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정문 집안의 효자(孝子), 징사(徵士), 청백리
이기설(李基卨)
沙月 盛永(2009. 11. 17)
  이기설은 명종13년(1558)에 태어나서 광해14년(1622)에 65세를 수하였다. 자 공조(公造), 호 연봉(蓮峯),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유(儒), 불(佛), 선(禪)에 조예가 깊었던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18세 때 조모 광릉안씨(節婦)가 병환 때 지성으로 간호하였고, 20세 되던 해에 선친 영응선생(永膺先生: 李至男,孝子)이 병환으로 별세하자 애통해하며 효행을 다 하였다.

  선조10년(1577)년에 선조가 이기설의 효행을 듣고 충훈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효렴(孝廉)으로 천봉케 하니 예조에서 그의 효행을 조사하여 1년 동안 세 번을 재랑(齋郞: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21년(1588) 이조에서 이기설의 순덕지효(純德至孝)로 천거하여 은일(隱逸)로 주부(主簿:종6품)를 제수 받고, 또 청산 현감(縣監:정7품)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그 해 겨울에 무주(茂朱) 현감, 이듬 송화(松禾)으로 나갔다. 선조23년에는 공조 좌랑(佐郞:정6품)으로 처음으로 조정에 들어갔다.

  선조25년(1592) 경도(京都:漢城) 판관(判官:종5품)이 되었는데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민(都民)을 강화도로 피난시켜 천 여명을 구제하여 이듬해 정랑(正郞:정5품)에 승차하여 선릉(宣陵), 정릉(靖陵)의 도감(都監)과 군무의 기밀을 취급하는 낭청(郎廳: 備邊郞)의 일을 겸직하였고, 해주 행재소에 나아가 선조를 보필하다가 겨울에 대가를 따라 환도하여 호조 정랑으로 군향(軍餉)과 비국랑(備局郞)을 겸하다가 12월에 덕천 군수(郡守:정5품)로 나갔는데 선조27년(1594)에 부인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선조29년(1596)에 탈상하자 청양 군수에 제수돠었다.

  선조30년(1597) 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의 무고(誣告)로 인한 어려운 고비를 넘긴 후 나이 40세에 병을 핑계로 공직에서 물러나 일체의 부름에 응하지 않다가 선조32년(1599) 영상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상원(祥原:평남 중화) 군수를 나갔다.

  선조34년(1601)과 38년(1605) 선조가 유사에게 명하여 염근(廉謹>)과 덕행(德行)을 뽑을 때도 이기설이 응하지 않자 특명으로 선조34년(1601) 청백리(靑白吏)에 녹선되었다.
  이듬해에 연안 부사(府使:정4품)로 나가고, 선조36년(1603) 군자감 부정(副正:종3품)으로 들어왔으며, 선조38년(1605) 사도시(司導寺) 정(正:정3품)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조41년(1608)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이기설에게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을 제수하고 세 번 불렀으나 사양하고 선유봉(仙遊峰) 아래로 퇴거하였다.

  광해2년(1610)에도 비옥(緋玉:당상관 관복)을 내려 부호군(副護軍:종4품) 예빈시(禮賓寺) 정(正:정3품)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9년(1617) 소인배들의 폐모론을 제창하자 이듬헤 선유봉도 버리고 온 식구를 이끌고 도성에서 더 먼 김포로 이사하여 만년에 학문에 전심하여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학(律學), 병술(兵術) 등 다방면에 정통하다.
  광해14년(1622) 9월에 병으로 졸하였는데 묘표석에는 ‘징사(徵士)’라 기록하고 있으니 이는 '학식과 덕행(德行) 혹은 절행(節行)이 뛰어난 산림(山林)의 유일(遺逸)이 천거(薦擧)되어 조정에 나온 선비'를 부르는 존칭이다.(우리 연리에는 蓮峯公 외에도 息山 李萬敷가 있다)
이기설 묘표석(墓表石) '徵士(징사)'
  인조1년(1623)연신(筵臣) 정경세(鄭經世)의 건청(建請)으로 이기설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이조 참판(參判:종2품)을 체증(遞增)하였다.

