駕鶴樓(가학루)에 올라
沙月 李盛永(2006. 12. 12)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하향 길에 오르면 금강(錦江)휴게소를 지나면서 북쪽의 속리산군(俗離山群)과 남쪽의 민주지산군(岷周之山群)의 준령(峻嶺)들 사이에 낀 협곡을 통과하느라고 오르고, 내리고, 돌고, 터널을 빠져나가면서 손바닥 만한 하늘 조각만 보이니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다가 앞이 탁 트이면서 차도, 사람도 식은 땀을 씻으며 안정을 찾게 되면 어느 듯 황간(黃澗)이다.

  왼쪽으로 황간 장터가 보이고 좀 더 눈이 앞질러 가면 높다란 벼랑 위에 산듯한 정자 하나가 보인다. 내가 김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이곳에 소풍을 온 적도 있고, 외지로 나와 다니면서 일년에 한두 번 고향을 찾을 때면 이 앞길을 지나기 때문에 기차나 버스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정자의 전경이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자의 이름도, 내력도 알지 못하고 또 알아 볼 생각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국방부 도서실 한 귀퉁이 서가에 새까만 먼지가 앉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는 옛날 우리나라의 각 지방의 지리와 역사가 혼합된 고전의 책장을 넘기던 중 황간현(黃澗縣) 편에서 「駕鶴樓(가학루)」라는 정자 이름을 보고 바로 그 정자일 것이라 생각하였고, 더구나 그 정자의 전경을 멋지게 읊은 한시(漢詩)를 읽어보고부터는 꼭 한번 가 보리라고 마음 먹게 되었다.
황간 가학루(駕鶴樓) 전경
  그것은 그 시(詩)가 바로 우리 延李의 양원공(楊原公 諱 淑 王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전(大田)에서 근무하게 된 지 며칠 안 되는 어느 날 가벼운 옷차림으로 차를 몰아 순식간에 정자가 있는 벼랑 밑에 다달아 차를 세워두고 벼랑이 길을 올랐다.

  장마 뒤에 오는 삼복 더위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즐거움 때문인지 사뭇 몸도 마음도 갓분한 기분으로 잡기장 한 권과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귀에는 카세트 이어폰을 꽂고 음악에 맞추어 흥얼거리면서 오솔길을 올랐다.

  정자에 도착하자 혹시나 헛탕이 아닌가 가슴을 조이면서 현판 쪽으로 가서 「駕鶴樓(가학루)」라는 큼직한 글씨를 보는 순간 “맞구나!” 하는 탄성과 함께 반가움과 성취감에 젖어 한동안 멍하니 현판 글씨를 쳐다보고만 있다가 먼저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안내판으로 갔다.

  안내판에 의하면 「조선조 태조2년(1392)에 황간현감 하첨(河詹)이 창건(創建)하고, 경상도 관찰사 남공(南公)이 순시 왔다가 ‘학(鶴)이 바람을 타고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하다’하여 정자 이름을 駕鶴(가학)이라 편액(扁額)하고, 이첨(李詹)이 기문(記文)을 썼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현감 손번(孫蕃)과 구장원(具長源)이 중건(重建)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누각 안벽에 걸려있는 가학루중수기(駕鶴樓重修記)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이첨(李詹)과 조위(曺偉)의 기문(記文) 내용과는 많이 틀린다.
  즉 의성인(義城人) 귀암(龜巖) 남재(南在)가 태종3년(1403, 癸未) 9월에 경상도 관찰사로서 황간에 순시왔다가 현감으로 부임한지 달포 밖에 안 되는 하동인(河東人) 하담군(河澹君)을 시켜서 짓게하고, 이듬해(태종4년, 甲申) 정월에 준공하면서 남공(南公)이 현판을 달고, 이첨(李詹)이 기문(記文)을 썼다고 되어 있으며, 성종20년(1489, 己酉) 8월에 현감 밀양인(密陽人) 손번(孫蕃)이 중건(重建)하고,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기문(記文)을 쓴 것으로 되어있다.

  잘못된 안내문은 언젠가 바로잡아 지겠지만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그런 것을 따지려 함이 아니므로 그냥 넘어 가기로 한다.

