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옹공의 서리(胥吏) 묘지명(墓誌銘)
- 극(?)자는 '나막신 극'자 이므로 '극옹''나막신 신은 노인'이란 뜻 -
沙月 李盛永(2007. 12. 15)
    서리(胥吏)는 조선조 때 이서(吏胥), 이속(吏屬), 아전(衙前)이라고도 부르며, 중앙과 지방 관청에 딸려있던 정1품-종9품의 품계에도 오르지 못한 하급관리를 말한다.
    2008년 1월 5일자 조선일보 ‘이덕일 舍廊’에 「권력에 맞선 서리(胥吏)들」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서리들의 이야기가 올라 있다.
    「정1품부터 종9품까지 18계단이었던 조선의 관직은 크게 두 개의 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종6품 이상 참상관(參上官)과 정3품 이상 중 당상관(堂上官)이 그것인데, 참상관이 되어야 회의에 참석할 수 있고 당상관이 되면 주요 국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종9품에도 속하지 못하는 하급 서리(胥吏)가 있어서 중인들이 맡았다.

    규장각 서리 유광진(劉匡鎭)이라는 사람의 묘지명(墓誌銘)은 정조 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가 써서 그의 『극원유고』에 실려 있다. 일개 서리의 묘지명을 왜 예조판서까지 지낸 규장각 각신이 썼을까?
    '정조 즉위 초 권흉(權凶)의 횡포가 심해 어느 누구도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나 유광진(劉匡鎭)만은 이치로써 따져 그 기세를 꺾는데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라는 묘지명 내용이 말해 준다.
    정조 초의 최고의 권신 중 하나였던 홍국영(洪國榮)에게 맞서던 서리이기 때문에 이만수가 존경의 마음으로 묘지명을 쓴 것이다」
(이하 생략)

    위와 같이 묘지명을 이만수(李晩秀)가 썼다는 규장각 서리 유광진에 대해서는 이 묘지명 내용 외에 어떤 자료도 찾을 길이 없지만 홍국영(洪國榮)에 대해서는 요즈음 MBC역사드라마 ‘이산’에 등장해서 영조 말년 노론들의 집요한 음해와 모략으로부터 세손을 보호하는 책사로서 지금까지는 의인(義人) 으로 시청자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드라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이산’이란 제목부터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이산’은 나중에 정조로 시호가 정해진 영조 다음 임금, 즉 드라마에서는 세손의 성(姓)과 이름(諱)이다.
    조선조에서 왕실 남자의 이름은 외자 즉 한 자로 짓는 것이 거의 원칙이 되다시피 돼왔다. 조선조 27대에 걸친 임금의 이름만 보더라도 3대 태종과 6대 단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자인데 22대 정조의 이름이 ‘산(示示)’이다. 그러니까 조선조 왕실의 성이 이(李)씨이니까 정조임금의 성명이 ‘이산(李 示示)’인 것이다.
조선조 제왕의 시호(諡號)와 휘자(諱字)
    태조는 원래 이름이 성계(成桂)였다가 조선 최초 임금이 된 후에 단(旦)으로 고쳤는데, 이후 旦(단)자가 붙은 이름은 모두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예로서 서울 동편의 얕으막한 울타리 아차산(峨嵯山)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은 원래 이름이 아단성(阿旦城)인데 이성계가 이름을 단(旦)으로 고친 후에 旦(단)자를 쉽게 且(차)자로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태종은 고치지 않고 원이름 그대로 ‘방원(芳遠)’이라 했고, 단종도 이름이 두 자인 ‘홍위(弘暐)’라 한 것은 이유를 모르겠다.
    또 위 표에서 연산군과 광해군은 시호(諡號)가 아니라 왕자의 군호(君號)이며, 폭군으로 도중에 폐주(廢主)가 되었기 때문에 시호를 정하지 않은 것이다.

