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安李氏 성씨 소개(略設)
沙月 盛 永 엮음
  이 내용은 90년대 초 연안이씨 대종회가 MBC로부터 매 일요 아침에 방연 되는 명가(名家) 성씨 소개 자료를 요청 받고, 1993년 대전 국과연에 근무하는 본인에게 써 보라고 요구하여 쓴 것이다. 대종회에 보낸 이후 방송국에 언제 제출 하였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으나 얼마 안 있어 그 프로가 없어지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1999년도 延星會(연성회) 선조 유적지 탐방시(김천의 延城君 유적과 거창의 忠剛公의 褒忠祠 등) 배포한 유인물에 함께 게재한 바 있다.

  다시 읽어 보아도 연안이씨를 소개 하는데 깊지는 않지만 폭이 넓고,연리의 자긍심을 일깨우는데 손색이 없을 것 같아서 많은 연리인이 읽을 수 있도록 일부 보완하여 홈페이지에 올린다.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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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家(序言)
시조(始祖)
계파(系派)
가세(家勢)
등과(登科)
호당(湖堂)
관직(官職)
문형(文衡)
문장(文章)
유현(儒賢)
청백(靑白)
정려(旌閭)
녹훈(錄勳)
기사(耆社)
증시(贈諡)
서화(書畵)
시조(時調)
독립운동(獨立運動
결론(結論)
명가(名家)-서언
  명가 또는 명문(名門)이라는 것이 명확한 기준이 설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조 오백년을 거치는 동안에 등과(登科), 관직(官職), 학문(學問), 윤리도덕(倫理道德) 그리고 국가기여(國家寄與) 등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오늘 소개 하려고 하는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이러한 제 요소들을 고루 갖추었던 대표적인 명문이다. 조선조 후기 유학(儒學)과 보학(譜學)에 조예(造詣)가 깊었던 정조 임금도 그의 저서 홍제전서(弘齊全書)에서 연안이씨를 두고 '동방(東方)의 갑족(甲族)'이라 칭송하였고, 식자들 사이에 명문을 이야기 할 때 '연리광김(延李光金)' 운운 하면서 연안이씨를 맨 먼저 꼽았다. 명가를 평하는 요소들을 기준으로 연안이씨를 소개하고자 한다.
연안이씨 시조: 李茂(이무)
  연안이씨 시조는 지금으로 1333년 전인 서기660년 신라 태종무열왕 7년에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일원으로 대장군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원정(遠征) 나온 당나라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가 백제 평정후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벼슬하면서 태종무열왕으로부터 백제 평정의 공으로 연안백(延安伯) 작위에 봉(封)해 지고, 식읍을 받아 연안(延安)에 적을 두어 연안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문무왕 8년(서기668년) 역시 나당연합으로 고구려를 정벌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김유신장군의 흥무왕(興武王) 진작(進爵)과 신라 장수 스물 여섯 사람을 포상하는 자리에서 김유신장군의 주청으로 이무(李茂)를 나당화합(羅唐和合)과 서번진수(西藩鎭守)의 공으로 연안후(延安侯)에 가봉(加封)하고 신하라 부르지 않고 국빈(國賓)으로 예우하였다고 한다.

  연안이씨 시조와 관련된 사적을 몇가지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경북 군위군 효령면에 장군동이란 마을이 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유신, 소정방, 이무 세 장수가 하루 저녁 묵어 간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마을에는 언제 설립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제동서원(濟東書院)이 있고, 그 경내 효령사(孝靈祠)에는 북편으로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 즉 김유신(金庾信)장군이 주향(主向)되고, 서편에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 동편에 연안후(延安侯) 이무(李茂)가 배향(配享)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3일 에 김해김씨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효령사
  둘째 지금으로부터 172년 전인 순조 21년(서기1821년) 충북 괴산에 살던 연안이씨 후손 월계(月溪) 이문우(李文愚)라는 분이 시조의 묘소에 관한 소문을 좇아 황해도 연안을 수차 왕래하면서 연안부 서편 비봉산(飛鳳山) 옥녀봉(玉女峰) 아래 은일동(隱逸洞)에 있는 고총(古塚)에서 「延安伯李茂(연안백이무)」라고 음각(陰刻)된 길이 약 1척(尺)의 묘지석(墓誌石)을 발굴하여 그 실물과 발굴 경위 일체를 자세히 적은 「신사삼월초삼일 서행전후사일기(辛巳三月初三日 西行前後事日記)」 원문이 월계공 5대손 이동훈(이동훈)씨 집에 전해 내려 오다가 연안이씨 대종회에 헌납하여 연세대학교 고고학 및 지질학팀의 고증을 마치고 현재 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월계공이 발굴한 시조 묘지석과 굴득 일기 원문
  셋째 연안이씨 시조 이무(李茂)에 관한 종합보학서(綜合譜學書) 기록으로
    (1) 조선 현종 때(1660-1674) 정시술(丁時述)이 쓴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가 가장 먼저이고,
    (2) 문헌비고(文獻備考, 영조46년 1770) 씨족고(氏族考),
    (3) 전고대방(典故大方, 일제 1924) 만성시조편(萬姓始祖篇) 등이 있다.

  넷째 연안이씨 각파 세보(世譜), 연안이씨 제현(諸賢)들의 신도비(神道碑), 묘갈비(墓碣碑), 유허비(遺墟碑),행적비(行跡碑) 등 비석에 새겨져 전해오고 있다.

  해방후 연안이씨 후손들은 시조의 실묘가 북한 땅에 있어 성묘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1954년 계룡산의 한 지맥인 갑하산 문필봉 아래 대전 유성 갑동에 연안이씨 후손 사우당공(四友堂公 휘 時聃)의 사패지(賜牌地)에 단소(壇所)를 설치하고, 1980년 대전 유성 구암동에 「연원사(延原祠)」라 편액된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매년 10월 3일 경향 각지에서 후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제향을 올리고 있다.
(요약)
연안이씨 시조 이무(李茂)

  ▶ 중국 당(唐) 중랑장(中郞將)
  ▶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일원으로 동래(東來)
  ▶ 백제 평정 후 불귀(不歸), 신라에서 벼슬함(仕新羅)
  ▶ 신라 태종무열왕으로부터 연안백(延安伯)을 하사 받고, 연안에 착적하고(着籍延安), 문무왕으로부터 연안후(延安侯)로 가봉됨.
  ▶ 사적(史蹟)으로
    - 경북 군위 효령면 장군동 제동서원 효령사(孝靈祠)에 김유신, 소정방과 함께 배향
    - 순조21년(1821) 월계공(月溪公)이 황해도 연안에서「延安伯李茂(연안백이무)」라고 음각(陰刻)된 묘지석(墓誌石) 발굴, 실물과 발굴 일기(日記)」 원문이 보존
    - 보학문헌, 족보, 각종 비문에 기록
    - 대전 유성 갑동에 설단(設壇)하고, 연원사(延原祠) 사우를 지어 제향
연안이씨 계파(系派)
  연안이씨 집안에 구전되어 오다가 연안이씨 각 파의 세보(世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연안이씨 집안에 전해오던 가승(家乘)이 고려 후기 몽고군의 침입과 삼별초난(三別抄亂) 때 소실되어 시조로부터 이어지는 계보(系譜)가 실전(失傳)되어 오다가 조선 선조 때 조정의 족보 장려 시책에 따라 연안이씨 후손 해고(海皐) 이광정(李光庭),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각 파를 통합한 대동보(大同譜)의 편찬을 시도하였으나 전래된 자료가 너무 빈약하여 실패하고, 각 파별로 파보(派譜)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이광정은 13대조 이습홍(李襲洪)을 중시조로 한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정구는 12대조 이현여(李賢呂)를 중시조로 한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최근 少府監判事公派로 개칭), 이호민은 8대조 이지(李漬)를 중시조로 한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의 계보를 만들었고, 해방 후 이북에서 남하한 연안이씨 후손 중에 고려 때 무관으로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이송(李松)의 후손들이 각각의 계보를 모아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의 세보를 편찬하여 현재 연안이씨는 4개 파의 파보가 유지되고 있다.

  조선 현종 때 정시술, 허함 양씨가 편집한 「제성보(諸姓譜)」에 따르면 연안이씨는 위 4개 파와 이핵(李核)을 중시조로 한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이분양(李汾陽)을 중시조로 한 시랑공파(侍郞公派), 이방(李昉)을 중시조로 한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이득량(李得良)을 중시조로 한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이백연(李伯衍)을 중시조로 한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이계연(李季衍)을 중시조로 한 영광군수공(靈光郡守公派) 등 모두 10개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4개 파는 계보를 유지하고 있지만 나머지 6개 파는 현재 그 실존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무후(無後)로 대가 끊어졌을 것이라 하고, 혹자는 다른 본관(本貫)으로 변관(變貫)하였을 것이라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요약)
연안이씨 계파(系派) (諸姓譜)
중시조 계파명 비 고
습홍(습홍)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실존
현여(賢呂)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실존
지(漬)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실존
송(松)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실존
핵(核)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실존 미확인
분양(汾陽) 시랑공파(侍郞公派) 실존 미확인
방(昉)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실존 미확인
득량(得良)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실존 미확인
백연(伯衍)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실존 미확인
계연(季衍) 영광군수공(靈光郡守公派) 실존 미확인
연안이씨 가세(家勢)
  연안이씨는 씨족의 역사가 천삼백년이 넘게 길지만 현재 인구면에서 가세는 빈약한 편이다. 1987년 12월에 경제기획원이 발표한 성씨별 인구 통계에 따르면 연안이씨는 126,569명으로 58위다. 1위인 김해김씨 370만 여명에 비하면 30분의 1에 불과한 약세다.

