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평위공사문견록(東平尉公私聞見錄)의 연리 이야기
沙月 李 盛 永 엮음
▶서언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은 조선조 효종의 다섯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으로 효종의 부마(駙馬: 사위)다. 동평(東平)은 임금이 내린 부마 이름이고, 위(尉)는 의빈부(儀賓府) 정1품-종2품의 관직이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동래정씨 정태화(鄭太和)의 아들로 효종 7년(1656)에 9세로 11세 되는 연상의 숙정공주와 혼인하여 궁에 들어가 11년 동안 부부생활을 하고, 20세에 상처하여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되었다. 조선조 때 부마재취불가원칙(駙馬再娶不可原則)에 따라 재혼하지 못하니 67세에 죽을 때까지 47년을 홀아비로 산 사람이다.

  동평위 정재륜이 궁에서 생활할 때나 궁 밖에 나와 사는 동안에 듣고(聞), 보고(見) 한 것을 기록(錄)한 것을 모아 동평위문견록이라 하였으며 상, 하 2책으로 선조-광해-인조-효종 연간의 이야기 357편이 수록되어 있다. (姜周鎭 역)
동평위공사문견록

  이들 이야기 중에 우리 延李와 관련이 있는 내용을 추려서 모아보았다.

▶63. 李時昉(이시방)이 光海君(광해군)을 優待(우대)하다.
  光海君(광해군)이 제주도에 이송되어 와 있을 때 (새로 부임한) 濟州牧使(제주목사)는 이연성군시방(李延城君時昉=延城君 李時昉)이었다. 牧使(목사)가 주방 사람들에게 명하여 (광해군의) 식사를 좀 깨끗이 잘 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光海君(광해군)이 밥상을 받아보니 이전과 달라졌음을 매우 좋아하면서 濟州牧使(제주목사)는 필시 이전에 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따라와 있는 늙은 宮人(궁인)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光海君(광해군)이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 宮人(궁인)이 말하기를, 「영감이 사람을 등용하고 내쫓는 일은 모두 후궁(後宮: 김상궁, 介屎, 개똥이를 말함)의 칭찬하고 헐뜯음에 따라서 인사를 하였는데, 이 濟州牧使(제주목사)가 만일 부정한 방법으로 등용되어 영감의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영감을 박대하여 전일에 後宮(후궁)을 통해서 승진 운동한 것을 감추려 할 터인데, 이렇게 정성으로 대우해 주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하였다.

  뒤에 光海君(광해군)이 濟州牧使(제주목사)가 李時昉(이시방)인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렸고, 그 宮人(궁인)한테도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光海君(광해군)이 죽은 후 따라갔던 宮人(궁인)이 돌아와서 옛 친구인 다른 宮人(궁인)에게 이야기 한 것을 내가 얻어들은 이야기다,

  李時昉(이시방)은 靖社功臣(정사공신) 延平(연평) 李公(이공)의 아들인데, 역시 靖社功臣(정사공신)에 勳錄(훈록)되었으며 延城君(연성군)에 封(봉)해진 사람이다. 그래서 光海君(광해군) 末期(말기)엔 목숨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주기) 이 이야기에서 신임 제주목사 이시방(李時昉)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貴)의 차자로서 형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우는 이른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형 이시백과 함께 정사(靖社) 2등 공신에 녹훈되어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으며, 인조18년(1640)에 제주목사로 부임히여 이듬해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광해군이 죽자 손수 염습하였다고 한다.

▶ 68. 李貴(이귀)의 딸이 아버지를 구하다
  金子謙(김자겸)의 부인 李氏(이씨)는 延平府院君(연평부원군) 李貴(이귀)의 딸이다. 일찍이 과부가 되어 잡서(佛書를 말하는 듯)를 많이 읽더니 출가해서 비구니승이 되었다. 宮女(궁녀)들이 이 여승을 존경하고 신복해서 서로 왕래하면서 가까워졌다.

  癸亥年(계해년)에 반정공작을 하게 될 때에 李貴(이귀)는 그 주모자였다. 이 공작을 아는 사람이 光海君(광해군)에게 告變(고변)하니 王(왕)이 명령을 내려 국청을 차리고 羅卒(나졸)을 사방으로 풀어 (이귀 등을) 잡고자 하여 장차 禍(화)가 어떻게 미칠지 모르게 되었다.

  여승 李(이)부인이 편지를 光海君(광해군)이 사랑하는 金尙宮(김상궁)에게 보내어 자기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부친이 國王(국왕)에 충성하는 심정을 노래하는 歌辭(가사)를 지어 보냈다. 金尙宮(김상궁)이 이를 보고 李貴(이귀)의 충성심을 믿게 되어 이 편지를 光海君(광해군) 앞에서 읽어 보였다.

