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沙公의 遊醫巫閭山記(월사공의 유의무려산기)
沙月 李 盛 永
월사집에 전하는 월사공(月沙公 휘 廷龜)의 많은 글 중에 기행문 11편이 있다.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상, 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 유박연기(遊朴淵記), 유천산기(遊千山記), 유각산사기(遊角山寺記), 유의무려산기(遊醫巫閭山記), 유송악기(遊松嶽記), 유화담기(遊花潭記), 유도봉서원기(遊道峯書院記), 유조계기(遊曹溪記) 등이다.

  2002년 10월 25일자 중앙일보에 의무려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스크랩 해 둔 것이 있어 간추려 월사공의 유의무려산기와 함께 펼쳐 본다. 유의무려산기는 조선 사신으로서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맨 먼저 의무려산에 오르고 남긴 기행문으로 백 여 년이 지난 후 노가재 김창업이 이 유의무려산기를 들고 두 번째로 의무려산을 올랐다고 한다.

  글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가 보지 않고 글만 읽어도 마치 그 산을 오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먼저 중앙일보 기사를 간추려 본다.

2002년 10월 25일자 중앙일보 18면에 기획기사로 '新연행록'이라는 글이 올랐다. 중앙일보,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공동기획하여 조선시대에 조선 사신들이 연경(燕京: 北京)을 오간 길을 추적하고 쓴 경희대 국문학강사 박지선 박사의 글인데 이 글에서 의무려산을 '연행사(燕行使: 연경으로 가는 사신)들의 혼(魂)이 담긴 산'이라 하였다.
  이는 의무려산이 조선조 500년 동안 수없이 많은 북경을 왕래한 사신과 그들을 수행하는 하졸들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도록 용기를 준 산이라는 뜻일 것이다.

  연행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에 들어와 망망 벌판을 몇 날 몇 일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참고 참으며 걸음을 재촉하여 겨우 선양(瀋陽)에 도착해서 잠시 노독을 풀었지만 또 다시 무작정 옥수수밭이 펼쳐지는 변함없는 지루한 풍광(지금의 풍광)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꼬박 닷새를 걸어갔을 즈음 앞을 가로 막아 하늘금에 우뚝 솟은 산, 바로 의무려산이다. 선양(瀋陽)에서 연경쪽으로 3백 20리를 더 가서 만나는 산이다.

중앙일보에 게재된 의무려산 모습

  산 이름이 좀 특이하다. 중앙일보 글을 빌리면 의(醫)와 무(巫)는 모두 '치료한다', '무당'등의 뜻이며 만주족(여진) 말로는 '크다(大)'뜻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굳이 그 뜻을 새긴다면 '세상에서 상처 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란 뜻이 된다는 것이다.

  의무려산은 3천년 전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열 두 곳의 진산(鎭山) 가운데 하나이며 중국 사람들은 의무려산을 천산(千山: 遼陽의 서쪽), 장백산(長白山: 백두산)과 함께 중국 동북지역 3대 명산 중에서도 첫째로 꼽는다고 한다.
  또 의무려산은 기자(箕子)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고 고구려의 옛 영토이기도 하다.

  중앙일보이 의하면 조선 연행사 중에서 처음으로 이 산을 오르고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1564-1653)였고, 그로부터 1백년여년의 세월이 지나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이 1712년에 이정구의 유람기를 손에 들고 의무려산을 올라 기행문을 썼다.
  그리고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이 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의산문답(醫山問答)」이라는 철학 소설을 남김으로서 의무려산은 연행길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김창업은 그의 기행문에서 의무려산을 그림을 그리듯 상세히 묘사했다고 한다. 관음각(觀音閣)을 지나 산 정상의 절벽에 잇대어 있는 조그만 절 관음사(觀音寺)에서 숙박하고 물 맛이 달고 이슬 같다는 감로암(甘露庵)을 찾았으며 바위 틈으로 난 뿌리를 휘어잡고 있는 관제묘(關帝廟: 관우를 모신 사당) 옛 터에 올라 '도화동(挑花洞)'이란 세 글자를 발견하고 여기가 바로 조선에는 없는 선경이라고 감격하고 있다.
  도화촌은 의무려산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예전에 1천여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있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1만 그루도 더 되는 복숭아나무가 가꾸어지고 있다고 한다.