    국사대사전에서 홍국영을 찾아보면
    홍국영은 영조24년(1748)-정조5년(1781) 간에 살았으며 정조 때 세도가로 자는 덕로(德老)이고,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영조48년(1772)에 25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예문관)에 들어가 춘방(春坊: 세자시강원 또는 세자익위사) 설서(說書: 정7품)를 겸하였다. 이 때 권신 정후겸(鄭厚謙), 홍인환(洪麟漢) 등이 동궁(東宮: 世孫, 후에 정조)을 모함하자 이를 잘 방어해서 세손이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정조다.
    홍국영은 그 공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 정3품상,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 겸 금위대장(禁衛大將: 지금의 대통령경호실장)에 임명되어 모든 정사는 그를 거쳐 상주(上奏) 또는 결재(決裁)하도록 하는 권한을 위임 받는 한편 누이를 정조에게 바쳐 원빈(元嬪; 임금의 正室)을 삼게 하고, 궁중에 기거하면서 세도정치를 하니 원로 대신들이나 서료(庶僚: 일반 관리)들 까지도 대궐에 들어가면 먼저 홍국영의 숙위소(宿位所: 거처하는 곳) 찾아보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이렇케 홍국영의 위세가 임금을 모욕할 정도에 이르자 얼마 안 있어 정조는 여론의 귀추와 승지 김종수(金鐘秀
; 후에 병조판서, 좌의정)의 직언을 받아들여 홍국영을 파직하고, 강릉으로 추방하여 거기서 33세로 병사하였다.

    이런 홍국영에게 규장각의 일개 서리(胥吏) 유광진(劉匡鎭)이 그의 기세를 꺾었다는 이야기를 당시 규장각 각신(閣臣: 提學, 종2품)으로 있던 극옹공(극翁公 諱 晩秀)이 그의 묘지명에다 썼다는 이야기다. 물론 홍국영은 정조5년에 강능으로 귀양가서 죽었으니 그 때는 이미 홍국영이 없는 때이기는 하지만, 종2품의 각신이 품계에 오르지도 못한 일개 서리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규장각에서 있었던 일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자랑스런 일이므로 의협심(義俠心)이 발로하여 그의 묘지명에 그 진실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극옹공(극翁公 諱 晩秀)이 지은 비명(碑銘)으로는 유광진서리비명 외에 서명선사제비명(徐命善賜祭碑)이 있는데 국사대사전에 따르면
    서명선(徐命善)은 영조4년(1728)-정조15년(1791) 간에 산 명신으로 자(字)는 계중(繼仲)이고, 호(號)는 귀천(歸泉), 동원(桐源)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영조가 병석에 눕고 세손 정조에게 위를 물릴 때 홍인한 등이 화완옹주(和緩翁主)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미려는 기도를 분쇄하고 정조의 즉위를 도와 영의정이 되었다. 그가 죽자 정조는 애도하여 사람을 보내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그의 사위 이만수로 하여금 사제(賜祭
: 임금이 죽은신하에게 내리는 제사)의 글을 짓게 하여 내려서 비를 세운 것이 서명선사제비명(徐命善賜祭碑)이다. 경기도 장단군에 있다.

    극옹공(극翁公 諱 晩秀)는 자(字)를 成仲(성중), 호(號)를 극옹(극翁) 또는 극원(극園)이라 하며, 시호(諡號)가 文獻(문헌)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홍문관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낸 쌍계공(雙溪公 휘 福原)의 아들이고, 영의정을 지낸 급건재공(及健齋公 휘 時秀)의 동생이다. 영조28년(1752)에서 순조20년(1820)까지 69세를 살았다.
가계(家系)
시조 연안후(延安侯) 茂(무)---
(1)중시조(中始祖) 賢呂(현여)-(2)暎君(영군)-(3)寅富(인부)-
(4)原珪(원규)-(5)孝臣(효신)-(6)匡(광)-(7)宗茂(종무)-(8)회림(懷林)-
    정조7년(1783)에 진사시, 정조13년(1789)에 38세로서 늦게 문과(文科) 식년전시(式年殿試)에 급제하여 태사(太史: 史官)와 세자익위사 세마(洗馬: 정9품)에 임명,
    정조18년(1794)부터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정3품上),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정3품上),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 종2품),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빈객(賓客: 정2품)을 역임하였다.
    정조24년(1800) 이조(吏曹)/예조(禮曹) 판서(判書: 정2품),
    순조1년(1801) 화성(華城) 유수(留守: 종2품), 병조(兵曹) 판서(判書)를 거쳐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 이른바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 정2품)이 되어 부친 이복원(左議政, 弘文館大提學)에 이어 부자대제학(父子大提學) 집안이 되었다. 조선조에 네 집 밖에 없는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에 이어 조선조에 일곱 집 밖에 없는 귀한 기록이다.
    *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 집안
    延安李氏(연안이씨): 李廷龜(이정구)-李明漢(이명한)-李一相(이일상)(선조-효종)
    光山金氏(광산김씨): 金萬基(김만기)-金鎭圭(김진규)-金陽澤(김양택)(효종-숙종)
    全州李氏(전주이씨): 李敏敍(이민서)-李觀命(이관명)-李徽之(이휘지)(현종-숙종)
    達城徐氏(달성서씨): 徐有臣(서유신)-徐榮輔(서영보)-徐箕淳(서기순)(정조-철종)


