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공(白洲公) 이명한의

애국충정(愛國衷情)의 노래들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항복식이 끝나고 청군이 철군하면서 함께 불모로 대리고 간 사람은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세 왕자와 척화파로 지목된 예조판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성균관 대사성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그리고 골수 척화파로 지목된 사헌부 장령 홍익한(洪翼漢), 홍문관 교리 윤집(尹集), 부교리 오달제(吳達濟) 등 이른바 삼학사(三學士)이다. 삼학사는 심양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처형되고 세 왕자와 두 대신은 3년 동안이나 불모로 잡혀 있다가 귀국하였다.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아버지에 이어 홍문관 대제학이 되고, 또 후에 장남 청호(靑湖) 이일상(李一相) 또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이 되니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조선조 오백년 동안에 네 집안밖에 없다는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 집안이 되었다.

 

백주공은 대제학을 지낸 한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조선의 고유 문학인 시조(時調)를 많이 남긴 사람 중의 하나다. 특히 농촌의 풍경을 읊은 시조가 많고,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가 역경 속에 있을 때 지은 시조가 여러 수 있는데 그 시조 속에 백주공의 나라와 임금을 생각하는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어 여기에 옮긴다.

 

① 병자호란 후 철병하는 청군 행렬이 서대문, 벽제, 장단, 개성, 황주를 거쳐 평양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청태종은 노독도 풀 겸 평양에서 하루 쉬어 가기로 하고 대동강이 휘감고 도는 부벽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저 남쪽 성벽 난간에 보이는 누각은 무엇인고?”하고 물었다. 역관 장현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저 곳은 대동강변의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연광정(練光亭)이온데, 고려 시인이며 한림학사였던 김황원이 그 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는 아름다움을 도저히 시로 표현할 길이 없어 미완성된 시구 두 행만 남긴 채 내려오며 붓을 꺾어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올 정도로 유명합니다.”청태종이

그래? 그리도 아름다운 곳이란 말인고?”하고 다시 물었다. 또 장현이

여부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명나라 서화가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와 그 절경을 탄복하여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란 현판을 써 걸어둔 곳입니다.

 

태종은 곧 연광정으로 갈 것을 명하였고, 연광정에 도착한 태종은 대동강을 굽어보다가 심사가 꼬여 하는 말이

그래, 이게 겨우 조선국의 절경이며, 더구나‘천하제일강산’이란 말이냐? 형편없는 것들 같으니라구!”청태종의 말 속에는 향명배금(向明排金)의 당사국 조선과 명나라를 싸잡아 질투하고 얕잡아보는 뜻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어

그래, 도대체 조선국과 명나라 선비들의 안목이 겨우 저 정도의 경치에 호들갑을 떨었단 말이냐?” 흥분을 이기지 못한 청태종은

여봐라! 저기 주지번인가 뭔가 하는 자가 썼다는 현판을 당장 뜯어내려 박살 내도록 하라. 우리 청나라에는 금릉(金陵)이나 절강(浙江) 같은 명소가 있거늘 감히 이 대동강변의 하찮은 경치를 '천하제일강산'이라 떠들었다니 가소롭도다.” 병졸들이 현판을 뜯어내어 장검으로 찍으려 할 때 청태종은

여봐라! 잠깐 중지하라. 천하제일은 가당치 않으나 글씨만큼은 명필임에 틀림없으니 박살내기는 아깝다. 천하 두 글자만 잘라내고 ‘제일강산’은 남겨 그냥 걸어 두어라.

 

이러한 청태종의 행동은 세상에 제일 가는 절경은 중원 땅에 있지 보잘 것 없는 조선에 있지 않다는 자부심과 동시에 그 자신이 훌륭한 글씨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졌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러한 청태종의 행동을 한 쪽에 서서 지켜보며 그 의도를 간파한 이명한은 피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면서 즉석에서 시조 한 수를 지어 청태종에게 올렸다.

 

녹수청산(綠水靑山) 깊은 골에 청려완보(靑藜緩步) 들어가니

천봉(千峰)에 백운(白雲)이요 만학(萬壑)에 유수(流水)로다

이 땅에 경개(景槪) 좋으니 놀고 갈까 하노라        (李 明 漢)

 

푸른물 푸른산 깊은 골짜기에 청려장 지팡이 흩어 짚고,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니 /

산봉우리마다 흰 구름 걸려있고, 골짜기마다 맑은 물 흐르네/

이 땅-나의 조국-이 경치 좋으니 놀고 갔으면 좋겠네

 

조선 땅 방방곡곡을 둘러보지도 않고 한 곳을 보고 천체를 본 양 속단 해 버리는 청태종의 경솔함을 넌지시 비웃는 뜻과 아무리 중국 땅이 경치가 좋더라도 조선인은 조국 조선 땅이 아름답고 좋으니 여기서 살고 싶지 오랑케 땅에 가고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척화의지가 다분히 들어있다.

