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黨派)를 초월한 절개(節槪)와 염담(心변舌 淡)의 청백리
이후정(李后定)
沙月 盛永(2010. 1. 2)
  이후정은 인조9년(1631) 태어나서 숙종15년(1689) 졸하였다. 자는 정숙(定叔)이고, 호는 만안당(晩安堂)이다.

  현종1년(1660) 30세에 사마시(司馬試; 生員試)에 급제하고, 숙종1년(1675)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사(三司: 司憲府,司諫院,弘文館)에 들어가 여러 직책을 거쳤다.
  숙종14년(1688) 2월에 홍문관 응교(應敎:정4품), 10월에 사헌부 집의(執義:종3품), 숙종15년(1689)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종4품), 5월 사간원 사간(司諫:종3품), 병조참지(兵曹參知:정3품)까지 승진하면서 청백(淸白)하여 이름이 높았다.

  숙종15년(1689) 1월에 장소의 소생의 2세된 아들 균(均에서土대신日)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 하자 서인(西人)이 반대하였으나 숙종은 이를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에 책봉하자 서인의 거두 송시열(宋時烈)이 두 번을 상소하여 왕비 민씨(閔氏)가 아직 젊으니 원자 책봉 시기가 아님을 주장하였다.

  이에 숙종은 ‘원자의 명호까지 결정하였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잘못’ 이라며 분하게 여기던 차 남인(南人)의 이현기(李玄紀), 남치훈(南致薰), 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반박하면서 숙종의 의견을 좇으니 숙종은 송시열을 파직시켜 제주도(중도에 정읍으로 변경)에 유배시켜 사사하고, 송시열의 의견을 따랐던 많은 신하들이 파직, 유배되는 대신 남인들이 등용되어 정권이 바뀌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사태가 일어났다.

  이 때 이후정(당시 남인으로 지목됨)은 병조참지 재임 중에 송시열의 상소를 공박한 남인들의 잘못을 직간(直諫)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묵살하고 임금에게 올리지 않자 원통함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그만 두고 상심하던 끝에 병을 얻어 그 해 7월에 59세로 죽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이후정은 성품이 염담(心변舌 淡: 욕심을 끊고 깨끗하게 지냄)하여 벼슬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숙종 3년(丁巳年,1677)종묘에 고하자는 의논이 있을 때 대간(臺諫)으로 이의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숙종6년(庚申年,1680)에 많은 사람들에게 추장(推奬: 여럿 중에서 특별히 추려 장려함)을 받아 영관(瀛館: 의정부?)의 녹사(錄事; 의정부와 중추원 하급관리)와 천조(天曹: 吏曹)의 낭관(郎官: 佐郞과 正郞)을 지냈지만 이후정은 오히여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전리(田里: 鄕里)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오래 동안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않고, 시종 절조를 온전히 지켰기 때문에 사론(士論)은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고 기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현왕후 민씨(閔氏) 폐비 반대를 간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그 중에 이후정의 소가 가장 명백하고 간절하였다. 임종 때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나의 상소가 주상에게 올려졌으면 주상으로 하여금 우리의 무리(南人을 말하는 듯) 가운데서 능히 다른 의견을 가진 자가 있다는 것을 아시어 돌이켜 깨닫는 바가 있었을 것인데, 정원(政院)에서 물리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나의 한(恨)이다” 고 하였다 한다.

  이후정은 그의 셋째 아들 이상기(李相琦)가 선친의 충직(忠直)을 상달(上達)하여 이듬해(숙종16년,1690)년에는 조정의 선친에 관한 잘못된 인식이 풀리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숙종21년(1695)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