  역사적으로 연안이씨가 당쟁이나 사화, 기타 역적 모의에 연루되어 멸족 당하는 일도 없었는데 긴 성씨 역사에 비하여 현재의 인구가 적은 원인을 정확히 규명할 수는 없지만 고려 말 이전 계보의 실전으로 많은 계파가 타관(他貫)으로 본관을 바꾼 데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조 때 성씨별 인구 통계가 전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인구는 알 수 없지만 인구 비례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연안이씨의 가세가 빈약한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소개할 여러 분야에 있어서 연안이씨의 괄목할 통계수치가 더욱더 높이 평가된다.
(요약)
성씨 본관별 인구 통계표
(인구 10만 이상, 1987.12. 경기원 발표)
순위 성씨본관 인구 순위 성씨본관 인구 순위 성씨본관 인구
1 김해(1)金(김) 3,767,061 28 나주林(임) 262,862 55 의령南(남) 130,179
2 밀양朴(박) 2,704,617 29 문화柳(유) 255,632 56 현풍郭(곽) 127,322
3 전주李(이) 2,379,537 30 밀양孫(손) 243,461 57 장수黃(황) 126,744
4 경주金(김) 1,523,468 31 연일鄭(정) 237,218 58 연안李(이) 126,569
5 경주李(이) 1,217,279 32 함안趙(조) 231,728 59 김해(2)金(김) 125,277
6 진주姜(강) 941,087 33 진양鄭(정) 231,289 60 정선鄭(정) 124,993
7 경주崔(최) 876,729 34 창원黃(황) 220,810 61 평해黃(황) 124,072
8 광산金(김) 750,701 35 의성金(김) 219,947 62 김해許(허) 121,603
9 파평尹(윤) 646,632 36 남원梁(양) 219,911 63 선산金(김) 120,214
10 청주韓(한) 597,596 37 여산宋(송) 200,323 64 한산李(이) 119,174
11 안동權(권) 558,574 38 평택林(임) 194,550 65 반남朴(박) 118,838
12 인동張(장) 538,803 39 청송沈(심) 186,382 66 충주池(지) 118,410
13 평산申(신) 460,238 40 은진宋(송) 179,247 67 고령申(신) 117,334
14 김녕金(김) 424,323 41 해주崔(최) 161,782 68 양천許(허) 114,863
15 순흥安(안) 417,591 42 강능劉(유) 161,634 69 영월嚴(엄) 114,191
16 동래鄭(정) 414,782 43 창녕咸(함) 158,335 70 천안金(김) 114,016
17 달성徐(서) 398,343 44 연안車(차) 154,641 71 제주梁(양) 113,419
18 안동金(김) 398,240 45 성주李(이) 153,146 72 전의李(이) 112,087
19 남양洪(홍) 382,077 46 단양禹(우) 152,298 73 능성具(구) 111,747
20 해주吳(오) 377,005 47 강능金(김) 150,576 74 풍양趙(조) 109,443
21 남평文(문) 343,655 48 진주河(하) 148,208 75 담양田(전) 109,213
22 전주崔(최) 342,849 49 이천徐(서) 144,204 76 함평李(이) 103,696
23 제주高(고) 317,967 50 신안朱 ㈜ 142,590 77 함양朴(박) 103,220
24 경주鄭(정) 300,731 51 하동鄭(정) 142,428 78 풍천任(임) 103,108
25 창녕趙(조) 299,642 52 광주李(이) 141,830 79 원주元(원) 102,748
26 수원白(백) 295,640 53 여흥閔(민) 137,314 80 여양陳(진) 100,232
27 한양趙(조) 273,408 54 강능崔(최) 132,300
연안이씨 등과(登科)
  요즈음도 대학 입시에 좋은 성과를 낸 학교를 명문고등학교라 하고 각종 고시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학교를 명문대학이라 하듯이 조선조 때 과거시험에 많은 급제자를 배출해야만 그 집안을 명문가라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조선조 사회는 관직이 모든 가치관의 최상위를 차지하던 시대인데 관직의 등용문이 등과(登科)였기 때문이다.

  관직에 등용하는 문은 등과 외에도 고관, 충신, 공신, 유현 등의 후손에게 특혜를 주는 음직(蔭職)과 지방 관리가 숨은 인제를 찾아내어 추천하는 은일(隱逸)이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 비율이 극히 낮았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벼슬길에 올라 입신 출세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서울대학교에서 발행한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따르면 조선조 때 생원(生員) 또는 진사(進士)의 자격을 부여하는 생원진사과(生員進士科)는 47,748명이 등과하였고, 문관 등용 시험인 문과(文科)는 14,620명이 등과하였다.

  연안이씨의 문과 등과자는 총 250명으로 성씨별 랭킹 9위에 해당하지만 인구 비례를 감안하면 단연 수위이다.

  연안이씨의 등과자로서 먼저 소개해야 할 사람은 세종 때 13년 동안 집현전에서 세종대왕의 문화창달의 일익을 담당했던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이다.

  세종 23년에 생원과, 진사과 그리고 문과에 연이어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한 방목에 이름이 세 번 기록된 조선조 최초의 삼장원(三壯元)이 되었다.(고려 광종 때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로는 포은 정몽주 다음으로 두 번째다)
세종23년 辛酉榜(신유방)
'李石亨'(이석형) 이름이 한 방의 문과(文科)의 맨 위, 생장(生壯: 생원과 장원), 진장(進壯: 진사과 장원)에 세 번 기록되어있다.
  임금이 내전에서 베푸는 사연(賜宴) 때 중전으로 하여금 손수 어의(御衣)를 가져와 하사하게 하고, 궁녀로 하여금 삼장원사(三壯元詞)를 지어 노래 부르게 하면서 술을 권하였다고 한다.
< 삼장원사(三壯元詞) >
  李判書石亨十四魁陞補聲名甚(이판서석형십사괴승보성명심)
  二十六竝魁生進及文科初試及益年辛酉三榜(이십육병괴생진급문과초시급익년신유삼방)
  世祖嘗於內殿宴公中殿親執御衣一襲以賜(세조상어내전연공중전친집어의일습이사)
  之命宮女製三壯元詞歌以侑酒自是每召飮必歌之(지명궁녀제삼장원사가이유주자시매소음필가지)

  판서 이석형은 14세에 승보시에 장원하여 명성이 드높았다.
  26세에 생,진과와 문과 초시에 모두 장원하여 이듬해 신유년(辛酉年: 세종23년, 1441)에 삼방에 함께 올랐다.
  세조께서 내전에서 공에게 잔치를베풀 때 중전이 손수 어의 한 벌을 내려 주셨다.
  그리고 궁녀에게 명하여 삼장원사를 지어 노래부르며 술을 권하게하니 이로부터 매번 술을 마실 때는 반드시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三壯元詞九天上(삼장원사구천상)삼장원을 치하하는 구천(九天: 九重天, 宮中) 위에서
  三壯元臣拜稽首(삼장원신배계수)삼장원한 신하(李石亨) 머리 숙여 절을 올리네
  臣名九皐風徹響(신명구고풍철향)구고(九皐: 水澤같은 깊은곳)에 떨친 신하의 명성 바람타고 사무치는데
  臣身一毛不自有(신신일모불자유)신의 몸은 털끝 하나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네
  王曰來汝文章骨(왕왈내여문장골)임금께서 이르시네 오라! 그대, 타고난 문장이로다.
  設我 竹아래邊 豆崇我酒(설아변두숭아주)내 그대 위해 변두(竹아래邊 豆: 과일과 안주)를 차리고 술을 가득 채웠노라
  居然敎坊新 門祭 出(거연교방신결출)교방(敎坊: 掌樂院의 左坊과 右坊)에서는 제빠르게 새곡조 만들어 내니
  宮娥信口歌以侑(궁아신구가이유)궁녀들 멋들어지게 노래하네
  歌聲淸切上蒼蒼(가성청절상창창)청아한 노래소리 창창하게 들려오니
  紫皇廳之咨嗟久(자황청지자차구)자황(紫皇: 太淸九궁에 사는 신선, 여기서는 임금)께서 들으시고 찬탄 마지 않으시네
  方丈蓬萊一時遍(방장봉래일시편)방장산(方丈山)과 봉래산(蓬萊山)(주1)을 일시에 두루 거닐은 듯
  五色雲間鸞鶴逗(오색운간란학두)오색 구름 사이 사이 난학(鸞鶴: 난새와 학)이 깃들인 듯
  瀏瀏瑞旭度仙掖(류류서욱도선액)맑고 밝은 상스러운 햇살 선액(仙掖: 宮中)을 지나가고
  細細和風動宮柳(세세화풍동궁류)솔솔 부는 온화한 바람 궁중 버드나무 흔드네
  天香桂樹長三枝(천향계수장삼지)천향(天香)(주2) 풍기며 우뚝 자란 계수나무 긴 세 가지(과거에 세 번 장원급제한 것)
  月裏精神恩雨後(월이정신은우후)달 속에 은우(恩雨)(주3) 내려 맑은 정기 받았다네
  玉壺瓊漿十分醉(옥호경장십분취)옥호(玉壺; 옥술병, 맛좋은 술)과 경장(瓊漿: 안주)로 맘껏 취하고는
  晩下 門昌 門扶左右(만하창문부좌우)늦어서여 좌우 부축받고 창문(門昌 門: 하늘문) 내려오네
  君知筆力參造化(군지필력참조화)임금께서 조화를 부리는 듯한 필력(筆力: 이석형의 문장을 말함)을 알아보고
  嗟爾小兒八叉手(차이소아팔차수)어린 나이에 능란했던 팔차수(八叉手)(주4)에 매우 감동하였네

