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강공(直講公) 추모비 건립괴 추모회 결성
沙月 李盛永(2007. 12. 8)
  거창에는 옛날부터 ‘오자암(五子巖)’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글자대로 하면 ‘다섯 아들 바위’인데, 내력인즉슨 뒤뜰에 있는 다섯 개의 바위 위에서 다섯 아들을 공부시켜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출세를 하니 사람들이 이 바위들을 오자암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한성 사대문안에서도 어려운 일을 벽촌 거창 모곡동에서 일궈냈으니 남들이 부러워할 만도 한 일이다.

  이야기는 조선조 테종-세종 연간에 이루어진 일로서 태조4년(1395) 한성에서 태어난 부사공 5세손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휘 末丁)은 연안이씨로서 남대(南臺) 백겸(伯謙)의 3자이며, 빙우(聘于) 평절공(平節公) 한옹(韓雍: 후에 장인이 됨)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세종8년(1426)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학행과 덕망으로 충청도 도사(都事)에 추천되어 수참(水站)과 판관(判官)으로 승진하여 지내다가 임금이 제수한 예빈시(禮賓寺) 소윤(少尹)을 사양하고 경상도 지례현(知禮縣) 지품(知品: 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지품)으로 낙향하였다가 다시 거창 모곡(茅谷)으로 이사하여 뜰에 수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뒤뜰의 반석 위에서 아들을 가르쳐 다섯 아들이 그 위에서 이업(肄業: 배우고 익힘)을 이루니 세상 사람들이 이를 오자암(五子巖)이라 불렀고, 아들들이 귀하게 되어 보조공신(補助功臣)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 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李末丁延安人南臺伯謙三子生太祖四年乙亥自漢城聘于平節公韓雍之門世宗八年丙午中司馬以學行德望薦爲忠淸都事陞水站判官禮賓少尹卜退居知禮知品又移居昌茅谷庭植數梅又遊盤石使五子肄業其上世稱五子巖以子貴贈補助功臣左贊成封延城府院君-금능군지)
「오자암(五子巖)」이업(肄業) 바로가기(클릭): 「오자암(五子巖)」이업(肄業)

  그 다섯 아들 중에서 장자가 직강공(直講公 휘 淑璜)이다. 직강공은 자(字)를 희보(姬輔)라 하며, 태종 중년에 태어났는데 천성과 자태가 너그러우면서도 굳세었다. 일찍이 유학(儒學)에 깊이 빠져 세종23년(1441)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세조13년(1467)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용궁현감을 지내고 승진하여 성균관 직강(直講: 정5품)을 지냈다. 만년에 관직을 버리고 늙어서 지례로 물러나 거문고와 술을 혼자 즐기고, 재물은 탐내지 않았으며 문장이 순수하고 아담하여 사림의 숭앙을 받았다. 지례향교중수기문이 있고, 군위 송호서원에 향사되었으며, 후손 판서 이명적(李明迪)이 찬한 묘갈이 있고, 주손(胄孫) 형균(馨均)이 사월(沙月)에 살고 있다.
  (李淑璜末丁長子子姬輔生太宗中年天姿寬毅早從儒染世宗二十三年辛酉司馬世祖十三年戊子文科歷龍宮縣監陞成均館直講晩年棄官退老于知禮琴酒自娛與物無競文章粹雅士林崇仰有知禮鄕校重修記文享軍威松湖書院後孫判書明迪撰竭胄孫馨均居沙月-금능군지, 연안이씨 부사공파 세보)
직강공 문과 급제방 ‘春場榜(춘장방)’
  직강공이 세종23년(1441) 에 사마시에 급제 하였는데 이 해는 판사공파 저헌공(樗軒公 휘 石亨)이 삼장원을 하던 해이다.
  그런데 관직 등용문인 문과시험은 그보다 27년 후인 세조14년(서기1468년)에 춘장시(春場試)에 급제하였다.
  이 해는 공의 계제(季弟: 막내 동생) 양원공(楊原公 휘 淑 王咸)이 이미 문과(文科: 단종2년,1454), 중시(重試: 세조3년,1457), 발영시(拔英試: 세조12년,1466)를 모두 급제하여 사람들에게 ‘삼중(三重)’이라 불리게 된 2년 후의 일이다.

