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련공(李後白)과 충무공(李舜臣)
沙月 李盛永(2012. 5. 12)
◆청련공(李後白)과 충무공(李舜臣)의 만남
우리 延李의 선조 중에 공도(公道)와 청백(靑白)의 상징으로 꼽을 수 있는 청련공(靑蓮公 諱 後白)과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민족의 가장 어려웠던 역경을 온 몸으로 막아 나라와 민족을 구한 이순신(李舜臣: 德水李氏) 장군은 한 세대 20년 정도 차이가 나지만 조선조 선조 대에 활약했던 같은 시대 사람이다.

청련공이 중종15년(서기1520) 생이고, 이순신이 인종1년(1545) 생이니까 청련공이 25년 앞선다.
청련공이 36세의 나이로 늦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것이 명종10년(1555)이고, 이순신이 32세 나이로 늦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것은 선조9년(1576)이니 이 또한 청련공이 21년 앞서나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벼슬길에 나섰으니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이 두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 같다.
청련공이 59세로 졸한 해가 선조 11년(1578년)이고,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54세로 전사한 해가 선조31년(1598)이니 청련공이 20년 앞서며, 두 분 다 아까운 나이에 졸하였다.

이와 같이 20여 년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함께 근무하면서 직접 만난 적은 한 번 있는 것 같다. 충무공전서에 따르면
「관찰사 이후백이 변경의 각 진영 순시에 나섰을 때의 일인데 변경의 장수들이 벌로 형장을 맞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이순신도 초년으로 함경도 변경의 도둑떼(여진족)를 감시하는 변경의 한 진영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이후백 관찰사가 이순신의 진영에 도착하자 이미 서로의 공명정대함과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는 터라 두 사람은 서로 만남을 기뻐하며 즐겁게 이야기 하였다.
먼저 이순신이 말하기를 “사도(司道 :
道의 主人 곧 관찰사를 말함)의 형장(刑杖)이 자못 엄하다고 하더군요” 라고 하니,
청련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 말도 맞는 말이기는 하나 내 어찌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고 형장을 치겠는가”하였다」
고 한다.

청련공이 함경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로 선조8년(1575)에 부임하여 이듬해(1576) 이조판서(吏曺判書)정2품)로 승진하여 내직으로 옮겼는데 그 해 2월에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삼수(三水)의 국경지대 동구비보(東仇非堡)의 권관(權官)으로 첫 벼슬길에 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청련공이 함경도 관찰사를 끝낼 즈음에 이순신이 함경도 삼수의 동구비보 권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동구비보(東仇非堡)’에서 보(堡)진(鎭)보다 작은 군영을 말하며, 동구비(東仇非)는 ‘동쪽 구비’란 우리말의 한자식 지명이며, 권관(權官)은 변경의 작은 보(堡)의 말단(종9품) 수장(守將)으로 요즈음 같으면 육군 소위로 휴전선(DMZ) 초소(GP)장 정도 되는 셈이다.

동구비보(東仇非堡)의 위치가 명확히 표기된 것은 없으나 김성일(金誠一)의 학봉일고(鶴峯逸稿) 제3권 북정일록(北征日錄) 기묘년조에 기록되어 전하는 이순신의 일기(동구비보 권관 부임초 진중일기인 듯)에
“자작구비(自作仇非)는 동구비보(東仇非堡)에서 동북쪽 강변으로 10여리 되는 지점에 있는데 지형이 자못 험하고 땅이 또한 살이 두터우므로(土厚) 군민이 보(堡)를 여기로 옮겨 설치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군기의 점고를 마치고 곧바로 말에 올라 보(堡)를 옮기기를 원하는 곳에 가서 보니 지세가 과연 편리하였다. 만약 여기에 성보(城堡)를 옮겨서 설치한다면 방어하기에 매우 편리할 뿐만 아니라 토병(土兵: 현지 병)들의 생업 또한 동구비보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고 하였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아래 대동여지도에 魚面(어면)으로 표기된 지점으로 추정되며 부임초기에 이곳 동구비(東仇非)에 있던 보(堡)를 동북쪽 10리 지점인 자작구비(自作仇非)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초년 근무지
자작구비(自作仇非)와 동구비보(東仇非堡)의 위치 추정(대동여지도)
위 두 사람의 만남과 대화는 1575년 이순신이 동구비보(東仇非堡)의 권관(權官)으로 부임하여 보(堡)를 자작구비로 옮긴 후 청련공은 함경도 관찰사로서 선조 임금이 우려하는 북방의 방비를 철저히 하고자 변경의 진보(鎭堡)를 시찰하면서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경상, 전라, 충청도를 제외한 지역은 대부분 관찰사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兵使)의 업무까지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 관찰사가 군영까지 시찰하고 미비한 것이 발견되면 벌주어 시정했던 것이다.

