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龍寺 煩惱(회룡사 번뇌)
沙月 李盛永
  의정부행 1호선 전철을 타고 서울을 빠져 나가다가 의정부 직전 회룡역에서 내려서 서북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 입구에서 도봉산 정상을 향하는 남쪽 능선 길과 사패산에 이르는 북쪽 계곡 길로 갈라진다.

  도봉산은 이웃한 북한산과 마치 힘겨루기라도 하는 양 큰 바위 덩어리를 하늘 높이 치켜 올려 넘치는 힘을 과시하고 그 힘을 북쪽으로 뻗쳐 세칭 ‘포대능선’이라고 부르는 아기자기한 석재(石材) 작품을 만들어 놓고 그래도 남는 기력으로 바위를 옹기종기 모아 끝맺음을 한 것이 사패산이다. 이 사패산 동쪽 아늑한 곳에 회룡사(回龍寺)라는 작지만 아담한 절이 자리잡고 있다.
불암산에서 바라본 북한산(왼쪽)과 도봉산(오른쪽)
포대능선 너머로 바라 본 자운봉, 만장봉, 신선봉 등 도봉산 정상들
포대능선에서 바라 본 사패산
그 오른쪽 아래 계곡에 회룡사가 있다.
회룡사 전경
  얼핏 보기에는 서울 주변의 산이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사찰이기에 등산객들에게는 절에 대한 관심보다는 절에는 으레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기 마련이기에 땀 흘리고 목마르던 차에 갈증도 풀 겸 쉬어가는 장소로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유월 어느날 우리 부부가 아사달산악회원들 틈에 끼어 이곳 회룡사에 들리게 된 것도 사패산을 오르던중 땀도 식히고 시원한 물도 마실 겸 들린 것이다.

  절은 비록 작기는 하지만 단청이 산듯하고 좁은 공간에 대웅전, 종각, 석조관음상 그리고 오층석탑이 짜임새 있게 배열되어 있는데 종각 아래 잘 다듬은 돌샘에서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철철 넘치도록 솟고 있어서 땀 흘린 등산객들에게 힘든 것도 잊고 산을 찾은 보람을 느끼게 하는 진품의 물맛을 맛볼 수 있다.

  남들이 쉬는 동안 절의 내력을 소개한 안내판 앞에 서서 몇 줄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다음 두가지가 관심을 쏠리게 한다.

  그 하나는 보기 보다는 이 절의 창건 역사가 매우 길고, 이 절이 조선조(朝鮮朝)의 개국(開國)과 초기 격동(激動)의 역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조선 인조 8년(서기1630년) 예순(禮順) 비구니 5창(五脹)’이라고 기록 되어 있는데 예순(禮順) 비구니라는 여승(女僧)에 관한 것으로서 어디서 인가 본 듯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산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 오자마자 다락방 서가에 꽂힌 延李 선조에 관해 수집해 놓은 자료집에서 입산(入山)하여 여승이 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딸이 니명(尼名)을 예순(禮順)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쉽게 찾아냈다. 정말 뜻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 延李 선조 분의 족적(足跡)을 찾았다. 그것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생(生)을 살고 간 분이 아닌가 !

  나 혼자 이정도로 알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어 며칠 지난 어느 일요일 우리 부부는 산행 코-스를 다시 이곳으로 잡아 회룡사(回龍寺) 안내판을 읽고 또 읽으며 이 절과 예순(禮順)비구니 그리고 조선조 초기와 중기의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엮어서 종보(宗報)에 실어 여러 일가 분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개국(開國)에서 회룡(回龍)까지>
  회룡사(回龍寺)의 창건(創建)과 확창(擴脹)의 역사를 읽어 보니 대략 다음과 같다.
    - 신라 신문왕(神文王=31대) 1년(서기 681년) 의상조사 창건(創建),법성사(法性寺)라 칭함.
    - 신라 경순왕(敬順王=56대) 3년(서기 930년) 동진국사 재창(再脹).
    - 고려 문종(文宗=11대) 24년(서기 1070년) 해거국사 3창(三脹).
    - 고려 우왕(禑王=32대) 10년(서기 1384년) 무학대사 4창(四脹).
    - 조선 인조(仁祖=12대) 8년(서기 1630년) 예순(禮順)비구니 5창(五脹).
    - 조선 고종(高宗=26대) 18년(서기 1881년) 대응선사 6창(六脹).
    - 6.25사변(六二五事變)으로 전소(全燒),도준비구니 모금(募金) 및 미8군의 원조로 큰방 50평 복원.
    - 1955-60년간 삼성각 8평 복원, 요사 40평등 8동 신축.
    - 1971.7.27. 대웅전 24평 신축, 7창(七脹).
    - 1987년 해주비구니 석조관음상 준공.
    - 1989년 해주비구니 500관 범종과 종각 건립.