  누(樓)에 오르니 추풍령(秋風嶺)으로 이어지는 길다란 들판에 경부(京釜) 국도(國道)와 고속도로(高速道路)가 나란히 달리고, 그 사이에 철로(鐵路)가 한 여름 폭염을 받아 아지랑이처럼 더운 김이 피어 오르는 가운데 파란색 새마을호 열차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다.

  영남(嶺南)을 거쳐 추풍령을 휘어 넘은 시원한 바람이 삼복의 더위를 싹 잊어버리게 한다. 내게는 시심도(詩心)도 시재(詩才)도 없으니 양원공(楊原公)의 시귀(詩句)를 빌릴 수 밖에----
< 양원공의 가학루시(駕鶴樓詩) >
弱歲放浪此地遊(약세방랑차지유) 젊은 시절 방랑하며 이곳에 와서도 놀았는데
跣丸歲月經幾秋(선환세월경기추) 탄환처럼 빠른 세월이 그 몇 년이나 지났던고
蒼樓 木追 碎今重修(창루추쇄금중수) 옛 정자가 낡아서 부수고 이제 다시 지으니
功重使君古諸侯(공중사군고제후) 사군의 공로가 옛날 제후와 같이 무겁도다.
激湍水聲亂驚湃(격단수성난경배) 세찬 물소리에 놀라 어지러이 물구비가 일고
遠混陰壑響靈 竹밑賴(원혼음학향령뢰) 멀리 음침한 골짜기 신령스런 소리 메아리 치네
試憑畵欄卷珠簾(시빙화난권주렴) 그림 같은 풍경의 난간에 기대어 주렴을 걷고 보니
萬像森羅騁目外(만상삼라빙목외) 삼라만상 풍경이 눈 앞으로 말타고 달려오네
坐待一更山月吐(좌대일경산월토) 초경까지 앉아 기다리니 산이 달을 토해놓고
以手弄之淸可 手변菊(艸제외) (이수농지청가국) 희롱 삼아 손 내밀면 맑은 달이 잡힐 것 같아
攝(手변제외) 銀橋何順隨(족섭은교하순수) 은교 밟고 월궁에 가는 것(注2)어찌 이에 따르리.
人免 仰宇宙直窮搜(면앙우주직궁수)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온 우주를 샅샅이 찾아 보아도.
崔灝已去挽難留(최호이거만난류) 최호(注3)는 이미 가고 없으니 붙들 수도 없네
霜枯芳草不復 艸밑妻(상고방초불복처) 서리가 방초를 말려버렸으니 다시 무성할 수 없고
只有歷歷淸川流(지유역역청천류) 지금은 맑은 시냇물만 역력히 흐르고 있구나
笛吹何處徹寂廓(적취하처철적곽) 어디서 부는 피리소리 적막한 허공을 꿰뚫으니
惹起客愁雲漠漠(야기객수운막막) 나그네 시름 구름처럼 막막하게 피어오르네
壁間詩句更起予(벽간시귀갱기여) 벽에 붙은 시귀가 다시금 나의 흥을 일깨워
欲和高吟頭側鶴(욕화고음두측학) 훌륭한 글귀에 화답하려 학 목을 빼고 기웃거리네.
  (注1) 옛 우리 조상들은 해를 상징하는 것을 삼족오(三足烏), 달을 상징하는 것은 두꺼비(蟾)라 하였다.
  (注2) 중국 당나라 명황(明皇) 때 도사 나공원(羅公遠)이 명황을 모시고 월궁(月宮)에 갈 때 지팡이를 공중에 던져 銀橋(은교)를 만들어 이를 밟고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말함.
  (注3) 崔灝(최호):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중국 무창(武昌)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에 올라 시 한 수를 지었는데, 최호의 황학루 시에 「芳草 艸밑妻 艸밑妻(방초처처) 淸川歷歷(청천역역)」이란 구절이 있다.