  금능군지에서는 이를 조종유염(早從儒染) 즉 ‘일찍이 유학(儒學)에 깊이 빠져서’라고 설명하지만 이에 추가하여 장자로서 이미 연로한 부친(연성군)을 모시고, 동생들의 학업과 출세를 뒷바라지를 하는 한 가정의 기둥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자신의 출세는 뒤로 미루다가 연성군이 졸하고(1461), 계제가 발영시까지 급제하여(1466) 공의 역할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뒤늦게 문과에 응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직강공이 성균관 직강(直講)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서울에 눌러앉지 않고 고향 시골로 낙향하였다.
  그 당시 장자 현감공(縣監公 휘 元禮, 開寧縣監)이 거창 모곡(茅谷)의 오자암 전설을 낳은 옛집을 지키고 있었고, 차자 참의공(參議公 휘 亨禮, 甲山敎授)은 처향(妻鄕)인 군위(軍威)에 분가하여 살고 있었고, 5자 감찰공(監察公 휘 終禮, 司憲府 監察)이 지례현(知禮縣, 柳村 朔洞에 墓)에 분가하여 살았다.

  공이 낙향한 곳은 장자가 있는 거창(居昌) 모곡(茅谷)이 아니라 지례(知禮)다.
  선고(先考: 延城君)의 묘소가 지례에 있고, 공의 묘소도 연성군 영후(塋後)에 있다. 또 성종17년(1486) 지례현감으로 온 야성(野成) 김수문(金秀文)이 지례향교를 중건하고 기문(記文)을 직강공에게 부탁하여 지은「지례향교 명륜당기(明倫堂記)」가 현재 지례향교에 액자로 걸려 있다.

  그러니까 공은 만년에 지례로 낙향하여 선고의 묘소를 지키고, 지례 향교에 관여하면서 만년을 금주자오(琴酒自娛) 하다가 선고 영후에 묻힌 것이다.
  지례향교중수기문은 선명홍치경오(宣明弘治丙午: 성종17년, 서기1481년)에 지었고, 5년 후인 홍치신해(弘治辛亥: 성종22년, 서기1491년)에 5자 감찰공(監察公 휘 終禮)가 대필한 유언장이 감찰공파 세마공(洗馬公)세파 13세손 현돈(鉉敦) 가(家)에 원문이 보존되어 있는데, 대필한 것으로 보아서 이후 얼마 안 있어 졸(卒)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마공 13세손 현돈가(鉉敦家)에 보존된 직강공 유언장

