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파주 선조유적 탐방 (2005. 6. 6)
분봉공(광해14년,1622, 왼쪽)과 해고공(인조14년,1636, 오른쪽) 신도비
延 星 會
盛 永엮음
목 차
인사 말씀
고양 덕양구 원당동
의정공(議政公 휘 廷華)
파주 조리읍 노조리
삼척공(三陟公 휘 土末)
분봉공(盆峯公 휘 澍)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
북백공(北伯公 휘 昌庭)
박천공(搏泉公 휘 沃)
파주 탄현면 축현리
근곡공(芹谷公 휘 觀徵)
파주 광탄면 발랑리
양원공(楊源公 휘 淑 王咸)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
충의공(忠毅公 휘 有吉)

첨부
(1) 의정공(議政公 휘 廷華) 신도비명(神道碑銘)
(2) 분봉공(盆峯公 휘 澍) 신도비명(神道碑銘)
(3)분봉가훈(盆峯家訓) 훈계(訓戒) 39덕목(원문)
(4)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 신도비명(神道碑銘)
(5)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6) 북백공(北伯公 휘 昌庭) 신도비명(神道碑銘)
(7) 이옥(李沃)의 청회별곡(淸淮別曲) 발견 기사
(8) 화석정(花石亭) 작명 이야기
(9)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10) 신정비(神井碑)
(11)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 신도비명(神道碑銘)
(12)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유년시절
(13)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어전상소(御前上疏)
(14)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공도(公道) 일생
(15)종계변무(宗系辨誣) 이야기
(16) 탑반송(塔畔松) 이야기
(17) 범마(犯馬)와 퇴고(堆鼓)
(18) 소상팔경(瀟湘八景) 시조
(19) 혈삼(血衫)무덤과 말무덤
(20) 이영유유길(李永柔有吉)의 허장(虛葬)에 대한 애사(哀辭)
(21) 연성회 2005년도 고양-파주 선조유적 탐방 앨범
인사 말씀
  延星會(연안이씨 별들의 모임). 綠陰이 짙어가는 盛夏의 季節에 여러 會員님 便安하십니까?

  우리 延星會가 첫 모임을 아서원에서 開催한지 엊그제 같은데 어언 21周年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다수의 우리 會員들리 40대 였었는데 어느덧 60대가 되었군요.

  初創期에는 會員님들의 熱誠이 大端하여 參席率도 좋았고, 每年 先祖님 遺蹟地를 踏査할 때에는 會員들과 家族, 어린 子女들까지 많이 參與하여 大盛況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그 뜨겁던 熱情도 次次 식어가고 參與率도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延星會가 發足한지 20餘年이 되도록 存續하고, 維持된 것은 熱誠會員 여러분들의 꾸준한 參與와 前任 會長님들, 總務님들의 獻身的인 努力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모든 면에서 많이 不足한 제가 이 모임을 맡게 되어 責任도 무겁고, 할 일도 많다고 봅니다. 微力하나마 저 熱心히 努力하겠습니다.
  會員 여러분! 우리 延星會를 活性化 하기 爲해서는 앞으로 회원 여러분들의 絶對的인 協助가 必要합니다. 또한 새로운 會員을 많이 모셔야 합니다. 會員 한분 한분이 새로운 會員 한분씩을 모셔오는 誠意를 다해주신다면 創立 當時의 活氣찬 모임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付託드립니다.

  會員 여러분! 우리의 延星會는 汎 延安이씨 四派의 靑, 長年들이 모여서 만든 團體입니다. 이 모임에 나오시는 회원 여러분들께서는 延李 子孫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崇祖精神이 透徹하고 宗親間에 愛族精神이 많으신 분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延星會員 여러분! 우리 延安李氏는 三韓甲族으로써 朝鮮朝 五百年 동안 첫째가는 國班이며 國家에 功績이 많고 文化 發展에 寄與하신 훌륭한 先祖님들이 많으시며 忠孝가 뛰어난 代表的인 名門家의 後孫들입니다. 우리 모두 自矜心을 가집시다.
  요즈음 世態가 道德性이 떨어지고 先祖님에 대한 崇慕精神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延李의 後孫들은 名門家의 後裔답게 훌륭하신 祖上님들의 遺志를 받들고 부모에 孝道하고 家庭을 잘 다스려서 우리 家門을 빛낼 수 있는 人材를 양성하여 先祖님들께서 이루어 놓은 옛 榮光을 다시 한번 찾읍시다.

  그동안 延星會 發展을 위하여 많은 努力과 協助를 하여주신 前任 會長님들과 總務님들 그리고 每年 踏査 行事를 위하여 많은 努力을 해 주신 會員님들게 眞心으로 感謝를 드립니다.
  끝으로 會員님들 家庭에 幸運이 있기를 祈願합니다
2005년 6월 6일 延星會 會長 昌熙 드림
의정공(議政公) 휘 정화(廷華)

고양시 원당에 있는 의정공(휘 廷華) 묘소

▶ 개요
  ● 중종15년(1520)-명종13년(1558) 壽39
  ● 자 자실(子實), 봉호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 배 안동권씨(安東權氏, 중종17년 1522-선조40년 1612, 壽91),
      부(父) 부사(府使) 권용(權鎔) 안동인(安東人), 모(母) 연안이씨(延安李氏), 외조(外祖) 삼척공(三陟公) 이말(李 土末)
  ● 신도비:고양시 원당동,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撰,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書
      (神道碑銘: 첨부 1)(1) 의정공(議政公 휘 廷華) 신도비명(神道碑銘)

▶가계도(家系圖)

▶ 관직
  ● 4자 연평군 휘 귀(貴)가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됨에 따라 공은증 순충적덕병의(純忠積德秉義) 보조공신(補祚功臣)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피봉됨

  ● 증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정1품)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정1품) 겸 영(領) 경연(經筵) 홍문관 (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觀象監) 사(事) (정1품)

▶ 성품 및 행실
  ● 공이 번화한 문벌에 나서 소시부터 문장재학(文章才學)에 이름이 사우(士友)간에 떨치고, 약관에 상상(上庠: 성균관)에 유학(遊學)함으로 당연히 진취(進取)할 길이 있었으나, 겸허하고 수학과 가훈에 골몰하니 대가의 자손다웠다.

  그래서 진로를 구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 경전을 습숙(習塾)하고, 고사(古史)를 를 범람(汎覽)함을 낙으로 삼고 만년에는 정정(靖淨)한 수도(修道)를 좋아하여 깊은 산중에 들어가 심신을 수련하고중생을 재활함에 심혈을 기울이니 사람들이 청고자량(淸高慈良)한 자질을 가히 추도숭앙(推度崇仰) 하더라.(李文宰 찬 墓碣文에서)

  ●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으며, 학문에 몰두하면서도 과게에 응시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처사’(處士: 벼슬을 하지 않고 야에 파묻혀 조용히 사는 선비에 대한 존칭)로 불렀다.
  그러면서도 판서 오상(吳祥: 해주인,부제학,대사헌, 이,예,형조판서,청백리,문장에 뛰어남), 유희림(柳希霖: 문화인, 형, 예조참판, 좌승지, 동지중추부사, 호성공신 3등)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월사찬 의정공 신도비문 중)

  ● 의정공이 이름난 아버지(靜軒公 휘 山夔: 靜庵 趙光祖의 수제자. 아호 靜軒은 스승이 자기의 아호 靜庵의 靜자를 넣어 직접 지어 주었다고 함)의 아들로서 행실이 두텁고, 효성스럽고, 공손하여 스스로 선(善)을 실현하며, 담박(澹泊: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하게 뜻을 지키면서 남에게 알아줌을 구하지 않았으니 비록 명이 짧아 잠긴 덕(德)과 음미(吟味)한 행실은 세상에서 알아 줌에 미치지 못했으나 하늘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부원군(府院君: 연평군을 말함)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중략)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 현계(縣契: 확고하게 묶어 약속함)하여 어기지 않음이 이와 같도다.(월사찬 의정공 신도비문)

  ● 대부인(大夫人: 안동권씨)께서는 일찍이 과부가 되었으나 항상 예법으로써 자제를 가르쳐 부원군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또 안산군수로서 문과에 급제 하니 다 대부인의 뒷받침 때문이다.
  (월사 찬 의정공 신도비문 중에서)

  ● 신도비문 찬자(撰者: 월사공)의 연리(延李)에 관한 설명
  우리 이씨 가문의 덕(德)을 쌓은 백년 동안 대대로 남에게 칭송을 들어왔다. 자손들이 비록 가난하고 벼슬이 미미하였으나 대개 선량(善良)하고 질박(質朴)하였으며, 일을 교묘하게 꾸미거나, 남을 속이는 행태는 절대로 보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선조들이 남겨주신 가풍(家風)이다. (월사 찬 의정공 신도비문 중에서)

▶ 미담과 일화
  ● 계해정사(癸亥靖社: 인조반정)의 산실(産室)
  4자 연평부원군 휘 귀(貴)는 친구 최기(崔沂)가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을 때 찾아 본 죄로 강원도 이천(伊川)에 귀양가 있을 때 아들 시백(時白)과 시방(時昉)이 오가며 연락책을 맡아 반정의 일을 진행시켰으나 연평군이 직접 반정동지들을 만나지 못하니 어려운 점이 많았다.
  광해14년(1622) 4월 29일 연평군 배 인동장씨가 졸하자 고위(考位 휘 廷華) 묘가 있는 이곳 고양 원당에 장사지냈다. (연평군 졸 후 공주 이인면 만수리에 합분) 이 때 연평군이 귀양에서 풀려나 배상(配喪)을 치루기 위하여 이곳에 머물 때 김류, 최명길등 반정 동지들이 문상 오게 되면서 당시 광해군 조정의 이목을 끌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어 반정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고비를 몇 번씩이나 넘기면서도 반정이 성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 곳은 곧 계해정사(인조반정)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의정공(휘 廷華) 신도비(위)와 제각 원모제(元慕齊)(아래)
의정공의 신도비와 제각은 고양시 덕양구 원당 의정공 묘소 아래 있다.
삼척공파 가계도(家系圖)

파주 조리읍 노조리에 있는 삼척공파 제각 경모제(景慕齊)

파주시 조리읍 노조리 해고공 묘소 아래 있는 신도비각
흩어져 있던 것을 보존을 위하여 한 곳에 모아 비각을 지었다.
왼쪽으로부터 분봉공(휘 澍), 해고공(휘 光庭), 북백공(휘 昌庭), 연창군(휘 泂: 해고공의 長曾孫)
삼척공(三陟公) 휘 말(土末)

파주시 조리읍 노조리 에 있는 삼척공(휘 土末) 묘소

▶ 개요
  ● 세조12년(1466)-중종21년(1526) 수61
  ● 자(字) 말지(土末 之)
  ● 배(配) 증(贈) 숙인(淑人: 정종3품) 원주김씨(原州金氏)(2녀)
      배(配) 숙인(淑人: 정종3품) 영월신씨(寧越신氏)(2남 1녀)
  ●묘표(墓表): 선조3년(1570) 손 분봉공(盆峯公) 휘 주(澍) 書
    처음 양주 장흥에 장사지냈다가 영월신시 졸후 파주로 이장하여 합장

▶ 관직
  ● 연산군2년(1496)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 급제
  ● 중종원년(1506) 문과별시(別試) 급제,
      승문원 부정자(부정자:종8품)(임시),
      예문관 검열(檢閱: 정9품),
      대교(待敎: 정8품), 승정원 주서(注書: 정7품)
  ● 중종3년(1508)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
      형조 좌랑(佐郞: 정6품) 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 저6품), 예조 좌랑(佐郞: 정6품),
      경기도 도사(都事: 정6품),
      호조 정랑(正郞: 정5품) 겸 춘추관 기주관(記注官: 정5품),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
      군자감 첨정(僉正: 종4품),
      한성부 서윤(庶尹: 종4품)
  ● 중종11년(1516) 대구 도호부사(都護府使: 정4품)
  ● 중종16년(1521) 성균관 직강(直講: 정5품),
      삼척 도호부사(都護府使: :정4품)

▶ 성품 및 공적
  ● 자품(資稟: 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 온후(溫厚: 성격이 온화하고 덕이 있음)하고, 안한(安閑: 느긋하고 한가로움)한 장자(長者: 덕망이 있는 어른)의 풍도(風度: 풍채와 태도)가 있었고, 나아가 일을 할 때는 염결(廉潔: 청렴결백)하여 공리(功利: 공명과 이욕)에 마음이 기울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법을 준수하여 불의와 불법에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인사권자에게 거슬림을 받아 크게 쓰이지 못했다.

▶ 미담 및 일화
  ● 자부(子婦: 慶宗 配) : 성종(成宗) 14子 운천군(雲川君) 인(心 변 寅)의 여(女) 전주이씨(全州李氏)
분봉공(盆峯公) 휘 주(澍)

파주시 조리읍 노조리 분봉공(휘 澍) 묘소

▶ 개요
  ● 중종29년(1534)-선조17년(1584) 壽51
  ● 자 언림(彦霖), 호 분봉(盆峯), 시호 정목(靖穆)
  ● 배(配)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정1품) 진주유씨(晉州柳氏)
  ● 유고(遺稿) 분봉가훈(盆峯家訓)
  ● 신도비: 파주시조리읍노조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撰, 탄옹(灘翁) 이현(李 衣玄: 공의 長孫) 書
      (神道碑銘 : 첨부 2)(2) 분봉공(盆峯公 휘 澍) 신도비명(神道碑銘)

▶ 관직
  ● 명종13년(1558) 25세로 진사시(進士試) 급제, 성균관 입학.
  ● 선조6년(1573) 성균관 추천으로 의금부 금오랑(金吾郞) 제수
  ● 선조6년(1573) 문과 알성시(謁聖試)급제
  ● 선조7년(1574) 승문원(承文原)에 선발, 보직
  ● 선조9년(1576) 문과 중시(重試) 급제,
  ● 선조10년(1577) 승정원 주서(注書: 정7품)에 임명, 불사. 오위(五衛)의 사정(司正: 정7품)에 체배. 이 때 함경도 판관(判官:정6품) 자리가 비어 있어 공을 임명하려 하였으나 대간에서 졸급한 승진이라 공격하는 바람에 임명되지 못하고 사정(司正) 직도 그만 두고 승문원으로 돌아 왔다.
  ● 선조13년(1580) 봄 다시 승정원 주서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병 때문에 체직, 여름에 종부시(宗簿寺: 왕 종실에 관한 업무) 주부(主簿: 종6품) 임명되었다.
  ● 황해도 고산역(高山驛) 책임자에 임명되었다가 선조15년(1582)에 병으로 돌아왔다.
  ● 선조16년(1583)에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그 때 사헌부 대사헌이기, 사간원 대사간 박승임, 부제학 김우굉 등이 함께 율곡 이이를 공격하다가 선조로부터 좌척을 당했는데 그때 공도 예조로 좌천되었다가 형조 정랑(正郞: 정5품)으로 옮겼다.
  ● 동년 겨울에 가산(嘉山: 평안도) 군수(郡守: 정5품)로 나갔다가 이듬해 7월 2일 동헌에서 51세를 수하고 졸하였다.

  ● 선조37년(1604) 장자(해고공)의 호성공신 책록에 따라 순충적덕(純忠積德) 보조공신(補助功臣) 연녕부원군(延寧府院君)에 추봉되었다.
    * 보조공신의 격(格): 1등공신: 순충적덕병의(純忠積德秉義), 2등공신: 순충적덕(純忠積德), 3등공신: 순충(純忠)

  ● 증직(贈職):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정1품) 의정부 영의정(領議政: 정1품), 영(領)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館)관상감(觀象監)사(事), 세자사(世子師: 정1품)

▶ 성품 및 행적
  ● 공은 뜻을 지킴이 독실하고, 예법에 따라 처신하여 일상생활때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서 정좌하였는데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이를 느슨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성품이 강방(剛方: 강직하고 방정함)하여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였고, 남의 과실을 보면 반드시 바른말을 하고야 마니 바르지 못한 행실이 있는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 하였다.

  ● 공이 중시 급제 후 선조10년(1577) 승정원 주서(注書: 정7품)에 제수되었을 때 공은 내자(진주유씨)가 당시 정승 홍섬(洪暹)의 처질녀였다는 이유 때문에 법을 내세워 나가지 않았다.

▶ 미담 및 일화
  ● 15세때 부친(휘 慶宗)의 임지 홍산현(鴻山縣:충청도부여군에 있음)에 따라가 그 곳에서 과거 급제를 포기하고 궁거(窮居: 가난하게 살아감)하는 선비 홍우성(洪友成) 아래서 각고면려(刻苦勉勵: 고생을 이기고, 스스로 애써 노력함) 하면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 명종20년(1565) 공이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문정대비(文正大妃: 중종 왕비)가 요승보우(普雨:봉은사에 있으면서 문정대비와 결탁하고 불교 중흥을 꾀하였음)의 말만 듣고 회암사 (檜岩寺)에서 무차법회(無遮法會: 성범, 도속, 귀천 구분없이 널리 베푸는 법회)를 한달 동안 열었는데 법회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문정대비가 승하하였다.
  성균관에서 보우를 탄핵하는 글을 모집하였는데 많은 글 중에 공의 글이 소(疏)로 채택되어 올리니 명성을 떨쳤다.
  ● 분봉가훈(盆峯家訓)(국사대사전)
  조선 선조 때 분봉(盆峯) 이주(李澍: 1534-1584)가 그의 자손에게 내린 가훈(家訓). 量欲其大 (양욕기대), 威欲其重 (위욕기중), 德欲其厚(덕욕기후) 등 48조로 이루어졌다. 가훈 뒤에 증손 이관징(李觀徵), 5대손 이만부(李萬敷)의 발문과 정경세가 찬한 신도비명이 수록되어 있다.

  ● 분봉가훈(盆峯家訓) 총론(總論) 9 덕목
    (1) 量欲其大(양욕기대) 도량(헤아림)은 크게 하라
    (2) 威欲其重(위욕기중) 위엄은 무겁게 하라
    (3) 德欲其厚(덕욕기후) 덕은 두텁게 베풀어라
    (4) 心欲其定(심욕기정) 마음은 확고히 정하라
    (5) 志欲其堅(지욕기견) 뜻은 굳게 거져라
    (6) 言欲其忠(언욕기충) 말은 충직하게 하라
    (7) 貌欲其恭(모욕기공) 용모는 공손하게 하라
    (8) 慮欲其深(여욕기심) 생각은 깊이 하라
    (9) 事欲其愼(사욕기신) 일은 신중을 기해서 하라

분봉가훈비


  ● 분봉가훈(盆峯家訓) 훈계(訓戒) 39 덕목 (원문: 첨부 3) (3)분봉가훈(盆峯家訓) 훈계(訓戒) 39덕목(원문)
해고공(海皐公) 휘 광정(光庭)

파주시 조리면 노조리 해고공(휘 光庭) 묘소

▶ 개요
  ● 명종7년(1552)-인조5년(1627) 수76
  ● 자 덕휘(德輝), 호 해고(海皐) 눌옹(訥翁), 봉호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
  ● 배(配) 청송심씨(청송심씨) 명종5년(1550)-선조19년(1586) 수37,
                  양천허씨(양천허씨) 선조2년(1569)-인조3년(1625) 수57
  ● 신도비: 동지성균관사 이민구(李敏求) 撰, 병조참지 이현(李 衣玄) 書
        (神道碑銘: 첨부 4)(4)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 신도비명(神道碑銘)

▶ 관직
  ● 선조6년(1573) 20세 때 진사시(進士試) 급제, 성균관에 유학
  ● 선조23년(1590) 37세 때 문과 증광시(增廣試) 등과. 문과 등과가 늦은 것은 그간 연이어 재최(齋衰: 내간상)과 참최(斬衰: 외간상) 상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 오복(五服): 참최(斬衰), 재최(齎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絲변에思 麻)
          참최(斬衰): 3년, 외간상(外艱喪, 父), 굵은 생베로 짓되 하단불봉(下端不縫: 아래 끝을 꿰메지 않는다)
          재최(齎衰): 3년, 내간상(內艱喪, 母), 처, 조부, 증조부, 고조부, 조금 굵은 생베로 짓되 하단을 꿰멘다
          대공(大功): 9개월, (도표 참조), 굵은 베로 짓는다.
          소공(小功): 5개월, (도표 참조), 굵은 베로 짓는다
          시마(絲변에思 麻): 3개월, 기타, 열다섯세 베로 짓는다.