당(唐)나라 시인 최호(崔顥)의
< 黃鶴樓詩(황학루시) >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선인은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리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이 땅에는 텅 빈 황학루만 남아 있네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복반) 황학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년을 허공에 유유히 떠 있네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역한양수) 맑은 날 강물 한양의 나무들 역력히 비치고
     芳草 艸밑妻 艸밑妻 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향기로운 풀 앵무주에 무성하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해 저물어 가는데 내 고향은 어드메뇨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연기 강에 서려 사람을 시름에 잠기게 하네

  이 시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최호가 경치 좋기로 이름난 동정호 호반의 앵무주가 눈앞에 펼쳐지는 황학루에 올라 주변 경치를 읊은 시다. 뒷날 중국 당나라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백(李白: 李太白)이 이 시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황학루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좋은 시를 읊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짓지 못하고 떠나면서 ‘眼前有景道不得(안전유경도부득) 崔顥詩在其上頭(최호시재기상두)’이란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가 눈 앞에 있어도 도(道: 詩)를 얻지 못하는 것은 최호의 시가 그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보다 더 나은 시를 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백은 그 후 금능(金陵)의 봉황대(鳳凰臺)에 올라 유명한 봉황대시를 지어 이 최호의 황학루시와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가 세상에 나온 후 중국과 조선의 많은 시인들이 이 시의 ‘芳草 艸밑妻 艸밑妻(방초처처) 晴川歷歷(청천역력)’을 많이 인용하였다. ‘

  이 시는 옛날 이 아름다운 황학루를 짓고 풍월을 하며 신선처럼 살던 사람이 죽고 없는 것을 ‘황학을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표현하였고, 주인이 없는 빈 누각만 남은 그 하늘에 흰 구름이 천년동안 유유히 떠 있고, 물가의 나무들이 맑고 맑은 시냇물에 비치고, 호수 복판의 섬 앵무주에는 향기로운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게 한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하루 해가 다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다가 문득 해가 지는데, 황학루 경치와는 대조적으로 갈 곳 없는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돌아본다. 강 위에 서리는 저녁연기는 사람을 더욱 시름에 잠기게 한다고 읊고 있다. 한자(漢字)와 한문 문장의 뉘앙스에 어두운 범인들에게도 한 폭의 그림을 머리 속에 그리게 하는 시다.

  양원공(楊原公 諱 淑 王咸, 숙함)은 자(字)를 차옥(次玉), 호(號)를 몽암(夢庵), 양원(楊原)이라 하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정확한 생년은 미상이나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휘 末丁)의 마지막 다섯째 아들로 바로서 위의 형인 연안군(延安君 휘 淑琦)이 세종11년(1429) 생이니 그보다 약간 뒤가 될 것이다.

  단종 원년(1453) 생진과(生進科)에 장원급제 하였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세조3년(1457)의 중시(重試)와 세조12년(1466)의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이 이를 두고 그를 삼중(三重)이라 하였다.

  성종7년(1476)에는 대제학(大提學) 서거정(徐居正)의 추천으로 노사신, 임원준, 어세겸, 정난종과 함께 호당(湖堂: 賜暇讀書)에 뽑혔으니 젊은 시절부터 유망한 인재로 우뚝 솟아 있었다.

  역임한 관직으로는 단종2년(1454) 문과 급제 후 경창부(慶昌府) 승(承), 경연(經筵)의 사경(司經: 정7품), 세조1년(1455) 좌익 원종공신으로 사헌부 감찰(監察; 정6품), 세조5년(1459) 경연(經筵) 사경(司經:정7품), 세조14년(1466) 홍문관 응교(應敎; 정4품), 성종1년(1470) 사섬시(司贍寺) 첨정(僉正: 종4품), 성종11년(1480) 군기시(軍器寺) 정(正: 정3품), 성종15년(1484)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정3품 상), 성균관 사성(司成: 종3품), 성종19년(1488) 중추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성종21년(1490) 대사성(大司成: 종2품)과 이조참판(吏曹參判: 종2품)을 지냈다.

  외직(外職)으로는 성종20년(1489) 충청도, 전라도, 함경도 관찰사(觀察使: 監司, 종2품)를 역임하면서 덕행(德行)과 선정(善政)을 베풀어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에 올라 있고,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과 지례(知禮)의 도동서원(道洞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사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 양관(兩館: 弘文館, 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정2품)에 증직(贈職)되고, 시호 문장(文莊)이 내려졌다. 시호 문장(文莊)문(文)근학호문(勤學好門) 즉 ‘학문을 추구함에 있어서 모르는 것은 수하(手下) 사람에게도 부끄러원하지 않고 물었다’는 말이고, 장(莊)이정지화(履正志和) 즉 ‘항상 바르게 이행하고, 뜻이 화합하였다’는 말이다.

