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津寬寺) 우정(友情)
沙月 李盛永(2006. 11. 8)
 북한산 비봉(碑峰: 정상에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어 명명된 이름)의 북쪽 계곡 중간쯤에 있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고색창연한 절이 진관사(津寬寺)다.
진관사 일주문
  이 한적한 사찰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탄로되어 세조로부터 모두 죽임을 당한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중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네 사람과 세조의 편에 서서 정승이 되고, 정난(靖難) 2등, 좌익(佐翼) 1등, 익대(翊戴) 1등, 좌리(佐理) 1등 네 번의 공신에 책록되는 등 최고의 영달을 누렸으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변절자로 남아 ‘숙주나물’이란 말이 생겨나게 된 신숙주(申叔舟), 그리고 우리 연이(延李)의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등 여섯 사람이 젊은 시절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나누던 곳이다.

  세종20년(1438) 임금이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을 시켜서 권채, 남수문, 신석조 등 세 사람을 뽑아서 장의사(藏義寺: 현 구기 초등학교 자리)에 휴가를 주어서 공부하게 하였는데 이를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주어서 독서함) 라 하였다.
  이것이 제도화 되면서 훗날 중종 때 두모포(豆毛浦: 지금의 옥수동, 옛날에는 포구가 있었음) 건물을 짓고 이곳에서 사가독서 하게 하면서 독서당(讀書堂)이라 하다가, 湖堂(호당) 이란 현판을 걸면서 호당이란 명칭이 보편화 되게 되었다.

  호당(湖堂)이란 ‘호수 가에 있는 집’이란 뜻인데, 이 독서당 건물에 호당이란 현판이 붙게 된 내력은 이러하다. 한강이 서울의 남쪽을 휘감고 흐르면서 여러 개의 이름을 얻는다. 하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면 서강(西江), 마포강(麻浦江), 용산강(龍山江), 그리고 지금의 옥수동 앞으로 올라와서는 ‘동강(東江)’이라 하지 않고, 동호(東湖)라 불렀다. 그것은 이곳이 다른 곳보다 강폭이 넓어서 물살이 없고 호수처럼 잔잔했기 때문이다.

  이 호수 같은 동호는 지금까지 이 주병의 지명과 다리 이름에까지 어원이 되었다. ‘물(水)이 옥(玉)같이 맑다’ 하여 옥수동(玉水洞), ‘강이 비단(錦)를 깔아 놓은 듯하다 하여 호수(湖) 같다’ 하여 금호동(金湖洞), 또는 ‘강물이 아침 햇살을 받아 금(金)가루를 뿌려 놓은 호수(湖) 같다 ’ 하여 금호동(金湖洞), ‘동호(東湖) 위에 놓인 큰 다리(大橋)’라 하여 동호대교(東湖大橋) 등의 이름들이다.

  호당(湖堂)은 일종의 인재양성(人才養成)제도이다. 덕이 있고, 글 재주가 있는 장래가 유망한 젊은 문신들을 대제학이 엄선하여 임금이 장기 휴가를 주어서 좋은 환경 속에서 독서(공부)에 전념하게 하고, 끝 난 후에는 특진을 시키는 제도였다.

  호당제도는 세조 때와 연산군 때 일시 중단한 적은 있지만 숙종 때까지 이어지면서 총 39회 291명이 호당에 선발되었다고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수록되어 있다.(호당 선발자 명단: 첨부)

  세종24년(1442) 집현전 대제학 권제(權?)가 제 2회 호당으로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 인수(仁搜) 박팽년(朴彭年), 근보(謹甫) 성삼문(成三問), 중장(仲章) 하위지(河緯地), 청보(靑甫) 이개(李塏) 그리고 우리 연이(延李)의 백옥(伯玉) 이석형(李石亨) 등 여섯 사람을 선발하여 북한산 비봉 북쪽 계곡에 있는 진관사(津寬寺)에서 함께 공부하게 한 것이다.

  호당에서 공부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구하지 못하여 잘 알 수 없으나 대동야승(大東野乘), 용제총화(傭齊叢話)에 위 세종 24년 제2회 호당 때의 활동 내용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진관사에 적을 두고 있던 일암(一庵)이라는 스님이 항상 이들을 따라다니면서 기록하여 전한 것이라 한다.