  김창업은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하여 조선 중기 삼재(三齋: 나머지 玄齋 沈師正, 觀我齋 趙榮祐)의 하나로 화가로서 이름이 난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그림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의무려산 마루턱에 걸터앉아 여섯 겹의 의무려산을 그렸는데 감로암 스님이 그의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산 깊은 곳까지 이렇게 소상히 그릴 수 있느냐고 감탄하자
  김창업은 "아름다운 여인은 미운 아이를 낳지 않고, 한 종지 국으로 온 솥의 국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니 어찌 산을 두루 다 편력하고 나야만 이 산의 모습을 알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면서 여유롭게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은 18세기 실학파 지식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실옹(實翁)이라는 선비와 명분과 공론만을 일삼는 허자(虛子)라는 두 상반된 가상 인물 간의 문답 형식으로 쓰여졌다.
  허자는 숨어서 독서한 지 30년 만에 우주의 원리와 유불선(儒佛禪) 삼교(三敎)의 진리를 다 깨우치고 세상에 나오면서 자신의 학문의 깊이가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라 자부하고 곳곳을 돌아 다니며 자신의 학설을 펴지만 가는 곳마다 비웃음만 산다.
  그래서 허자는'작은 지혜와 더불어 큰 것을 이야기 할 수 없고, 비열한 세속사람과 더불어 도(道)를 말할 수 없다'고 탄식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알아줄 선비를 찾아 중국의 연경으로 간다. 그러나 연경에서도 알아주는 선비를 만날 수 업게 되자 허자는'철인(哲人)이 말랐는가? 나의 도(道)가 잘못되었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세상을 등지고자 한다.
  허자가 세상을 도피하고자 찾는 곳이 바로 의무려산이다. 의무려산에서 허자는 실옹이라는 선비를 만나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마침내 자신의 30년간 해온 공부가 허학(虛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고 실학(實學)에 이르게 된다
는 내용이다.

실옹과 허자의 대비는 곧 실학사상의 본체를 말하는 것인데 홍대용은 왜 그 무대를 의무려산으로 했을까?. 그것은 아마 홍대용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의 현실은 허자들만 들끓고 있으면서 그들은 세계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참으로 답답한 병든 사회로 인식하고 병을 치료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의무려산이 허자처럼 허학에 병든 사람을 치유한다는 뜻을 둔 것 같다. 특히 제목을 '의산(醫山)'이라 한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첩(내금강 佛頂臺, 서울대 규장각 소장)
유의무려산기(遊醫巫閭山記)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월사집(月沙集) 5집 번역문에서
병진년(광해8년,1616) 겨울, 내가 세 번째로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었는데 연도에 명승들은 모두 예전에 실컷 구경한 곳들이다. 다만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북진의 명산으로 늘 한번 구경하려는 뜻은 가지고 있었으나 내가 늙고 행역(行役: 걷는 일)에 지쳐 있는데다가 날씨 마저 추운 때라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었다.

  정사년(광해9년, 1617) 7월에 비로소 사행(使行)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녕(廣寧)에 이르니 예전에 묵었던 집의 주인인 부이시(傅以詩: 傅秀才)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부이시는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산수를 얘기하기를 좋아하여 대화 중에 의무려산의 빼어난 경치를 모두 얻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구경하러 가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나는 설사로 오래 고생하던 터라 종자(從者)들이 번갈아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부사 유노천(柳老泉: 柳澗)은 병으로 함께 가지 못하고 서장관 장자호(張自好)와 종자(從者) 일곱 사람이 따랐다.