상례(喪禮)에 따른 오복도(五服圖)

  ● 선조24년(1591) 승문원 정자(正字:정9품), 사관직(?)에 천거
  ● 선조25년(1592) (광해군)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정7품)가 되어 세자를 호위하고 서천, 도중 홍문관 정자(正字: 정7품) 겸 지제교(知製校) 배수, 예조 및 병조 좌랑(佐郞: 정6품)
  ● 선조26년(1593) 명군 접반사 이덕형의 종사관
  ● 선조 년(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 병조 정랑(正郞: 정5품)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 하), 이조, 예조, 병조참의(參議)
  ● 선조29년(1596) 승정원 좌승지(左承旨: 정3품 상)로써 이몽학의 홍산(鴻山: 부여에 있음) 난 반역옥사를 다루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상)
  ● 선조30년(1597) 정유재란으로 호남지방에 왜군에게 유린 당할 때 공은 군량조달을 담당하던 중 명부사 심유경의 빈접을 맡아 영외(嶺外)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호조 참판(參判: 종2품), 다시 영외(호남)로 나가 군량조달. 명군 양원이 남원을 버리고 후퇴하자 공은 왜군의 포위망을 뚫고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군량조달 담당은 그대로 맡앗다.
  ● 선조31년(1598)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명제독 마귀(麻貴)를 수행하여 울산으로 갔다.(울산전투는 월사공의 무술변무주의 계기가 되었음)
  ● 선조32년(1599) 호조,공조 판서(判書:정2품), 한성 팡윤(判尹: 정2품), 다시 호남의 군향(軍餉: 군량미조달)을 담당
  ● 선조35년(1602) 호조, 예조, 이조 판서(判書:정2품), 가을에 인목왕후 주청사 정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연경에 있는 동안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사행에서 돌아오자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대사헌(大司憲: 종2품)
  * 이때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지도를 가져왔다.
  ● 사신에서 돌아 온 후 판돈영부사(判敦寧府事: 종1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종1품)겨울에 예조, 이조 판서(判書:정2품),
  ● 선조37년(1604) 호성공신(扈聖功臣:임난극복공로 문신)2등 책록봉(封) 연원군(延原君), 가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가봉(加封), 록(錄) 청백리(靑白吏)
  ●광해13년(1621) 호조 판서(判書: 정2품)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관직을 받지 않고 봉조청(奉朝請)만 받았다.
  ● 인조원년(1623) 공조, 형조 판서(判書: 정2품), 곧 사면
  ● 인조4년(1626) 개성 유수(留守: 종2품)

▶ 성품 및 행적
  ● 공이 졸한 후 진신대부(搢紳大夫: 벼슬이 높고 점잖은 관리)들이 말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공과 같이 청명(淸明)하고 온손(溫遜: 온화하고, 겸손함)하여 어렵게 벼슬에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있겠는가? 명리(名利)가 일세를 풍미하여 절조(節操: 절개와 지조)마저 뺏기는 세상에 공은 아도(雅途: 바른 길)를 깨끗이 닦아 이험(夷險: 평탄한 길과 험한 길, 순경과 역경)에 변함이 없었고, 작위는 높았으나 머리 숙여 지냈으며, 세도를 보기를 겁부(怯夫: 겁이 많은 사람)가 함정을 피하듯 하였다.”고 하였고, 학사후생(學士後生)들은 “세상에 어떻게 공처럼 인심(仁心: 어진 마음)이 바탕이 되어 청검하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단말인가? 자신의 광영은 피하고, 아랫사람을 구제하여 말 한마디 하면서도 혹 사람을 다칠까 걱정하였고, 안으로는 강방(剛方: 강직하고 방정함)하여 남과 겨루지 않아 좋은 자리에 30년을 있으면서도 본심은 한결같았다”고 하였다.(이민구 신도비문 중에서)

  ● 선조35년(1602)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인목왕후 주청사 정사로 연경에 갔을 때 청엄(淸嚴: 깨끗하고 엄숙함) 방직(方直: 방정하고 올곧음)한 처신으로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엇다. (세부내용 첨부5. 곤여만국전도 참조)

  ● 임란중 군량미 조달 책임
  (1) 선조30년(1597) 정유재란으로 호남지방에 왜군에게 유린 당할 때 공은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2) 명부사 심유경의 빈접을 맡아 영외(嶺外)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호조 참판(參判: 종2품)을 맡앗다가 다시 영외(호남)로 나가 군량조달을 하였다. 이 때 명군 양원이 남원을 버리고 후퇴하는 바람에 공은 왜군의 포위망을 뚫고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군량조달 담당은 그대로 맡앗다.
  (3) 선조32년(1599) 한성 팡윤(判尹: 정2품)을 하다가 다시 호남의 군향(軍餉: 군량미 조달)을 담당

  ● 공정한 인사업무 수행
  선조35년(1602) 겨울 에조판서에서 이조판서로 옮기자 염퇴(恬退: 조용히 관직에서 물러남, 명퇴)를 숭상하고, 사알(私謁: 사적으로 임금을 배알하여 청탁함)을 막고, 공에게도 사적으로 청탁이 들어오면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반드시 배척하고, 남의 청으로 문 밖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아니하니 사람들은 공을 ‘옹졸하다, 못났다’ 하면서 비방하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 공정한 업무처리
  인조4년(1626) 개성유수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개성은 옛고려의 서울로서 관리들에게 이굴(利窟: 이권이 많은 곳)로 여겨져 왔으나 공은 그런 오점을 깨끗이 씻고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였다. 사직하고 돌아 올 때는 일용품에 이르기가지 모조리 문서에 기록하여 관부에 돌려주니 부로(父老)들이 공을 사모하는 뜻을 글로 읊었다고 한다

  ● 광해군 난정 속에서 몸보신
  선조37년(1604) 호성공신 공신에 책훈된 이후 일체의 관직에 서 물러나 훈신(勳臣)으로만 거취하였는데 광해13년(1621) 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선조의 구신으로 정사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궐내 사정이 날로 바뀌니 병을 핑계하여 받지 않앗고, 두문(杜門: 문박출입을 끊음), 사객(謝客: 손님을 사양)하고, 염정(恬靜: 조용히 지냄) 자수(自守: 스스로 지킴) 하니 공에게는 위험이나 욕됨이 미치지 않았다.

▶ 미담과 일화
  ●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첨부 5) (5)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는 공이 연경(燕京)에 사신 갔다가 들여 온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
북백공(北伯公) 휘 창정(昌庭)

파주시 조리읍 노조리에 있는 북백공(휘 昌庭) 묘소

▶ 개요
  ● 선조6년(1573)-인조3년(1625) 壽53
  ● 자 중번(仲蕃), 호 화음(華陰) 무구옹(無求翁)
  ● 배(配) 성주이씨(星州李氏) 생년미상-인조12년(1634) 졸
  ● 신도비: 양관대제학 조경(趙絅) 撰, 근곡(芹谷) 관징(觀徵) 書
      (神道碑銘: 첨부 6) (6) 북백공(北伯公 휘 昌庭) 신도비명(神道碑銘)

▶ 관직
  ● 선조36년(1603) 31세 때 진사시(進士試) 급제, 선조41년(1608) 36세 때 문과 별시(別試) 2등 급제
  ● 선조37년(1604)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천거되었으나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양하였고, 선조38년(1605) 서열을 뛰어넘어 호조에 배수되었으나 겸손의 뜻을 보이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 광해원년(1609) 은율(殷栗:황해도에 있음) 현감(縣監: 정7품)
  ● 광해3년(1611) 순천(順天:전라도에있음)부사(府使=都護府使:정4품)
  ● 광해5년(1613) 동래 부사(府使: 정4품)
  ● 광해8년(1616) 양주 목사(牧使: 정3품)
  ● 인조원년(1623) 충청도수군절도사(水軍節道使=水使: 정4품), 안악(安岳: 황해도에 있음) 군수(郡守: 정5품)
  ● 인조2년(1624) 함경도 관찰사(觀察使)=北伯: 종2품
  ● 인조3년(1625) 선위사(宣尉使)로 평안도 안변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기다리던 중 병이나서 그 곳에서 졸하였다.

▶ 성품 및 행적
  ● 광해3년(1611) 공이 순천 부사로 있을 때 평소 공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평안도관찰사 최동립이 순찰을 오면서 십수 개의의심스러운 소송장을 가지고 와서 공에게 주었다. 공은 공청(公廳)을 물리치고 순식간에 깔끔하게 처리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관찰사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또 도(道)의 공안(貢案: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적은 예산표)을 고쳐 정하는 일을 공에게 마꼈는데 공은 아전을 불러 광주리를 풀어보고는 각종 산과 바다의 소산물 들을 놓고 열손가락으로 셈을 하면서 상호 비교하여 한결같이 높고, 낮게 값을 순식간에 정하였다.
  이를지켜보던 관찰사가 더울 탄복을 하면서 공에게 비단 옷 한 벌을 내리고, 이 일을 간추려 적어 조정에 포장(褒狀)을 올렸는데 거기에 쓰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는 공씨와 황씨(?氏와 黃氏: 중국 한나라 때 관리 ?遂와 黃覇를 말함)에 비길만하며, 이치를 헤아리는 역량이나 재간은 아무도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하였다.

  ● 광해5년(1613) 동래 부사로 있을 때 공과 성명과 관함(官銜)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친구 중 가난한 선비 한사람이 딸을 시집보낼 자금을 얻고자 공을 찾아 왔다가 공을 만나보고 자기 친구가아님을알고 실의(失意)한 빛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공이 불러 함께 앉아 천천히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가식없이 사실대로 이야기 하였다. 공은 서슴지 않고 “물론 내가 해 드리지요”하고는 그를 후하게 대접하고 필요한 일체의 물품을 부족함이 없이 준비하여 주었다. 그 사람은 감사해 하면서 “비록 제 친구에게 부탁했더라도 결코 이처럼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였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일은 사대부들 사이에는 공을 칭송하는 이야기로 번져나갔다고 한다.

  ● 광해8년(1616) 양주 목사로 있을 때 이야기. 양주는 원래 한양에 가까운 곳이라 그 곳 백성들은 사람을 속이는데 정신을 팔고 일을 하지 않앗다고 한다. 교통수단인 수레의 이권을 독점하여도 이 곳을 다스리는 관리들은 병페를 거론만 할 뿐 이를 다스리지 못하여 왔다.
  공은 부임하자 모든 정사를 법에 따라 금하는 것으로만 하지 않고, 자애로움으로 선치하였는데 늙은이는 부양받고, 젊은이는 일을 하게하고, 딸은 시기에 맞추어 시집을 보낼 수 있게 하였다. 경기감사가 도내의 사정을 살핀 글을 조정에 올리면서 공을 ‘1등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하여 올렸기 때문에 주상께서 말(馬) 한 필을 하사하고 위로하였다.

  ● 공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있던 인조2년(1624) 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이괄의 무천치함 (無天治艦)에 갑장(甲將) 한 사람이 잡히자 공이 곧바로 나아가 구원하였다.
  또 수군을 강화도로 출정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 때 폭풍으로 출정하기가 어려웠다. 공은 목욕재계하고 병사들에게도 정성으로 하늘에 빌도록 하였더니 폭풍이 도리어 순풍으로 바뀌어 줄곧 순풍을 타고 빠르게 강도에 이르렀는데 장졸 모두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강도에 도착하니 조정은 계획을 바꾸어 공주로 파천하였기 때문에 공은 말을 타고 공주로 달려가 임금을 배알하고 명을 받아 돌아갔다.

  ● 함경감사 권반이 명의 모문룡 도독과 맞설 능력이 없어 오랑캐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유격 등 두 장수가 국경을 마음데로 드나들고 있어 국경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조정은 권반을 교체할 것을 논의하는데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편부원군 이귀(李貴)가 입을모아 공을 천거하면서 주상 앞에 이르기를 “당금 재주며 국량(局量: 능력)이 이모(李某)보다 뛰어난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공이 함경도관찰사(北伯)으로 발탁되었다.
  공은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답이 없자 길을 떠나기에 앞서 역관을 먼저 보내 명나라 유격을 설득하고, 공이 뒤 따라 도착하여 유격을 만나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리있게 설득하여 약조(約條)를 세우고 우리 땅에 깊이 들어와 살피는 것을 금하고, 약탈 당한 우마를 모두 돌려 받으며 북방을 안정케 하였다.
근곡공(芹谷公) 휘 관징(觀徵)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에 있는 근곡공(휘 觀徵) 묘소

▶ 개요
  ● 광해10년(1618)-숙종21년(1695) 壽78
  ● 자 국빈(國賓), 호 근곡(芹谷), 근옹(芹翁), 시호 정희(靖僖)
  ● 배 삭녕최씨(朔寧崔氏) 광해11년(1618)-현종13년(1672) 壽54
  ● 행장(行狀): 자(子) 박천(博泉 휘 沃) 찬, 신도비명(神道碑銘): 종제 대사헌 봉징(鳳徵) 撰(未建立), 묘지(墓誌): 손(孫) 식산(息山 휘 萬敷) 撰(紛失), 시장(諡狀): 영의정 채제공(蔡濟恭) 撰

▶ 관직
  ● 인조17년(1639) 사마시(司馬試) 급제
  ● 효종3년(1652) 성균관유생 때 뛰어난 재질을 보여 성균관 추천으로 정릉(靖陵: 중종왕릉) 재랑(齎郞:참봉,종9품) 제수
  ● 효종4년(1653) 36세 때 문과 별시(別試) 등과
  ● 효종10년(1659) 함평(咸平: 전라도) 현감(縣監: 정7품)
  ● 효종 년( ? ) 사헌부 장령(掌令: 정4품)
  ● 현종4년(1663) 전라도 도사(都事: 정6품)
  ● 현종5년(1664) 사헌부 장령(掌令: 정4품)
  ● 현종10년(1669) 함경도 종성(鐘城) 도호부사(都護府使: 정4품)
  ● 현종13년(1672)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 숙종원년(1675) 호조, 이조 참판(參判:종2품), 대사헌(大司憲: 종2품)
  ● 숙종2년(1676) 도승지(都承旨: 정3품 상), 병조, 형조, 공조 참판(參判:종2품)
  ● 숙종3년(1677) 강화도 유수(留守: 종2품)
  ● 숙종4년(1678) 형조 판서(判書:정2품)
  ● 숙종5년(1679) 예조 판서(判書:정2품), 동지사(冬至使) 정사(正使)로 연경(燕京: 북경)에 다녀왔다.
  ● 숙종6년(1680) 한성 판윤(判尹:정2품)
  ● 숙종9년(1683)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관련 관직에서 물러나 파주 조리동 선영에 유하였다.
  ● 숙종13년(1687) 기로소(耆老所)
  ● 숙종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 후 예조 판서(判書:정2품), 1차 복상미배(卜相未拜: 정승에 추천 되었으나 임명되지 못함) 지경연사(知經筵事: 정2품),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정2품) 의정부 우,좌참찬 (右,左參贊: 정2품)
  ● 숙종16년(1690)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종1품), 세자좌,우빈객(世子左,右賓客: 종2품)
  ● 숙종17년(1691) 이조판서(判書:정2품), 2차 복상미배(卜相未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가자) (加資)
  * 延李 복상미배(卜相未拜:3인):해고공(海皐公) 휘 광정(光庭), 연평부원군 휘 귀(貴), 근곡공(芹谷公) 휘 관징(觀徵)
  ● 숙종19년(1693)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종1품), 치사(致仕: 연로하여 스스로 관직을 물러남)하고, 봉조하 (奉朝賀)
      * 봉조하(奉朝賀): 조선시대 전직 관원을 대우하여 일컫던 말. 예종1년(1469)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며, 임금이 특별히 지명한 종2품(참판급) 이상의 관리에게 이 칭호를 주어 종신토록 그 품계에 알맞은 녹을 받게 하고, 나라에 의식이 있을 때조복을 입고 참여하였다.

▶성품 및 행적
  ●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기사환국 이후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편협하지 않았다. 퇴관 후 파주에 은거해서는 일족과 돈목을 다졌는데 매월 초하루면 선영을 성묘하여 자손들에게 규범이 되도록 하였다.

  ● 송덕비
  - 함평현감(咸平縣監) 때 선치(善治)하여 임기가 끝난 후 읍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 종성도호부사(鐘城 都護府使)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읍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 흉년 백성규휼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의 봉급과 비축미를 풀어 재민을 구제하였다.

  ● 당쟁 피해
  - 현종원년(1660)년 효종이 죽고 장례 때 송시열(서인) 등이 대왕대비(仁祖? 莊烈王后)의 복제(服制)를 1년으로 정하자 허목 등 남인들이 이를 반대하고 3년으로 주장하였는데 집권측은 1년을 반대하는 자는 모두 처벌하기에 이르렀다.
 공은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으로 소(疏)를 올려 허목 등을 구론(救論)하다가 전라도 도사(都事:정6품)로 좌천되었다.
  -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숙종6년(1680)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사건. 현종15년(1674) 때 예론(禮論:?)에서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던차 당시 영의정 허적의 유악남용(油幄濫用:?)사건으로 왕은 더욱 남인들을 꺼리게 되었다.
  이 때 서인의 김석주, 김익훈 등이 허적의 서자 허견이 종성(宗姓: 왕실)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3형제와 결탁하여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옥사가 일으나 복창군3형제와 허견은 물론 허적, 윤후 등도 사사되고, 나머지 남인 일파도 옥사, 사사, 파직,유배됨으로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아 김수항은 영상이 되고, 김석주는 우상이 되었다.
  이 때 공도 관직에서 물러나 파주 조리동 선영에 유하였다.
  -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15년(1689) 숙종이 장소의(장희빈) 소생의 아들 균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 의해 패배 당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넘어간 사건. 일명 기시사화(己巳士禍)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업다가 후궁 장소의가 균을 낳았다. 숙종은 크게 기뻐하며 균을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하는데 서인들이 반대하자 남인들의 도움을 받아 강행하려 하니 서인들은 소론, 노론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가 아직 젊으니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서인의 주장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중욱의 예를 들면서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원자 책봉의 시기가 아님을 주장하였다. 숙종은 이미 원자의 명호가 결정되었는데 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여 송시열 등에 분하게 생각하던 중 남인의 이형기, 남치훈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반박하며 왕의 의견을 쫓으니 왕은 송시열을 파직시키고제주도에 유배시킨 후 사사하였으며 송시열의견을 따랐던 서인의 김수홍, 김수항 등도 파직, 유배시켰다. 이로써 정원은 남인에게로 넘어갔다.
  공은 경신대출척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기사환국 후 다시 예조판서에 기용되었다.

▶ 미담과 일화
  ● 숙종19년(1693) 공의 퇴임 때 왕이 주연을 베풀고 공을 위하여 친히 삼절시(三絶詩:?)를 지어 하사하였다. (공의 연보에 기록)

  ● 숙종21년(1695) 2월 16일 공의 부음이 조정에 전해지자 2일간 정무를 파하고, 시장은 점포 문을 닫았으며 예장으로 모시고, 명필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필원(筆苑)에 올랏다.

  ● 공의 아호 근곡(芹谷: 미나리골)은 조정에 근무할 때 거쳐하던 서문 밖 동네 이름에서 따 온 것인데 임금을 향한 어린 백성의 소박한 마음을 芹 日暴 之誠(근포지성: 芹誠,옛날 충성스럽지만 가난한 백성이 임금에게 바칠 것이 없어 미나리를 바쳣다는 고사에서 유래)이라 하였으니 공의 소박한 마음은 아호에도 잘 나타나 있다.

  ● 공은 청렴한 관리로서 문장에도 능하였고, 명필(名筆)로 이름이 높았는데 해서(楷書: 바르게 정자로 쓴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고, 만년에는 김생(金生: 신라 후기 때 명필)의 필법을 연구하였다.

근곡공의 해서체 필적
숙종10년(1684)에 분봉가훈을 정리하여 쓴 것이다
박천공(博泉公) 휘 옥(沃)

▶ 개요
  ● 인조19년(1641)-숙종24년(1698) 수58
  ● 자 문약(文若), 호 박천(博泉)
  ● 배(配) 전주이씨(全州李氏): 지봉(芝峰) 이수광(李粹光)의 손녀)

▶ 관직
  ● 현종 1년(1660) 문과 증광시(增廣試) 급제, 사관(史官: 춘추관직)
  ● 현종 9년(1668) 예조 좌랑(佐郞: 정6품)
  ● 현종11년(1670) 사간원정언(正言:정6품), 사헌부지평(持平:정5품)
  ● 숙종원년(1675) 홍문관 옥당(玉堂: 부제학 이하 통칭)에 선발,등용, 사간원 헌납(獻納: 정5품), 이조 좌랑(佐郞: 정6품), 홍문관 응교(應校: 정4품), 사간원 사간(司諫: 종3품),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 정3품 상)
  ● 숙종 3년(1677)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정3품 상),
  ● 숙종15년(1689) 기사환국으로 풀려나 승정원 승지(承旨: 정3품),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 숙종18년(1692) 예조 참판(參判: 종2품)

▶ 성품 및 행적
  ● 공은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감관(諫官)으로서직간을 하다가 여러 번 귀양살이,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 숙종 3년(1677) 홍문관 부제학 때 실각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집권한 남인 측은 강온(强溫) 양론이 있었는데 공은 청남(淸南)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송시열을 종묘에 고하고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탁남(濁南)의 영수 허적 등의 반대로 공은 부제학 직을 사직하고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 이옥의 「淸淮別曲(청회별곡)」(첨부 7) (7) 이옥(李沃)의 청회별곡(淸淮別曲) 발견 기사
양원공(楊原公) 휘 숙함(淑 王咸)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에 있는 양원공 묘소

▶ 개요
  ● 생년미상(仲兄 靖襄公 휘 淑琦: 세종11년, 1429 생) ? 졸년 미상
  ● 자 차옥(次玉), 호 양원(楊源) 몽암(夢菴), 시호 문장(文莊)
  ● 배(配) 정경부인 강릉김씨(江陵金氏) (生卒年 未祥)

▶ 가계도(家系圖)

▶ 관직
  ● 단종원년(1453) 생원시(生員試) 장원(壯元) 급제
  단종 2년(1454) 문과 식년시(式年試) 2등 급제
  세조 3년(1457) 문과 중시(重試) 급제
  세조12년(1466) 문과 발영시(拔英試) 2등 급제
  * 세인들이 공의 문과 식년시, 중시, 발령시 급제를 ‘삼중(三重)’이라 했다
  ● 단종 2년(1454) 문과 급제후 경창부(京倉府) 승(丞: 정9품-정5품), 옥당(玉堂: 홍문관 부제학 이하직 통칭)에 선발
  * 경창부(京倉府): 조선시대 한강 근처에 있던 각종 창고를 관할하는 부서. 지방에서 배로 운반되어 온 조세, 공물 등의 물품을 저장했으며, 이로써 경관직 관리들의 녹봉으로 주었다
  ● 세조원년(1455) 좌익(佐翼: 세조 옹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사헌부 감찰(監察: 정6품)
  ● 세조5년(1459) 경연(經筵) 사경(司經: 정7품), 대제학 신숙주에 의하여 임원준, 노사신, 어세겸, 정난종과 함께 호당(湖堂)에 선발됨(첨부10 신정비 이야기 참조)
  ● 호당 후(연도?) 홍문관 응교(應校: 정4품), 발영시 응시 급제
  ● 성종원년(1470) 사섬시(司贍寺: 楮貨, 지방 노비’ 貢布 담당 ) 첨정(僉正: 종4품)
  ● 성종11년(1480) 군기시(軍器寺: 무기 제조) 정(正: 정3품 하)
  ● 성종15년(1484)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정3품 상)
  ● 성종19년(1488)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상)
  ● 성종20년(1489) 수(守)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연도미상 충청도 관찰사와 함경도 관찰사도 역임
  ● 성종21년(1490)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상)
  ● 성종 년( ) 이조 참판(參判: 종2품)
  ●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이조판서(吏曺判書: 정2품), 홍문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

▶ 성품 및 행적
  ● 북방문풍(北方文風)
  공이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 지방이 문학이 어두워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사체(四體)의 소학(小學)을 대량 발간하여 보급함으로써 젊은이들이 학문의 기초를 닦을 수 있게 하여 북방에 문학의 바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이 지방 백성들로부터 숭앙을 받아 공의 사후에 함흥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배향되었다.

