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星會 천안-공주-대전 선조유적 탐방
(2006. 6. 6)
대전 유성 갑동 소재 시조 중랑장공 단소
연평부원군(왼쪽)과 연양부원군(오른쪽) 영정
延   星   會
盛 永엮음
목 차
시조 중랑장공(中郞將公) 휘 무(茂)(클릭): 중랑장공(中郞將公 휘 茂)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귀(貴)(클릭):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휘 시백(時白)(클릭):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휘 時白)
사우당공(四友堂公) 휘 시담(時聃)(클릭): 사우당공(四友堂公 휘 時聃)

첨부
1.시조(始祖)와 연안(延安) 관련 자료 모음 (클릭): 첨부1. 시조(始祖)와 연안(延安) 관련 자료 모음
2.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신도비명(神道碑銘)(클릭): 첨부2.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신도비명(神道碑銘)
3. 회천(回天)의 아침(클릭): 첨부3. 회천(回天)의 아침
4. 묵재공(默齋公)의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 연구(클릭): 첨부4. 묵재공(默齋公)의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 연구
5. 회룡사(回龍寺) 번뇌(煩惱)(클릭): 첨부5. 회룡사(回龍寺) 번뇌(煩惱)
6. 남한산성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삼부자(三父子)(클릭): 첨부6. 남한산성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삼부자(三父子)
7.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의 자식 훈계(클릭): 첨부7.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의 자식 훈계
8.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신도비명(神道碑銘)(클릭): 첨부.8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신도비명(神道碑銘)
9. 박씨전(朴氏傳) 남자주인공 이시백(李時白)(클릭: 첨부9. 박씨전(朴氏傳) 남자주인공 이시백(李時白)
10. 사우당공(四友堂公) 묘갈비명(墓碣碑銘(클릭): 첨부10. 사우당공(四友堂公) 묘갈비명(墓碣碑銘)
11. 사우당공(四友堂公) 사패지(賜牌地)(클릭): 첨부11. 사우당공(四友堂公) 사패지(賜牌地)
◆ 시조(始祖) 중랑장공(中郞將公) 휘 무(茂)
  우리 연안이씨 시조는 이무(李茂)로써 연리 각파 세보(世譜)와 각종 종합 보서(譜書) 등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연안이씨 세보(世譜)에 따르면 시조 난에
  「시조는 이무(李茂)이다. 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에 공(公)은 중랑장으로써(以中郞將) 소정방을 따라(從蘇定方 名 烈) 백제를 정벌하러 왔다(伐百濟).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가지 않고(濟平不歸) 그대로 머물러(仍留不歸) 연안에 적을 두니(着籍延安) 연안이씨는(延之李氏) 이 분으로부터 시작되었다(自此始).
  또 세상에 흘러 전해오는 바로는(且流傳) 이씨의 보파(李氏譜派)가 3개가 있는데(有三而) 모두(皆) 삼별초의 난 때 모두 분실되었다(失於三別抄之難) 한다.
  그 선계(其先)는.농서이씨(농西李氏)라고 한다. 동경서악지에 따르면(按東京西岳誌) 신라 태종 7년이(新羅 太宗 七年) 즉 현경 경신년이다(卽顯慶 庚申年而), 역대 전세도로써 고찰해 보면(以歷代傳世圖攷) 곧(則) 경신년으로부터 지금 우리에 이른 것이다(自庚申至我).」
라 기록하고, 그 서문에
  「신라 태종으로부터 연안백(延安伯)에 봉해지고 신(臣)이라 부르지 않고, 국빈(國賓)으로 예우(禮遇) 하였다」는 설명도 추가되어있다.(부사공파 세보)

  이러한 세보 기록은 다른 파의 세보에도 대동소이 하다. 첨사공파 을사보(乙巳譜: 서기1605년)에는 시조에 대한 기록 난은 없고, 연안부건치연혁(延安府建置沿革) 난에 조종운(趙從耘)의 씨족원류(氏族源流)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연안이씨보첩에 이르기를 당나라 중랑장 이무가 소정방을 따라 백제평정에 나섰다가 돌려 머물러 신라에서 벼슬하였다. 그 후손은 3-4개파가 나누어졌으나 중간 세계는 서로 접속할 수가 없다」
  「延安李氏譜曰唐中郞將李茂從蘇定方平百濟回留仕新羅其後分爲三四派而中間世系皆未能接屬焉」
  (연안이씨보왈당중랑장이무종소정방평백제회류사신라기후분위삼사파이중간세계개미능접속언)


  이러한 세보의 기록들은 여러 가지 종합보서(綜合譜書)로서 그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는데, 종합보서 중 영조46년(1770)에 발간된 문헌비고(文獻備考) 씨족고(氏族考)와 1924년 발간된 전고대방(典故大方) 만성시조편(萬姓始祖篇)에는 다음과 같이 다른 성씨 보다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연안이씨(延安李氏) 시조는 무(茂) 인데,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써 소정방을 따라(從蘇定方) 동쪽(우리나라)으로 와서 (東來) 백제를 평정하고(平百濟) 그대로 머물러(仍留) 신라에 벼슬하니 (仕新羅) 연안에 적을 내리고(賜籍延安) 연안백에 봉하였다(封延安伯)」 라고 기록되어있어 위 세보와 동일한 내용을 싣고 있다.

  위 세보 기록 내용들을 좀 더 알기 쉽게 풀이 해 보자

① 당고종(唐高宗)과 현경(顯慶)
  고종(高宗)은 당나라 제3대 황제이며, 현경(顯慶)은 그의 재위 기간 중 연호(年號)의 하나이다. 고종은 재위 34년 동안에 모두 13개의 연호를 갖는데 두 번째 연호가 현경이다. 즉 고종 7년(신라 태종무열왕 3년, 고구려 보장왕 15년, 서기656년)부터 고종10년까지 5년간이다. 따라서 현경5년은 당 고종10년이고, 신라 태종무열왕 7년이며, 서기660년이다.

② 중랑장(中郞將)과 소정방(蘇定方)
  중랑장(中郞將)은 당나라 무관의 계급으로 당나라 무관 직계(職階)를 구하지 못하여 정확한 직위를 알 수 없으나 참고로 소정방(蘇定方)의 계급과 인물 소개를 보면 대장군(大將軍) 바로 아래 계급으로 추정된다.

  즉 당 고종6년(永徽 6년, 서기655년) 고구려가 백제, 말갈 등과 함께 신라를 침공하여 서북쪽 변경 33성을 빼앗아 가자 신라는 급히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 고종은 영주도독 정명진과 소정방으로 고구려를 치게하였는데 이 때 소정방의 직위와 직계가 좌우위(左右衛) 중랑장(中郞將)이다.
  고종10년(현경5년,서기660년) 나당연합으로 백제를 침공할 때 소정방의 직위와 직계는 신구도행군대총관 (神丘道行軍大摠管) 좌무위(左武衛) 대장군(大將軍)이었다.

  또 조선 세종 때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들(樗軒公 휘 石亨도 포함)이 문종1년(1451)-세조1년 (1455) 간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며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역 군사문헌집 2호의 「동국병감(東國兵監)」상권의 14.신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다’는 제목의 글 중의 소정방에 관한 주해에서
  「소정방은 당나라 초기 장군<將軍>으로 이름은 소열(蘇烈)이며, 정방(定方)은 자(字)임. 수(隨)나라 두건덕의 휘하에 있다가 수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 귀순하여 당 태종4년(630) 이정의 선봉장으로 동투르크(동돌궐)을 정복한 후 자무위(左武衛) 중랑장(中郞將)에 올랐고, 고종8년(657)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 원정군사령관)으로 서투르크(서돌궐)을 격파한 후에 좌효위(左孝衛) 대장군(大將軍)에 오르고, 형국공(邢國公)에 봉작되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즉 소정방의 직계(職階)가 당나라 초기에 장군<將軍>이었고, 당 고종6년(영휘6년, 서기655년)경 중랑장(中郞將)으로서 고구려 침공에 나섰고, 고종8년(현경2년, 서기657년)경에 대장군(大將軍)에 승진하였으며, 고종11년(현경5년, 서기660년)에는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신구도행군대총관 (나당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백제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따라서 당나라에서 중랑장(中郞將)장군<將軍> 바로 위의 계급이고, 대장군(大將軍) 바로 아래 계급인 것이다.

  시조 중랑장공께서 백제 정벌 후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남게 된 이유와 경위에 대하여 구구한 억측이 많은데 다음과 같은 사실(史實)에서도 한가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상기한 「동국병감(東國兵監)」상권 ‘14. 신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다’에서

  「소정방이 원정군의 주력을 정돈하여 귀국하자, 이 때 김인문은 사찬 유돈, 대내마 중지 등과 동행하였다. 한편 신라 무열왕 역시 제강, 천복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승전을 보고하였다.
  (補註)소정방이 주력을 이끌고 급거 귀국한 원인은 중국 서부 변경에 있는 티베트족(吐番族) 세력이 당시 양주(凉州: 甘肅省)와 선주(敾州: 新疆省) 일대를 침공함으로써 이들 티베트군을 우선적으로 방어하라는 당 고종의 명을 받고 백제 땅의 치안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채 귀국한 것이었다.

  이로써 신라는 소수의 당 나라 주둔 병력을 거의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전개하여 백제의 영토를 잠식할 수 있었다. 당시 소정방이 사비성에 잔류 시킨 유인원의 당군은 1만 명 이었으며, 여기에 신라는 병력 7천 명을 함께 주둔시켜 당군을 지원하면서 백제의 부흥군을 격파하는 한편, 당군의 행동을 견제하여 사비성 이외의 지역을 신라군이 공취(攻取)하도록 방조하였다 」
고 주해를 달고 있다.

  여기서 소정방이 불안하게 주둔군 1만 명을 잔류 시키면서 ① 당 종실인으로 믿을 수 있고 ② 신라에 은혜를 베풀었고(무술대회), 신라와 우호적이었던 시조 중랑장공을 함께 잔류 시켰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후 백제 부흥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당군이 열세로 몰린 상황과 개인적인 신라와의 친교에 따라 당 잔류군이 귀환할 때 중랑장공은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③ 착적연안(着籍延安)
  고려사(저헌공 휘 석형도 편찬에 참여), 동국여지승람 등에 따르면 황해도 연안의 지명은 고구려 때부터 동음홀(冬音忽), 시염성(鼓鹽城), 해고군(海?郡), 염주(鹽主), 영응현(永膺縣), 복주(復州), 석주(碩州), 온주목(溫州牧)으로 개칭되다가 고려 충선왕2년(서기1310년)에 와서 연안부(延安府)로 바뀌고 별호를 오원(五原)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각 파 세보에 「연안에 적을 두었다(着籍延安)」이라 함은 이러한 연안 지명의 변천 과정과 관련하여 볼 때, 시조께서 우리나라에 왔을 때(서기 660년경) 황해도 연안(延安)이란 지명이 없고, 시염성(鼓鹽城)이었다는 점과 관적(貫籍) 제도가 그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려 말기 이후에 와서야 생겨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기록은 고려 말기 황해도 연안 지명이 생긴 후에 우리의 관적을 연안으로 정하고(延安李氏라 하고), 조선 선조 때 해고 이광정, 월사 이정구, 오봉 이호민 등이 각 파의 세보를 창설하면서 협의하여 이렇게(着籍延安)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④ 봉연안백(封延安伯)과 연안후(延安侯)
  연안백(延安伯)은 신라 태종무열왕이 백제 정벌 후 시조 중랑장공에게 내린 작위로 당나라 때 작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백작(佰爵)으로 정4품에 해당하고, 식읍(食邑)이 700호로 알려져 있다.

  또 다소 과장 논란은 있지만 신라 김유신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흥무왕실기(興武王實記)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시조 중랑장공께서는 신라 문무왕에 의하여 연안후(延安侯: 侯爵, 종3품, 식읍 1000호)에 가봉(加封)되었다는 다음 기록이 발견되어 1954년 대전 유성 갑동에 복원한 묘소의 묘표(墓表)와 1981년에 건립한 시조 중랑장공 신도비에는 연안후(延安侯) 작위를 기록하고 있다.

  「선생(김유신)이 주청 하기를 “당나라 장수 이무(李茂)는 우리 신라를 구하였으며, 함께 백제를 멸하였고, 또 당으로 하여금 신라에 화합하게 하여 그 공로가 작지 아니하며, 지금은 서번(西藩: 서쪽 변경, 지금의 황해도 연안 일원으로 추정됨) 진수(鎭守: 군사상 중요한 요지를 든든히 지킴)하고 있으니 의당 작위를 가봉하여 예우하소서” 하니. 왕(문무왕)이 말하기를
  “이는 과인의 뜻이라”하면서 이어서 이무(李茂)로써 연안후(延安侯)로 하고, 식읍 1천호를 내리고 대개 빈객(賓客)으로 하고 신하라 하지 않으려 했다」
  「先生復奏曰唐將李茂救我新羅同滅百濟又使唐羅和合功不小今鎭守西藩宜加封爵以禮待之王曰此寡人之意也乃以李茂封延安侯食采邑一千戶盖欲賓之而不臣彦」
  (선생복주왈당장이무구아신라동멸백제우사당라화합공불소금진수서번의가봉작이예대지왕왈차과인지의야내이이무봉연안후식채읍일천호개욕빈지이불신언)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우리나라의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에는 작위로서 ‘왕(王)’,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 없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신라 태종무열왕으로 부타 ‘연안백(延安伯)’, 문무왕으로부터 ‘연안후(延安侯)’의 작위에 봉해졌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김춘추가 진덕여왕2년(648)에 대당외교차 당나라에 갔을 때 당태종이 김춘추의 의표가 당당함을 보고 호감을 가지고 후대하니 김춘추는 더욱 당나라에 접근하기 위해 “(신라) 조정의 예복(관작)을 당의 제도에 따라 고치겠다”고 약속하고, 동행했던 아들 문주를 당에 숙위(宿衛: 실상 인질)하게 하였다’ 는 역사 기록에 비추어 볼 때 당의 도움으로 백제를 멸한 후에 당나라 제도중의 하나인 왕, 공, 후, 백, 자, 남의 작위 제도를 도입하여 시행했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고 본다.

  특히 시조는 당나라 사람이었으므로 당나라 제도에 따른 ‘연안백(延安伯)’ 또는 ‘연안후(延安侯)’로 봉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조치이고, 태대각간 김유신을 ‘흥무왕(興武王)’이라는 통치권이 없는 ‘왕(王)’의 작위에 봉한 것도 같은 맥락의 조치라 할 수 있다.

⑤ 선계(先系) 농서이씨(阜변龍 西李氏)
  시조의 선계(先系)는 당(唐) 종실(宗室) 성씨인 농서이씨(阜변龍 西李氏)로 알려져 왔는데 농서이씨는 중국의 유일한 이씨 성씨로서 노자(老子: 名 耳, 자 伯陽 또는 聃)로부터 비롯되었고, 농서지방은 중국대륙의 서북에 위치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일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이 대체로 시조 중랑장공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과 관련된 해설이다. 그러나 아직 고증을 거쳐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사적(事跡)이 존재하고 있다.

⑥ 나당화합(羅唐和合)에 공로(功勞)
  전술한 흥무왕실기에도 언급되었지만 시조 중랑장공께서는 나-당 화합에 공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것은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신라도 멸할 생각을 가지고 비밀회의를 가졌는데 시조 중랑장공께서는 황제의 뜻이 그것이 아닐 것이라는 점, 신라군이 숫적으로는 적지만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하여 쉽게 멸할 수 없다는 점, 잘못하면 백제를 정벌한 공마저 훼손되고 낭패한 입장에 처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하면서 당군과 신라군간의 무술시합으로 유도하여 승전축하연을 벌려 무술시합을 열었던 바 신라군이 당군 보다 월등히 우세하여 소정방이 시조 중랑장공에게 “공이 아니었더라면 큰 위험에 봉착할 뻔 하였다”며 극구 칭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사료로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세종 때 편찬)」,「동국병감(東國兵監: 문종-세조간 편찬)」,「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정조 때 편찬) 김유신(金庾信)」,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 1960년대 崔棟著 서울동국문화사 발행)」등에 다음과 같은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소정방이 가져온 것(귀중품 또는 의자왕을 비롯한 포로와 노획물의 품목인 듯)을 바치자 천자가 위로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느냐?”하니 소정방이 대답하기를
  “신라는 임금이 어질어서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아랫사람들은 웃어른 섬기기를 제 부모형제 섬기듯 하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하였다.」 「定方,旣獻?. 天子慰藉之曰, 何不因而伐新羅. 定方曰(중략), 雖小不可謨也」(정방,기헌부. 천자위자지왈, 하불인이벌신라. 정방왈(중략), 수소불가모야)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러 떠나 올 때 고종으로부터 사세를 보아 신라도 정벌하라는 밀명을 받지 않았나 하는 추정이 성립된다.

⑦ 장군동(將軍洞) 지명(地名)과 효령사(孝靈祠) 배향(配享)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장군당이 마을 이름은 김유신, 소정방 그리고 이무 세 장군인 하루 유숙 한 데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며 이를 기념하여 사당을 지어 효령사(孝靈祠)라 하며 세 장군의 위패를 모신 것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최근 군위군이 설치한 안내판에 따르면 「신라 태종무열왕 때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정벌키 위해 경주-영천-소계를 거쳐 일선군(지금의 선산)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이 곳에서 하룻밤 유숙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려 말엽(1390년대)에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속칭 장군당(將軍堂)이라 하고, 3장군(김유신, 소정방, 이무)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치렀으며--- 」라고 설명하고 있다.