    (주1) 방장봉래(方丈蓬萊) :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 方丈山, 蓬萊山, 瀛洲山)을 말하며 이는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의 별칭이기도 하다.
    (주2) 천향(天香) : 하늘의 향기 즉 좋은 향기를 말하며, 천향계화(天香桂花)라 하여 달 속에서 자란 계수(桂樹) 즉 월계(月桂)는 과거에 급제한 것을 이르는 말인데 중국 진(晉)나라 극선(邑변谷 詵)이 과거 급제를 '계림일지(桂林一枝 :계수나무 숲에서 한가지)'라 한데서 나온 고사성어로 계수나무 세 긴 가지는 이석형이 세 번 장원 급제 한 것을 말함.
    (주3) 은우(恩雨) : 은혜로운 비 즉 이석형이 달 속의 계수나무가 은혜를 내려 이를 맞고 맑은 정기를 받으며 자라서 세 번 장원급제하는 은혜를 입었다는 뜻
    (주4) 팔차수(八叉手) 팔장을 끼는 사이에 팔운(八韻)의 시를 다 지었다는 중국 당(唐)나라 때의 溫庭均(온정균)의 고사를 인용한말로 시를 민첩하게 빨리 짓는다는 뜻
삼장원사비

    생원진사과 급제자 발표 후에도 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등과자가 사연장에 들어 갈 때는 생원과 급제자는 왼쪽 좁은 문(峽門), 진사과 급제자는 오른쪽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중앙의 큰 문은 오직 임금만이 출입하는 문이었다.

  이석형이 생원과와 진사과를 동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기 때문에 양 편이 서로 장원을 자기편 앞에 세우려고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연회 시간이 지연되자 임금께 사실을 고하였더니 세종 임금은 무척 기뻐하면서 광화문 중앙의 큰 문을 열고 장원은 이 문으로 들어 오도록 명하여 이석형은 평소 임금만이 드나드는 광화문 중앙의 큰 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전해지고 있다.

광화문(光化門) 전경(2003. 10.12, 촬영 增補)
옛날(조선시대) 광화문(光化門) 전경
光化(광화)被四表 及萬方(광피사표 화급만방)
'빛이 나라의 변두리까지 사방을 덮고, 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뜻이다.
태조4년(1395) 경복궁의 남쪽 정문으로 창건되었으며,
당시 위치는 현 광화문보다 약간 앞이고, 방향이 약간 서쪽으로 관악산을 향했다 한다.
2010년 8월 15일 다시 태어난 광화문(光化門) 전경(2010. 8. 16. 조선일보)
광화문(光化門)의 역사(2010. 8. 16. 조선일보)


  또 이석형은 세종29년에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신숙주(申叔舟), 박팽년(朴彭年), 유성원(柳誠源), 최항(崔恒) 등과 함께 중시(重視)에 응시하여 총 19명이 급제하였는데 그 중 이석형을 포함한 여덟 사람의 답안이 우열을 가릴 수 없어 임금에게 과차(科次)를 정하도록 상주하였더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면서 팔준도(八駿圖) 그림을 내 놓으면서 이에 병서(竝書)할 글을 각자 자기 취향에 맞도록 전(箋), 부(賦), 시(詩), 명(銘), 송(頌)을 짓도록 하는 재시험을 실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헌집(樗軒集)에 전해지고 있다.
  * 팔준도(八駿圖): 태조 이성계가 고려 장수로 북쪽 야인과 남쪽 왜적을 토벌할 때 타고 다니던 여덟마리의 말을 그린 그림

  이석형은 세종 때부터 성종까지 6조에 걸친 명신으로 최종 직위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종1품)를 지냈고 성종2년에 좌리공신 2등에 녹훈(錄勳) 되어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만년에 한직에 있으면서 양수(洋水)의 서편에 집이 있었는데 검소하게 살면서 연못을 파고, 「계일정(戒溢亭)」이라는 초가 정자를 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분수에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계일정신(戒溢精神)을 일깨워주었다 하며, 지금은 서울대학병원 남쪽 연건동(蓮建洞)의 옛 이름이 연화방(蓮花坊)이었는데 이는 이석형의 계일정 연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석형은 세종24년 젊은 시절에 사육신(死六臣)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 뽑혔고, 집현전에 함께 있었으며, 중시(重試)에서 경쟁하는 등 절친한 사이였으나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가담하지 못하였다.

  세조2년 전라도 관찰사로서 익산(益山)을 순시하던 중에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착잡한 심경으로 즉석에서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사육신을 애석해 하는 마음을 시로 지은 이른바 「익산동헌시(益山東軒詩)」를 지었는데 이로 인하여 세조의 국문을 받을 때 정몽주에 관한 세조의 질문에 대하여 또한 시로서 대답한 「이석형영시이헌(李石亨詠詩以獻)」이란 시가 유명하다.

  즉 이석형이 세조1년(1455) 전라도 관찰사에 부임하여 세종 때부터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정인지, 유효통, 이석형 등 20인이 집필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전담하여 출간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다른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 사이 진관사 호당 친구들 중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이 유성원, 유응부를 합한 여섯 사람이 주동이 되어 영월로 귀양 가 있는 단종을 다시 복원 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일이 여의치 않아서 발각되어 잡혀서 국문을 받고 처형되니 사람들은 이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른다. 반면 신숙주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오히려 세조 편에 섰다.

  세조2년(1456) 이석형이 전라도 관찰사로서 익산을 순시하던 중 사육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착잡한 심경으로 다음과 같은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 이라는 짧은 시 한수를 지었다.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 익산 동헌에서 짓다.
                    虞時二女竹(우시이녀죽) 순임금 때는 이녀죽의 슬픈 일이 있었고,
                    秦日大夫松(진일대부송) 진나라 때는 대부송의 영화로운 일이 있었네
                    縱是哀榮異(종시애영이) 이것은 비록 슬프고 영화스러움이 다를 뿐
                    寧爲冷熱容(영위냉열용) 어찌 차갑게(냉대), 따뜻하게(환대) 함이 용납되리

  * 二女竹(이녀죽): 중국 고대 삼화오제의 마지막 임금 순(舜)임금은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왕비를 두었는데 모두 요(堯)임금의 딸이다. 순임금이 남쪽 창오(倉梧) 지방을 순시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두 왕비가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소상강(瀟湘江)까지 와서 슬피 울었는데, 두 왕비의 눈물이 강가에 무성한 대나무 잎에 떨어져 반점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소상반죽(瀟湘班竹)’ 또는 ‘이녀죽(二女竹)’ 이라 하여 ‘슬픈 일’ 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 大夫松(대부송):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이 동쪽 맨 끝 산동지방에 우뚝 솟아 있는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통일을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올리려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미쳐 우장을 준비하지 못하여 비를 맞게 되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 밑에서 비를 피하고, 비가 그친 후 무사히 제사를 마칠 수 있었다. 제사를 끝낸 진시황이 그 소나무를 고맙게 생각하고 대부(大夫)의 벼슬을 내렸다.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대부송(大夫松)’ 이라 부르면서 ‘영화로운 일’ 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위의 시에서 이녀죽(二女竹)은 사육신(死六臣), 대부송(大夫松)은 이석형 자신을 말한다고 풀이하고, 이 시는 ‘슬픈 일을 당한 사육신 즉 이녀죽이나 영화를 누리고 있는 이석형 자신 즉 대부송이나 단지 슬프고, 영화스러움만 차이가 있을 뿐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사육신 그들을 냉대하고, 나를 열열히 환대할 일이 아니다’ 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 시가 세상에 전해지자 헐뜯기를 업으로 삼는 대간(臺諫)들은 ‘이 시는 사육신(死六臣)을 동정한 시’로 단정을 내리고, 이석형을 국문할 것을 간하여 결국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석형이 잡혀와 세조 앞에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세조가 부왕 세종대왕이 키우고 아끼던 집현전 학자들을 많이 처형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부왕이 아끼던 이석형을 벌해야 할 지 모른다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던지 곧바로 국문에 들어기지 않고, 국문에 앞서 이석형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정몽주(鄭夢周)가 고려에서는 어떤 사람이고, 우리 조선에 있어서는 어떤 사람인가?” (上問鄭夢周於高麗朝何等人我朝何等人)

  이석형은 세조가 하문한 것을 시(詩)로써 답하겠다 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올렸다.
李石亨詠詩而獻(이석형영시이헌) 이석형이 시로 읊어 올리다.
                    聖周容得伯夷淸(성주용득백이청) 주 무왕은 백이숙제의 깨끗함을 알아 주어
                    餓死首陽不用兵(아사수양불용병) 군사를 쓰지 않고 수양산에서 죽게 두었네
                    善竹橋頭當日夕(선죽교두당일석) 선죽교 머리에 그날 저녁
                    無人扶去鄭先生(무인부거정선생) 정선생을 따르는 사람도 업었는데

  이 시는 중국 주나라 무왕(武王)이 조국 은(殷)나라를 멸하려 할 때 이를 말리던 백이(伯夷), 숙제(叔齊) 형제의 말을 듣지 않고 은나라를 멸하자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뜯어먹고 살다가(무왕이 군사를 풀어서 잡아 죽이지 않고, 不用兵) 굶어죽게 내버려 둔 고사와 조선조 개국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인 일을 비교하면서 ‘정몽주는 고려의 신하로써 기울어지는 고려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대세를 돌이킬 만한 세력을 이루지도 못했는데(無人扶去) 그를 굳이 죽인 것은 도량이 좁은 처사’ 임을 은근히 꼬집는 내용이다.