  활동 내용을 보면 ‘三角山(삼각산: 북한산)’, ‘紙燈(지등: 종이 등)’, ‘高山放石(고산방석: 높은 산에서 돌 굴리며)’, ‘聞笛(문적: 피리 소리를 들으며)’ 등 네가지 시제(詩題)로 4, 5인이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시를 읊어서 합치는 연구시(聯句詩)를 지었다. 이들 중 지등, 고산방석, 문적 세 개의 연구시는 저헌문집(樗軒文集: 樗軒公 李石亨의 문집)에도 올라 있다.

  高山放石(고산방석) 연구시에서 몇 구절만 옮겨 본다.
高山放石(고산방석) 높은 산에서 돌을 굴리며
          高山千萬 人刃(고산천만인) 自上放巖石(자상방암석) 천만길 높은 산에서 그 위에서 돌을 굴린다.(성삼문)
          乍訝響雷霆(사아향뢰정) 숙如飛霹靂(숙여비벽력) 그 소리 천둥이 아닌가 의심스럽고, 빠르기는 벼락이 내리치는 듯 하네(이개)
          擊木驚搖翠(격목경요취) 傾崖觸噴白(경애촉분백) 나무를 치니 푸른 잎새 놀라고, 절벽에 부딪치니 흰 연기 품어내네(신숙주)
          猛獸盡橫 牛자3개(맹수진횡분) 丈夫皆僻易(장부개벽이) 맹수도 모두 뛰어 달아나고, 장부도 모두 뒤로 쭉 물러나야 하네(박팽년)
          飛走任高低(비주임고저) 東西隨觸激(동서수촉격) 날아서 달려감은 높낮음에 달렸고, 동서로 움직임은 격하게 부딪침에 달렸네(이석형)

  세종29년(1447)에 시행했던 문과(文科) 중시(重試) 결과 발표에는 진관사 호당 친구 여섯 중 하위지를 제외한 다섯 사람이 방목에 올라 있는 것을 보면 이분들은 젊은 엘리트로서 항상 선의의 경쟁을 하는 사이었던 것이다. 이 때 중시와 ‘팔준도(八駿圖)’ 시제를 가지고 치룬 재시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방목에 발표된 급제자는
  을과 1등 3인으로 성삼문(成三問), 김담(金淡), 이개(李塏) 등이고,
  을과 2등 7인으로 신숙주(申叔舟),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 이석형(李石亨), 송처관(宋處寬), 유성원(柳誠源), 이극감(李克堪) 등이며,
  을과 3등 9인으로 정종운(鄭從韻), 이예(李芮), 김증(金曾), 조섭융(曺燮隆), 이승소(李承召), 이극효(李克孝), 정창손(鄭昌孫), 김예몽(金禮蒙), 김통(金統) 등이다.

  이 중시 때의 일화 하나가 전해지고 있다.
  중시를 치른 고관(考官)들이 급제자 19인을 뽑아 9위에서 19위까지는 석차를 정했는데 1위에서 8위는 서열의 고하를 정할 수가 없어서 임금에게 과차(科次: 서열)을 정하는 문제를 고하였더니 임금이 몹시 기뻐하면서 8인을 대상으로 재시험을 치게 하면서 팔준도(八駿圖) 그림을 놓고 여기에 병서(竝書) 할 글을 전(箋), 부(賦), 시(詩), 명(銘), 송(訟), 중에서 취향대로 글을 짓도록 하였다.

  팔준도(八駿圖) 는 태조 이성계가 고려 장수로 있으면서 북으로 야인, 남으로 왜구의 노략질을 토벌하면서 타고 다닌 여덟 마리의 말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 옆에 쓸 글을 지으라는 것이 중시 결선의 시험문제인 것이다.