효령사와 사적비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소재

⑧ 연안백이무(延安伯李茂)’ 묘지석(墓誌石)/b>
  조선 순조21년(1821) 충청도 괴산에 사는 월계공(月溪公: 휘 文愚)이 수차에 걸쳐 황해도 연안을 왕래하면서 연안 서편 비봉산(飛鳳山 일명 鳳勢山) 옥녀봉 아래 은일동(殷逸洞)에서 ‘연안백이무(延安伯李茂)’음각된 묘지석을 굴득(屈得)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경 월계공 5대손 동훈(東勳)씨가‘신사삼월초삼일서행전후사일기 (辛巳三月 初三日西行前後事日記)’라는 제하의 상세한 굴득일기(屈得日記)와 묘지석 실물을 종중에 헌납하였고, 이를 고증하기 위하여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위탁, 소장하고 있다.

시조묘지석과 굴득일기
조선 순조21년(1821) 충청도 괴산에 사는 월계공(月溪公: 휘 文愚)이 황해도 연안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에서 굴득

  延安李氏 후손들은 시조(휘 茂)의 묘소가 북한 땅 연안에 있어 참배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1951년 대전에 있는 죽창공의 종손 고 이병구(李秉龜)씨의 발의와 각고의 노력 끝에 전국 종원들로부터 일부 기금을 확보하고, 대전 계룡산 동쪽기슭 갑하산 아래 판사공파(사우당공세파)의 종산을 기증 받아 1954년에 단소를 설치하였다.

대전 유성 갑동에 설치된 시조 단소
매년 10월 3일(개천절) 후손들이 연원사에서 시조 제향을 올린 후 단소에 참배하고 있다.

  시조의 단소는 설치하였으나 그 후 1978년 대전 제2국립묘지 경내로 편입됨에 따라 단소 현장에서 제향을 올릴 수 없게 되어 제각의 건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78년 제향시 제각건립건이 발의되어 우선 3종파(첨사공파, 소부감공파, 부사공파)에 제각건립기금을 할당하여 거출키로 결정하고, 대덕군 유성읍 구암리(현 대전시 유성구 구암동) 424번지에 대지를 매입하여 1980년 5월 17일 기공식을 거행하고, 건축을 진행하면서 부족 자금은 1979년 음력 9월 초3일 결성된 연안이씨전국대종회가 거출 충당하여 1980년(庚申年)에 준공을 함으로서 시조께서 이 땅에 오신 서기660년(庚申年)으로부터 1320년(22甲)만에 제각이 마련되어 전국 연리 종원이 한 자리에 모여 제향을 올리고 설치된 시조 단소에 참배하게 되었다.
  제각 이름은 ‘延李의 원천(源泉)’이란 뜻으로 ‘연원사(延源祠)’라 명명하였다.

대전 유성 구암동 소재 연원사
2006.6.6.Eh 매년 10월 3일(개천절)에는 경향 각지에서 후손들이 여기 연원사에 모여 시조 제향을 올리고, 단소에 참배한다.

延星會 시조 단소 참배
2006.6.6. 延星會 선조유적지 탐방시 시조 단소에 참배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귀(貴)

연평부원군 가계도(家系圖
연평부원군의 차자 시담(時聃)은 중부(仲父 휘 資)에게 계출(系出) 하였다.
▶ 개요
    - 명종12년(1557)-인조11년(1633) 수77
    - 자 옥여(玉汝), 호 묵재(默齋), 시호 충정(忠定), 봉호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 인조 원년(1623)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정사1등공신에 훈록
    - 배(配):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인동장씨(仁同張氏)
    - 종묘(宗廟) 인조실(仁祖室)에 배향(配享)
    - 신도비(神道碑): 포저(浦渚) 조익(趙翼)찬, 죽남(竹南) 오준(吳竣)서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소재 연평부원군 신도비
효종1년(1650)년 건립, 충남유형문화재 제89호.

국비와 충남도비로 건립중인 연평부원군 신도비 비각
신도비명(神道碑銘)(클릭) : 첨부#2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신도비명(神道碑銘) 참조
▶ 등과와 관직
    - 선조15년(1582) 26세 때 사마시(司馬試) 급제
    - 선조36년(1603) 47세 때 문과 정시(庭試) 급제
    - 선조20년(1587) 심의겸(서인)에 붙었다가 동인으로 돌아서 심의겸을 공격하는 자들을 밝히는 상소를 올린 후 처음으로 참봉(參奉: 종9품)에 보임.
    -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으로 우마, 군졸, 대두 등 군량을 조달하여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수송.
    - 선조26년(1593) 강원도 이천(伊川)에서 소모관 활동 중 세자 광해가 이곳에 왔는데 공이 모집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맞이하니 광해가 크게 기뻐하여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 종7품) 승격
    - 동년 광해가 돌아가 선조에게 보고하자 선조는 공을 공조(工曺) 좌랑(佐郞: 정6품) 배수하고, 이어 선조가 공을 불러서 숙천에서 배알하니 공을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임명
    - 명군이 파주에 머물면서 군량이 부족한데 체찰사 유성룡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을 공이 창졸간에 계획하여 열흘 동안에 콩과 말먹이를 충족하니 유성룡이 크게 기뻐하며 도총검찰관(都聰檢察官)을 삼음.
    - 전라도 장성(長城) 현감(縣監: 정7품)이 되어 장정을 훈련시키고, 입암산성(笠岩山城)을 쌓아 식량과 병기를 저장하여 왜적을 방비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공의 벼슬(?)을 올려줌,
    - 선조 년( ) 군기감(軍器監) 판관(判官: 종5품)
    - 선조 년( ) 김제(金提) 군수(郡守: 정5품)
    - 선조36년(1603) 문과정시에 급제후 형조(刑曺)좌랑(佐郞:정6품), 안산(安山) 군수(郡守: 정5품), 양재(良才) 찰방(察方: 정7품), 백천(白川)군수(郡守: 정5품), 함흥(咸興) 판관(判官: 정6품) 역임
    - 광해 1년(1609) 숙천(肅川) 부사(府使: 정4품)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상) 승격
    - 광해4년(1612) 공은 외간상(외간상)을 입고, 3년간 공직에서 물러나 시묘
    - 광해14년(1622) 평산(平山) 부사(府使)
    - 절제제장(切除諸將: 여러 장수르 참할 수 있는 권한)으로 명에 움직이지 않는 자를 선참후계(先斬後啓: 먼저 참수하고 후 보고)케 하여 이서(李曙)이하 모든 무관을 통솔케 함
    - 동년 이조(吏曺) 참판(參判: 종2품)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종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승진
    - 동년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 정2품), 사헌부(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종2품),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종1품)
    - 동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김유 다음 제2인)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피봉
    - 인조 년( ) 개성 유수(留守: 종2품)로서 어영사(御營使)겸무
    - 인조4년(1626) 병조 판서(判書: 정2품)을 배수하였으나 사양.
    - 인조9년(1631) 이조 판서(判書: 정2품)를 배수하고, 1년이 넘어서 사직
▶ 행적(行蹟)과 일화(逸話)

<스승 율곡(栗谷: 李珥)과 우계(牛溪: 成渾)선생 변론>
    - 선조15년(1582) 공이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조정이 동, 서로 나뉘었는데, 율곡선생이 동서분당을 걱정하여 중간에서 화해론을 주장하였으나, 선조16년(1583) 겨울 대사간 송응개가 홍문과 전한 허봉과 함께 “율곡이 교만하여 위(位: 임금)를 업신여기고, 나라의 정권을 제 멋대로휘두르니 그 뜻이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함이냐?”하는 등의 말로 율곡을 탄핵하니 율곡이 해주로 낙향하였다. 우계 성혼이 상소하여 율곡을 구원하기 위하여 해명하다 우계까지도 그들(동인)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공(公)이 성균관 여러 선비들을 설득하여 성균관에서 상소를 올려 변론하니 선조 임금이 크게 깨달아 이를 가납하니, 그들(동인)의 참소가 임금에게 통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받았다.

    - 선조18년(1585) 가을 또 삼사의 부회(傅會: 억지로 끌어대어이치에 맞추는 것)하는 무리들이 율곡과 우계를 심의겸의 당(서인)에라고 당적에 이름을 적어 넣었는데 공(公)이 두 분이 무함당하는 곡절을 낱낱이 들어 상소하여 변론하니, 선조가 비답하기를
    “너의 말이 옳다. 대간이 이(珥: 율곡)와 혼(渾: 우계)을 함께 지적한 것은 다만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대체로 ‘심의견이 옳다’하는 자는 곧 간사한 주장이지만 이(珥)와 혼(渾)이 그르다 하는 자 또한 바른 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만약 내가 옳다 하면 그른자 조차 옳다고 하고, 만약 내가 그르다하면 옳은자 조차 그르다 하니 이것이 곧 당에 치우친 간사한 자들의 소행이다’ 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나의 뜻은 이 말에 다 들어 있다”고 하였다. 즉 율곡과 우계를 무함하는 자들이 틀렸다는 뜻이다.

    - 정여립(鄭汝立)이 율곡과 우계 문하인으로 중망(重望: 두터운 명망)을 얻었는데 율곡이 죽자 그는 시론(時論: 당시 동인들의 주장)에 아부하여 경연석에서 율곡을 헐뜯었다. 이에 공(公)은 이경진과 함께 선조16년(1583) 9월과 11월(율곡이 죽기 3일전)에 정여립에 율곡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 상소에 첨봉하여 올리니 선조가 경연에서
    “여립(汝立)이 이이(李珥)에게 준 편지를 본 사란이 있느냐?” 고 물으니, 이덕형이 나서 대답하기를
    “이귀(李貴)는 신과 같은 마을 사람입니다. 일찍이 이 편지를 신에게 보였습니다” 하였고, 또 김공민이 또한 대답하기를
    “이귀(李貴)가 일찍이그 편지 내용을 외워서 전하는 것을 신도 들었습니다” 하니, 선조가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여립(汝立)은 ‘오늘날의 형서’(邢恕: 중국 송나라 때 사람으로 程子, 司馬光, 章惇을 차례로 배반한 사람)로군!”하였다. 그러자 정여립은 물러가 도망쳐버렸다.

    - 선조20년(1587) 공(公)이 조광현(趙光鉉)과 함께 상소를 올려 율곡의 본 뜻을 밝혔는데 선조가 26일간이나 두고 이 상소문을 읽어 본 후에 하교하기를
    “너의 상소에 ‘경솔하고 조급하게 벼슬에 나가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앞다투어 의겸의 문에 드나들면서 아침 저녁으로 추축(追逐: 따라다니며 왕래함)하고, 노비처럼 얼굴을 숙이고, 무릎을 꿇는무리와 하대를 받으면서 뚫고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고 하였고, 또 ‘전일에 의겸에게 아부하던 무리들이 일시에 동인에게 항복하여 창을 거꾸로 잡고 의겸을 공격한다’하였는데 어느사람을 지적한 것이냐? 임금을 섬기는데는 숨김이 없는 것이 옛 도리이니 너는 상세하게 대답하라”하고,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이귀(李貴)를 불러서 물어보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이귀(李貴)를 불러서 물어 본 즉 ‘문자(文字)로는 상세히 다 할 수 없음으로 면대(面對)하여 아뢰고자한다’고 합니다” 하니, 선조가 전교하기를
    “네가 만약 창졸간에 능히 할 수 없으면 집으로 물러가서 서계(書啓)하라” 하였다. 그러자 공(公)은
    “군부(君父)의 물음이 있을 때 집으로 물러가서 서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하면서 즉시 승정원에 종이와 붓을 요구하였는데 당시 승정원 승지들은 모두 시론(時論: 동인)에 치우친 자들이기 때문에 공(公)이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것처럼 임금에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끝이 무지러진 붓을 주어 자획(字劃)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그 때 승정원 아전이 공의 뒤에 있다가 온전한 붓 한 자루를 남모르게 주어 공(公)이 받아서 서계(書啓)를 썼다.

    (서계 내용)
    ①“이른바 경솔하고 조급하세 벼슬에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자는 백유양(白惟讓)과 노직(盧稙)이며, 만약 다 아뢰고자 한다면 어찌 이 두 사람으로 그치겠습니까마는 구 중에서도 표표한 자가 이들입니다."

    ②“전일 의겸과 결탁하였다가 그가 실세(失勢)한 후에는 도리어 의겸을 공격하는 자는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윤의중(尹毅中) 등입니다.”

    ③“의겸과 친하기가 이이(李珥)와 비교가 안되는 사람으로 이산해(李山海)가 있습니다. 시배(時輩)들이 만약 의겸과 친한 것으로 이이(李珥)의 죄를 삼는다면 먼저 이산해(李山海)부터 공격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갓 시론에 거슬리지 않는다소 해서 이사람은 공격하지 않고, 이이(李珥)만 허물한다면 이것이 과연 '임금을 섬기는데 속이지 않는다’는 도리이겠습니까?”
    “신이 산해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산해는 이이(李珥)와 평생 친구인데 이이(李珥)가 무함당하는 것을 예사로보고, 일찍이 임금 앞에서 한 말도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이이(李珥)가 지하에서도 꼭 한이 될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바라옵건데 산해를 불러 놓고, ‘의겸과 친한 것이 이이(李珥)와 더불어 누가 더 얕고, 깊은가’를 물어 보소서. 천일(天日)이 위에 있으니 산해가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산해가 의겸에게 준 시(詩)에 ‘봄이 온 후 서울에서 편지 거듭 받았고(洛下春來重見札), 깜깜한 산계에서 자주 서로 맞았네(小溪月黑慣相迎)’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산해가 의겸을 모르는 사람이옵니까?”
    “이런 것들이 신이 이른바 아침저녁으로 추종했던 자입니다”

    ④"이른바 종처럼 얼굴을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는 자는 정희적(鄭熙績)입니다.”
    “신이 만약 앞날에 화가 두려워 바로 아뢰지 않는다면 그 무엇으로써 시배들의 속임을 꾸짖겠습니까? 신은 재주도 모자라고, 문필도 졸렬하므로 우선 물러가 자세히 써서 올리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사오나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다른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가하지 않을 뿐더러 또 임금의 말씀을 집에 가서 하루 묵히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한 까닭에 죽음을 무릎쓰고 아뢰는 바입니다”하였다.

    이산해가 이조판서를 사직하면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귀(李貴)가 써서 바친 시귀(詩句)는 신이 지었던 것이오나 읊조리는 가운데는 실정(實情) 밖의 말이 없지 않았사옵니다” 하였다.

    선조가 이산해에게 말하기를“그 사람(李貴)의 맘 속을 헤아려 본다면 그 스승(율곡)이 시배들에게 무함당함을 통분히 여기어 궐문 밖에서 부르짖으며 상소한데 불과하니 또한 해로울 것이 없으니 서로 교계하지 말고 빨리 나와서 직무를 행하오” 하였다.

    공(公)이 포의(布衣)의 몸으로 상소를 올려 임금이 그 뜻을 깨닫게 하고, 조정의 시비를 시원하게 밝히니 당시 세상 여론은 공을 매우 장하게 여겼다. 이 상소의 결과로 공은 처음으로 강릉 참봉(參奉: 종9품)에 보임되었다.(神道碑文) (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 선조22년(1589) 겨울 송강 정철이 역변을 듣고 고양에서 성(城:서울)으로 들어왔는데 공(李貴)이 신경진과 함께 송강의 집에 가서 역변을 공평하게 진정시킬 것을 이야기 하면서 말하기를
    “망사(亡師: 율곡)께서 평소에 대감을 마음에서 잊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의 거치가 만약 선비들에게 신망을 앓는다면 필시 망사에게 누가 미칠 것이기 때문에 이같이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니 송강이 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참으로 옳소. 내 마땅히 힘껏 그대들 말처럼 행하겠소” 하였다. 공과 경진이 하직하면서
    “대감이 저희들의 말을 믿어 일을 처리하기를 세상 인심에 맞도록 한다면 저희들의 발자국이 대감의 집 문에 미치겠지만 그렇게 못하시면 저희들의 발자국이 대감의 집 문에서 영원히 끊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후 송강이 우상(右相: 우의정)이 되었는데 인심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낭패를 당하게 되니 이로부터 두어 달 동안 공은 송강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노상에서 송강이 공을 지나치면서 하리(下吏)를 시켜 만나자 하여 공은 성문예와 함께 송강에게로 가서 시국 상황이 극도로 나쁘다고 하고, 이어 말하기를
    “대감께서 저희들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급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망사께 누가 미친 것만 한스럽습니다.”하니 송강은 공의 말에 깊이 탄복하였으나 이미 소용이 없게 되었다. (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임진왜란 때 삼도소모관/선유관(三道召募官/宣諭官)> 활약
    -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부인과 피난을 하였다가 선조가 평양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부인과 하직하고, 동년 5월에 행재소에 도착하여 상소하여 면대(面對)하기를 청했으나 선조는 기력이 다하여 면대하기가 어려우니 서계하라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써서 상소로 올렸다.
    ① 대소 신료가 모두 임진강과 대탄(大灘: 한탄강인 듯) 등지를 힘껏 지킬 것
    ② 왕자(王子)를 보내되 중신으로 보필케 하여 원수(元帥)의 책임을 하게 할 것
    ③ 왕이 친정(親征:임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에 나섬)할 것 등이었으나 선조는 답하기를 “비변사는 이귀(李貴)를 불러 대책을 상의하라”하였다.

