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나무(樗)의 무용지용(無用之用)
沙月 李盛永(2013. 11. 27)
  내가 김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사에 입학하여 고향을 떠날 때까지 고향마을에서 도시락 반찬이나 귀한 손님 밥상에 올리는 반찬 중에 ‘가죽자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른 봄에 가죽나무 새순을 따서 잘 양념된 찹쌀죽을 골고루 발라서 말린 것을 볶거나 튀긴 것이다.

  그래서 나의 고향마을 사월(沙月)에서는 가죽나무를 숭상했었고, 지금도 몇몇 집 담 가에 작지만 가죽나무가 남아있다. 또 이를 무척 좋아했던 족형(族兄) 한 분은 고향집을 개축하여 가꾸면서 언덕바지에 가죽나무를 심어 여러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최근에 박영하 글, 제갈영 사진으로 이비락(樂)이 발행한 <우리나라 나무이야기> 책에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라 부르고, 진짜 가죽나무는 ‘개가죽나무’라 부른다」고 쓰면서 「참죽나무 어린 잎은 식용할 수 있고 목재도 다양한 곳에 사용할 수 있지만 가죽나무는 어린 잎도 먹을 수 없을 뿐더러 목재조차 별반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이득이 없는, 별볼 일 없는 나무로 여겨지기도 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나를 포함해서 우리 고향 사람들은 ‘참죽나무’‘가죽나무’로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한자로 樗(저) 또는 樗木(저목)으로 표기하고, 가승목(假僧木), 가중나무, 취춘수(臭椿樹)라고도 부르는 가죽나무(樗)자를 호(號)로 사용하신 저헌공(樗軒公)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가죽나무

  전해오는 고사성어(故事成語)에 ‘무용지용(無用之用)’이란 말이 있다. 어의(語義)는 아무 쓸모 없이 보이는 것이 때로는 어느 것보다도 더 유용하게 쓰인다는 뜻이다.
  이 말의 어원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은사 광접여(狂接輿)가 공자(孔子)를 비평하는 대목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광접여가 공자를 비평하기를 “무릇 산의 나무는 쓸모가 있음으로 벌목이 되어 불을 때기 때문에 자기 몸이 해를 입는다. 육계(肉桂: 계수나무의 두꺼운 껍질, 건위강장제로 씀 )는 식료가 되고, 옷(漆)은 도료가 되므로 벌목도 당하고 꺾이기도 한다. 그 사람(공자를 가리킴)은 유용(有用)한 용(用)만 알고, 무용(無用)의 용(用)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참으로 가련하다”(人皆知 有用之用而莫知 無用之用也)
  이는 인의도덕(仁義道德)으로써 난세에 유익한 일을 해 보려고 애쓰는 공자의 태도를 풍자한 것인데 쓸모 없는 유용(有用)은 도리어 자신을 해치는 유해 무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한 것이다.

  다음은 송나라 때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자가 제자 한 사람과 산길을 가다가 무성한 큰 가죽나무를 보았다. 그런데 부근에서 벌목을 하고 있는 나무꾼이 이 나무는 손을 대려고 하지 않고 다른 나무들만 베고 있어 그 까닭을 물으니 나무꾼이 대답하기를 ‘이 나무는 잘라봐야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자 장자가 제자에게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가 없는 덕택으로 자기의 천수(天壽)를 다 할 수가 있군”(此木以不用得其天年) 하였다.

  또 송나라 사상가 혜시가 어느 날 장자를 쓸모 없이 크기만한 가죽나무 빗대어 말하자 장자가 이렇게 대꾸하였다.
  “비록 가죽나무가 몸통은 울퉁불퉁하고 가지가 굽어져 쓸모가 없으나 벌판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찾아와 그늘 밑에서 쉬기도 하고, 목수가 도끼로 자르려 해도 힘만 들고 쓸모가 없어 그대로 내버려 두니 이것이야 말로 대용(大用)이 아닌가. 작은 재주를 인정 받은 사람은 그 재주 때문에 평생을 그 틀에 묶여 산다. 참된 재주란 보다 높은 경지의 도(道)를 알고 그것에 맞추어 사는 것 이다”라고 하면서 가죽나무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을 설명하였다.