직강공의 성(李)는 쓰고 이름(諱: 淑璜)은 쓰지 않은 것은 자식이 대필하면서 부친의 諱를 쓸 수가 없어 안 썼고,
직강공은 수결(手決)만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대필한 감찰공도 자신의 이름을 쓰기가 민망하여 수결(手決: 終禮)로 대신한 것 같다.
  직강공에 관한 연대와 행적이 명확한 연보(年譜)는
      (1) 세종23년(1441) 사마시(司馬試) 급제
      (2) 세조14년(1468) 문과(文科) 춘장시(春場試) 급제
      (3) 성종17년(1481) 지례향교 중수기문 명륜당기(明倫堂記) 저술
      (4) 성종22년(1491) 감찰공이 대필한 유언장(遺言狀) 등이다.
현존하는 지례향교 건물들
(위로부터 대성전, 사반루, 강당)
지례향교 「명룬당기」바로가기(클릭): 지례향교 「명룬당기」
  공이 만년에 지례현 어디에 살았을까?
  연성군이 최초 낙향했던 지품(知品)을 고려할 수 있는데, 지품은 연성군의 묘소가 가깝고 연성군이 처음 낙향하여 살 던 곳이라 가능성이 있지만 낙향한지 얼마 되지 않아 거창 모곡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사는데 조건이 나빠졌던 것 같다.
  일설에는 큰 홍수로 감천(甘川; 일명 甘湖)의 물길이 바뀌어 부득이 떠났다고도 한다. 그러니 그곳으로 다시 갔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고려할 수 있는 곳이 사월(沙月: 현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사드레)이다.
  가까운 곳 유촌(柳村, 사드레서 4Km)에 공의 막내 감찰공(監察公 휘 終禮)이 분가하여 살았고, 얼마 후 그 후손들이 사드레(沙月)로 이사하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공의 장자(縣監公 휘 元禮)의 후손들 또한 대부분이 사드레(沙月)로 이사하였다.
  그래서 사드레(沙月)는 조선조 말기부터는 현감공 후손과 감찰공 후손이 섞여 전체의 90% 이상을 점하는 延李 집성촌이 되었다. 지금은 타성들이 많이 들어와 거의 반반 정도 된다.
  공의 후손들이 이 궁벽한 산골 사드레(沙月)로 몰려든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공이 만년에 이곳 사드레(沙月)에서 살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한 증거이다.
앞산 시루봉 산불감시초소에서 내려다 본 사드레(沙月)
왼쪽이 윗사드레, 오른쪽이 아래 사드레
  사드레(沙月)의 원 이름은 사등량부곡(沙等良部曲)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례현편의 고적(古跡) 난에보면 인근의 월이곡부곡(月伊谷部曲)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사드레(沙月)와 다레실(月谷)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례현편
  그런데 한국사대사전에 따르면 부곡(部曲)이란 향(鄕), 소(所)와 같은 말이라 하였고, 국어대사전에는
  '부곡(部曲)은 목축, 농경, 수공업 등에 종사하는 천민 집단 부락, 신라와 고려 때에 있었으며, 고려 때에는 특수 지방 행정 단위. 소(所)는 고려 때 천민(賤民)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모여 살게 하던 특수 행정구역, 향(鄕)은 고대 중국이나 신라, 고려의 부곡(部曲)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부곡(部曲)은 상민(常民)도 못 되는 천민(賤民)이 몰려 사는 마을인 것이다.
  이를테면 죄를 지어 복역한 전과자나, 죄를 짓고 숨어사는 죄수들이 몰려 사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이 산골 후미진 곳에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세상에 출세할 길이 막혔기 때문에 생계를 이어가는 방법이라고는 골짜기 손바닥 만한 밭떼기를 부치거나, 화전을 일구거나, 소규모로 가축을 키우고, 버드나무 가지나 싸리나무, 대나무로 광주리, 키, 바지개 등 수공예품을 만들어 장에다 내다 팔며 호구지책으로 삼는 길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사드레(沙月)가 고려시대 까지만 해도 이런 마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조는 말할 것도 없고, 일제를 거쳐 해방이 된 후에도 사드레(沙月)는 인근 부락 사람들이 무척이나 시기할 정도로 반촌(班村)으로 유세를 부렸다.
  오죽하면 일제 때 행정구역이 도(道)-시(市),군(郡)-동(洞),읍(邑),면(面)-통/반(統/班),리(里)로 바뀔 때 사드레(沙月)는 사월리(沙月里)가 되지 못하고, 사등리(沙等里)가 되었겠는가?
  초대 부항면장 김아무개라는 자가 인근 마을 갯절(丹山) 출신인데, 일제 때 일찍이 눈을 떠서 외지로 나아가 일본말과 일본글을 배워 고향에 돌아와 초대 부항면장이 되어 행정구역 개편의 주역이 된 것이다.