  백옥 이석형은 전(箋)의 형식으로 天佑作之君聖人應千齡之運(천우작지군성인응천령지운) 地用莫如馬神物效一時之能(지용막여마심물효일시지능) 즉 “하늘이 도우사 임금을 내셨으니 성인(聖人: 태조를 말함)은 천년의 운수에 응했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보다 더 한 것이 없으니 신물(神物: 말)이 일시에 재능을 바치도다” 라는 뜻으로 두련(頭聯)을 쓰고 다음 구절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근보 성삼문이 다가와서 보고는
  “대(對)는 잘 되었지만 임금과 말을 대(對)로 하여 지었으니 너무 체모가 없지 않은가? 신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남에게 전해져서는 안 될 듯 하네” 하고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이석형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다시 장률(長律: 詩)로 바꾸어 지었다. 이석형이 답안을 바꾸는 것을 곁눈질로 본 성삼문은 이석형의 그 두련을 사용하여 전(箋)을 지어 제출하였다. 다음날 중시방이 나붙었는데 성삼문이 장원, 이석형은 일곱번째였다. 그 후 두 사람이 만나자 이석형이
  “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지 오래 되었는데---” 하니, 성삼문이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남에게 굽히지 않던 자네의 무릎을 내가 굽히게 했지” 하면서 둘이서 한바탕 웃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이들이 과거시험의 등수와 같은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대범했던 사람들이라는 것과 이석형이 성삼문을 비롯한 호당에서 우정을 맺은 사람들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석형은 사가독서 이후 세종25년(1445)부터 단종2년(1454)까지 10년 동안 집현전에 들어가 부교리(副校理: 종5품), 교리(校理: 정5품), 직제학(直提學: 정3품)을 역임하였는데 이 시기에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 진관사 호당의 친구들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집현전에 들어가 여러 분야에서 찬란한 세종대왕의 문화창달에 저마다 이바지 하였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올라있는 허봉(許封) 찬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집현전 출신으로 높은 직위에 올랐거나 유명하게 된 사람들의 인명이 열거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진관사 호당에서 함께 공부한 여섯 사람의 이름이 모두 들어있다.
  정인지(鄭麟趾: 領相), 이사철(李思哲: 左相), 정창손(鄭昌孫: 領相), 이계전(李季甸: 領院), 안지(安止: 領院), 김조(金 金兆: 判書), 김말(金末: 判樞), 신숙주(申叔舟: 領相), 박중손(朴仲孫; 참찬), 최항(崔恒: 領院), 김담(金淡: 判書), 이석형(李石亨: 判樞), 윤자운(尹子雲: 議政), 어효첨(魚孝瞻: 判樞), 노숙동(盧叔同: 參判), 양성지(梁誠之: 判書), 성임(成任: 判書), 이극감(李克堪: 判書), 이명겸(李鳴謙: 부윤), 김예몽(金禮蒙: 判書), 노사신(盧思愼: 領府), 한계희(韓繼禧: 西平君), 홍응(洪應: 贊成), 이승소(李承召: 參贊), 이파(李坡: 參判), 이예(李芮: 판서), 조근(趙瑾: 府尹), 강희안(姜希顔: 府尹), 강희맹(姜希孟: 判書), 최선복(崔善復: 府尹), 박건(朴楗: 參判), 허봉(許封: ?), 박중림(朴仲林: ?),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등이다.

  이석형이 세조1년(1455) 전라도 관찰사에 부임하여 세종 때부터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정인지, 유효통, 이석형 등 20인이 집필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전담하여 출간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다른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 사이 진관사 호당 친구들 중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이 유성원, 유응부를 합한 여섯 사람이 주동이 되어 영월로 귀양 가있는 단종을 다시 복원 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일이 여의치 않아서 발각되어 잡혀서 국문을 받고 처형되니 사람들은 이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른다. 반면 신숙주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오히려 세조 편에 섰다.