    * 부자대제학(父子大提學) 집안
    延安李氏(연안이씨): 李福源(이복원)-李晩秀(이만수)
    全州李氏(전주이씨): 李眞望(이진망)-李匡德(이광덕)
    德水李氏(덕수이씨): 李   植(이   식)-李端夏(이단하)
    安東金氏(안동김씨): 金壽恒(김수항)-金昌協(김창협)
    昌寧成氏(창년성씨): 成   俔(성   현)-成世昌(성세창)
    海州吳氏(해주오씨): 吳   瑗(오   원)-吳載純(오재순)
    宜寧南氏(의령남씨): 南有容(남유용)-南公轍(남공철)


    순조3년(1803) 호조(戶曹) 판서(判書)로 있으면서 사은사(謝恩使) 정사(正使)로 청나라에 갔다 왔다.
    순조4년(1804) 광주(廣州) 유수(留守),
    순조6년(1806)에 함경도(咸鏡道) 관찰사(觀察使),
    순조11년(1811)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
    순조18년(1818) 춘궁(春宮: 태자궁)을 보도(輔導; 보익) 하고,
    순조20년(1820)에 화성(華城) 유수(留守)에 재임하였다가 병을 얻어 돌아와 낙산(駱山: 종로구 동숭동 도성 성곽이 있는 산) 아래 구제(舊第: 옛집)에서 졸하였다. 묘는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 선고(先考) 쌍계공(雙溪公 휘 福原)의 영하(塋下)에 있다.
쌍학리 부자연상, 부자대제학 묘
위 부친 쌍계공(雙溪公 휘 福原), 오른쪽 형 이시수, 왼쪽 이만수
급건재공(及健齋公 휘 時秀)의 묘는 뒤 산에 있고,
쌍계공(雙溪公 휘 福原)극옹공(극翁公 諱 晩秀) 부자 묘는 들판에 있다.
    유고로 극옹집(극雍集)과 극원유고(극園遺稿)가 있고, 성품과 대인관계, 공적과 미담을 열거해 본다.
    - 성품은 효순(孝順: 효성이 지극하고 잘 순종함)하여 어려서부터 부모의 뜻에 순종하여 가책(呵責: 책망)을 들은 적이 없으며, 6세에 모친상을 입어 수최(受衰: 상복을 입음)하고 애호(哀號: 슬프게 부르짖음)함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 취학기에 조부 지암공(止庵公 諱 喆輔)이 벼슬을 그만 둔 시기라 조부의 가르침이 엄하여 공은 바르게 앉아 종일 독서하기를 10년이나 하였다.

    - 부모를 여읜 후 급건공(及健公 휘 時秀, 伯兄)과 우애로서 서로 의지하였으며, 집안 일꾼들을 동복과 같이 상대하여 춥고, 덥고, 배고프고, 배부름을 함께 하였다.

