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삼(血衫)무덤과 말무덤

沙月 李盛永(延安李氏宗報 1987년 봄호 통권제4호 게재, 增補및 제목 변경)

 

조선 광해조 때 명나라에서 후금이 명나라를 침공한다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는데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서 도와 준 일이 있어서 조선 조정은 강홍립을 도원수, 김경서를 부원수, 선천군수 김응하를 좌영장으로 하여 1만 군사로서 출병을 하였다.

 

이 때 우리 延李의 忠毅公(휘 有吉: 청련 이후백의 손자)도 출전하였는데 충의공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특히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바 있고, 문무재략이 뛰어나 이 때는 승진하여 영유현령으로 있다가 우영장(右營將)이 되어 출전하였다.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심하(深河)에 이르러 명조군이 후금군과 대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 전투결과 명나라 군사는 장졸이 다 죽고, 조선군사도 더 지탱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도원수(강홍립)와 부원수(김경서)는 후금군에게 항복하였지만 좌영장 김응하와 우영장 충의공은 최종까지 싸워서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손가락이 다 잘려서 더 이상 활을 쏠 수 없을 때까지 분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날이 3월 4일이었다. 충의공은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으로 싸움에 임하였고, 숨을 걷우기 전에 옷소매를 찢어서 피로써‘三月四日死’(3월4일사) 다섯 글자를 써서 말 갈기에 매고 말을 체찍 질을 하여 보내고 목숨을 거두었다.

 

충의공의 말은 강을 건너고, 먼 길을 달려서 고향 집에 와서 비명을 지르며 울고 죽었다. 가족들이 죽은 말을 조사하여 갈기에 매여있는 혈삼(血衫)을 찾아 냈는데, 혈삼에는 위와 같은 다섯 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공의 동생 되는 별좌공(휘 復吉)이 압록강까지 가서 그 혈삼에 공의 혼을 불러 와 선산(파주군 광탄면 발랑리)아래 그 혈삼을 묻어서 장사 지내니 시체가 없는 무덤 곧‘혈삼무덤’이 되었다.

 

그 충성스런 말도 그 혈삼무덤 아래 묻어 주고 사람들은‘말무덤’이라 불러 오다가 근래에義馬塚’이라는 조그마한 묘지석을 세워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혈삼무덤(위 오른쪽)과 말무덤(아래)

그후 혈삼무덤의 주인 이유길(李有吉)은

① 인조1년(1623) 교지를 내려서‘심하순절(深河殉節)은 300년 역사의 우리나라가 금수(禽獸)의 나라를 면하게 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고,(深河殉節獨扶三百年綱常使我國得免禽獸之域, 심하순절독부삼백년강상사아국득면금수지역)

 

② 숙종21년(1695)에도 교지를 내려서 찬양하고 ‘충신(忠臣)’에 정려(旌閭)하고 이조참판(吏曺參判, 종2품)의 증직(贈職: 죽은 후에 주는 벼슬)을 내렸다. (箕封禮儀賴玆以扶 皇朝大恩賴玆以酬 命旌 特贈吏曺參判, 기봉예의뢰자이부 황조대은뢰자이수 명정 특증이조참판)

 

③ 영조9년(1733)에는 교지를 내려서 심하순절을 높이 찬양하고 정려하였으며,(深河殉節使國家忠義著旌天下其功大矣, 심하순절사국가충의저정천하기공대의)

 

④ 정조11년(1787)에도 교지를 내려서 심하순절을 찬양하였고, (深河殉節永有辭於天下後世 又 睢陽文山合而爲一, 심하순절영유사어천하후세 우 휴향문산합이위일)

 

⑤ 순조 때는 영의정(領議政, 정1품)에 가증(加贈)하고, 시호‘충의’(忠毅: 전쟁에 임하여 나라를 잊지 않았고-忠, 강직한 결단을 내렸다-毅)’를 내리고, 부조전(不祧典: 영구히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는 특전)을 내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