  세조2년(1456) 이석형이 전라도 관찰사로서 익산을 순시하던 중 사육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착잡한 심경으로 다음과 같은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 이라는 짧은 시 한수를 지었다.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 익산 동헌에서 짓다.
                    虞時二女竹(우시이녀죽) 순임금 때는 이녀죽의 슬픈 일이 있었고,
                    秦日大夫松(진일대부송) 진나라 때는 대부송의 영화로운 일이 있었네
                    縱是哀榮異(종시애영이) 이것은 비록 슬프고 영화스러움이 다를 뿐
                    寧爲冷熱容(영위냉열용) 어찌 차갑게(냉대), 따뜻하게(환대) 함이 용납되리

  * 二女竹(이녀죽): 중국 고대 삼화오제의 마지막 임금 순(舜)임금은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왕비를 두었는데 모두 요(堯)임금의 딸이다. 순임금이 남쪽 창오(倉梧) 지방을 순시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두 왕비가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소상강(瀟湘江)까지 와서 슬피 울었는데, 두 왕비의 눈물이 강가에 무성한 대나무 잎에 떨어져 반점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소상반죽(瀟湘班竹)’ 또는 ‘이녀죽(二女竹)’ 이라 하여 ‘슬픈 일’ 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 大夫松(대부송):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이 동쪽 맨 끝 산동지방에 우뚝 솟아 있는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통일을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올리려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미쳐 우장을 준비하지 못하여 비를 맞게 되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 밑에서 비를 피하고, 비가 그친 후 무사히 제사를 마칠 수 있었다. 제사를 끝낸 진시황이 그 소나무를 고맙게 생각하고 대부(大夫)의 벼슬을 내렸다.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대부송(大夫松)’ 이라 부르면서 ‘영화로운 일’ 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위의 시에서 이녀죽(二女竹)은 사육신(死六臣), 대부송(大夫松)은 이석형 자신을 말한다고 풀이하고, 이 시는 ‘슬픈 일을 당한 사육신 즉 이녀죽이나 영화를 누리고 있는 이석형 자신 즉 대부송이나 단지 슬프고, 영화스러움만 차이가 있을 뿐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사육신 그들을 냉대하고, 나를 열열히 환대할 일이 아니다’ 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 시가 세상에 전해지자 헐뜯기를 업으로 삼는 대간(臺諫)들은 ‘이 시는 사육신(死六臣)을 동정한 시’로 단정을 내리고, 이석형을 국문할 것을 간하여 결국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석형이 잡혀와 세조 앞에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세조가 부왕 세종대왕이 키우고 아끼던 집현전 학자들을 많이 처형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부왕이 아끼던 이석형을 벌해야 할 지 모른다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던지 곧바로 국문에 들어기지 않고, 국문에 앞서 이석형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정몽주(鄭夢周)가 고려에서는 어떤 사람이고, 우리 조선에 있어서는 어떤 사람인가?” (上問鄭夢周於高麗朝何等人我朝何等人)
  이석형은 세조가 하문한 것을 시(詩)로써 답하겠다 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올렸다.
李石亨詠詩而獻(이석형영시이헌) 이석형이 시로 읊어 올리다.
                    聖周容得伯夷淸(성주용득백이청) 주 무왕은 백이숙제의 깨끗함을 알아 주어
                    餓死首陽不用兵(아사수양불용병) 군사를 쓰지 않고 수양산에서 죽게 두었네
                    善竹橋頭當日夕(선죽교두당일석) 선죽교 머리에 그날 저녁
                    無人扶去鄭先生(무인부거정선생) 정선생을 따르는 사람도 업었는데

  이 시는 중국 주나라 무왕(武王)이 조국 은(殷)나라를 멸하려 할 때 이를 말리던 백이(伯夷), 숙제(叔齊) 형제의 말을 듣지 않고 은나라를 멸하자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뜯어먹고 살다가(무왕이 군사를 풀어서 잡아 죽이지 않고, 不用兵) 굶어죽게 내버려 둔 고사와 조선조 개국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인 일을 비교하면서 ‘정몽주는 고려의 신하로써 기울어지는 고려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대세를 돌이킬 만한 세력을 이루지도 못했는데(無人扶去) 그를 굳이 죽인 것은 도량이 좁은 처사’ 임을 은근히 꼬집는 내용이다.

  시를 읽은 세조도 이석형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그 시(익산동헌시)는 시인의 영감을 읊은 것일 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 하면서 이석형에 대한 국문을 중지하고, 또 이석형을 내직으로 불러들여 예조참의(禮曺參議: 정3품)에 임명하였다.