  저자를 지나고 성을 벗어나 십 여 리를 가니 빽빽이 우거진 숲이 길을 덮고 푸른 풀이 평원을 덮고 있다.맑은 아침 노새를 타고 가노라니 기분이 상쾌하여 문득 묵은 병이 깨끗이 낫는 듯 하였다. 고개 하나를 넘으니 사당이 나오는데 북진묘(北鎭廟)라 하였다. 바로 무술년(선조31년, 1598)에 필운(弼雲: 李恒福) 대감과 유람한 곳으로 당시 지은 서(敍)와 시(詩)가 있다.
(戊戌辯誣使 副使로 연경에 갔음)

중앙일보에 게재된 북진묘 전경

청나라 건륭황제가 조선 사신들에 대하여 언급한 비석이 있다고 한다. 언덕 너머에 저택이 많아 단청이 은은히 비쳐 보이니 모두 성안 거실(巨室)들의 별장이라고 한다. 또 오리쯤 가니 봉우리들이 다발로 묶어 세운 듯 삐죽 삐죽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모두 조물주의 조화가 아닌 것이 없었다. 시냇물을 건너자 길을 찾지 못하여 부수재(傅秀才)가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산 아래 마치 무릉(武陵)과 같은 마을이 있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소를 타고 골짜기에서 나와 턱으로 산에 들어가는 길을 가르켜 주기에 그 길로 올라가니 작은 암자가 가파른 봉우리 위에 붙어 있는 모습이 너무도 기절(奇絶: 정신을 잃고 까무르칠 정도로 기이한 절경) 하여 마치 그림 같았다. 이 곳이 바로 소관음굴(小觀音屈)이다. 말을 멈추고 눈길을 모아 바라 보노라니 차마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두 개의 시냇물을 건너고 꺾어서 북쪽으로 올라가니 큰 봉우리가 우뚝 허공을 버티고 서 있는데 온 산이 바위이고, 나는 듯한 자태의 누각이 절벽의 반쯤 높이에 있었다. 중이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문을 열고 아래로 굽어 보는데 그 모습이 아득하여 마치 날고 있는 새와 같았다.

  부수재가 채찍을 들어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대관음굴(大觀音屈)입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모든 봉우리의 경치를 다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얼굴을 젖히고 우러러보니 곧바로 치솟은 바위가 가파르고 미끄러워 발붙일 곳이 없을 것 같기에 부수재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속였구려. 내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히지 않은 한 올라가기 어렵겠구려" 하니, 부수재가
  "나만 따라 오십시오 신선을 찾아가는 길은 절로 있게 마련입니다" 하였다. 잠시 고생을 하다가 가던 길을 버리고 남쪽으로 걸어가서 벼랑을 따라 고개를 하나 넘으니 길은 역시 험했으나 그나마 오를 만했다. 산 능선에 올라 능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서 다시 한 바위에 오르니 관음굴 바로 뒤쪽인데 멀리 둘러서 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가 있었다. 봉우리가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져 관음굴로 길이 뚫려 있었다. 몹시 숨이 가빠서 잠시 쉬어서 걸었다. 기이한 나무와 바위들이 걸음마다 사랑스러웠으나 숨이 차서 일일이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한 절벽에 '북진무악(北鎭巫嶽)'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에 물이 솟아 작은 못을 이루었고 또 그 물을 받아서 작은 우물을 이루고 있었다. 주인(廚人: 주방 담당)이 이곳에서 밥을 지어 소나무 그늘에 식사를 차려 놓았다. 소나무는 늙어 구름을 찌르듯 높이 자랐고, 뿌리는 마치 용의 발톱과 같았다. 완만한 길을 돌아 동쪽으로 가서 돌계단 길을 올랐다. 계단은 40여 개 남짓했고, 계단을 다 오르자 석문(石門)이 입을 딱 벌린 모습으로 굴을 이루고 있으며, 굴 위에는 전각이 나는 듯한 자태로 서 있었다. 전각 위에는 누각이 있는데 난간이 벽 밖으로 나와 있어 위태로워 기대고 설 수가 없었다.

  물이 산꼭대기로부터 세 갈래로 시작하여 전각 아래로 흘러와서는 쏟아져 내려 폭포를 이루었다. 가뭄이 한창 심할 때인데도 물이 바위 표면을 덮으며 졸졸 흐르고 있었다. 비가 왔다 하면 백 길 높이의 절벽이 죄다 긴 폭포가 되어 기절(奇絶)하기가 여산폭포(廬山瀑布)와 같다고 한다.