  ● 교화본형벌말(敎化本刑罰末)
  공은 충청, 전라, 함경도 관찰사 등 지방 방백을 두루 거치면서 항상 교화(敎化: 교양이나 도덕면으로 가르쳐서 착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를 근본으로 삼아 선정을 베풀어 국조명신록(국조명신록)에 올라 있다.
  원주 숭화정(崇化亭) 기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친구이며 원주 목사로 나간 민정(閔貞)이 정자를 짓고 ‘백성을 교화를 숭상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기문을 부탁하였는데 공의 목민 철학과 일치하여 기꺼이 승락하고 아름다운 기문을 지어 주었는데 이 기문에서 ‘爲政者也敎化本刑罰末也(위정자야교화본형벌말야)’라는 구절이 그 핵심이다. 즉 정치하는 자는 교화를 그 근본으로 삼고, 형벌의 집행은 맨 마지막에 해야한다’는 뜻이다.

  ● 성종16년(1485) 홍문관 부제학으로 대제학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신증동국통감(新增東國通監) 편찬 완료

  * 신증동국통감(新增東國通監): 신라초기부터 고려말까지의 편년사서(編年史書). 조선세조 때 유신에게 명하여 착수했으니 미완성. 성종 15년(1484) 서거정 등이 왕명에 의하여 편찬 완성. 중국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보 따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타 중국 사료를 참조하여 저술. 편년체이기 때문에 읽기가 편하여 널리 읽혀졌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고려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1400여년여 동안의 국토의 이합(離合), 성쇠(盛衰), 명교(名敎), 절의(節義), 난적(亂賊), 간유(奸諛) 등의 사적을 쓰고, 따로 단군(檀君), 기자(箕子), 위만(위만)의 고삼선(古三鮮), 한사군(漢四郡), 이부(二府), 삼한(三韓) 등을 외기로 실었다.(56권 26책)

  ● 일대종장지문(一代宗匠之文)
  사육신의 한 사람인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가 공을 가리켜 일대종장지문(一代宗匠之文) 즉 ‘한 세대에 으뜸가는 문장’이라 하였다.

  ● 부사공파 세보 기록
  공은 문장과 학식이 한 세대의 사표였다. 여러 차례 방백(관찰사)을 역임하면서 아름다운 치적을 쌓았고, 교지를 받들어 동국통감을 편수하였으며, 북백(함경감사) 시절에는 4체의 소학을 간행, 배포하여 학생들에게 그르치므로써 이로부터 북방문풍이 떨치기 시작하였다. 문열 하위지공이 일찍이 교지를 받들어 평하기를 일대에 으뜸가는 거장의 문장이었다고 하였다.

  「公文章學識爲世師表(공문장학식위세사표)累經方伯皆有美蹟(누경방백개유미적)奉敎修東國通監(봉교수동국통감) 爲北伯時刊布 四體小學以敎學者自是北方文風始振(위북백시간포사체소학이교학자자시북방문풍시진)河忠烈公緯地嘗奉敎評品一代宗匠之文(하충렬공위지상봉교평품일대종장지문」

▶ 미담과 일화
  ● 화석정(花石亭) 작명 이야기 (첨부 8) (8) 화석정(花石亭) 작명 이야기

  ●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첨부 9)(9)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 신정비(神井碑) (첨부 10)(10) 신정비(神井碑)

온양관광호텔 경내에 있는 양원공 글씨의 신정비
청련공(靑蓮公) 휘 후백(後白)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금병산 아래 있는 청련공 묘소

청련공 배위(配位) 남양홍씨(南陽洪氏) 묘소
양원공묘소 영하(塋下)에 따로 있다

▶ 개요
  ● 중종15년(1520)-선조11년(1578) 壽59
  ● 자 계진(季眞), 호 청련(靑蓮) 송소(松巢), 시호 문청(文淸)
  ● 배(配) 남양홍씨(南陽洪氏)
  ● 신도비: 양관대제학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 찬,
        1985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에 건립 (神道碑銘: 첨부 11)(11)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 신도비명(神道碑銘)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신도비
비문은 양관대제학 황경원(黃景源) 찬으로 청령집에 수록되어 전해오다가 1985년에 세웠다.

▶ 관직
  ● 중종37년(1542) 23세 때 향시(鄕試) 장원,
      중종41년(1546) 27세 때 진사시(進士試) 급제,
      명종10년(1555) 36세 때 문과 식년시(式年試) 급제
  ● 명종11년(1556)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정7품), 병조 좌랑(佐郞),
  ● 명종12년(1557)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
  ● 명종13년(1558)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종6품), 이조 좌랑(佐郞: 정6품), 호당(湖堂: 賜暇讀書)
  ● 명종14년(1559) 홍문관 교리(校理: 정5품), 이조정랑(正郞:정5품), 수의어사(繡衣御使)로 호남지방 순찰
  ● 명종15년(1560) 연이어 삼사(三司)의 직책에 재임
  ● 명종16년(1561) 의정부 검상(檢祥: 정5품), 사인(舍人; 정4품)
  ● 명종17년(1562) 홍문관 응교(應校: 정4품), 사간(사간: 종3품)
  ● 명종18년(1563) 홍문관 전한(典翰: 종3품)
  ● 명종20년(1565) 사간원 사간(司諫: 종3품)
  ● 명종22년(1567)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 하)
  ● 선조원년(1568)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정3품 상)
  ● 선조2년(1569)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정3품 상)
  ● 선조4년(1571) 예조 참판(參判: 종2품), 대사헌(大司憲: 종2품), 홍문관 제학(提學: 종2품), 이조 참판(參判: 종2품),
      중시(庭試) 장원
  ● 선조5년(1572)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예문관 제학(提學: 종2품)
  ● 선조6년(1573) 종계변무(宗系辨誣) 정사(正使)
  ● 선조7년(1574) 형조 판서(判書: 정2품)
  ● 선조8년(1575) 함경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 선조9년(1576) 이조 판서(判書: 정2품)
  ● 선조11년(1578) 호조 판서(判書: 정2품)
  ● 선조23년(1590) 훈록(勳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봉(封)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증(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의정부 좌찬성(左贊成: 종1품),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종1품), 록(錄) 청백리(淸白吏)

▶ 성품 및 행적
  ● 성품과 기품묘사
      공은 기상이 수려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꿋꿋하게 부동한듯 하고, 그 지킴이 굳어 옮길 수 없는 바가 있는 듯 하였다. 다른 사람의 착한 말을 들으면 곧 바로 주저하지 않고 그 말을 따르면서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과 사귐에는 늙을 때까지 더욱 그 정을 두텁게 하였고, 몸을 다스림이 청렴결백하여 나물국에 담박한 생활을 하여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고, 사방에서 보내오는 선물을 하나도 받은 적이 없었다. (황경원 찬 신도비 중에서)

  ● 청련공의 유년시절 (첨부 12) -공의 후손이 강진-해남에 살게 된 경위- (12)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유년시절

  ● 호남의 유학자들과 교유
      - 명종6년(1551) 32세 때 공은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三唐詩人),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三唐詩人), 동은(?隱) 이의건(李義健), 고담(孤潭) 이순인(李純仁), 남계(南溪) 김윤(金胤), 선비 임회(林會), 선비 윤기(尹箕) 등 여러 유학자들과 교윻하였는데 백광훈과 최경창은 공을 사부로 하여 사제간으로 지냈다.
      * 삼당시인(三唐詩人): 당나라 풍의 시를 잘 지은 백광훈, 최경창, 이달

      - 청계(淸溪) 유몽정(柳夢井), 건재(健齎) 김천일(金千鎰: 임란 때 의병장) 등 여러 선비들도 예문이나 경서에 착오가 있거나 의문이 생기면 찾아와 공에게 물어보고 감탄면서 말하기를 “그 분(공)의 이론과 분별이 정확하니 지금 세상사람은 발돋움을 해서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다” 하였다 한다.

      - 명종7년(1552) 32세 때 공은 ‘장성의 글’로 알려진 하서(하서) 김인후(金麟厚: 문묘배향)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난 것이 큰 절의(節義)가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가 절하고 더불어 강론을 하였다.

      - 명종10년(1555) 35세 때 공은 광주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을 찾아가 더불어 시를 짓고 경서를 논하면서 교유하여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 청련공의 어전상소 (첨부 13)(13)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어전상소(御前上疏)

  ● 공에 대한 현자들의 평가
      (1) 율곡(栗谷)이이(李珥):“이모는 관직에 있을 때 그 직분을 다하였고, 몸가짐이 청렴하였다.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는데도 청빈하기가 (벼슬이 없는) 선비와 같았다. 손님이 오면 술상이 한산하고 담박하였기에 손님이 그의 결백함에 탄복하였다”

      「李某居官盡織律(이모거관진직율)身淸苦(신청고)位至六卿(위지육경)寒素如儒生(한소여유생)客至杯盤冷淡人服其潔(객지배반냉담인복기결)」

      (2) 사암(思菴)박순(朴淳): “이모는 가히 육척의 어린 아이를 맡길 수 있고, 백리의 명을 기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경연에서) 「 李某可以託六尺之孤(이모가이탁육척지고) 寄百里之命云(기백리지명운)」

      (3) 우암(尤庵)송시열(宋時熱):“을사사화 때 문충공 규암 송인수는 나의 종증조가 되는 분인데 일세의 영수로서 가장 혹독하게 화를 입어 원한을 머금고 구천에 계신지 거의 30년이 되었는데 선조10년(1577)공의 글(상소문)이 한 번 나오자 일시에 눈처럼 깨끗이 씻으졌으니 나는 항상 공을 마음으로 경앙하기를 변함이 없이 하였다.?” (공의행장에서)
      「巳之禍圭菴宋文忠公을사지화규암송문충공)余叔曾祖也(여숙증조야)以一世領袖(이일세영수)而受禍最酷(이수화최혹)含寃九原殆三十餘年矣(함원구워태삼십여년의)至曆丁丑(지어만력정축)公文一出(공문일출)神人寃憤一時淸雪(신인원분일시청설)余每景仰於心如一日也(여매경앙어심여일일야)?- 」

      (4)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나 세체는 젊을 때부터 공의 이름과 덕을 추모해서 명종-선조 연간의 제1의 인물로 생각해 왔고, 항상 공이 지으신 글을 보고자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여 마음 속으로 은근히 애달프게 생각하였다.---” (공의시장에서)

      「世采自少每服公名德(세채자소매복공명덕)以爲明宣間第一人物(이위명선간제일인물)常欲得見其論著文字而不能得心?憫然(상욕득견기론저문자이불능득심절민연) 」

▶ 미담과 일화
  ● 북방 선치(북방선치)
      선조8년(1575) 공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국법에 없는 세금은 모조리 없애어 백성들의 살림에 도움을 주었다. 공이 관찰사 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온 후 어사 허봉이 북방을 순찰할 때 국경의 말단 병사들이나 산중의 가난한 백성들까지 마나는 사람마다 묻기를 “이공은 아무 탈이 없느냐?”고 안부를 물었다고 전했다. 이로써 공이 남긴 북방 선치의 증거가 되며 공이 졸한 후 함경도 백성들이 공을 증조부(휘 숙 왕함)과 함께 함흥 문회서원에 향사하였다.

  ● 청련공의 공도(公道) 일생(첨부 14)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공도(公道) 일생

  ● 종계변무(宗系辨誣) 이야기 (첨부 15)종계변무(宗系辨誣) 이야기

  ● 탑반송(塔畔松) 이야기 (첨부 16)(16) 탑반송(塔畔松) 이야기

  ● 犯馬(범마) 와 推鼓(퇴고) (첨부 17) (17) 범마(犯馬)와 퇴고(堆鼓)

  ● 소상팔경(瀟湘八景) 시조 (첨부 18)(18) 소상팔경(瀟湘八景) 시조

청련공 제각 청련사(靑蓮祠)
충의공(忠毅公) 휘 유길(有吉)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충의공( 휘 有吉)의 혈삼무덤

▶ 개요
  ● 자 유지(有之), 호 연사(蓮史), 시호 충의(忠毅)
  ● 선조9년(1576) 생, 광해11년(1619) 졸, 壽44
  ● 배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정1품) 광산이씨(光山李氏): 선조9년, 1576년 생, 인조11년, 1633년 졸, 수58

▶ 관직
  ● 임진왜란 때 공으로 세자익위사 좌세마(左洗馬: 정9품)
  ● 광해10년(1618) 영유(永柔: 평안도) 현령(縣令: 정6품)
  ● 숙종21년(1695) 특증(特贈) 이조참판(吏曺參判: 종2품)하고, 충신(忠臣)에 정려(旌려)
  ● 순조조(1801-1820) 가증(加贈) 의정부 영의정(領議政: 정1품) 시(諡) 충의(忠毅: 臨亂不忘國-忠 剛而能斷-毅 전장에 임하여 나라를 잊지 않았으니 忠이요, 굳은 의지로 결단을 내렸으니 懿라) 특사(特賜) 부조전(不?典: 영구히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특전, 평상: 四代奉祀)

▶ 성품 및 행적
  ● 공은 천성과 자태가 남아답고 용감하였으며,또한 그릇이 넓고 컸다.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다.

  ● 임진왜란 공은 임진란 초기(선조 25년, 1592)에 왜적에게 살해된 부친(휘 善慶)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말타고 활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조26년(1593) 약관 17세로 이순신 장군 휘하에 종군하여 명량해전(노량해전이라는 설도 있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충무전서에 기록되었다. 그 공으로 광해 10년(1618) 영유현령(永柔縣令: 정6품)을 제수 받았다.

  ● 심하전투(深河戰鬪)
      광해 11년(1619) 후금의 침략을 받은 명나라 가 원군을 청해와 강원립을 도원수로 하는 1만명의 원군에 영유현령으로 있던 공이 우영장으로 출전하여 동년 3월 4일 조명연합군과 후금군의 심하전투에서 명군은 참패하고, 원군도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투항하였으나, 공은 좌영장 김응하와 함께 최후까지 저항하다 순절하였다. 말갈기에 달아온 혈삼(血三)에 혼을 불러 파주 평지능(平地陵)의 양원공(楊原公 휘 淑 王咸) 영하에 장례를 지냈다.
      「己未三月四日殉節于深河之役(기미삼월사일순절우심하지역)以血衫招魂葬于坡州平地陵 楊原公瑩下乾坐」

  ● 그 후 나라에서 조치한 사항들

    ① 인조1년(1623) 교지를 내려서‘심하순절(深河殉節)은 300년 역사의 우리나라가 금수(禽獸)의 나라를 면하게 하였다’ 고 평가하였다.
    「深河殉節獨扶三百年綱常使我國得免禽獸之域(심하순절독부삼백년강상사아국득면금수지역」

    ② 숙종21년(1695)에도 교지를 내려서 찬양하고 충신(忠臣)에 정려(旌閭)하고 이조참판(吏曺參判: 종2품)에 증직(贈職) 하였다.
    「箕封禮儀賴玆以扶皇朝大恩賴玆以酬命旌特贈吏曺參判(기봉예의뢰자이부황조대은뢰자이수명정특증이조참판)」

    ③ 영조9년(1733) 지를 내려 심하순절을 높이 찬양하고 정려하였다.
    「深河殉節使國家忠義著旌天下其功大矣(심하순절사국가충의저정천하기공대의)」

    ④ 정조11년(1787)에도 교지를 내려서 심하순절을 찬양하였다.
    「深河殉節永有辭於天下後世又?陽文山合而爲一(심하순절영유사어천하후세우수양문산합이위--)」

    ⑤ 헌종8년(1842) 이조판서 조두순의 1700여자에 달하는 영유현령(永柔縣令) 증영의정(贈領議政) 시장(諡狀)에 따라 영의정(領議政: 정1품)에 추증되고, 시호 충의(忠毅)가 내려졌다.

▶ 미담과 일화
    ● 血衫(혈삼)무덤과 말무덤(첨부 19) (19) 혈삼(血衫)무덤과 말무덤

충의공(휘 有吉)의 혈삼을 전하고 죽은 애마의 말무덤 의마총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충의공 혈삼무덤 아래 있다.
첨 부
(1) 의정공(議政公 휘 廷華) 신도비명(神道碑銘)
(2) 분봉공(盆峯公 휘 澍) 신도비명(神道碑銘)
(3)분봉가훈(盆峯家訓) 훈계(訓戒) 39덕목(원문)
(4)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 신도비명(神道碑銘)
(5)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6) 북백공(北伯公 휘 昌庭) 신도비명(神道碑銘)
(7) 이옥(李沃)의 청회별곡(淸淮別曲) 발견 기사
(8) 화석정(花石亭) 작명 이야기
(9)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10) 신정비(神井碑)
(11)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 신도비명(神道碑銘)
(12)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유년시절
(13)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어전상소(御前上疏)
(14)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공도(公道) 일생
(15)종계변무(宗系辨誣) 이야기
(16) 탑반송(塔畔松) 이야기
(17) 범마(犯馬)와 퇴고(堆鼓)
(18) 소상팔경(瀟湘八景) 시조
(19) 혈삼(血衫)무덤과 말무덤
(20) 이영유유길(李永柔有吉)의 허장(虛葬)에 대한 애사(哀辭)
(21) 연성회 2005년도 고양-파주 선조유적 탐방 앨범
첨부1 의정공(議政公 휘 廷華) 신도비명(神道碑銘)
  孰短其脩孰窒其通(숙단기수숙질기통) 누가 긴 것을 짧다하고 누가 통한 것을 막혔다 하는 고
  壽吾不知命繫其逢(수오부지명계기봉) 오래 사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니 명이란 만나는 데에 매인 것이다.
  旣嗇其施乃積于躬(기색기시내적우궁) 이미 베푸는 것을 몸에다 쌓았으니
  積之伊何惟孝惟忠(적지이하유효유충) 무엇에 쌓았는고 오직 효와 충이라
  孰當其隆公有季子(숙당기융공유계자) 누가 그 융성함을 감당하겠는가 공이 막내로서 하였고
  福祿功業隆其未已(복록공업융기미이) 복과 공과 업이 끝없이융성하였다.
  寔惟光前奚但趾美(식유광전해단지미) 이는 오직 앞을 비춘 것이니 어찌 다만 뒤만 아름다우리오
  凡我子孫宜知所自(범아자손의지소자) 우리자손들은 마땅히 우리가 어디서 부터 왔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첨부2 분봉공(盆峯公 휘 澍) 신도비명(神道碑銘)
  剛德而愼儁才而敏天與公豊강직하고 근신하고 민첩하니
  (강덕이신준재이민천여공풍) 하늘은 공에게 풍성하게 주엇도다
  命于蒼艾官且不大天嗇于公 그러나 명은 중년을 못넘고
  (명우창애관차부대천색우공) 벼슬 또한 높지 못하였으니 공에게 인색도 하였도다.
  雖躬不?二子行成珪璋望隆비록 자기는 넉넉지 못햇으나 두 아들이
  (수궁불영이자행성규장망융) 그 공을 이루어 벼슬과 명망이 크게 높도다.
  錫及泉?彛鼎是銘食報收功 증직은 천양(泉壤: 九泉)에 미치고
  (석급천경이정시명식보수공) 이정(彛鼎: ? )에 새겨지니
  無怠于善天命不舛請言念裔夢 착한 일에 게으르지 않으면 하늘은 어김없이
  (무태우선천명불천청염예몽) 보답하는 것이니 자손의 번성함을 볼지어다.
첨부3 분봉가훈(盆峯家訓) 훈계(訓戒) 39덕목(원문)
  (1)忌日不出(기일불출)
  (2)將赴宴當思其日國忌與否家忌臨近與否(장부연당사기일국기여부가기 임근여부)
  (3)將弔喪當思祭祀有無(장조상당사제사유무)
  (4)與人約言當思其可踐(여인약언당사기가천)
  (5)與人共事當思其合義(여인공사당사기합의)
  (6)被人求請不牽於情不奪於威唯義所在則정之(피인구청불견어정불탈어위유의소재칙정지)
  (7)被人 口言辱橫逆當思反己不可核其曲直(피인언욕횡역당사반기불가핵기곡직)
  (8)見人善則可揚揚於路人(견인선칙가양양어로인)
  (9)見人惡則必隱隱於父子(견인악칙필은은어부자)
  (10)喜時言動常恐其淫 人失驕肆(희시언동상공기음실교사)
  (11)怒時言動常恐其暴루粗한(희시언동상공기폭루조한)
  (12)勞事常先於人(노사상선어인)
  (13)便事常後於人(편사상후어인)
  (14)關人譽己思繼其可譽之實而不可喜(관인예기사계기가예지실이불가희
  (15)關人毁己思去其可毁之實而不可怒(관인훼기사거기가훼지실이불가노
  (16)在주中言動常處人後(재주중언동상처인후)
  (17)在名譽間務爲韜晦(재명예간무위도회)
  (18)發言當思下氣怡聲(발언당사하기이성)
  (19)作事當思躁妄顚倒(작사당사조망전도)
  (20)將出言當思其無妄而不可信口(장출언당사기무망이불가신구)
  (21)將造行當思其無부而不可任情(장조행당사기무부이불가임정)
  (22)入人之門泌問客有無(입인지문필문객유무)
  (23)到人之門門有車馬必問客爲誰(도인지문문유거마필문객위수)
  (24)被人邀必問客來與否(피인요필문객래여부)
  (25)入人家坐有不識者言動項爲恭謹(입인가좌유불식자언동항위공근)
  (26)不澄人父記況可書乎在一家則有不부已者是不可盡?也(부징인부기황가서호재일가칙유불부이자시불가진폐야)
  (27)志節宜磊磊落落(지절의뢰뢰락락)
  (28)言貌當謙遜恭謹(언모당겸손공근)
  (29)心定則氣定故倉卒無疾言處色(심정칙기정고창졸무질언처색)
  (30)心和則氣和故喜?不見於辭色(심화칙기화고희온불견어사색)
  (31)凡爲言語達意而止不可已甚已甚則粗矣不可形容形容則?矣(범위언어달의이지불가이심이심칙조의불가형용형용칙추의)
  (32)凡與女子對不使兩目相擊已雖無心彼必回此生淫傍人閒見之又必정其有私在娼?猶然況不爲娼?者乎(범여여자대불사양목상격이수무심피필회차생음방인한지우필정기유사재창량유연황불위창량자호)
  (33)凡行道女子過則不顧視凡在席女子坐則不可寓目此皆養淫之道也(범행도여자과칙불고시범재석여자좌칙불가우목차개양음지도야)
  (34)凡乞簡請簡一切不行如有不能?者必須再思(범걸간청간일절불행여유불능폐자필수재사)
  (35)凡由不자者不肯向人道此乃不自憮處必須禁斷克去不可仍回수且(범유부자자불긍향인도차내부자무처필수금단극거불가잉회수차)
  (36)凡有不善必有所諱是非無好惡之智羞恥之心而猶且陰爲陽합則豈克己之功有不誠也與是以可諱於人者一切勿爲(범유불선필유소휘시비무호오지지수치지심이유차음위양합칙기극기지공유불성야여시이가휘어인자일절물위)
  (37)聲音必須和緩低闊雖甚怒盛喜不可變(성음필수화완저활수심노성희불가변)
  (38)持身必須植立端重雖私居燕處不可改(지신필수식입단중수사거연처불가개)
  (39)吾性剛是以多過吾量狹是以多失吾言煩是以多責若能柔其剛寬其狹簡其煩吾其兌夫(오성강시이다과오량협시이다실오언번시이다책약능유기강관기협간기번오기태부)
첨부4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 신도비명(神道碑銘)
  臣惟事君立爲大綱 (신유사군입위대강) 신하는 인금을 섬김이 대강(가장 큰 강령)이니
  曷用自盡曰誠與淸 (갈용자진왈성여청) 어떻게 하면 도리를 다할 수 있는가? 충성(忠誠)과 청백(淸白)이로다
  ? ? 李公允蹈其臧 (순순이공윤도기장) 정성스런 이공은 착함만 행하였으니
  匪允蹈之克體在衷 (비윤도지극체재충) 행함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 체득하였도다
  治友有家孝友爰發 (치우유가효우원발) 가정에서 다스리니 효우가 피어나고
  出贊王猷皇祖是契 (출찬왕유황조시계) 나가서 왕유(임금)를 도우니 황조(중국)와도 뜻이 맞았도다
  雲雷? 屯王播西灣 (운뢰구둔왕파서만) 운뢰(구름과 천둥: 왜적)가 둔을 지으니 왕은 서만(의주를 말함)으로 파천하여
  恤恤其? 公? 于艱 (휼휼기어공한우간) 우리 속에 갇혀서 근심하니 공이 어려움을 막았도다.
  師徒十萬八年于征 (사도십만팔년우정) 사도(군사) 십만이 팔년을 싸웠는데
  驛驛其餉公司厥程 (역역기향공사궐정) 역마다 군량인데 공은 그것을 운반하였도다.
  倉敖囊석實裕邦計 (창오낭석실유방계) 창고마다 전대마다 나라 살림은 넉넉한데
  歸視其家鼎미不繼 (귀시기가정미불계) 집에 돌아가 보니 끼니도 잇지 못하엿도다.
  營營紫人莫問公廬 (영영자인막문공려) 우굴거리던 사람들은 공의 집을 찾지 않았으니
  謂公寒士塚宰司徒 (위공한사총재사도) 공도 한사와 같앗으나 총재(이조판서)요 사도(대사성)였도다.
  溫溫令儀不盈不持 (온온영의불영부지) 온온한 영의(위엄있는 모습)는 자만도 고집도 없엇으니
  謂公靜者烟閣雲臺 (위공정자연각운대) 공은 정자라 하나 능연각(당태종의 공신각), 운대(한광무의 공신각)에 새길만 하도다
  豊資嗇用有監自天 (풍자색용유감자천) 자질은 풍부하였는데 쓰임은 못다하였으니 하늘은 알고 있을터
  公操其券旣多子孫 (공조기권기다자손) 공은 그 복권을 잡아 자손도 많도다.
  非謙胡受非種胡獲 (비겸호수비종호획) 겸손하지 않으면 어떻게 받을 수 있으며 씨뿌리지 않으면 어떻게 거둘 수 있겠는가?
  我면斯石惟後人式 (아면사석유후인식) 나는 이 돌에 새기어 후인들의 긍식(모범)을 삼노라
첨부5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 우리나라에 들어 온 최초의 세계지도 -
盛 永(부사공 22세손)
  요즈음 신문 사설이나 칼럼 또는 기사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의 실력이 너무 떨어져 입시에 합격하여 대학에 입학한 학생도 수학능력이 모자라 과외 보충 공부를 해야 한다는 기사들은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TV프로 중 일요일 저녁 때 방영되는 고등학교 학생을 상대로 한 ‘도전, 골든벨’은 순진한 학생들의 재치와 유모가 넘쳐 흐르는 장면도 좋고, 최선을 다해서 한 문제 한 문제 풀어가는 과정도 진지해서 좋다. 그 무엇 보다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한 개 실수 없이 50개의 정답을 내 놓을 때면 보는 시청자도 정말 감격적이다.
  2003년 6월 12일 방영된 전남 영광해룡고등학교에서의 ‘도전골든벨’의 마지막 50번 문제를 여학생이 맞혔을 때는 그만 입이 벌어진 채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 50번 골든벨 문제는
  우리나라는 격동의 세월이었던 조선 후기에 들어서 많은 부분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세계 지도 역시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1602년,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 명나라 학자 이지조와 함께 목판에 새겨 만든 이것은 당시 베이징에 파견되어 있던 이광정과 권희가 우리나라로 귀국할 때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사실상 한국에 전래된 최초의 세계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이 세계 중심이 아닐뿐더러 세계가 무척 넓다는 것을 깨닫고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으며, 중화 사상이 크게 동요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도는 무엇일까요?