  그 편지에는 글 하나하나가 모두 충성심에 가득 찬 것이어서 임금의 마음이 측은해졌다. 이 때 金尙宮(김상궁)이 말하기를
  「君王(군왕)에게 충성심이 가득 찬 이러한 臣下(신하)를 형벌로 다스린다고 하면 그 사람의 억울한 원한을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고 아뢰니, 光海君(광해군)이 지당한 말이라 하고는 옥사를 늦추어 풀게 하였다.
  그런데 그 날 밤 삼경에 反正軍(반정군)이 일어나서 宮(궁)을 깨끗이 쓸어내는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후 한 늙은 宮人(궁인)이 손수 본 대로 나에게 말해 주었다.


  (주기) 연평부원군(휘 貴)의 딸 여승의 尼名(니명)은 禮順(예순)으로 인조 때 도봉산 동쪽 회룡골에 있는 回龍寺(회룡사)의 주지승으로 五脹(오창: 다섯번 째 확창)을 하였으며, 自歎(자탄)이라는 짤막한 시 한 수가 전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연안이씨 이야기 261쪽 ‘回龍寺(회룡사)의 煩惱(번뇌)’ 또는 이성영 홈페이지 http://www.sungyoung.net/ >> ‘연리이야기’에 있다.
                회룡사(回龍寺)의 번뇌 바로가기(클릭): 회룡사(回龍寺)의 번뇌

▶ 91. 才操(재조) 부리다 죽은 奇自獻(기자헌)
  사람이 처세해서 살아가는데 正道(정도)를 지키지 않고 권모술수를 능사로 삼으면 반드시 끝에 가서 화를 당하기 마련이다. 奇自獻(기자헌)은 宣祖(선조)의 형이 되는 河原君(하원군)의 사위였다.

  光海君(광해군) 때에 廢母論(폐모론)에 반대한 까닭에 癸亥年(계해년) 反正後(반정후) 한 때 政丞(정승)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 권모술수를 잘 부렸다.

  甲子年(갑자년) 李适(이괄)의 亂(난)이 있자 어떤 사람이 고해 바치기를 奇自獻(기자헌)이 거기에 가담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잡아 가두었는데 미처 조사하기도 전에 李适(이괄)의 반란군이 서울로 쳐들어 오므로 金昇平(김승평) 류(流 아래 土) (김류를 말함)가 옥에 갇힌 사람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 때 奇自獻(기자헌)도 함께 죽었다. 그것은 奇自獻(기자헌)의 평소 권모술수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 때 李适(이괄)과 내통했다는 사람 중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延平(연평) 李相公(이상공)이 王(왕)에게 아뢰어 그 원통함을 많이 풀어주었지만 奇自獻(기자헌)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라 하였다.


  (주기) 延平(연평) 李相公(이상공) : 延平府院君(연평부원군) 李貴(이귀)

▶ 184. 李時白(이시백)의 인물됨을 뒤늦게 알아
  한 선배가 「靖社功臣(정사공신) 가운데서 훌륭한 문학자가 많다」 고 말하고, 「仁祖大王(인조대왕)은 특히 完平府院君(완평부원군) 李元翼(이원익)을 신임해서 李完平(이완평) 만한 賢臣(현신)이 없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延陽府院君(연양부원군) 李時白(이시백) 같은 이는 忠僕(충복)한 臣下(신하)였지만 大王(대왕)은 평범한 功臣(공신)으로만 알고 있었다.

  丙戌年(병술년: 인조24년, 1646년) 尼山(니산)의 土賊(토적: 유탁의 모반을 말함)이 일어나자 李時白(이시백)은 자청해서 토벌에 나섰다. 李時白(이시백)은 王命(왕명)을 받고 戰地(전지)로 가기 위해 闕下(궐하)를 떠나면서 (자기)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토벌군 진지로 향했다.

  뒤에 仁祖大王(인조대왕)이 이 사실을 알고 가상히 여겨 포상을 내리고 「李延陽(이연양)이 근신 근면하여 그의 인물 됨을 늦게 서야 알게 되었다」고 중신들 앞에서 칭찬하고 이어서 「李時白(이시백) 같은 훌륭한 사람도 그 진가를 이처럼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李時白(이시백)만 못한 사람이야 어찌 알게 될 것인가?」 하고 안타까워 했다는 것이다.

  흔히 王(왕)이 세상에 드러난 공적만 가지고 깊이 臣下(신하)를 신임하는 것은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完平府院君(완평부원군)은 梧里政丞(오리정승) 李元翼(이원익)의 勳號(훈호)이다.


▶ 255. 李貴(이귀), 아들 時白(시백)을 훈계
  甲子年(갑자년: 인조2년 , 1624년) 李适(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仁祖(인조)가 延平府院君(연평부원군) 李貴(이귀)를 시켜 江灘水(강탄수)에 나가 지키는 형편을 보고 적을 물리치라고 했다.

  李貴(이귀)가 그 곳에 가 보니, 이미 守卒(수졸)들이 다 도망가고 없고, 적이 臨津江(임진강)을 건너니 官軍(관군)이 패했다는 전보가 서울에 들어왔다.