선조8년(1575) 청련공이 형조판서로 있을 때 임금이 청련공을 함경도, 김계휘(金繼輝: 光山金氏, 沙溪 金長生 父)를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율곡(栗谷: 李珥)이 상소문을 올려
    “이후백과 김계휘는 법전과 문장이 밝고 시무(時務: 당면한 일)에 통달한 사람들이니 마땅히 조정에 머물게 하여 조정의 일을 하게 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선조 임금이 율곡의 상소를 듣지 않고 두 사람을 변경인 함경도와 평안도로 내보낸 것도 서북방(평안도와 함경도)의 민심과 변경의 방비가 우려 됐기 때문이었다.

청련공 또한 임금의 뜻을 잘 알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온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증조부 양원공(楊原) 이숙함(李淑咸)처럼 학문에 어두운 북도(함경도)에 문풍(文風)을 일으키고, 감세등 서민 위주의 선정을 베풀며, 변경 진보(鎭堡)의 방비상태를 점검하여 미비한 사항을 발견하면 그냥 덮지 않고, 책임 장수에게 형장(刑杖)까지 쳐 제장들에게 경각심을 고취했던 것이다.

◆ 이순신 막하로 달려간 충의공(忠毅公 李有吉)
청련공과 이순신이 만난 그 해(1576) 청련공은 장자(善慶)에서 두 번째 손자 이유길(李有吉)이 태어났다.
이유길은 고향인 해남에서 22세의 청년으로 자랐을 때 이순신 장군이 모함에 빠져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되고, 자만에 빠진 신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가덕도해전과 칠천량해전에서 연거푸 패전하면서 전사함으로써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해역까지 제해권(制海權)을 왜군에게 완전히 빼앗겼다.

권율 휘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되어 겨우 12척 남은 군선을 가지고 133척 왜군의 서해 해역 진출 기도를 저지해야 하는 임란을 통하여 가장 어려웠던 명량해전(선조30년, 1597)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유길은 고향 해남에서 진도의 이순신에게로 단숨에 달려가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워 임진왜란이 끝난 후 특진해 평안도 영유현령(정6품)에 임명되었다.

그 후 광해조 때 명(明)-후금(後金: 후에 靑) 간의 전쟁에 명나라 청병으로 원군 우영장으로 참전하여 심하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조명연합군이 완패하면서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 등은 항복하였으나 이유길은 좌영장 김응하와 함께 끝까지 항전하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충신(忠臣)에 정려(旌閭)되고 충의(忠毅) 시호를 받았다.

이를 알리려 애마가 혼자 파주집까지 달려와 말갈기에서 혈삼(血衫: 피묻은 옷자락)을 찾아 압록강까지 가서 혼을 불러와 선친(善慶) 영하에 혈삼무덤이 조성되어 있고, 소식을 전하고 죽은 말 무덤도 의마총(義馬塚)이란 조그만 표석을 세웠다.
충의공의 혈삼무덤과 의마총 말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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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 이순신의 녹둔도 패전
김경훈 지음 「뜻밖의 한국사」에 ‘이순신은 정말 불패의 장군인가’라는 제목의 숨은 역사 이야기가 실려있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삼도수군통제사로 출전하여 한번도 패한 적이 없고 고금동서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불패의 장군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은 중년 함경도 조산만호(造山萬戶,종4품)로 있을 때 관할 하에 있는 녹둔도(鹿屯島)가 여진족에 의해 유린되고 약탈 당했는데 직속상관 북병사(北兵使: (함경도병마절도사, 종2품) 이일(李鎰)「녹둔도 함몰」이라는 표현하면서 패전(敗戰)으로 규정하고, 경흥부사(정4품) 이경록(官 책임자)과 조산만호 이순신(軍 책임자)을 감금하고 장계를 올려 이들을 극형(死刑)에 처할 것을 상소한 것이다.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의 근무지 조산(造山)과 패전지 녹둔도(鹿屯島)의 위치(대동여지도)

그러나 선조 임금은 ‘이경록과 이순신이 아군의 피해를 줄이지 못한 책임은 있지만, 전쟁에 패한 것은 아니라’ 면서 이일의 상소를 들어주지 않고 대신 ‘장형(杖刑)과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는 명을 내려 이순신의 첫번째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당했던 것이다.