  영광 해룡고등학교 최후의 도전자 이정주학생은 정답을 맞추고 32대 골든벨을 울렸다. 정답은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이다.

  한국사대사전에서 곤여만국전도를 찾아보니
  「선조 17년(서기 1584년, 청 만력12년)중국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에서 이탈리아 선교사 리마두(利瑪두: Matteo Ricci)가 고국에서 가져 온 세계지도에서 중국을 지도의 중앙에 두고 지명을 한자로 번역하여 개각한 지도이다. 이보다 20년 후인 선조37년(서기 1604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되어있다.

  한국사대사전에는 없지만 ‘도전 골든벨’ 50번문제 설명에는 ‘당시 베이징에 파견되어 있던 이광정과 권희가 우리나라로 귀국할 때 가지고 들어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 이광정이 바로 우라 延李의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이다.

  해고공은 첨사공 14세손이며 자를 덕휘(德輝) 호를 해고(海皐)라 하고,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임란 수행에 기여한 공으로 우리 延李에서는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과 함께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어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공의 경력을 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34년(1601) 공이 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그 청백함이 인정되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선조35년(1602) 호조판서, 예조판서, 를 거쳐 이조판서를 맡았고, 또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겨 가을에 인목왕후 책종 주청사로 중국에 갔다. 이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 이민구(李敏求)가 찬한 신도비문에는 공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이 지도(곤여만국전도)를 입수한 과정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록은 없으나 사신으로 가 있는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공은 가을에 표문(表文: 인목왕후 주청표문)을 받들고 연경(燕京: 당시 명나라 서울 , 지금의 북경)에 갔는데 청엄(淸嚴: 깨끗하고 기율이 엄함)하고 방직(方直: 바르고 곧음)하여 그 처신이 아래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보좌관 한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겨울용 겉옷을 샀다가 곧 후회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내가 사사로운 일로 우리 공에게 누를 끼칠 수 있겠는가?” 하고 자탄하니 장사 속으로 자기들 이익만 추구하던 역관들도 이를 보고 서로 경계하면서 한 사람도 범한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공이 명나라에 가 있는 동안에 임금이 1자급(資級)을 올려주었고(資憲大夫→正憲大夫), 귀국한 후 또 1자급을 올려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승자하였다.

  선조37년(1604) 임란 수행의 공적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되고, 연원군(延原君)에 피봉되었다가 가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에 가자되면서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으로 가봉되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제위에 올라 난정이 시작되면서 공에게 호조판서가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받지 않고 두문(杜門: 문밖에 나가지 않음), 사객(謝客: 손님을 받지 않음), 염정( 靜: 조용히 지냄), 자수(自守: 스스로 자기를 지킴)하니 공에게는 위험이 미치지 않았다.

  인조1년(1623) 인조반정이 일어난 그날 밤에 인조는 공을 이조판서에 제수하였고, 이어서 공조,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 정2품이상, 70세 이상의 원로 자문회) 에 들어갔다가. 인조2년(1624) 이괄의 난 때는 73세의 노령에도 왕을 호종하면서 한번도 늙었다거나 병들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공은 세 번이나 정승의 물망에 올랐으나 정승이 되지 못하였으니 남들이 ‘관운이 없다’하였으나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청선고(淸選考)에도 ‘복상미배(卜相未拜: 정승에 추천되었으나 임명되지 못했다)에 우리 延李로서는 이광정(李光庭), 이귀(李貴), 이관징(李觀徵)이 올라 있다.

  공은 인조4년에 개성유수를 마지막으로 인조5년(1627)에 정묘호란으로 강화에 들어갔다가 병을 얻어 76세를 수하고 졸하였다.

  공이 별세한 후 사람들은
  “세상에 어떻게 공과 같이 청명하고 온손(溫遜: 온순하고 겸손함)하여 (벼슬에) 어렵게 나가고 쉽게 물러난 사람이 있겠는가. 명리(名利)가 일세를 풍미하여 절조마저 빼앗기는 세상에 공은 아도(雅道: 바른 길, 떳떳한 길)를 깨끗이 닦아 이험(夷險: 평탄하고 험함)에 변함이 없었고, 작위는 높았으나 항상 머리 숙여 지냈으며, 세도(勢道: 權勢)를 보기를 겁부(怯夫: 겁이 많은 보통 사람)가 함정을 피하듯 하였다”고 하였다. 또 후생(後生)들이 말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공처럼 인심(仁心: 어진 마음)이 바탕이 되어 근검하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광영은 피하고 아랫사람을 구제하여 말 한마디 하면서도 혹 사람을 다칠까 걱정하였고, 안으로는 강방(剛方: 굳셈)하면서도 남과 겨루지 않아 30년을 관직에 있으면서도 본심은 한결같았다.”하였다. 향당(鄕黨: 동네 어른들)과 족족들은 말하기를

  “공은 내행(內行)이 독실하였으나 더욱 일가간에 자상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섬김에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고, 귀하게 된 후에는 미처 봉양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서러워 하였다. 아우 창정(昌庭)을 무애(撫愛)하기를 늙어서도 얼리 때처럼 하여 그가 죽었을 때는 매우 슬퍼하여 다섯 달 동안 상선(常膳)을 물리치니 종당(宗黨)에서 그 인자함을 우러러 보고 마을에서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하였다. 또 여대(輿臺: 하인)나 마졸(馬卒: 마차꾼)들이 말하기를

  “우리 같은 천인들이 어떻게 공을 알겠는가 마는 권문 요로에서는 한번도 공의 수레를 보지 못하였고, 포저(苞?: 선물 꾸러미)나 청탁이 공의 문전에 이르럼을 보지 못하였으니 우리들의 촉망은 공에게 있었다” 하였다.
(延安李氏이야기 288쪽)
첨부6 북백공(北伯公 휘 昌庭) 신도비명(神道碑銘)
  士常患才 ?(사상환재전) 선비라면 재주가 작은 것을 늘 근심하더라도
  不能讐其志(불능수기지) 그 뜻을 원수로 삼을 수는 없으며
  常患不遇時(상환불우시) 시절을 만나지 못했음을 늘 근심하더라도
  不能有所施(불능유소시) 베풀어 주는 바를 바랄 수는 없네
  若李公者才(약이공자재) 이공과 같은 분은 재주가
  旣大矣時亦(기대의시역) 이미 큰데 시절 또
  遇矣進塗關(우의진도관) 잘 만나 앞길 어려운 관문 활짝 열림에
  矣進執洪樞(의진집홍추) 나아가 큰 직책 잡으시고
  實咫尺矣芒(실지척의망) 실로 지척에
  乎執제其壽(호환제기수) 나랏님 모셨네
  之速邪局於(지속사국어) 아! 누가 공을 그리 빨리 보내려 하였던가?
  一方之治而(한 일방지치이) 한 지역 다스림에 머물러
  不咸緊我後(불함긴아후) 우리의 뒤를 다 보살필 수는 없었네
  之臨朝出口昔(지임조출차) 훗날 조정에 임해서 탄식하고 있을 사람이
  者以此不 ? (자이차불영) 이것으로 그 일신을 이롭게 하지 않고
  其躬以成浚(기궁이성준) 후인을 이루는 것도
  人亦天之道(인역천지도) 또한 하늘의 도(道)일지니
  兮宜칭子孫(혜의칭자손) 의당 자손들도
  之軒冕繼車凡(지헌면계범) 그 법도를 이으리라
첨부7 이옥(李沃)의 청회별곡(淸淮別曲) 발견 기사
- (부제들)
- 金剛山(금강산) 勝景(승경)을 읊은 紀行歌辭(기행가사) -
- 關東(관동), 金剛別曲(금강별곡)에 이어 3번째로 -
- 原名(원명) 「淮陽別曲(회양별곡)」--淮陽府使(회양부사) 때 지은 것 -
- 모두 74행, 뒤엔 8대손 李吉寧(이길영)이 쓴 跋文(발문)도 -
- 未發表(미발표)작품, 자신의 心境(심경) 등 잘 묘사 -

  金剛山 勝景을 읊은 李沃(이옥)(1641-1698)의 가사「淸淮別曲(청회별곡)」이발견되어 국문학계의 귀중한 자료가 또 하나 늘게 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古典歌辭중 金剛山을 읊은 歌辭는 松江 鄭澈의 「關東別曲」, 英祖 때 朴淳愚의「金剛別曲」뿐이었는데, 「淸淮別曲(청회별곡)」이 발견됨으로서 3번째 金剛山 紀行歌辭가 나온 것이다.

  「淸淮別曲(청회별곡)」은 博泉 李沃의 10대손인 李敬熙씨(56, 慶北尙州군점촌읍)가 소장하고있던 종가장서중 朝鮮朝 역대왕, 영의정. 좌,우의정의 명단을 기록한 필사본 「黃閣錄」과 朝鮮 8道 書院의 入學者를 적은 「書院錄」을 함께 묶은 「 黃閣錄 - 書院錄」이란 표제의 책(21.5 x 15cm, 1백 18페이지)에 함께 묶여진채 발견됐다.

  모두 74행 5백 3자인「淸淮別曲(청회별곡)」뒤에는 박천의 8대손 李吉寧(이길녕)이 쓴 跋文이 들어 있다.
  「내가 우연히 先蹟을 보다가 좀이 먹은 종이에 쓰여진 두어줄 詩文을 얻었는데 머리에 淮陽別曲이라 쓰고 끝에 짧은 敍가 있어 그 전말을 자세히 상고하여보니, 이 노래는 나의 八代祖 博泉府君이 지은 것이고 敍는 곧 5代祖 剛齋府君이 또한 이것을 휴지중에서 얻어 그것을 위해 기록한 것이었다. 내가 이에 일어나 공경하여 말하기를 아아! 淮陽이라고 이른 것은 府君이 일찍이 간악한 무리에게 모함한 바가 되어서 淮陽府使로 나간 때문이다」(漢文意譯)

  이 跋文의 내용으로 미루어 「淸淮別曲(청회별곡)」은 博泉이 淮陽府使로 있을 때 지은 것이고, 본래 「淮陽別曲(회양별곡)」이라 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李吉寧이 휴지조각처럼 뒹굴던 先祖의 「別曲(별곡)」을 우연히 얻어 보존하기 위해 옮겨적은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淸時(太平聖代)는 의미가 있는데 이몸이 무능하여/ 南湖(남쪽의 자기가 살고 있던 곳) 낡은 집에서 돌로 만든 사립문을 닫았더니/ 仙區(신선의 구역, 淮陽을 지칭)에 연분이 있고, 성은이 지중하여/ 銅章(구리로 만든 마패 같은 것) 竹符(지방관에게 주는 王의 信標)를 松裡林에 맡겼으니---」

  「淸淮別曲(청회별곡)」에서 博泉은 먼저 자신이 淮陽府使로 와있는 것을 仙區와 인연, 임금의 성은이라고 먼저 읊기 시작, 金剛山의 절경을 묘사하여 자신의 심회를 담담하게 펼쳐가고 있다.
  「烟松溪에 배를 띄워 靈境을 바라보니 백두산 ( )( )을 ( )( )( )池를 둘러두고/ 그 앞에 서려 있는 기운으로 仙府를 열었으니/ 산의 모습도 秀出하고 地勢도 요험하다/ 神仙의 屈宅인가 隱者의 道區런가/ 玉陋方寸地를 우연히 이별하고/ 연하 깊은 곳에 여러 신선이 모였구나/ 저관령 맨 윗 봉우리에서 淸淮水가 흘러내려/ 취병대 남쪽 둔덕으로 百里까지 둘러 있으니/ 깊은 못을 이루어 흐름에 발을 씻고 갓끈을 씻으리로다」(일부 현대어로 옮김)

  積雪이 떨어지면서 푸른모습을 나타내는 千枯栢松의 자태에서 선비의 정점을 본다고 표현하기도 한 博泉은 고향을 떠나 나라일로 먼 임지에 와서 君王과 兩親을 그리워 하는 지극한 심정을 「南江의 여울소리 客枕에 다다랐다」고 표현하면서 「忠孝가 두가지 아님을 옛글에서 배웠으니 竭忠盡孝하여 옛사람을 따르리라」고 별곡의 끝을 맺고 있다.-(박천공 이력에 관한 사항 생략)-

  ▲ 梁東麟(?)교수(檀國大 국문학)의 말 = 「淸淮別曲(청회별곡)」은 李沃이 지은 것으로 未發表歌辭 작품이다.
  우리의 古典歌辭 중에 金剛山을 읊은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松江의「關東別曲」, 英祖 때 博淳愚가 지은「金剛別曲」이 있을 뿐이다.

  작자 李沃은 「淸淮別曲(청회별곡)」에서 金剛勝地를 감상하면서 자신의 愁憐을 읊었다. 표현기교상으로는 특이한 점은 없지만 「淸淮別曲(청회별곡)」이 발굴됨으로서 金剛山紀行歌辭가 또 하나 늘게되었음은 다행한 일이라고 본다.
  이「淸淮別曲(청회별곡)」에는 당시에 있어서 작자 李沃이 처했던 역사적 배경과 작자의 心境이 잘 그려져 있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高光植(?)기자>
(1982년 1월 19일자 한국경제신문 기사)
첨부8 화석정(花石亭) 작명 이야기
沙月 盛 永(부사공 22세손)

파주 임진강 남안에 있는 화석정(花石亭)
1973년 율곡 유적 정화사업 때 화석정의 현판도 박대통령의 한글 글씨로 바꾸었다.

  임진강 물이 임진각과 자유의다리가 있는 문산읍에 도착하기 전에 장단군 진동면 남쪽 끝 일월봉을 남쪽으로 크게 회돌이 치는 남안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날아갈 듯 날개를 펴고 있는 아담한 정자가 유형문화재 61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석정(花石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 화석동 마을 뒷동산이다.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여 그들의 대륙침략 목적에 맞도록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면서 서울에서 평양, 의주에 이르는 길을 문산-개성-해주-사리원을 거치도록 연결하였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평양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직선 길은 벽제-파주(이 화석정 앞에서 임진강을 건너)-장단-평산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화석정은 옛날에는 한양-평양의 가장 번화한 길목 강가에 있었던 것이다.

  화석정문화재 안내간판은 화석정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다.
  화석정 유형문화재 안내 간판 내용
  『이 정자는 율곡선생이 국사의 여가와 퇴관 후에 들러 작시, 연구와 묵상을 하던 곳이다. 율곡선생의 5대조 강평공 이명신에 의하여 세종25년(1443) 창건된 것을 성종9년(1478) 선생의 증조보 이의석이 중수하고 몽암 이숙함이 이 정자를 화석정이라 이름하였다.그 후 율곡선생이 다시 중수하여 사용하던 이 정지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80년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14년(1673)에 선생의 종증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동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선생 및 신사임당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화석정을 단청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위 안내문 중에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는 대목은 여러 호종했던 신하들의 회상록에서 보통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에 몽진하는 어가(御駕)가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배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고 왜군은 뒤를 쫓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절벽 위에 정자(화석정)에 불을 질러 강 바닥을 낮같이 밝힌 후 겨우 배를 찾아 임금이 도강하였다”는 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율곡선생은 임진왜란 10년 전에 경연에서 선조 임금에게 10만양병론을 주청했다가 배석했던 당시 득세한 유성용 등 동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율곡선생이 화석정을 중수 할 때 이미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불에 잘 타도록 간솔로 정자를 지었다”고 말하기도 하는 데 그 진위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율곡선생의 선견지명을 칭송하는 과장된 표현인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 9년 중수할 때 정자의 이름을 ‘화석정(花石亭)’이라 짓고, 중건 기문을 쓴 몽암 이숙함은 연안이씨 부사공 5대손 양원공(楊原公) 이숙함(李淑 王咸)이다. 이숙함의 화석정 중건 기문 서두에 따르면
  『나의 문생(文生)이며 전 날 홍주(洪州: 현 홍성)의 원을 지낸바 있는 이후(李侯) 의석(宜碩)이 그의 아우(사촌)이며 또한 나의 동료인 의무(宜茂)씨를 보내서 말하기를 파주 관아 북쪽 10리 쯤에 율곡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나의 조부 강평공(康平公: 지돈영부사를 지낸 李明晨, 율곡선생의 5대조)의 옛 별장이 있고, 별장 북쪽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에다 정자를 지어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을 많이 심어 놓고 감상하였는데 그 동안 세월이 흘러 퇴폐하고 다만 옛 터만 남았다.
  의석이 조업(祖業)이 황폐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옛 터에 정자를 중건하였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관생략)- 그러므로 자네는 정자 이름을 짓고 기문을 써서 더욱 아름답게 하여 주게』
하며 작명과 기문을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이숙함은 이의석이 조업이 황폐될까 두려워 정자를 중건하여다는 지극한 마음과 옛 정자에 기화이초와 진송괴석을 많이 심어놓고 감상하였다는 설명에서 중국 고서 찬황공(贊皇公) 이덕유(李德裕)의 평천장(平泉莊) 기문(記文)을 머리에 떠 올리고 그 기문 가운데서 ‘화석(花石)’이란 글자를 따서 이름을 ‘화석정(花石亭)’이라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평천장의 기문에서 찬황공이 “평천을 파는 자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한 개라도 남에 주는 자도 아름다운 자재가 아니다”라고 훈계하였지만 후에 평천장의 꽃과 돌이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는 기록을 들면서 화석정을 창건한 강평공이 이러한 훈계를 하지도 않았지만 손자 이의석은 남에게 팔지도 주지도 않았거니와 조선(祖先)의 마음에 들게 중건하여 능히 조업을 이었으니 그 어질기가 찬황공의 자손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들어 난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기문의 말미에
  『정자가 황폐해지니 꽃(花)과 돌(石)도 함께 황폐해지고, 정자가 새로워지니 꽃(花)과 돌(石)도 함께 새로워졌다. 물(物)은 비록 앎(知)이 없겠으나 서로 만남은 각자 때(인연)가 있는 것이니 어찌 우연이라 하리요. 외로운 배에 명월 싣고 청풍에 닊싯줄 드리우는 것은 이후(의석)의 속세를 떠난 그윽한 정취이니 이 다음 이후를 따라 정자에 올라 놀게 되면 다시 이후를 위하여 글을 지으리라』하면서 기문은 끝났다.