    -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아름답고 얼굴은 단곡(丹鵠: 붉은 고니) 같이 윤택하였다. 또 반행(班行: 동료 들과 비교하여)에 있어서는 항상 의표(儀表: 위용)가 의의(疑疑: 덕이 높은 모양)하였고, 붕우(朋友)와 유연(遊燕: 遊宴. 사귐)함에 있어서는 부드럽고 온화하여 화기(和氣)가 있으며 안으로 경계함이 없고 밖으로 꾸밈이 없이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므로 사람들이 공과 교유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음과 뜻이 맞지 않으면 비록 세리(勢利: 세력과 권리, 권세와 이익)로 유혹하고 위화(危禍: 위협과 화)로서 두렵게 하여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 평소에 담연(澹然: 고요하고 평안함)하고, 충소(沖素: 화기가 있음)시사(時事)에는 일체 마음을 두지 않았으나 세상 운수의 승강(昇降)이나 사풍(士風)의 성쇠(盛衰)는 개연히 탄식하고 근심하였다.

    - 관직에 나아가 임금 섬기기를 부모 섬김과 똑 같이 애경(愛敬)하고 공손히 하여 임금(정조)이 공을 규장각에 보임시켜 유선(諭善)과 빈객(賓客)을 선임하는 일을 전담시켰다.

    - 임금께서 직접 공에게 극옹(극翁)이라는 호를 하사하면서 함께 내린 어제사극명(御製賜극銘: 임금이 지어 내린 극옹의 비명)에
    「나이는 벼슬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으나 충성심은 완황(阮皇: )과 같다. 진실로 경의 효상(孝祥: 효도하고 착함)함이 가히 희경(羲經: 주역의 별칭)에 둘 것이요, 필해(弼諧: 일치단결하여 임금을 도움)에 가함으로 당정(唐廷: 당나라 조정)의 지조(知照: 통지하기 위하여 照會함)의 밝음을 모방할 만하다」 라 하였는데 임금이 하사한 ‘극翁(극옹)’이란 호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나막신을 신고 걷는 사람처럼 여유롭고 차분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문장은 또한 사람됨과 같아 경술(經術: 儒家의 經書)을 본으로 삼고, 그 법칙은 성률(聲律: 한자 발음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 없어서 실로 아름답고 그 짜임이 후하고 읽기가 쉬웠다. 안으로 넓히고 밖으로 궁구하여 말이 통달하고 이치가 창달하였으니 실로 문충공(文忠公 휘 廷龜)과 선대부(先大夫 휘 福源)의 유업을 이은 것이었다.

    - 정조24년(1800) 이후에 나온 대문자(大文字: 大文章) 중에는 공이 쓴 것이 많으며 세상 사람들이 이를 전송(傳誦: 입에서 입으로 전해짐)되어 공은 문원종장(文苑宗匠: 문림의 종사)으로 추앙되었다.

    - 정조대왕께서는 일찍이 문풍(文風)이 날로 쇠하여간다고 걱정하면서 공을 오래도록 국자(國子: 성균관의 직)에 오래 머물도록 명하여 공은 제생(諸生: 성균관의 여러 유생)을 인도하여 읍양(揖讓: 공수-공경하는 뜻으로 왼손을 오른손 위에 놓고 두 손을 잡는-의 예를 행하고 겸양함) 유액(誘掖: 인도하여 도와 줌)하였으며 또 장점을 갖춘 자를 발굴하여 지명사(知名士)에 많이 발탁되는 업적을 남기어 사람들은 구양자(歐陽子: 당나라 구양수)가 지공거(知貢擧: 제후가 재학이 있는 선비를 중앙에 천거케 하는 제도)로서 쌓은 업적에 비유하였다.
정조의 남자들과 이산 주제가 '약속'(클릭): 정조의 남자들과 이산주제가 '약속'
이산 주제가 '약속' 가사
(1)기억 하나요 가슴 아픈 사연을
내님 오실 날을 저울질 하나요
한참 후에야 그마음을 알았죠
내가 아닌 곳에 머물러 있다는 걸
내게 올 수 없나요 사랑할 수 없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였던가요
잊지 말아요 가슴아픈 사랑이
슬퍼하는 날엔 내가 서 있을께요

(2) 내게 올 수 없나요 사랑할 수 없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였던가요
이대론 안되나요 돌아올길 잊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였던가요
잊지 말아요 가슴아픈 사랑이
슬퍼하는 날엔 내가 서 있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