    좌상 윤두수가 빈청에앉아 있다가 공을 보자 꾸짖기를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친정을 하라고 하느냐?”하니, 공이 답하기를
    “여기에 온 재신들은 속수무책으로 코를 골며 낮잠만 자고 있습니다. 그냥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기다리기 보다는 친정이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공은 또 체찰사(體察使)를 보내라고 청하니 윤두수가 노하여 꾸짖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롭고 망할지라도 조정의 체면은 있어야 하는 것인데 네가 감히 조정에서 대신들을 욕하느냐?”하니,
    공이 “오늘날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이귀(李貴)가 아니라 곧 대감들이 나라를 망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나의 말까지 듣기 싫어하니 다시 기성(箕城: 평양)조차 망치려는 것입니까?” 하였다.(神道碑文)

    - 호소사 황정욱이 소집한 군사들이 도망가자 그 부모들을 잡아 가두고 도망자의 자수를 독촉하였다. 공이 인수 받아 갇혀있던 도망자들의 부모를 다 석방하여 놓아 주니 곧 도망친 군사들이 돌아와 자수한 자가 100여명이나 되어 이로 인해 군사의 형세가 점점 왕성해지므로 공은 장정 70여명을 뽑아 양양부사 김수연에게 주어 요새를 지키게 하고,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일의 군에 합세케 하였다.(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 양궁(兩宮: 선조와 세자 광해군)이 서천하는데 어리석은 시골 백성이 도적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관청은 위협하고, 약탈을 자행하며 장차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이천(伊川)이 가장 심하였다. 공은 군사를 이곳으로출동케 하면서 그 선문(宣文)에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 이귀(李貴)는 철원, 평강, 안협 등의 의병과 관군을 거느리고 아무달 아무날에 이천에 당도하여 왜적을 추격할 터이니 이천현에서도 군사를 점고하고 대령하라” 하였다. 이천의 여러 도적들이 공의 이 선문을 보고 모두 흐트져 버렸다.
    공이 향병 70여명을 모집하여 이천으로 가니 미리 도적들이 숨어 있어 꾀를 써서 유치하고, 죄를 용서하면서 나라에 충성할 것을 권하여 모두 의병에 소속시키고, 장정 40여명을 선정하여 각각 흩어져 10명씩을 모집하도록 하였으며, 선전관 홍윤석이 빼앗긴 표신과 역마도 되찾아 그 연유를 장계하였다.(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 공이 안협에 있는데 이천현감 유대정의 급한 편지에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대빈(大賓)의 행차가 곡산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공은 ‘이것은 필시 세자가 곡산에서 오는 것이다’고 생각하고 밤새워 토산(兎山)으로 달려가 이일(李鎰)의 숙소에 들어가 연유를 고한 다음 모병을 거느리고 함께 중로에 나아가 영접하기를 청했으나 이일은 크게 노하여 소리치기를
    “대조(大朝: 임금)은 요동으로 건너갔고, 세자도 벌써 강계로 향했는데 어찌 산골에서 세자가 나올 리가 있겠는가?” 하면서 영접의 뜻이 없었다.
    공은 안협으로 돌아와 강홍립과 함께 이천으로 가서 모집한 군사를 인솔하고 앞길에 나가 기다렸는데 과연 세자(광해군)가 곡산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공은 곧 모군과 함께 엄히 약속을 하고 뒤를 따랐다. 이천현에 이르자 세자는 공을 불러 위로하고, 퇴선(退饍: 먹고 남긴 음식)을 하사하므로 공은 받아서 모군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이후 며칠간 세자는 날마다 공에게 퇴선을 하사하였는데 공은 아뢰기를
    “소인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있아오나 본디 궁마(弓馬: 군사)에 대한 재주가 없음으로 급한 일이 있을 적에 앞장 설 수 없아오니 청컨데 모군을 이시언(李時言)에게 주시옵소서”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속하기를 원하는 자가 수 백에 이르렀다.
    세자는 현장에서 공을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 종7품)으로 특진시키고, 대조(임금)에 아뢰어 등급을 뛰어 공조 좌랑(佐郞: 정6품)을 제수하였다. 이 때 팔도가 모두 ‘어가(御駕)가 요동으로 건너갔다’는 소문으로 민심이 몹시 수렁거렸는데 이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자 민심이 안정되고, 조정의 영(令)이 비로소 행해지게 되었다. (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 우계(牛溪: 成渾)선생이 세자의 소명을 받고 성천으로 가던 중 길에서 공을 만나 이르기를
    “그대는 난리 초기부터 국사에 진력을 다하여 게획을 세우고, 인심을 진정시킨 것이 남들이 미치지 못한다. 듣건데 북도 사람 국경인 등이 왜적과 결탁하여 나라의 깊은 걱정을 만들고 있다 하니, 내가 만약 대조(임금)에 들어가면 반드시 계청하여 그대를 북도의 선유관(宣諭官)으로 삼도록 계청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 후 대조가 유지로 공을 부르므로 공이 숙천에 이르니 선조가 인견하였다. 공이 전세를 회복할 계책을 힘껏 아뢰고 이어서 규율을 잃은 모든 장수의 죄와 일행 도관(徒官)들의 폐단끼지 진달하였다.
    상(上: 임금)은 공의 말을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고 별도로 명주 두 필을 하사하고, 대신들에게 명하여 공이 진달한 계책을 상의 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 천병(天兵: 明軍)이 평양의 왜적을 쳐서 물리치자 동조(東朝: 세자)는 또 공으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을 삼아 천병의 말먹이와 식량을 독려하도록 하였으며, 유제독의 접반사 이덕형이 또 계청하여 공을 종사관(從事官: 보좌관)으로 삼았다.
    또 천병이 서울의 왜적을 치고자 남진하다가 선봉이 벽제관에서 패하여 파주로 후퇴하였는데 군량이 끊기자 천장(天將: 명군 장수)가 ‘군량이 떨어지게 한 죄’로 체찰사 등 조선 관원에게 죄주려 하므로 공이 여러 재신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 계책을 쓴다면 수일 안에 말먹이, 콩 천여섬과 운량군(運糧軍) 천여명, 마소 수백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니, 체찰사 유성룡이 묻기를
    “무슨 계책으러 할 것인가?”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만약 체찰군관 5명으로 5고을에 나누어 보내고, 안협군수 홍윤장을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 삼아 영을 내리되 도망친 보군 한 명에 콩 5말씩 운반하는데 10일 기한으로 개성까지 이른다면 그 죄를 놓아 준다. 그리고 콩은 관가에 저축한 것으로 나누어 주는데 자기 콩을 운반하기를 원하는 자는 그 운반이 끝난 다음 관가에서 보상한다. 하면 사람마다 기꺼이 따르고 군법 또한 첨차 행해 질 것입니다” 하니 유상(柳相: 유성룡)이 이를 좋은 계책으로 여겨 즉시 치게(馳啓: 급히 보고함)하고, 한결같이 공이 말 한 바를 따랐다.
    공이 안협등 고을에 이르러 도망친 군사들에게 잘 알아듣게 타일러서 날을 약속하고 출발하여 마소 3백마리, 군사 6백여명이 밤낮없이 콩 7백삼을 개성부에 운반하였다. 체신(體臣: 체찰사) 유공(유성룡)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공을 도총검찰관(都摠檢察官)으로 삼고, 막부와 송도의 운량에 대한 일을 모두 맡겼다. (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 선조29년(1596) 천병이 성(城: 도성)에 가득하여 경비가 탕갈(蕩竭: 탕진)되었는데 조정은 어찌 할 줄 몰라서 영의정 유성룡과 호조판서 심수는 공을 비국으로 불러 군량을 판출할 계책을 물었다.

    공은 즉시 10여 조목으로 계책을 진술하니 모든 재신들이 옳다고 하면서 즉시계청하여 공을 경기, 황해, 강원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삼았다.
    공은 한 번 순행하여 쌀과 콩 1만5천석을 마련하고 또 철원, 삭주 등 고을에서 마련한 쌀과 콩 4백여섬을 바로 양주로 운반시켰는데 그때 봉급 받는 신하들에게 스스로 실어오도록 하였다.
    그 나머지 바닷가 각 고을에서 마련한 쌀은 서울로 멀리 운반하려 하였는데 대론(臺論)으로 공이 파직 당했다. 비국에서 다시 계청하여 공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공이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대사헌 정인홍을 파직케 하다>
    - 선조 년( ) 임란 중 이덕형이 공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영남을 가니 이곳에 정인홍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마치 주군(州郡: 수령)의 위세를 부리고 다니니 방백과 사명들이 두려워 피하고 있어서 공이 합천(정인홍고향)에 글을 보내 정인홍의 죄를 묻고 그 종을 갇우었다.

    정인홍이 크게 노하여 공이 우계(牛溪: 成渾)의 문인인 것을 알고, 그 무리 문경호를 시켜서 우계를 소척하여 ‘간당’이라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자 공이 정인홍이 고을(합천)에 있을 때의 열가지 죄목을 열거하여 소를 올리니, 정인홍은 파직되어 권우(眷遇: 임금이 특별히 우대함)도 쇠하자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갔다.(神道碑文) (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광해가 외척 박건(朴楗)의 대사헌 임용을 공박>
    - 선조41년(1608) 공이 차사원(差使員)으로 서울에 들어오니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가 즉위하였다. 광해는 외척 박건(朴楗)을 맨 먼저 헌정(憲長: 대사헌)에 임명하니 사람들은 모두 놀랍게 여겼다. 공은 상소문을 올려
    “건(楗)은 인망이 부족한 자인데 갑자기 대간에서 제일가는 청망(淸望: 높고 맑은 명망)을 차지하였으니 백성들이 눈을 씻고 새 교화(敎化)를 기다리는 이 때에 사(私)로써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로써 박건이 피렴하니 사람들은 공을 몹시 위태롭게 생각하였다.
    광해는 답하기를 “말은 비록 미친 듯이 경직하지만 내용은 마땅히 아름답게 여기고 권장하여 언로를 열도록 하겠다”하고, 공을 죄주지 않았다.(安邦俊著 默齋日記 平居言行 編)

<광해 난정(亂政)간의 행적>
    - 광해 당시 적신(賊臣: 이이첨 등을 말함)이 용사(用事: 맘대로 권세를 부림)하여 연달아 역옥(逆獄: 역적 옥사)을 일으키고, 장차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 김제남(인목대비 친정 아버지)을 모해하여 죽이려 하니 공이 오성(鰲城: 이항복)과 한음(漢陰: 이덕형)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만일 국구를 죽이면 모비(母妃: 인목대비)를 폐할 것이니 이제 이것을 구원하지 못하면 비록 폐모를 막고자 하나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양상(兩相: 두 정승)이 탄식하고 능히 공의 말을 따르지 못하니 김제남이 처형되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대비(인목)를 유폐시켜 존호를 삭제하고, ‘서궁(西宮)’이라 칭하였다. 흉도(凶盜; 이이첨 등을 말함) 들이 서궁을 폐할 것을 논의 하자 공이 한교(韓嶠: 한명회 5세손, 공과 율곡 동문)를 보내 이이첨에게 화복(禍福)으로 효유하여 이이첨이 다소 주춤해져 대비가 폐하는 것을 면하고, 화가 여기에서 그친 것은 실로 공의 힘이었다. (神道碑文)

<친구와 의리를 지키고 귀양>
    - 광해 년( ) 공의 친구인 해주 목사 최기(崔沂)가 모함을 받아 옥에 갖혔는데 친구들이 감히 가서 만나보지 못하는데, 공은 홀로 찾아보았기 때문에 이천(伊川)으로 귀양을 갔다.(神道碑文)

<이괄의 난 관련 행적>
    - 인조반정 훈공(2등)과 외지 근무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북병사(北兵使)로 나가 있으면서 역심을 품고 그 아들
    이전(李?)을 시켜서 불만분자들을 모아 유사시 서울에서 내응하도록 하였는데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이괄은 훈신으로 채포하지 않고, 그 아들 전과 도당들만 모두 채포되어 국청에서 사실을 시인하였다. 공이 인조에게 말하기를
    “가령 이괄이 이러한 음모가 없었더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아버지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다만 그 아들에게만 죄가 미친다면 즐거이 명을 따르겠습니까? 이괄도 아울러 채포하는 것만 못하옵니다. 채포한 후 사실이 아니면 다시 임명하옵소서”하였으나, 인조는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조정의 사자가 영변(북병사 이괄이 있는 곳)에 이르자 이괄이 사신을 베어버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의 반란 소식이 서울에 이르자 인조가 공을 불러 말하기를
    “경의 말을 듣지 아니해서 일이 이지경에 이르렀다”하고 뉘우쳤다.(神道碑文)

    - 이괄의 반란과 관련하여 서울에서 채포된 자가 매우 많아 국청에서 국문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되자 조정은 이들을 모두 죽이고자 의논하니 공이 간하여 말하기를
    “일은 비록 급하나 어찌 본인들에게 물어보지도 아니하고 베겠습니까?”하고 반대의사를 말하였으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진정되고 난 후 공이 인조에게 말하기를
    “괄의 변란 초에 옥에 갖혔던 38인은 본인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처형하였으니 그 속에는 받드시 억울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재심 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로써 기자헌(奇自獻), 유공량(柳公亮), 전유형(全有亨), 현즙(玄楫) 등이 모두 무죄로 원한을 풀고 치욕을 씻었다.
    전유형의 아들 전습은 공이 졸한 후에 심상(心喪: 상주가 아닌 사람으로서 상주의 예를 치르는 것) 3년을 하였다.

    - 이괄이 반란 병력을 이끌고 남진하고 있을 때 공이 임진방수(臨津防守)를 사찰하기 위하여 임진에 이르니 방어군사가 무너지고 적이 이미 도강한 후였다. 공이 달려 돌아와 임금을 뵙고 말하기를
    “청컨데 오늘 한강을 건너서 피하소서. 이틀 뒤면 적이 성안에 들어 올 것입니다”하였다

    그러나 대간들이 공이 임진에서 군사를 둘러보고 제장들에 파수를 독촉하여 방어하지 못한 것을 논하자 인조는 공을 백의호가(白衣扈駕) 할 것을 명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다시 서용하였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인조가 서울에 돌아오자 공이 강사(江舍: 용산)에 머물면서 스스로 상소를 올려
    “임진의 일에서 신은 명을 받고 군사를 사찰하는데 불과하고, 영병(領兵)의 책임(군사지휘책임)이 없으니 논하는 것이 그 죄가 아니옵니다” 하였다.
    인조는 옥당에서 이 문제를 사론한 자를 체직하고, 궤문(饋問: 문안을 해옴)이 끊이지 않고, 등청하라는 명을 여러 번 내리고, 예조 낭관 을 보내어 효유하였다.(神道碑文)

            <이괄의 난 때 임진방수(臨津防守) 책임관련 일화: 첨부7.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의 자식 훈계 참조>

<정묘호란 관련 행적>
    - 인조5년(1627) 금나라 군사가 침입(정묘호란)해 와서 세 성과 여러 진들이 무너지고, 인조가 강화도에 행행했는데 대간들이 ‘도성을 떠나려는 의론을 공의 죄’라 하며,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다.
    금병이 평양에 이르러 화친하기를 구하였는데(서신) 조정의 논의는 그 서신에 화친할 것을 회답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대간들은 또‘화친하는 것을 공의 죄’라며 힘을 다 해 공을 공격하였다.

    양사의 논의가 점점 심해지자 여러 대신들도 대간들의 눈치를 보며 그 태도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전에서 공과 대간들이 쟁론을 벌렸는 데 공이 말하기를
    “능히 싸우지도 못하고, 능히 지키지도 못하고, 능히 화친하지도 못한다면 종사는 어느 땅에 두겠습니까? 이제 조정 신하들이 내심 누가 화친하고자 하지 아니하리오 마는 밖으로는 ‘화친하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하면서 울부짖으며 분노하여 대간들을 꾸짖었다.

    금군이 물러간 후 공은 여러 번 사간원의 비판을 받아 연하여 네 번이나 차자를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고, 대신들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판명해 주기를 청하니 대신이 말하기를
    “(정묘호란시) 도성을 떠난다는 의논은 당초에 이귀(李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귀는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난에 임해서 몸을 아끼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비할 사람이 없는데 어찌 말로써 죄를 더하겠습니까?(그의 죄라 말하겠습니까?)” 하니,
    인조가 말하기를 “이귀(李貴)는 충성이 일월(日月)을 꿰어서 연소배들이 밟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神道碑文)

<병자호란 예측과 대비책>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영조 46년, 1770년 편찬) 성곽고(城郭考)에 따르면
    「인조4년에 남한산에 성을 쌓았는데 일명 일장산으로 본래 백제의 옛 도읍이며, 서울에서 40리 거리에 천연적으로 성터가 이루어진 곳이다. 이괄의 남 후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축성 건의에 따라 축성하게 되었으며, 총융사 이서가 명을 받아 그 일(축성)을 맡아서 완성하였고, 광주읍 관청을 이 곳으로 옮겨 다스리게 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文獻備考)

    <남한산성 축성에 관한사항: 첨부4. 묵재공(默齋公)의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 연구 참조
                                               첨부6. 남한산성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삼부자 참조 >

    - 금나라의 협박이 점점 더 심해지자 의논들이 세폐(歲弊: 조공)를 더 올리려 하자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나라를 꾀하는 도(道:길)는 ‘싸움’과 ‘지킴’과 ‘화친’의 세가지인데, 화친은 싸우거나 지키는 것이 모두 불리할 때 핳수없이 마지못해 계획하는 것입니다. 화친만을 믿고서 싸우고, 지키는데 뜻이 없으면 나라는 반드시 위태로울 것입니다”하고,
    또 병농(兵農)을 분간하고, 장령을 택하며, 진관을 복구하고, 정예를 뽑으며, 험준한 곳을 지키고, 야지를 분산하는 등 10조를 제시하고, 또 차자를 올려서 말하기를“어제 묘당에서 강(講)한 바는 다만 해마다 폐백(弊帛: 조공을 말함)의 많고 적음에 대한 것 뿐이요 싸우고, 지킴에 대한 계책은 하나도 없으니 이것이 어찌 위태롭고, 망하는 화를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또다시 말하기를 “신은 전부터 청했듯이 강도(江都: 강화도)와 남한(南漢: 남한산성)으로써 보장(保障)을 삼자함은 도성이 지키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이제 금나라의 따르기 어려운 요청이 갈수록 더욱 심하니 강도로 들어가 보존하기 위해서 먼저 근본을 굳게 해서 적이 범할 수 없는 형세를 만드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공은 큰 화(禍: 병자호란을 말함)가 장차 이를 것을 분명히 알아서 그 마음으로 걱정하고, 환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와 같았다.(神道碑文)

