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재공(默齊公)의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 연구
沙月 盛永(2006. 5. 22)
  조선조는 숭문경무(崇文輕武)의 사상이 만연한 시대로서 특출한 군사사상가(軍事思想家)가 배출되지 못했던 시대라 생각된다.
  잦은 외침으로 난리(亂離)는 많이 겪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전략(戰略)과 의지(意志)로서 전쟁다운 전쟁을 치룬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리가 일으나면 그때부터 장수(將帥)를 찾고, 모병(募兵)을 하고, 의병(義兵)이 일으나고, 원병(援兵)을 청하는 등 당면한 상황처리로서 위기(危機)를 모면하거나, 불리한 조건하에 강화(講和)하거나, 아니면 굴욕적인 항복(降伏)을 하여 독립국가로서 국위(國威)의 중대한 손상을 입으면서 겨우 사직(社稷)을 보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선조 오백년 동안 가장 규모가 크고 참혹했던 변란(變亂)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은 선조25년(1592) 4월에 왜병(倭兵)이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서 시작되어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을 거쳐 선조31년(1598) 11월 왜병이 총 철퇴(撤退)하기까지 잔장 7년에 걸쳐 전 한반도가 참혹한 병화(兵禍)에 시달렸던 난리였고, 병자호란은 인조14년(1636) 12월, 청군(靑軍)이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여 이듬헤 1월에 왕(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三田度)에서 청태종(靑太宗)에게 삼배구고(三拜九叩: 세 번 절하고, 아홉번 고개를 조아림)의 굴욕적인 항복식을 치룰 때까지 두 달 만에 끝이 낫지만 인조 5년(1627)에 이미 그 서전으로 간주할 수 있는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부터 치면 9년에 걸친 긴 세월의 전란으로 인적, 물적, 큰 손실 뿐만 아니라 국가 위신과 우리 민족의 자존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손상을 입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뒤돌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국제관계에 잇어서는 국력의 중요성을 실감케 하며, 더욱 애석함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양 병란(兵亂) 공히 십여년 전부터 선각자(先覺者)들이 이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할 묘책(妙策)을 제시했건만 당쟁의 호재(好材)로 이용되었을 뿐 빛을 보지 못했거나 실기(失機)하는 우(愚)를 범하였다.

  임진왜란 10년 전인 선조15년(1582)에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주장한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3년전(정묘호란 4년전)인 인조 원년(1623) 묵제공(默齊公 휘 貴)께서 역설한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이 그것이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묵제공(默齊公)의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율곡선생의 십만양병론을 먼저 살펴봄으로서 비록 시대적 상황은 다르나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 흐르고 있으며, 특히 정병(精兵)을 주장하는 등 여러 면에서 유사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율곡(栗谷)선생의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

  은봉야사(隱峰野史, 隱峰은 安邦俊의 호)의 별록(別錄)에 전하는 율곡선생이 주장했다는 십만양병론의 대강(大綱)은 이러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선조15년, 1582) 당시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栗谷: 李珥)이 이산해(李山海), 김우옹(金宇?), 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 세미나)에 들어 갔는데, 율곡이 아뢰기를
  "국세(國勢)가 부진(不振)하온데 장차 닥쳐 올 화재(禍災)를 미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아오니 십만의 군사를 양성하시어 도성(都城: 서울)에 2만을 두고 각 도에 각각 1만씩을 두어 일단 완급(緩急: 위급한 일, 돌발사태) 때를 미리 대비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없이 세월만 보내고(恬憘度日, 염희도일), 공연하게 지내는 것이 습성이 되어(玩계成習, 완계성습) 일조(一朝: 하루 아침에) 변(變)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몰아서 싸우는 것을 면할 길이 없아온즉 그렇게 되면 대사(大事)는 허사가 되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찬성하는 사람이 없고, 서애(西厓: 柳成龍)이 나서서 말하기를
  "유사시에 임하여 잘 계모(計謀: 계획하고 모색함)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미리 대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경연에서 퇴출(退出)한 후에 유성룡은 율곡선생에게
  "지금과 같이 태평무사한 때에 경석(經席)에 힘 쓸 것을 권하고, 성학(聖學: 성인들이 진술한 학문 즉 유학을 말함)으로 선무(先務: 먼저 할 일)로 하여야 할 것이며, 군여(軍旅: 軍事)는 급무(急務: 급한 일)가 아닌데 공은 어떠한 소견(所見)이 있어서 저와 상의하지도 않고 스스로 이와 같은 것을 진달(進達)하였소" 하면서 공박하였다.
  율곡선생은 웃으면서
  "속유(俗儒)가 어찌 시무(時務)를 알 것이오"하면서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율곡선생의 십만양병(十萬養兵)의 주장은 엄연히 공식석상의 경연에서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선조실록과 같은 정사(正史)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득세한 무리(東人)들이 율곡을 서인(西人)으로 몰던 때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사초(史草)에서 삭제한 것으로 보고있다.