  이 기문 서두에 양원공은 덕수이씨 이의석과 사제관계이고, 그의 사촌 이의무와는 문학동료로서 공에게 기문을 부탁할 정도로 가깝고 허물없는 사이였다. 선조의 친분 때문인지 양원공의 증손 청련공 이후백과 이의석의 증손 율곡선생은 선후배 관계지만 매우 가까웠던 것 같다.

  율곡선생이 쓴 석담일기에 선조8년(1575)에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 김인후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떠나려 할 때 율곡이가 나서 임금에게 고하기를
  “이후백과 김인후는 전장(典章: 법과 제도, 문물 등)에 밝고 시무(時務: 당면한 급한 일)에 능하니 조정에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일, 박순의 천거로 형조판서에 기용된 일, 이조판서로 있을 때 좋은 인재를 천거하려고 노력하고 고민한 일과 친족의 청탁을 거절했다는 일, 동인의 거두 김효원이 “이후백이 정성에 기용되면 논박하겠다”는 말에 반박한 일 등 이후백을 좋게 평가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끝
(延安李氏이야기 277쪽)
첨부9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沙月 盛 永(부사공 22세손)

황간에 있는 가학루(駕鶴樓)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하행길에 오르면 금강(錦江)휴게소를 지나면서 백두대간(白頭大幹) 속리산(俗離山)-황악산(黃嶽山)-삼도봉(三道峰)의 준령들 사이로 오르고, 내리고, 돌고, 터널을 빠져나가면서 손바닥 만한 하늘 조각만 보이니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다가 앞이 탁 트이면서 차도 사람도 식은 땀을 씻으며 안정을 찾게 되면 어느덧 황간(黃澗)이다.
  왼쪽으로 황간장터가 보이고, 눈이 좀더 앞질러 가면 높다란 벼랑 위에 산듯한 정자 하나가 보인다.

  내가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멀지 않은 김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이곳에 소풍을 온 적도 있고, 외지로 나와 다니면서 일년에 한두번 고향을 찾을 때면 이 앞길을 지나기 때문에 기차나 버스의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정자의 전경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자의 이름도 내력도 알지 못하고 또 알아 볼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국방부 도서실 한 귀퉁이 서가에 새까만 먼지가 앉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는 엣날 우리나라 각 지방의 지리와 역사가 혼합된 고전의 책장을 넘기던 중 황간현(黃澗縣) 편에서 「가학루(駕鶴樓)」라는 전자 이름을 보고는 ‘바로 그 정자’일 것이라 생각하였고, 더구나 그 정자의 전경을 멋지게 읊은 한시(漢詩) 한 수를 읽어보고 부터는 꼭 한 번 찾아가 보리라고 마음 먹게 되었다.

  그것은 그 시(詩)가 바로 우리 延李의 양원공(楊原公 휘 淑 王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전(大田) 국과영(國科硏)에 근무하게 된지 며칠도 안 되는 여름 어느날 가벼운 옷차림으로 차를 몰아 순식간에 정자가 있는 벼랑 밑에 다달아 차를 세워두고 벼랑길을 올랐다.

  장마 뒤에 오는 삼복 더위지만 하고싶은 일을 한다는 즐거움 때문인지 사뭇 몸도 마음도 갓뿐한 기분으로 잡기장 한 권과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귀에는 카세트 이어폰을 꽃고 음악에 맞추어 흥얼거리면서 오솔길을 올랐다.
  정자에 도착하여 혹시나 헛탕이 아닌가 가슴을 조이면서 현판 쪽으로 가서 「駕鶴樓」라는 큼직한 글씨를 조는 순간 ‘맞구나!’하는 반가움과 성취감에 젖어 한동안 멍하니 현판 글씨를 쳐다보고 있다가 먼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안내판으로 갔다.

  안내판에 의하면 「조선조 태조2년(1393)에 황간현감 하첨(河詹) 이 처음 창건하고, 경상도 관찰사 남공(南公)이 순시 왔다가 ‘학(鶴)이 바람을 타고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 하다’하여 정자 이름을 「가학(駕鶴)」이라 편액하고, 이첨(李詹)이 기문을 썼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현감 손번(孫蕃)과 구장원(具長源)이 중건(重建)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누각 안에 걸려있는 가학루중수기(駕鶴樓重修記)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이첨(李詹)과 조위(曺偉)의 기문(記文) 내용과는 많이 틀린다.
  즉 의성인(宜城人) 귀암(龜巖) 남재(南在)가 태종3년(1403년 癸亥) 9월에 경상도 관찰사로서 황간을 순시왔다가 현감으로 부임한 지 달포 밖에 안되는 하동인(河東人) 하담군(河澹君)을 시켜서 짓게하고, 이듬해(태종4년, 甲申) 정월에 준공하면서 남공이 현판을 달고 이첨(李詹)이 기문을 썼다고 되어 있으며, 성종20년(1489년, 己酉) 8월에 현감 밀양인(밀양인) 손번(孫蕃)이 중건하고 매계(梅溪)조위(曺偉)가 기문을 쓴 것으로 되어있다.

  잘못된 안내문은 언젠가 바로잡아 지겠지만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그런 것을 따지려 함이 아니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누(樓)에 오르니 추풍령(秋風嶺)으로 이어지는 들판에 경부(京釜) 국도와 고속도로가 달리고 그 사이에 철로가 한여름 폭염을 받아 아지랑이처험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파란색 새마을호 열차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다.
  영남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온 시원한 바람이 이 삼복의 더위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한다.

  나에게는 시심(詩心)도 시재(詩才)도 없으니 양원공(楊原公)의 시귀(詩句)를 빌릴 수 밖에---

  弱歲放浪此地遊(약세방랑차지유) 젊은 시절 방랑하며 이곳에서 놀았는데
  跣丸歲月經幾秋(선환세월경기추) 탄환같이 빠른 세월 몇 년이나 지났던고
  蒼樓木追碎今重修(창루추쇄금중수) 옛 정자가 헐어 이제 다시 지으니
  功重使君古諸候(공중사군고제후) 이 곳 수령의 공 옛 제후 같이 무겁도다
  激湍水聲亂驚湃(격단수성난경배) 세찬 물소리 놀라 어지러이 물구비 일고
  遠混陰壑響靈 ?(원혼음학향령뢰) 먼 음침한 골짜기 신비한 소리 메아리치네
  試憑畵欄卷珠簾(시빙화란권주렴) 그림 난간에 기대어 주렴을 걷고 보니
  萬像森羅騁目外(만상삼라빙목외) 삼라만상이 눈앞으로 달려오네
  坐待一更山月吐(좌대일경산월토) 초경까지 앉아있으니 산이 달을 토해놓고
  蟾影婆娑仍媚撫(섬영파사잉미무) 달그림자 너울거리며 곱게 어루만지니
  以手弄之淸可 ?(이수농지청가국) 손으로 잡으면 맑은 달이 잡힐 것만 같애
  足攝銀橋何順數(족섭은교하순수) 은교 밟고 월궁에 가는 것이 이에 따르리(섭=口변)
  人免仰宇宙直窮搜(면앙우주직궁수)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우주를 샅샅이찾아도
  崔灝已去挽難留(최호이거만난류) 최호는 이미 가고 없으니 잡을 수도 없네
  霜枯芳草不復處(상고방초불복처) 서리가 방초를 말리니 다시 무성할수 없고(처= 艸 아래 處)
  只有歷歷淸川流(지유역력청천류) 지금은 맑은 시냇물만 역력히 흐르고 있네
  笛吹何處徹寂廓(적취하처철적곽) 어디서부는 피리소리 적막허공을 꿰뚫으니
  惹起客愁雲莫莫(야기객수운막막) 나그네 시름 구름같이 끝없이 이네
  壁間詩句更起余(벽간시귀경기여) 벽에 걸린 시구가 다시 나의 흥을 일깨워
  欲和高吟頭側鶴(욕화고음두측학) 훌륭한 글귀에 화답하려 학처럼 목을 빼고 이리 저리기웃거리네

  (주1) 은교(銀橋): 중국 당나라 명황(明皇) 때 도사 나공원(羅公遠)이 명황을 모시고 월궁(月宮0으로 갈 때 짚고있던 지팡이를 공중에 던져 은교(銀橋)를 만들어 이를 밟고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말함.

  (주2) 최호(崔灝):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무창(武昌)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에서 시 한수를 써 놓았는데 이백(李白)이 와서 보고 더 좋은 시를 지으려고 애쓰다가 못 짓고 그냥 내려가면서 "眼前有景道不得(안전유경도부득) 崔灝詩在其上頭(최호시재기상두) 즉 눈앞에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도 도(道)를 얻지 못하는 것은(시를 짓지 못하는 것은) 최호의 시가 맨 윗머리에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보더 더 나은 시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백은 돌아가 금능(金陵)의 봉황대(鳳凰臺)에서 시를 지어 이에 대적했다 한다. 최호의 황학루 시에 방초처처(芳草처처) 청천역력(晴天歷歷)일라는 구절이 있어 중국과 조선의 글쓰는 사람들에세 널리 인용되어 왔다.

  양원공(楊原公 휘 淑 王咸)은 자(字)를 차옥(次玉) 호를 몽암(夢庵) 또는 양원(楊原)이라 하며 시호(諡號)는 문장(文莊)이다.
  정확한 생년(生年)은 미상이나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휘 末丁)의 마지막 다섯째 아들로서 바로 형인 연안군(延安君 휘 淑琦)이 세종11년(1429) 생이니 거의 비슷한 연대가 될 것이다.

  단종 원년(1453)에 생진과(生進科)에 장원하였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3년(1457)의 중시(重試)와 12년(1466)의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고 성종7년(1476)에는 대제학 서거정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뽑혔으니 젊은 시절부터 유망한 인재로 우뚝 솟아 있었다.

  역임한 주요 관직으로는 경연(經筵)의 사경(司經: 정7품), 사헌부 감찰(監察: 정6품), 홍문관 응교(應校: 정4품)와 부제학(副提學: 정3품), 성균관 사성(司成: 종3품)과 대사성(大司成: 종2품), 중추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이조 참판(參判: 종2품)을 지냈고, 증직으로는 이조 판서(判書: 정2품) 과 양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이 내려졌다
  외직(外職)으로는 충청(忠靑), 전라(全羅), 함경도(咸鏡道) 관찰사(觀察使=監司: 종2품)를 역임하면서 덕행(德行)과 선정(善政)을 베풀어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에 올라 있고,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과 지례(知禮) 도동서원(道洞書院)에 모셔지고 있다.

  공은 성품이 곧고, 넓고 깊은 학식을 가졌으며 문장이 아름답고 글씨를 잘 썼다고 기록되어 있고, 많은 비명(碑銘), 행장(行狀), 시장(諡狀) 그리고 기문(기문) 들이 비석과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며, 성종16년(1485)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신증동국통감(新增東國通鑑)을 편찬하였다.

  또한 공은 시심(詩心)이 깊어 앞에 소개한 가학루시(駕鶴樓詩) 외에도 동국여지승람에는 시 17수와 기문 6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온양의 온천행궁(溫泉行宮) 직려(直?)로 입직하고 있을 때 임금을 호종해 온 영숙(永叔) 임원준(任元濬)과 수창(酬唱: 시문을 주고 받는 것)하면서 온양의 여덟 가지 좋은 일을 읊은 것 8수와 비인현(庇仁縣)에서 서거정과 비인팔경(庇仁八景)을 읊은 것 8수, 그리고 임실현(任實縣)에서 읊은 한 수 계 17수가 수록되어 있다.
  기문으로는 파주의 화석정(花石亭), 원주의 숭화정(崇化亭), 영광의 망원루(望遠樓), 진도의 벽파정(碧波亭), 서울의 승문원(承文院)과 사복시(司僕寺)등의 창건(創建) 또는 중건(重建) 기문이 있다.

  앞서 소개한 황간의 가학루시의 정확한 창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시문의 내용과 양원공의 행적으로 볼 때 성종20년(1499) 정자를 중건한 직후 공이 충청도 또는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이 곳에 들려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성종20년에 가학루가 중건되었고, 또 공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후 충청도 관찰사도 역임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학이 공중을 둥둥 떠 다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가학루(駕鶴樓)」라 이름 지었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이 누각에 올라 내 자신 학을 탄 듯한 상쾌한 기분으로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양원공의 발자취를 따라 경치좋은 곳에 세워진 정자와 시심이 울어나게 하는 절경들을 책 속에서나마 찾아 훨훨 날아 다녔으니 삼복의 피서법 치고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또 있겠는가?
  정자를 내려오니 해는 벌써 정오를 훨씬 넘어 비로소 시장기를 느끼면서 차를 몰고 또 한번 동국여지승람을 따라 황간 서편의 산양암(山羊岩) 아래 장교천(長橋川)으로 가서 민물고기 매운탕을 먹으니 이곳 황간의 일품(一品)은 이제 빠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끝 (延安李氏宗報 통권 제17호 16쪽)
- 최호의 등황학루시(登黃鶴樓詩) - 황학루에 올라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선인은 황학을 타고 가버리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이 땅에는 그저 텅 빈 황학루만 남았네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복반) 황학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白雲天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유유히 천년을 공중에 떠 있네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력한양수) 맑은 날 강물에 한양의 나무들 역력히 비치고
  芳草處處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향기로운 풀 앵무주에 무성하네(처= 艸 아래 處)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날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드메뇨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강상에 연기 파도처럼 서려 사람을 시름에 잠기게 하네
(연안이씨종보 통권제17호 증보)

  옛날 이 아름다운 황학루 놀던 사람은 황학을 타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주인 없는 빈 황학루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그 하늘에 흰 구름만 떠 유유히 천년의 세월이 흐르고, 물가의 나무들이 맑고 맑은 시냇물에 비치고 호수 복판의 섬 앵무주에는 향기로운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게 한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하루해가 다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다가 문득 해질 무렵 황학루 경치와는 대조적으로 갈 곳조차 없는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돌아 본다. 강 위에 서리는 저녁 연기는 더욱 시름에 잠기게 한다고 읊고 있다.

  (황학루에 얽힌 고사) 무창지(武昌志)에 의하면 옛날 이 곳에 신씨(辛氏)라는 술장수가 있었는데, 몸집이 크고 남루한 몰골의 한 선비가 와서 술을 외상으로 주겠느냐고 물었다. 신씨는 거절하지 않고 큰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반 년이 지났으나 신씨는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남루한 선비에게 술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선비가 술 빚을 갑겠다고 하면서 바구니에 있는 귤 껍질을 벗겨 주막집 벽에다 학을 한마리 그렸더니 곧바로 산 황학(黃鶴)이 되었는데 사람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하면 학이 노래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학춤을 보려고 몰려오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신씨는 거부가 되었다.
  그 뒤 선비가 나타나자 신씨는 은혜를 갚으려고 선비에게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해 드리겠다고 하니 선비는 웃으면서 옷자락에서 피리를 꺼내 불었다. 그러자
  곧 하늘에서 그 황학에 내려와 땅에 앉았다. 선비는 그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가 어디론가 가버렸다. 거부가 된 신씨는 선비와 황학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뜻으로 선비가 황학을 타고 떠난 그 자리에 누각을 짓고 황학루(黃鶴樓)라 이름을 붙였다.


  (金陵 鳳凰臺) 금능은 남경(南京)의 옛 이름. 송나라 원가(元嘉: 424-453) 중에 왕기(王 豈見)이라는 사람이 산에 이상한 새가 모인 것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봉황(鳳凰)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누대(樓臺)를 세우고 봉황대(鳳凰臺)라 불렀다 한다. 지금도 남경시 남쪽에 봉황대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한다.
  무창의 황학루에서 좋은 시를 짓지 못한 이백(李白)이 이 봉환대에 올라 '등금능봉황대(登金陵鳳凰臺)'라는 시를 지어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 권 이십일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 登金陵鳳凰臺(등금능봉황대) - 금능의 봉환대에 올라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봉황대 위에 봉황새가 놀더니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봉황능 가고 봉황대 앞엔 강물만 흐르고 있네
  吳宮花草 土里 幽徑(오궁화초리유경) 오나라 궁전의 화초는 오솔길에 묻혀버렸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진나라 때 귀인들은 낡은 언덕(무덤)을 이루었네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 쯤 솟아 있고
  二水中分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 두 강물이 백로주를 가운데 두고 갈라지네
  總爲浮雲陵蔽日(총위부운능폐일) 뜬구름(간신배)이 해(성총)를 가리고 있으니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당나라 서울, 현 서안)을 볼 수도 없어 사람을 시름에 잠기게 하네

  봉황새가 날아들던 좋은 시절은 가버리고, 아름다은 산천 속에 그 흔적인 봉황대만 의연히 남아있네. 이처럼 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지만 지금 조정에는 간신배(양국충, 고역사 등)들이 성총을 가리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있구나.(이백도 이들 간신배들 때문에 조정에서 쫓겨나 이렇게 정처없이 유랑하는 몸이 된 것이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대하니 마음 한 구석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근심이 생긴다.

  이 시는 위 최호의 등황학루시의 운(韻), 시상(詩想), 시구(詩句)까지 본 따고 있다.

  이백은 황학루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贈韋南陵'(증위남릉: 위남릉에게 주다) 라는 시에서
  "내 또한 그대 위해 황학루(黃鶴樓)를 부숴버릴터이니 그대 또한 나를 위해 앵무주(鸚鵡洲)를 두엎어라"는 구절을 썼는데 丁十팔(정십팔)이라는 사람이 위 이백의 시를 "너무 광방(狂放: 미친 듯이 방만함)하다"고 나무라는 시를 지은 모양이다. 이에 답하여 이백이 '醉後答丁十八以詩기予追碎黃鶴樓(취후답정십팔이시기여추쇄황학루)'라는 시를 써 '李太白集(이태백집)' 19권에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 醉後答丁十八以詩기予追碎黃鶴樓(취후답정십팔이시기여추쇄황학루) - 술 취한 뒤에 정십팔에게 내가 황학루를 부숴버리겠다고 한 것을 나무람에 답하노라

  黃鶴高樓已追碎(황학고루이추쇄) 높이 솟은 황학루 이미 부숴버렸으니
  黃鶴仙人無所依 (황학선인무소의) 황학을 타고 간 선인은 의지할 곳이 없어졌네
  黃鶴上天訴上帝 (황학상천소상제) 황학이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호소하여
  却放黃鶴江南歸 (각방황학강남귀) 도리어 황학을 쫓아 강남으로 도려 보랬네
  神明太守再추飾 (신명태수재추식) 신명한 태수가 나타나 황학루를 다시 고치고 꾸미니
  新圖粉壁環芳 艸아래非 (신도분벽환방비) 흰 벽에 새롭게 그린 (황학의) 그림이 향기로울러라
  一州笑我爲狂客 (일주소아위광객) 온 고울이 나를 미친 친구라 비웃고
  少年往往來相譏 (소년왕왕래상기) 젊은이들이 가끔 와서 (날) 나무라네
  君平簾下誰家子 (군평렴하수가자) 선인에게 신선주를 배운 이는 어느 집 아들이오?
  云詩遼東丁令威 (운시요동정령위) 요동의 정령위라 말하네
  作詩卓我驚逸興 (작시탁아경일흥) 시를 지어 나를 흔드니 몹시 흥미롭고
  白雲堯筆窓前飛 (백운요필창전비) 흰 구름이 그 붓에 감돌며 창 밖에 날았을러라
  待醉明朝酒醒罷 (대취명조주성파) 내일 아침 술 깰 때를 기다려 주구려
  與君爛曼尋春輝 (여군난만심춘휘) 그대와 함께 꽃 만발한 봄빛을 함께 찾아 보자구요

  역자(譯者)는 "이백이 황학루를 부숴버리겠다는 것은 황학과 이를 타고 간 신선이 없이 혼자 속세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안타까와서다. 그러니 황학루를 부숴버리고 나면 황학이 있을 곳이 없으니 옥황상제에게 호소를 하더라도 상제는 듣지 않고 이 땅으로 되돌려 보낼 것이니 있을 곳 없이 들판에서 지낼 것이다. 그 뒤 어느 신명한 태수가 이 고을에 와서 이것이 안타까워서 황학루를 더 잘 지을 것이 아니냐? 그대가 황학루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대는 나의 바른 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내가 술이 취해 있으니 술 깬 다음 내일 만나보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해설을 하고 있다.

첨부10 신정비(神井碑)
沙月 盛 永(부사공 22세손)

온양관광호텔에 있는 신정(神井)과 신정비각(神井碑閣)

  아산시 온양역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 큰 길 가에 온양관광호텔이 보인다. 이 곳이 조선조 때는 온양온천으로 임금이 온천에 행차할 때 묵던 행궁(行宮)이다.

  호텔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주차장인데 주차장 서편 울타리 가에 산듯한 비각 하나가 보인다. 비각 안에는 높이 70Cm, 폭 50Cm 정도의 조그마한 비석이 하나 봉안되어 있는데 ‘신정비(神井碑)’라 부르며 그 옆에 지금은 물도 마르고 깊이도 메워져 얕은 우물이 하나 있는데 난간은 새로 돌로 ‘井’자를 만들어 올려 놓았다. 이것이 ‘신정(神井)’이라 한다고 안내 간판에 쓰여 있다. ‘신비한 샘’이란 뜻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신정비는 세조 때 처음 세워졌다가 성종 때 다시 세운 것이라 하며 비문은 영숙(永叔) 임원준(任元濬: 연산군 때 갑자사화를 유발한 임사홍의 부)이 짓고 글씨는 우리 延李의 양원공(楊原公) 이숙함(李淑王咸)이 쓴 것이라 한다. 오백년이 넘는 긴 세월에 글자가 깎이어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게 마모되었는데 뒤 늦게나마 비각을 세워 풍우를 피하게 하였으니 큰 다행이다.

