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도(公道)를 지킨 바른 선비정신의 청백리
이후백(李後白)
沙月 盛永(2009. 11. 15)
    이후백은 조선 중종15년(1520) 경상도 함양에서 태어나 선조11년(1578)에 59세로 졸하였다. 자를 계진(季眞), 호를 청련(靑蓮), 송소(松巢), 시호는 문청(文淸)이고, 봉호는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이후백의 선친 이국형(李國衡)은 종(從)조부 양원(楊原) 이숙함(李淑 王咸)의 독자 이세문(李世文)이 후사가 없이 졸하자 그 후로 계출(系出)하였으나, 그대로 함양에 살고 있었는데 이후백이 9세 때 내외가 한꺼번에 급졸하였다.

    이후백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거창 모곡동 세칭 오자암(五子巖) 종가의 백부 이국권(李國權) 아래서 양육되면서 옥계(玉溪) 노진(盧 示眞), 목사(牧使) 양희(梁喜), 덕계(德溪) 오건(吳健), 한금산(韓錦山) 등 15인과 은둔거사 표인(表寅)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후백은 16세에 친인 금릉(金陵: 현 강진)에 와서 홀로 지내고 있는 계(系) 조모(祖母) 정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를 모시기 위해 전라도 강진으로 가서 박산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정부인 홍씨의 질손 군수 홍처성(洪處誠)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가정을 이루어 조모를 정성으로 모시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공부하여 23세 때 향시에 장원한 후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동은(山同 隱) 이의건(李義健), 고담(孤潭) 이순인(李純仁), 남계(南溪) 김윤(金胤), 사문(斯文) 임회(林?), 사문(斯文) 윤기(尹箕), 청계(淸溪) 유몽정(柳夢井),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등 호남의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27세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36세 때 문과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 이후백이 교유했던 인사 중에 하서 김인후는 호남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고봉 기대성은 호남을 대표하는 문장이었으며, 옥봉 백광훈, 고죽 최경창, 고담 이순인은 조선조 중기 8대 문장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조선8대문장: 아게 이산해, 중호 윤탁연, 간이 최립, 구봉 송익필, 청천 하응림)

    이후백은 문과 급제 후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정7품), 병조 좌랑(佐郞: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종6품), 이조 좌랑 등 초급 관직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당시 대제학 홍섬(洪暹)으로부터 장래가 유망한 인재로 인정받아 기대승(奇大升), 이산해(李山海), 신응시(辛應時), 심의겸(沈義謙)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이후백은 호당 후 홍문관 교리(校理), 이조 정랑(正郞) 등 정5품 직에 승차하고, 수의어사(繡衣御使)로 전라도 지방을 순찰하였는데 수령 중에 탐관오리들은 이후백이 강직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미리 관직의 인수(印綬: 인장과 관복)를 벗어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후백은 연이어 삼사의 대간 직책을 역임하고, 의정부에 들어가 검상(檢詳: 정5품), 사인(舍人: 정4품)을 거쳐 홍문관, 사간원, 승정원을 오가며 응교(應敎: 정4품)와 전한(典翰: 종3품), 사간(司諫: 종3품),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 도승지(都承旨: 정3품) 등 중책을 역임하였다.

    이후백은 선조4년(1571) 예조 참판(參判: 종2품)을 시작으로 대사헌(大司憲: 종2품), 홍문과 제학(提學: 종2품), 이조 참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종2품), 예문관 제학 등 종2품직(현 차관급) 직책을 역임하면서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도 하였다.

    선조6년(1573)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 주청사 정사(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를 시작으로 이조와 호조의 판서(判書: 정2품, 현 장관급)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함경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에 기용되기도 하였다.

    이후백은 선조11년(1578) 호조판서 재임 중 9월에 휴가를 얻어 함양에 선친 성묘를 갔다가 병을 얻어 이 해 10월 7일 졸하였는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선조23년(1590)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로 가자(加資)되고,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종1품),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종1품)에 증직(贈職)되고,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훈록(勳錄)되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며, 아울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이후백은 젊은 시절에는 부모가 조졸하는 불행을 당했지만 굳센 의지와 성실과 효성으로 사곡됨이 없이 바른 재목으로 자라났고, 관직에 나아가 형조, 이조, 호조의 육경(六卿) 직과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등 삼사의 직책, 그리고 승정원, 관찰사 청탁이나 축재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직책들을 골고루 역임하면서도 공도(公道)를 지키는 바른 선비정신으로 청빈하게 살았기 때문에 졸한지 12년이 지난 후에도 이를 인정받아 청백리에 녹선된 것이다.