  다행이도 십만양병론이 그 대강이나마 후세에 알려지게 된 것은 상술한 은봉야사 외에 월사공(月沙公 휘 廷龜)이 찬한 율곡선생의 시장(諡狀)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율곡선생은 만년(晩年)에 정치에는 별 흥미가 없고, 행도(行道)와 제세(濟世)에만 힘쓰면서도 조정의 궤열(潰裂), 군적(軍籍)의 퇴폐(頹廢), 공안(貢案: 貢物의 簿冊)의 번용(繁冗: 번거로운 것)등 세가지에 대해서는 늘 근심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책들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첫째로 조정은 동서의 분열을 씻고, 보합(保合)하고, 화동(和同)하여 왕사(王事)에 힘써야 하며, 거단취장(去短取長: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함) 하여 심법가론(深法茄論: 심하게 따지고, 논쟁하는 것)하지 말 것이며,

  둘째로 군적(軍籍)에는 노약자를 도태(淘汰)하고 정용(精勇)한 장정을 뽑아서 십만의 병력을 확보한다면 후일의 완급지용(緩急之用)에 긴요하게 쓸 수 있을 것이며,

  셋째로 공안(貢案)은 연산조 이후 날마다 증가하여 백성들이 생활안정을 기할 수 없고, 공물은 거의가 그 지방의 생산물이 아니라 모두 사서 바치고 있는 형편이므로 일대 개혁을 하지 않으면 장차 지탱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조신들의 반대에 부딛쳐 한가지도 실현되지 못하였고, 유성룡도 나서서 말리니 율곡선생은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국세가 부진한지 오래건만 속유들이 시국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공도 또 이런 말을 하시오"하였다 한다.

  율곡선생은 학자로서 우계(牛溪: 成渾), 귀봉(龜峯: 宋翼弼), 사암(思庵: 朴淳), 송강(松江: 鄭澈) 등 서인들과 교분이 있었던 관계로 당시 득세하고 있던 동인들은 율곡선생도 서인으로 취급하고 이러한 선생의 주장도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반대하였던 것이며, 선조16년(1538) 겨울 대사간 송응개(宋應慨), 전한(典翰: 홍문관 종3품) 허봉 등의 탄핵을 받고 고향 파주로 돌아갔다.

  당시 율곡선생을 서인으로 몰아서 공격하는 것을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貴, 당시 康陵 參奉)이 목숨을 걸고 변호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닌데 묵제일기(默齊日記: 隱峰 安邦俊 찬)에서 몇가지를 옮겨 보면-
  「계미년(癸未年: 선조16년) 대사간 송응개와 전한 허봉이 율곡을 “교만하여 위(位: 임금)을 업신여기고 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니 그 뜻이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함이냐?”라는 등의 말로 써 율곡을 탄핵하자 율곡은 드디어 파주로 돌아갔는데 우계(牛溪: 成渾)가 상소하여 그(율곡)를 구원하고자 해명하자 당시 의논(議論: 與論)은 우계까지 아울러 공격하자 상(上: 임금, 선조)이 비로소 이 둘을 의심하기 시작하므로 장차 화가 어떻게 미칠는지 헤아릴수 없게 되었다.
  공(李貴)이 성균관의 여러 선비와 더불어 상소하여 사실대로 변명하니 선조가 크게 깨달아 이로부터 이 두 사람을 참소하는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을유년(乙酉年: 선조15년) 가을 삼사(三司)의 부회(傅會: 억지로 끌어대어 이치에 맞게 꾸미는 것)하는 무리들이 비로소 우계와 율곡을 심의겸(沈議謙: 西人의 영수)의 당이라 하야 당적에 이름을 적어 넣었는데, 공(李貴)이 또 나서 두 사람이 무함(誣陷) 당한 곡절을 낱낱이 들어서 상소하여 변명하니 선조는 비답하기를
  “너의 말이 옳다. 대간이 이(珥: 율곡)와 혼(渾: 우계)을 아울러 지적한 것은 다만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대저 의겸(議謙)을 옳다 하는 것은 곧 간사한 의논이지만 이(珥)와 혼(渾)을 그르다 하는 자 또한 바른 의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만약 옳다고 한다면 그 그릇된 자 조차 옳다고 하고, 만약 그르다 하면 그 옳은 자 조차 그르다 하니 이것이 곧 당에 치우친 간사한 자의 소위다’라고 하였는데 나의 뜻은 이 말에 다 들어있다”고 하였다.