  동국여지승람 온양편에 수록된 임원준이 쓴 신정비 기문에 따르면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福泉寺: 약수로 유명)에 갔다가(피부병 치료차 간 듯 함, 속리산의 文章臺는 이 때 신하들과 함께 올라 글을 지었다 해서 얻은 이름) 귀경 길에 이 곳 온양 행궁에서 유숙하는데 온천과 온천 중간이 되는 행궁 뜰에서 갑자기 맑고 찬 물이 솟아 나왔다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들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이구동성으로 좋은 징조라 하여 그 이름을 ‘신정(神井)’이라 이름 짓고, 당시 수행했던 임원준이 이를 칭송하는 기문을 쓴 것이다.

  그 후 성종 때 양원 이숙함이 온양 행궁에 입직하고 있을 때 임금이 온양 온천의 행궁에 와서 유숙하면서 신정비를 보고 너무 헐어서 다시 쓰라 해서 역시 수행한 임원준이 기문을 짓고, 이숙함이 썼다고 되어 있다.

  양원공과 임원준은 단종1년(1453) 대제학 신숙주에 의하여 노사신(盧思愼), 어세겸(魚世謙), 정난종(鄭蘭宗)과 함께 다섯 사람이 제4회 호당에 선발되어 같이 공부하였으며, 세조3년(1457) 중시(重試)와 세조12년(1466) 발영시(拔英試)에도 함께 급제하는 등 문학 친구로 매우 친하게 지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양원공과 임원준이 이 때 만나 술 잔을 나누면서 오랜 회포를 풀며 ‘온양팔영(溫陽八詠: 온양의 여덟 가지 시제)으로 행궁상운(行宮祥雲: 행궁 위의 상스러운 구름), 영천서액(靈泉瑞液: 시령스런 온천의 상서로운 온천물), 천주분선(天廚分膳: 임금이 하사한 주방 음식 선물), 신정륵석(神井勒石: 신정에 새긴 빗돌), 광덕조람(廣德朝嵐: 광덕산의 아침 아지랑이), 공곶춘조(貢串春潮: 공곶의 봄 조수), 송령한도(松嶺寒濤: 송령의 찬 파도), 맥롱수파(麥?秀波: 보리밭 이삭 물결) 등을 선정하여 시제로 삼아 시를 증답한 것이 8수가 올라 있다.

  시에 앞서 양원공은 서문에서
  “내가 산수(山?), 영숙(永叔: 임원준의 자)과 같이 온천 행궁의 직려(直廬: 당직)에 입직(入直: 근무)하고 있으면서 때로는 서하(西河), 고양(高陽), 언양(彦陽) 등지의 여러 상공(相公)들과 더불어 왕복 수창(酬唱: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 받음)하며 스스로 그 회포를 풀고 지냈는데 영숙이 그 사이 팔영(八詠)의 시제 얻어 나에게 먼저 고채시(古體詩)를 지으라 하여 장차 화교(和敎: 따뜻한 가르침)의 장본으로 삼으려 하니 그야말로 키질 해 까불면 쭉정이가 먼저 나가는 법이라 이를 보는 자 나의 광참(狂僭: 경망하고 분수 없음)함을 용서하시라”하였다.

  그 중에서 신정과 관련된 신정륵석 시를 옮겨 본다.
神井勒石(신정륵석) 신정에 새긴 빗돌
이숙함 시
  世廟當年此臨行(세묘당년차임행) 세조 당시 (그대가) 이곳에 임행했을 때
  行殿庭心湧神井(행전정심용신정) 행궁 뜰 한가운데서 신정이 솟아났네
  從臣才藝眞第一(종신재예진제일) 호종했던 신하(그대) 그 재예 진정 제일이라
  頌德雄詞信手騁(송덕웅사신수빙) 성덕 칭송한 웅대한 글 그대 손 믿고 달렸네
  可堪石刻今 元刀 金夫(가감석각금완부) 돌에 새긴 글자 벌써 깎이고 떨어져 나가
  二十 歲光陰驚一瞥(입세광음경일별) 이십년 세월이 한 순간임에 놀랐도다
  慈聖心測命重新(자성심측명중신) 자상한 성주 측은해서 새로 중건하라 명하니
  流傳更憑太史筆(유전갱빙태사필) 뒷날 세상에 전하리로다 또다시 태사(임원준)의 붓대에 의지했노라고.

임원준 시
  生逢聖祖誠萬行(생봉성조성만행) 살아서 성조를 뵈온 것은 진실로 만행한 일
  扈從當時到溫井(호종당시도온정) 호종했던 그 당시 온정에 왔었네
  寒泉忽湧兩湯間(한천홀용양탕간) 두 온탕 사이에 찬 샌물 홀연히 솟아 올라
  命臣記事蕪詞騁(명신기사무사빙) 신에게 기하라 명하여 거치른 붓을 달렸네
  未二十年字已 金夫(미이십년자이부) 이십년도 채 안되어 글자 이미 상하였고
  時移事改共驚瞥(시이사개공경별) 세월도 세상사 바뀌니 일순인생 함께 놀랐네
  空장耿耿寸草心(공장경경촌초심) 염려스러운 작은 마음 다시 가다듬어
  水比 淚磨崖重載筆(비루마애중재필) 눈물 지며 돌 갈고 다듬어 거듭 필적 실었네
(延安李氏 이야기 408쪽)
첨부11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 신도비명(神道碑銘)
  李自中國始徒于延(이자중국시도우연) 이씨는 중국에서 건너와 처음 연안으로 옮겨 살았네
  文莊侃侃烈聞甚火單 (문장간간열문심천) 문장공(휘 숙함) 강직하여 매운이름 몹시 빛낫고
  公治文章遂翔王庭 (공치문장수상왕정) 공은 문장을 다스려 드디어 왕정(대궐 마당)에 솟아났네(과거급제)
  衡牙朱組有 金將 璜聲 (형아주조유장황성) 이조와 승정원에 맑은 패옥소리 들렸지
  公隆儒學序我四賢 (공융유학서아사현) 공은 유학을 일으켜 우리나라 사현록에 서문을 쓰고
  沂 水回 大道以昭其傳 (기회대도이소기전) 대도를 거슬러 올라가 그 전통을 밝혔노라
  公有令望元臣交擧 (공유영망원신교거) 공은 높은 명망 있어 원로대신 서로 추천하여
  乃授士師九棘以處 (내수사사구극이처) 마침내 선비의 스승자리 내리시고 구극(삼공육경)의 벼슬 하였도다
  乃卑 金夫 鉞朔方于宣 (내비부월삭방우선) 이어 부월(도끼; 지휘권)을 메고 북방을 베풀어 다스리니
  赫赫天關何任之傳 (혁혁천관하임지전) 빛나는 천관(이조판서)이야 그 임지 어딘들 못가랴?
  公有懿德君子攸友 (공유의덕군자유우) 공은 높은 덕 있었으니 군자의 좋은 벗이었지
  文忠維前文成維後 (문충유전문성유후) 문충공(사암 박순)은 앞이 되고 문성공(율곡 이이)은 뒤가 되니
  褒之揚之引之挽之 (포지양지인지만지) 자랑(칭찬)하고 부추켜서 인도하고 만류했네
  噫 口喜 小人讒言其滋 (희희소인참언기자) 슬프다! 소인들은 헐뜯기 그지없었지
  王明邪正爰削衛社 (왕명사정원삭위사) 왕이 사정(옳고 그름)을 밝히시어 위사공신 이름 깎으실 때
  公作칙書布聞于下 (공작칭서포문우하) 공이 칙서 지어 아래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니
  德音惻 心旦 芻 艸밑에堯 亦泣 (덕음측달추요역읍) 덕음(임금의 말씀)이 간절하고 애닲아 나무꾼도 울었다네
  是非旣定王道乃立 (시비기정왕도내립) 시비가 정해져서 마침내 왕도가 바로서니
  哲人則母 心僉 人則 此밑에言 (철인칙모섬인칙자) 철인에겐 어머니요 간사한 무리들에게는 비난 받네
  刻詩于石百世不侈 (각시우석백세불타) 돌에 시를 새기니 백세 후애도 허물어지지 않으리
첨부12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유년시절(幼年時節) 이야기들
- 후손이 강진-해남 등지에 살게 된 경위 -
  - 청련공의 선친 휘 국형(國衡)은 개령현감을 지낸 현감공(휘 元禮)의 차자(次子)로 거창 모곡동에서 태어나 자랐고, 공의 모친 나주임씨(羅州林氏)와 혼인 한 후 함양으로 분가하여 살았는데 양원공(서울, 파주)의 독자 휘 세문(世文)이 무후하여 계출하였으나 이사하지 않고 함양에 그대로 살았다.

  - 청련공은 중종15년(1520)4월11일 함양 개평촌(우암촌: 현 수동면우명리)에서 태어났다.
  * 공의 조부(휘 元禮)는 개령현감으로 있으면서 진주목사 경임(慶?)을 좌장으로 하여 김일손(金馹孫: 김종직의 수제자), 조위(曺偉: 김종직의 사위)(위 두사람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화를 입음)등과 함께 조정과 영남일원의 문사 32명이 진주 촉석루에 모여 ‘금난계(金蘭契)’라는 문계를 결성하고 주기적으로 모여 풍월을 읊는 회원이었다.(지금도 촉석루 내에는 금난계 현판이 붙어있음)
  현감공은 아마 중국 당나라 때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백(李伯: 李太白)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장자(휘 國權)에게서 난 손자를 ‘작은 이백’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소백(小白)이라 짓고, 차자(휘 國衡)에게서 난 손자를 ‘뒤에 태어난 이백’이란 뜻으로 후백(後白)이라 지었다,
  그래서 후백은 자라서 할아버지 현감공(휘 元禮)의 뜻을 받들어 이백의 호를 따서 호를 청련(靑蓮)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집안에 전해오고 있다.

  - 중종22년(1527) 8세 때 산사에서 공부할 때 경상도 관찰사 방문하여 공을 시험하자 탑반송시(塔畔松詩)를 읊어 주었다.(첨부15 탑반송이야기 참조)

  - 중종23년(1528) 9세 때 부친(휘 國衡)과 모친(나주임씨)가 연이어 상을 당하여 슬프게 통곡하며 가슴을 쳤으나 집상(執喪)하는데는 예법이 조금도 허트러지지 않으니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 고아가 된 공은 백부(伯父 휘 國權)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어리지만 상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몹시 더운 여름이었는데도 경대(상복과 굵은 허리띠)를 벗지 않고 문상객의 조문을 받을 때는 의젓한 성인 같이 거상 중에 지켜야 할 예법을 아주 작은 것 까지도 어른들에게 물어보고 행동했다.
  하루는 종장댁(宗長宅 ?)갔는데 감주(甘酒)를 내오자 마시지 않자 그 까닭을 물으니 “비록 감주이나 그 이름에 주(酒)자가 있으니 감히 마실 수거 없습니다”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경탄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 중종26년(1531) 12세 때 백부의 명으로 표인(表寅: 은둔거사)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엇는데 학우들이 옥계(玉溪) 노진(盧 示眞), 목사(牧使) 양희 (梁喜), 덕계(德溪) 오건(吳健), 한금산(韓錦山) 등 15인이었는데 공이 가장 연소하여 항상 말석에 앉아 강론을 들었다.
  그러나 공은 다른 사람들이 배우는 책을 보지도 않고 외우는 지라 선생이 불러 시험하니 한 글자도 착오가 없었다고 한다. 표공이 놀라 말하기를
  “옛날에도 이와 같은 아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하였다 한다.

  - 중종29년(1534) 15세 때 백부를 따라 화개, 악양으로 뱃놀이 가서 지리산 운람(雲嵐)을 보고 시를 읊어 보라고 하자 즉석에서 부소상팔경(賦瀟湘八景)을 읊었다고 한다(첨부18 소상팔경 시조 이야기 참조)

  - 중종30년(1535) 16세 때 금릉(金陵: 지금의 강진) 친정에 가 있는 계조모(系祖母)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 系祖父 吏判公 휘 世文의 配)를 모시기 위하여 금릉으로 가서 머물러 조모를 봉양하였다. 공의 계(系) 증조부인 양원공(楊原公 휘 淑 王咸)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군수 남양인 홍구서(洪九敍)의 딸을 돋자 이판공(휘 世文)과 혼인 시겼으나 설하에 자녀가 없이 이판공이 졸하자 서울에서 친정인 금릉으로 내려가 있었다.

  - 중종31년(1536)-중종32년(1537) 17-18세 때 조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니 마을에서 모두가 칭찬하였다. 공은 조모를 모시면서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중종33년(1538) 19세 때 보익공신 이기(李 艸 아래 己)가 금릉에 귀양와 있었는데 공이 그가 글을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가 며칠 안되어 돌아와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그의 사람됨을 보니 털끝 만한 작은 일도 감추고 사람들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군자의 행사가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며 뒤로는 발 길을 끊고 찾아가지 않앗다.

  - 중종35년(1540) 21세 때 조모 남양홍씨의 질손(姪孫)이며 군수 홍처성 딸과 혼인하였다.

  - 중종37년(1542) 23세 때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서울에 올라가니 공의 이름을 듣고 문인학사들이 찾아와 명공거경(名公巨卿)들과 두루 사귀게 되었다.

  - 중종38년(1543) 24세 때 공의 부부가 금릉 박산촌(?)에 집을 짓고 조모를 모셔와 여기서 살았다.

  - 인종 원년(1544)-명종원년(1545) 25-26세 때 공은 정주학에 뜻을 두고 정자와 주자의 여러 저서를 열심히 탐독하여 명종2년(1546) 27세 때 사마시(司馬試: 進士試)에 급제 하였다. 이해 장자 선경(善慶)이 출생하였다.

  이렇게 해서 영남에서 태어나 자란 청련공이 강진으로 가게 되었고, 그 후손들이 강진-해남 등지에 퍼져 살게 되었다.
첨부13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어전상소(御前上疏)
  - 선조원년(1567) 48세 동부승지 때
  '수령들이 사사로이 궁중에 재물을 헌납하는 폐단’을 금지하도록 청하는 계를 올렸다.
  『검약하면 궁중에 필요한 물자는 (수령들이 재물을 바치는 등)번거럽게 하지 않고도 됩니다. 만약 임금이 재물을 모으는데 뜻을 둔다면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걷우어들이는 신하는 의례 자기가 먼저 재산을 차지하게 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지 않고 성심으로 나라에 바치려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겟습니까? 궁중에 재물이 부족하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먼저 민심을 잃을까 걱정해야 합니다. 백성의 재물을 가렴하여 바치는 신하를 중용하게 되면 재물을 얻는 것은 얼마 되지도 않고 민심을 잃는 것은 매우 많게 됩니다.근래 외부에서 전하는 말은 들으면 수령들이 사헌(私獻)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사헌을 빙자하여 다른 곳에 재물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선대왕 때는 백성을 덕화(德化)하고 다스림이 청명(淸明)하였는데 지금 어떻게 이런 말이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이러한 일은 엄중히 막고 근원을 살펴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수령이 비록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으로 재물을 헌납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하고, 법으로 금하는 데 어떻게 사헌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시냇물 따라 굽은 나쁜 길을 가는 것은 모두 자기를 위한 것이고,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은 임금의 총애를 얻고자 하는 일입니다.』

  - 선조원년(1568) 49세 대사헌 때 박원근의 아우 박신원이 청송부사로 임명되었는데 보잘 것 없는 곳이라며 부임하기 싫어서 뒤로 몰래 간관들에게 청탁하고 병이 났다고 누워 있으니 다른 사람으로 부사 임명을 거론하자 승지 정지연이 계를 올려 간관들의 잘못이라고 논박하자 사헌부, 사간원 양사의 간관들이 어전에서 정지연이 간관의 말을 저지억압한다며 역공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은 간관의 맨 윗자리 대사헌 직위에 있었지만 이에 영합하지 않고 홀로
  “비록 간관의 말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어찌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상감께 아뢰기를
  『대간이란 원래 언론의 소임을 맡고 있으나 대현(大賢)이 아닌 바에야 어찌 잘못한 말이 없겠으며, 말을 해서 혹 잘못됬다면 그 말로 인해 정사에 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인데 어찌 화 낼 일이 되겠습니까?하물며 임금의 후설(喉舌)노릇을 하는 승지는 직책이 무거우니 보통 관리들과 비교가 안됩니다. 그의 말을 신중하고 자세히 살피서 그의 말대로 간관들의 말이 틀렸다면 앞으로 잘못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근심하고 강개(慷慨)하는 풍조가 사라지고 영합하는 병폐만 생겨나 온 세상이 아첨만 일삼을 것입니다. 대신이 혹 미진한 것이 있어도 ‘대신의 말인데 어찌 어길 수가 있겠느냐?’하고, 대간의 말이 혹 잘못을 저질러도 ‘대간의 말을 어떻게 논박할 수 있느냐?’라고 하는 풍조가 계속 쌓여 나가면 얼마 안가서 자사(子思)의 말씀처럼 아무도 감히 바로잡지 못해 나라일이 잘못되어간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임금이 공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공은 곧 대사헌을 사직하였다.

  - 선조2년(1569) 50세 도승지 때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고자 임금이 특지를 내려 홍문관과 양사에서 차론을 올려 남곤에 대한 시비를 따지게 하였다.
  공이 글로써 주상하기를
  『소차를 올리는 것은 공론이 격화되어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와야 하는데 임금의 뜻을 받아 사건을 상소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하지 않던 일로서 그 일이 비록 좋은 일이고논의가 비록 공정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후일에 폐단이 있을까 두려우며 오직 옥당과 양사에서 그(남곤) 죄를 조목별로 예거하는 것은 무방할까 합니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계의 뜻이 지당하다고 하고 받아들였다.
(靑蓮公 年譜에서)
첨부14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공도일생(公道一生)
- 구하는 자 만이 얻게 된다면 이는 공도가 아니라(若求者得之則非公道者也) -
鉉 敦(부사공 21세손), 盛 永(부사공 22세손)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은 관직에 나가 초년에 호당에 뽑힐 만큼 어리 때부터 영특하고, 시문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리에 녹선된 청렴결백한 관리로 그 이름이 높이 평가되어 왔지만 뭐니 뭐니 해도 청련공을 놓고는 ‘공도(公道)를 지킨 바른 선비정신’을 그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청련공이 공직을 수행하면서 얼마나 원칙과 정도를 중시하였는지는 여러 일화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양관 대제학을 지낸 황경원(黃景源)이 찬한 청령공 신도비문에서 청련공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공은 기상이 수려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꿋꿋하게 부동(不動)하는 듯 하고, 그 지킴(守堅)이 굳어 누구도 도저히 옮길 수 없는 듯 하였다. 다른 사람의 착한 말을 들으면 주저하지 않고 곧 바로 이를 따르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사람과 사귐에 있어서 늙어 가면서 더욱 그 정을 두텁게 하였으며, 자기 몸을 다스림이 있어서는 청렴결백하여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마치 포의(布衣: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의 선비와 같았으나 사방에서 보내오는 선물(뇌물)은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하였다.

  청련공이 선조2년(1569) 도승지로 입궐한 후로는 하루 종일 단정하고 엄숙하게 앉아 있으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이었다. 그래서 궁중은 숙연하여 감히 큰 소리로 떠들거나 하는 사람이 없고, 후궁과 그 시녀들도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이모가 도승지로 있으니 말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선조7년(1574)에 임금이 박순(朴淳)에게
  “형조판서에 적임자를 얻지 못해서 걱정인데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적임자를 천거하기 바라오” 하였다. 박순이 나와 동료들과 상의하여 임금에게 청련공을 추천하면서
  “증자(曾子)가 말한바 ‘육척(六尺)의 고자(孤子)를 맡길만 하고, 백리의 명을 부탁할 만한 사람(托六尺之孤寄百里之命)’은 바로 이모(청련공)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하였다.

  선조8년 청련공이 함경도 관찰사, 김계휘가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이율곡 선생이 “이모(청련공)와 김계휘는 조정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려 말하기를
  “이모(청련공)와 김계휘는 법전과 문장에 밝고, 시무(時務: 당 면한 일)에 통달한 사람이니 마땅히 조정에 머물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정의 일을 하게 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아 청련공은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관찰사 이후백이 변경의 각 진영 순시에 나섰을 때의 일인데 변경의 장수들이 벌로 형장을 맞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이순신도 초년으로 함경도 변경의 도둑떼(주로 여진족)를 감시하는 변경의 한 진영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관찰사가 이순신의 진영에 도착하자 이미 서로의 공명정대함과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는 터라 두 사람은 서로 만남을 기뻐하며 즐겁게 이야기 하였다. 먼저 이순신이 말하기를
  “사도(司道: 관찰사를 말함)의 형장(刑杖)이 자못 엄하다 하더군요?”라고 하니 청련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 말도 맞는 말이기는 하나 내 어찌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고 형장을 치겠는가” 하였다.(충무공전서)

  청련공이 말년에 정승의 물망에 오르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청련공은 후에 붕당에서 서인의 거두가 된 심의겸과는 명종18년(1563) 대제학 홍섬(洪暹)에 의하여 호당에 뽑혀서 함께 공부한 사이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심의겸을 배척하는 김효원(후에 동인의 거두가 됨)은 청련공도 함께 경계하였다.
  그래서 김효원이 말하기를
  “이모(청련공)는 육경(판서)의 재목이나 만약 그가 재상(정승)이 된다면 내가 탄핵하겠다”라고 하였는데 이율곡 선생이 이 말을 듣고
  “이모(청련공)가 사람을 포용하지는 못하나 지금 이 시기에 판서 중에서 이모보다 더 나은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비록 그를 재상을 시킨다 해도 저 김효원 따위가 어떻게 그를 탄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조선조의 관직을 오늘날과 비교하면 판서는 정해진 법령을 시행하는 각 부 장관에 해당하고, 정승은 여러 의견을 모아 정책을 입안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는 소위 정치가에 해당한다.
  청련공은 형조(法律, 詞訟), 이조(文選, 勳封, 考課), 호조(戶口, 貢賦, 田糧) 판서를 지냈다. 이들 직책은 예조나 병조 그리고 공조 보다도 공도를 중시하여 원리원칙을 요구하는 직책이었다. 율곡선생이 청련공을 ‘사람을 포용하지는 못하나---’한 것도 청련공이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얼마나 공도를 지켰는가를 반증해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선조9년(1576) 청령공이 함경도 관찰사에서 돌아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공은 사람을 등용할 때마다 두루 아랫사람에게 물어보고 의론이 일치한 후에야 임금에게 추천하여 등용하였다.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을 경우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가 주상을 속였다”고 말하면서 후회하였다 한다.
  또 청련공은 어느 직책보다도 공도(公道)가 요구되는 동전(東銓: 문관을 전형 하는 이조판서)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공도를 숭상하여 인사 청탁을 받거나 뇌물을 받지 않았다. 비록 절친한 친구라 할 지라도 만약 자주 와 그를 살피면 좋지 않게 생각하였다.