<불우했던 유년시절>
    - 공이 2세 때 아버지(贈 延城府院君 휘 廷華)를 여의고, 어머니 권부인을 따라 남방(익산: 공의 어머니 안동권씨의 친정)으로 낙향하였다가 15세에 귀경하여 비로소 독서와 율곡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며 글을 배웠다.(神道碑文)

<공정한 인재 등용>
    - 인조9년(1631) 공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당시 인재들을 널리 물어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평소에 들은 것이 있으면 그때 그때 기록해 두었다가 인재를 등용할 때는 의망(懿望: 좋은 인망)을 기록해 둔 곳에서취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이조판서 때 등용한 자들이 대부분 전에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비록 본래부터 재주외 인망이 있는 자일지라도 혼조(昏朝: 광해군시대) 때와 관련하여 흠이 있으면 요직에 임명하지 아니하였다.(神道碑文)

<임종을 미리 알고 하직 인사>
    - 공이 병을 얻으니 인조는 내의원의 의원과 약을 보내고, 사신을 날마다 두세번씩 보내서 문병하였다.
    인조11년(1633) 2월 15일 임종하던 날 아침 공은 기운을 차려 창문의 해를 바라보고, 몸을 구부렸다 엎드리기를 마치 절하고 꿇어 앉듯이 세 번을 하였다. 곁의 사람이 묻기를
    “이것이 천안(天顔: 임금)을 영결하는 뜻이 아니옵니까?” 하니 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조가 공의 부음을 듣고, 하교하기를 “이귀(李貴)는 알고서 말하지 않음이 없어서 온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도운 충직한 신하이다. 이제 홀연히 세상을 버리니 내 심히 슬프게 통곡한다” 하면서 소리 내어 슬피 울고, 외조정을 철회하고, 어용의 옷과 신과 비단과 엽습할 제구를 하사하였다.
    인조가 또 말하기를“그의 벼슬이 정승에 미치지 못한 것을 내 심히 뉘우치노니 영의정을 증직하라” 하였다. 또
    “지난 밤 꿈에 선경(先卿: 공을 말함)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도 또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다가 꿈을 깨고나서도 슬픔을 견디지 못하였다. 금년 세모에 그의 자손들이 가난하여 곤궁할까 염려되니 쌀 10섬을 주라” 하였고, 그 후에도 기일(忌日)마다 제수를 하사해서 항상 그렇게 하도록 하니 그 전후 은휼이 모두가 특이한 대우를 하였다. (神道碑文)

<9대 11인 봉군(封君)>
    - 조선조 때 공신에 오르면 그 특혜를 받았는데, 그것을 믿고 권세를 부리다가 역모에 몰리거나 지탄을 받아 뒤끝이 좋지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적개1등공신 남이장군이 그러했고, 연평부원군과 함께 인조반정을 주동하여 1등 내지 2등공신에 오른 사람들 중에도 김유, 김자점, 심기원, 이괄, 김경징 등이 역모에 몰리거나 세인의 지탄을 받았고 그 이름을 더럽혔다.

    이에 비하면 연평부원군은 반정을 주도하여 일등공신에 오른 것을 개인의 출세나 영달에 이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일등공신이 정승에 올랐지만 자신은 좌찬성에 머물렀다.
    이러한 공의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생활관이 그 후손 9대에 이르기까지 11인이 봉군(封君)되는 음덕을 내렸다.

9대 11인 봉군 세계도

공의 인조반정 정신 '光明正大'

<李貴(이귀)의 딸이 아버지를 구하다>
    金子謙(김자겸)의 부인 李氏(이씨)는 延平府院君(연평부원군) 李貴(이귀)의 딸이다. 일찍이 과부가 되어 잡서(佛書를 말하는 듯)를 많이 읽더니 출가해서 비구니승이 되었다. 宮女(궁녀)들이 이 여승을 존경하고 신복해서 서로 왕래하면서 가까워졌다.

    癸亥年(계해년)에 반정공작을 하게 될 때에 李貴(이귀)는 그 주모자였다. 이 공작을 아는 사람이 光海君(광해군)에게 告變(고변)하니 왕(왕)이 명령을 내려 국청을 차리고 羅卒(나졸)을 사방으로 풀어 (이귀 등을) 잡고자 하여 장차 禍(화)가 어떻게 미칠지 모르게 되었다.

    여승 李(이)부인이 편지를 光海君(광해군)이 사랑하는 金尙宮(김상궁)에게 보내어 자기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부친이 國王(국왕)에 충성하는 심정을 노래하는 歌辭(가사)를 지어 보냈다. 金尙宮(김상궁)이 이를 보고 李貴(이귀)의 충성심을 믿게 되어 이 편지를 光海君(광해군) 앞에서 읽어 보였다.

    그 편지에는 글 하나하나가 모두 충성심에 가득 찬 것이어서 임금의 마음이 측은해졌다. 이 때 金尙宮(김상궁)이 말하기를
    「君王(군왕)에게 충성심이 가득 찬 이러한 臣下(신하)를 형벌로 다스린다고 하면 그 사람의 억울한 원한을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고 아뢰니, 光海君(광해군)이 지당한 말이라 하고는 옥사를 늦추어 풀게 하였다.

    그런데 그 날 밤 삼경에 反正軍(반정군)이 일어나서 宮(궁)을 깨끗이 쓸어내는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후 한 늙은 宮人(궁인)이 손수 본 대로 나에게 말해 주었다.(東平尉公私聞見錄)

    <이귀의 딸 (禮順比丘尼)의 행적에 관한 사항: 첨부5. 회룡사(回龍寺) 번뇌(煩惱) 참조 >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 있는 연평부원군 묘소와 묘표석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 위치, 인조11년(1633) 4월 18일 졸하자 교하에 장사지냈다가
2년뒤 인조13년(1635) 9월 17일 현 위치 괘성산 아래로 이장

연평부원군묘소 참배
2006년 6월 6일 연성회 선조유적 탐방시 연평부원군묘소에 참배하였다.
◆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휘 시백(時白)

천안 광덕 자무실에 신축한 연양부원군 사우
연양부원군 사우는 직계후손이며 우리 연성회 회원인 이동선씨가 낙향하여 앞장서 심혈을 기울여 중건하였다.
▶ 개요
    - 선조14년(1581)-현종1년(1660), 수80
    - 자 돈시(敦詩), 호 조암(釣岩), 시호 충익(忠翼), 봉호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 인조원년(1623) 계제(季弟) 연성군(延城君 휘 時昉)과 함께 부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貴)을 도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훈록(勳錄)
    - 전배(前配): 증 정경부인(貞敬夫人:정1품) 남원윤씨(南原尹氏), 후배(後配): 정경부인(貞敬夫人:정1품) 창원황씨(昌原黃氏)
    - 신도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찬,

연양부원군 신도비
천안 광덕 매당리 동네 앞에 있다

신도비명(神道碑銘): 첨부.8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신도비명(神道碑銘) 참조
▶ 관직
    - 인조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상(喪) 중인데도 불구하고 협수사(協守使)에 임명.
    - 인조2년(1624) 이괄의 난 때 공로를 인정 받아 수원 유수(留守:종2품)에 제수.
    - 인조7년(1629) 수원유수를 마치고 돌아와 장예원 판결사(判決使: 정3품상)을 거쳐 다시 양주 목사(牧使:정3품)로 나갔다가, 이어 강화 유수(留守:종2품) 부임.
    - 인조11년(1633) 부친 충정공(忠定公 휘 貴)이 졸하자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나 치상(治喪)에 열중하였으며 인조13년(1635) 부친 상을 마치고 병조 참판(參判:종2품)에 제수
    - 인조14년(1636) 경주 부윤(府尹:종2품)에 임명하였다가 임금이 어떤 사람의 진언을 들어 다시 참판(參判:종2품) 겸 남한산성 수어사(守御使)에 임명.
    - 인조14년(1636) 공조 판서(判書:정2품) 제수.
    - 인조15년(1637) 형조 판서(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 인조16년(163) 병조 판서(判書:정2품) 제수.
    - 인조19년(1641) 총융사(聰戎使: 종2품)에 임용

    * 총융청은 내,외 2개이 영을 두고,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 등의 진 군무를 맡아보는 오늘날의 수도권 외곽사령부).

    - 인조20년(1642) 다시 형조판서(判書)와 병조판서(判書)제수. 동년 형조판서로서 연경(燕京: 청나라 서울 지금의 북경)에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옴.
    - 인조22년(1644) 한성판윤(漢城判尹:정2품,서울시장)과 형(刑) 공(工)조 판서를 역임.
    - 인조23년(1645) 공이 병이 심하여 사직하였다가 요양 후에 다시 병조 판서(判書:정2품) 및 훈련대장(訓練隊長) 겸무.

    * 공은 임금에게 “이 벼슬은 옛날 소위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인데 소인으로는 부족하옵니다”하면서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인조 년( )에 청백리(靑白吏)에 기록됨.
    - 효종 원년(1649) 1월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이은 후에도 더욱 공을 권대(眷待: 돌봄)하여 이조 판서(判書)와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 효종1년(1650)8월 병조판서로서 우의정(右議政) 대배(大拜), 동년 공이 연사(燕使: 연경사신, 進奏使)에 에 임명되었다가 취소 됨으로써 가지 않았다.
    - 효종3년(1652) 4월 진주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돌아와서 조석윤(趙錫胤)등 언관의 간언으로 파직된 사람들을 신구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음으로 일시 채직하였다가 다시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고,
    - 효종6년(1655) 영의정(領議政) 승차(陞差) 동년 동래(東萊)에 축성하는 문제에 공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대간들이 ‘의정부에 사람이 없다’고 상소하였기 때문에 사직하였다가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 효종9년(1658)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남에도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다.
▶ 풍모와 성품
    연양부원군은 그의 호 조암(釣岩: 바위를 낚는다)처럼 대범한 사람이었다. 조선조 고전들이 전하는 그의 풍모와 성품을 적어 본다.

    - 그는 풍모와 위간(偉幹: 위엄이 있는 큰 체구)이 절인(絶人: 남보다 훨씬 뛰어남) 하였으며, 계곡(鷄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포저(浦渚) 조익(趙翼: 연평부원군신도미명 찬자) 등이 그를 심히 추중(推重: 추앙하여 중히 여김)하였다. (朝鮮名人典)

    - 공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순독(純篤)하여 항상 효감(孝感)으로 응했고, 형제간에 극진히 화락(和樂)하나 잘못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공의 용모가 웅위(雄偉)하고, 여력(여力: 체력)이 과인(過人: 다른 사람을 능가함)하나 항상 자시(自恃: 자기 능력만 믿고 함부로 함)하지 아니하여 마치 의복도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지려(智慮)가 명심(明深)하나 겸허퇴탁(謙虛退託: 겸손하고 허심탄회하며, 옳지않은 부탁은 철저히 물리쳤다.) 하여 외면으로 무능한 것 같았고, 어릴 적부터 인자한 품성이 그 천성이라 애군우국(愛君憂國: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함) 하는 마음은 지성(至誠)에서 나오므로 시정(時政:당면한 정사)에 궐실(闕失:잘못)이 있으면 종일 걱정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軍)에 임하고 백성을 다스림에는 은의(恩義: 혜택)가 두루 흡족하여 이르는 곳마다 사람의 사력(死力: 죽을 힘)을 얻고, 빙설(氷雪) 같은 지조(志操)가 있어 성세(聖世: 효종조)에 원훈(元勳: 공이 큰 원로 신하)으로 일곱 번의 서전(西銓: 병조판서)을 담당하였고, 두 번의 동전(東銓: 이조판서)에 있었으며, 세 번 상부(相府: 정승)에 들어갔으나 재업(財業: 재산을 모으는 일)은 숙연(肅然: 고요하고 엄숙함)하여 한사(寒士: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어려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에게 배웠으며, 풍체가 당당하고, 힘이 세며, 지혜가 있었고, 너무 겸손하여 마치 무능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였으나 항상 우국지성 (憂國至誠)이 넘쳤고, 청백(淸白)하였다.(顯宗實錄)

    - 공이 어려서 우계문간공(牛溪文簡公: 成渾)과 사계문원공(沙溪文元公: 金長生)에게 수학하여 소학(小學)을 근본으로 하였고, 선배로 이백사항복(李白沙恒福), 제류(齊流: 同輩)로 장계곡유(張谿谷維)가 다 배행(輩行: 나이가 비슷한 친구)을 굽히고, 문지(門地: 문지방)를 불고(不顧: 돌보지 않는)하여 허여(許與: 허락)하였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미담과 일화

< 공의 이름 석자가 근위대장을 설득>
    인조반정 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큰 병대로서 궐내에서 대궐을 호위하고 있었으니 제공(諸公: 반정모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사하는데 이것이 근심거리였다. 그래서 그의 사위 장신(張紳: 반정동지 張維의 동생)을 시켜서 설득하게 하니
    이흥립은 “이시백도 역시 모의에 참가하고 있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장신이 “그러하옵니다”하고 대답하니
    이흥립은 “그렇다면 이 의거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고 말하면서 드디어 허락하니
    이시백이 남에게 신임을 받고 있음이 이와 같았다.(白沙 李恒福 一代記)(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이원익의 의향을 알아 낸 공의 기지(機智)>
    계해년(인조1년, 1623) 반정론이 비밀히 발의되고 있을 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은 여주에 귀양 가 있었다. 공(時白)이 부친(귀)의 명으로 가서 오리의 의향은 어떤가 알아보라고 하였다. 이원익을 찾아 가 문안을 드리고 저녁밥을 먹은 뒤 오리는 공(時白)이 찾아 온 뜻을 짐작하고 잠깐 자리를 피하니 공(時白)이 문방구(文房具)들을 요강, 타구와 위치를 바꾸어 놓았더니 오리가 돌아와서 둘레둘레 둘러보고는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時白)이 오리의 의향을 알아차리고 드디어 반정의 의(議)를 결정하게 되었다.(東平尉公私聞見錄)

<박씨전론(朴氏傳論)에서 공의 풍모와 성품 묘사
    김기동(金起東)저 ‘이조시대소설론 박씨전(李朝時代小說論 朴氏傳)’에서
    「박씨전(朴氏傳)의 역사적 인물 여부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남녀 주인공의 실재송(實在性)을 규명해 보면 명백해질 것이다. 주인공 이시백(李時白)은 물론 실재 인물이다. 이시백은 인조반정 때 가부(家父: 貴)와 더불어 대공을 세우고 연양부원군이 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병조참판으로 있으면서 남한사(南漢使: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였다」
고 설명하고 공의 풍모와 성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풍질위간(風質偉幹): 몸집이 크고외모가 당당하여 위엄이 있는 모습이었다.
        완력절윤(脘力絶倫): 남보다 힘이 월등히 세었다.
        지혜명심(智慧明深): 지혜가 밝고, 깊었다.
        겸허퇴탁(謙虛退託): 겸손하고 허심탄회하며, 옳지않은 부탁은 철저히 물리쳤다.
        애군우국(愛君憂國):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신이 투철한 지사(志士)요 영웅적인 기상을 가지고 있었다.

    <박씨전 이야기: 첨부9. 박씨전(朴氏傳) 남자주인공 이시백(李時白)참조>

< 이괄의 난 토벌담 >
    서변사(西邊帥) 이괄(李适)이 모반하자 상(上:인조)가 상중에 있는 공을 불러서 협수사(協守使: 방어작전에 협력하는 직분)에 임명하니 공이 즉시 이천(伊川, 강원도)으로 가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요지(要地)에서 방어할 것을 정하였는데 반군이 다른 길로 해서 서울로 직행하여 점령하고 임금은 공주로 파천하였다.

    공은 병사들을 모아 놓고 울면서 말하기를 “이미 이지경을 당하였으니 나는 당연히 적군과 사생결단을 할 것이니 장졸들 중에 부모가 있는 자들은 다 돌아가라”하니, 장졸들이 또한 울면서 대답하기를 “사생을 같이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 때 원수(元帥) 장만(張晩)이 파주에 진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 병졸들을 이끌고 찾아가니 장만이 공의 손을 잡고 “하늘이 나를 도움이라” 하고 정세와 대책을 서로 상의 하였다.
    장만이 “반군을 토벌하기가 용이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남방의 군사와 합류할 때를 만전지계(萬全之計)를 하리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안합니다. 적이 이미 서울을 점거하여 그(이괄)에게 붙는 자가 늘어나면 우리가 도리어 객이되어 주객이 전도되는 형세가 될 것이 염려됩니다. 또 지금 날씨가 좋지 않고 바람이 심한데 만약 비가 내려 사졸들이 피로하여 이산(離散: 흩어짐)될 염려도 있다”고 하고 곧바로 토벌작전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정충신(鄭忠信), 남이흥(南以興), 이수일(李守一) 세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전방(북방)에 머물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내가 정충신의 위인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용진할 것이며, 이수일은 오랜 장수라 반드시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세 장수들이 진군하여 안현(鞍峴)을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장만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과연 공의 말과 같이 되었다”하였다.

    다음날 전세는 역전되어 반군이 패주하였는데, 공과 장만이 따라가 합세하니 정충신이 공에게 함께 추격하여 이괄을 체포할 것을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괄이 얼마 안 있어 체포될 것인데 내가 어찌 다른 사람(정충신 등)의 공(功)을 가로채리오” 하니
    정충신이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하였다.

    공이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피난 가 있는 곳, 공주)에 이르니 그 때 조정에서는 장만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론이 분분하고, 자못 심각하였다. 이에 공이 진주(進奏)하여 당시 상황을 자세히 진달하니 임금이 공을 크게 신뢰하여 장만이 치죄되는 것을 면하였다.