  또 공(李貴)은 반궁(班宮:成均館과 文廟의 통칭)에 들어가 유영근(柳永謹)이 전후 임금을 속이고 유종(儒宗:儒學의 영수, 율곡을 말함)을 모함한 죄를 낱낱이 들어서 언성을 높여 공격하다가 마침내 손도(損徒: 오륜에 벗어난 자를 그 지방의 유림에서 쫓아내는 것) 를 당하였는대 공(이귀0은 이로서 망사(亡師: 죽은 스승, 율곡을 말함)를 신구(伸救: 구원활동을 펴는 것)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율곡선생이 십만 양병을 주장한 지 10년이 지난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을 당하여 당시 영의정으로 난을 치루게 된 유성룡이 율곡선생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탄복하였다 한다.

  율곡선생이 십만양병론을 놓고 과연 그 시대에 실현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었는 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자도 있는 듯하다.
  당시 경제적인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부(可否)의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문제의 핵심은 병력 십만이라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방위를 위한 군사(軍事)는 먼 장래를 내다보고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유비무환(有備無患)」 그 정신에 있는 것이다. 설사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점진적으로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율곡선생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당시 당쟁에 눈이 멀었던 시류(時流)들에 의해 무참하게 사멸(死滅)되었지만 삼백년이 지나 1974년에 그 깊은 뜻과 정신이 되살아 나 「율곡계획(栗谷計劃)」으로 명명(命名)된 방대한 현대식 군사전력 증강계획이 수립되고, 착실히 추진되어 오늘에 이르면서 호시탐탐 적화의 기회를 노려 온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야욕에 잘 맞서 왔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화합에 바탕을 둔 평화통일의 발판이 될 것이다.
율곡선생 영정

* 월사공(月沙 휘 廷龜)이 찬한 율곡선생 시장(諡狀)에 포함된 십만양변론(十萬養兵論) 관련 내용 (月沙集 53권 諡狀上 중에서)
  일찍이 연중(筵中: 경연 중)에서 (율곡선생이)청하기를 "미리 10만의 병력을 길러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넘지 않아 장차 나라가 토붕와해(土崩瓦解: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산산조각 깨어짐, 근본적으로 붕괴됨)하는 변고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서애(西厓) 유공성룡(柳公成龍)이 "무사한 상황(태평한 시절)에서 병력을 기르는 것은 화(禍)를 기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오래 평안한 세월이 지속된 터라 연대(筵對: 경연에 든)하는 신하들이 모두 선생의 말을 지나치다 하였다.
  선생이 연중에서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국가의 형세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놓여 있는데 속유(俗儒)들은 시무(時務: 당면한 일)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진실로 그렇다 치더라도 군(君: 유성룡)도 이러한 말은 하시오. 지금 미리 병력을 길러두지 않으면 필시 손을 쓸 수 없게 될 것이오" 하고는 근심스런 기색을 보였다.

  임진년의 왜란이 일어난 뒤 서애(西厓)가 조당(朝堂)에서 재신(宰臣)들에게 말하기를 "당시에는 나도 괜한 소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그 말을 반대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이문정(李文靖: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송나라의 이명의 시호, 앞 일을 미리 예측하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닥아오는 환란에 잘 대처한 재상,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다"는 선견지명과 유비무환을 뜻하는 관용어가 되었음. )은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만약 그 말을 따랐다면 국사가 어찌 이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전후로 올린 소장(訴狀)과 차자(箚子: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의 주책(籌策: 이해를 헤아려 생각한 꾀)도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혹 헐뜯고 반대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분명한 선견지명(先見之明)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탁월한 재주이다. 지금 율곡이 있다면 필시 오늘의 시국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옛 성인이) 이른 바 '(진실한 사람은) 사후(死後)에 백년이 지나지 않고도 옳은 평판을 받는다' 는 말에 해당한다.

