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延安은 延李의 故鄕

沙月 李    永(延安李氏宗報 1987년 봄호, 통권제4호 게제, 增補)

우리 延安李氏의 본관 ‘延安’은 시조 봉호(封號) ‘延安伯(연안백)’에서 비롯된 것이며 황해도 연안(延安)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지금까지 황해도 연안을 우리 연안이씨의 관향으로 생각 해 온 많은 延李 사람들이 당황 해 하고 있다.

연안이씨종보 제2호 ‘나의 提言’에서 대종회 초대 간사장을 지낸바 있는 혜승(慧承)씨가 개인의 소견을 피력하면서 그 근거로 황해도 ‘延安’지명이 延李의 시조 중랑장의 봉호‘延安伯’보다 651년이나 뒤인 고려 충선왕2년(1310) ‘온주(溫州)’에서 ‘연안(延安)’으로 바뀌면서 처음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라는 연안 지명의 유래를 들고, 또 내국인에 대해서는 국내 지명을 본관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 통례이지만 귀화인애 대해서만은 예외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혜승씨가 제시한 연안 지명 유래(종보 통권제2호 게재 내용)

동음홀(冬音忽) 또는 시염성(豉塩城) – 해고군(海皐郡) – 염주(塩州) –1217년

영응(永膺) – 1259년 차송우 공로로 복주(復州) –1269년 이분희의 공로로 석주

(碩州) – 1298년 온주(溫州) – 1310년 연안부(延安府) – 1413년 연백군(延白郡)

 

이러한 논리상으로 보면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지명유래사전에서 연안 지명의 유래를 찾아 보았더니 위 혜승씨가 제시한 것과 같다.

지명유래사전 연안 편

고구려 때 冬音忽(동음홀) 一云 豉塩城(시염성), 신라 경덕왕 때 海皐縣(해고현), 고려초 鹽州(염주), 성종14년(단기3328년)에 방어사를 두었고, 현종 초에 방어사를 폐하고 해주에 소속하고 감무(監務)를 둠, 고종4년(단기3550년) 丹兵(단병: 글안병)을 막는데 공이 있어 永應縣令(영은현령)으로 승격, 고종46년에 이 곳 출신 차송우의 공으로 復州事(복주사), 원종10년(단기3602년)에 이곳 출신 이분희(李分禧)의 공으로 碩州(석주), 충렬왕34년(단기3641년)에 溫州牧(온주목), 충선왕2년(단기3643년)에 延安府(연안부)  * 단기3642년은 서기 1310년

 

또한 조선 성종12년(서기1481년) 여지승람 50권으로 처음 발간되고, 17년(1486) 동국여지승람 35권으로 정정 발간되며, 중종25년(1530)에 증보하여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편을 보면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신증동여지승람 연안도호부편

 

 

 

 

 

 

 

 

 

 


「원래 고구려의 동음홀(冬音忽: 音은 三으로 쓰기도 하고, 또 다른 이름으로 시염성豉鹽城이라고도 한다)이라 하다가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염주(염주)라 하였다. 성종조에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현종조 초기에 는 방어사를 폐지하고 해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조에 글안 군사를 맞아 싸워 공이 있으므로 영응현령(永膺縣令)으로 승격시켰으며 후에 또 고을 사람 차송우(車松祐)가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으므로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시켰다. 원종조에는 또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신이 되었으므로 석주(碩州)로 고쳤고, 충렬왕조에는 또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이 여러 목(牧)을 없이 할 때에 강등하여 부(府)로 하고, 지금의 이름(延安)으로 고쳤다. 본조(朝鮮)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고 경기(京畿)에서 다시 본도(黃海道)에 예속시켰다.」

 

① 그렇다면 황해도 연안은 우리 延李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말인가?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듯이 가문도 처음 열리고 기반이 굳혀진 곳이 있을 터인데 우리 延李의 고향은 어디란 말인가?