  또 도종환 시인은 가죽나무를 이렇게 읊고 있다.

  우리 延李 후손들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된 선조들 중에는 저헌공(樗軒公諱石亨)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저헌공을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삼장원(三壯元)이다. 세종23년(1441) 27세로 봄에 치른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모두 장원(壯元)을 하고, 여름에 실시한 문과(文科)에 또 장원하여 한 해에 삼장(三場)에서 모두 장원한 것을 말한다.
辛酉榜(신유방): (세종23년)
< 서울대학 발간 國朝榜目 秒 >
<설명>오른쪽 첫머리 乙科三人의 맨 앞에 司正李石亨(문과 장원),
왼쪽 끝에 生壯司正李石亨(생원과 장원),
進壯司正李石亨(진사과 장원) 이 기록되어 있다.
* 司正은 오위에 속하는 정7품의 관직인데 저헌공 연보에는 기록이 없으나
성균관 공부를 마친 후 이 관직에 임명되어 있다가 삼장(三場)에 응시한 것 같다.

  저헌공은 이 삼장원에 앞서 세종10년(1424)에 14세의 나이로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바 있고, 전해(세종22년) 가을에 26세로 진사(進士), 생원(生員), 문과(文科)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그 初試, 일명 鄕試에서도 장원으로 합격) 세종29년(1447) 중시(重試)에서도 합격자 19인 중 7위에 기록되었다.
  조선 말기 학자 치당(痴堂) 강효석(姜斅錫)선생이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나라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는 각종의 참고자료를 수집하여 편찬, 간행한 책, 전고대방(典故大方) 3권에 문장가 78인이 수록되어 있는데, 김종직(金宗直), 서거정 (徐居正), 김시습(金時習), 김인후 (金麟厚)에 이어 다섯 번째로 저헌공(李石亨)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에 양반집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조(父祖)가 지어준 본 이름(本名: 윗사람의 본명은 함부로 부르기를 꺼린다 하여 諱라 함), 동료들 간에 허물없이 부를 수 있는 자(字), 아무나 거리낌 없이 부를 수 있는 호(號)를 가진다.

  樗軒(저헌)이석형(李石亨)의 호다. 저헌공의 생애와 관련하여 가죽나무를 뜻하는 호(號) 樗軒(저헌)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취지다.
  세종24년(1442), 집현전 대제학 권제(權 帝)가 제 2회 호당(湖堂)에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 인수(仁搜) 박팽년(朴彭年), 근보(謹甫) 성삼문(成三問), 중장(仲章) 하위지(河緯地), 청보(靑甫) 이개(李塏)와 함께 저헌공도 뽑아 북한산 비봉 북쪽 계곡에 있는 진관사(津寬寺)에서 함께 공부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함께 지은 연구시(聯句詩)에 당시 28세의 저헌공을 이백옥(李伯玉)으로 호칭한 것을 보면 자(字) 백옥(伯玉)은 일찍부터 사용한 것 같으나 호(號)를 언제부터 저헌(樗軒)이라 하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 진관사 호당 이야기 바로가기(클릭): 진관사 우정

  헌(軒)은 추녀끝헌(詹 宇) 자로 집의 격(格)을 나타내는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 중에서 여섯 번째 말인데, 堂, 齋, 軒, 亭자는 대부 들이 호에 즐겨 사용한 글자이지만 저(樗)자는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옥편에서 樗(저)자를 찾아보면 ‘가죽나무저(惡木不材)’, ‘벚나무화(樺)’ 두 가지로 발음하는데, 樗(저)자로 시작하는 단어 樂(저력)은 쓸모 없는 나무, 무능한 사람, 쓸모 없는 물건, 樗材(저재)는 쓸모 없는 재목이란 뜻으로 모두 부정적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헌공의 생애를 상고해 보노라면 금방 수긍이 간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과거시험 삼장원(三壯元) 후 사간원 좌정언(정6품)에 파격적으로 보임되어 화려한 출발을 했고, 다음해에 호당(選湖堂)에 선발되었으며, 5년 후 중시(重試)에도 등과하여 초년 시절이 화려하고 쟁쟁했다.
  이어 세종24년-32년(9년)과 문종 2년 간에는 주로 집현전에서 부교리, 교리, 응교, 직제학 등 학자로써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 고려사(高麗史) 편수에 참여하는 등 세종대왕의 문화창달에 훌륭히 일익을 담당하다가 단종3년에 12년 만에 집현전을 떠나 첨지중추부사 겸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옮겼다.
  세조가 즉위하자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로 나가 근무하면서 역대병요의 인쇄 발행을 맡아 세조2년 3월에 초판을 간행하였다.