  (원문) 「筵中請預十萬兵以備緩急否則不出十年將有土崩之禍西厓柳公成龍以爲無事而養兵養禍也時久安恬憘筵對之臣皆以先生言爲過先生出謂成龍曰國勢危如累卵而俗儒不達時務他人則固無望君亦有此言耶今不預養必無及矣因 心변秋 然不樂逮壬辰之後西厓於朝堂語諸臣曰當時吾亦慮其騷擾而非之到今見之李文靖眞聖人也若用其言國事豈至於此極乎且其前後章箚中籌策其時人或 此밑言 議而今皆鑒鑒先見眞是不可及之才栗谷若在必能有爲於今日矣云誠所謂不對百年而知也」
            (연중청예십만병이비완급부칙불출십년장유토붕지화서애유공성룡이위무사이양병양화야시구안념희연대지신개이선생언위과선생출위성룡왈국세위여누란이속유불달시무타인칙고무망군역유차언야금불예양필무급의인초연불낙체임진지후서애어조당어재신왈당시오역려기소요이비지도금견지이문정진성인야약용기언국사기지어차극호차기전후장차중주책기시인혹자의이금개감감선견진시불가급지재율곡약재필능유위어금일의운성소위불대백년이지야」
◆ 묵제공(默齊公)의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

  은봉(隱) 안방준(安邦俊)이 찬한 묵제일기(默齊日記) 비어론변(備禦論辯) 편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계해년(癸亥年: 인조원년, 1623) 9월에 묵제공(默齊公 휘 貴)은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으로 차자(箚子: 간략한 상소문)를 올렸는데 대강은
  (1) 경기의 군사를 정(精)하게 훈련시켜 근본(根本)을 견고히 할 것(精鍊畿兵以固根本)
  (2) 남한산성을 수축(修築)하여 미리 보장(保障)을 정해 둘 것(修築南韓豫定保障)
  (3) 여러 보(堡)의 군사를 합쳐거 큰 진을 만들어 견고하게 지킬 것(合軍諸堡固守大鎭)
  (4) 서병(西兵)을 뽑아 훈련시키고 남군(南軍)을 들여보내지 말 것(初鍊西兵不入南軍)
  (5) 변지(邊地)에 둔전(屯田)을 설치해서 군랭을 대주게 할 것(屯田邊地以資軍糧)
  (6) 다시 진관(鎭管)을 설치하여 전수(戰守)에 편리하도록 할 것(復設鎭管以便戰守)
  (7) 강변(江邊: 압록강변)의 공지(空地)는 부역(負役)을 면제하여 경작자를 모집할 것(江邊空地給複募耕)
  (8)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의 인재를 수습(收拾)하여 그 능력에 따라 등용할 것(兩西人才收拾器用)
등 여덟가자 조목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묵제공이 상계한 여덟가지 계책을 현대적 방어작전 전략과 전술개념에 입각하여 분류해 보면
  - (3)항과 (6)항: 전방방어(前方防禦, FEBA: Forward Edge Battle Area)
  - (1)항과 (2)항: 종심방어(縱深防禦)
  - (4)항과 (8)항: 인사(人事)와 병무(兵務)
  - (5)항과 (7)항: 군수(軍需)에 관한 사항으로서 군사에 관한 계책을 제시함에 있어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 고려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하나 빠짐없이 망라된 완벽한 계책이라 생각된다.

  공(李貴)은 전방을 방어함에 있어서 전방방어지역을 양서(兩西) 즉 평안도와 황해도로 보았고, 그 종심지역을 경기도로 보았다. 전방방어는 소규모의 보(堡)에 병력을 분산시켜 각개격파 당하는 것을 피하고, 규모가 큰 진(鎭)에 병력을 집중 운용할 것을 강조하는 이른자 거점방어(據点防禦) 개념을 제창하고 있다.

  조선조 초기 세종조 때 김종서의 주장에 따라 두만강변에 강력한 군사 위주의 육진(六鎭)을 설치한 바 있는데, 공은 이 진관의 군사위주 국경방어체제를 주장한 것이다.

  다음은 종심방어대책으로 경기도 군사를 정예(精銳)하게 훈련을 시켜, 강력한 전투력을 확보함으로서 방어의 핵심인 도성(都城: 서울) 방어의 성공을 보장하고, 상황이 호전되어 공세이전(攻勢移轉)의 호기를 포착하면 공세전력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예비대(豫備隊,RF: Reserve Force)를 확보하는 개념과 만약의 불리한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계획으로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여 최후의 저항거점(抵抗據点=保障=城)을 확보함으로서 지속적인 전투와 작전지휘가 가능케 하자는 것이다.

