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충(杜士忠) 이야기
沙月 李盛永(2008. 3. 22)
    2003년 10월 1일 발간된 『연안이씨 이야기』 책에 본인이 기고하여 ‘桑田碧海 渡船參拜를 豫言한 황강의 副護軍 墓’라는 이야기가 수록된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에 상전벽해(桑田碧海) 도선참배(渡船參拜)를 예언한 두사충(杜士忠)이란 사람이 나온다.

    그런데 이 두사충(杜士忠)이 실제 인물로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대장 이여송(李如松)을 수행해서 조선에 나왔다가 난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만경두씨(萬頃杜氏)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이 2008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의 ‘대원군 책사 박유봉’이란 이야기 속에 들어있다.

    다만 부호군 묘에 얽힌 이야기 중에는 ‘두사충(杜士忠)’이라 했는데, 조용헌 살롱에서는 '두사충(杜思忠)'으로 이름 가운데 글자의 한자 표기가 다르나 이야기 내용으로 봐서는 동일인이다. 두 이야기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함께 올린다.
桑田碧海(상전벽해) 渡船參拜(도선참배)를 예언한
黃江(황강)의 부호군공(副護軍公 휘 巖) 묘
2003. 10. 1. 연안이씨 이야기 중에 沙月 盛永
    충주댐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월악나루나 단양으로 향하면서 월악산 영봉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올려보다가 시선을 낮추면 월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가 황학산으로 끝맺음을 한다.
    그 황학산이 충주호에 잠기면서 여러 개의 반도(곶: 串)와 같은 지형을 만들었는데 가장 멀리 튀어나온 곶(串)의 끝머리에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아슬아슬하게 자리잡고 있는 묘지 하나가 눈에 띈다. 행정구역으로는 제천시 한수면 북로리 작곡(鵲谷
: 까치골)이다.
충주호반에 아슬아슬한 묘지 하나, 부호군(副護軍 諱 巖)의 묘
갈수기라 수면이 많이 내려갔지만 만수기에는 묘 뜰 앞 제절까지 물이 찼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은 묘가 물가에 있어 충주호에 놀고 있는 물고기와 오가는 유람선을 바라보고 있지만 묘를 쓴 400여년 전에는 물가가 아니라 해발 140여 미터의 황학산 중턱에 있었고,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한강을 이곳에서는 황강(黃江)이라 불렀다.

    이 묘지에 얽힌 이야기다.
    우리 延李의 판소부감공(判小府監公 諱 賢呂)의 8대손 저헌공(樗軒公 諱 石亨)의 여섯 손자 중 넷째(六長派 中 四派), 대호군공(大護軍公 諱 孝長)의 둘째 아들 부호군공(副護軍公 諱 巖)의 묘다.
    이암(李巖)은 중종과 선조 때에 살았다. 후에 부호군(副護軍
: 종4품의 무관직)에 증직(贈職)되어 후손들이 「 부호군공(副護軍公) 」이라 부른다.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자라 역시 글을 배워서 일찍이 선공감(繕工監
: 토목과 영선을 맡은 관청)의 감역(監役: 감독관)으로 일하다가 중종14년(서기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조선 중종14년 11월 南袞 등 勳舊宰相들이 '走肖爲王'과 같은 모함을 하여 趙光祖 등 신진사류를 몰아낸 士禍) 때 종형 정헌공(正軒公 諱 )이 조광조의 제자라는 이유로 사화에 연루시켜 파직되는 세태를 보고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충주(忠州)로 낙향하여 수차 조정에서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살다가 선조 4년에 별세하였다.

    세월은 흘러 선조25년(서기1592년)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참혹한 병화에 휩쓸릴 때 조선을 돕기 위해 명(明)나라 원군의 장수로 온 이여송(李如松)이 와서 보니 조선의 산세가 웅장하여 장차 큰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본국에 연락하여 천문지리에 밝은 두사충(杜士忠)이라는 도사를 불러 데리고 다니면서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산의 혈(穴)을 자르고 다녔다 한다.

    그 때 부호군의 둘째 아들 청계당공(淸溪堂公 諱 麟瑞)의흥(義興
: 현 경북 軍威에 있음) 현감으로 있었는데 마침 이곳에 들른 두사충(杜士忠)을 만나 알게 되었다. 극진히 대접하였더니 감사의 뜻으로 묘 자리 하나 잡아주겠다고 하여 고향 중주로 안내하였다.