    얼마 안 있어 공이 상을 마쳤으므로 수원유수에 제수하였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李貴(이귀), 아들 時白(시백)을 훈계 >
    갑자년 (인조2년,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가 연평부원군 이귀(李貴)를 시켜 강탄수(江灘水)에 나가 지키는 형편을 보고 적을 물리치라고 했다.
    이귀(李貴)가 그 곳에 가 보니, 이미 수졸(守卒)들이 다 도망가고 없고, 적이 임진강을 건너니 관군이 패했다는 전보가 서울에 들어왔다.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이 때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정3품상)으로 있으면서 사간(司諫) 오숙(吳 肅羽)과 같이 인조를 청대해서 군율로서 이귀(李貴)를 처벌해야 된다고 했다. 인조는 이귀(李貴)의 잘못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끝내 윤허해 주지 않았다.
    장유(張維)는 이귀(李貴)의 아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과 동문이고, 또 우정이 두터워 형제 같이 지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으로 공사(公私)를 어길 수 없어서 이렇게 청대했다.

    이귀(李貴)가 아들 시백(時白)을 훈계하기를 “군기(軍機)를 잘못해서 놓치면 법으로 마땅히 죽게 되어 있다. 장모(張某)가 군율로써 나를 처벌하라는 것은 그의 직책이 그렇게 한 것이다. 너희가 결코 그를 원수로 여기지 말아라” 하였다.
    그리고 또 장유(張維)를 불러서 서로 대면케 하여 구정(舊情)을 상하지 말라고 하니 시백(時白)이 부친의 명이라 그대로 장유(張維)와 왕래하고 지냈다.(東平尉 公私聞見錄)

< 수원유수로서 비상 대비 >
    인조2년(1624) 이괄의 난 때 공로를 인정하여 임금이 공을 수원유수(水原留守)에 제수하면서 말하기를 “수원이 서울 백리 내에 위치하고, 병마가 3천이 있기에 경을 명한다”고 하였다. 공은 부임하여 성심을 다하여 군졸들을 대하고, 훈련시키니 군졸들도 잘 따라주었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공(時白)이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군사와 말이 각 마을에 흩어져 있었음으로 만약 위급한 일이 생겨도 쉽사리 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 발(십장) 되는 깃대를 높은 언덕 위에 세우고 모든 군사들에게 약속하기를 “위급하면 내가 깃대에 방색기(方色旗: 동,서,남,북 사방으로 각기 샌을 다르게 한 깃발)를 달고 자호포(子號砲)를 세 번 쏠 터이니 깃발을 보거나 포성을 들으면 서로 알려서 어떤 사람도 때를 넘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묘호란의 소식이 오자 공(時白)은 갑옷을 입고, 정문에 깃발을 달고, 포를 쏘았더니 오시(오시: 11시-1시)경에 모든 군사가 다 모여 공(時白)이 거느리고 동작나루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임금이 공(時白)을 불러서 말하기를 “어떻게 귀신처럼 빠르느뇨?”하였다.」 (同春集)

    이러한 평소 훈련은 인조5년(1627) 정묘호란을 당하여 똑 같이 하여 하룻 밤 사이에 병사들을 이끌고 동작진(銅雀津)에 집결하니 상(인조)가 공을 인견하녀 칭탄(稱歎: 칭찬하고 탄복함)하고, 공으로 하여금 전위(前衛)를 삼아 강화도로 파천하였다가 전란이 끝난 후 임금이 상으로 하사한 물품이 매우 많아 병졸에게까지 나누어 줄 정도였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인조 임금의 배려 >
    인조6년(1628) 정월에 흉도(凶徒:?)가 범궐(犯闕: 대궐을 침범)을 시도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마침 서울에 와 임금을 만나 알고 즉시 수원으로 돌아가 군사를 출동하려 하였다.
    임금이 공이 혼자 야행하는 도중에 불의의 변이나 있지 않을까 염려하여 금위병(禁衛兵)으로 하여금 호송케 하였는데 과연 도적이 공을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공을 해하려 하였으나 마침 호송병이 있어 무사하였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강화도 보장(保障) 강화 >
    인조10년(1632) 경 공이 강화 유수(留守)로 부임하자 ‘강화는 보장(保障)의 중지(重地: 중요한 곳)라’며 군사를 애율(愛恤)하고, 비상시를 대비한 양곡 저축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의 모획(謀劃: 꾀와 계획)이 늘 조정의 의론에 반영되지 않아 한탄하였다.(이 결과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쉽게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병자호란 초기 상황 >
    인조14년(1636) 12월 청군이 침입해 오자 공이 임금을 대좌하고 “적기(敵騎:적의 기마군)가 매우 신속하오니 오늘 중에 대가가 서울을 피하여야 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공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

    다음날에야 임금이 강화도로 향하려고 출발하야 성문에 이르렀을 때 이미 적이 서쪽 교외를 압박하고 있어 공이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경기(輕騎: 가벼운 차림으로 말을 타고)로 나아가고 대장으로 하여금 뒤를 맡게 하면 초저녁에 한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나, 만약 또다시 망설이면 반드시 낭패할 것입니다”하고, 또 “남한산성의 일이 또한 구차하니 신은 하직을 고합니다”하고 즉시 말을 달려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뒤 따라 온 자가 급히 공에게 “대가(大駕: 임금이 탄 수레)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고 하자 공이 더욱 급히 달려가 남한산성의 군사를 정비하여 대가를 영접하였다.

    다음날 새벽 임금이 샛길로 강화도로 향하려 하였으니 여의치 못하니 곧 남한산성을 지킬 것을 방략으로 정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성(城) 중의 일을 다 경에게 위임하니 어떤 일을 급선무로 해야 할 것인가”하고 묻자
    공이 말하기를 “급히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격려 하시는 것이 가장 급한 일입니다”고 하였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남한산성 농선전투 초기 공의 활약상 >
    임금이 남한산성에 도착한 첫날 저녁 창졸 간에 공이 명을 받아 여러 군부대를 나누어 지킬 성벽을 분담케 하고 다음날 임금에게 진주하기를 청하여 남한산성의 일을 전담하는 것을 사양하면서 “어제 밤에는 일이 급하여 감히 스스로 군병을 분수(分守)케 하였으나 다시 체부(體府: 體察府)에 명하시고, 신은 절판(節判: 부분을 맡음) 받기를 청하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므로 다시 힘써 진주하였다.

    이에 임금이 체신(體臣: 體察使, 김류)을 불러 방략(方略: 방책)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못하므로 공이 나서 대답하기를 “별 다른 방략이 없으면 신경진(申景?), 구굉(具宏), 이서(李曙) 그리고 제가 사문(四門: 동, 서, 남,북문)을 맡아 지키고, 체신이 총관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한 참 생각한 후에 허락하였다.
    이렇게하여 공은 휘하의 병력으로 서성(西城: 성의 서쪽 부분)을 지키게 되었는데 이는 임금이 처음 공에게 전담시키려는 생각과 일맥 상통하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공에게 맡긴 것이다.

    하루는 임금이 공을 불러서 밤을 이용하여 적병을 치고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만일 불리하면 성중이 다 저상(沮喪: 기운을 잃음) 될 수 있으니 그 때 가서 후회해도 도리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 북쪽을 지키는 군사가 성 북쪽으로 출전하였다가 패한 이후로 다시는 출전하는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한 때 세자를 인질로 삼게하고,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는 것을 기도하는 자가 있어 공이 임금을 청대하여 말하기를 “이런 계교를 부리는 자는 죄상이 마땅히 참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고로 전쟁의 성패는 군의 다과에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중국 조(趙)나라 진양(晉陽)과 제(齊)나라 즉묵(?墨)이 이의 표본입니다. 이제 성을 고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이와 같은 계교를 말하니 전하가 어찌 송(宋)나라 흠종(흠종)이 피집(被執)한 뒤 휘종(徽宗)이 또 면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기기(器機)가 미리 준비되지 않았다고 하교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이미 건의 하였지만) 조정의 의론에 반영되지 않아서 미리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옆에서 체신(體臣: 김류)가 듣고 내심 불쾌하게 생각했는데 다른 날 다른 일로 공을 무겁게 치죄하면서 유혈이 낭자하도록 곤장을 친 후에야 그쳤다.
    그러나 공은 성중의 일이 급하므로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하고 조금도 억울하다는 표현이 없었다.

    어느 때 군졸을 선동하여 군졸들이 몰려 와 척화제신(斥和諸臣)을 다 적진으로 보내자며 며칠간 소란을 피웠는데 다만 공이 영솔(領率)하는 군졸들은 한 사람도 자기 막사에서 떠나지 아니하니 이와 같이 상하가 일체가 되어 의지하였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남한산성 농성전투간 공의 활약상: 첨부6. 남한산성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삼부자(三父子) 참조>

< 공의 부상 >
    인조15년(1637) 1월 19일 홀연 적진에서 화살이 서문에 와서 떨어졌는데 체부(體府)가 암문(暗門)의 군졸을 서문으로 옮겨 서문의 방비를 강화케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적의 계교에 빠지는 것이다.” 하고 암문을 굳게 방비하였다.
    그날 밤 적이 돌연 암문을 공격하거늘 공이 몸소 궁시를 잡고 성곽을 돌아다니면서 사졸들 보다 앞서니 군사가 함께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며, 공의 한 번 화살을 쏘면 수명의 적이 쓰러지니 적이 네 번이나 공격을 하다가 패퇴하였는데 공도 네 개의 화살을 맞았다.

    전투가 한창일 때 찬획사(贊劃使) 황황(黃潢)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공을 도왔는데 공이 말하기를 “적병이 동쪽으로 달아나며 지지 않느냐? 고은 급히 가서 동쪽을 구하라” 하duTek.
    황황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시백공이야 말로 진정 인인(仁人: 어진 사람)의 처사라”하였다 한다.

    다음날 성내 사람들이 서문쪽에 와서 간밤의 전장을 살펴보니 피가 흘러 내가 되고, 적이 버리고 간 기계(機械: 雲梯 등 공성무기를 말함)가 산과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성을 공격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공이 부상당한 것을 들으시고 중사(中使)를 보내 하교하기를 “경이 갑옷을 입지 아니하여 중상하게에 이르니 만일 경이 없으면 장차 나라를 어찌하리요” 하시고 어주(御酒)를 사송(賜送)하여 위로하니 군중이 모두 감격하였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출병거부 조건 반영 >
    인조15년(1637) 1월 임금이 성을 나가서 항복할 것을 결정 하고, 사신(최명길)을 보내 화약(和約: 강화 약속 조건)을 정하고 돌아오자 공은 임금에게 상주하기를
    “이후에 피변(彼邊: 상대편,청나라를 말함)이 만일 우리를 위협하여 서쪽 출병(청이 명나라를 치는데 원병을 말함)하라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그에 따르게 되면 이는 차마 못할 일이옵니다.(임진왜란 때 도와 은혜를 베푼 명나라를 치는 것을 말함) 복종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니 최명길을 다시 보내서 그 일(출병)에는 응하지 못할 의리를 말하고, 힘쓰 반드시 응약(應約)을 받아야 하옵니다” 하고,
    최명길을 보고도 이일을 역설하니 최명길이 다시 청군 진영으로 가서 공의 말과 같이 그 허약(許約)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 뒤 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나 세상 중론들은 공의 처사를 높이 칭찬하였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병사(兵使) 서우신(徐祐申)을 구하다. >
    인조15년(1637) 병조 판서(判書)에 임명된 후의 일이다. 청군에 항복할 것을 결정한 후 전군에 청군과 접전하지 말도록 군령이 내려갔는데 병사(兵使) 서우신(徐祐申)이 조회(朝會: 조정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경솔하게 청병과 접전하여 패한 죄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공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신이 이미 사신(使臣: 병사)의 책임이 있으니 적과 싸우지 아니하고 어찌하겠습니까? 우신이 비록 상장(上將: 청나라 장수를 말함)의 제압을 받아 뜻을 아루지 못하고 재주를 다하지 못하였으나 이 한 번 싸움으로 중죄를 받게 되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신의 사형을 면헤게 하였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전몰 유가족 후휼(厚恤) >
    인조16년(163) 병조 판서(判書)에 기용하면서 임금이 하교하기를 “경의 충성이 과인(過人)하고,(남다르고) 재지(才智: 재주와 지혜)가 우월하여 실로 이 책임이 합당하도다” 하였다. 공이 힘써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어떤 일로 채임하였다가 5일 후에 복임하여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신이 생각하기로는 전망자 유족들을 후휼(厚恤)해야 할 것이온데 도리어 그들에게도 군포(軍布)를 거두고 다른 것으로 대신 추구(追求)하는 일이 불가하옵니다. 급히 변통하하도록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서전(西銓)의 공정한 인사 >
    공이 병조판서가 된 후로 공의 사무실과 집의 문(門)에는 사알(私謁: 사적으로 만남)이 통하지 아니하였다. 서전(西銓: 선발과 승진등 무관의 인사) 즉 무관의 선발에는 공론에 따라 공정하게 하니 비록 교만한 장수나 사나운 장교라도 다 심복하였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세자의 청을 거절 >
    인조16년(1642) 다시 병조 판서(判書)에 제수된 후 한 번은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자기에게 잘 하는 사람으로 변장(邊將: 변방의 장수)를 시키려 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았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볏짚 광주리 고안 >
    인조16년(1642) 다시 병조 판서(判書)에 제수된 후 변방을 지키는 군병이 동사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남으로 고심 끝에 볏짚으로 광주리를 엮어 그 속에 들어가 보초를 서게 하니 이후로는 동사자가 발생하지 않았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심기원 관련 모함 >
    인조22년(1644) 공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심기원(沈器遠: 정사 1등공신, 좌의정)이 모반하여 주살되자 이 때를 틈타서 공을 심기원과 연루되었다고 모함하려는 자가 있었으나 임금이 공의 무고함을 살펴서 화를 입지 않고 무사하였고 얼마후에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금사낙양홍(金沙洛陽洪) >
    공(時白)이 살던 집은 곧 충정공(忠定公 휘 貴)이 나라에서 하사 받은 집인데 뜰에 금사낙양홍(金沙洛陽洪)이라는 유명한 꽃나무가 하나 있었다. 어느날 대전별감이 임금의 명이라면서 그 꽃나무를 캐어가려 하였다.

    공(時白)이 그 꽃나무로 가서 그 뿌리까지 뽑아 망가뜨리고 눈물울 흘리며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조석으로 보장할 수 없는데 임금께서 어진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하시려는가? 내 차마 이 꽃을 가지고 임금에게 아첨하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모름지기 아뢰어라.” 하였다.

    이후로 임금이 공을 대접함이 더욱 두터웠는데 이는 그가 충정스럽게 간(간)한 뜻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燃藜室記述)

< 근면, 근신으로 대기만성(大器晩成) >
    인조24년(1646) 공이 공주에 성묘(연평군 묘소로 생각됨) 가던 길에 호서(湖西: 충청도) 이산(泥山: 현 충남 논산군 노성면의 옛 이름)에 토적(土賊)의 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즉시 성묘 길을 돌려 돌아와 초멸(剿滅: 적을 처서 무찌름) 자청하니 임금이 “이제는 근심이 없다”하면서 허락해서 토벌에 나섰다. 시백이 왕명을 받고 전지로 가기 위해 궐문을 나서면서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토벌군 진지로 향했다.

    뒤에 임금(인조)이 이 사실을 알고 가상히 여겨 포상을 내리고 “이연양(李延陽: 이시백, 연양군)이 근신 근면하여 그 인물 됨을 늦게 서야 알게 되었다”고 중신들 앞에서 칭찬하고, “이시백과 같은 훌륭한 사람도 그 진가를 이처럼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이만 못한 사람이야 어찌 알게 될 것이가?” 하며 안타까워 하였다. (東平尉公私聞見錄)

    이어서 “ 이연양이 급한 난을 당하여 몸을 생각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충신이라”고 하였다.
    또 공의 아우 시방(時昉)이 제읍하여(눈물을 흘리며) 배사(拜謝: 관직을 사양함)함으로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형제가 사람들의 모함함을 당하였으나 애가 이르기를 충정(忠定: 延平府院君 휘 貴)의 아들이 반드시 그렇지 아니하다 하였으니 경들은 자제를 교훈하여 다 경들과 같게 하여라”하였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어수당(魚水當)에서 삼자 대화 >
    인조27년(1649) 봄에 임금이 어수당에 공을 불러 술을 내려며 옆에 있는 세자(봉림대군)에게 명하여 수작(酬酌: 슬을 따룸)케 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가 고굉(股肱: 팔 다리) 같이 여기는 사람이니 너도 나와 같이 하라” 하고, 이어서 충정(忠定: 연평군 휘 귀)의 국사에 대한 진심을 말하면서 지금 사람들이 그렇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공이 감읍(感泣)하여 말하기를 "신료(臣僚)의 권면(勤勉: 부지런함)과 해태(懈怠: 나태함)는 오직 주상께오서 대접하는데 달렸사옵니다” 하였다.

    또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조익(趙翌), 김집(金集), 송준길(宋浚吉)의 글이라 하니 그 날은 물러가게 하고 다음에 또 어전에서 사찬(賜饌)하면서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효종이 세자 책봉에 반대한 공을 우의정에 제수 >
    병자호란 후 청에 불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죽자 임금(인조)은 봉림대군(후에 효종)을 세자로 세우려 하면서 다른 신하들은 찬동을 얻었으나 공(時白)과 이경여는 세손(世孫)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임금(인조)은 공(時白)과 봉림대군을 함께 불러놓고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공(時白)에게 술을 따라 올리도록 하였다.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임금(효종)으로 등극 한 후 봉림대군의 세자책봉을 반대했던 공(時白)을 우의정(右議政:정1품)으로 제수하고, 이어서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십 여년을 삼공(三公: 우, 좌, 영의정)의 직에 있었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人物考)
    이는 공이 모든 공사에 사심이 없고, 오직 우국충정으로 임하고 있음을 임금도 잘 알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 사신에 태의(太醫) 수행, 어의(御衣) 하사 >
    효종3년(1652) 4월 공이 진주사로 연경에 사신으로 갈 때 임금이 노병함을 염려하여 태의에게 명하여 약을 가지고 사신을 수행토록 하고, 공에게 어의를 하사하였다.