  또한 인사(人事)와 병무(兵務)에 있어서는 철저한 지역방어적 병력충당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전방방어에 필요한 병력은 양서 즉 편안도와 황해도에서 뽑아서 훈련시켜 충당하고, 종심방어전력을 약화시키는 남군을 전방으로 보내자 말 것이며, 간부도 양서에서 인재를 뽑아 능력에 따라 등용하므로서 현지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고, 상하 일체감으로서 단결된 군대를 확보할 수 있있, 남군 즉 남쪽지방의 군사들을 멀리 보내므로서 군량의 부족, 후방 농사의 피폐 등 많은 폐단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끝으로 군수(軍需)문제로서 군량 역시 철저한 현지조달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변지(邊地)에 둔전제도(屯田制度)를 두어 현지에서 군인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군량의 일부를 확보하고, 입록강변에 놀고 있는 땅에는 부역을 면제하는 등 특전을 주어 경작자를 모집하여 부족한 군량을 충당하자는 계책이다.

  묵제공이 나라의 방위, 특히 서변방비(西邊防備)에 대한 대한 관심은 지극하였는데 인조원년(1623) 4월에 이조참판과 호위대장을 사면하고 몸소 양서지방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상을 살펴보고, 옛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모색하여 적을 방어할 계책을 세우기를 간청하였으나 임금은 공의 나이가 많고, 길이 멀다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동년 9월 위와 같은 여덟가지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을 상소하면서도 “변지(邊地)의 사정은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신이 비록 쇠약하고 늙었으나 스스로 정력을 헤아리건데 아직은 말을 탈 수 있으니 직접 서새(西塞)에 가서 요리하고 오겠습니다.”하고 청하였더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읽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성을 심히 아름답게 여겼소. 경이 친히 서토(西土)에 간다면 잘 규획(規劃)하는 일이 매우 많을 것이니 나라를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그러나 서새는 추위가 다른 도보다 배나 심하고, 게다가 왕복하자면 몇 달씩 걸릴 것이므로 윤허하지 못하오. 조목조목 올린 일은 묘당(廟堂: 議政府)과 의논해서 처리하겠소” 하였다.

  그 후에도 공은 세 차례나 더 상소를 올려 공이 직접 서변의 현장에 갈 것을 간청하였으나 번번히 윤허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묵제공은 서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하여 현지 사정을 파악하고서 위와 같은 방비책을 제시한 것이다. 묵제공의 서변방비책을 제안한 배경과 공이 생각하는 전략 내지는 전술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알 수 있도록 공이 행한 몇가지 언행을 들어 보겠다.

  인조3년(1625) 7월 체찰사(體察使) 장만(張晩))이 병영을 안주로 옮기려 했는데 공의 생각으로는 병사(兵使: 兵馬節度使)는 주장이므로 압록강에 얼음이 얼면 나아가서 변성을 지키고, 얼음이 녹으면 들어와 영변을 지키는 것이 조종 때부터 전해오는 규례인데 이와 같이 변방의 걱정이 극심할 때에 안주로 물러나서 지킨다는 것은 청청강 이북의 토지와 백성을 을 적에게 내어주는 생각하고 비국(備局: 備邊司) 공회(公會)에서 장만과 큰소리로 서로 타투어 그(장만)의 생각이 잘못된 것으로 배척하고, 차자를 올려 그 이해를 역설하였다.

  인조3년(1625) 8월 27일 상(上: 임금)이 공을 인경하여 서변 정세에 관하여 이야기 하는 가운데 공이 말하기를
  “신이 반정 초기부터 관서지방에 다시 진관(鎭管)을 설치하여 각각 그 땅을 지키게 할 것과 남군을 불러 올리지 말고 토병(土兵: 토착민으로 편성한 부대)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것이 현 시점에서는 제일의 계책이라고 청했기 때문에 신은 여러 번 직접 가서 요리하기를 청했으나 끝내 윤허하시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계책을 채택하여 여러 곳의 산성을 수축하여 각 읍의 수령들로 하여금 그 백성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지키어 험지에 웅거하고, 들판을 말끔히 하여 우리가 주인으로서 적을 손님으로 맞는 태세를 갖추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만일 일국의 힘을 통틀어 전력으로 요지의 한 성만 지키다가 당하지 못하게 되면 적은 그 한 진을 격파한 여세로 쉴세없이 몰아닥쳐 마치 무인지경으로 들어오듯 할 것입니다. 연전에 역적 이괄의 변란이 한 경험입니다.
  대개 적을 방어하는 방법은 적이 국경에 침범하지 않았을 때는 동서남북이 각각 그 땅을 지키다가 적이 국경에 침범했을 때에는 차츰차츰 조발(早發: 조기 발진)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정상의 계책이며, 적이 침범해 오기도 전에 먼저 먼 곳에 있는 군사를 출동해서 근본(농사)을 피폐하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옵니다” 하니.