  이기설의 효행(孝行)과 청백(淸白)과 지조(志操)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기설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7세부터 어른처럼 어버이를 섬기고,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소학(小學)에서 가르친 대로 이행하여 날마다 아침에 문안 드리고, 친히 음식의 차고 더운 것을 확인한 후에 부모가 잡수신 뒤에 물러나 먹고, 저녁에는 반드시 이부자리를 봐 드리고, 평상시에도 다른 일이 없으면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기설이 15세 때 형(基稷)과 함께 수암 박지화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수암이 형은 ‘영수(英秀)하다’고 하고, 이기설은 ‘화소(話素)하다’고 칭찬하였으며, 형제가 함께 학궁에 나가면 ‘쌍벽(雙璧)’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기설이 31세 때 효행으로 무주현감을 제수받아 나갈 때 모친을 모시고 가서 봉양함에 의복제구는 반드시 집안 것을 쓰고, 관청의 것을 쓰지 않았고, 평상시 식사도 나물밥으로 먹었다.

  이기설이 송화현감으로 있을 때 하루는 기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람을 시켜서 꿩을 잡게 하였으나 잡아오지 못하여 성효(誠孝)가 미진한 때문이라고 몹시 자책하였는데 제사에 임박하여 밤중에 꿩 한 마리가 대청으로 날아들어 이를 잡아 제수에 쓰니 사람들이 감탄하고, 송화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 꿩을 ‘효감치(孝感雉)’라 하여 이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고 한다.

  이기설은 임란 중 대가를 따라 환도하여 호조정랑으로 군향(軍餉)을 겸관하고 있을 때 당군이 입성하여 군향의 방출을 재촉하는데 호조에서는 이기설 밖에 처리할 사람이 없다 하여 맡겼는데 이기설이 당군 부대에 나아가 먼저 장령(將領) 대오(隊伍)의 수를 파악하고, 속셈으로 삼만석을 마당에 내려놓고, 차례대로 대오를 호명하여 잠깐 사이에 분배가 끝났다. 이후로 비국(備局)의 중요한 일은 이기설의 자문을 받아 시행하였다.

  이기설이 36세 때 덕천군수로 부임하는 도중 모친상을 입었는데 화적들이 상가를 침범했다가 이기설이 꼼짝하지 않고 슬피 울고만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이기설이 청풍군수로 있을 때 군사관계로 찬획사 이시발에게 처벌을 받은 후로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서호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성내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왕래를 끊고, 징벽(徵 僻에서人제거)하여도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청풍(청풍)이란 이름이 매우 좋아서 내 마지막 벼슬인 ‘청풍군수’의 칭호를 놓지지 않겠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를 ‘이청풍(李淸風)’이라 불렀고, 천신(薦紳)들도 이기설의 용퇴를 높이 찬양하였다.

  광해4년(1612)적성 땅에 자리 잡아 부모의 묘소를 한 곳으로 이장할 때 실화하여 빈소에 불이 나자 이기설이 몸으로 관을 막아 지켰는데 이때 머리털이 다 타고 중병을 얻어 죽을 뻔 하다가 회생하였다 한다.

  인조11년(1633)에 향교동 제현들이 이기설의 행장을 예조에 표백(表白)하여 인조가 조모 광릉안씨(節婦), 부친 지남(至男:孝子), 모친 동래정씨(節婦), 백씨 기직(基稷:孝子), 누이동생(孝女)과 함께 이기설(李基卨)효자(孝子)에 정려하도록 특명을 내리고, ‘孝子三世(효자삼세)’라는 사액을 내리니 ‘한 집안에서 한꺼번에 여섯 정문이 세워진 적은 세상에 아직 없었던 일’이라고 온 세상이 칭찬하고 탄복하였다.
이기설 효자 정려기(旌閭記)
효자삼세 어필
  이후 이기설의 아들 이돈오(李惇五)도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충신(忠臣), 부인 광주김씨는 열녀(烈女)에 정려되니 사람들은 ‘팔홍문가(八紅門家)’라고 칭송하였다.(연려실기술)

  그 이후에도 이기설의 차자 이돈서(忠臣). 삼자 이돈실의 처 전주이씨(節婦), 장손 돈오에게서 난 장손 이후성(孝子), 차자 돈서에게서 난 손자 이후잠(孝子), 사자 돈림에게서 난 증손자 이상기(孝子) 등 5개의 정문이 더해지니 6대에 걸쳐 모두 13정문(十三旌門)의 집안이 되었다.
13정려각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