    사신 일행이 산해관(山海關: 북경에 들어가는 만리장성의 맨 동쪽 관문) 이르니 공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호인(胡人: 청나라 사람)과 한인(漢人)들이 모두 나와 보더라.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평양서윤과 평양감사의 기생 접대 훈계 >
    효종3년(1652) 공(時白)이 연경(燕京: 청나라 수도, 북경)에 사신으로 갈 때 평양에 당도하니 대동문(大東門) 밖에 화려한 복색과 단장을 한 기생들이 일진을 이루고 있었다.
    공(時白)이 말하기를 “병자난(丙子亂) 이후 서도(西道: 평안도)가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다더니 이제 와서 보니 틀린 말이구먼” 하였다.
    평양 서윤이 대답하기를 “난리 후 기생이라고는 오직 늙고 병든 자만 남아 있어 사신의 행차에 체통을 이루지 못하므로 각 고을의 관비들 가운데서 자태와 재주가 있는 자를 뽑아 본부에 옮기고, 그 친족들에게 의복과 비용을 맡게 하였습니다.” 하자.
    공(時白)이 노하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서윤을 설치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사신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절에 이 짓을 하니 극히 놀랄 일이로다.”하고,
    평양감사를 불러 책하기를 “지금이 어찌 기생놀이 할 때인가? 주상께 아뢰어서 치죄(治罪)하고 싶지만 이번만은 그냥 두니 모름지기 고을로 돌려보내시오” 하였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燃藜室記述)

‘平壤妓生’(盛永글)의 삽화(億榮畵) (종보 제7호)

< 비단방석 >
    공(時白)의 집이 대대로 청렴 검소함을 지켜왔는데 어느날 부인이 비단방석을 만들었다.
    공(時白)이 그 말을 듣고 부인에게 뜰 아래 부들자리(포석)을 깔게 하고 부인과 함께 앉아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가 예부터 깔던 것이요. 내가 풍운의 때를 만나 외람되이 공경(公卿: 정승 판서)에 올랐으니 조심스럽고 두려운데 어찌 사치하여 스스로 망하기를 재촉한단 말이오. 부들자리도 불안한데 하물며 비단방석이야 말해 무엇 하리오” 하고 한탄하니 부인이 부끄러워 하며 사과하고 곧 비단방석을 뜯어버렸다. (燃藜室記述)

< 휴가 중에 두 번이나 어의(御醫)를 보내다. >
    효종9년(1658) 영의정을 사직하고 휴가를 청하여 남중(南中)에 내려가 가묘(家廟)와 선묘(先墓)에 전배(展拜)하였는데 또 역병(疫病) 을 강작(强作: 무리하게 힘을 냄)하여 돌아 오는데 도중에 병세가 더한 것을 임금이 알고 내의를 보내 약을 내리고 도신(道臣)에게 하명하여 간호를 철저히 하도록 하니 공이 더욱 불안하여 내의를 돌려보내니 임금이 또 다시 내의를 내려보냈다.
    이듬해 4월에야 공이 조정에 돌아왔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영릉(寧陵)의 선정 >
    효종10년(1659) 임금이 승하하였는데 산능의 위치를 정하지 못해서 윤선도(尹善道)가 수원부내(水原府內)가 가장 길지라고 주장했는데,

    공이 말하기를 “신하의 정성을 다 할 것이 산능인데 수원은 사통오달(四通五達)한 곳으로 후일 오환(五患)을 면치 못할 자리라”고 하면서, 5차에 걸친 상소를 하니 임금(현종)도 마침내 공의 정성에 감격하여 건원릉(建元陵: 태조의 릉) 우강(右崗: 오른쪽 날등)에 개복(改卜)하니 곧 영릉(寧陵)이다.(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유소(遺疏) >
    효종의 국상을 당한 후로 공은 애통해 하기를 친상과 다름이 없이 하였는데, 이듬해 현종1년(1660)에 계제(季弟) 연성(延城 휘 時昉)의 상을 당하여 너무 비통해 하다가 병이 더욱 심하여 그 해 5월 2일에 태평방(太平坊: 현 태평로) 우수(寓舍: 거처하던 집)에서 수80으로 고종(考終: 명대로 살다 죽음)하였다.

    공이 임종에 가까워 지면서 구두로 유소(遺疏)를 남겼는데 주상(主上)께서는 덕업(德業)을 진수(進修)하고, 형벌(刑罰)을 신중히 할 것을 말하며 겨우 반부(半部)에 그침으로 공의 제자(諸子)들이 그대로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보고 매우 슬퍼하였다.

    병이 더할 때부터 의문(醫問: 내의의 방문)이 그치지 않더니 상을 당함에 상장(喪葬)을 비호(庇護)하고 은영(恩榮)에 천은(天恩)이 보통 예보다 더하였고, 위로는 진신(縉紳: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상민에 이르기까지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진 재상이 돌아가셨다"고들 하였다.
    7월 17일에 천안군 자매곡(紫梅谷)에 장사지냈는데 출상할 때 횃불을 들고 따르는 사람이 십여리에 이어졌다. (宋時烈 찬 公의 神道碑文)

< 전고대방(典故大方) 상신록(相臣錄) >
    1924년 한양서원 발간 전고대방 상신록에 공에 대한 요약된 기록이 있다.
    공은 연인이씨로 자는 돈시, 호 조암, 시호 충익이다. 인조 계해년(1623, 인조반정의 해)에 정사공신 2등에 책훈되고, 즉시 수원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연양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전투에서 많은 공적을 쌓았고, 소현세자가 죽자 임금(인조)이 원손이 어리다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공은 백강(李敬與)와 함께 세손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경인년(효종1년, 1650) 우의정 제수되어 영의정까지 올랐고, 훈련대장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기록되었다.
    공은 울면서 말하기를 “지금 국세가 누란의 위기와 같은데 어찌 임금이 꽃이나 감상하고 있을 마음이 있겠아옵니까?” 하였다. [ 이는 위의 금사낙양홍(金沙洛陽洪) 이야기를 말하는 것임 ]

    (延安人 字敦詩 號釣岩 諡忠翼 仁祖癸亥策靖社二等 ?拜水原府使 延陽君 南漢之役多著功績 昭顯薨元孫幼 上欲立孝宗爲世子 公與白江主立世孫之論 庚寅大拜右至領 訓將 淸白吏 公涕而言曰方今國勢與卵上何心玩)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소재 연양부원군 묘소와 묘표석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 위치, 인조11년(1633) 4월 18일 졸하자 교하에 장사지냈다가
2년뒤 인조13년(1635) 9월 17일 현 위치 괘성산 아래로 이장
오른쪽 贈貞敬夫人 南原尹氏, 왼쪽 貞敬夫人 昌原黃氏
연양부원군 묘소 참배
2006년 6월 6일 연성회 선조유적 탐방시 연양부원군 묘소에 참배하였다.
◆ 사우당공(四友堂公) 휘 시담(時聃)
▶ 개요
    - 선조17년(1584)-현종5년(1665) 수82
    - 자 자현(子玄), 호 사우당(四友堂), 봉호 연풍(延豊)부원군
    -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貴)의 2자로서 중부(仲父 휘 資)에게 계출(系出: 양자)
    - 배: 한산이씨(韓山李氏),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
    - 묘와 묘갈비: 대전 유성 갑동 장군봉하 국립현충원내, 송준길(宋浚吉) 찬
사우당공(四友堂公 휘 時聃) 묘소와 묘갈비

<묘갈비명: 첨부10. 사우당공(四友堂公) 묘갈비명(墓碣碑銘) 참조

<대전국립현충원 내 묘소 유지 경위: 첨부11. 사우당공(四友堂公) 사패지(賜牌地) 참조>
▶ 관직
    - 광헤5년(1613)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
    - 인조1년 계해년(1623)에 광해군의 난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입기명륜(立紀明倫: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인륜을 밝게함)’의 기치 아래 일어 선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政) 때 형 시백(時白), 제 시방(時昉)과 함께 부친을 도와 반정이 성공함으로써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어 유성 갑동의 산과 땅 그리고 집 전장(田庄)을 사패지로 하사 받음.
    - 인조2년(1624) 선교랑(宣敎郞:종6품)으로 내자시 (內資寺) 주부(主溥:종6품), 사헌부(司憲府) 監察(감찰: 정6품), 사직서 (社稷署) 령(令: 종5품)
    - 인조3년(1625) 남평(南平: 전남) 현감(縣監: 정7품)
    - 인조6년(1628) 순창(淳昌: 전북) 군수(郡守: 정5품)
    - 인조9년(1631) 김제(金堤: 전북) 군수(郡守: 정5품)
    - 인조11년(1633) 연평부원군 치상 후, 담양(潭陽:전남) 부사(府使, 정4품, 부임전 오부인 상처로 미부임)
    - 인조16년(1638) 대구 부사(府使: 도호부사, 정4품)
    - 인조20년(1642)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정3품 상)
    - 인조20년(1642) 담양(潭陽: 전남) 부사(府使, 정4품)
    - 인조24년(1646) 능주(綾州: ) 목사(牧使: 정3품상)
    - 인조26년(1648) 강능(江陵) 부사(府使,정4품, 병으로 사임)
    - 인조26년(1648) 회복 후, 광주(光州) 목사(牧使: 종3품)
    - 효종3년(1652) 충주(忠州) 목사(牧使: 종3품, 병으로 사임)
    - 현종4년(1663) 80세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동지중추 부사(同知中樞府使:종2품)
    - 현종6년(1665) 졸,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병조 판서(兵曺判書: 정2품)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정2품), 묘 공주 갑촌 갑하산 옥녀봉 남쪽 사패지 내 (지금의 대전 제2현충원 장군묘역 右,上)
▶ 미담과 일화

    - 사우당공은 남평, 순창, 김제, 대구, 담양, 능주, 광주, 충주 등 8개 고을에 수령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잘 다스려 명관(明官)으로 이름이 났는데, 특히 순창, 능주, 광주에는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 사우당공은 오언시(五言詩)를 잘 지었고, 서예에 능하며, 그림을 잘 그렸다. 만년에 금마(金馬: 전북익산)에 가당(家堂)을 짓고 매(梅: 매화), 죽(竹: 대나무), 연(蓮: 연꽃), 국(菊: 국화)를 심고, 이들을 즐겨 그림으로 그리면서 당호(堂號)를 사우당 (四友堂)이라 하고, 또 이를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첨부1. 시조(始祖) 관련자료 모음
이성영홈페이지 >> 연리이야기 >> 시조관련자료 모음
첨부2.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신도비명(神道碑銘>
공주 이인면 만수리 소재 연평부원군의 신도비
延安之李來自唐室(연안지이내자당실) 연안이씨(延安李氏)는 당나라 종실로부터 와서
樗軒之後百年乃復(저헌지후백년내복) 저헌(樗軒)의 뒤에 백년 안에 다시 회복되니
其復伊誰月沙與公(기복이수월사여공) 그 회복한 이 누구뇨 월사(月沙)가 공(公)과 더불어 하였도다.
彼以文章公以勳庸(피이문장공이훈용) 월사는 문장(文章)이요 공은 훈업(勳業)이라
一時兩大莫我與隆(일시양대막아여융) 한 때에 두 대가(大家)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업도다.
公始孤童來自南?(공시고동내자남추) 공이 처음 아버지를 여윈 아이로 남방 촌에서 와서
爰倚大賢才俊遍遊(원의대현재준편유) 대현(大賢: 우계,율곡)을 의지하고 재주있는 준걸들을 두루 가귀었도다.
山頹無何凶逆噴沙(산퇴무하흉역분사) 산이 무너지자(선조승하) 오래되지 않아 조정에 귀역(鬼逆)이 기운을 토하였도다.
朝中連結勢不可奪(조중연결세불가탈) 조(朝)-중(中)을 연결하니 그 형세를 만회하지 못하도다.
至於陜奸山林託跡(지어합간산림탁적) 합천(陜川)의 간인(奸人: 정인홍을 말함)이 산림에 탁적(託跡)하며 선동하고
鼓吻欺天衆皆脅息(고문기천중개협식) 천청(天廳)을 속이니 온 무리가 다 위협에 숨을 죽이도다
公無所恃寸管寸舌(공무소시촌관촌설) 공은 믿을 게 없어 한치의 붓과 한치의 혀 뿐이라
一言破之?枯振落(일언파지최고진락) 한 말씀으로 갈파(喝 口皮) 함에 자빠지고, 말라 시들어 떨어지도다.
倭化漫天八路波蕩(왜화만천팔로파탕) 왜화(倭禍)가 하늘에 가득하고 팔로가 물결치고 들끓으니
痛哭西走從駕草莽(통곡서주종가초망) 통곡하며 서쪽으로 달려가 풀밭 속에 대가(大駕)를 호종하였네
?力出入民間兵間(탄력출입민간병간) 민간과 군대 안을 힘을 다해 출입하며
人從事辯相臣敬歎(인종사변상신경탄) 사람들 따르고 일이 잘 처리되니 정승도 탄복하네
昏朝滅德塗炭民罹(혼조멸덕도탄민리) 혼조(昏朝:광해군)가 덕이 없어 생민이 도탄에 빠져 근심하네
賊臣逢惡虐及母儀(적신봉악학급모의) 도적 같은 신하들이 악을만나 폐모에까지 미치니
綱常淪亡宗社점危(강상윤망종사점위) 강상(綱常)이 윤망(倫망)하고 종사가 낭떠러지에서 위태롭도다.
起而正之天日重新(기이정지천일중신) 떨쳐 일어나 바로 잡으니 하늘의 해가 다시 새로와 지도다.
固知大功不出常倫(고지대공불출상륜) 확고히 알 수 있는 큰 공업(功業)은 인륜에 벗어나지 아니한 것이라.
一心無他惟國是循(일심무타유국시순) 한 마음 다름이 없고 오직 나라만을 위함이라.
多言觸犯忘身憤世(다언촉범망신분세) 말이 많이 촉범(觸犯)되니 일신은 잊어버리고 나라만 생각하도다.
幾顚幾覆不悔益?(기전기복불회익려) 엎어지고 자빠지기 몇번이뇨 후회 않고 더욱 매진하도다.
公在朝廷人多憚顧(공재조정인다탄고) 조정에 있을 때는 꺼리고 조심하는 사람도 많더니
自公之逝?舞狐號(자공지서추무호호) 공이 가신 뒤로는 미꾸라지와 여우(소인)가 춤을 추도다.
上厭其直?折何屢(상염기직최절하누) 임금이 곧은 것 꺼리니 최절(?折) 당하기 몇 번인가
亦賞其忠極其恩遇(역상기충극기은우) 그러면서도 그 충성 기리고 그 은우를 베푸는데 극진하였도다.
公有男子忠貞是嗣(공유남자충정시사) 공의 아들 있어 충정을 계승하니
事業家聲百世可紀(사업가성백세가기) 사업과 가문의 명성은 백세에 벼리(紀)가 되려니
刻詩墓碑以示來祀(각시묘비이시래사) 묘비에 시를 새겨 오는 해(훗날)에도 보게 하리라
첨부3. 회천(回天)의 새아침>
- 인조반정의 주역 연평부원군(귀)를 중심으로 -
延安李氏宗報 제3호 哲培
인조반정을 의미하는 삽화(億榮畵)
<서언>
    조선조 중기 유학자의 영수 율곡선생과 우계선생 문하에서 도학을 전수하신 당대의 유학자이며 애국자이신 연쳥부원군(延平府院君) 휘 귀(貴)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으셨다.
    모친이신 안동권씨의 태몽에 이인이 나타나 옥척(玉尺)을 주면서 “당신 집에 훌륭항 아기가 태어날 것이니 이 자를 잘 간수하라”고 하는 꿈을 꾸었고, 또 집에 있는 항아리 속에 마음이 쏠려 뚜껑을 열어보니 물이 가득차 있고, 그 안에 흰 용이 서리고 업드려 있는 꿈을 꾸고, 1557년(명종12년) 3월 1일에 공을 낳으셨다. 그로 인해 아명을 영룡(盈龍)이라 지어 불렀다.(崔鳴吉의 延平行狀에서)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공신들은 공신임을 빙자하여 직권을 남용해 세도를 부리고 재물을 긁어모아 부귀영화를 누리는게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국왕 앞에 형식적인 신하의 예만 갖출 뿐 실제는 국왕 위에 군림하다시피 해 국가 대사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사람들에게 원성을 사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로 인해 공신치고 후대에까지 가문의 명망을 이어 간 예가 거의 없다.