  행정구역 중 리(里)의 명칭은 몇 개의 인근 자연부락 중 중심이 되고, 가장 큰 부락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것이 당연한 처사였다.
  예를 들면 다레실(月谷)과 학동과 몽고동을 모아 월곡리(月谷里), 어전(魚田)과 가목(釜項)을 모아 어전리(魚田里), 뱃들(丹평)과 지시와 조산동(造山洞)과 음지말과 아래두대(下垈)를 모아 하대리(下垈里), 윗두대와 해인동(海印洞)을 모아 해인리(海印里), 갈불과 대야동(大也洞)과 숲실을 모아 대야리(大也里), 안간(安澗)과 대평동을 모아 안간리(安澗里) 등이 그 예다.
  그 예에서 벗어난 것으로 갈계와 말미를 모아 두산리(斗山里)라 하였는데 이는 적절한 한자어가 없어서 새로 만든 이름이고, 대밭마와 봄내(春川)와 꽈리밭골을 모아 파천리(巴川里)라 하였는데 이는 춘천(春川)이 강원도청소재지 춘천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외의 이름도 다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갯절(丹坪)과 장자동(長子洞)과 한적동(閑笛洞)과 사드레(沙月)을 모아 사월리(沙月里)라 하지 않고, 굳이 옛날 천민이 살던 사등량부곡(沙等良部曲)의 이름을 따서 사등리(沙等里)라고 한 저의가 어디에 있는가?
  이미 작고했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선친을 ‘형님’이라고 불렀던 현재(鉉宰) 아저씨는 ‘김면장이 고집을 부려서 사월리(沙月里)로 하지 않고, 사등리(沙等里)라 한 것은 그자의 사드레(沙月)에 대한 악감정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지금이라도 탄원하여 사월리(沙月里)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나의 고향 사드레(沙月) 선인(先人)들은 사등(沙等)은 사월(沙月)을 모독하는 이름이라 했다. 신라-고려 때 천민들이 살 던 때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글자 풀이로도 ‘사드레 무리들’이라는 다분히 비하한 말이 되기 때문이다.

  신라-고려 동안에 상민도 못 되는 천민들이 귀양살이처럼 살던 사등량부곡(沙等良部曲)마을이 어떻게 해서 조선조에 들어와 행정구역 이름을 지을 때도 시기해서 그 이름을 잃게했던 반촌이 되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우리 延李, 특히 직강공(直講公)의 후손들이 몰려 사는 집성촌(集姓村)이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직강공이 만년에 낙향하여 여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그려 본다.

  직강공은 장자로서 선친(延城君 휘 末丁)을 모시고, 네 동생들의 학업과 출세를 뒷바라지 하면서 유학에 심취하였다가 선친도 작고하고, 네 아들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훌륭히 출세한 다은 늦으막이 문과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아가 성균관 직강을 지내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송의 말을 들었다.
  워낙 늦게 세상에 나갔으니 이미 연로하여 관직을 버리고 서울에 눌러앉지 않고 고향 땅에 돌아와 거창의 장자에게도 여생의 짐이 되지 않고, 선친의 유택을 돌 볼 수 있는 지례현 사드레(沙月)에 터를 잡고, 금주자오(琴酒自娛) 즉 거문고와 술을 홀로 즐기며 여생을 살았다.

  다행히 성균관 사마로 있을 때 직강공을 흠모했던 후진 야성(野成) 김수문(金秀文)이 지례현감으로 와서 지례향교를 중건하고 기문을 직강공에게 기탁한 것을 계기로 공은 지례향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자문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직강공은 사드레(沙月)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공의 여생이 길지 않아서 당대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겠지만 그 후진들이 공의 면학정신과 선구자적 정신을 이어받아 이 인근에서는 처음이고 유일한 서당, 월파재(月波齋)를 짓고 본격적으로 유학을 공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거창 모곡(茅谷)과 죽동(竹洞: 김천시 대덕면 대리)에 살던 장자 현감공(縣監公 휘 元禮)의 후손들과 유촌(柳村: 김천시 부항면 유촌)에 살 던 5자 감찰공(監察公 휘 終禮)의 후손들이 선조 직강공이 일군 사드레(沙月)로 몰려 들어 조선조 후반기와 일제 해방 후에도 90%를 넘는 가구가 延李 집성촌이 되었고, 몇 집 안 되는 타성은 延李 집안의 허드레 일을 도와주는 일꾼으로 살았다.