  저헌공은 여기까지는 격에 맞는 일을 맡아 즐겁게 복무하였고, 승진도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전라 관찰사로 나가 익산을 순행하던 중 호당에서 함께 공부하고, 집현전에서 함께 근무하고, 중시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절친한 친구로 지냈던 박팽년, 이개, 성삼문, 하위지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가 나서 반역으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감회에 못 이겨 이른바 익산동헌시를 지은 것이 사육신을 두둔한 시라고 고변되어 세조 앞에 끌려가 국문을 받고 처형 당할 위기에 처했다.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
虞時二女竹(우시이녀죽)
秦日大夫松(진일대부송)
縱是哀榮異(종시애영이)
寧爲冷熱容(영위냉열용)

익산 동헌 운에 따라 짓다.
순(舜) 임금 때에는 이녀죽(二女竹)이 있었고
진(秦)나라 때에는 대부송(大夫松)이 있었네
비록 슬픔과 기쁨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 차고(冷待) 더운(歡待) 얼굴빛을 지으랴.

  국문이 시작될 때 세조는 바로 국문에 들어가지 않고 ‘정몽주는 고려조에는 어떤 사람이고, 아조(我朝: 朝鮮朝)에는 어떤 사람인가?”(上問鄭夢周於麗朝何等人我朝何等人)라는 엉뚱한 질문을 하자 저헌공이 시(詩)로써 답하겠다하여 즉석에서 시를 써서 바쳤다.(李石亨詠詩以獻)
  세조가 저헌공의 시를 읽어보고 ‘당초의 시(益山東軒詩)는 시인의 영감을 읊었을 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관대한 해석을 내려 국문에 들어가지 않고 요즈음 말로 ‘무혐의 처분’ 하였다.
李石亨詠詩以獻(이석형영시이헌)
聖周容得伯夷淸(성주용득백이청)
餓死首陽不死兵(아사수양불사병)
善竹橋頭當日夕(선죽교도당일석)
無人扶去鄭先生(무인부거정선생)


이석형이 (답변을) 시로 읊어 올리다
주나라 임금(武王)은 청렴한 백이숙제를 용서 해
군대 풀어 잡아 죽이지 않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게 내버려 두었네
선죽교(善竹橋) 머리 그날 저녁에
정선생(鄭夢周)은 부축해가는 이도 없었네.
  이후 저헌공은 오히려 세조로부터는 후대를 받게 된다. 어느 날 세조가 내전에서 중궁(中宮: 王后)과 함께 저헌공에게 진작(進爵: 加資)을 명하고, 중궁이 친히 어의(御衣) 1습(襲)을 저헌공에게 내리며, 궁녀에게 명하여 전왕 때의 일인 저헌공의 삼장원을 칭송하는 삼장원사(三壯元詞)를 지어 노래 부르면서 술을 권하게 하였는데 이후에도 내전에서 인견할 때마다 이렇게 하였다.
  가자(加資)의 승급이 빨라 말년에는 보국숭록대부(정1품)와 판중추부사(종1품직)에 까지 오르고, 좌리공신 책록과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의 능력을 시기하고, 사육신과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트집잡는 소인배(한명회등)들의 견제 때문에 실권이 있는 정승(政丞), 판서(判書), 문형(文衡: 大提學) 등의 직에는 보직되지 못하고, 중추부등 한직(閑職), 공주목사등 외직(外職)과 명나라 사신(使臣)으로 중국을 오가며, 체찰사(體察使)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항상 권력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연보(年譜) 抄
<세조3년(1457)-성종8년(1477)간>
세조3년(1457)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판공주목사(判公州牧使, 정3품)
세조4년(1458) 첨지중추부사(첨지중추부사, 정3품)
세조5년(1459) 호분위(虎賁衛) 대호군(大護軍,종3품), 수문전(修文殿) 제학(提學,종2품)
세조6년(1460) 황해도 관찰사(관찰사, 종2품), 가정대부(嘉靖大夫,종2품)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세조7년(1461)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 사헌부(大司憲, 종2품) 겸 경기도 관찰출척사(京畿道觀察黜陟使) 개성유수(開城留守,종2품)
세조8년(1462) 호조참판(戶曹參判,종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종2품)
세조10년(1464)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세조12년(1466) 겸 세자시강원 좌빈객(左賓客,정2품), 숭록대부(崇祿大夫, 종1품)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
세조14년(1468) 세조승하, 예종즉위. 명나라에 부고승습사(訃告承襲使) 다녀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2품)
예종원년(1469)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성종원년(1470)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정2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종2품)
성종2년(1471) 좌리공신(佐理功臣)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성종7년(1476)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실봉(實封: 食邑이 따름)
성종8년(1477) 졸(卒)