    이후백이 죽자 그 문인들이 상례를 치르기 위해 남긴 재산을 조사해 보니 서적들과 하사 받은 모피 몇 장뿐이었다고 한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도 이후백의 부음을 듣고
    “이후백은 관리로 있을 때 그 직분을 다했으며, 몸가짐이 육경(六卿: 육판서)의 지위에 이르렀으나 살림이 가난하고, 소박하기가 마치 유생(儒生)과 같았고, 사방에서 오는 뇌물을 일체 받지 안 했으며, 손님이 오면 술상이 냉담하였으니, 한창 정승으로 들어갈 물망에 올랐는데 서거하니 사람들이 몹시 아까워하며, 정2품의 지위에는 이제 앉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이후백의 만사(輓詞)에서
    八座位高猶賃屋(팔좌위고유임옥) 여덟번 높은 벼슬에 앉았건만 오히려 셋집에 살았고,
    兩朝恩重未歸田(양조은중미귀전) 명(明),선(宣)양조의 은총이 무거워 전원으로 돌아가지 못했네

    양관 대제학을 지낸 황경원(黃景源)이 찬한 신도비문에서
    “공은 기상이 수려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꿋꿋하게 부동하는 듯하고, 그 지조가 굳어 누구도 도저히 옮길 수 없는 듯 하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착한 말을 들으면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따르면서 조금도 의심치 않았고, 사람을 사귐에 있어 늙어가면서 그 정을 더욱 두텁게 하였으면, 자기 몸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청렴결백하여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마치 포의(布衣)의 선비와 같았으나 사방에서 보내오는 선물(뇌물)은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고 썼다.

<유년시절의 미담>
    이후백의 생조부 개령현감을 지낸 이원례는 진주목사 경임, 탁영 김일손, 매계 조위등 조정과 영남일원의 문사 32명이 진주 촉성루에서 맺은 진양수계(晉陽修契) 금난계(金蘭契)의 회원으로 풍월을 좋아하여 당나라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을 무척 좋아하여 장자 이국권에게서 난 손자를 ‘작은 이백’이라는 뜻으로 이소백(李小白), 차자 이국형에게서 난 손자를 ‘뒤에 태어난 이백’이라는 뜻으로 이후백(李後白)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후백은 조부의 뜻에 부응하여 이백의 호를 따서 청련(靑蓮)이라 하였고, 청련집(靑蓮集)에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이후백은 9세에 양친이 한꺼번에 별세하니 어린 나이인데도 상주로서 집상하는데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고, 혹서에서도 경대(상복과 허리띠)를 벗지 않고 상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주 작은 것 까지도 어른들에게 물어서 옳게 시행하니 어린 시절부터 이미 공도(公道)를 중시하는 기품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백이 12세 때 백부 이국권(李國權)의 명으로 산사에서 공부를 하는데 경상도 관찰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후백이 영특하 다는 것과 가까운 산사에 소문을 듣고 한번 시험해 보려고 산사를 찾아와 탑 곁에 심은 작은 소나무를 보고 이후백에게‘탑반송(塔畔松)’이란 시제를 내었는데 이후백은 즉석에서 시를 지어 바쳤다.
<塔畔松(탑반송)>
- 탑 가에 심은 소나무 -
一尺靑松塔畔栽(일척청송탑반재) 작은 소나무 탑 곁에 심으니
   塔高松短不相齊(탑고송단불상제) 탑 높고 솔 낮아 어울리지 않네
    傍人莫怪靑松短(방인막괴청송단) 사람들아 솔 낮다고 탓하지마라
              他日松高塔反低(타일송고탑반저) 훗날 솔은 높고 탑이 도리어 낮을 것이니
    이 시에서 사람들은 탑은 관찰사, 솔은 이후백 자신을 말하며, 이후백은 12살 어린 나이에 이미 큰 야망을 가졌음을 말하는 시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백은 16세 때 금릉(金陵: 지금의 강진)으로 가서 조모 남양홍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면서도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19세 때 보익공신 이기(李 艸하己)가 금릉에 귀양 와 있는데 그가 글을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 와서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그의 사람됨을 보니 털끝 만한 작은 일도 감추고 사람들이 아는 것을 싫어하니 군자의 행사가 그래서야 하겠는가?” 하면 이후로는 발길을 끊고 찾아가지 않았다.

    이후백이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한 포의(布衣) 시절에 길을 가다가 어느 고관의 행차를 범하게 되었다. 그는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그러나 당황하지 않고 현장에서 지필묵을 꺼내 ‘범마(犯馬)’라는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犯馬(범마)>
- 행차길 범하다 -
       遠郊斜日眩西東(원교사일현서동)먼 들판 저녁햇살 동서로 어지럽고
    撲面塵沙滾北風(박면진사곤북풍)세찬 바람 모래먼지 얼굴 때리네
        誤觸牙旌知不恨(오촉아정지불한)대감행차 범하였지만 후회는 없다오
        浪仙從此議韓公(낭선종차의한공)낭선도 이런일로 한문공을 알았으니
    저녁햇살과 세찬 북녁바람을 핑계하며 정중히 사과하고, 중국 당나라 때 퇴지(退知) 한유(韓愈)와 낭인 가도(賈島)의 '추고(推鼓)' 고사를 들어 넌지시 범마를 선처해 줄 것을 은유적으로 청하고 있는 참으로 마음의 여유가 돋보인다.