  이어서 기록된 회룡사유래(回龍寺由來)를 보니 조선조 이태조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고려 공민왕 2년(서기 1353년) 이성계(李成桂)가 화가위국(禍家衛國; 집안의 화를 각오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 하려는 뜻을 품고 이 절에서 백일기도중 관세음보살님의 현신을 친견한 곳임.
    - 조선 태종 3년(서기 1403년)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부터 환궁하던 도중 되돌아 가려는 것을 무학대사가 이 절로 초치하여 용란가(龍鸞駕: 御駕)를 돌려 환궁(回)케 한 사연에 따라 이 절의 이름을 법성사(法性寺)에서 회룡사(回龍寺)라 개칭함.


  이와같은 회룡사의 창건 및 발전 역사와 유례에서 보면 이야기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과 함흥차사(咸興差使) 등 역사의 소용돌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국사대사전에서 이 두 역사적 사건을 찾아 보았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고려 우왕 14년(서기 1388년) 5월 요동정벌(遼東征伐)차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른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개경(開京)으로 회군(回軍)한 사건'으로 본래 요동정벌이 논의될 때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네 가지 이유를 왕에게 상소하였으나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崔瑩) 등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아 부득이 출정한 것이다.

 이성계가 요동정벌 출정을 반대한 이유
    첫째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친다는 점
    둘째 여름철 농번기를 택한 점
    셋째 거국적 원정의 틈을 타서 왜구의 침입이 우려되는 점
    넷째 시기가 무더운 장마철이라 활이 풀리고 병영 내에 질병이 우려된다는 점 등이다

  출정군은 5월경에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으나 때마침 큰 비로 강물이 범람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주군(駐軍)하고 있던 중 사졸들 가운데 중환자가 속출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상의하여 상서(上書)로서 회군(回軍)을 청하였으나 최영과 왕은 허락하지않고 오히려 속히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성계는 다시 평양에 머물고 있는 최영과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회군할 것을 청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이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마침내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하고 드디어 5월 20일에 군사를 돌이키니 이 돌연한 회군에 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평양에서 송도로 귀경하여 저지를 기도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얼마 가지않아 왕과 최영은 잡혀 왕은 강화도로, 최영은 고봉현(高峯懸: 현 高陽)으로 귀양 간 사건이다.

  후임 왕에 우왕의 아들 창(昌)을 창왕(昌王)으로 세웠다가 동년 다시 제20대 신종(神宗)의 7대손 요(瑤)로 공양왕을 세웠으나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성계에게 나라를 내어주니 위화도 회군은 고려조가 망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또 함흥차사(咸興差使)‘조선 태종 때 부자간의 의견 상충으로 함흥으로 간 태조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하여 함흥에 보낸 사신’이라고 적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자세한 내력들이 적혀있다.

  태조 7년(서기 1398년) 세자 방석(芳碩)이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죽은 뒤 태조는 정치에 뜻이 없어 위(位)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정종에 이어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일단 서울로 돌아왔으나 태종 2년(서기 1402년) 다시 함흥으로 간 채 돌아오지 않음으로 왕이 차사(差使)를 보냈으나 차사도 돌아오지 않아서 이때부터 ‘한번 가서 돌아오지 않은 것’을 일러 ‘함흥차사’라 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태조가 차사를 모두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문헌에는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朴淳)의 희생만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태조는 여러 차례의 간청에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다가 무학대사가 설득하여 겨우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 양주군지(楊洲郡誌)에 여기(회룡사)서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퇴계원(退溪院) 이름의 내력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조선 태조가 함흥에 가 있을 때 차사로 간 개국(開國) 동지(同志)인 남재(南在)와 함께 매사냥에 열중하여 무의식 중에 이곳 양주까지 와서 보니 눈에 익은 삼각산(三角山)이 보이매 ‘이하! 내가 남재의 꾐에 속았구나’하고 부랴부랴 발길을 함흥 쪽으로 돌려 물러갔기 때문에 이곳을 ‘퇴조가 물러갔다’는 뜻으로‘퇴조원(退祖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院은 驛이 있던 곳)

  그 후 연안이씨(延安李氏)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후손 중 이조원(李祖源)이라는 분이 판서(判書)까지 지내고 낙향하여 이곳(지금의 퇴계원면 내곡리)에 일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그 아들 대(代)에 와서 상민들이 ‘퇴조원, 퇴조원’하는 것이 마치 선친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하여 소(訴)를 올려 퇴조원(退祖院)을 퇴계원(退溪院)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한다. 퇴계원 이름은 수원산에서 발원하여 이곳을 관통하여 지나가 흐르는 맑고 큰 왕숙천에서 비롯되었다.