  시를 읽은 세조도 이석형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그 시(익산동헌시)는 시인의 영감을 읊은 것일 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 하면서 이석형에 대한 국문을 중지하고, 또 이석형을 내직으로 불러들여 예조참의(禮曺參議: 정3품)에 임명하였다.

  등과와 관련하여 한 사람 더 소개할 사람이 있다. 역시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살면서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에 이르렀던 양원(楊原) 이숙함(李淑 王咸)이다. 단종 1년에 생원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세조 2년에는 중시에 급제하는가 하면 세조 12년에는 발영시에 또 급제하니 세상 사람들이 양원공을 두고 '삼중(三重)'이라 불렀다. 문과와 두 번의 중시에 급제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양원공 이숙함은 충청, 전라, 함경 감사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의 교화(敎化)에 힘쓰며 형벌과 법율은 말절(末節) 즉 최후의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함경도 지방이 문학에 어두운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소학(小學) 등 교재를 대량 간행하여 배포함으로서 북방분풍(北方文風)을 일으켜 그의 이름이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에 올랐다. 사후 이조판서와 대제학이 추증되었고, 아름다운 시와 글이 동국여지승람 등에 많이 올라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율곡선생의 5대조 이명신이 창건하고, 증조부 이의석이 중건할 때 이숙함이 정자 이름을 '화석정(花石亭)'이라 짓고, 그 내력과 경관을 찬양한 기문(記文)이 역시 동국여지승람 파주군편에 에 전해지고 있다. 또 온양관광호탤 정원에 있는 신정비(神井碑)의 비문은 임원준(任元濬)이 짓고 이숙함이 글씨를 썼다고 안내판에 소개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花石亭) 전경과 온양 신정비(神井碑)
6.25한국전쟁후 복원된 화석정 현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글씨가 걸려있다.
(요약)
연안이씨 등과 현황
구분 조선조 연안이씨 비고
문과(文科) 14,620 250 상위(9위)
이석형(李石亨) : 삼장원(三壯元)
이숙함(李淑 王咸): 삼중(三重)
연안이씨 호당(湖堂)
  조선 세종20년에 임금이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을 시켜서 권채(權採) 등 글재주가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문관들을 뽑아서 지금의 구기동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에서 공부하게 한 것을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였는데 독서당(讀書堂), 호당(湖堂)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계속된 엘리트 양성제도였다.

  호당에 선발되면 좋은 여건에서 공부할 수 있고, 학습이 끝나면 특진되며 장차 관직 진출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이에 선발되면 등과 이상으로 명예스럽게 생각하였으며 그 이름이 호당록(湖堂錄)에 오른다.

  호당은 세조 때와 연산군 때 일시 중단 한적이 있지만 숙종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 호당에 선발된 사람은 38회에 걸쳐 291인에 불과한데 연안이씨 사람으로는 모두 10인으로 성씨 중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석형(李石亨)을 비롯하여 이숙함(李淑王咸), 이후백(李後白), 이호민(李好閔), 이명한(李明漢), 이소한(李昭漢), 이경의(李景義), 이은상(李殷相), 이단상(李端相), 이해조(李海朝) 등이다.

  이후백이숙함의 증손자이고, 이경의이호민의 조카이며, 이명한이소한은 형제이면서 이석형의 5대손이다. 이단상이명한의 4자이고, 이은상이소한의 장자이며, 이해조이명한의 손자이다.

이석형이 사가독서한 진관사 일주문
  세종24년(1442)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그리고 이석형 6사람이 제2회 호당에 선발되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이명한은 호를 백주(白洲)라 하며 어릴 때 말을 배우면서 곧바로 글자를 익혔다 하며, 8세 때 이미 '궁성농추사(宮聲弄秋思)'라는 시를 지어 사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하여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오산(五山) 차천로 (車天輅)등이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장래를 크게 촉망하였는데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호당에 뽑히고 아버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에 이어 대제학에 오르고 또 그 아들 이일상(李一相)이 또 한 양관 대제학이 되어 연안이씨를 삼대대제학 집안이 되게 하였다.

  이명한은 남양부사로 있을 때와 강원감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고, 도승지로 있을 때 홍문관 대제학과 지성균관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일이라 한다. 인품이 온유하고 성리학에 밝았으며 문장과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글씨는 당송(唐宋)의 명필들과도 비견되었다고 한다.

  이소한은 호를 형 백주(白洲)와 상대 되는 현주(玄洲)라 하였다. 이소한 또한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가 형 이명한에 버금가 역시 말을 배울 때 글자도 함께 익혔다고 한다. 아버지(월사 이정구)가 글을 읽을 때 그 무릎 위에 앉아서 듣고 빠짐없이 따라 외웠다 하며 15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자 시관들이 이를 의심하고 불러서 답안을 다시 쓰게 하니 즉석에서 한자 틀림이 없이 써 내려갔다 하며, 합격자 발표를 보고 귀가하니 부친이 합격자 명단을 물으니 합격자 200여명의 주소, 성명, 부친 이름까지 전부 외워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동(神童)이라 경탄하였다고 한다.

  연안이씨의 가세가 약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등과자와 호당을 배출된 것은 다른 어느 집안보다도 높은 교육열이 가문의 기풍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초년에 남보다 뛰어나게 학업을 닦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서 이숙함은 영남 거창 지방에 전해오는 자식 교육의 큰 교훈을 남긴 이른바 '오자암(五子巖)'전설의 다섯 아들 중 막내인데, 오자암전설의 주인공인 이말정(李末丁)은 세종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하여 충청도 도사와 판관 벼슬을 하다가 학행과 덕망을 인정 받아 추천되어 예빈시(禮賓寺) 소윤(少尹)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경상도 지례(知禮)로 낙향하였다가 다시 거창 모곡(茅谷)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서 다섯 아들의 학업에 힘썼는데 전원에 매화를 많이 심어 자식들로 하여금 추운 날 씨에도 이를 이겨내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를 본 따게 하고, 집 뒤 다섯 개의 큰 반석 위에서 학업을 열심히 닦게 하여 다섯 아들이 전후 11회에 걸쳐 생원과, 진사과, 문과, 무과, 중시 등에 급제하여 모두 관직에 나아가 출세를 하니 사람들은 그 바위들을 '다섯 아들을 이업(肄業)케 한 바위'라는 뜻으로 '오자암(五子巖)'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연안이씨 부사공파 세보, 금릉군지 그리고 거창 향토지 '못질마을, 모곡'등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요약)
호당(湖당) 현황 (典故大方)
조선조 호당 연리 호당 비고
291 10 수위
(연리 호당)
석형(石亨) : 세종24년 대제학 권 채 선발
숙함(淑王咸): 단종 1년 대제학 신숙주 선발
후백(後白) : 명종18년 대제학 홍 섬 선발
호민(好閔) : 선조18년 대제학 이산해 선발
명한(明漢) : 인조 1년 대제학 김 류 선발
소한(昭漢) : 인조 1년 대제학 김 류 선발
경의(景義) : 인조 1년 대제학 김 류 선발
은상(殷相) : 숙종 4년 대제학 채유후 선발
단상(端相) : 숙종 4년 대제학 채유후 선발
해조(海朝) : 숙종35년 대제학 강 경 선발
연안이씨 관직(官職)
  사람이 공직의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은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조선조 때 관직은 곧 권력(權力)과 부(富)와 명예(名譽)를 함께 가져오는 최고의 가치 기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직을 얻기 위하여 매관매직(賣官賣職)을 하고, 왕실 또는 세도가와 혼인을 하여 외척, 인척의 힘을 빌어 관직을 얻거나 더 높은 직위에 오르려고 하였다.

  많은 관직을 일일이 들 수는 없기 때문에 관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정승(政承)을 표본적으로 들었다.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벼슬인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을 정승이라 하며, 다른 이름으로 영상(領相), 좌상(左相), 우상(右相)이라 하기 때문에 이들을 상신(相臣)이라고도 한다.

  조선조에 정승에 오른 사람은 총373인인데 연안이씨는 9인으로 성씨별로는 8위다.
  태종 때 이귀령(李貴齡) 좌의정, 인조 때 이정구(李廷龜) 좌의정, 효종 때 이시백(李時白) 영의정, 영조 때 이천보(李天輔) 영의정, 이후(李 王厚) 좌의정, 정조 때 이복원(李福源) 좌의정, 이성원(李性源)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영의정, 순조 때 이존수(李存秀) 좌의정 등이다.
  이복원과 이시수는 부자(父子)간이며, 이천보와 이존수는 조손(祖孫)간이다.