  하루는 족인(族人: 종씨 일가) 한 사람이 찾아 와 이런 저런 말 끝에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였다. 청련공은 금새 낯 빛이 변하면서 ‘효렴록’(孝廉錄: 효행이 있고 마음이 결백한 사람을 적은 명부)라 적힌 책을 내 보이는데 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 족인의 이름도 그 속에 적혀 있었다. 청련공이 말하기를
  “내가 자네의 이름을 여기에 기록하고 장차 천거하려 하였는데 지금 자네가 관직을 구하는 말을 하였으니 ‘만약 (관직을)구하는 자 만이 (관직을)얻게 된다면 이는 공도(公道)가 아닐세(若求者得之則非公道者也). 애석하다. 자네가 만일 그(관직을 구하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멀지 않아 벼슬을 하게 될 것이었는데” 하였다.(大東野乘 栗谷 李珥撰 石潭日記와 청련공 신도비문에 있는 이야기)

  선조11년(1578) 청령공 이후백이 59세로 고향 함양(부모 묘소)에 성묘 갔다가 병을 얻어 졸하였다. 부음을 들은 율곡 선생이 말하기를
  “이모(청련공)는 관리로 있을 때 그 직분을 다하였으며 몸가짐이 청고하고 벼슬이 육경(판서)의 지위에 올랐으나 살림이 가난하고 소박하기가 유생과 같았고. 사방에서 오는 뇌물을 일체 받지 안 했으며 손님이 와도 술상이 냉담하였으니 한창 정승으로 들어갈 물망에 올랐는데 서거하니 사림(辭林)이 몹시 아까워하며 이제 정2품의 지위에는 (정승에) 앉을 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청련공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선조21년(1588)에 종계변무에 따른 공으로 광국공신 책록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숙종22년(1696)에 시호 문청(文淸)이 내려졌는데 문(文)은 근학호문(勤學好問) 즉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했음이요, 청(淸)은 피달불의(避達不義) 즉 이롭지 않는 것은 피하고 멀리하였다는 뜻이다. 즉 공도(公道)를 지켰다는 뜻이다.
(延安李氏 이야기 139쪽)
첨부15 종계변무(宗系辨誣) 이야기
沙月 盛 永(부사공 22세손)

  선조24년(1596)‘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 하는 공신책록이 있었는데 통상적으로 ‘광국공신’이라 한다. 광국공신 에는 1등 3인, 2등 7인, 3등 9인 계19인이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그 중 2등 공신에 청련공(靑蓮公) 이후백(李後白)이 포함되어 있다.

  광국공신(光國功臣)이란 중국 명 나라의 여러 공식 문서에 태조 이성계의 조상에 관한 종계(宗系)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186년의 긴 세월에 걸쳐 바로잡는데 공이 큰 사람에게 내린 공신책록이다.

  일의 발단은 태조3년(1394)에 명 나라 사신 황영기(黃永奇) 등 세 사람이 조선에 와서 해악산천(海岳山川)의 제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고제축문 (告祭祝文) 내용중에 ‘고려의 배신(陪臣: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권세를 부리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後孫)인 성계(成桂)는 云云’하는 구절이 있어 이 명사(明使) 편에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변무(辨誣)하는 글을 명 나라로 보냈다.

  명사(明使)의 고제축문에 이성계의 조상이라고 지칭한 이인임(李仁任)은 고려우왕때 간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의 손자이다. 조부의 문벌에 힘입어 벼슬에 나아가 서북면순문사(西北面巡問使) 겸 사경윤(西京尹: 평양총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좌시중(左侍中), 수시중(守侍中)에 올라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피살 된 후 태후와 경복흥(慶復興) 등은 공민왕의 아들 우(禑)가 신돈의 혈통으로 의심 받고 있기 때문에 정통 혈통의 종친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이인임은 이를 물리치고 우왕(禑王)을 세워 우왕의 우대를 받으며 정권을 잡고 임견미, 염홍방 등과 붕당을 이루어 비정(秕政: 惡政, 썩어서 몹시 어지러워진 정치)을 감행하고, 충신을 모함하여 몰아내고 자기세력을 키우며, 매관매직을 자행하다가 도가 지나쳐 경산부(京山府: 전남 화순 동복)에 안치되고 친척과 당파 전원이 귀양가거나 참형을 당하였다.

  참고로 태조 이성계의 본관이 전주이씨(全州李氏)로서 부(父)는 이자춘 (李子春)으로 환조(桓祖)로 추존되었고, 조부(祖父)는 이춘(李椿)으로 도조 (度祖), 증조(曾祖)는 이행리(李行里)로 익조(翼祖), 고조(高祖)는 이안사 (李安社)로 목조(穆祖)로 추존 되어 이인임과는 혈통이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런데 명 나라 사신이 고제축문에 위와 같이 역사에 극히 부정적인 인물 이인임의 후손이라 하였으니 조선국 왕통의 체면에 먹칠을 한 것이라 조선의 온 조정이 발 벗고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 태종 2년(1402)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온 조온(趙溫), 공부(孔俯) 등이 고하기를 명(明)의 조훈조장(祖訓條章)에 ‘이성계의 종계 (宗系)가 이인임의 후손 으로 되어 있다’고 아뢰었고, 그 후 대명회전 (大明會典)에도 이렇게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로부터 태종-선조간 12대에 걸쳐 15회의 사신을 보내는 등 186년 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선조22년(1599)에 종계를 바로 잡고, 2년 뒤인 선조 24년에 그 동안 종계를 바로잡는데 공이 큰 19인을 골라 輸忠貢誠翼謨修紀 光國功臣(수충공성익모수기 광국공신)』(약칭: 광국공신)으로 책록한 것이다.

  종계변무 사신 현황
  1회 태종3년(1403) 정사 이 빈(李彬), 부사 민무휼(閔無恤), 종계변무주청사
  2회 중종12년(1517) 정사 이계맹(李繼孟), 부사 이사균(李思鈞), 서장관 이지방(李之芳), 책봉주청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3회 중종13년(1518) 정사 남 곤(南 袞), 부사 이 자(李자), 서장관 한 충(韓 忠), 종계변무주청사
  4회 중종31년(1536) 정사 송 겸(宋겸), 하성절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5회 중종34년(1539) 정사 권 발(權撥), 부사 임 권(任權), 동지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6회 중종35년(1540) 정사 김인손(金麟孫), 부사 임백령(林百齡), 사은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7회 명종6년(1551) 정사 한 두(韓두), 동지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8회 명종10년(1555) 정사 정 유(鄭裕), 동지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9회 선조6년(1573) 정사 이후백(李後白), 부사 윤근수(尹根壽), 서장관 윤탁연(尹卓然), 종계변무주청사
  10회 선조7년(1574) 정사 안자유(安自裕), 서장관이언유(李彦愉), 동지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11회 선조10년(1577) 정사 윤두수(尹斗壽), 서장관김성일(金誠一), 사은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12회 선조14년(1581) 정사 김계휘(金繼輝), 서장관고경명(高敬命), 종계변무주청사
  13회 선조17년(1584) 정사 황정혹(黃廷或), 서장관한응인(韓應寅), 종계변무주청사
  14회 선조20년(1587) 정사 유 홍(兪泓), 서장관윤 섬(尹暹), 사은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15회 선조22년(1589) 정사 정 탁(鄭琢), 부사 권극지(權克智), 사은사 겸 종계변무주청사
      * 제9회 정사 이후백은 청련공이고, 제15화 부사 권극지는 월사(휘 廷龜)의 장인이다.

  참고로 조선조 때 중국에 보내는 사신은 정기사절에
    정조사(正朝使) : 정월 초하루에 중국 황제를 배알하는 사절, 세배사절
    성절사(聖節使) : 중국 황제의 탄신일 경축사절
    천추사(千秋使) : 중국 황후의 탄신일 경축사절
    동지사(冬至使) : 동지를 전후해서 보내는 사절 가 있고,

  임시사절에는
    사은사(謝恩使) : 중국 황제가 호의를 베풀었을 때 감사하는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주청사(奏請使) 또는 진주사(陳奏使) : 중국 황제에게 상주할 일이나 보고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사절
    진하사(進賀使) : 중국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려고 보내는 사절
    진위사(進慰使) 또는 진향사(進香使) : 중국 황실의 상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변무사(辯誣使): 중국의 오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참핵사(參?使): 조, 중간에 공동 논의 할 사항이 있을 때 보내는 사절 등이 있다.
        *종계변무사신은 임시사절의 변무사(辯誣使)에 해당한다.

  선조24년(1591)에 종계변무에 따른 공로자 19인에게 공신책록을 하였는데 공신명(功臣名)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며 보통 약해서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한다.

  광국공신 책록(光國功臣冊錄)현황(淸選考)
  1등(3인) 윤근수(尹根壽), 황정혹(黃廷或), 유홍(兪泓)
  2등(7인) 홍성민(洪聖民),이후백(李後白), 윤두수(尹斗壽), 한응인(韓應寅), 윤섬(尹暹), 윤형(尹炯), 홍순언(洪純彦)
  3등(9인) 김주(金澍),이양원(李陽元),황림(黃琳),윤탁연(尹卓然) 정철(鄭澈), 이산해(李山海), 기대승(奇大升), 유성룡(柳成龍) 최황(崔滉)
      * 청련공이 정사로 간 사절은 정사 이후백(2등)을 비롯하여, 부사 은근수(1등), 서장관 윤탁연(3등) 그리고 역관 홍순원(2등) 네사람이 녹훈되었다. 역관 홍순언이 광국공신 2등에 책록된 이야기는 이성영홈페이지 www.sungyoung.net >> 옛날이야기에 있음.

  종계변무는 태종 때부터 명종 때까지 8회의 사신을 보내 변무하였으나 그 때 마다 개정하겠다고 약속은 하였으나 내심 개정할 생각이 없는지 차일 피일하며 개정하지 않아서 개정된 글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가 즉위한지 5년이 지난 어느날 임금이 개탄하여 말하기를
  “나라의 종계가 무고를 받은 지 200년이 되는데 어찌 하루라도 누워서 편안히 쉬며 이 일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사신을 엄선하여 혈성(血誠)을 기울여 주청해서 분명하게 잘 못을 가리도록 만전을 기하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선조임금의 애절한 유시를 받들 수 있는 사람을 심사숙고하여 찾은 것이 이후백이었다. 그는 홍문관, 예문관 제학(提學: 종2품)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종2품)를 겸하고 있었다.

  이후백이 제학으로 선발 될 때의 일이다. 대제학 노수신이 물러나려 하면서 후임 대제학을 선발하여 천거하려고 물망이 있는 사람의 명단을 갖다 놓고 삼정승과 이판 박승준, 호판 정종영, 이참 원혼 등 여섯 사람에게 마땅한 사람의 이름 위에 동그라미를 치게 하였더니 이후백과 김귀영이 똑같이 6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졌는데 김귀영이 대제학이 되고, 이후백이 제학이 되었다. 조정의 여론은 이를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제학 이후백을 정사로 임명하고, 부사에 대사성 윤근수, 서장관에 예조좌랑 윤탁연을 임명하여 최선의 인원으로 변무사를 편성하였다.(후에 정사 부사, 서장관 3인과 역관 홍순언까지 4인이 광국공신에 책록되었음)

  변무사신은 선조6년(1573) 2월28일 출발하였는데 구체적인 임무는 종계 (宗系)의 개정(改正)과 악명(惡名) 변무(辯誣)의 사정(事情)을 세종황제실록 (世宗皇帝實錄)과 속수회전신서(續修會典新書: 새로 개정 편수중인 대명회전)에 자세하게 기록하여 주도록 청원하는 것이었다.

  사신들은 북경에 도착하자 이후백은 직접 나서 관련부서의 요원들을 지성으로 설득하였다. 결과 이 업무의 주무자인 예부상서(禮部尙書: 조선의 경우 예조판서) 육수성(六樹聲)이 이후백의 간청에 감동하여 즉시 황제에게 진주문을 갖추어 세종실록에 기재하고, 새로 재편중인 대명회전에 넣을 것을 주상하니 황제가 마침내 칙서를 내려

  “너의 조상이 오랫동안 좋지 못한 누명을 썼는데 우리 역대 황제의 굽어 살피심에 힘입어 누명을 깨끗이 씻고 사실이 바로 잡혔다. 이 사실을 찬수함에 전후의 주사를 두루 빠짐없이 채록하여 영구히 후세에 드리우게 하노라. 짐은 너의 나라가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고 또 사건이 군신의 대의에 관한 일이니 특히 너의 소청을 윤허하고 즉시 명을 내려 사관들에게 초본을 보내어 빠짐없이 사실을 숙조실록에 기재하도록 하고, 후일 신회전을 편수할 때를 기다려 누명을 씻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는 너희들 조상의 간절한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다” 하였다.

  사신 일행은 9월 16일 위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임금이 법가를 갖추고 교외로 나와 맞이하고, 종묘에 고하고 경사에 행하는 사면령을 내렸다. 이후백에게는 가의대부(嘉義大夫: 조2품 상) 가자를 내리고, 밭 30결과 노비 5명을 내렸다 한다.

  선조21년(1588) 사은사로 북경에 갔던 유흥이 돌아오면서 완성된 대명회전과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옴으로서 180여년간의 종계변무가 끝났다. 3년 뒤 선조24년(1591)에 종계변무에 공이 큰 19사람을 뽑아 광국공신에 책록한 것이다.

  이후백은 선조 11년(1578)에 졸한지 13년 후인 선조24년(1591)에 2등공신에 추록하고, 좌찬성과 대제학을 증직하였다. 또 이후백과 함께 사신으로 간 부사 윤근수는 1등, 윤탁연은 3등, 그리고 역관으로 갔던 홍순언이 또한 2등에 녹훈됨으로써 전후 15차의 사신 중에서 공로가 가장 큰 것을 인정 받은 것이다.

  (추가) 정사였던 청련공이 2등인 반면 부사였던 윤근수가 1등에 책록된 것은 공신 책록 당시 청련공은 졸한 지 13년이 지났고, 윤근수는 살아 있었으며 그의 2등공신에 녹훈된 형 윤두수가 모사꾼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시기라 공정한 포상이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됨
(延安李氏 이야기 283쪽)
첨부16 탑반송(塔畔松) 이야기
沙月 盛 永(부사공 22세손)
탑반송(탑반송)
一尺靑松塔畔栽(일척청송탑반재)
塔高松短不相齊(탑고송단불상제)
傍人莫怪靑松短(방인막괴청송단)
他日松高塔反低(타일송고탑반저)

탑 둘레에 심은 소나무
작은 소나무 탑 둘레에 심으니
탑은 높고 솔은 낮아 서로 가지른 하지 (어울리지) 않네
사람들아 소나무 낮다고 탓하지 말라
후일 소나무는 높고 탑이 도리어 낮을 것이니


  이 시는 조선 명종-선조간에 살면서 이조판서까지 지내고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청련 이후백이 12살 때 어떤 계기가 있어 지은 시다.

  이후백이 함양(개평동)에 살다가 9세 되던 해에 괴질이 유행하여 부모가 한꺼번에 죽고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16세까지 이웃 고을 거창에 있는 백부(伯父: 李國權, 縣監) 밑에 의탁하였는데 어찌나 총명한지 먼 고을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이후백의 이름을 ‘後白(후백)’이라 지은 것은 개령현감(開寧縣監: 현 김천시 계령면 일대)을 지내면서 중앙과 영남 일원의 문사(文士)들이 중국의 진나라 왕희지 등의 문계 난정계를 본 따서 결성하여 진주 촉석루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풍월을 읊고 친목을 돈독히 했던 진양수계(晉陽修契) 금난계(金蘭契)의 회원이던 조부 이원례(李元禮)가 손자 이후백이 중국 당나라 때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백(李白: 자 太白, 호 靑蓮)을 닮아서 시문을 잘하라는 소망을 담아서 ‘뒤에 태어난 이백’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후백은 이러한 조부의 충정에 보답하듯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공부와 시 짓기를 잘 하였다. 문집 ‘靑蓮集(청련집)’에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호를‘靑蓮(청련)’이라 한 것도 조부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여 이백의 호 청련(靑蓮)을 그대로 취한 것이다.

  이후백이 12세쯤에 절에 가서 글공부를 하고 있는데 근처를 지나던 경상도 관찰사가 이후백이 총명하다는 것과 가까운 절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만나 시험 해 볼 생각으로 찾아왔다.

  관찰사가 주위를 둘러보니 절의 탑 둘레에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소나무가 보여서 시제를 ‘탑반송(塔畔松 ? 탑 둘레에 심은 소나무)’이라고 냈더니 이후백이 곧 답하여 위의 시를 지은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이 시에서 탑은 관찰사를 지칭하고, 소나무는 이후백 자신을 지칭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시의 뜻을 음미해 보면
  ‘지금은 탑(관찰사)이 높고 소나무(이후백)는 작지만, 소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언젠가는 탑 높이를 능가할 것이다. 그 때는 소나무가 높고 탑이 도리어 낮게 될 것이라’는 어린 이후백의 패기와 야망에 찬 시다.

  비록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백부에게 의탁한 불우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이 시에서 보여준 늠늠한 기상을 간직하고 자라서 시문에 능하고, 사리에 밝고 성정이 곧고 청백하여 관직에 나아가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59세로 단명하여 정승을 눈앞에 두고 관직은 판서로 끝났지만 나라에서는 그의 청렴결백과 문장과 공적을 인정하여 그가 죽은 후에 나라에서는 청백리에 녹선(錄選)하고 증직으로 양관 대제학과 시호 문청(文淸)을 내렸다. 끝
(延安李氏 이야기 413쪽)
첨부17 범마(犯馬)와 퇴고(堆鼓)
沙月 盛 永(부사공 22세손)
犯馬(범마) 행차길을 범하다.
遠郊斜日眩西東(원교사일현서동) 먼 들판 저녁 햇살 동서로 어지럽고
  撲面塵沙滾北風(박면진사곤북풍) 세찬 북녘바람 모래먼지 얼굴 때리네
  誤觸牙旌知不恨(오촉아정지불한) 대감 행차 범하였지만 후회는 없다오
  浪仙從此識韓公(낭선종차식한공) 낭선도 이런 일로 한문공을 알았으니

  * 이시에서 낭선(浪仙)은 중국 당나라 때 시인 가도(賈島)를 말하고, 한공(韓公)은 역시 동 시대 대문장가 퇴지(退之) 한유(韓愈)를 말한다.

  이 시는 청련공 이후백이 아직 벼슬에 오르지 못한 포의(布衣) 시절에 지은 시인데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 금능(金陵: 지금의 전남 강진)에서 조모님을 모시고 주경야독(晝耕夜讀) 하면서 학문에 정진할 때가 아닌가 싶다.

  또 누구의 행차를 범했는지 모르겠으나 저녁 햇살과 세찬 북녁 바람을 핑계하여 시 한 수 지어서 정중히 사과하는 시인데 중국 당나라 때 퇴지(退之) 한유(韓愈)와 낭인 가도(賈島)와의 고사를 들어 넌지시 범마한 것을 선처해 줄 것을 은유적으로 청하고 있다. 참으로 마음의 여유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 시에 나오는 한퇴지와 가도의 고사 이야기는 이러하다.
  중국 당나라 때 가도(賈島)라는 시인이 서울 장안(長安)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의 일이다. 나귀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시상이 하나 떠 올라서 나귀등에서 한 수 지었다.

  閑居少隣竝(한거소린병) 인가 드문 곳에 한가한 집 있는데
  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풀 무성한 길이 거친 정원으로 나 있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연못 가 나무에서 잠자고
  僧鼓月下門(승고월하문) 중은 달빛 아래 사립문을 두드리네

  그런데 가도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두드린다’는 뜻의 鼓(고)자 보다 ‘민다’는 뜻의 推(퇴)자로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두 글자를 놓고 골돌히 생각하며 “推(퇴)?”, “鼓(고)?”, “推(퇴)?”,”鼓(고)?”--- 하면서 무아경에 빠져서 정신 없이 가다가 그만 어떤 귀인(貴人)의 행차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서 행차 길을 범한 죄로 가도는 귀인의 앞으로 끌려와 문초를 받게 되었는데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듣고 있던 귀인은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역시 ‘민다’는 뜻의 堆(퇴)자 보다 ‘두드린다’는 뜻의 鼓(고)자가 좋겠군!” 하고 가도와 나란히 행차를 계속하며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았고,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친한 문학 친구가 되었다 한다.

  그 행차의 귀인은 중국 문학의 황금기라 하는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의 문장의 거장들 즉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대 문장가이며 당시 당나라 경조윤(京兆尹)으로 있던 한유(韓愈: 字 退之, 諡號 文公)였다.

  이 일로 가도는 한퇴지(韓退之)와 같은 대 문장가를 친구로 삼게 되었고, 이 때부터 글의 문장을 다듬고 고친다는 뜻으로 비슷한 말이라도 어느 것이 더 적절한가를 여러 번 생각하고 살피는 것을 ‘堆鼓(퇴고)’라고 하는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생겨났다. ‘민다고 할 것인가, 두드린다 할 것인가’라는 뜻의 ‘堆鼓(퇴고)’‘글 다듬기’라는 뜻이 된 것이다. 끝
(延安李氏 이야기 419쪽)
첨부18 소상팔경(瀟湘八景) 시조
沙月 盛 永(부사공 22세손)
  중국의 명승지 중에 손꼽히는 곳 중에 하나가 장강(양자강) 하류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에 양자강의 지류인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이른바 소상강(瀟湘江) 지역이다.