  이석형의 저헌문집(樗軒文集)에는 신숙주를 대상으로 쓴 시가 2수 있고, 이개를 대상으로 쓴 시가 2수, 하위지를 대상으로 쓴 시가 2수, 그리고 박팽년, 이개, 성삼문에게 한꺼번에 쓴 시가 1수 올라 있다. 신숙주는 시류에 붙어 출세한 사람이니까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이개, 하위지, 박팽년, 성삼문 등은 반역으로 처형된 사육신인데 그들과 우정을 나눈 시가 보존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특히 이석형은 후손과 후진들에게 戒溢(계일)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 정신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였고, 그의 시에서 '人崔 車不必在羊腸(최거불필재양장)' (넘어진 수례가 항상 험한 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라는 구절과 같이 그 행동에 있어서 항상 조심하고,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 우정이 느껴진다.

  진관사 우정이 흠뻑 스며있는 저헌공의 시들을 옮기면서 이야기를 끝낸다.
戱贈左議政泛翁(의증좌의정범옹) 희롱삼아 좌의정 범옹(신숙주)에게 증증한다
(전일 비속에 초대를 받고 술에 취해 돌아왔는데 어저께는 齋戒 때문에 집에 들어 앉아 나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體候가 어떠하신지요)
                    久霖當路起波瀾(구림당로기파란) 오랜 장마로 길 위에 물결이 이니
                    出戶猶如萬里艱(출호유여만리간) 집 밖에 나서기가 마치 만리 같이 어려워
                    ?借高陽濟川手(상차고양제천수) 고양의 강 건너는 솜씨를 빌린다면
                    直鞭?馬也無難(직편영마야무난) 여윈 말 채찍하여도 어려움이 없으련만---
書泛翁畵栗屛疊(서범옹화율병첩) 범옹(신숙주)의 밤나무 그림 병풍첩에 쓰다
(범옹이 姜希顔 景愚에게 그림을 요구하여 열장의 잡 그림으로 10폭의 병풍을 만들고, 또열명의 친구에게 각각 그림 한 쪽에 시를 구하였다)
                    正秋苞栗亂稜稜(정추포율난능능) 한 가을 밤송이 가시 어지러이 촘촘한데
                    收拾兒童好爛烝 (수습아동호난증) 아이들이 주워다 쩌 먹기 좋아하네
                    健脚傳方如有驗(건각전방여유험) 다리 건강해 진다는 약방문대로 효험이 있다면
                    天台仙舫也先乘(천태선방야선승) 천태산 가는 신선배는 (그대가) 맨 먼저 타리
次靑甫韻(차청보운) 청보(이개)의 운에 따라 짓다
                    藏魚洞裏絶纖鹿(장어동리절섬록) 장어동에 티끌이라고는 없는데
                    中有閒閒物外人(중유한한물외인) 그 가운데 한가로운 물외의 사람 있구나
                    莫用紛운雲雨手(막용분운운우수) 분분한 입신출세 말하지 말라
                    能爲孤絶鳳凰身(능위고절봉황신) 고고한 봉황의 몸 지닐 수 있는 것은
                    縱橫禮樂胸中瀉(종횡예악흉중사) 질서 정연한 예악 가슴에서 나오고
                    보물文章筆下新(보불문장필하신) 아름다운 문장 붓 끝에 새롭네
                    堪笑韓山煙雨意(감소한산연우의) 우습다 한산(韓山)에 이슬비 내리는 뜻을
                    其於何暇 山밑片 綸巾(기어하가편륜건) 그 어는 겨울에 윤건 쓰고 노닐 수 있겠는가?
                    *한산(韓山): 청보 이개가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여기서는 청보를 말함
山中代靑甫戱作(산중대청보희작) 산중에서 청보(이개)를 대신하여 희롱삼아 짓다
                    初來題柱學相如(초래제주학상여) 처음에 기둥에 쓰는 것 사마상여(司馬相如: 한나라 사람)에게 배웠건만