  정승을 비롯한 높은 관직에 많이 오른 집안 중에는 왕실과 많이 혼인하여 그 외척의 세도나 후덕을 입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왕비, 세자빈에 간택되거나 부마 또는 왕실의 며느리로 들어가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연안이씨는 이와 반대로 왕실과 혼인 즉 국혼을 피하는 것이 대대로 불문율처럼 되어 왔다.
  심지어 임금이 청혼한 것을 거절했다가 관노가 되어 지방관아에 배치되고, 집안의 재산은 몰수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풍비박산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태종 때 이귀령의 조카이며,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 가까운 친구였던 이속(李續)은 태종이 보낸 매파에게 "짚신은 짚 날이 좋으니라(藁鞋藁經好和也:고혜고경호화야)"하면서 점잖게 거절한 것이 화근이 되어 불공(不恭)-불충(不忠)-대역죄(大逆罪)-반역(叛逆)-횡역(橫逆)으로 발전하여 투옥(投獄)에서부터 국문(鞠問)-참수(斬首)-삼족멸(三族滅)까지 운위되다가 결국 그 아들 이근건(李根建)과 함께 지방 관청 관노(官奴)로 전락 되고, 전 가산을 적몰 당하였다.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그 시신도 찾지 못하여 묘소도 없다가 손자 이인문(李仁文)이 억울함을 상소하여 설원 하고, 1981년에야 판교에 있는 증손 이곤(李坤)의 정국공신(靖國功臣) 사패지에 부자의 단소를 설치하였다.

  연안이씨의 정승 중에 이시백(李時白)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시백은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된 후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올라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정승의 직에만 십여년을 있었다.

  이시백은 병자호란 때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 와서 남한산성 농성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신경진, 구굉, 원두표 등과 함께 산성을 지키는 주장(主將)의 하나인 서성장(西城將)으로서 적의 가장 치열한 주공격 방향인 서쪽을 맡아 분전하였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 청나라에 불모로 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나온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는 세손(世孫)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하려 할 때 이시백은 세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자 임금이 이시백과 봉림대군을 함께 불러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이시백에게 술을 따라 올리도록 하는 등 설득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효종이다. 효종이 등극하자마자 자기의 세자책봉에 반대했던 이시백을 우의정에 제수하고 이어서 좌의정, 영의정까지 십 여년을 정승 직에 있게 하였는데 이는 효종이 그만큼 사심이 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시백이 또한 사심이 없이 나라를 생각하는 충성심으로 일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시백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 충성을 다하며 청백한 생활자세를 견지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십 여년을 정승 직에 있으면서도 재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 효종 당년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연안이씨 상신 중에 또 한사람 소개하고 넘어가야 할 사람이 있다. 이천보(李天輔)인데,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오대손(五代孫)으로 글도 잘하여 조선조 문장가록(文章家錄)에도 올라 있다.
  영조 15년 병조판서로 있다가 우의정에 오른 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라 역시 십 여년을 정승직에 있었다.

  영조 25년에 사도세자의 평양 원유사건(遠遊事件)에 대하여 세자사(世子師)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세자에 대하여 책임 추궁을 하지 말라고 상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여 후세 사람들로부터 직분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정치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천보의 생가가 현재 가평 상면 상동리에 보존되어 경기도지장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정승에 추천되었으나 오르지 못한(卜相未拜) 연안이씨로는 해고(海高) 이광정(李光庭), 묵재(默齋) 이귀(李貴),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 등이 있고,
  정승에 물망에 올랐으나 조졸하여 정승에 오르지 못한 사람으로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이 있다.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은 광해군 10년에 태어나 품계는 정1품, 관직은 형(刑), 예(禮), 이조(吏曺)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다. 만년에 서문 밖 근곡(芹谷: 미나리골)에 살면서 호를 근곡이라 불렀다.
  초년에 함평(咸平) 현감과 종성(鐘城) 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읍민들이 각각 송덕비를 세웠고,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이 도탄에 빠졌을 때 자신의 봉급과 비축미를 풀어 재민을 구하였다.
  숙종 14년에 예조판서로 있을 때와 숙종 16년 판의금부사 겸 세자좌우빈객에 있을 때 두 번이나 정승에 추천되었으나 오르지 못하니 관운이 없었던 것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봉조하(奉朝賀: 종2품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평생 녹봉을 지급하고 예우하는 제도)가 하사되었다.
(요약)
상신(相臣)현황(전고대방)
조선조 상신 연이 상신 비고
373 9 상위(9)
(연이 상신)
귀령(貴齡) : 세종 27년, 40세, 지 좌상
정구(廷龜) : 인조 6년, 65세, 지 좌상
시백(時白) : 효종 원년, 70세, 지 영상
천보(天輔) : 영조 28년, 55세, 지 영상
후(王厚) : 영조 34년, 65세, 지 좌상
복원(福源) : 정조 6년, 60세, 지 좌상
성원(性源) : 정조 12년, 64세, 지 좌상
시수(時秀) : 정조 23년, 65세, 지 영상
존수(存秀) : 순조 27년, 56세, 지 좌상

부자연상(父子連相) : 복원(福源) - 시수(時秀)
부자연상(父子連相) : 복원(福源) - 시수(時秀)
복상미배(卜相未拜) : 광정(光庭), 귀(貴), 관징(觀徵)
연안이씨 문형(文衡)
  조선조 때 홍문관과 예문관 그리고 세종 집현전의 대제학(大提學: 정2품)을 문형(文衡)이라 불렀는데, 그 직급은 판서급에 해당하는 정2품이지만 그 명예스러움은 정승을 능가하였다. 그래서 '열 정승이 대제학 하나만 못하다'는 말도 생겨났다.

  대제학은 본인이 스스로 사퇴하지 않는 한 종신직으로 학문이 깊은 사람 중에서 전, 현임 대제학 2인 이상이 추천하여 임명된다. 때문에 조선조를 통틀어 대제학에 오른 사람은 132인 뿐이다.

  연안이씨는 대제학에 있어서도 7인으로 광산김씨와 함께 성씨별로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정구(李廷龜: 선조 34년), 이호민(李好閔: 선조 35년), 이명한(李明漢: 인조 9년), 이일상(李一相: 효종 10년), 이정보(李鼎輔: 영조 37년), 이복원(李福源: 영조 48년), 이만수(李晩秀: 순조 1년) 등이다. 또 대제학의 물망에 올랐으나 전임자가 사의 하지 않아서 기회를 얻지 못한 문형피권(文衡彼圈)에 든 사람도 이은상(李殷相), 이성원(李性源), 이약우(李若愚) 등이 있고,

  청련(靑蓮) 이후백(李厚白)은 대제학을 선출하는 자리에서 3정성, 이판, 이참 그리고 전임 대제학(盧守愼) 등 동전(東銓: 문관 선발) 관련 인사 6사람이 문형 추천 선발 때 김귀영과 함께 모두 6개의 낙점을 받았는데 운이 없어 김귀영이 대제학이 되고, 이후백이 제학이 되었다.

  연안이씨 문형 중에서 이정구, 이명한, 이일상은 삼대에 걸친 연세(連世) 문형이다.
  조선조를 통 털어 삼대에 걸쳐 대제학이 배출된 집안은 연안이씨를 비롯하여 광산김씨, 전주이씨, 달성서씨 네 집안 뿐인데 그 중에서도 연안이씨가 제일 먼저 삼대대제학을 배출한 것이다.
  또 이복원과 이만수는 부자간으로서 부자 연세 대제학도 연안이씨를 비롯하여 전주이씨, 덕수이씨, 안동김씨, 창녕성씨, 해주오씨, 의령남씨 등 일곱 집안 밖에 없다.
조선조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 가문
가문/왕조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철종
延安李氏 廷龜
(정구)
明漢
(명한)
一相
(일상)
光山金氏 萬基
(만기)
鎭圭
(진규)
陽澤
(양택)
全州李氏 敏敍
(민서)
觀命
(관명)
徽之
(휘지)
達城徐氏 有臣
(유신)
榮輔
(영보)
箕淳
(기순)
조선조 부자대제학(父子大提學) 가문
가문 父(부) 子(자)
  延安李氏(연안이씨)  福源(복원) 晩秀(만수)
全州李氏(전주이씨) 眞望(진망) 匡德(광덕)
德水李氏(덕수이씨) 植(식) 端夏(단하)
安東金氏(안동김씨) 壽恒(수항) 昌協(창협)
昌寧成氏(창년성씨) 俔(현) 世昌(세창)
海州吳氏(해주오씨) 瑗(원) 載純(재순)
宜寧南氏(의령남씨) 有容(유용) 公轍(공철)
  현재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는 연안이씨 삼대대제학 이정구, 이명한, 이일상의 묘가 한 능선에 줄져 있고, 신도비 3기를 봉안한 비각, 사우(祠宇) 경덕사(景德祠) 그리고 월사문집 등 2,619개의 각판(刻版)을 저장한 장판각(藏版閣)이 있다.

  원래 월사 이정구가 죽자 처음 용인 능원리 저헌 이석형의 묘가 있는 곳에 예장하고 두 아들 이명한과 이소한이 여묘살이를 하였다.
  어느날 장자 이명한의 꿈에 부친이 나타나 어떤 시를 읊는데 다른 귀절은 잘 모르겠으나 '십이탄(十二灘)을 지나면 길지(吉地)가 있다'는 구절은 선명하였다.
  꿈을 깨고 이상히 여기고 필연 무슨 곡절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날부터 지관과 노복들을 동원하여 십이탄 지나 길지를 찾아나선 결과 2년 만에 현재의 자리를 찾아 이장하였고,
  이어서 장자 이명한, 장손 이일상에 이르는 삼대 대제학이 한 능선에 묻히게 되었다.