  사람의 호칭 중에 본명(本名)은 부조(父祖)의 소망(所望), 자(字)는 친구들이 보는 평가, 봉호(封號)는 가문(家門), 시호(諡號)는 일생(一生)의 공식평가라면 호(號)는 자기의 생활철학(生活哲學)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저헌공은 자신의 호(號)에 가죽나무(樗) 자를 쓸 만큼이 가죽나무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도(道)를 일찍이 깨우친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지난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장래가 촉망되었던 사람이 임금의 총애(寵愛), 초년(初年)의 성공(成功), 훈공(勳功), 명성(名聲) 때문에 몸을 낮출 줄 모르고 자만(自慢)에 빠져 미쳐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덧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간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저헌공으로 말한다면 초년의 대 성공이 있었고, (세종, 세조, 성종)임금의 총애도 받았고, 세종치세에 공적도 쌓았으며, 글(文章)로써 시(詩)로써 명성도 얻을 만치 얻었다.
  더군다나 세조의 왕위찬탈이라는 역사의 큰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자신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을 텐데 몸을 낮추면서도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등용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 어떤 난관도 개의치 않고 험한 길을 걸었다.
北靑東軒(북청동헌)
地盡形如斥(지진형여척)
山圍勢自成(지진형여척)
眼遮雲外暗(안차운외암)
心透日邊明(심투일변명)
播棄非今事(파기비금사)
登庸及老生(등용급노생)
更圖酬聖澤(갱도수성택)
努力雪中行(노력설중행)

(도체찰사)북청동헌에서
땅이 다하여 넓게 터진 형상이고
산이 에워싸는 형세(분지) 절로 이루었네
눈은 구름이 밖에서 막아 깜깜하게 어둡지만
마음은 해를 투시해 볼 수 있으니 밝아지네
사람 버리는 것 어제오늘 일 아니거늘
이 늙은이에까지 등용이 미치나니
다시금 성택에 보답을 하고자
기를 쓰면서 눈길을 가네
  일생의 공식 평가인 공의 시호 문강(文康)의 康(강)자 즉 안락무민(安樂撫民: 나라의 四方에 虞患이 없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였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관직과 권력에 연연(戀戀)하지 않고, 비굴하게 권력에 아부하지도 않았다. 반역자(死六臣) 두둔 피의자로 문초 받기 위해 국문장(鞠問場)에 선 저헌공의 붓끝에서 '조선조 건국을 반대하고, 쓰러져가는 고려조의 기둥을 붇잡고 고군분투하는 정몽주를 구태여 죽일 필요가 있었느냐' 고 힐책하는 善竹橋頭當日夕(선죽교두당일석) 無人扶去鄭先生(무인부거정선생), 사육신의 두둔 혐의에 정몽주 두둔이 첨가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구절을 거침없이 써내려 갔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항상 낮은 자세로 자만(自慢)을 경계하는 계일(戒溢)을 스스로 익혔을 뿐만 아니라 계일정(戒溢亭)을 지어 후손과 사람들에게 깨쳐 주려 하였다.
용인 문강재에 복원한 계일정
  이런것들이 곧 저헌공이 일찍이 높은 경지의 가죽나무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도(道)를 깨우쳤을 것이라 추정케 하는 소이(所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