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성공신(扈聖功臣), 만국(萬國)에 일찍 눈뜬 청백리
이광정(李光庭)
沙月 盛永(2009. 11. 15)
  이광정은 명종7년(1552)에 태어나서 인조7년(1629) 수78세로 졸하였다. 자 덕휘(德輝), 호 해고(海皐), 시호 문충(文忠), 봉호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이광정은 선조6년(1573) 22세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하고, 선조23년(1590) 39세로 늦게 문과 상존호경과(上尊號慶科) 증광시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 정자(正字:정9품)가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광정은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정7품)가 되어 세자(광해군)를 호위하고 서천 하는 도중 홍문관 정자(正字:정7품) 겸 지제교(知製敎)가 되어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가서 7월에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8월에 예조 좌랑(佐郞;정6품)으로 승차하였다.

  선조26년(1593) 8월 명군이 내원함에 따라 이광정은 명군접반사 이덕형(李德馨)의 종사관(從事官) 시작으로 왜란이 끝나는 선조32년(1599)까지 7년간 임난 수행에 적극 기여하는 여러 직책을 맡으며 조명연합을 통하여 왜군을 물리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중요한 것만 열거해 보면
    ① 선조26년(1593) 명의 전차수송 독려 차 평안도 현지에 나감.
    ② 동년 10월 승정원 동부승지(副承旨:정3품하)되자 사헌부와 사간원이 크게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시행함.
    ③ 동년 11월 개성에 가서 명군을 위문하고, 명군 간부와 접촉하면서 그 동정을 살피고 돌아와서 선조에게 보고 함.
    ④ 동년 12월에 명군이 군량문제로 시끄럽게 굴자 이광정이 선조에게 대책을 세워 바침. 성균관 전적(典籍:정6품) 지제교가 됨.
    ⑤ 선조27년(1594) 2월 명 유격 심유경이 일본과 강화교섭을 하면서 거짓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므로 이를 명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이광정이 진주사(陳奏使)로 가도록 결정하였다가 명군의 감정을 고려하여 결행하지 않음.
    ⑥ 동년 4월 이조 참의(參議:정3품)가 되어 명군 참장인 호택을 방문하였고, 5월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명사 고관들을 대동하고 호택을 방문할 때 이광정도 동반함.
    ⑦ 선조28년(1595) 우승지(右承旨:정3품상,禮坊)가 되고, 9월 선조가 숭례문에 나와 명사 이종성이 강화 시도 차 일본으로 떠나는 것을 전송할 때 이숭원이 예방승지로서 준비한 예단 선물을 전함. 10월 예조 참의가 됨.
    ⑧ 선조29년(1596) 정월에 좌승지가 되고, 6월에 경연(經筵)에 참찬관으로 참석함. 이몽학의 홍산난(鴻山亂) 반역옥사를 처리하고 가선대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상)이 됨.
    ⑨ 선조30년(1597) 2월 명의 책봉부사 심유경의 접반사가 되어 심유경의 동정을 선조에게 2월에 1차, 3월에 2차,3차 보고를 올림.
    ⑩ 동년 5월 명군 총병 양원이 양초 보급대책을 요구해 오자 이광정이 양초 수집과 보급 업무를 맡음.
    ⑪ 선조31년(1598) 2월 공조 참판(參判:종2품)으로 승차함. 7월 전라도로 내려가 양초 보급을 맡음.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에 가자(加資)됨,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반대함. 헌납 이이첨이 ‘이광정이 명군 제독 마귀의 접반을 잘못한다’고 트집을 잡았으나 선조는 듣지 않음.
    ⑫ 동년 9월 제독 마귀의 접반사 이광정의 통사 표정로가 무책임하게 함부로 통역한다는 것을 알고 선조에게 표를 추고하기를 요청하자 선조도 이광정의 뜻대로 처리함
    ⑬ 동년 9월 마귀의 접반사로서 울산 현장에 내려가 마귀기 왜군 가등청정과의 울산전투에 임하는 동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1차 보고하고, 10월에 2차, 3차, 11월에 4차 보고를 함.
    ⑭ 선조32년(1599) 정월 제독 마귀의 상경에 앞서 이광정이 먼저 상경하여 선조에게 마귀의 동정을 보고함. 2월에 호조판서에 임명됨
    ⑮ 동년 2월 5일 왜란이 끝나고 명군이 철군에 앞서 양미(糧米)의 비축이 부족하다고 불평 불만을 하자 이광정에 선조에게 양미 대책을 진언하고 호남의 군량미 조달을 담당함.
    (16) 동년 3월 한성 판윤에 제수됨