 

② 그러면(황해도 연안이 우리 延李의 관향과 무관하다면) 어떻게 시조 중랑장의 묘소가 연안에 있을까?

 

③ 延李 선조들은 물론 과 심지어 타성 사람들까지 왜 황해도 연안을 延李의 관향으로 생각하고 이 땅에 세워 진 그 많은 비문과 보학 서적에 그렇게 기록 해 놓았는가? 하는 등등의 의문이 잇달아 일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의문들을 다소나마 풀어보고자 하는 충정에서 수집된 기록을 바탕으로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延安은 始祖께서 닦은 터전

황해도 연안이 시조 중랑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지금부터 165년 전(조선 순조21년 서기1821년)에 월계공(月溪公 諱 文愚)께서 충청도 괴산에서 먼 황해도 연안을 수차에 걸쳐 오가며 천신만고 끝에 연안부 서쪽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에서 ‘延安伯李茂’라고 적힌 묘지석(본보 창간호 표지에 게재)을 찾아내어 그 실물과 자세한 굴득일기(屈得日記) 원문이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로써 이미 입증이 되었다.

시조 중랑장공의 묘지석과 굴득일기원문

 

 

 

 

 

 

 

 

 

 

 

 

 


황해도 연안지역 지도

 

 

 

 

 

 

 

 

 

 

 

 


김유신장군전에 신라 문무왕8년(서기668년) 신라 장수 26인에 대한 삼국통일 위업을 포상하는 자리에서 김유신 장군이 왕에게 “당(唐) 장(將) 이무(李茂)는 원군으로서 백제를 함께 정벌하였고, 나-당간의 화합에 있어서도 공로가 적지 아니하였으며, 또 서번(西藩)을 진수(鎭守)하였으니 의당 작위를 가봉하여 예우토록 하소서”하였고, 왕도 “짐의 뜻과 같다”고 하면서 ‘연안후(延安侯)’로 가봉(可封)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서번(西藩)’이란 특정 지명이 아니라 ‘서쪽 변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측에서 볼 때 당시서쪽 변경’이라면 지금의 황해도 일원이 되고 그 중심은 곧 연안지방이다. 또 신라 문무왕이 중랑장공을 서번진수에 내 보낸 것은 신라측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간다.시조 중랑장공께서 백제정벌과 나당화합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귀화인으로서 그 속마음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상고사에서 ‘위만조선’과 같이 외래인에 의하여 국기가 흔들린 예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측에서는 사직의 안전을 위해서 가급적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먼 곳에 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장차 고구려 공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고구려와의 접경인 연안지방을 미리 확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시조 중랑장공으로 하여금 연안지방을 개척케 함으로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이(利)를 얻는 아주 현명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시조 중랑장께서는 ‘연안백(延安伯)’에 봉해진 후 연안(당시는 豉塩城)을 중심으로 한 서번 공략에 나서 고구려 세력을 진압하고 ‘연안후(延安侯)’에 가봉 되기 전에 그 곳(연안)에서 졸(卒)함으로써 묘소가 연안에서 확인될 수 있었으며, 묘지석은  가봉(加封)된 ‘연안후(延安侯)’로 기록되지 않고연안백(延安伯)으로 기록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1958년 충남 부여 금산성 아래 시조의 단소(壇所)를 설치하면서 세운 ‘금성단기적비(金城壇紀蹟碑)’에 延城君(휘 時昉)의 10세손 병연(秉延)씨가 찬하고 그 아들 덕희(悳熙)씨가 쓴  비명(碑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금성단기적비명 인용

 전략--新羅大角干金庾信奏曰唐將李茂救我新羅하야共平百濟하고又使唐羅和合하니功德不少今鎭守하니宜加封爵하고以禮待之니이다曰此寡人之意也라하고封延安伯하고食邑一千戶하고賓而不臣焉하니라又總章元年戊辰攻下高句麗豉塩等十四城하고乃留守豉塩城하니即延安府後孫因以爲鄕貫焉하니라—후략