  회룡사의 내력과 위에 인용한 위화도회군과 함흥차사 그리고 양주군지의 퇴계원의 유래 등을 얽어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된다.
  고려조의 신하요 덕망 있던 장수 이성계가 고려 말기 신돈의 정권 장악에서부터 시작하여 왕실과 사회 구석구석까지 문란해진 고려조에 반의(反意)를 품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뜻을 이 절 회룡사에서 백일기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현신하고, 그 뜻을 확고히 하였으며 또 위화도회군의 호기(好機)를 놓지지 않고 실행에 옮겨 성공하니 회룡사(回龍寺)는 조선 개국을 잉태(孕胎)한 현장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조가 계후(系后)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청을 들어 본처 소생의 다섯 아들을 제쳐 두고 후처 소생의 방석(芳碩)을 세자(世子)로 책봉하면서 왕위 계승을 놓고 야기된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고 고향 함흥으로 감으로서 이른바 ‘함흥차사’의 비극이 야기되고 있었는데 태조와 개국 동지인 남재(南在)가 매사냥을 핑계로 태조를 양주 땅까지 유인하였다가 태조가 속은 줄 알고 다시 함흥으로 되돌아 가려고 이곳을 떠 남으로서 이곳의 지명이 ‘퇴조원(退祖院)’이 되게 하였다.

  태조가 함흥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시 법성사(法性寺: 현 회룡사) 주지로 있던 무학대사가 길을 막고 태조를 절로 초치하여 설득함으로써 발길을 서울로 돌리는 회룡(回龍: 용 즉 임금을 돌려 놓았다는 뜻)의 역사를 만들어 함흥차사를 종식시키고 부자간의 갈등(葛藤)을 해소하여 조선조의 기초를 굳건히 한 현장이기도 하니 회룡사(回龍寺)는 비록 조그마한 절이지만 조선조의 개국(開國)에서 회룡(回龍)에 이르는 초기 격동의 역사와 무척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곳이었다.

<환우지능수사대(환宇只能囚四大)>
  이야기를 회룡사를 5창(五脹)한 예순(禮順)비구니로 옮겨보자.
  동평위공사문견록 (東平尉公私聞見錄 : 효종의 다섯째 사위인 동평위 정재륜(鄭載崙)이 듣고 보고한 세종-숙종 연간의 일들을 기록한 책)에 ‘이귀의(李貴)의 딸이 아버지를 구하다’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자겸(金自兼: 靖社 一等功臣 金自點의 弟)의 부인 李氏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仁祖反正을 主謀하여 靖社一等功臣이됨)의 딸이다. 일찍이 과부가 되어 책을 많이 읽고 출가(出家)해서 비구니승이 되었다. 궁녀(宮女)들이 이 여승을 존경하고 신복해서 왕래하면서 가까이 지냈다.
  계해년(癸亥年: 仁祖反政이 일어난 해, 서기 1623년)에 반정(反正) 공작을 할 때 이귀(李貴)는 그 주모자였다. 이 공작을 염탐한 사람이 광해군(光海君)에게 고변(告變)을 하자 왕이 명하여 국청을 차리게 하고 나졸(邏卒)들을 풀어 이귀 일당을 잡아 들이게 하니 장차 그 화(禍)가 어떻게 미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여승 이씨(李氏: 李貴의 딸)가 광해군이 끔찍이도 사랑하던 김상궁(金介屎)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부친의 왕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한 가사(歌辭)를 적어 보냈다.
  김상궁이 이 편지와 가사를 보고 감동하여 이귀의 충성심을 믿게되었으며, 이 편지를 광해군 앞에서 읽어보였는데 그 편지의 글귀 하나하나가 모두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는 지라 임금의 마음도 측은해졌다. 이때 김상궁이 말하기를 ‘군왕이 이렇게 충성심이 가득 찬 신하를 형벌로서 다스리면 그 사람의 억울한 원한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니 광해군도 맞는 말이라 하며 옥사(獄事)를 풀게 하였다.
  그런데 그 날 밤 삼경(三更)에 반정군이 일어나서 궁(宮)을 깨끗이 쓸어내는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그 후에 한 늙은 궁인(宮人)이 손수 본 대로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이 정변을 역사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반정이 성공한 후 광해군은 강화-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정묘호란을 맞아 제주도로 이송되어 그 곳에서 죽었고, 물론 김상궁은 광해군의 난정(亂政)과 불륜(不倫)이 그녀로부터 비롯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그날로 붙잡혀 효시(梟示)되었고, 광해군의 난정과 불륜에 직,간접으로 관계된 이이첨, 박승종 등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다.