  임금이 “남쪽에서 정병을 만여명 뽑아 각각 그 지경(地境) 위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어떠하오?”하였다.

  공(公: 李貴)은“이것은 폐조(廢朝 : 광해조)의 그릇된 계책이니 지금 본받을 것이 못되옵니다. 한것 헛소문만 듣고서 먼저 군사를 출동시켜 지경 위에서 기다리고 있게 하면 백성을 괴롭히고, 대중을 움직이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각도의 수령들을 시켜 미리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무장을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게 하고, 뱡사(兵使)만 지경 위에 가서 적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위급한 일이 있있을 때에 각 고을에 전령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달려오게 한다면 기회에 미칠 수 있을 것이옵니다.”하니,

  상(上)이 “모든 일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데 달렸소.이서(李曙)가 기읍(畿邑: 경기도) 군사 만명을 뽑아서 이미 조련하였다 하니 위급한 때에 많은 힘이 되겠소” 하였다.

  공(公)은“군사란 정(精)한 것것에 힘쓰고, 많은 것에 너무 힘쓰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데 이서가 지성으로 나라를 걱정하여 경기 같이 잔폐(殘廢)한 고을에서 군사 2만명을 뽑앗기 때문에 비록 한 집에 동거하는 사람이라도 모두 뽑혔음으로 남은 백성이 많지 않으니 만일 군사가 일으나게 되면 병역에 응하느라고 남은 일(농사)은 할 사람이 없다고 하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 가운데서 장건한 자를 뽑아서 군사를 삼고 노잔한 자는 제외하여 그 봉족(奉足: 보조하는 사람)으로 정하면 군정도 기뻐할 것이고, 일도 착실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이러한 뜻을 이서에게 말하니 그 역시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대로 행할 런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上)이 “군사를 뽑는데 숫자를 적게하는 것은 불가하오. 한신(韓信)도 군사는 많을수록 더욱 좋다고 했소. 군중에는 눈 먼 사람도, 다리 저는 사람도 모두 쓸 수가 있소.” 함에.

  공(公)은“용병하는 법은 반드시 먼저 선봉을 택하여야 합니다. 그 선봉이 정하느냐 둔하느냐에 승부가 판가름나게 됩니다. 한신이 용병하는데 어찌 쓸모가 없는 군사를 가지고 ‘많을수록 좋다’고 하였겠습니까? 오직 장수가 부하를 잘 통솔하는냐 못하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공(公)이 나온 후 상은 삼공(三公: 삼 정승)과 비국당상(備局堂上: 비변사의 당상관)을 불러 의논 하여 삼도(三道: 평안, 황해, 경기)의 군병을 각기 경상(境上: 도 경계선상)에 유대(留待)하게 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병사(兵使)만 동방(冬防) 때까지 지경위에 가서 대기하게 하였다.

  인조3년(1625) 모문룡(毛文龍)이 명조(明朝)에 항명하고 오랑케와 내통하여 조선과 혼단(昏端: 불화의 계기)을 내어 침범할 조짐이 있고, 조정에서는 모문룡에게 군량을 도와주고 요구에 응하는 것으로 대책을 삼고 방어책은 새악하지 않고 있는데 공은 적의 속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강책(自强策)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곱가지 계책을 진정하였다.
  ① 각 도의 병감사(兵監司: 兵使와 監司)에 명하여 미리 각 고을에 선봉을 양성하게 할 것.
  ② 만일 경급이 있으면 남쪽 4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의 군사는 서울로 모여 형세에 따라 계속 지원할 것
  ③ 호패의 기한을 너무 촉박하게 하지 말고, 어사를 보내지 말고, 감사에게 전 책임을 지울 것.
  ④ 방(榜)에서 제외된 출신(무과 급제에 낙방한 사람)들을 교대로 숙위(宿衛)하게 할 것.
  ⑤ 시예(試藝)에 떨어진 선비들을 우선 무학(武學)에 소속 시킬 것.
  ⑥ 각 고을의 교생 수를 정원보다 더 할 것.
  ⑦ 먼저 인정(仁政)을 베풀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것.

