 자신은 왕으로, 난영은 왕후로 천하의 절반을 호령하며 새 서울을 이룩하였다.
"이로부터는 신라와 후백제를 합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그런 뒤에는 당나라를 들이치어 당나라 황제로 하여금 싯내벌에 조공을 오게 하리라. 오, 그러리라." 궁예는 그 인덕이 백성들 사이에 자자하였고, 새 서울의 도성 안은 꽃이 만발하여 어느 것 하나 태평 기상이 아님이 없었다.
궁예에게는 유독 아끼는 신하가 있었으니 그가 왕건이었다.
"왕건아! 너는 나라의 금기둥이로다" 궁예왕왕건을 믿는 마음은 더욱 깊어 가 대소사는 물론이고 어려운 일은 모두 왕건에게 맡기게 되어 그의 신임은 높아만 갔고, 모든 일은 왕건의 손을 거치게 되었다.

이때에 신라는 겨우 명맥만 보전할 뿐이요, 견훤은 곰나루(공주) 이남에 박혀 감히 궁예를 건드리지 못하였다. 이렇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라의 조정은 궁예견훤의 비위를 맞추기에만 급급하였는데 신라의 경명왕에게 옳은 말을 올리는 이들은 셋뿐이었다. 그 중 하나가 장차 마의태자가 될 시중 효종의 손자 되는 김충이었다. 김충이 조정에 바른 소리만 올리니 그를 좋게 보는 이가 없었다.

날이 가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궁예는 정사에 뜻이 없을뿐더러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때문에 궁예가 반은 미치었다는 풍설까지 돌아다녔으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명성이 높아지는 이는 왕건이었다. "궁예왕은 이름뿐이지 실상은 왕건이가 왕이라는 걸"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말들이 퍼지게 되었다. 궁예는 자신이 노쇠해지는 것을 탓하다 천 일을 숫처녀와 함께 하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 뒤부터 천일 동안 처녀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 후 궁예의 몸은 더욱 쇠약해지고, 그로 인해 왕후는 왕을 원망하고 슬퍼하다가 결국 왕건에게 몸을 허락하게 되었다.

하루는 궁예가 한밤중에 왕후의 침실을 찾았더니 왕후왕건이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다음날 궁예는 왕후를 칼로 내리치고 두 왕자도 함께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 바로 그때 왕건이 군사들을 이끌고 궁예를 멸하기 위해 만세전을 향하여 물밀듯이 들어와 옥새를 빼앗고 새로운 왕이 되어 고려를 세우니 궁예는 달아나다 결국 스스로 자진하였다.
신라 조정은 이로 인해 백제를 더욱 배척하고 고려와 화친하는 정책을 세워 고려 서울 송도와 신라 서울 사이에는 빈번히 사신이 내왕하였다. 이것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억울해 하는 이는 오직 김충(후에 마의태자)과 시중 유렴뿐으로 왕에게 백제와 고려를 칠 것을 호소하였으나 누구도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사월 팔일, 신라의 왕과 귀족들이 불국사에 모였다. 이날 법당 안에는 선남선녀들이 가득하였으니 그 속에는 김충과 시종 유렴의 딸 계영도 있었다. 뛰어난 미모의 계영에게 김성의 아들 김술이 말을 붙이다 망신을 당해 계영에게 칼을 빼어 들었다. 하지만 김충의 도움으로 계영은 무사할 수 있었으니 이날 이후 김술은 장안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김술김충에게 앙갚음을 하리라 다짐하였고, 그날 이후 김충계영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달리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김성은 그의 아들 김술의 억울함을 갚기 위해유렴김충의 아버지 김부(후에 경순왕)를 잡아 가두고 이들이 아직도 견훤의 편을 들고 있다는 전갈을 왕건에게 보내 화를 입게 할 음모를 꾸몄다. 마침 이 전갈을 견훤이 중간에서 가로채 살펴보고는 신라를 치기로 결심하였다. 포석정에서 큰 잔치가 열릴 때를 기회 삼아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을 장악하였다.

결국 신라왕(景哀王)왕후견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새로운 왕으로 김충의 아버지 김부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경순왕(敬順王)이었다. 김충태자가 되었고 계영은 태자비가 되었다.
신라의 조정은 고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보일 것인가 고민을 하였지만 군신들은 서로 아무 말도 아니하고 눈치만 보았다. 이때 왕건이 신라왕을 만나기를 청하였고, 왕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유렴태자는 눈물이 흐름을 금치 못하였으나 왕건의 행차는 풍악과 환영 속에 유유히 신라 서울에 당도하였다.

왕건이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와 함께 왔으니 이것은 태자 김충의 마음을 고려로 돌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태자낙랑공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오히려 왕(경순왕)낙랑공주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왕(경순왕)이 그러면 그럴수록 태자는 괴로운 마음에 자신을 실성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했다. 낙랑공주는 그러한 태자에게 마음이 이끌렸으나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왕건을 따라 고려로 돌아갔다.

이때 후백제에서는 견훤의 아들 신검견훤을 내쫓고 자신이 왕으로 올랐으나 왕건의 군사에게 패하여 후백제는 고려의 손에 넘어갔다. 견훤은 스스로 왕건의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고려왕(왕건)은 신라에게 항복하기를 바란다는 기별을 보냈다. 왕(경순왕)은 쪼들리고 힘없는 나라를 맡아 가지느니 낙랑공주와 함께 살 것을 생각하고는 결국 항복하였다. "천년 종사가 오늘에 망하는가" 태자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는 것을 보고 대궐 안은 온통 곡성으로 진동하였으며 온 백성이 슬퍼하였다.

태자는 어머니 되는 왕후태자비를 이끌고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대궐을 빠져 나왔다. 모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누더기를 입고 동냥을 하면서 북으로 북으로 정처 없이 향하였다. 고려왕(왕건)이 사방으로 태자 간 곳을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고, 백성이 모이면 태자의 이름으로 고려에게 반항하였으니 고려 군사는 이십만 호나 되는 경주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이리하여 천년 신라의 옛터는 옛 생각을 할 물건조차 남기지 않고 없어져 버렸다.

여전히 태자 간 곳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5년이 지나고 고려왕 왕건낙랑공주와 함께 금강산을 찾았을 때였다. 표훈사에 머물며 노승과 이야기를 하던 끝에 돈도암에 사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베옷을 입고는 풀뿌리와 나무뿌리를 캐어 먹으며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건과 낙랑공주는 적잖이 놀랐다. 낙랑공주는 의심을 참지 못하고 돈도암을 찾았으니 과연 그곳엔 태자비와 (경순왕)왕후가 함께 살고 있었다.

마침 그날이 일년에 한 번 태자가 그 곳을 찾는 날이었기에 낙랑공주는 태자를 우러러보고 흐느껴 울기만 하였다. "열두 번이나 돌아 가시었다던 동궁마마를 오늘 뵈오니 생시인가 꿈인가 혼령이신가?" 마침내 낙랑공주는 머리를 깎고 먹물들인 옷을 입고는 그들과 살기로 결심하였다.
낙랑공주가 없어진 것을 알고 왕건은 친히 돈도암을 찾아 낙랑공주태자를 만나 보았다. 태자에게 원한을 풀 기회를 주었으나 태자는 모든 것을 단념하였다. "모든 일이 끝났도다! 원한도 다 끝났도다!" 태자는 모두를 남겨 둔 채 다시 숲 속으로 떠나갔다. 그가 어디 간 줄은 아무도 알 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