  문헌편찬회(文獻編纂會) 편 한국역대명시전서(韓國歷代名詩全書)에 예순(禮順)비구니 작으로 된 자탄(自歎)이란 제목의 한시(漢詩)가 한 수가 실려있다.

                    自歎(자탄)혼자 탄식함
  祗今衣上汚黃塵 (지금의상오황진) 어느새 이 몸 풍진 속에 더럽혔느니
  何事靑山不許人 (하사청산불허인) 청산마저 이 몸을 싫다는 구나
  환宇只能囚四大 (환우지능수사대) 하늘 땅 넓다 해도 이 몸 하나 둘 곳이 없네
  金吾難禁遠遊身 (금오난금원유신) 금오랑 넨들 어찌 멀리 멀 리 떠도는 이 몸 잡을 수 있으리
  *(주) 환우(환宇); 우주, 하늘과 땅, 온 천지를 말함
        사대(四大); 불가(佛家)에서는 세상 만물을 이루는 그 근본을 지(地),수(水).화(火), 풍(風)의 네 가지로 보고 이를 사대(四大)라 하며, 사람의 몸도 또한 이들 네 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보아 사대(四大)라고 함
        금오(金吾); 죄인을 잡아들이는 의금부 도사, 또는 저승사자를 이름

  이 짤막한 시 한수를 앞의 동평위공사문견록에 기록된 사실과 연관하여 음미 해 보자.
  여승 이씨(李氏)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몸과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속세를 떠나 불가(佛家)에 귀의(歸依)하여 청산(靑山)과 벗해 왔건만 부친의 신변에 급박한 위험이 닥쳐왔음을 알고도 속세의 일이라고 어찌 모른 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실과는 다른 거짓의 편지와 가사를 적어 자기를 믿던 김상궁에게 보내니 천우신조(天佑神助)로 김상궁과 광해군이 속아 넘어가 부친의 위급을 구하고 반정(反正)을 성공케 하는데 크게 도왔지만 많은 인명의 희생을 가져 왔으니 어찌 자기의 몸이 속세의 황진(黃塵)에 더렵혀 졌다는 생각과 죄책감에 번뇌(煩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祗今衣上汚黃塵)

  그러니 말없는 청산이지만 나를 용서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이 사물을 보는 그 자체가 곧 자기 마음의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니 마음이 죄책감에 젖어 있으니 자연히 청산(靑山)도 나를 용서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 같이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何事靑山不許人)

  가장 가까운 벗으로 여겨 왔던 청산마저 나를 용서 않으니 이 세상 넓은 우주 공간(환宇), 이루지 못 할 것이 없이 지극히 능하다(至能)지만 이 한 몸과 마음(四大)잡아 둘 곳(囚)이 없어 번뇌(煩惱)와 갈등(葛藤)으로 방황해야 했을 것이다.(환宇只能囚四大)

  이렇게 멀리 멀 리 방황하며 떠돌고 있으니 아무리 죄인을 잘 잡아 들인다는 금부도사나 저승사자인(金吾)들 이몸을 잡을 수 있겠는가?(金吾難禁遠遊身) 하고 시는 짤막하게 끝난다.

  예순(禮順)스님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 속에 속세(俗世)와 불가(佛家) 틈바구니에서 번민(煩悶) 하며 살고 가신 것 같다.
  인조 8년(서기 1630년)에 이 회룡사의 5차 확창(擴脹)에 힘 쓴 것도 속세의 일에 관여한 죄가(罪價)로 한없이 방황하는 자기의 마음을 달래고 속죄하는 의미가 내포(內包)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 당시는 부친이 요즈음 말로 '정권의 실세'였던 만큼 그 정도의 경제적 능력도 가능 했으리라 생각된다.

  이 조그마한 절, 회룡사(回龍寺)는 참으로 번뇌(煩惱)의 사원(寺院)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조 개국(開國)을 꿈꾸며 반의(反意)로 번민하였고, 태종과의 부자(父子) 갈등(葛藤)에서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회룡(回龍)을 놓고 번민하였으며, 예순(禮順) 스님이 불가(佛家)와 속세(俗世)의 틈바구니에서 번민하였다.

  예순스님이시여!
  당신께서 그토록 번민했던 그 속사(俗事: 仁祖反正)에 대하여 4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이 후손들은 난정(亂政)과 불륜(不倫)으로 점철(點綴)된 광해조(光海朝)의 문란한 기강(紀綱)을 바로 잡아 밝고 올바른 도덕(道德)과 인륜(人倫)을 세운 입기명륜(立紀明倫: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인륜을 밝게 한다)의 쾌거(快擧)요 나라와 민족과 우리 집안의 기틀을 공고히 한 정의로운 거사(擧事)로 생각하고 있음을 고(告)하나니 그 번민(煩悶) 훌 훌 떨쳐버리고 고이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