  공은 성품이 곧고, 넓고 깊은 학식을 가졌으며, 시호에서 보듯이 남들과 화합하였으며, 문장이 아름답고, 글씨를 잘 써서 많은 비명(碑銘), 행장(行狀), 시장(諡狀) 그리고 기문(記文)등이 비석과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며, 성종16년(1485)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대제학 서거정(徐居正)과 신증동국통감(新增東國通鑑)을 편찬하였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충열공(忠烈公) 중장(仲章) 하위지(河緯之)가 공을 평하여 일대종장지문(一代宗章之文) 즉 '한 시대의 으뜸가는 문장’이라 하였다. 양원공은 특히 외직으로 전라, 충청,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특히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북방이 문학에 어두운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4체의 소학(小學)을 대량 발간 보급하여 학문의 기초를 닦을 수 있도록 북방문풍(北方文風)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어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에 도 올랐으며, 함흥 문회서원에 향사(享祀)되었다. 이러한 공의 애민정신을 이어받아 후에 증손 청련공(諱 後白)이 역시 함경감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이 문회서원에 향사(享祀)되었다.

  서거정과 깊은 관계를 가진 것 같다. 성종 15-17년 공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대제학 서거정을 도와 통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은 성종12년(서기1481년)에 여지승람 50권으로 처음 발간되었고, 17년(1486)에 동국여지승람 35권으로 정정 발간되며, 중종25년(1530)에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으로 발간된 전국 군현별로 지리와 역사가 망라된 책이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는 공의 시와 글이 많이 실려 있다.

  공은 또한 시심(詩心)이 깊어 앞에 소개한 가학루시(駕鶴樓詩) 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시 17수, 기문(記文) 6편이 수록되어 전해지고 잇다.

  시는 위 황간의 가학루시 외에 온양의 온천행궁(溫泉行宮)의 직려(直려)(주3)로 입직하고 있을 때 임금을 호종하고 내려온 영숙(永叔) 임원준(任元濬)과 수창(酬唱: 시문을 주고 받는 것)하면서 온양의 여덟 가지 좋은 일을 읊은 것(八詠詩)8수와 비인현(庇仁縣)에서 서거정과 비인팔경(庇仁八景)을 읊은 것 8수, 그리고 임실현(任實縣)에서 읊은 것 1수가 수록되어 있다. (주3) '려'자는 礪에서 石을 뺀 글자

  기문으로는 파주 화석정(花石亭), 원주 숭화정(崇和亭), 영광 망원루(望遠樓), 진도 벽파정(碧波亭), 서울 승문원(承文院)과 사복시(司?寺) 등의 창건 또는 중건 기문이 수록되어 있다.(화석정기문 관련 이야기(클릭): 이성영홈페이지 >> 연리이야기 >> 화석정 작명 이야기)

  앞서 소개한 가학루시의 정확한 창작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시문의 내용과 양원광의 약력으로 볼 때 성종20년(1489) 중건 직후 공이 전라도 또는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에 들려 지은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것은 성종20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기록으로 보아 이를 전후하여 충청도 관찰사도 역임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학(鶴)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가학루(駕鶴樓)라 이름 지었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이 누각에 올라 내 자신이 학을 탄 듯한 상쾌한 기분으로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양원공의 발자취를 따라 특히 경치 좋은 곳에 세워진 정자와 시심이 울어나게 하는 절경들을 책 속에서나마 찾아 훨훨 날아다녔으니 삼복의 피서법 치고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또 있겠는가/.

  정자를 내려오니 해는 벌써 정오를 훨씬 넘어 비로소 시장기를 느끼면서 또 한번 동국여지승람이 가르쳐 준 황간 서편의 산양암(山羊岩) 아래 장교천(長橋川) 물가에서 민물고기 매운탕을 먹으니 이곳 황간의 일품(一品)은 이제 빠진 것이 없는 것 같다.
경부선 하행열차에서 바라본 가학루(2008.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