  이광정은 임란 수행과정에서 그 공적이 인정되어 임란후 선조의 신임 속에 여러 중책을 맡는다.
  선조34년(1601) 중추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정2품)로 있을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선조35년(1602) 호조, 예조, 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가을에 후비(后妃) 인목왕후의 주청(奏請) 정사(正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온 후 숭정대부(崇政大夫:종1품)에 가자되고, 대사헌(大司憲:종2품)에 임명되었고, 판돈영부사(判敦寧府事:종1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종1품), 예조, 이조 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선조37년(1604)에 있은 임란공로를 포상하는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지며,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정1품)에 가자(加資)되고,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다.

  광해조는 이광정에게 불운의 시기였다.
  광해3년(1611) 광해의 측근들은 비변사(備邊司)에 참석한 이광정에게 발언을 잘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이듬해 아들 이현(李 示玄)의 장인인 영의정 유영경을 유배시켜 사사(賜死)하고, 광해군은 그 시체에까지 형벌을 내렸다.(癸丑獄事)
  광해10년(1618) 이광정은 좌의정 한효순에게 이끌리어 어떤 회의에 나갔다가 인목대비를 폐출하자는 회의가 열리자 놀라 아무 발언도 하지 않았다.
  광해13년(1621)에는 이광정에게 호조판서가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받지 않았다.

  인조조에도 이광정은 광해군 아래서 벼슬을 살았고, 인목대비 폐출을 목적으로 한 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반대파로부터 많은 공박을 받는 괴로운 시기였다.
  인조1년(1623) 3월 이조 판서 임명을 받고 나오는데 “당신이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 폐출에 가담하고서 이번에도 대신 노릇을 할 수 있는가?”하면서 면전에서 공박하는 자도 있었다. 10월 공조, 이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인조2년(1624) 10월 이광정이 인목대비(仁穆大妃) 존호(尊號)를 올리는 사신으로 가게 되니 인조는 이광정의 노신(老身)의 수고를 생각해서 반숙마(半熟馬)를 내렸다. 다녀와서 이듬해 12월에 형조판서에 다시 임명되었다가 그 이듬해 자진 공직에서 사직하여 75세로 기사(耆社)에 들었다
  인조5년(1627)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이광정도 76세의 고령임에도 인조를 호종하여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인조는 이광정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오위도충부 도총관(都摠管:정2품)에 임명하였다.
  인조7년(1629) 2월 향년 78세에 병으로 졸하였다.

  이민구(李敏求)찬 이광정의 심도비문에는 그의 청백무사(淸白無私)한 자태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전하고 있다.
  이광정이 졸 한 후 많은 진신대부(縉紳大夫)들이
  “세상에 어떻게 공과 같이 청명(淸明)하고 온손(溫遜)하여 어렵게 벼슬에 나가고,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있겠는가? 명리(名利)가 일세를 풍미하여 절조(節操) 마저 뺏기는 세상에 공은 아도(雅道)를 깨끗이 닦아 이험(夷險)에 변함이 없었고, 작위는 높았으나 머리 숙여 지냈으며, 세도를 보기를 겁부(怯夫)가 함정을 피하듯 하였다” 고 하였다,

  학사후생(學士後生)들은
  “ 세상에 어떻게 공처럼 인심(仁心)이 바탕이 되어 청검(淸儉)하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광영은 피하고 아랫사람을 구제하여 말 한마디 하면서도 혹 사람을 다칠까 걱정하고, 안으로는 강방(强方)하여 남과 겨루지 않아 좋은자리에 30년을 있으면서도 본심은 한결같았다”고 하였다.