  보통 한 능선에 선조와 후손이 묻힐 경우 선조가 위, 후손이 아래에 묻히는 것을 순장(順葬)이라 하여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으며, 그 반대일 경우는 역장(逆葬)이라 하여 꺼리는 것이 통상이었다.

  이 곳 삼대대제학의 묘는 위로부터 이명한(子), 이일상(孫), 맨 아래 이정구 순으로 되어있는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지관이 이 곳이 워낙 길지라 순장을 하게 되면 '너무 특출한 사람이 나서 임금도 가볍게 여기게 되는 역신이 날 것'이라며 그 예방책으로 역장을 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삼대대제학의 묘자리가 좋아서 그 후손들이 대대로 문장이 뛰어나고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한다.

삼대대제학 묘
(요약)
문형(文衡) 현황
조선조 문형 연안이씨 문형 비고
132 7 수위(1)
(연이 문형)
정구(廷龜) : 선조 34년
호민(好閔) : 선조 35년
명한(明漢) : 인조 9년, 이경석 추천
일상(一相) : 효종 10년, 채유후 추천
정보(鼎輔) : 영조 37년, 김양택 추천
복원(福源) : 영조 48년, 서명응 추천
만수(晩秀) : 순조 1년

3대 문형(三代文衡): 정구(廷龜), 명한(明漢), 일상(一相)
부자문형(父子文衡): 복원(福源), 만수(晩秀)
문형피권(文衡彼圈): 은상(殷相), 성원(性源), 약우(若愚)
연안이씨 문장가(文章家)
  고등학교 학생들이 국사시험 준비를 하면서 조선조 4대 문장가를 암기하면서 '월상계택(月象溪澤)'이라 외운다. 이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상촌(象村) 신흠(申欽), 계곡(溪谷) 장유(張維),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조어(造語)이다.

  월상계택의 맨 앞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연안이씨 가문의 문장가이다. 한국고사대전(韓國古事大典)의 문장가록(文章家錄)에는 조선조 대표적 문장가로 81인을 기록하고 있는데 연안이씨는 5인으로 전주이씨와 함께 수적으로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연안이씨 문장가 5인은 이석형(李石亨), 이호민(李好閔), 이정구(李廷龜), 이명한(李明漢), 이천보(李天輔)이다.

  이 뿐만 아니라 연안이씨에는 한 시대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사람들이 매우 많다. 위 5인 외에도 이숙함(李淑王咸), 이후백(李後白), 이소한(李昭漢), 이관징(李觀徵), 이경의(李景義), 이해조(李海朝), 이희조(李喜朝), 이옥(李沃), 이만부(李萬敷), 이복원(李福源), 이시원(李始源), 이시수(李時秀), 이만수(李晩秀), 이존수(李存秀) 등을 들 수 있다.

  연안이씨 문장들의 특징은 단순히 문학적 가치에 그치지 않고 현실 속에 파고 들어 국가, 사회의 발전과 국익에 유용하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의 선조6년 종계변무주청사로서 중국에 들어가 그가 작성한 「종계변무주(宗系辨誣奏)」는 조훈조장(祖訓條章),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명나라 공식 문서에 잘 못된 조선 왕조의 종계(宗系)를 바로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때 각 아문에 보내는 글도 모두 이후백이 단기간에 지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높이 평가 받았다.
  그가 죽은 지 10년 후인 선조23년에 시행한 광국공신 2등에 녹훈되고,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피봉되었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죄기서(罪己書)」로 불리는 글은 임진왜란 초기에 난을 당하여 경상도 사민(士民)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임금이 그 동안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백성이 나라를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교서로서 실의에 빠진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경향각지에서 불같이 의병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구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고 평가 받고 있다.

  또 그는 낭신(郎臣: 佐郞, 正郞)에 불과한 초급관리로 왕명을 받고 필마로 만주 요양에 머물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명나라 원군사령관 이여송 제독을 찾아가 그간의 전쟁 경과와 최근 평양에 집결한 왜병의 전투력에 관한 자세한 현황을 설명하고, 피를 토하는 정성으로 설득하여 이에 감동한 이여송이 드디어 원군의 본진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오게 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후로도 대명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여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하면서 모친상을 당하고도 임금이 "사명(辭命)의 득실이 곧 국가의 존망에 관계가 있다. 너의 문사(文辭)가 아니면 능히 사정(事情)을 조달(條達: 조리있게 하달함)할 수가 없다. 사봉(詞鋒)이 어찌 전봉(戰鋒)만 못하랴"하면서 허락하지 않아서 상주로서 치상(治喪)을 하지 못하였다. 임란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또 그는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여 언제나 비단 관복을 입지 않고 무명 조복을 입었기 때문에 선조 임금도 그의 뜻을 가상히 여기고 어의(御衣)를 내릴 때 그에게는 특별히 무명 어의를 내렸다고 한다.

  선조30년(임진왜란 6년차) 무술년(戊戌年)에 명나라 경략 형개의 수하에 있는 병부(兵部)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왜(倭)를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범하려고 임진왜란을 유발하였다"는 등 조선에 나와 있는 양호 등 명나라 원군 지휘부와 조선 조정을 싸잡아 20여가지를 명황제에게 상주하여 무고하였는데,
  그 중 조선이 관련된 5가지-유왜입범(誘倭入犯) 내지 초왜복지(招倭復地), 우롱천조(愚弄天朝), 교통왜적(交通倭賊), 칭종칭조(稱宗稱祖), 붕기천자(朋欺天子)- 를 변론하기 위한 변무주문(辨誣奏文)을 공모하였다.

  이 때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35세로 병조참지로 있으면서 이에 응하여 쓴 것이 곧 명황제에게 올리는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로 선정되고, 이항복을 진주정사(進奏正使), 이정구를 호조참판으로 1품계 특진시켜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변무에 나섰다.

  명나라에 도착하여 이정구는 관련 39개 아문(衙門)에 보낼 39통의 문서를 침식을 잃고 작성하여 직접 돌면서 설득하고 39개 아문의 장들이 다 참여한 어전회의에서 명황제에게 변무주를 올리면서 정응태의 상주가 터무니 없는 무고임을 역설하므로서 이구동성으로 타당함을 이야기 하였다.

  명황제 신종(神宗)도 "조선은 참으로 예의 바른 나라이다. 국왕의 진주함이 이처럼 명백통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 어찌 일개 소신(小臣)이 사념(私念)으로 국사를 망간(妄奸)되게 하고, 장사(將士)들의 장기간 전진(戰塵)의 고초를 생각하지 않고 속국의 군신(君臣)으로 하여금 고정(苦情)을 읍소(泣訴)케 하였도다. 정응태의 거동이 요망스러워 대사를 그릇되게 할 뻔 하였도다. 정응태를 혁직(革職)하여 서민으로 만들고 회적(回籍)하여 그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는 이정구의 문장을 중국에 크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개 명나라 하급 관리의 무고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임진왜란의 마무리가 역전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무고한 사항을 통쾌하게 변무하여 조명연합(朝明聯合)을 지속 시킨 외교문서로서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 이정구가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에 들어 갈 때면 그의 글을 얻으려고 몰려드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월사 이정구는 자신 뿐만 아니라 두 아들 이명한(李明漢)이소한(李昭漢)까지 문장이 출중하게 뛰어나 사람들은 이들 삼부자를 중국 송나라의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동파), 소철(蘇轍) 이른바 삼소(三蘇) 삼부자의 문장과 비견하기도 하였다 한다.

  또 한사람 특이한 연안이씨 문장가를 소개하여야겠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이다.
  이만부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부사에 오른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의 손자요, 이조참판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박천(博泉) 이옥(李沃)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닜지만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학문에 열중하다가 34세 때 경상도 상주로 낙향하여 69세로 별세할 때까지 처사(處士) 또는 징사(徵士)로 불리며 살았다.

  이관징, 이옥에 이어 문장에 능하며, 글에 있어서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만년에는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였다. 글씨 또한 능하였는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와 종정체(鐘鼎體)를 잘 썼다고 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식산문집(息山文集)에 그가 찬한 식산의 행장(行狀)에서 "타고난 자태는 티없이 아름답고, 피부는 얼음과 눈과 같이 맑고, 빛나는 눈빛은 밝은 별과 같았으며, 의지와 취향은 굳세고 깨끗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동은 단정하고 아담하여 군자(君子)로서의 재능과 덕을 겸비하여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이라고들 하였다"고 또 "처사(處士)로서 완명(完名)하였고, 오학(吾學)의 종장(宗匠)이었다"고 찬양하였다.

  식산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다방면에서 많은 유고(遺稿)를 남겼다. 식산문집(息山文集) 38권(原集 22권, 續集 10권, 別集 4권, 附錄 2권), 도동편(道東編) 20권(2권 失傳), 역통(易統) 8권, 예기상절(禮記詳節) 30권, 사서강목(四書講目) 7권, 지서(志書) 15권, 역대상편람(易大象便覽) 2권, 태학성전(太學成典) 13권, 노여록(魯餘錄) 1권, 독서법(讀書法) 2권(상, 하권), 독서일기(讀書日記) 1권, 규훈(閨訓) 2권(한글본 상,하권, 失傳), 잡록(雜錄) 1책 계 140권에 이른다.