  누각 왼쪽에는 요사(寮舍: 절의 중들이 거처하는 집) 두 채가 있고 거주하는 중이 7, 8명 남짓 되었는데, 차를 내 와 우리를 환대 해 주었다. 누각 뒤 바위 틈을 뚫고 길이 나 있었다. 길은 모두 여섯 차례나 꺾이면서 꼬불꼬불하고 매번 꺾이는 곳마다 수 십 여 개의 계단이 있는데 짧은 것은 십 여 개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엉금엉금 기어서 계단을 손으로 잡고 줄곧 올라가니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마치 옛 글에 이르기를 '차서(次序: 순서)에 따라 점차적으로 올라 하학상달(下學上達: 학문이 점점 높아짐)하면 절로 고명(高明)한 경지에 도달한다'는 가르침과 같았다. 정상은 비좁아 겨우 한 칸의 암자가 들어서 있는데 암자에는 금불상 하나가 안치되어 있고, 금불상 앞에는 종이 하나 걸려 있었다. 정신이 어지러워 아래를 굽어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봉우리들이 마치 신하들이 임금을 조회하듯이 둘러선 모습 뿐이고, 지금까지 지나 온 전각이며 누각은 구름에 덮여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 몸이 날려갈 판이라 서로 부축하며 내려왔다.누각에 돌아와서는 피곤하여 한 식경 동안 낮잠을 잤다. 종자(從者)가 시원한 과일을 깎아서 내놓기에 먹어 보니 교리(交梨: 배의 일종)와 같았다. 앞 봉우리에 이미 석양이 지는 것이 보이기에 빨리 걸어서 고개 하나를 넘으니 멀리 옥천사(玉泉寺)가 보였으나 몹시 피곤하여 올라가 보지 못하였다. 무더위가 한창 심할 때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소녀풍(少女風: 비 오기 직전 솔솔 부는 바람)을 만나 매우 시원하더니 모르는 사이에 비가 산을 뒤덮어 지나온 뒤를 돌아보니 이미 몽롱해져 보이지 않았다.

  막 골짜기를 벗어나자 빗방울이 사람을 뒤따라 와서 서늘한 기운이 더위를 씻어내고 어느새 옷이 젖었다. 이 또 한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북진묘에 들어가 회선정(會仙亭)에 오르고, 이어서 북루(北樓)에 오르니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거세어 앉아 쉴 수가 없었다. 응씨(應氏) 성의 도사(道士)가 소나무 그늘로 인도해 앉혔는데 사람됨이 충실하여 얘기를 나눌 만 하였다. 주인(廚人)이 술과 과일을 내왔기에 몇 잔 마시고 헤어졌다. 객점에 돌아와서 등잔불을 밝히고 글을 쓰노라.
(유의무려산기 끝)

  이 산행 기행문에서 월사공의 표현력이 정말 돋보인다.
  기암봉들이 조밀하게 솟아 있는 것을 아래서 보면서는 "오리쯤 나아간 곳에 봉우리들이 다발로 묶어 세운 듯 삐죽삐죽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모두 조물주의 조화가 아닌 것이 없다(五里許,始望見群峯束立,無不造天: 오리허,시망견군봉속립,무불조천)"라고 하였고,
  정상에 올라 내려다 보면서는 "그저 보이는 것은 봉우리 들이 마치 임금을 조회하듯이 둘러선 모습이다(但見群峯環拱與朝,向之閣與樓: 단견군봉환공여조향지각여루) "라고 하였다.
  또 정상에 오른 감회를 "마침내 정상에 오르니 마치 '차서(次序: 순서)에 따라 점차적으로 올라 하학상달(下學上達)하면 절로 고명(高明)한 경지에 도달한다'는 옛말과 같았다"고 하여 힘들게 산에 오르는 것을 마치 학문을 닦는 과정에 비유하고 있다.
  월사공의 높은 경지에 이른 학문과 문장가 다운 생각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월사공은 기행문 뿐만 아니라 의무려산에 오르면서 감회에 젖어 시 세 수를 지었고 또 그 보다 18년 전인 선조31년(1598) 무술변무부사로 연행하였을 때 의무려산 기슭의 서악묘(西嶽廟)에 들려서 긴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월사공의 시 4수를 말미에 옮겨 놓는다.