  임금은 이를 비국에 내렸는데 대부분 공과 같은 의견을 회계(회계) 하였으나 어사 출신과 무학은 시행하지 않았다.

  인조4년(1626) 7월 공이 분황(焚黃: 贈職을 받았을 때 官誥의 副本인 누런 종이를 묘 앞에서 태우는 것)의 일로 익산의 종가에 가면서 공주에 이르러 남군의 자송(資送)에 따르는 폐단을 보고 서울에 돌아와서 상소를 올리기를
  “변성의 군량이 모두 약탈 당했으니 남군을 들여보내더라도 반드시 먼저 관서의 군량이 있는지 없는지 계산하고서 그 뒤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가할 것이옵니다. 더구나 모문룡의 문제는 이침, 저녁에(단시일 내에) 닥치는 걱정이 아니옵니다.
  반드시 청천강 이북지방을 잠식한 뒤에 다시 관서지방을 삼킬 계획을 할 것이오니 당면한 계책은 청천강 이남의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각각 그 고을을 지키게 하고, 병사(兵使)는 청천강 이북에서 뽑은 정예군사를 가지고 먼저 응젆라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강원, 황해, 북도(北道: 함경도)의 군사들은 역시 무장을 하고 변(變)을 기다리다가 위급한 일이 일으나면 적기에 출전하도록 하고, 삼남(三南: 충청, 정라, 경상)과 경기의 군사는 변을 들으면 모두 서울에 모여 호위에 전속케 하여 그때 그때 조용(調用)해 쓰는 계책을 세운다면 중요한 위치에서 가볍게 적을 방어허고, 또 근본(서울)을 튼튼히 하는 방법이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아옵니다.
  설사 관서를 지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근본이 견고하면 회복을 기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적이 국경을 침범하기도 전에 먼저 근본을 곤폐(困弊)시켜 여지없이 무너지는 형세에 이를 것이오니, 신이 듣건데 ‘오천의 군사를 자장(資裝: 무장)하는데 무명 팔만여필이 넘게 소요되고, 일로에 자송하는 비용은 그의 배나 되며, 관서에 도착하면 당장 먹을 양식도 없다’하오니 내지(內地)만 비고 메마를 뿐만 아니라 관서의 피폐도 더욱 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금년에 이와 같이하고 명년, 후명년에도 이와 같이 한다면 외구(外寇)가 오지 않아도 방본(邦本: 백성)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옵니다.
  신은 비록 어리석고 망령되오나 또한 중풍환자는 아니옵니다. 지금 이 문제를 가지고 시종 힘써 말하는 것은 국가의 흥망이 인심의 향배(向拜)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옵니다” 하였다.
  상소는 비국에 계하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인조5년(1627) 9월 정묘호란이 강화로 끝나고 적이 물러간 후 공은 윤황(尹), 이목(李목) 등으로부터 강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강사(江舍; 龍山)에 물러나 있다가 소명을 받고 입성하여 임금이 공을 인견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적이 물러간 지 이미 오래인데 진작(振作: 정신을 가다듬고 일으남)하는 일이 없으니, 신은 그윽이 민망하옵니다. 오랑캐와 화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왔는바 화친으로 그 사세를 늦추고, 정벌로서 그 원수를 갚는 것이 현재로서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 (중략) - 현재로서 가장 좋은 방책은 남군을 들여보내지 말고 서토(西土)에서 파산하고, 실업한 백성들을 모집하여 그 중에서 뽑아서 변전을 삼고, 삼남에서 베를 걷우어 그들에게 주고곡식을 가까운 도에서 걷우어서 먹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응모할 것이며, 위급할 때에는 조용(調用)하는 것도 도감군(都監軍: 훈련도감의 정예군)과 다를게 없을 것이옵니다.
  지금 양서지방은 물력이 텅 비어서 십년 안에는 생산하여 모으기 어려울 것이오니 5-6년을 기한으로 그들의 부역을 면제하여 다시 모여 편안히 살게 하시옵고, 오직 모병을 일삼고 또 군사를 한 곳에 집중시키지 말아서 적으로 하여금 감히 공략할 생각을 낼 수 있는 공허한 지대처럼 보지 못하게 해야겠사옵니다.
  그리고 각 고을 수령들은 널리 복수군(復讐軍)을 뽑아서 선봉을 만든 다음 험지에 의거하고들판을 말끔히 하여서 아군은 편안한 자세로 수고로운 이(피로한 적)을 대하고, 주인의 자세로 손(客: 적)을 대하는 격으로 한다면 적은 감히 멋대로 깊숙히 몰아치지 못하고, 삼남의 백성 역시 먼저 무너지는 걱정이 없을 것이옵니다.
  이렇게 하면 비록 양서가 잔폐했다 하더라도 정병 만여명은 얻을 수 있사온데, 이제 안주로 병영을 옮기고 황주에 성을 쌓는 것은 크게 좋은 계책이 아니옵니다” 하고