  식산문집 4권은 우리나라 전국의 명승고적지(名勝古蹟地)와 명산(名山)을 거의 답사하고 가는 곳마다 지리지적(地理誌的) 성격의 기행문(紀行文)과 기행시(紀行詩)를 모아 4권 11록과 부록으로 편성하여 「지행록(地行錄)」 이라 하였다.
(요약)
연안이씨 문장가(文章家) 현황(한국고사대전)
조선조 문장가 연안이씨 문장가 비 고
81 5 수위(1)
(한국고사대전에 오른 연이 문장가)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백주(白洲) 이명한(李명漢)
진암(晉庵) 이천보(李天輔)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연이 문장가)
양원(楊原) 이숙함(李淑王咸),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만사(晩沙) 이경의(李景義),
현주(玄州) 이소한(李昭漢),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 명암(鳴巖) 이해조(李海朝),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박천(博泉) 이 옥(李 沃),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쌍계(雙溪) 이복원(李福源), 경심(景深) 이시원(李始源), 급건(及健) 이시수(李時秀),
극옹(?翁) 이만수(李晩秀), 금석(金石) 이존수(李存秀)
조선조 4대 문장가
가문 4대 문장가
延安李氏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平山申氏 상촌(象村) 신 흠(申 欽)
德水張氏 계곡(溪谷) 장 유(張 維)
德水李氏 택당(澤堂) 이 식(李 植)
삼부자(三父子) 문장
구분 이정구 삼부자 송나라 삼소(三蘇)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노천(老泉) 소순(蘇洵)
長子 백주(白州) 이명한(李明漢) 동파(東坡) 소식(蘇軾)
次子 현주(玄州) 이소한(李昭漢) 난성(鸞城) 소철(蘇轍)
식산문집(息山文集) 별집(別集)2권-4권 지행록(地行錄)
목차 내역
권2 지행록1 소서(小序), 사군산수기(四郡山水記-淸風, 丹陽, 永春, 堤川), 시(詩) 5수
지행록2 가야산기(伽倻山記), 청량산기(淸凉山記), 시(詩) 10수
지행록3 소야동기(疎野洞記), 다락동기(多樂洞記), 용유동기(龍遊洞記), 백운동기(白雲洞記), 선유동기(仙遊洞記), 시(詩) 6수
지행록4 동유(東遊: 안동에서 청량산까지), 청량산기(淸凉山記), 시(詩) 26수
지행록5 남유(南遊: 금릉에서 지리산까지), 시(詩) 8수
권3 지행록6 관동(關東), 금강산기(金剛山記), 금강산총기(金剛山總記), 우금강산후기(又金剛山後記), 발(跋), 시(詩) 49수
지행록7 지리고사부소서(智異古事府小序), 삼장동기(三藏洞記), 약천기(藥泉記),월영대기(月影臺記), 황계폭포기(黃溪瀑布記), 북귀기(北歸記),시(詩) 3수
지행록8 덕유산기(德裕山記), 원학동기(猿鶴洞記), 화림동기(花林洞記), 심진동기(尋眞洞記), 시(詩) 18수
지행록9 반구기부발(盤龜記府跋), 시(詩) 20수
권4 지행록10 동도잡록부소서(東都雜錄府小序), 시(詩) 10수
지행록11 추소설(秋蘇說), 선비화설(仙飛花說), 냉천기(冷泉記), 백화산기(白華山記), 속리산기(俗離山記), 소유기(少遊記), 시(詩) 23수
지행부록 (산) 소서(小序), 삼각도봉(三角道峰), 관악(冠嶽), 미지(彌智), 천마성거(天摩聖居), 오관(五冠), 감악(甘嶽), 보개(寶蓋), 치악(雉嶽), 청평(淸平), 한계(寒溪), 태음(太陰), 설악(雪嶽), 오대(五臺), 동계(東界), 태백(太白), 소백(小白), 일월(日月), 빙산(氷山), 사불(四佛), 주흘(主屹), 내영(內迎), 공산(公山), 금오(金烏), 비슬(琵瑟), 운문(雲門), 신어(神魚), 칠점(七點), 금정(金井), 금산(金山), 무등(無等), 조계(曺溪), 천관(天冠), 월출(月出), 금성(錦城), 변산(邊山), 상산(裳山), 추월(秋月), 고덕(高德), 한라(漢拏), 계룡(鷄龍), 부소(扶蘇), 마니(摩尼), 인수(艸아래忍秀), 구월(九月), 수양(首陽), 금수(錦繡), 묘향(妙香), 흘골(紇骨), 칠보(七寶), 백두(白頭)
연안이씨 유현(儒賢)
  조선조는 유교사상과 유학을 국기(國基)로 삼았는데 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선비를 유현(儒賢)이라 부르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유현은 스스로 유학을 연구하여 도를 깨쳐 독자적인 사상을 펴는 경우도 있고, 스승으로부터 그 사상을 전수 받아 발전시키고 또 제자에게 전수하여 하나의 사상적 학문적 맥(脈) 이른바 학맥(學脈)을 형성하였다.

  유현의 거두를 문묘(文廟: 孔子와 周四聖, 宋六賢을 모신 成均館 大成殿)에 배향하고 있다. 현재 신라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2인, 고려의 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 2인, 그리고 조선조의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송준길(宋浚吉), 정여창, (鄭汝昌), 이언적(李彦迪), 김인후(金麟厚), 성혼(成渾), 조헌(趙憲),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 등 14인이 배향되어 있다. 광산김씨 2인(김장생, 김집), 은진송씨 2인(송준길, 송시열)인데 연안이씨는 문묘에 배향된 유현은 없다.

  전고대방(典故大方) 문인록(門人錄)에 수록된 문인은 연 1837인이며 연안이씨는 24인(연 31인)이다.

  연안이씨 유현 중에서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손자요, 백주(白州) 이명한(李明漢)의 제4자이다.

  인조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어갔고, 병조정랑 때 호당(湖堂)에 선발되었으며 대간(臺諫)으로 있다가 벼슬에 뜻이 없어 경연관(經筵官), 승지(承旨), 참지(參知) 등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유교 경전(經典)과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여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현종5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사헌부 집의를 거쳐 현종10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서연관(書筵官: 세자를 모시고 하는 세미나 담당 책임관, 임금을 모시고 하는 세미나 책임관은 經筵官)에 임명되었다.

  문하에 아들 이희조, 사위 김창협, 이재 그리고 김창흡, 임영, 나석좌등 쟁쟁한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성현통기(聖賢通紀)」 등 많은 유고를 남겼다.

  이단상의 아들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는 부친 정관재로부터 유학을 익혔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로 알려졌다.
  숙종6년에 은일(隱逸: 지방관리가 숨어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추천하는 것)로 건원릉 참봉에 추천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대사헌, 이조참판까지 지냈으나, 벼슬보다는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써 경례문답(經禮問答)을 수집, 찬수하여 「우서절요(又書節要)」,「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육동이집람(朱陸同異輯覽)」,「송원명서절요(宋元明書節要)」,「오선생절요(五先生節要)」,「해동유선록(海東儒先錄)」등 후진을 위한 책을 많이 썼다.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있을 때 석담(石潭)에 있는 율곡선생의 유적을 찾아 요금정(瑤琴亭)을 세우고,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제8곡 금탄(琴灘)에 붙여 시를 썼다.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제8곡 琴灘(금탄)
                                        八曲(팔곡)은 어드메고 琴灘(금탄)에 달이 뜬다
                                        玉輸金徽(옥수금휘)로 數三曲(수삼곡)을 노론 말이
                                        古調(고조)를 알리 업쓴이 혼자 즑여 하노라 (栗谷)

                                        팔곡은 어디인가? 금탄에 달이 뜨는구나
                                        옥을 뿌리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로 몇 곡을 타지만
                                        옛 곡조를 알 사람 없어 혼자 즐기노라

                                        八曲何處是(팔곡하처시) 琴灘月正朋(금탄월정붕)
                                        玉輸與金徽(옥수여금휘) 聯奏數三曲(연주수삼곡)
                                        古調無知者(고조무지자) 何妨獨自樂(하방독자락) (尤庵)