  내가 어릴 때도 사드레(沙月) 마을에는 ‘놈이’라고 부르는 나이 많은 사람 부부가 온 동네 잔치에는 가장 든든한 일꾼으로 일했고, 그가 말랑에 올라와 웃뜸을 향해 “건넌들 보 막으로 나오이소---’하면서 소리치는 것을 들으면서 자랐다.

  지금은 스피커에서 이장(里長)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후! 후!?--에! 사등 동민 여러분! 대산농협에서 전달하는 사항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년도 벼 품종 신청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 사드레(沙月)가 마을 이름마저 잃어버리게 될 정도로 남들이 시기하는 반촌이 된 경위일 것이다.

  사드레(沙月)에 살아온 延李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沙月」 이름이 지어진 내력 또한 다분히 낭만적(浪漫的)이다.

  600년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지경 삼도봉(三道峰)에서 발원하여 사드레(沙月) 마을 앞에서 앞산 시루봉(甑峰)에서 벋어 내린 산줄기 때문에 급히 회돌이쳐서 장자동과 한적동 앞으로 흘러가는 앞냇물은 지금은 부항천(釜項川)이라 이름 지어졌지만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완성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내감천(內甘川)이라 표기되어 있다.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대덕, 지례를 거쳐 김천, 선산으로 흘러 가는 물을 감천(甘川)인데 발원지-지례 간을 외감천(外甘川)이라 표기하고 있으니 상대적인 이름인 것이다.

  내감천물이 다레실(月谷)에서 사드레(沙月)로 너머오는 경계 협곡이 서낭댕이(城隍堂)인데 여기서부터 냇물을 사이에 두고 사드레(沙月) 마을 쪽은 산골 치고는 꾀나 넓은 들판, 방내(坊川)들과 앞들이 이어지고, 물 건너 쪽은 옷자락에 붙은 옷섭 만큼이나 될까 말까 하는 쇠목(金項)들과 건넌들이 앞산 시루봉 줄기의 그늘 속 물가에 겨우 붙어 있다.
  이 내감천 물 이쪽 저쪽에 붙어있는 들판이 내감천 물이 회돌이치 바람에 마치 초생 달처럼 생겼는데 상현(上弦: 음력 7-8일 달, 초생달)이 아니라 하현(下弦: 음력 22-23일 달, 그믐달)을 이루고 있다. 즉 보름달로 둥그렇게 커지는 달이 아니라 그믐달로 기울어지는(斜) 달(月)이다.
서낭댕이서 바라 본 사드레(沙月) 마을과 부항천 그리고 들판
냇물이 부항천(釜項川, 옛 이름 內甘川), 냇물 왼쪽 들이 방내(坊川)들과 앞들, 오른쪽 들이 쇠목(金項)들,
건넌들은 곱돌백이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부항천을 사이에 둔 양쪽 들이 하현(下弦: 그믐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사월(斜月)이라 했다가 한자 뜻에 민감한 식자(識者)들이니 ‘사월(斜月)’이면 ‘달(마을)이 기울어진다’는 뜻이니 이는 마을이 흥하지 않고 망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斜)’자를 ‘사(沙)’자로 바꾸어 '사월(沙月)'이라 하였고, 우리 토속 발음으로 ‘사달’- ‘사드레’로 변음되었다는 것이다.

  ‘한 없이 넓게 펼쳐진 모래펄 위에 교교한 달빛이 비쳐 모래알이 빤짝 빤짝 빛나는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낭만적인 이름이 사월(沙月)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드레(沙月)에는 부항천이 급경사에다 회돌이치는 물길이라 모래펄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나 조상들이 이름 지으며 마음에 품었던 드넓은 모래펄이 마음 속에 펼쳐져 있고, 이 산골 마을에도 초생달이건 보름달이건 그믐달이건 떠고 지면서 비쳐준다.