  소상강은 경치도 아름답지만 소상반죽(瀟湘班竹)으로도 유명하다. 옛날 중국의 성군 순임금이 남쪽 창오지방을 순시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요임금의 딸로서 순임금의 두 왕비가 된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이 곳 소상강까지 와서 슬피 울었다.
  이 때 두 왕비가 흘린 눈물이 강가에 무성한 대나무에 떨어져 얼룩무늬 가 생겨났는데 이를 사람들이 소산반죽이라 부르고, ‘슬픈 일’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소상강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 중에서 사람들이 여덟 개를 뽑아 소상팔경(瀟湘八景)이라 불러왔다.
  (1) 평사낙안(平沙落雁) 넓고 넓은 모래펄에 기러기가 내려 앉는 풍경
  (2)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수와 상강에 밤비 내리는 풍경
  (3) 원포귀범(遠浦歸帆) 동정호 고기잡이 배가 먼 포구로 돌아오는 풍경
  (4) 동정추월(洞庭秋月) 바다같이 망망한 동정호에 가을달이 떠 있는 풍경
  (5) 산시청람(山市靑嵐) 첩첩산중 맑은 날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 풍경
  (6) 어촌석조(漁村夕照) 동정호 어촌에 저녁 해가 떨어지는 풍경
  (7) 연사만종(煙寺晩鐘) 연기 자욱한 산사에 저녁 종소리 울려오는 풍경
  (8) 강천모설(江天暮雪) 소상강에 저녁 눈 내리는 풍경 등이다.

  청련공(靑蓮公) 이후백(李後白)의 아버지(휘 國衡)는 당시 거창 모곡동에 사는 개령현감을 지낸 현감공(縣監公 휘 元禮)의 차자로서 함양 개평촌(현 수동면 원평리)으로 분가하여 살았는데 서울에 사는 종조(從祖) 양원공(楊原公 휘 淑?)의 독자 이판공(吏判公 휘 世文)이 절손(絶孫) 되자 집안에서 의논 끝에 그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사는 하지 않고 그대로 함양에 살았다.

  이후백이 아홉살 되던 해에 괴질(전염병)이 돌아서 부모가 한꺼번에 돌아가고 어린 이후백은 거창 모곡동의 백부(伯父) 현감공(縣監公 휘 國權) 집에 들어가 의탁하면서 공부햐게 되었다.

  이후백이 열 다섯살 되던 해에 백부 현감공(휘 國權)을 따라 섬진강 하류 하동의 화개(花開), 악양(岳陽)으로 뱃놀이를 간 적이 있는데 뱃놀이 중 지리산의 아름다운 운람(雲嵐: 맑은 날 얇은 구름과 같이 끼는 아지랑이 같은 것)을 보고 시흥에 젖어 부소상팔경(賦瀟湘八景: 누구의 작인지 모르겠다)을 거침없이 암송하여 함께 간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다.

  선조6년(1573) 이후백이 이조참판 겸 예문관 제학으로 있을 때 종계변무 주청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소상팔경을 구경하고 지은 시조가 8수가 있다. 어린시절 백부를 따라 섬진강 화개, 악양에서 뱃놀이 하면서 부소상팔경 (賦瀟湘八景)을 암송하던 그 시심으로 소상팔경 현장에서 시조를 읊었을 것이다. 시조 여덟 수를 옮겨 놓는다.

  청련공이 소상팔경을 노래한 시조

  (1) 창오산(蒼梧山) 성제혼(聖帝魂)아 구름 조차 소상(瀟湘)에 나려
      야반(夜半)에 흘러들어 죽간우(竹間雨) 되온 뜻은
      이비(二妃)의 천년 누흔(淚痕)을 씻어 볼까 함이라

  (풀이) 창오산에서 돌아가신 순임금의 혼이 구름 따라 소상강에 내려와서
            한 밤중에 비를 내려 소상반죽 대나무에 떨어지는 의미는
            아황(娥皇), 여영(女英) 두 왕비의 천년 묵은 눈물 자국을 씻으려 하는가

  (2) 평사(平沙)에 낙안(落雁)하니 강촌(江村)에 일모(일모)이로다.
      어선(漁船)은 이귀(已歸)하고 백구(白鷗)는 다 잠든밤에
      어듸서 수성장적(數聲長笛)이 잠든 나를 깨우는고

  (풀이) 평평한 모래펄에 기러기 앉으니 강촌에 저녁이로구나
            고기잡이배는 이미 돌아오고 흰 갈매기들도 다 잠든 밤에
            어디서 부는지 여러 소리의 긴 피리소리가 나의 잠을 깨우는구나.

  (3) 동정호(洞庭湖) 밝은 달이 초회왕(楚懷王)의 넋이 되어
      칠백리(七百里) 평호수(平湖水)에 다 비치어 보이는 뜻은
      아마도 굴삼려(屈三閭) 어복충혼(魚腹忠魂)을 굽어볼까 함이라.

  (풀이)동정호에 뜬 밝은 달이 초나라 회왕의 넋이 되어
            동정호 칠백리의 평평한 호수 위를 구석구석 다 비치고 있는 뜻은
            아마 굴원이 멱라수에 빠져 고기 뱃속에 들어간 그 충성심을 굽어보려는 것이겠지

  (4) 소상강(瀟湘江) 세우중(細雨中)에 누엿삿갓 저 노옹(老翁)아
      빈 배 홀로 저어 향(向)하나니 어디메뇨
      이백(李白)이 기경비상천(騎鯨飛上天)하니 풍월(風月) 실러 가노라

  (풀이)소상강에 가랑비 내리는데 삿갓을 비스듬히 쓴 저 늙은이야
            빈 배 혼자 저어서 어디를 가느냐
            이태백이 고래 타고 하늘로 날아 가버렸으니 대신 풍월 실러 간다오

  (5) 아미산(峨嵋山)월반륜추(月半輪秋)와 적벽강산(赤壁江山) 무한경(無限景)을
      소동파(蘇東坡) 이적선(李謫仙)이 못다 놀고 남은 뜻은
      후세(後世)에 나 같은 호걸(豪傑)이 다시 놀게 함이라

  (풀이)아마산에 뜬 수레바퀴 반쪽같은 가을달과 적벽강의 무한한 경치를
            소동파와 이태백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놀지 않고 남겨 둔 뜻은
            뒷날 나같은 놀기 좋아하는 호걸들이 다시 놀 수 있게 한 것일 것이다.

      * 아미산(峨嵋山)월반륜추(月半輪秋): 이백(李白)의 '峨眉山月歌(아미산월가)'의 첫구절이다.

  - 峨眉山月歌(아미산월가)-
            峨眉山月半輪秋(아미산월반륜추) 아미산의 조각달이 가을하늘에 떠 있고,(眉=嵋)
            影入平羌江水流(영입평강강수류) 그 그림자가 평강강에 비치어 강물과 함께 흐르네
            夜發淸溪向三峽(야발청계향삼협) 밤에 청계를 떠나 삼협으로 향하노니
            思君不見下 水兪 州(사군불견하유주) 그대를 그리면서도 못보고 유주로 내려가네

      * 적벽강산(赤壁江山) 무한경(無限景): 소동파(蘇東坡)의 '前/後赤壁賦(전/후적벽부)'에 저벽강의 좋은 경치를 잘 표현하고 있음을 말함

  (6) 순(舜)이 남순수(南巡狩)하사 창오야(蒼梧野)에 붕(崩)하시니
      남풍시(南風詩) 오현금(五絃琴)을 누구 손에 전(傳)하신가
      지금(至今)에 문차성(聞此聲)하니 전차수(傳此手)인가 하노라

  (풀이)순임금이 남쪽지방을 순시하다가 창오의 들에서 돌아가시니
            그 좋아하시던 남풍시와 오현금을 누구에게 전하셨는가
            지금 이 거문고 소리 들으니 아마 이 손에 전했는가 싶구나

  (7) 악양루(岳陽樓) 상상층(上上層)에 올라 동정호(洞庭湖) 굽어보니
      칠백리(七百里) 평호수(平湖水)에 군산(君山)이 반이나 잠겼어라
      어듸서 일엽어선(一葉漁船)이 임거래(任去來) 하는고

  (풀이)악양루 맨 윗 층에 올라 동정호를 내려다 보니
            칠백리에 걸친 평평한 호수에 군산이 반이나 잠겼구니
            어디서 한조각 작은 고기잡이 배들이 오가는 구나

  (8) 황학루(黃鶴樓) 적소리 못듣고 고소대(姑蘇臺) 올라가니
      한산사(寒山寺) 찬바람에 취(醉)한 술이 다 깨겠다
      아이야 주가하처(酒家何處)오 전의고주(典衣高酒)하리라.

  (풀이)황학루에서 피리소리 못듣고 고소대에 올라가니
            한산사 찬 바람에 취한 술이 다 깨겠구나
            아이야 술집이 어디냐 옷을 잡혀서라도 흡벅 취해 보리라.
(延安李氏 이야기 415쪽)
첨부19 혈삼(血衫)무덤과 말무덤
沙月 盛 永(부사공 22세손)
  조선 광해조 때 명나라에서 후금이 명나라를 침공한다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는데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서 도와 준 일이 있어서 조선 조정은 강홍립을 도원수, 김경서를 부원수, 선천군수 김응하를 좌영장으로 하여 1만 군사로서 출병을 하였다.

  이 때 우리 延李의 충의공(忠毅公) 이유길(李有吉: 청련 이후백의 손자)도 출전하였다. 충의공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특히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바 있고, 문무재략이 뛰어나 이 때는 영유현령으로 있으면서 우영장(右營將)으로 출전하였다.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심하(深河)에 이르러 조명군(朝明軍)이 후금군과 대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 전투결과 명나라 군사는 장졸이 다 죽고, 조선군사도 더 지탱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는 후금군에게 항복하였지만 좌영장 김응하와 우영장 충의공 이유길은 끝까지 싸워서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손가락이 다 잘려서 더 이상 활을 쏠 수 없을 때까지 분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날이 3월 4일이었다. 충의공 이유길은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으로 싸움에 임하였고, 숨을 거두기 전에 옷소매를 찢어서 피로써 ‘三月四日死’(3월4일사) 다섯 글자를 써서 말 갈기에 매고 말을 채찍질을 하여 보내고 목숨을 거두었다.

  충의공의 말은 강을 건너고, 먼 길을 달려서 고향 집에 와서 비명을 지르며 울고 죽었다. 가족들이 죽은 말을 조사하여 갈기에 매여있는 혈삼(血衫)을 찾아 냈는데, 혈삼에는 위와 같은 다섯 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공의 동생 되는 별좌공 이복길(李復吉)이 압록강까지 가서 그 혈삼에 공의 혼을 불러와 선산(파주군 광탄면 발랑리)아래 그 혈삼을 묻어서 장사 지내니 시체가 없는 무덤 곧‘혈삼무덤’이 되었다.

  그 충성스런 말도 그 혈삼무덤 아래 묻어 주고 사람들은‘말무덤’이라 불러 오다가 근래에‘義馬塚’(의마총)이라는 조그마한 묘지석을 세워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끝
(延安李氏 이야기 217쪽)
첨부20 이영유유길(李永柔有吉) 허장(虛葬)에 대한 애사(哀辭)
月沙 李廷龜(월사집 56권에서)
表獨立兮荒郊(표독입혜황교) 황량한 교외에 홀로 우뚝 서고
綴芳杜於湘澤(철방두어상택) 상택(湘澤; 湘水의 물가)에서 향기로운 두약(杜若: 香草의 일종)을 땄어라(綴은 手변)
攬 水변弟 兮遠望(람제혜원망) 눈물을 훔치며 멀리 바라보고
弔國傷於天之北(조국상어천지북) 저 하늘 북쪽에 국상(國傷: 나라를 위해서 희생된 사람)을 조상하노라(傷은 死변)
昔爾之去兮(석이지거혜) 옛날 네가 떠나갈 때에
訪我於河湄(방아어하미) 한강 가로 나를 찾아왔었지
佩郡綬之若若兮(패군수지약약혜) 군수의 인끈을 길게 늘어뜨리고
帶長劍之陸離(대장검지육리) 흔들거리는 긴 장검을 차고서
謂西方之有難兮(위서방지유난혜) 말하기를 서방에 난리가 있어
將余赴乎王師(장여부호왕사) 내가 구원하러 간다고 했었지
曾日月之幾何兮(증일월지기하혜) 그리고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事大謬兮天不助(사대류혜천불조) 불운하게도 일이 크게 잘못되었어라
領前茅兮當一隊(영전모혜당일대) 선봉의 한 부대를 거느리고 앞장서서
凌虜障兮越險阻(능로장혜월험조) 험준한 오랑케 보루를 넘어가는데
風埃捲地兮沙礫擊面(풍애권지혜사력격면) 풍진이 땅을 휩쓸고 모래가 얼굴을 치니
車錯곡兮矢墜輦(차착곡혜시추련) 치열한 교전에 화살이 앞에 떨어졌어라
三創兮飮血(삼창혜음혈) 세 번 상처를 입고 피눈물을 흘렸으나
賊騎如雲兮救兵不至(적기여운혜구병불지) 적의 기병은 구름 같고, 구원병은 오지 않았지
左 馬參 死壹 兮空拳張(좌참에혜공권장) 타던 말이 죽어서 맨주먹만 남았고
士伏 弓山밑又 兮鼓不起(사복도혜고불기) 군사들은 쓰러져 북을 쳐도 일으나지 않았지
力已竭兮心不 水변兪(역이갈혜심불투) 힘은 이미 다했으나 마음은 변함없고
身離原野兮骨暴沙 石責(신리원야혜골폭사적) 들판을 진격하여 모래와 자갈밭에 해골이 누었어라
悲先珍之不反兮(비선진지불반혜) 선진(先軫: 晉 文公의 신하 장수)이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하고
痛臧洪之同日(통장공지동일) 장홍(臧洪: 중국 삼국시대 사람, 자 子源)의 같은날 죽음을 가슴아파 하노라
彼 臣又밑豆 子與老奴兮(피수자여노노혜) 저 간사한 소인과 늙은 놈(淸에 항복한 姜弘立과 金景瑞를 말함)이
制中權兮擁後勁(제중권혜옹후경) 중군을 장악하고 후군을 거느린 채
仰凶酋之鼻息兮(앙흉추지비식혜) 오랑케 추장(후금 누루하치를 말함)의 숨소리만 우러러 보며
爭嚮風而趨命(쟁향풍이추명) 앞 다투어 달려가 그 명을 따랐지
驅七千之健卒兮(구칠천지건졸혜) 7천의 건아들을 전장에 내 모는게
若群羊之交勁(약군양지교경) 마치 양 떼를 몰고가는 것과 같았나니
束强弩兮解堅甲(속강노혜해견갑) 강한 쇠뇌를 묶고 굳센 갑옷을 벗기니
藏鹿拳兮斂長臂(장녹권혜렴장비) 큰 주먹을 감추고 긴 팔뚝 걷우게 하고는
壺漿迎兮款話言(호장영혜관화언) 적이 잘 대접하며 은근한 말로 달래니
忘厚渥兮背大義(망후악혜배대의) 그만 두터운 성은을 잊고 대의를 저버렸지
哀爾 目少 小之丈夫兮(애이묘소지장부혜) 슬프도다 그대 작은 장부는
一行間之校尉(일행간지교위) 일개 대오 속의 한 장교일 뿐이라
奔有路兮降有徒(분유로혜항유도) 도망 할 길도 있고, 항복하는 무리도 있었으니
豈不知生之可樂兮死之可畏(기부지생지가락혜사지가외) 사는 것이 좋고,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을 어찌 몰랐으랴
臨大節義不 艸밑句 生(임대절의불구생) 그러나 큰 절개에 임하여 구차히 살지 않는 것이
實平生之所守(실평생지소수) 실로 평생에 지켜온 지조였어라
子能仕兮敎之忠(자능사혜교지충) 아들이 벼슬할 수 있으면 충성을 가르쳤으니(晉나라 때 狐突과 아들 狐毛, 狐偃 이야기)
吾知爾之有所受(오지이지유소수) 내 그대 가정에서 받은 가르침이 있음을 알겠네
念爾祖於先輩兮(염이조어선배혜) 생각칸데 그대의 조부(靑蓮公 諱 後白)는 선배들 중에서
詞華哲匠兮經綸大手(사화철장혜경륜대수) 문장이 뛰어난 대신이요, 경륜을 갖춘 대가였지
謂爾之妙年投筆혜(위이지묘년투필혜) 그대가 젊은 나이에 붓을 던지는 것을 보고
初若?乎所生(초약첨호소생) 처음에는 조상을 욕되게 한다고 여겼더니
及今成就之若此兮(급금성취지약차혜) 지금에 와서 성취한 바가 이와 같으니
眞可謂不墜家聲(진가위불추가성) 참으로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할 만하네
縱不能立功異域(종불능입공이역) 비록 이역 땅에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其視太祝奉禮僅持門戶者(기시태축봉례근지문호자) 태축과 봉례나되어 겨우 문호를 유지하는 이들(음덕으로 벼슬하는 사람들을 말함)과 비교하면
奚 帝밑口 天壤(해시천양)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뿐이겠는가?
爲臣止忠兮以死報國(위신지충혜이사보국) 신하가 되어 충성을 하여 죽음으로 보국하였으니
亦乃祖所望(역내조소망) 이것이 또한 그대 조부(靑蓮公 諱 後白)가 바라는 바일 것일세
故山兮何許(고산혜하허) 고향산천은 어드메인가?
關塞長兮楓林杳杳(관새장혜풍림묘묘) 관새는 멀어 단풍 숲은 아득하구나(杜甫가 夜郞에 귀양간 李白을 생각하며 지은 <夢李白> 시의 '魂來楓林靑 魂返關塞黑'구절에서 인용)
魂兮歸來千秋(혼혜귀래천추) 넋이야 천추토록 고향에 돌아오리니
水변卞 水兮應有雙廟(변수혜응유쌍묘) 변수에는 응당 (李有吉과 金應河)한 쌍의 사당이 있으리.
첨부21 延星會 2005년도 고양-파주 선조유적지 탐방 앨범
▶개요
  연성회가 창립된 후 21년 동안 연례적으로 연 1회 선조유적 탐방 행사를 실시해 왔는데 2005년도에도 6월 6일 현충일에 회원과 초청된 종원 79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어 버스 2대로 경기도 고양시와 파주시 일원에 있는 선조의 유적들을 탐방하였다. 특히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연안이씨 전국대종회 천배회장님과 간사장님, 부사공파 경식회장님이 참석하여 끝까지 함께 해 주셔서 이 날 연성회 행사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예년대로 광화문 동원빌딩 앞에서 09: 00에 출발하여
  (1) 고양 원당의 의정공(議政公 휘 廷華) 묘소에 참배하고, 신도비(神道碑)와 제각 원모제(元慕齊)를 둘러보고,
  (2)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 근곡공(芹谷公 휘 觀徵) 묘소에 참배하고
  (3)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원조할머니손두부집에서 두부전골로 점심을 먹고,
  (4) 파주시 조리읍 노조리에 있는 삼척공(三陟公 휘 土末), 북백공(北伯公 휘 昌庭) 묘소에 참배하고,
  (5) 파주시 조리읍 노조리에 있는 분봉공(盆峯公 휘 澍),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 묘소에 참배하고, 신도비(神道碑)와 제각 경모제(景慕齊)를 둘러보고,
      (등넘어 있는 박천공(博泉公 휘 沃)의 묘소 참배는 시간 관계로 미실시)
  (6)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에 있는 양원공(楊源公 휘 淑 王咸), 청련공(靑蓮公 휘 後伯) 배위(配位) 남양홍씨(南陽洪氏) 묘소와 충의공(忠毅公 휘 有吉)의 혈삼무덤에 참배하고, 의마총, 청련공 신도비(神道碑)와 제각 청련사(靑蓮祠)를 둘러보았다.
      (청련공 묘소는 버스가 들어기지 못하여 미실시)

▶ 선조유적탐방 이모저모

경모제(景慕齊)에서 탐방객 일동

동원된 대한여행사 버스 2대

의정공(휘 廷華) 묘소 참배

근곡공(휘 觀徵) 묘소 참배

점심식사장 원조할머니손두부집(파주시 탄현면)



손두부전골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삼척공(휘 土末) 묘소 참배

북백공(휘 昌庭) 묘소 참배

분봉가훈 표석
석재상을 하는 종원이 세운 것이라 한다

분봉공(휘 澍) 묘소 참배

해고공(휘 光庭) 묘소 참배

양원공(휘 淑 王咸) 묘소 참배

청련공 신도비 곁에서 마지막 음복

귀경


모두 끝
목 차
인사 말씀

고양 덕양구 원당동
의정공(議政公 휘 廷華)

파주 조리읍 노조리
삼척공(三陟公 휘 土末)
분봉공(盆峯公 휘 澍)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
북백공(北伯公 휘 昌庭)
박천공(搏泉公 휘 沃)

파주 탄현면 축현리
근곡공(芹谷公 휘 觀徵)
파주 광탄면 발랑리
양원공(楊源公 휘 淑 王咸)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
충의공(忠毅公 휘 有吉)

첨부
(1) 의정공(議政公 휘 廷華) 신도비명(神道碑銘)
(2) 분봉공(盆峯公 휘 澍) 신도비명(神道碑銘)
(3)분봉가훈(盆峯家訓) 훈계(訓戒) 39덕목(원문)
(4)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 신도비명(神道碑銘)
(5)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6) 북백공(北伯公 휘 昌庭) 신도비명(神道碑銘)
(7) 이옥(李沃)의 청회별곡(淸淮別曲) 발견 기사
(8) 화석정(花石亭) 작명 이야기
(9)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10) 신정비(神井碑)
(11)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 신도비명(神道碑銘)
(12)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유년시절
(13) 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어전상소(御前上疏)
(14)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공도(公道) 일생
(15)종계변무(宗系辨誣) 이야기
(16) 탑반송(塔畔松) 이야기
(17) 범마(犯馬)와 퇴고(堆鼓)
(18) 소상팔경(瀟湘八景) 시조
(19) 혈삼(血衫)무덤과 말무덤
(20) 이영유유길(李永柔有吉)의 허장(虛葬)에 대한 애사(哀辭)
(21) 연성회 2005년도 고양-파주 선조유적 탐방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