 

② 청나라에 잡혀간 불모 중에 삼학사가 일찌감치 처형을 당하고, 왕자들과 김상헌 그리고 이명한이 남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이들도 삼학사에 이어 극형에 처해 질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으나 처형은 하지 않고 2년이 지나갔다.

 

피를 말리는 지루한 시간만 흘러가고 있던 어느 날 청태종이 두 사람을 인견하고, ‘그러면 두 대감에게 묻겠소. 앞으로 우리 청나라를 조선 국왕이 약속한데로 군주국으로 인정하겠소’그러자 이명한이 나서

“폐하! 조선국은 지금까지 식언(食言)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임금이 맹약한 것을 신하로서 어찌 거역하겠읍니까?”하였고, 김상헌도 나서서 우리가 척화를 한 것은 청국이 병참제공 등 무리한 요구를 하여 양국간의 약속을 위약해서 일어난 불난이기 때문이며, 이후로도 그런 전철을 답습한다면 척화론은 재발할 것입니다. 폐하께서 앞으로 이러한 무리한 요구가 없을 것임을 약속한다면 신들도 우리 임금이 약속한 것을 지킬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여 ‘군신맹약’을 조건부로 인정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였다.

 

청태종과의 인견사실을 세 왕자에게 아뢰고 숙소로 돌아온 이명한은 슬피 우는 두견새 소리에 잠을 못 이루고 봄밤을 지세며 시조 한 수를 읊는다.

 

서산에 일몰(日沒)하니 천지가 가이 없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니 님 생각 새로왜라

두견아 너는 누를 그려 밤새도록 우나니       (李 明 漢)

 

서산에 해가 지니 하늘과 땅이 끝없이 넓고 멀구나- 임금이 계신 곳까지 도저히 갈 수 없을 만큼-

배꽃이 달빛을 받아 더욱 하야니 님 -임금- 생각이 새롭게 나는구나

두견새야 너는 누구를 그리워하여 밤새 그토록 우느냐)

 

③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간 지 3년이 되던 해에 청나라 조정에는 김상헌과 이명한의 우국충정을 가상히 여겨 환국시키자는 의론이 돌기 시작하였으나 당사자들은 세 왕자가 함께 돌아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명한은 지난 3년을 돌아보며 수심에 젖어 시조 한 수를 읊는다.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곳 날작시면

님의 집 창 밖이 석로라도 닳을로라

꿈길이 자취 없음에 그를 슬허하노라        (李 明 漢)

 

꿈에 사람이 다니는 길에도 오간 발자국이 난다면

임금이 계신 집 즉 궁궐로 가는 길이 돌길이더라도 다 닳았을 것이다

그러나 꿈에 다니는 길은 발자국이 나지 않아 밤마다 찾아간 흔적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④ 불모로 잡혀간 지 3년 되는 인조 17년 이른 봄, 드디어 두 신하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남겨두고 환국 길에 오른다. 청의 배려로 세자와 대군이 심양 밖 오십리까지 배웅하고 해어지면서 봉림대군은 간밤에 지은 시조 한 수를 김상헌에게 건네주면서 임금에게 전해 달라고 하였다.

 

앗가야 사람되랴 온 몸에 깃이 돋쳐

구만리 장천에 푸드득 솟아올라

님 계신 구중궁궐을 굽어볼까 하노라     (鳳 林 大 君)

 

원망스럽게도 사람으로 태어났느냐 차라리 날개가 돋힌 새가 되어

아득히 높은 창공으로 푸드득 날아 올라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내려다보았으면 좋으련만

 

두 왕자와 이별한 김상헌과 이명한은 사라져 가는 두 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져 서로 부축하며 울었다. 이명한은 두 왕자와의 이별을 하루 종일 가슴아파하며 객관에 들어 시조 한 수를 읊는다.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 마소

초원 장제에 해 다 저물었다

객창에 잔등 돋우고 앉아보면 알리라      (李 明 漢)

 

헤어지기 싫어 울며 붙잡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지 마오

까마득한 초원의 긴 뚝 길 멀리 해가 다 졌는데

객주집 등잔 밝히고 앉아 밤을 지새어 보면 그 이별 한 심경을 알 것이다.

 

⑤ 불모에서 풀려난 김상헌은 좌의정에 올랐고, 이명한은 도승지로서 홍문관 대제학을 겸직하다가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조판서에 오른 이명한은 청나라에서 겪은 고난의 세월을 되돌아보며 새삼스럽게 나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시조 한 수를 지었다.

 

초강(楚江) 어부들아 고기 낚아 삼지 마라

굴삼려(屈三閭) 충혼(忠魂)이 어복리(魚腹裏)에 들었으니

아무리 정확(鼎鑊)에 삶은들 익을 줄이 있으랴       (李 明 漢)

 

초나라 양자강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아 고기를 낚아서 삶지 말라

그 강에 몸을 던져 죽은 삼려대부 굴원의 충성스런 넋이 그 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니

아무리 솥가마에 넣고 삶더라도 익지(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조에서 ‘초강 어부’는 청태종, ‘굴삼려 충혼’은 불모로 잡혀갔던 사람들, ‘정확에 삶는 것’은 그간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