  지금 직강공 후손들이 직강공 추모비 건립과 추모회 결성을 추진하면서 추모비를 이와 같이 직강공의 행적과는 끊을 수 없는 유서 깊은 사드레(沙月)에 세우기로 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추진위원장 명의로 개인에게 보낸 (1)호소문, (2)계획안, (3)후손 통계(종파별 부담금), (4)헌성금(獻誠金) 납입서 양식을 올린다.

(1) 호소문(呼訴文)
직강공추모비건립과 추모회결성에 따른
호      소      문
  국추지절(菊秋之節)에 직강공(直講公) 할아버지 후손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다같이 자랑스런 직강공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직강공 묘사(墓祀)와 벌초(伐草: 掃墳)를 우리가 하지 않고, 원터 정양공(靖襄公 휘 淑琦, 직강공의 弟)의 후손(연성군 종회 유사)에게 쌀 1가마니를 주고 위탁해오고 있었으나 금년부터 원터 유사가 직강공 묘소 관리는 더 이상 할수 없다는 것을 제의해 왔습니다.
  이런 당면한 사항을 지난 9월13일에는 사월 종회, 9월 15일에는 시조공 묘비 제막식후 대전에서 50여명의 군위종원들에게 보고하였더니 직강공추모비건립 및 추모회결성을 전원 찬동하므로 10월 13일에는 군위 송호서원에서, 10월 15일에는 원터 직강공 산하 영모제에서 종회를 개최하고 별첨 계획서를 확정하고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금년 구정 전후까지 헌성금(獻誠金)을 모금해서 명년 봄에는 추모비를 제막고유제(除幕告由祭)를 성대히 개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현재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15대조(鉉자 기준) 직강공(直講公 휘 淑璜) 할아버지의 자손은 2006년도 발간한 세보(世譜) 기준으로 4,808명이나 됩니다. 뿐만 아니라 두 손자(國柱, 國衡)를 중제(仲弟: 靖襄公 휘 淑琦)와 계제(季弟: 楊原公 휘 淑 王咸)에게 계출(系出)하여 세계(世系)를 잇게 하였으니 이를 합친 혈손(血孫)으로 계산하면 연성군(延城君 휘 末丁) 자손의 95%를 점하고 있습니다.
  직강공 할아버지는 생졸년이 미상이나 세종23년
(서기1441년: 延李 判事公派 樗軒公이 三壯元한 해)에 이미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일찍부터 유학(유학)에 정진하였고, 장자(長子)로서 오자암 전설을 낳은 거창 모곡(茅谷)의 서당집을 지키면서 선친(휘 末丁)을 모시고, 네 아우(淑珩,淑珪,淑琦,淑 王咸)들의 학업과 출세를 뒷바라지 하느라고 자신의 출세 관문인 문과(文科)는 계제 양원공이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함으로서 문과 중시(重試)와 함께 삼중(三重)이 된지 2년 후이고, 사마시에 급제한지 27년 후인 세조14년(서기1468년)에 문과 춘장시(春場試)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 용궁현감, 장예원사평, 홍문관 부수찬과 교리를 거쳐 성균관(成均館: 현 국립서울대학교에 해당) 직강(直講: 정5품, 현 교수)을 마지막으로 지례현 사월(沙月)로 낙향하여 연성군의 유택을 지키면서 거문고와 술을 벅삼아 홀로 즐기면서 재물을 탐내지 않고(琴酒自娛 與物無競) 여생을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증직으로 승문원 판교(判校: 정3품)와 의정부 찬성(贊成: 종1품)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직강공의 이력을 바탕으로 그 생애를 새겨보면
  ① 공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한 장자(長子)의 표상이었습니다. 자신의 출세도 뒤로 미루고, 모곡(茅谷)의 서당집에서 선친을 모시고, 아우들의 학업을 돌보다가 아우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제 앞가림을 할 때쯤 늦으막이 벼슬길에 나섰습니다.
  공의 아호(雅號)를 모헌(茅軒)이라 한 것도 장자로서 이곳 모곡(茅)의 집(軒)을 지키겠다는 공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퇴관 후에도 서울에서 눌러 앉거나, 장자(長子 휘 元禮)가 지키고 있는 옛집, 거창 모곡의고향집으로 가서 편안한 여생을 얻지 않고 연성군 선영이 있는 지례(知禮)에 머물러 선영을 돌보며 지내다가 졸(卒)한 후에는 선영의 뒷자락에 묻혔습니다.