이듬해 북병사 이일을 필두로 2차의 대대적인 여진 정벌에 큰 성과를 올렸을 때, 이순신도 공을 세워 백의종군은 해제되었으나 전직(조산만호)에 복직되지 않고,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그 밑에 있다가 4등급이나 좌천된 정읍현감(종6품)에 임명되었다.

그 후 만포진 첨사(僉事)로 있다가 진도 군수(郡守,정5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선조가 파격적인 발탁을 하여 전라좌수사 (全羅左水使: 全羅左道水軍節度使, 정3품,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는 좌, 우 2개 수영을 두고 있었음)에 임명하니 이 때가 임진왜란이 발발 전해였다.

그러자 사간원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을 체차(遞差: 관리를 갈아 바꿈)하기를 청하면서 이순신의 경력을 문제 삼았는데 이는 녹둔도패전 이후 군을 지휘하여 전쟁을 치러본 경험이 없고, 반반한 직책에 근무한 적이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첫째 인재가 모자라서 어쩔 수 없고, 둘째 이순신이라면 능히 그 일(전라좌수사)을 맡아 해낼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간원의 청을 물리쳤다.
자칫 녹둔도패전이 임진왜란 영웅 이순신의 출현을 막아, 나라와 민족이 사라졌거나 더 큰 시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순신이 사간원의 우려와는 반대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7년의 전쟁 과정을 통해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13전 (1592년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 부산, 1593년 웅포, 1594년 당항포, 1597년 명량, 1598년 노량) 전승(全勝)을 이룩한 것은
①이순신의 능력은 믿어준 선조 임금이 있었고,
②초년 시절 함경도 관찰사 청련공의 변방 순시에서 군사에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면서 미비한 군영의 책임자에 형장(刑杖)을 친 교훈과 녹둔도 패전의 쓰라린 경험,
③그리고 명량해전과 같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충의공과 같은 젊은이가 달려와 용기를 북돋아 준 숨은 공덕이 뒷받침 한 때문일 것이다.
두만강하구 녹둔도의 과거와 현재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이순신 리더십 ⑫
銃砲 전문가로 거듭나 임진왜란의 '준비된 장군' 되다
( 2017년 3월 22일 수요일자 조선일보 A33면)
沙月 李盛永(2020. 6. 12)
소설가 송우혜씨
<부제>
함경도에 세 차례 근무하며 맡은 일을 자기 계발에 활용
말단 무관으로 국경방어 익히고 둔전 경영 요령도 크게 깨우쳐
총포로 여진족 토벌 경함까지 '준비된 장수'로 임진왜란 맞아
함경도는 도약의 땅이었다. 이순신은 평생 세 차례 함경도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는데, 그 모든 경험이 그를 조선 왕조 최고의 위대한 무장으로 조련해냈다.
그의 첫 함경도 부임은 선조 9년(1576년)이었다. 그해 과거에 급제하고 2년간 동구비보(董仇非堡)에서 무관 최하위 벼슬인 종9품 권관으로 복무하면서 국경 방어의 실체를 체득했다.
두 번째 부임은 선조 16년 3월로 10개월간 머물렀다. 당시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러 간 그는 피비린내나는 전투 현장에서 무장에게 필요한 자양분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눈부시도록 강력하게 성장했다.
이때 그는 최고 지도자의 시각으로 전쟁 전체를 고찰하는 안력(眼力)을 키웠고, '전략 및 전술'의 중요성과 불가피성을 엄중히 인식했으며, 그것을 우을기내 생포 작전의 화려한 성공으로 실현했다.