의무려산(醫巫閭山)으로 가는 도중 읊다
              월사집(月沙집) 제6권
暫偸行役暇(잠투행역가) 바쁜 일정에 잠시 틈을 훔쳐서(내서)
來訪石門禪(내방석문선) 석문의 선방을 찾았노라
野店依深樹(야점의심수) 객점은 깊은 숲속에 있고
山蹊入亂蟬(산혜입난선) 산길은 시끄러운 매미 울음 속으로 드네
鐘來知近寺(종래지근사) 종소리 들려오니 가까이 절 있는 줄 알겠고
僧出恍逢仙(승출황봉선) 스님이 나오니 마치 신선을 만난 듯 하구나
客意飜蕭瑟(객의번소슬) 나그네 마음은 문득 스산해져
歸程望杳然(귀정망묘연) 돌아갈 길 바라보니 아득하기만 하네

策馬荒城外(책마황성외) 황량한 성 밖에서 말을 채찍질하고
扶공古寺前(부공고사전) 옛 절 앞에서 대나무 지팡이 짚었노라
飛樓壓無地(비루압무지) 날아갈 듯한 누각은 땅을 짓누르고
危塔近諸天(위탑근제천) 아슬아슬하게 높은 탑은 하늘세계에 가까웠네
晩睡松間榻(만수송간탑) 저녁에는 소나무 숲 평상에서 자고
朝炊石竇泉(조취석두천) 아침에는 석간수 샘물로 밥을 짓네
世間三伏熱(세간삼복열) 세상에는 삼복 더위 속에
膏火幾人煎(고화기인전) 기름 불길에 몇 사람이나 들볶이고 있는지

동악(東嶽)의 북진묘(北鎭廟)
五嶽雄天下(오악웅천하) 오악이 천하에 웅거 하였는데
巫山鎭北隅(무산진북우) 무산은 북쪽 모퉁이를 누른다.
風雲配斗極(풍운배두극) 풍운은 북극을 짝하였고
日月護神都(일월호신도) 해와 달은 신도를 감싸 주는 구나
禮數增昭代(예수증소대) 제사의 예수를 더한 것은 태평성대이었고
崇封始聖虞(숭봉시성우) 높이 봉해지기는 순임금 시절 때부터 이라네
苔碑尋古事(태비심고사) 이끼 낀 비석에서 옛 일을 찾아보노니
不覺滯征途(불각체정도) 나도 모르게 갈 길을 지체하였구나
(무술년-선조31년, 서기 1598년-에 오성 이항복과 무술변무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북진묘에 들려 지은 것으로 생각됨)