    이러한 추세와는 달리 공께서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면서도 높은 벼슬, 세도, 재물 등 개인의 영달에응 고개 한 번 돌리신 일이 없이 오히려 겸양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으셨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인품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공의 인품은 거사 후 공신들의 벼슬 논란에서 나타난다. 거사가 성사된 직후 공신들이 최명길의 집에 모여 서로 높은 벼슬을 차지하려고 다툴 때 공께서는 “나는 광명정대(光明正大)했노라” 오직 이 한마디만 남기고 자리를 뜨셨다.
    이는 거사의 목적이 사리사욕에 있는 게 아니고, 순수한 구국의 일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입증하는 한 예다. 또 당대 굴지의 유학자이자 노 선비의 기품으로 공신들의 추앙과 세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영수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셨음이 그 인품을 가히 짐작케 한다.
<光海君 시대의 부패>
    인조반정이 광해군 시대의 난세에서 비롯된 구국의 일념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난세에서부터의 공의 행장을 살펴보면---

    광해군 시절 이이첨, 정인홍 등이 인목대비를 폐모키로 모의하고 적기를 기다릴 때 박응서, 서양갑 등 서자들이 살인 강도질을 하다 잡혔는데 , 이를 모진 고문으로 역모로 무고케 하여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깁제남을 처형하는 등 옥사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 때 공께서 이덕형에게 서신을 보내 이에 연루된 무고한 인사의 구명을 호소했으나 이덕형의 답은 “당연하지만 사세가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옥사는 점점 확대되어 김제남과 영창대군이 처형되고, 드디어는 폐모론까지 대두됐다. 이에 공께서는 선비들을 모아 연명으로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셨지만 광해군의 태도는 미미할 뿐이었고, 이이첨, 정인홍 등은 더더욱 방자해 지기만 했다.
    공께서는 계속 상소를 올렸으나 이이첨 등은 심악하기가 극에 달해 헌부에 명해 상소문을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1616년 엉뚱한 사건으로 잡혀온 죄인들을 고문하여 또 역모로 몰아 해주목사 최기가 역모의 괴수라는 자뱍을 받어낸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최기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평소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닥쳐올 화를 겁내 감히 문안조차 못 할 때 유독 공만은 그를 방문해 위로해 주었다. 이로 인해 공께서 탄핵을 받고 강원도 이천으로 귀양을 가셨다.
<救國의 결심>
    큰 자제 시백(時白)께서 부처에 오셨을 때 시 한수를 지으셨다.
        ?嗟龍兮德何衰(우차용혜덕하쇠) 아- 용바위 어찌 덕이 없어졌는고
        長臥波心世不知(장와파심세부지) 세상사 내 마음 몰라 나 여기 있게 하네
        莫笑隆中諸葛老(막소융중제갈노) 융중의 제갈선생 웃지마시오
        慇懃三顧豈無時(은근삼고기무시) 정중한 삼고도 설마 때가 없었는지

    (다른 번역: 1990. 11.25 東信出版社 간 名句選解, 朴喜昌) 아! 용이여. 덕이 어찌 쇠했다 하는고/ 물결 복판에 길게 누어 있으니 세상은 다 모르네/ 융중에 있는 제갈공명 비웃지 말라/ 은근히 삼고초려 한 것이 어찌 때가 없을소냐

    이에 시백께서 답하기를
        愧恨當年漢業衰(괴한당년한업쇠) 한나라 망할 때 부끄럽고 한도 많았으니
        變形爲石不求知(변형위석불구지) 이 돌 변하지 않아 지혜 구할 수 없어요
        深潭八處猶回首(심담팔처유회수) 망설이지 마시고 새 세상 찾으세요
        空憶隆中覺夢時(공억융중각몽시) 융중사 헛된 생각 꿈에서 깨소서

    공의 시는 광해군조를 한탄하는 것이며, 이에 시백께서 새 세상을 찾자고 답한 것으로 이 때부터 구국의 의지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나시고부인께[서 병환이 위중하여 경기도 고양의 사가에 와 계실 때(1621년) 이이첨이 인목대비의 폐모를 모의하였다.
    한교란 사람이 이를 알아내고 공을 찾아 와 전했다. 공께서 “명나라 황제가 이 일을 안다면 이이첨은 시역죄인이 되어 당연히 처형될 것”이라며 이를 이이첨에게 전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이 전달되어 폐모의 시기를 다소 늦췄고, 대비의 목숨을 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622년 4월 부인상을 당하셨는데, 신경진이 조상을 왔다. 한 번 만난 정도여서 다소 괴이하게 생각했는데, 신경진이 “공께서 서용(敍用)되는데 좋은 기회이니 벼슬을 하시죠?”하자
    공이 우스갯소리로 “지금이 가히 태평성대라고 할 수 있나요? 이 일로 인해 내가 고변이라도 당하는게 아닌지 모르겠소” 라고 답하시자
    신경진이 정색을 하고 “나를 먼저 고변하시죠” 하니
    공께서 그의 진심을 감지하시고 “곧 반정의 대사가 있을 것이오”하시니 신경진이 동참할 것을 맹세했다. 즉시 시백을 불러 밀책을 모의하였다.

    이 때부터 거사는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최면길, 김자점, 심기원 등과 합세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벼슬에서 추방당한 선비들이어서 그 힘이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반정을 하기 위해서는 군사와 재력이 있어야 하고, 군사를 통솔할 만한 지장이 있어야 했다.
    그럴 즈음 날개를 하나 얻게 됐다. 공께서 평산부사에 등용돼 병권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공의 큰 따님이신 예순(禮順: 김자겸의 부인, 김자점의 제수)의 힘이 컸다는 설이 있다.
    여사께서 거사를 돕기 위해 개사 김상궁에게 접근, 뇌물을 주고 공의 벼슬을 산 것이다.
<擧事의 본격화>
    자제 시방(時昉)을 연락책으로 한양에 남겨두고 평산부사에 부임하여 거사계획을 본격화 하기 시작했다. 평산을 본거지로 하여 거사 준비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고, 신경진이 평안병마사를 버리고 거사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사방으로부터 정황 보고가 왔다.

    신경진의 뒤를 탐지한 영의정 박승종이 “신경진은 장수의 재목으로 뛰어난 사람이나, 친척이 옥사에 연루되어 목매 자살한 후부터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원망하며, 평양으로 부임하지 않고 평산에서 배회하고 있으니, 그의 마음을 풀어준다는 명목을 내세워 불러들여 조사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신경진이 한양으로 떠났고, 공께서는 “벌써 발각이 되다니 분하기 짝이 없다. 평산이 모의 본부로 알려진 모양이니 한양에 가서 최명길, 김자점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한준견, 이명과 내통하여 국난을 은밀히 서둘러라”며 심기원을 뒤따라 보냈다.

    그해 12월 거사를 결심하고 장단 방어사 이서와 합세하여 홍의동에서 호랑이를 몰아 잡는다는 구실로 휘하 속읍의 군사를 동원시켰다.

    그러나 고변자에 의해 실패하고, 사태는 예측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됐다. 이 때 예순여사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얘기가 있다. 김개시를 구워삶아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공만 파직 당하는 선에서 일단락된 것이다.
   
    파직되고도 공은 고양의 사가에 돌아오시어 거사 모의를 계속하셨다. 그러나 공을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는 상소가 들어가고, 이이첨으로부터 감시를 받는 등 거사 준비는 스릴 속에 진행됐다.

    이무렵 능양군(인조)이 심기원을 통해 거사자금을 댔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크게 용기를 얻어 거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고 한다.

    훈련대장 이흥립은 공과 동향사람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지만 박승종과 사돈 간이라 설복하기가 매우 위험한 인물이어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그의 사위인 장신(張紳: 張維의 동생)이 나서 설득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반정군이 무혈 입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한밤의 擧事>
    1623년 3월 13일. 드디어 거사의 날이 왔다. 모의를 시작한 지 만 1년이었다. 밤 10시. 집결지는 홍제원(弘濟院)으로 하고, 김유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집결지에는 김자점, 송영망, 한교 등이 모집 인솔해 온 의병 수백명만 와 있을 뿐 김유와 이괄 등 무관을 비롯 태반이 오지 않아 불안한 감이 돌고 있을 때,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장유가 헐레벌떡 달려와 “고변자가 있어 박승종 등이 국청(鞠廳)을 차리고 있으며, 훈련도감 중군 이곽이 포수(조총 및 화포수) 수백명을 인솔하여 창의문에 포진하고 있다”고 했다.
    이로 인해 의병들 마저 술렁대기 시작해 거사는 이미 실패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 때 이괄이 도착하여 공께 예를 올렸다. 공께서 이괄의 손을 잡고 절박한 상황을 알리며 “공을 총지휘관으로 삼겠으니 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출전토록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이괄을 총수로 임명한다! 모두 총수의 명령에 따르라! 복종치 않는 자는 참할 것이다!”라고 전 의병에 호령하셨다.
    이에 따라 전군은 군열을 정비했고, 이괄의 군관이 미리 준비한 ‘義’자를 전 병사의 등에 붙여 반정군의 표시를 했다.군의 사기가 회복되고, 교전태세가 갖춰졌다.

    이 때 김유의 전령이 달려와서 김유, 심기원, 원두표 등이 모화관(慕華館: 중국 사신의 영빈관)에 집결해 있으니 전군을 그리로 이동시키라고 전했다.
    이에 이괄이 대노하여 공께서 설득하여 모화관으로 이동하고 지휘권을 김유에게 넘기도록 했다.

    모화관에서 출진한 의병은 다시 홍제원에 도착하여 심기원이 사병 200명과 장단부사가 인솔해 온 관병 200여명을 합류함으로써 사기가 충천했다.

    김유가 군 점검을 할 것을 면하자 시백께서 “군 점검을 하다 보면 날이 샌다. 각 대장들은 백전노장들이다. 각 대장들에게 지휘권을 주었으니 현 대형으로 진격하자. 시간이 촉박하다”며 제지하였다. 김유가 이에 응락하고, 심기원, 김자점, 최명길, 송영망, 신경유 등에 선봉군을 인솔케 하여 출진하였다.

    창의문에 다다르니 선전관이 성문을 굳게 닫고 저지했다. 선발대가 달려들어 성문을 부수고 선전관의 목을 베었다.
    의병은 파죽지세로 창덕궁을 향해 진격했다. 이 때의 북소리와 함성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창덕궁 궐문 앞에는 이흥립의 훈련도감병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곽 또한 포수를 지휘 포진하여 저지했다. 의병군은 이에 따라 공격대형으로 대치했다.

    이 때 이흥립이 궐문을 나와 “쏘지 마라!”고 소리쳐 명령하고, 말머리를 돌려 길을 비켰다. 이곽도 따라서 병력을 다리 옆으로 퇴각시켜 길을 열어 줬다. 의병군은 삽시간에 인정전으로 진입했고, 대궐을 완전히 장악했다.
<回天의 새아침>
    뒤이어 대궐에 들어 온 인조가 용상에 앉아 공신들을 인견함으로써 회천의 새아침을 맞은 것이다. 그 때 광해군과 세자, 그리고 이이첨, 박승종 등은 모두 도피했을 때였다.

    이 날 숙직이었던 이덕경, 윤지경, 이행원 등은 인정전으로 나와 엄청난 광경에 놀라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가 거사가 성공했음을 알고 인조 앞에 큰 절을 올렸다. 공께서 호위대장에 이조참판, 동지의금부사를 겸직하시게 됐다.

    평복을 하고 민가에 숨어 있던 광해군이 잡혀 들어왔고, 이이첨의 하수인 한찬남, 이위경, 정몽필 등이 잡혀 들어왔다.
    공께서 왕명을 받아 이이첨의 수하인들을 참수하셨는데 이 때 성안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환성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으며, 심지어 달려들어 죄인들의 배를 칼로 찌르고뼈까지 잘랐다.

    이어 이이첨이 채포되었다. 형장으로 끌려갈 때 공을보고 “전에 내가 대감의 말을 듣고 대비를 오늘까지 안전하게 보호했소. 그 공으로 나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간청했다.
    이에 공께서 “그 말은 내가 한 말이다. - 그 생각은 내가 한 것이지 이이첨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뜻 ? 그 공이 어찌 너의 것이될 수 있느냐?”고 하시자 이이첨은 할 말을 잃은채 고개를 떨구고 형장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先覺者의 고난>

    1627년(인조 5년) 즉 정묘 정월 후금이 국경을 침공하여 어가가 강화도로 몽진했다. 후금의 침략군에 가담한 강홍립이 강화를 청해왔다.
    이 때 조정 중신들은 불법 침범을 분하게 여기고 강화를 반대했다. 그러나 공신들을 대표한 공께서는 “국가의 존망이 위급한 형편이다. 앉아서 말로만 저들을 격퇴할 수 없다. 고식지계로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 예봉을 피해야 한다” 면서 강화를 주장하셨다.

    홍문관쪽은 척화를 주장했고, 공신들은 강화를 주장했다. 홍문관의 윤황은 명과의 의리를 들어 공을 중벌로 다스려야한다고까지 주장하며 척화를 내세웠다.
    그러나 의전회의에서는 강화를 결의, 3월 22일 후금과 강화를 약정함으로써 후금군이 물러가 일단은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무, 윤황 등은 상소를 올려 “피란 갈 때 시백이 방자하게도 그의 군관을 보내 가족을 보호하고, 재신(宰臣)을 모욕했다”고 무고하고, “공을 처벌하고, 시백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정국이 험악해 짐에 따라 공께서 사직 상소를 올리고, 한강변 정자에 은거하였다.

    인조가 환도하기 전에 공께 환도시 어가를 호위해 줄 것을 명했으나 “신의 나이가 71세로 노쇠하여 전하를 가까이 섬길 수 없습니다”고 사양하였다.

    임금이 환도하자 척화파들은 또다시 공을 탄핵하기를 “이귀는 진회(秦檜: 중국 남송 고종 때 재상으로 岳飛를 무고하여 죽이고, 주전파를 탄압하여 금과 굴욕적인 강화를 채결한 간신)와 같은 사람이다. 강화파의 당수로서 국정을 크게 그르친 원흉”이라고 했다. 이에 인조가 공을 불러들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무가 나서 강화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에에 대해 공께서 “송이 금의 침공을 받을 때는 송은 국력이 부강했고, 악비는 유능한 군략가로 막강한 군사력이 있어 능히금을 격퇴할 수 있었으나 진회는 정권욕으로 악비를 모함하여 죽이고, 강화를 억지로 채결한 만고의 죄인이다. 이무는 이길수 있는 힘을 가진 악비를 모르고 종사의 존망도 돌보지 않은채 큰소리만 치는 한탁주(韓 人宅 胄: 송의 정치가로 송나라의 국력이 미약할 때 억지로 금과 전투를 벌려 패한 자)와 같은 무리다” 라며 강화의 타당성을 밝히셨다.

    그러나 척화파들은 일제히 “임금을 속이고 자기 정권욕에 사는 무리들”이라고 혹평하고, 공을 “처벌해야한다”고 반박했다. 심지어 “임금 위에 올라선 자들”이라며 강화파를 공략햇다.
    이에 인조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겠다”며 종식시키려 했으나 윤환등은 척화를 계속 주장했다.
    공께서 사직 상소를 올리고 은거하니 인조는 “국사는 위중하고, 그대의 명예는 사소하다. 다시 돌아오라”고 간청하고, 노대신이 적구도 아닌 신료들에 의해 망신을 당했음을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당시 반정공신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흔들 수 있었고, 벼슬 또한 정승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은 최고 좌찬성 밖에 오르지 않으신 것과 척화파들에 대해 일체의 정치보복을 가하지 않으셨음은 공의 인품을 가늠할 수 있으며, 그 후 몇 년만에 병자호란이 일으났음을 볼 때 공의 선견지명임을 알 수 있다.

    1633년(인조11년) 공께서 서거하셨다. 당대의 거목이, 아니 역사 속의 거목이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수 77세로. 끝

    (필자의 말) 이 글은 공신력을 기하기 위해 선조들께서 기록하신 것을 피하고 최면길이 쓴 ‘연평행장’‘노랄수사(老?隨辭)’에 의한 것이다.
공의 인조반정 정신, 光明正大
반정 성공후 논공행상을 다투는 자리에서 공이 한 말
첨부 4, 묵재공(默齋公)의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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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5, 회룡사 번뇌(回龍寺 煩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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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6, 南漢山城과 延平府院君 三父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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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7, 연평부원군의 자식 훈계
연평부원군이 장자 이시백을 훈계한 이야기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동평위공사문견록(東平尉公私聞見錄)에 전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과 연양시장(延陽諡狀)에 전하는 이야기다.

(1) 전자는‘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의 일로서 인조2년(1624) 이괄이 난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인조는 호위대장을 겸하고 있는 이조참판 연평부원군 이귀를 시켜서 강탄수(江灘守: 임진강 여울목 방어진지)에 나가 방어 형편을 보고 그 곳에서 적을 물리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귀가 그 곳에 갔을 때는 이미 수졸(守卒)들이 다 도망가고 없고 반군은 임진강을 건너 관군이 패했다는 보고가 서울 까지 들어 올 상태였다.

    여기서 잠시 ‘이괄의 난’의 경과를 살펴보고 이야기를 계속하자. 광해15년(1623) 북병사(北兵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인조반정에 뒤늦게 참여하여 정사2등공신이 되어 한성부윤(정2품)이 되었다가 관서지방에 변환(邊患)의 징조가 있다 하여 도원수 장만 휘하 부원수 겸 평안도 병사(兵使: 종2품)로 좌천되어 나가 영변에 머물고 있었다.

    이괄은 인조반정 공신책록(2등)에 불만이 있는데다가 변지로 내보내면서 1품계 좌천 된데 불만을 품은 이괄은 수하의 이수백, 기익헌 등과 모의하여 반대하는 도사를 죽이고, 구성(龜城: 龜州)부사 겸 순변사(巡邊使) 한명련과 함께 인조2년 1월 28일 난을 일으켜 순사 1만 여명과 항왜병(降倭兵) 1백여명으로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 형조판서 이시발, 대사간 정엽을 부사, 이수일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삼아 반군을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순천, 자산, 평양을 점령하고 중화, 수안, 황주를 거쳐 평산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과 장만의 추격군이 서흥에서 합류하여 저탄(猪灘)에서 반군과 충돌하여 격전을 벌렸으나 관군이 패하였다. 반군은 사기충천하여 개성을 돌파하고 순식간에 벽제에 이르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고 반군은 서울을 점령하여 이괄은 2월 11일 선조의 제10자 흥안군(興安君) 제(?)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논공행상을 하였다.