                    不意年年乃客居(불의연년내객거) 해마다 나그네 신세일 줄 어이 알았으랴
                    縱愛祗林閒歲月(종애지림한세월) 사찰 세월 한가로움 좋기는 해도
                    那堪萱초기문려(나감훤초기문려)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는 부모님 어이할거나
                    雪消山下溪聲急(설소산하계성급) 눈 녹은 산 아래에는 시냇물 소리 급하고
                    雲過峰頭樹影疎(운과봉두수영소) 구름 지나간 산봉우리에는 나무 그림자 성글구나
                    幾日鍊丹歸鳳闕(기일연단귀봉궐) 얼마나 연단(鍊丹: 선약을 만드는 것, 공부)해야 봉궐(鳳闕: 궁궐)에 가서
                    飄然羽化奉鸞輿(표연우화봉란여) 표연히 날아 올라 난여(鸞輿: 임금이 타는 가마)를 모실 수 있으려나
與仲章夜話(여중장야화) 중장(하위지)과 밤에 이야기를 나누다
                    土兆 燈兀坐耿無眼(조등올좌경무안) 등불을 돋우고 오똑이 앉아 자지 않으니
                    窓外松風自颯然(창외송풍자삽연) 창밖의 솔바람 절로 시원하구려
                    高論有時談世外(고론유시담세외) 고담준론, 때로는 세상 밖의 이야기
                    新詩聊與詠燈前(신시료여영등전) 새로운 시 애오라지 등불 앞에서 읊네
                    知心遇處眞爲友(지심우처진위우) 마음 알아주는 벗 만나면 참 벗이 되는 것
                    忘事閒人卽是仙(망사한인즉시선) 세상사 잊고 한가한 이 바로 신선이라
                    莫恨伊人今未到(막한이인금미도) 그런 사람 지금 오지 않는다고 한하지 말게
                    二人交契斷金傳(이인교계단금전) 우리 두 사람의 교계 단금(쇠도 끊는 것)으로 전하리
夜中戱次仲章戱贈(야중희차중장희증) 밤중에 희롱삼아 중장(하위지)의 운에 따라 지어주다
                    夜寂人稀醉復眠(야적인희취복면) 밤은 적적해, 사람 드물어 취해 다시 잠드는데
                    忽廳俉子歎悠然(홀청오자탄유연) 갑자기 그대의 유연한 탄식소리 들었네
                    風情不減紅塵裏(풍정불감홍진이) 홍진 속의 풍정 줄어지지 않았거니
                    魂夢常馳翠黛前(혼몽상간취대전) 혼몽은 항상 취대로 달리는 것을
                    松下尙看花下客(송하상간화하객) 소나무 밑에 아직도 꽃놀이 하는 이 보겠고
                    山中猶伴酒中仙(산중유반주중선) 산속에 오히려 신선과 짝지었네
                    未知誰是與誰僞(미지수시여수위) 모르겠네 누가 옳고 누가 거짓인가를
                    黑犬追豚自古傳(흑견추돈자고전) 검은 개도 돼지 따른다는 말 예부터 전해오네
寄山人朴仁搜靑甫謹甫(기산인박인수청보근보) 산사람이 박인수(박팽년), 청보(이개), 청보(성삼문)에게--
                    邇來酬酢幾篇詩(이래수초기편시) 근래에 몇 편의 시 수작했는데
                    春鳥앵앵日正遲(춘조앵앵일정지) 봄새들 지저귀니 해가 바로 더디 지네
                    三角雲煙依舊 金巢(삼각운연의구쇄) 삼각산 구름 연기 옛처럼 서려있고
                    九街楊柳至今垂(구가양류지금수) 구가(九街: 번화한 거리)의 버드나무 지금도 늘어져 있네
                    不才孱質人誰顧(부재잔질인수고) 재주 없는 잔약한 몸 그 누가 돌보랴
                    多病窮廬藥自宜(다병궁려약자의) 병 많으니 궁벽한 집에서 약 먹는 게 당연해
                    我謫山耶山謫我(아적산야산적아) 내가 산에 귀양 온 건지 산이 내게 귀양 온 건지
                    箇中消息總難知(개중소식총난지) 이 가운데 (그대들) 소식 도무지 알 수 없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