  현재로서 군사상 긴급한 시무(時務)를 헤아려 수심여 책을 조목지어 올렸는데 그 내용들은 민심으를 순리하고, 장수를 엄선하고, 영장(營將)을 혁파하고, 진관(鎭管)을 부설하고, 병(兵)과 농(農)을 구분하고, 선봉을 뽑고, 안주와 황주에 성을 쌓지말고, 험지에 의지하여 들판을 말끔리 하고, 남쪽군사를 들여보내지 말고, 서쪽 백성 중에서 모병하라는 등이었다.

  이상으로 묵제공이 주장한 서변방비책의 대강과 이와 관련된 공의 생각을 예시하였다. 이들을 망라해 보면 묵제공의 서변방비책의 특징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 전후방의 병력운용과 인사, 군수 등 후방지원을 망라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전략개념과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둘째, 전방방어는 병력집중을 강조하고, 거점방어개념으로서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는 험거청야(險據淸野)의 방책을 제시하였고,
  셋째, 전방방어는 철저한 지역책임방어를 강조한 반면 종심 또는 후방은 병력의 집중으로 강력한 예비대를 확보하여 종심작전 내지는 공세이전 전력으로 운용하도록 강조하였으며,
  넷째, 병력은 양보다 질에 주안을 둔 정병(精兵)을 주장하였고, 군수, 특히 군랸문제를 강조하였다.

  묵제공은 선조36년(1603) 문과 별시에 급제한 문인으로서언제 어떻게 병학에 대하여 공부했는 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의 주장은 하나 하나가 병학에 조예가 깊은 논리정연하고, 일관성이 있는 지론들이다.

  공의 병학은 스승인 율곡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더욱 확증이 가는 것은 임진왜란 동안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전쟁에 소극적이고, 자기 가문의 보존에 급급하였는데 비하여 공은 이미 초년시절에 몸과 마음을 받쳐 적극적으로 전란에 뛰어들어 일익을 했던 경력에서 찾을 수 있다.

  공은 임진왜란이 일으날 때 강릉(康陵: 明宗, 楊州) 참봉으로 있었는데 전란이 일어나고 조정이 서천(西遷) 함에 따라 평양으로 달려가 임금이 장차 의주로 피난가려는 것을 반대하고, 국왕이 직접 나서 친정(親征: 임금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전투에 나서는 것)할 것을 내용으로하는 교서를 내릴 것을 계청(啓請)한 바도 있으며,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 삼도의 병력을 소집 및 모집하는 담당관),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 삼도홍보관)으로 우마, 군졸, 군량의 확보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적도 있다.

  이렇게 볼 때 공의 병학은 스승 율곡선생의 영향과 임진왜란을 통한 스스로의 체험에서 닦아진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현실성과 실현가능성이 제고(提高) 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임진왜란의 아픔을 안타까워 하면서 이를 예방할 수 있었던 율곡선생의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이 빛을 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만, 병자호란의 참상과 치욕적인 항복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그 이전에 묵제공의 논리정연하고, 실현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조차 알고 있는 이가 드물다.

  ‘남한산성’에 관한 글을 쓰면서 묵제공이 남한산성의 수축을 주장한 것이 곧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의 일환임을 알고 이를 꼭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로 은봉 안방준의 묵제일기(默齊日記)에 전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필자의 군사지식에 바탕을 두고 촌평을 가하였다.

  필자의 졸필이 계기가 되어 더욱 깊은 역구가 뒤따랐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며, 아울러 국가방위에 있어서는 이를 소홀히 하거나 현명한 방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리당략의 빠른 맹목적인 반대나, 결정권자의 우유부단으로 실기를 하게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전란의 참화를 자초하는 교훈을 되새기는 온고이지신(溫故而之新)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묵재공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