서악묘(西嶽廟)에 노닐며
              월사 이정귀(선조31년, 1598, 戊戌)
誣閭之山何壯哉(무려지산하장재) 무려의 산은 어쩌면 이다지도 웅장한가
萬朶芙蓉揷晴昊(만타부용삽청호) 만 송이 연꽃이 맑은 하늘에 꽂히었어라
東蟠滄海界華夷(동반창해계화이) 동쪽으로 바다에 서려 화이의 경계 이루고
北注陰沙鎭荒 阜奧(북주음사진황오) 북쪽으로 사막에 뻗어 변방의 진산 되었도다.(阜奧 합)
專雄坎維配玄冥(전웅감유배현명) 북방에 홀로 웅거하여 현명(북방신)을 짝하고
擺弄陰機排老오(파롱음기배노오) 음기를 마음껏 희롱하여 노오(할미)을 밀쳤구나
靈宮丹碧照山腰(영궁단벽조산요) 신령한 사당 휘황한 단청은 산허리를 비추고
玉塔珠燈窮佛寶(옥탑주등궁불보) 옥탑과 구슬등잔, 절이 갖는 보물 다 갖추었네
殿門高開洞庭野(전문고개동정야) 전각문 높이 열려 동정호 같이 넓은 들판 펼쳐지고
霞光遠邑蓬萊島(하광원읍봉래도) 안개 빛은 멀리 봉래산 섬과 잇닿아 있네
我來山下日初斜(아래산하일초사) 내가 산 아래 이르니 해가 막 기울 즈음이라
玉立千峯雲淨掃(옥립천봉운정소) 우뚝 선 일천의 옥봉우리에 구름이 깨끗이 걷혀
擡頭快見眞面目(대두쾌견진면목) 머리 들어 산의 진면목을 후련히 보았으니
感通不待潛心禱(감통불대잠심도) 맘 속으로 기도 안해도 이미 감통했다오
天台四萬八千丈(천태사만팔천장) 사만 팔천 길 높이를 자랑하는 천태산도
對此應須愁欲倒(대차응수수욕도) 이 산 마주하면 속상해 자빠지고 싶으리라
庭邊松老不知年(정변송노불지년) 정원 가에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송들이
翠盖成行夾神道(취개성행협신도) 신도(묘소길) 양쪽에 푸른 덮개처럼 줄을 섰구나
豊碑 奇欠 側字半訛(풍비기측자반와) 큰 비석들 기울어지고 글자는 반이나 마모돼(奇欠 합)
苔蘚荒凉不可考(태선황량불가고) 황량하게 이끼 끼어 연대를 알 수 없구나
森然自覺魂骨夾(삼연자각혼골협) 숙연히 넋과 뼈가 서늘해 짐을 느끼겠노라
菲薄何由薦 艸頻 藻(비박하유천빈조) 무슨 수로 정갈한 제수를 마련해 올릴까(艸頻 합)
樓前有亭石爲層(누전유정석위층) 누대 앞에 있는 정자 돌 층계
乍倚危巖滌煩惱(사의위암척번뇌) 높은 바위에 기대어 잠시 번뇌를 씻노라
前臨長野杳無邊(전임장야묘무변) 앞의 끝없이 긴 들판을 굽어보고
海色天光同浩浩(해색천광동호호) 바다와 하늘 빛 함께 어우러져 아득하구나
水闊蒼梧波影浸(수활창오파영침) 물이 드넓은 창오에 파도 그림자 스미고
日暈扶桑曙色早(일운부상서색조) 햇무리 지는 부상에 새벽 빛이 이르구나
還如開闢混沌初(환여개벽혼돈초) 오히려 개벽하던 당초의 혼돈 상태에서
萬象鴻 水蒙 始天造(만상홍몽시천조) 흐릿한 삼라만상을 하늘이 처음 만든 듯(水蒙 합)
地靈光嶽鍾豪英(지령광악종호영) 신령한 땅 산 기운이 영걸을 내었고
天府雄藩拱襟抱(천부웅번공금포) 천년의 고장 웅장한 변방 봉우리들이 애워쌌네
鐘鳴鼎食足樓臺(종명정식족누대) 즐비한 큰 대갓집들 누대가 빼곡히 모였고
碁布星羅壯城堡(기포성라장성보) 바둑판인 듯 별자리인 듯 성곽도 웅장해라
心隨望眼極天外(심수망안극천외) 마음은 눈길 따라 하늘 저편 끝까지 가네
況御冷風遊太灝(황어냉풍유태호) 흡사 서늘한 바람 타고 태허공에 노니는 듯
飄然窮海一畸人(표연궁해일기인) 표연히 외진 바닷가에 온 쓸모없는 사람
半世風塵頭已皓(반세풍진두이호) 반평생 풍진 겪느라고 머리털이 싀었구나
桃源緬思久迷津(도원면사구미진) 아득한 도원 생각해도 길 잃은 지 이미 오래
壯遊如今諧夙好(장유여금해숙호) 장쾌한 여행의 숙원을 오늘에야 이뤘구나
仙區幸寤石上夢(선구행오석상몽) 이 신선 세계에서 행여 석상꿈 깬다면
一丘煙霞願終老(일구연하원종노) 여기 연하 속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구나
歸時擬把費公藤(귀시의파비공등) 그리고 돌아갈 땐 비장방의 지팡이 타고
萬岫春風採瑤草(만수춘풍채요초) 봄바람 속에 만악천봉의 요초를 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