  ② 공은 일찍부터 유학(儒學)에 정진하여 학문적으로 깊은 경지에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유학에 빠져 사람들은 공을 조종유염(早從儒染: 이찍부터 유학에 물들었다)이라 평하였고, 느즈막이 문과를 준비하기 위한 사마(司馬: 성균관 학생)로 있을 때 후에 대제학을 지낸 야성(野成) 김수문(金秀文)이 공의 글을 보고 여러 사마들 중에 가장 명망이 높다(名升諸司馬)고 하였고, 공이 지레로 낙향하여 있는 동안에 지례 현감으로 와서 지례향교를 중건하고,(明倫堂增築) 공에게 기문을 위촉하여 지은 지례향교명륜당기(지례향교명륜당기)가 지금까지 지례향교에 잘 보존되어 있는데 문장이 순수하고 우아하여(文章粹雅)하여 사림(士林)의 숭앙을 받아왔습니다.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있을 때 후에 사육신의 한 사람이 된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가 공을 일대종사(一代宗師) 즉 ‘한 시대의 으뜸가는 스승’이라 평하였습니다.

  직강공의 묘소는 연성군 묘소 뒤에 계시고 화음공(華陰公 휘 明迪)이 찬한 묘갈비가 있지만 세월에 퇴락(頹落)되어 글자를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일제 해방후 후손들은 공의 선친인 영성군의 신도비를 상원 앞 감호천변에 세웠고, 장자 현감공(縣監公 휘 元禮)의 유허비를 거창 상도평(上道坪), 차자 참의공(參議公 휘 亨禮)의 유허비를 군위 외량(外良), 5자 감찰공(監察公 휘 終禮)의 신도비를 김천 부항 유촌(柳村)에 세웠습니다.
  위 아래가 그런대로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금석문(金石文)을 갖추었는데 오직 직강공만이 빠졌습니다.

  또 공의 시제(時祭)와 소분(掃墳)을 위한 위토 4두락이 20여 년 전부터 경작자가 없어 폐답이 된 후로 사월 종손과 종중에서 연 백미 1가마니를 연성군 유사(정양공 후손)에게 제공하고, 시제와 소분을 기탁하여 왔는데 금년에는 소분을 거절하여 중추절이 한 달이나 지난 지금까지 산소가 산처럼 잡초가 우거져 유택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소분을 하지 않은 직강공 묘소 풍경
추석이 지닌지 한 달
  직강공 후손 여러분!
  이렇게 효와 우애와 학문에 대한 열의로서 한 생을 살다 가신 우리의 선조 직강공께서 우리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이렇게 홀대를 받고 계십니다. 삼정승불여일대제학(三政丞不如一大提學) 즉 '정승 세 사람이 대제학 한 사람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직강 선조의 혈손으로 행증직(行贈職)을 합치면 네 분의 대제학을 배출하시고
(五峰公 휘 好閔, 靑蓮公 휘 後白, 守拙齋公 휘 友閔, 晩沙公 휘 景義), 연리광김(延李光金)을 자랑으로 빛내주신 우리의 할아버지 직 강공을 이렇게 계속 방기해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직강공추모회(宗會)를 결성하고, 시제와 소분을 걱정하지 않도록 기금을 마련하여 우리 후손들이 남들보다 뛰어나가 하지는 못하더라도 선조를 모시는 도리에 맞도록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직강공추모비건립과 추모회결성계획을 첨부하오니 우리 후손된 분, 한사람도 빠짐없이 적극 호응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추신: 동봉한 헌성금 납입 용지에 기입해서 부회장 겸 충무인 시영 총무에게 송금하시고 납입 용지도 보내주시면 성금록 작성에 참고하겠습니다. 100만원 이상 헌성금자는 별도 돌에 그 이름을 영구히 남기기로 하였습니다.
2007년 10월 일
직강공추모비건립추진위원장 직강공 16세손 鉉敦 謹拜