신라 대각간 김유신이 상소하기를 “당나라 장수 이무는 우리 신라를 구(지원)하여 함께 백제를 평정하고 또 당나라와 신라 간의 화합을 이룩하는데 공덕이 작지 아니하며, 지금은 진을 지키고 있으니 의당 작위를 가봉하고 예로써 대하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것은 과인의 뜻이다” 하고는 연안백(延安伯)에 봉하고 식읍 일천호를 내리면서 신하라 부르지 않고 빈객으로 예우하였다.또 총장 원년 무진년(신라 문무왕8년, 서기668년)에 고구려 시염성등 14개 성을 공략하고 이어서 시염성에 머물러 지키니 이 곳이 곧 연안부라 후손들이 이로써 관향을 삼았다.

 

위 비명 인용 내용 중에서 延安白(연안백)에 대한 보조 설명에서 延安은 中國(중국) 峽西省(협서성) 延安(연안)이니 以其所居地名(이기소거지명)으로 爲封號(위봉호)하니라’(연안은 중국 협서성의 연안으로서 시조께서 사시던 곳의 지명이 봉호가 되었다) 하였다.

 

이 설명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 보면 후손들이 연안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연안이씨’라는 말이 반드시 시조 때부터 있었던 말이라고는 볼 수는 없으며 그 시대부터 모든 성씨가 본관을 정하여 사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어쨌든 황해도 연안은 시조 중랑장공께서 고구려 땅을 공략하여 확보한 곳이고 그곳을 지키다가 그 곳에서 졸함으로서 1150여년 후 월계공이 그 곳에서 ‘延安伯李茂’묘지석을 굴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안은 시조 중랑장공의 후손들이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살아왔을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월계공의 시조 묘지석 굴득일기에도 관동이씨(館洞李氏: 판소부관공파의 관동파를 말함)댁이 있다고 하였고, 그 산(비봉산 옥녀봉) 아래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이중군(李中軍: 중군은 무관의 직명)의 본관도 연안이씨라 하였으니 연안 일원에는 연안이씨가 많이 살고 있었던 것 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또 한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고려 충선왕 2년(서기1310년)에 溫州牧(온주목)에서 延安府(연안부)로 개명될 때 그 ‘연안’은 어디에 연유하였을까? 하는 문제인데 혹시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많이 살고 있는 이씨의 시조 즉 중랑장공의 봉호 ‘연안백 또는 연안후’에서 비롯되지 안았나 하는 것이다. 또 이 곳 지명이 ‘연안’이 된 이후에 이 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온 이씨를 ‘연안이씨’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延安李氏(연안이씨)’란 씨족 이름이 고려 충선왕 2년(단기3643년, 서기1310년) 이후에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연안 지명은 시조의 봉호 연안백’에서 연유되었고, 연안 지명이 생긴 이후에 우리 연안이씨는 ‘연안’을 관향으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연안이씨’라고 부르게 된 것이 고려 충선왕2년 이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시조의 묘소가 연안에서 확인되었고, 이 곳이 시조의 행적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일부 이론(異論)도 있는 모양이지만 연안은 시조께서 닦은 터전이요 그 곳에 뼈를 묻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延安은 延李의 故鄕

비록 국토가 분단되어 가 볼 수는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연안은 우리 延李 시조께서 터전을 닦았고, 또 그 곳에 뼈를 묻었으며, 많은 선조들이 관향으로 생각해 온 터이다.

 

비록 황해도 ‘연안’ 지명이 시조 중랑장공의 봉호 ‘연안’ 보다 늦게 생겨났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 延李의 본관 기원과는 무관하다고 단언할 수도 없으니 명확한 증거가 들어 나지 않은 한 전통을 이어 황해도 연안을 우리 연이의 고향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延李는 연안을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훗날 통일이 되어 왕래하는 날 비봉산 옥녀봉을 바라보면서 시조묘소에 참배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할 것을 제언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