    그러나 그 날밤 패잔병을 수습하여 추격해 온 도원수 장만 휘하의 관군이 안령(鞍嶺: 서대문 밖 질마재)에서 크게 격파 당하자 이괄은 잔도와 함께 광주를 거쳐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 정충신의 추격을 받자 15일 이천 묵방리에서 이괄의 부하 이수백, 기익헌 등이 이괄, 한명련 등 반군 괴수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니 잔당들은 모두 흩어지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러한 ‘이괄의 난’경과에서 보듯이 정예 편성된 토벌 관군도 반군을 당하지 못하고 패하였는데 단신으로 급파된 연평부원군은 전황을 파악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본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런데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는 계곡(谿谷) 장유(張維: 후에 조선 4대문장가 중의 한 사람)가 사간(司諫) 오숙(吳 肅羽)과 함께 인조를 청대하고 이귀를 반란군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군율로 처벌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으나 인조는 이귀의 잘못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 때 장유는 이귀의 장자 연양부원군 이시백과 동문이고 또 우정이 두터워 형제같이 지나는 사이였다. 이귀가 아들 이시백을 불러 훈계하기를 “잘못해서 군기(軍機)를 놓치면 법으로 마땅히 처벌 받게 되어 있다. 장모(張某)가 임금에게 나를 군율로서 처벌하라 한 것은 그의 직책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다. 너는 그를 결코 원수로 여기거나 멀리하지 말고 우정을 유지하여라” 하였다.

    그리고 또 이귀는 장유를 불러서 이시백과 대면케 하고 구정을 상하지 말도록 이르니 이시백이 부친의 명에 따라 그대로 장유와 왕래하였다.

    이괄의 난 때 이시백은 협수사(協守使)로서 군사를 모집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공을 인정 받아 수원부사에 임명되었다. 수원은 서울에서 가까워서 유사시 서울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한시도 군사 점검과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곳이다.

    이시백이 수원 부사로 있을 때 항상 걱정스러운 것은 부내 수천명의 군사와 말들이 각 마을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위급한 일이 생겨도 군사들을 모으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시백은 열 발쯤 되는 긴 장대를 언덕 위에 깃대를 세우고 군사들과 약속하기를 “위급하면 내가 이 깃대에 방색기를 달고, 자호포를 세번 쏠 터이니 깃발을 보거나 포성을 들으면 서로 알려서 아무도 시간에 늦지 말고 달려 오도록 하라” 하였다.

    정묘호란통지가 있자 이시백은 깃발을 달고 포를 쏘게 한 다음 갑옷을 입고 정문에 앉아서 군사들이 모이는 상황을 직접 점검하였다. 오시(午時: 12시) 경에 모든 군사가 다 모였다. 무장을 모두 갖추고 이시백이 직접 거느리고 밤을 도와 서울로 향했는데 동작나루에 도착하여도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임금이 이시백을 불러 이르기를 “그대들은 어찌 귀신처럼 빠르느뇨?”하였다.

    이렇게 이시백은 첫 관직으로 나간 수원부사 임무를 열성을 다하여 수행했던 것이다.

(2) 세월은 흘러 인조7년(1649) 이시백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어수당(魚水堂: 임금과 신하가 접견하는 곳)에서 임금과 마주 앉아 여러 가지 나라일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선친 이귀의 이야기에 이르러 이시백이 말하기를 “신이 수원을 맡았을 때 집(서울)에 와서 선신(先臣: 임금 앞에서 자기 부친을 부르는 말)을 뵈었더니 선신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요즈음 어떻게 다스리느냐?’고 묻기에 답하기를 ‘요즈음 듣건대 누가 아버님께 수원(이시백을 말함)에서 밤낮으로 군사를 준비하는데 그 마음을 추측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니 인심이 이 지경이라 비록 나라 일에 정성을 다하고자 하여도 그 사세가 어렵습니다’ 하였더니 선신이 이 말을 듣고 몹시 노하여 신을 뜰 아래 꿇어 앉히고 는 ‘임끔께서 너의 무능함을 살피지 않으시고 중대한 일을 맡겼으니 소신 껏 성의를 다 할 뿐이지 어찌 네 몸을 돌보며 남의 허망한 말에 귀를 기울여 제 직책의 수행을 망치려 하느냐’ 하면서 신에게 매를 때리려 하자 친척들의 만류로 그만 두었습니다”하였다.

    인조가 한참 동안 이시백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옆에 있는 세자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들은 너의 팔다리와 같으니 뒷 날 이들을 대하기를 내가 한 것과 똑같이 하라”하였다.

    흔히 공이 큰 공신이 그 위세로 높은 관직에 오르고 권세를 틀어쥐고 조정을 좌지우지하다가 말년에는 끝이 좋지 않고 패가망신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연평부원군 이귀는 반정을 주동하여 인조 임금을 세운 1등공신이다. 그러나 자신은 공명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광명정대(光明正大)’했음을 천명하면서 스스로는 그 흔한 정승에도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 두 이야기와 같은 대범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구국의 일념으로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그는 청사에 그 이름을 빛나게 하였고, 그 후손들에게는 9대를 이어 11인이 봉군(封君)되는 음덕을 내렸고, 종묘 인조실에 배향(配享)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다. 끝
첨부 8, 연양부원군 신도비명(神道碑銘)
尤庵 宋時烈 찬
천안 광덕 매당리 소재 연양부원군 신도비
天眷王家乃生忠定(천권왕가내생충정) 하늘이 큰 집안을 권고(眷顧:돌보아)하사 충정공(忠定公: 휘 貴)을 나게 하시고
亦 田아래ㅠ 賢子子孝而義(역비현자자효이의) 또 현명한 아들을 주시니 아들은 효성스럽고, 의로우며
亦勇且智父子知己(역용차지부자지기) 또 용맹하고 지혜로우니, 부자가 지기(知己之友,속마음을 알아는 주는 친구)가 되었다.
大功旣樹宗社雖安(대공기수종사수안) 대공을 이미 세워서 종사가 비록 안정되었다 하나
革日未己乃?我誠(혁일미기내탄아성) 이후로도 나를 생각지 않고 이에 내 정성을 다하고
乃竭我力乃盡我?(내갈아력내진아췌) 이에 내 힘을 다하며 이에 내 병든 몸을 바치도다
彼具貝玉婢珠僕犀(피구패옥비복복서) 남들은 패옥(貝玉:보석)을 가져서 비복(婢僕:노비)까지 사치하나
我寶不取彼華宅第(아보불취피화택제) 나는 보물을 취하지 아니하고 남은 택제(第宅:집과 정자 등)를 화려히 하여
戶綺墻繡我安露地(호기장수아안노지) 문호까지 비단으로 장식하나 나는 땅바닥에 앉아 이슬맞아도 편안하네
我豈不침人莫我同(아기불침인막아동) 나는 어찌 생각 지 아니하랴마는 사람들은 나와 같지 아니하도다
難平者事王室在難(난평자사왕실재난) 일은 평탄한 것이 어려워서 왕실이 난국에 빠지니
衆謀要君公曰寧死(중모요군공왈영사) 사람들은 (靑과)군신으로 대하기를 요구하나 공은 홀로 차라리 죽는다 하여도
沫血?城肉薄?殲(말혈영성육박재섬) 피를 뿌려서 성(城:남한산성)을 표시하고 육박하는 적을 겨우 섬멸함에
終見牲耳公曰我肉(종견생이공왈아육) 종내 화친하는 것을 정하니 내가 차라리 어육이 되리라 하였다
脅子亦父彼將何忌(협자역부피장하기) 아들로 아비를 협박하니 저 사람들이 장차 무엇을 기탄하리요
遂將吾義冒死要質(수장오의모사요질) 드디어 내 의리를 주장하여 질언(質言: 참된 말)하기를 요구하네
吾義粗遂俄陞八座(오의조수아승팔좌) 내 의리가 겨우 성취됨에 곧 팔좌(八座:6상서와 좌,우복야)에 승탁(陞擢: 등용)되고
遂登三事民信士倚(수등삼사민신사의) 다시 상부(相府:정승)에 들어가니 백성들은 믿고 선비들은 의지네다
時事多故분孼傍萌(시사다고분벽얼맹) 그 때 일이 점차 어려워지고 화난(禍難:患亂)의 조짐이 바야흐로 싹트니
或摘其鼓桀安之變(혹적기고걸안지변) 혹 그에게 고동 됨을 적발하다 불의의 변이
是謂近出小大戰?(시위근출소대전비) 근친(近親:)에서 일어나며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 하되
惟公內積上允下孚(유공내적상윤하부) 오직 공이 내심으로 충적하여 주상이 윤가하시고 아래서는 신빙하네
其?凡凡一節三朝(기석범범일절삼조) 그 상업이 혁혁하므로 한 절개로 삼조(三朝:인조,효종,현종)에 역사(歷事)하고
終以令譽巧舌莫訛(종이영예교설막와) 마침내 명절(名節)을 완전히 하여 공교한 참언(讒言:거짓말)도 허용하지 않았네
昔公掌旅怯勇수完(석공장여겁용수완) 석일(昔日)에 공이 군사(軍士)를 장악함에 약한 자가 강하고 완전하게 길러서
可以采芭今其逝矣(가이채파금기서의) 가히 써 간성(간성)이 되더니 이제 그가 돌아감에
誰我吹煦軍校涕泗(수아취후군교체사) 누가 나를 살펴주리오 하며 군교가 다 읍체하고
昔公秉勻廉升?屈(석공병균염승도굴) 옛날에 공이 상부(상부: )에 처함에 이곳은 염결한 사람이 들어가고
可以致理今其逝矣(가이치리금기서의) 욱부가 물라가더니 이제 그가 돌아가시니
誰復玉雪聖朝戱噫(수복옥설성조희희) 누가 다시 옥처럼 맑으리오 하며 성조가 탄식하도다
惟忠與義自我先公(유충여의자아선공) 오직 충과 의는 우리 선공 때부터이니
公是以似爾敎爾子(공시이사이교이자) 공이 이와 같이 자손에게 가르치라 하심은
聖祖有訓勉哉後嗣(성조유훈면재후사) 성조가 훈계하신 말씀이니 후사되는 이는 힘 쓸 지어다
我 言念 太常行誰與大(아심태상행수여대) 내가 시호를 의논하는 것을 생각하니 공에 행적을 누가 있어 더하리요
其稱厥諡我銘公墓(기칭궐시아명공묘) 그 칭도하는 것이 바로 공의 시호요 내가 공의 묘문을 씀에
我辭如 言? 觀者紙鼻(아사여소관자지비) 내 말이 만일 아첨하는 말이 있다면 보는 사람이 종이로 코를 막으리라.
첨부 9, 「朴氏傳」남자주인공 李時白: http://www.sungyoung.net/lee/bagssi
이성영홈페이지(http://www.sungyoung.net), '연리이야기' 왼쪽 목차 '박씨전 남자주인공'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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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0, 사우당공(四友堂公) 묘갈 비명(墓碣碑銘)
대전 유성 갑동 제2국립현충원 경내 사우당공 묘소에 있는 묘갈비
延城之李累公累卿(연성지이누공누경) 연리(延李)는 여러 번 공(公: 정승)을 내고 여러 번 경(卿: 판서)을 내니
赫赫文康愈大其鳴(혁혁문강유대기명) 위대한 문강공(文康公 휘 石亨)이 세상을 더욱 크게 울렸네(鳴)
忠定承之實天所生(충정승지실천소생) 충정공(忠定公 휘 貴)이 그 업을 이으니 실로 하늘이 내신 바로다
撥亂扶綱宗?再寧(발난부강종팽재녕) 난(亂)을 바로잡고 강(綱)을 붙들어 종사(宗社)가 다시 평안케 하니
雙壁聯芳竝赫勳名(쌍벽연방병혁훈명) 쌍벽으로 연방(聯芳:연이어 이름을 떨침)하여 함께 훈명(勳名)이 혁혁하도다
公居其間退然若驚(공거기간퇴연약경) 공이 그 사이에 거하니 퇴연히 놀랍도다
一家三人爲國柱石(일가삼인위국주석) 일가의 삼인(三人: 연평, 연양, 연성)이 기둥(柱)과 초석(石)이되고
公處於外역躬奉職(공처어외역궁봉직) 공은 외직에 처하여 몸을 근신하며 직무를 받들었도다
八邑之政一於寬慈(팔읍지정일어관자) 여덟 개 읍을 다스리며 하나 같이 관대하고 자애로우니
神之聽之福慶之基(신지청지복경지기) 신명이 들으시고 복경(福慶:복과 경사)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도다
?彼金馬晩歲攸歸(권피금마만세유귀) 돌아보면 금마(金馬: 전북 익산)는 만년에 돌아갈 곳이로다
疏傳義方我取爲師(소전의방아취위사) 소전(疏傳: ) 의방(義方: 옳은 방향)을 내가 취하여 스승을 위하고
四友之堂送我殘年(사우지당송아잔년) 사우당에서 나의 여생을 보내네
佳辰美景月?花筵(가진미경월사화연) 가진(佳辰:고운 별)과 미경(美景:아름다운 경치) 월사(月?: 달)와 화연(花筵: 꽃)을
左絃右壺其樂誰爭(좌현우호기락수쟁) 좌우에 현호(絃壺:현과 호)를 벌렸으니 그 즐거움을 누가 다툴 수 있으리오
天賜大耆赤??珩(천사대실적비총형) 하늘이 대기(大耆: 오래 삶)를 내리니 붉은색 옥(玉) 패물이 玲瓏(영롱)하도다.
子姓振振盈堂溢宇(자성진진영당일우) 자성(子姓:자손)이 진진(振振:성함)하여 당우(堂宇: 집안)가 가득하고 넘치도다
式有式享福隆祿?(식유식향복융녹무) 형유(亨有)함이 무성(蕪盛)하니 복(福)은 융성하고, 녹(祿)은 두텁도다.
乘化而歸實全其天(승화이귀실정기천) 돌아가심에 실제 천부(天賦:천명)를 완전히 다 하였도다.
視履考祥哀榮備焉(시이고상애영비언)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애영(哀榮:슬픔과 영화)이 고루 갖추었도다
甲村之原山廻水灣(갑촌지원산회수만) 갑촌(유성 갑촌) 땅은 산이 두르고 물이 구비치도다
靑鳥協吉孝思攸安(청조협길효사유안) 일진도 길일에 화협하니 효사(孝思;효심)가 더욱 편안(확실)하도다
嘉?同塋死穀人皆藏(가우동영사곡계장) 어진배우(配偶:부인)가 동영(同塋:합분)하니 사생(死生)을 함께 감추었도다
勒石薦辭昭示茫茫(륵석천사소시망망) 돌에 새길 말을 다 천거하려니 소시(昭示: 밝기)가 망망(茫茫:흐릿함)하도다. 끝
첨부 11, 사우당공(四友堂公) 사패지(賜牌地)
延安李氏이야기399쪽 仁楚 哲培(判事公 27世孫), 沙月 盛永(副使公 22世孫)
    금남정맥(錦南正脈: 진안 마이산-부여 조룡대)이 종점 조룡대가 서남으로 멀리 내려다 보이는 논산-공주 지경에 끝마무리 작품으로 금계포란(金鷄抱卵: 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 비룡승천(飛龍昇天: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상)의 대 명산 계룡산(鷄龍山)을 솟구친다.
    계룡산 제2봉 쌀개봉에서 동쪽으로 천왕봉-황적봉-밀목재-관암봉까지 뻗은 다음 남북으로 갈라지는데 북쪽으로 도덕본-삽재-갑하산-우산봉까지 뻗어나간다.

    계룡산 동쪽 울타리이며, 한밭(大田)의 북서풍 바람막이에 해당하는 이 산줄기의 중간 갑하산 동쪽 저지대에 대한민국 제2국립묘지(현충원)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성스러운 터가 오랜 옛날부터 우리 연이(延李)와 인연을 맺어 온 땅이며, 지금도 그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이다.

    대전 제2국립 현충원 터는 우리 연이(延李)의 소부감판사공(少府監判事公: 휘 賢呂)의 15세손 사우당(四友堂) 이시담(李時聃)의 사패지(賜牌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땅)다.

    사우당공은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貴)의 3자 중 차자로 태어나 중부(仲父 휘 賢)에게 계출(系出) 하였다.
    광해5년(1613)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엇다. 계해년(癸亥年, 1623) 광해군의 난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입기명륜(立紀明倫: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인륜을 밝게 함)」의 기치 아래 일어선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政) 때 형(兄) 시백(時白), 제(弟) 시방(時昉)과 함께 부친을 도와 반정이 성공함으로써 부친이 1등공신, 형과 아우가 2등공신에 책록되고,

    사우당공은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어 집과 전장(田庄)을 하사받을 때 유성 갑동의 산과 땅을 사패지로 받은 것이다.

    그 후 사우당공의 행적을 살펴보면-(생략, 본문 관직란 참조)

    대전 현충원 내, 사설묘는 우리 시조 중랑장공(中郞將公)의 단소(壇所)와 사우당공의 묘소(墓所) 2기 뿐인데 이 두 기의 묘소도 철거령이 내렸던 것을 문중에서 진정하여 남게 된 것으로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시조 단소와 사우당 묘소까지도 이장(移葬) 통고가 있자, 저헌공파 대종회 등 종중 대표들이 「시조께서 삼국통일에 공헌이 많았고, 나당화합(羅唐和合)에 주도적으로 공헌하시어 국가존폐위난(國家存廢危難)의 계기를 슬기롭게 해결하신 역사적인 인물이었음」과 「사우당공은 부친 충정공(忠定公 휘 貴)을 3형제가 도와 인조(仁祖) 즉위에 공헌하시어 어지러운 정세를 바로잡는데 기여, 정사원종일등공신(靖社原從一等功臣)으로 연풍부원군(延豊府院君)에 피봉되셨고, 그 후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증직(贈職)되셨음」을 들어 현충원 내에 모실 수 있는 역사적 인물임」을 관계요로(국방부, 청와대)에 진정한 바 신중히 검토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병구(秉九), 중배(重培), 천배(千培) 등 종원이 활약하여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이 “두 분 묘소는 원래위치에 존치보존(尊置保存) 하라”고 재가를 하시어 시조 단소와 사우당공 묘소는 대전 국립현충원 경내에 영구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