세 번째 부임은 선조 19년 1월로, 2년간 머물렀다. 조산보 만호로 임명받아 다시 함경도에 간 그는 다음해에 녹둔도 둔전관으로 겸임 발령을 받아 직접 둔전을 관리하면서 '둔전 경영의 묘리'를 깨쳤다.
'군대는 하루치 양식이 있으면 하루의 군대가 되고 100일치 양식이 있으면 100일의 군대가 된다'고 한다.
군대와 군량의 관계는 그토록 엄중한데, 이때 겪은 둔전 경영 경험이 뒷날 임진왜란 때 매우 긴요하게 활용됐다. 임란 당시 그는 많은 둔전을 설치해 군량을 조달하면서 왜적과 싸웠다.
이순신의 '녹둔도 둔전관 김경눌 희롱 사건'의 여파가 훗날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국제전의 처절한 대결에서 그처럼 요긴하고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줄 누가 알았으랴!

선조 21년(1588년)은 이순신이 함경도에서 보낸 마지막 해였다. 전년인 선조 20년 9월의 녹둔도 전투 패배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그는 새해 벽두로 계획된 여진족 토벌전을 기다렸다.
그것은 녹둔도 침공에 대한 응징이자 이순신이 그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백의종군 처분을 해제받기 위한 전투이기도 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 이철원 기자의 녹둔도 '시전부락 전투' 장면 그림
토벌 부대는 2700여 명으로 조직됐다. 부대장인 북병사 이일이 수하 장교들과 지휘본부를 구성했고, 실제 전투는 좌위군(左衛軍)과 우위군(右衛軍)으로 편성된 두 부대가 맡았다.
이때 크게 주목할 사안이 있다. 이순신이 토벌전에서 맡은 직책이다. 그는 우위 부대를 구성한 단위 부대장 24명 중 한 사람으로서 '우화열장(右火熱將)'이란 직책을 맡았다
(육군박물관 소장,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화열장은 '총포대(銃砲隊)의 대장'을 뜻하는데 좌위부대와 우위부대 모두 좌·우 두 명의 화열장이 있었다.
이때 이순신이 '우화열장'으로 선정된 것은 토벌대 무장 총 58명 중 총포를 가장 잘 아는 4명의 장수 중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을 뜻한다.

이순신이 전쟁 무기로 총포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니탕개의 난 때였다. 그는 선조 16년 5월 5일에 니탕개군 2만여 명의 공격으로 벌어진 종성진 전투를 크게 주목했다.
신임 북병사 김우서는 첫날 전투에서 활과 창 등 종래 써오던 무기가 모두 소진되자 둘째 날에는 무기고에 방치돼 있던 낯선 무기 승자총통을 꺼내 매우 효과적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승자총통은 무기 창제에 재능이 많았던 전 병사 김지가 새로 개발한 무기로 이때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됐다.
보고를 받은 선조는 매우 기뻐서 고인인 김지에게 증직(贈職하고 그의 후손에게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16년 6월 11일)

그뿐 아니다. 선조는 급히 승자총통을 다량 제작해 각지에 추가 배치하려 했다. 하지만 재료를 구하기 힘들자 하삼도(下三道:충청·경상·전라)에 있는 사찰의 종을 징발하도록 명하면서 불교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이런 희한한 하교까지 내렸다.
"불씨(佛氏·부처)는 본시 자비심으로 은덕을 베푸는지라, 머리와 눈까지 아끼지 않고 인명을 구한다고 한다. 하물며 지금은 국가가 어려운 처지에 있고 변방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는 때니, 그 종을 버려서 적국을 막는 것이야말로 불씨가 바라는 바일 것이다."(우성전, '계갑일록')

이순신은 이때 새 무기인 총포의 중요성을 기민하게 알아보고 계속 관심을 가진 결과 후일 여진족 토벌전에서 우화열장으로 활약할 만큼 전문가가 됐고, 이후 임진왜란 때도 매우 유용한 자산이 됐다.
당대 무장들이 모두 이순신처럼 총포를 주목하고 전문가가 됐다면 임진왜란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 패배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지 석 달 뒤인 선조 21년 1월 14일. 야밤에 출동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넌 조선군 토벌대는 이튿날 날이 샐 무렵 녹둔도 침공의 중심 세력이었던 여진족 부락을 덮쳐 초토화했다.
전리품은 적의 수급 383급과 말 9필과 소 20마리. 이 전투는 토벌 대상이었던 여진족 부락 이름을 따서 '시전부락 전투'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올랐다.
이 전투에서 올린 전공으로 이순신은 백의종군 처분에서 벗어났다. 그 후 자유인으로 함경도를 떠난 이순신은 다시는 함경도에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