    며칠간 충주 일대의 산을 둘러보던 두사충(杜士忠)이 황강(黃江
: 현 제천시 한수면 일대의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월악산 북쪽 줄기(사실은 1161.5m의 문수봉 줄기) 끝자락 황학산 기슭에다 묘자리를 잡아주며 말하기를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할 때 쇠갓(鐵冠)을 쓴 사람이 지나가는 시각에 하관하라』고 말하고 이어서
    『400년 후에는 이 산소 앞 들판에 물이 차서 상전벽해(桑田碧海
: 뽕밭이 푸른 바다로 바뀐다)가 되고, 산소의 제절(除節) 아래서 물고기가 놀면서 파도를 일으키며, 후손들이 도선참배(渡船參拜: 배를 타고 와서 참배한다) 해야 하고, 자손 중에는 유능한 인물이 많이 배출될 것이다』고 예언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말들이었다. 멀쩡한 산 중턱이 ‘상전벽해’는 무엇이며, ‘묘 앞에서 고기가 파도를 일으키며 놀고, 도선참배’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래도 중국에서 유명한 천문지리에 통달한 도사의 말이니 믿어보기로 하고 부호군 묘의 이장을 서둘렀다.

    부호군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려고 일꾼들이 땅을 파니 큰 바위가 나와 며칠을 걸려 바위를 깨었더니 갑자기 바위 밑에서 벌 떼가 몰려나와 산 밑 황강 가 들판에 퍼져 온 들판을 까맣게 덮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이 이 들판을 ‘벌들’이라 불렀다 한다.

    두사충(杜士忠)이 하관시간을 정해주지 않고 ‘쇠 갓을 쓴 사람이 지나갈 때’라고 하였기 때문에 유해를 운구해 놓고도 하관하지 못하고 ‘쇠 갓 쓴 사람이 지나갈 때’를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관할 때를 답답하게 기다리는데 이 때 어떤 아낙네가 들일에 점심밥을 이고 나갈 때 소나기가 잦기 때문에 비가 오더라도 빗물이 점심 음식에 들어가지 않도록 광주리 위에 솥뚜껑을 덮어 머리에 이고 산 아래 지나가고 있었다. 이를 본 상주 청계당공이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쇠 갓을 쓴 사람, 바로 저것이다. 빨리 하관 하여라”

    이렇게 해서 부호군 묘지가 이곳에 있게 되었다. 부호군의 묘를 이장한 이후로 오랫동안 두사충(杜士忠) 이야기와 관련하여 여러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직접 와서 보고 명당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호군공의 종증손(從曾孫) 되는 월사공(月沙公 諱 廷龜)의 손자 정관재공(靜觀齋公 諱 端相)은 이곳 동쪽 인근의 청풍부사로 있을 때 직손과 함께 참배하고 “과연 명당”이라고 칭송하였고, 정관재공의 사위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도 이 묘에 와서 보고 “풍수지리에 맞는 명당”이라 하였다.
    또 이곳이 고향인 수암(遂巖) 권상하(權尙夏)도 이 묘에 와서 보고 ‘내사군(內四郡
: 주변 4개 군)에서는 으뜸 가는 명당’이라 칭송하였다.

    묘를 이장한지 412년이 지나 충주댐이 완공되었다. 묘 앞애 황강과 벌들이 모두 물에 잠기어 바다처럼 되니 두사충(杜士忠)이 말 한데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 또한 묘지로 가는 길이 따로 없기 때문에 성묘를 하려면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매년 묘사 때면(10월 4일) 함께 모여 도선참배(渡船參拜)하여 묘제를 올리니 400여 년 전에 두사충(杜士忠)의 예언이 아주 적중한 셈이라 놀라워하고 있다.
1993년 여름 가족과 함께 도선참배한 延星會 회원들
참배후 묘 뜰에서 본인의 부호군공에 대한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부호군공 묘소 앞에선 우리 내외

    황강과 벌들이 상전벽해가 되었는데도 부호군의 묘는 원상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것은 후손들이 두사충(杜士忠)의 예언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충주댐 공사 당시 정부에서는 수몰예정선인 해발 145m 이하의 모든 분묘는 모두 이설 또는 이장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는데 이 묘는 해발 142.7m에 있어 수몰 예정선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문중회의를 거쳐 400여 년 동안 전해내려 온 두사충(杜士忠)의 말을 믿고 당국에 현상보존을 청원하면서 ‘수몰이 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공증을 해주고 이장하지 않았는데 과연 만수위 때도 묘의 제절(除節) 바로 아래까지만 물이 차고 묘뜰과 봉분까지는 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충주댐나루에서 월악나루와 단양을 오가는 유람선이 이 묘지 앞을 지날 때면 이 묘에 얽힌 이 이야기를 안내양의 낭낭한 목소리로 녹음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대원군(大院君) 책사(策士) 박유붕(朴有鵬)
2008. 3. 12.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군왕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용인(用人: 사람을 쓰는 일)능력이고, 신하가 갖추어야 할 자질은 용사(用事: 用權 즉 권세를 쓰는 일, 일하는 능력)이다. 군왕은 자질구레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사람을 잘 골라 쓰면 된다. 신하는 일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구한말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가장 고심한 것도 사람을 판별하는 일이었다. 매일처럼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밀려드는 사람들 가운데 옥석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 때 대원군이 고용한 책사가 박유붕(朴有鵬)이라는 인물이었다.