<관직에서 공도(公道) 일생>
    이후백은 36세에 비교적 늦게 관직에 나아갔지만 3년 후인 39세 때 호당에 선발될 만큼 영특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다. 그가 공직에 임하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공도(公道)를 떠난 일이 없었다. 많은 일화 중에서 몇 가지만 골라 적어본다.

    이후백이 도승지로 입궐한 후로는 하루 종일 단정하고 업숙하여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몸가짐을 하고 있으니 궁중이 숙연하고 감히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이 없고 궁인들이 서로 경계하면서
    “이모가 도승지로 있으니 말소리도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선조 임금이 박순(朴淳)에게
    “형조판서에 적임자를 얻지 못해서 걱정인데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적임자를 천거하도록 하오” 하였는데 박순이 동료들과 상의 하여 이후백을 추천하면서
    “증자(曾子)가 말 한 바 ‘육척의 고자(孤子)를 맡길 만 하고(托六尺之孤), 백리의 명을 부탁할 만한 사람(寄百里之命)'은 이후백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며 추천하여 이후백이 형조판서에 기용되었다.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 김계휘가 평안도 관찰사로 내정되었을 때 율곡선생이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려 말하기를
    “이후백과 김계휘는 조정을 떠나서는 아니 됩니다. 두 사람은 법전과 문장에 밝고, 시무(時務)에 통달한 사람들이니 마땅히 조정에 머물게 하여 조정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각각 양도의 관찰사로 나갔다.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변경 각 진영 순시에 나섰을 때 변경 장수들이 벌로 형장을 맞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이순신(李舜臣)도 관직 초년으로 함경도 변경의 작은 진영을 맡고 있었는데 이후백이 당도하여 두 사람은 서로 만남을 기뻐하며 즐겁게 이야기 하였다. 먼저 이순신이
    “사도(司道)의 형장(刑杖)이 자못 엄하다고 하더군요” 하니 이후백이
    “그대 말도 맞는 말이기는 하나 내 어찌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고 형장을 치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이후백이 함경도에서 돌아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공은 사람을 등용할 때마다 두루 물어보고 의론이 일치한 후에야 임금에게 추천하였다.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을 발견할 경우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가 주상을 속였다”면서 후회하였다.

    이후백은 어느 직책보다도 공도(公道)가 요구되는 동전(東銓: 이조판서)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인사청탁이나 뇌물을 받지 않고, 비록 절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자주 와서 그를 살피는 눈치가 보이면 싫어하였다.

    하루는 족인(族人: 일가) 한 사람이 찾아와 이런 저런 말 끝에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였다. 이후백은 금세 낯빛이 변하면서 ‘효렴록(孝廉錄)’이라 적힌 책을 내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 족인의 이름도 그 속에 적혀 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자네의 이름을 여기에 기록하고 장차 적절한 관직에 천거하려고 하였는데 지금 자네가 관직을 구하는 말을 하였으니 ‘만약 구하는 자만이 얻게 된다면 이는 공도가 아닐세(若求者得之則非公道也)’애석하다. 자네가 만일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멀지 않아 관직을 갖게 될 것이었는데---” 하면서 그 족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이후백이 정승의 물망에 오르고 있을 때 이후백은 호당에서 함께 공부한 심의겸(沈義謙)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음을 기화로 심의겸을 배척하는 김효원(金孝元)이 말하기를
    “이후백은 육경(六卿)의 재목은 되나 만약 그가 정승에 된다면 내가 탄핵하겠다”하니. 율곡선생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지금 이 시기에 나는 판서 중에서 이후백보다 더 나은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비록 그에게 정승을 시킨다 해도 김효원이 어떻게 그를 탄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후백(李後白)이 조선 명종10년(1555)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향에 성묘차 들렸을 때 마침 소시(少時)적에 함께 공부했던 옥계 노진이 지례현감으로 있어 만나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는데 여기에도 검소했던 이후백의 행색이 나타나 있다.
<登第下鄕知禮使君盧玉溪 示眞(등제하향지례사군노옥계진)>
-급제하여 고향으로 갈 때 지례현감 옥계 노진에게 주다 -
匹馬單童行色惡(필마단동행색악) 말 한 필에 따르는 아이 하나, 내 모습 초라하여
官人誤道摘梨郞(관인오도적리랑) 관리들 나를 보고 '배 따는 일꾼'이라 잘못아네
誰知獻賦明光宮(수지한부명광궁) 누가 알았으랴 (급제하여) 명광궁에 시부 바쳐
頭上仙 艸하白巴 五色香(두상선파오색향) 머리에 어사화 꽂고 오색향기 드날린줄
靑蓮(청련) 李後白(이후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