  향당(鄕黨)과 종족(宗族)들은
  “공은 내행(內行)이 독실하였으나 일가간에 더욱 자상하고, 어려서 부모를 섬김에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고, 귀하게 된 뒤에는 미처 봉양을 다하지 못했음을 서러워하였으며, 아우 창정(昌庭) 무애(撫愛)하기를 늙어서도 어릴 적 같이 하다가 그가 죽었을 때는 다섯달 동안 상선(常膳)을 물리치니 종당(宗黨)에서는 그 인자함과 의리에 감복하였다” 고 하였다.

  여대(輿臺)나 마졸(馬卒)들은 말하기를
  “우리 같은 천인들이 어찌 공을 알겠는가 마는 권문 요로에서는 한 번도 공의 수레를 보지 못하였고, 포저(蒲菹)나 청탁이 공의 문전에 이르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우리들의 촉망은 오직 공에게 있었다」 고 전하고 있다.

  이민구찬 신도비문에는 이광정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인목왕후 주청사로 연경에 갔을 때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공은 가을에 인목왕후 주청 표문(表文)을 받들고 연경에 갔는데 청엄(淸嚴)하고 방직(方直)하여 그 처신이 아랫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보좌관 한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겨울용 겉옷 한 벌을 샀다가 곧 후회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내가 사사로운 일로 우리 공에게 누를 끼칠 수 있겠는가?” 하고 진심으로 후회하니 많은 장사 속으로 이익을 추구하려던 사신에 따라 온 역관(役官)들도 이를 보고 서로 경계하면서 한 사람도 범한 일이 없었다」
고 하였다.

  역대 사신들과 이를 수행하는 역졸들이 국사는 뒷전이고, 귀중품을 구하거나 돈 될만한 물건을 가져와 치부(致富)하는데 온 신경을 써왔는데 이광정은 청엄방직(淸嚴方直)한 처신 솔선 모범이 되어 이러한 폐단이 없게 하였다.
  대신 치부와는 거리가 먼 우리 민족이 만국(萬國) 즉 세계(世界)에 눈을 돌리게 하는 귀중한 것을 가지고 왔다.

  즉 청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선교사 리마두(利瑪竇: Matteo Ricci,마테오리치)가 고국에서 가져온 세계지도에서 중국을 가운데 놓고, 지명들을 한자로 표기하여 개작(改作)한 세계지도를 많이 복제하여 보급하였는데, 이보다 20년 후에 사신으로 간 이광정이 이 셰계지도 1부를 구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세계지도다. 이를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 불렀다.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 밖에 모르던 조야의 사람들에게 '세계는 중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넓고, 많은 나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은연중에 마음 속에 사대(事大)로부터 자주성(自主性)을 싹트게 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민구찬 이광정 신도비문 말미에
  「세상에서 말하는 ‘이병(利柄)에 한 번만 들어갔다 나와도 집안이 따뜻해진다’는 직책을 여러 번 하였지만 공은 오히려 빙벽(氷檗)같은 절조를 깨끗이 하여 봉록 외에는 조금의 수입도 취하지 아니하였다.
  평생 집을 빌려서 살았고 심지어는 제기(祭器)를 두 벌도 장만하지 않았고, 시종 가난한 선비처럼 살았다.
  조정에서는 일찍이 공을 염근리(廉謹吏)에 녹하여 일세의 모범이 되도록 하였다」
고 적고 있다.

  또 이광정을 평하여
  「공은 참으로 중흥의 훈신(勳臣)이요, 현신(賢臣)이며, 충성(忠誠)으로 절조(節操)를 다하고, 청백(淸白)으로 행의(行誼)를 다듬어 진실로 신하의 도리를 다하였다」 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