직강공후손 제위             귀하
(2) 직강공선조 추모비 건립 및 추모회 구성계획안
                ** 추모비 건립과 추모회 기금 확보방안은 두 가지인데
                    1) 후손 각 지파 종회에 부담금(負擔金)을 할당 하는 것과
                    2) 후손 개인이 헌성금(獻誠金)을 내는 것이다
(3) 직강공 후손 통계와 종회별 부담금 할당표

  * 부담금은 각 세파별(細派別)로 관자(冠者)의 수를 100명 단위로 4사5입 하여 X 만원 한 것이다.
      (冠者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사람이고, 童者는 미혼을 말한다)

  * 장자 현감공(縣監公 휘 元禮)파는 1개의 종회를 유지하고 있으며 자손 관자 298인으로 부담금은 300만원이다.

  * 차자 참의공(參議公 휘 亨禮)파는 송오공(松烏公 휘 軫)파 4게 세파
(都事公派, 澄心亭公派. 奉事公派, 參奉公派)와 남계공(南溪公 휘 輔)의 5개 세파(細派: 判官公派, 別座公派, 監正公派, 修軒公派, 同樞公派)를 합한 것이며, 자손 관자는 총 1583인으로 부담금은 합하여 1,600만원이다.

  * 5자 감찰공(監察公 휘 終례)파는 5개 세파
(細派: 引義公派, 洗馬公派, 參奉公派, 金泉 木川公派. 居昌 木川公派)로서 자손 관자는 464인으로 부담금은 600만원이다.

  * 각 종파 부담금 합계는 2,500만원이다.

    (3자와 4자는 무후 또는 계출하여 자손이 없다.)
(4) 헌성금(獻誠金) 모금

  헌성금납입자는 명단과 헌금액수 뿐만 아니라 위 납입서 양식의 전 내용이 헌성금록(獻誠金錄) 책을 만는데 사용되며, 100만원 이상 헌성금자는 그 명단을 비석으로 새겨 추모비 옆에 별도로 세운다.
  직강공 추모비는 모두 세 개의 비로 구성할 계획인데 한문(漢文)으로 된 직강공의 행적 등을 새긴 주비(主碑)를 가운데 세우고, 한쪽에 국한문 해역비(解譯碑)를 세우고, 다른 쪽에 100만원 이상 헌성금자의 명단을 새긴 헌성금비(獻誠金碑: 臥碑)를 세울 계획이다.

  위 헌성금 납입서 양식을 작성여 마지막 난에 적은 헌성금액을 아래 적힌 이시영총무의 구좌
(농협중안회 대구중앙지점 703-01-419393)로 보내고,
  이 헌성금 납입서 용지는 우편으로 역시 총무 주소
(대구시 달서구상인1동1524번지 동서APT 105동 1307호)로 보내면 헌성금록 책을 만드는데 사용되고, 100만원 이상 헌성금자는 명단을 뽑아서 비석에 새긴다.

 헌성금은 관자(冠者)와 동자(童者), 직계(直계) 후손과 방계(傍系) 후손, 딸네(女息) 구분없이 할 수 있다.


  * 성명에 본인 뿐만 아니라 부친(先考)의 이름을 쓰도록 한 것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