    박유붕(朴有鵬)의 주특기는 바로 지인지감(知人之鑑
: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이었다. 관상(觀相)의 대가였다. 대원군 옆에 앉아서 내방객들의 얼굴과 행동거지를 보고, 그 성격과 주특기를 판별해주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박유붕(朴有鵬) 내력을 추적해 보니까, 그는 경북 청도가 고향이었다. 박유붕(朴有鵬)이 관상에 일가견을 갖게 된 계기는 처갓집의 내력이 작용하였다. 장가를 '만경 두씨(萬頃 杜氏)' 집안으로 갔는데, 이 처갓집이 임진왜란 때에 이여송의 참모로 따라왔다가 조선에 눌러 앉았던 중국 도사 두사충(杜思忠)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처가에 전해 내려오던 두사충(杜思忠)의 풍수서와 관상서를 박유붕(朴有鵬)이 입수할 수 있었고, 이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자 서울 운현궁으로 올라갔다.

    운현궁 마당에서 제기를 차며 놀고 있었던 명복(命福) 도련님의 관상을 보고, 앞으로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 예언이 들어맞았다. 명복 도련님이 고종으로 등극할 무렵부터 대원군은 박유붕(朴有鵬)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도록 운현궁에다가 붙들어 놓았다. 이때부터 세간에는 일명 '백운학'으로 알려지게 된 인물이 바로 박유붕(朴有鵬)이었다. 말하자면 원조 백운학이 청도사람 박유붕(朴有鵬)이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복채(福債)로 서울 '삼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구역을 박유붕(朴有鵬)에게 떼어 주었다. 그가 살았던 45칸 집은 운현궁 길 건너편에 있었다. 현 '수운회관' 뒤였다. 어느 날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며느릿감으로 데려왔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박유붕(朴有鵬)은 반대하였다. 한 번 반대하고, 두 번 반대하고, 세 번째 반대를 하니까, 대원군이 "내 며느리를 보는 것이지, 당신 며느리 보나?" 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후손인 박이수(朴二洙)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 일을 계기로 대원군과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부호군공(副護軍公) 휘 암(巖)
(1993년 延星會 선조유적지 탐방 유인물 抄)
◆ 가계(家系)
부호군공의 가계도

◆ 부호군공(副護軍公 諱 巖) 약력
    ㆍ 자(字) 노첨(老瞻)
    ㆍ 생년 미상, 선조4년(1571) 졸(卒)
    ㆍ 관직: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 증(贈) 부호군(副護軍: 종4품)
    ㆍ 배(配) 전주최씨(全州崔氏), 부(父) 상호군(上護軍) 최수광(崔秀光)
    ㆍ 묘(墓) 제천군 한수면 황강(黃江) 작곡(鵲谷: 까치골) 합부(合 示付)
    ㆍ 중종14년(1519) 기묘사화 때 공의 종형 정헌공(正軒公) 휘(諱) 기(山夔)가 정암(正菴) 조광조(趙光祖)의 수제자로서 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는 등 불안한 시기에 공도 관직을 버리고 충주로 낙향하여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여생을 은일(隱逸)하며 살았다.
    ㆍ 후에 지촌공(芝村公 諱 喜朝)과 친하게 지내던 수암(遂巖) 권상하(權尙夏)가 공의 증손인 시희(時熙), 시걸(時杰) 형제의 효행을 조정에 천거하여 효자(孝子)에 정려(旌閭)되었으며 충북 중원군 동량면 대전리 배일곡에 있는 쌍효각(雙孝閣)이 이들 형제의 효자정려각이다.
쌍효각

◆ 맺는 말
    ㆍ 황강의 부호군공(副護軍公 諱 巖)의 산소는 굳이 풍수지리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월악산과 충주호가 한데 어울어진 한폭의 그림 같은 선경(仙境)에 자리잡고 있어 누가 보아도 명당이라 생각되며, 400여 년 전해오는 전설은 그 진위를 따지기 전에 이 산소의 진가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ㆍ 우리의 선조분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부호군공 또한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깨끗하게 자연과 더불어 한 생을 살고 가신 분으로서 요즈음 사정(司正)과 개혁(改革)의 바람 속에 지난날 권좌에 있던 사람들이 저지른 부정, 부조리, 비리 등 추악한 사회상을 보면서 적어도 공의 산소를 찾는 이 그 ‘맑고 깨끗함’을 배워서 한 생을 살아가는데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