  谿谷(계곡) 張維(장유)가 이 때 弘文館(홍문관) 副提學(부제학: 玉堂의 長, 정3품 상)으로 있으면서 司諫(사간) 吳 肅羽(오숙)과 같이 仁祖(인조)를 請對(청대)해서 軍律(군율)로서 李貴(이귀)를 처벌해야 된다고 했다. 仁祖(인조)는 李貴(이귀)의 잘못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끝내 윤허해 주지 않았다.

  張維(장유)는 李貴(이귀)의 아들 延陽府院君(연양부원군) 李時白(이시백)과 동문이고, 또 우정이 두터워 형제 같이 지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으로 公私(공사)를 어길 수 없어서 이렇게 임금을 청대하였던 것이다.

  李貴(이귀)가 아들 時白(시백)을 훈계하기를 「軍機(군기)를 잘못해서 놓치면 법으로 마땅히 죽게 되어 있다. 張某(장모)가 군율로써 나를 처벌하라는 것은 그의 직책이 그렇게 한 것이다. 너희가 결코 그를 원수로 여기지 말아라」 하였다.

  그리고 또 張維(장유)를 불러서 서로 대면케 하여 舊情(구정)을 상하지 말라고 하니 時白(시백)이 부친의 명령이라 그대로 張維(장유)와 왕래하고 지냈다.


▶ 301. 洪純彦(홍순언) 譯官(역관) 外交(외교)로 功(공)을 세우다
  洪純彦(홍순언)은 역관이었다. 일찍이 燕京(연경: 北京)에 갔는데 돈을 많이 가지고 갔다. 妓館(기관)에 갔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한 방을 안내하면서 「여기서 돈을 많이 써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純彦(순언)이 들어가 보니 國色(국색: 국중미인)인데 나이 젊은 여자였다. 소복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처량하고 당황하므로 純彦(순언)이 연고를 자세히 물으니 죄를 얻은 兵部尙書(병부상서)의 딸인데 부친의 시체를 모셔가 치상하기 위하여 몸을 팔게 되었다고 하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한 번 몸을 허락하면 종신토록 수절하겠다고 하였다.

  純彦(순언)이 이 말을 듣고 뜰 밑에 내려가 절을 하고 말하기를 「외국의 천한 역관이 어찌 감히 天朝(천조)의 宰相(재상)집 가문을 더럽힐 수 있습니까?」 하고는 가지고 간 금덩이를 주고 그냥 돌아왔다. 동료들이 이를 알고 조소하면서 놀려댔으나 純彦(순언)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 후 수년이 지나 純彦(순언)이 사절을 따라 다시 바다를 건너 明(명)나라를 가니 禮部(예부)에서 여러 번 純彦(순언)이가 왔느냐고 물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北京(북경)에 들어가 보니 전일의 尙書(상서) 딸이 禮部尙書(예부상서)의 후처가 되어 있었다.

  尙書(상서)가 純彦(순언)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으로 매우 존경하게 되어 이렇게 물어왔다는 것을 알았다.그 때 使節(사절)은 宗系(종계)를 바로잡기 위하여 갔는데 일이 禮部尙書(예부상서)에 관계되는 일이고 보니 尙書(상서)가 純彦(순언)의 연고로 해서 극력 주선해서 數百年(수백년) 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宗系(종계)를 바로잡게 되어 王統(왕통)의 蔑辱(멸욕)을 벗게 되었다.

  宣祖大王(선조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宗廟(종묘)에 告諭(고유)하고 光國功勳(광국공훈)에 올리고 純彦(순언)을 唐陵君(당릉군)으로 봉했다.

  尙書夫人(상서부인)이 純彦(순언)을 불러 후한 선물로 錦(금: 비단)을 내려 은혜에 보답하였다고 한다. 領相(영상) 洪命夏(홍명하)가 그 때 어른에게서 듣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譯者解說) 朝鮮建國(조선건국) 후부터 李氏(이씨) 王家(왕가)의 家系(가계)를 (명나라에서) 잘못 알고 事實(사실) 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 6년에 宗系辨誣奏請使(종계변무주청사: 正使 李後白, 副使 尹根壽, 書狀官 尹卓然)를 보냈다. 이 때 洪純彦(홍순언)이 譯官(역관)으로 따라 갔다. 이 때 辨誣(변무)가 밝혀져서 國家(국가)를 빛나게 했다 하여 光國功臣(광국공신)이 선조 23년에 錄勳(녹훈)되었다.


  (주기) 종계변무주청사의 정사 이후백(李後白)은 우리 연리 부사공 9세손 청련공(靑蓮公)이다. 종계변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延安李氏이야기 283쪽과
  이성영홈페이지 http://www.sungyoung.net/ >> 연리이야기 >> 고양-파주 선조유적 탐방 >> 첨부15 종계변무이야기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