                                        八曲溪山何處開(팔곡계산하처개) 팔곡은 어데메로 열리는가?
                                        琴灘終日好沿 水변回(금탄종일호연회) 금탄여울 구비 돌아 종일 흐르네
                                        牙絃欲奏無人識(아현욕주무인식) 거문고 줄을 골라 곡을 타는 듯
                                        獨待靑天霽月來(독대청천제월래) 밝은 달 떠 오르면 더욱 좋으리. (芝村 李喜朝)
(요약)
문인록(門人錄) 현황(典故大方)
師父 門人 延李 門人 師父 門人 延李 門人
회헌(晦軒) 안유(安裕) 11 상당(上黨) 백신정(白?정) 2
국재(菊齋) 권부(權傅) 8 목은(牧隱) 이색(李穡) 10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9 야은(冶隱) 길재(吉再) 8
강호(江胡) 김숙자(金叔玆) 1 점필재(占畢齋)김종직(金宗直) 59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 25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3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31 希閔, 山夔 탄수(灘?) 이연경(李延慶) 6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30 동천(東泉) 김식(金湜) 18
이진(이眞) 김덕수(金德秀) 3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48
사재(思齋) 김정국(김정國) 6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4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 이소재(履素齋)이중호(李仲虎) 18 至男
남명(南冥) 조식(趙植) 41 일재(一齋) 이항(李恒) 31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5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5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5 퇴계(退溪) 이황(李滉) 305
율곡(栗谷) 이이(李珥) 108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2
우계(牛溪) 성혼(成渾) 62 貴, 時白 한강(寒岡) 정구(鄭逑) 30
송강(松江) 정철(鄭澈) 3 대곡(大谷) 성운(成運) 2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 8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 5 基稷, 基卨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4 중봉(重峰) 조헌(趙憲) 17
고청(孤靑) 서기(徐起) 7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51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79 時稷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29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4 廷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20 殷相
포저(浦渚) 조익(趙翼) 8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96 喜朝, 賀朝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25 미암(眉庵) 허목(許穆) 6 鳳徵
명재(明齋) 윤증(尹拯) 80 입석(立石) 박세채(朴世采) 9
정관재(靜觀齋)이단상(李端相) 6 喜朝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30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41 賀朝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39
장암(丈巖) 정호(靜澔) 3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5 雨臣, 亮臣
도암(陶庵) 이재(李縡) 86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5
노소(櫓巢) 김신겸(金信謙) 2 기원(杞園) 어유봉(魚有鳳) 7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2 聖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7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 2 宜朝 미호(渼胡) 김원행(金元行) 50 直輔
지암(止庵) 김양행(金亮行) 9 直輔 역천(?泉) 송명흠(宋明欽) 10 宜朝
중주(中洲) 이직보(李直輔) 2 逑源, 鳳秀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2
과재(過齋) 김정묵(金正默) 2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 10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20 鐘愚 목산(睦山) 이우신(李友信) 10
강재(剛齋) 송치규(宋穉규) 10 鐘愚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46 勝愚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4 수종재(守宗齋)송달수(宋達洙) 2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6 봉서(鳳棲) 유신환(兪莘煥) 18
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 8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 6
성재(省齋) 유중교(柳重 ) 1 성재(省齋) 유중교(柳重 ) 1837 연 31인
문묘배향록(文廟配享錄)(典故大方)
主享 大成至聖文宣王(대성지성문선왕) 孔丘(공구)
周四聖 顔子(안자) 回(회) 曾子(증자) 參(삼) 子思(자사) 伋(급) 孟子(맹자) 軻(가)
宋六賢 周子(주자) 敦?(손신) 程伯子(정백자) 顥(호) 程叔子(정숙자) ?(신) 邵子(소자) 雍(옹) 張子(장자) 載(재) 朱子(주자) 熹(희)
配享 東撫(동무) 西撫(서무)
新羅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高麗 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
朝鮮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 황(李 滉) 이 이(李 珥) 김장생(金長生) 김 집(金 集) 송준길(宋浚吉)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김인후(金麟厚) 성 혼(成 渾) 조 헌(趙 憲)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
* 延李는 문묘(文廟) 배향자(配享者)를 배출하지 못하였음
연안이씨 청백리(淸白吏)
  고금을 막론하고 공직 사회에서 가장 높이 숭앙 받는 덕목(德目)은 청렴결백(淸廉潔白)이다. 지금도 새 정부가 출범하면 과거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부정부패, 축재, 부조리 들을 척결하는 작업부터 하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대통령이 부정축재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스스로 백담사로 귀양을 가는가 하면 감옥에 간다. 이러한 청렴한 기풍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일대 개혁을 단행하는 것은 모든 국민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는다.

  조선조에서도 공직자의 청렴결백이 강조되었고 그 일환으로 청백리(淸白吏)를 선정, 기록하여 오래 오래 기려왔다. 조선조 때 청백리에 기록된 사람은 모두 218인이고 그 중 연안이씨는 7인으로 성씨별로 수위를 차지한다.

  연안이씨 청백리는 성종 때 병조, 형조, 이조판서를 지낸 이숭원(李崇元: 중종 때 녹선), 성종 때 부승지를 지낸 이인충(李仁忠), 선조 때 예조, 이조, 호조판서를 지낸 이광정(李光庭: 선조 때 녹선), 선조 때 형조, 이조, 호조판서를 지낸 이후백(李後白: 선조 때 녹선), 선조 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이기설(李基卨: 선조 때 녹선), 효종 때 영의정에 오른 이시백(李時白: 인조 때 녹선), 숙종 때 병조참지를 지낸 이후정(李后定: 숙종 때 녹선) 등이다.

  백봉(白峯) 이숭원(李崇元)은 단종 원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이후 승정원(承政院: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에서 동부승지로부터 도승지에 이르기 까지 6년간을 왕의 측근에서 보필하였으며,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 평안도 관찰사 등 지방 방백과 형조(2회), 이조, 병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성종 2년에 좌리공신 2등에 녹훈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지만 "평생에 즐기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생산작업(生産作業)의 마련을 즐기지 않음으로서 비록 권병(權柄)의 고위에 있었으나 집은 항상 빈독 같이 소연(蕭然)하여 마치 위(位: 관직)가 없는 사람 같아서 문전에 들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성종 때 대제학을 지낸바 있는 홍귀달이 그의 신도비문에 적고 있다.

  이숭원은 성종22년 죽은지 20여년이 지난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충신(忠臣)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졌다. 현재 전북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현동에는 충신 정려문과 그의 영정을 모신 영당 현동사(玄洞祠)가 복원되어 그의 유품인 예종 하사 영정, 공신녹권, 교지, 공신회맹록 등 20여점이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은 명종1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동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 형조, 이조, 호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연려실기술(燃黎實記述)에 이르기를 '이후백이 벼슬을 살 때 자기 직분에 충실하고 스스로 몸을 청고(淸高)하게 가져서 벼슬이 육경(六卿: 판서) 직에 이르렀어도 가난하고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다. 그는 선물을 일체 받지 않았고 집에 손이 와도 식탁이 보잘 것 없었다. 공이 전장(銓長: 이조판서)이 되어 공정한 인사에 힘쓰고 청탁을 받지 않아서 비록 친한 친구일지라도 이런 일로 찾아오면 조치 않게 대하였다.
  하루는 일가 사람이 찾아와서 벼슬을 구하는 청탁을 하니 후백이 안색을 변하면서 장롱 속에서「효렴부(孝廉符)」라고 적힌 책을 꺼내 보이면서 "내 일찍이 자네 이야기를 듣고 그 이름을 이 책에 기록해 놓고 장차 벼슬에 천거하려던 참인데 이제 자네가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였으니 만약 구하는 자에게 벼슬을 준다면 이는 공도가 아닐세(若求者得之則非公道也)"하면서 효렴부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율곡 이이가 찬한 석담일기(石潭日記) 그리고 그의 신도비문에 적혀 전해지고 있다.

  이후백이 함양에 살았는데 아홉살 때 부모가 한꺼번에 죽고 거창에 있는 그의 백부(國權)의 집에서 양육되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아 왜곡되지 않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안았고 예절에 벗어남이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절에 들어가 공부하는데 경상도 관찴가 이후백이 총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시험삼아 '탑반송(塔畔松)'이라는 시제를 주면서 시를 짓게 하였는데 즉석에서 시를 지어 관찰사를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塔畔松(탑반송)
一尺靑松塔畔栽(일척청송탑반재)
塔高松短不相齊(탑고송단불상제)
傍人莫怪靑松短(방인막괴청송단)
他日松高塔反低(타일송고탑반저)

탑 둘레에 심은 소나무

작은 소나무 탑 둘레에 심으니
탑(관찰사)은 높고 솔(이후백)은 낮아 서로 가지런하지(어울리지) 않네
사람들아 소나무 낮다고 탓하지 말라
후일 소나무는 높고 탑이 도리어 낮을 것이니

  해고(海皐) 이광정(李光庭)은 선조23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선조26년 3년만에 정3품의 부승지에 올랐고, 선조32년에는 급제한지 9년 만에 호조판서에 올라 무척 빠른 승진을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의주로 임금을 호종하여 명나라와의 외교, 명나라 원군과의 절충 교섭, 전황파악, 후방지원 등 국난극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임란 후 선조34년에 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이원익, 유성룡, 김수 등과 함께 13인이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선조37년에 있은 임란극복 공신 책록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고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인조7년 향년 78세로 죽었는데 선조실록에도 "이광정은 사람됨이 근신하고 검소하였다"고 평하였다. 또 이광정은 서양 문물에도 관심을 가져 선조36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6폭짜리 세계지도를 가지고 왔는데 이를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 한다.
(요약)
연안이씨 청백리(淸白吏) 현황(典故大方)
조선조 청백리 연안이씨 청백리 비고
218 7 수위(1)
(연안이씨 청백리)
인충(仁忠): 성종, 승정원 부승지
숭원(崇元): 중종, 판서
후백(後白): 선조, 판서
광정(光庭): 선조, 판서
기설(基卨): 선조, 사헌부 장령
시백(時白): 인조, 영의정
후정(后定): 숙종, 병조 참지
  인조14년 병자호란 때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강화가 함락될 때 청군에게 포로가 되거나 부녀자들은 그 몸을 더럽히지 않고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자결한 사람이 많은데 연안이씨 집안에는 이정구의 차자 이소한의 처 여주이씨(驪州李氏), 장손 이일상의 처 전주이씨(全州李氏) 그리고 차손 이가상(李嘉相)이 함께 자결하여 난이 끝난 후 열녀2인, 효자 1인이 함 정려되었다.

연안이씨 정려(旌閭)
  조선조 사회에서 도덕적 귀감을 대표하는 것이 청백리라면 윤리적 귀감을 표시하는 것이 충신(忠臣), 효자(孝子), 절부(節婦), 열녀(烈女)를 정려하는 것일 것이다.

  연안이씨 가문의 정려로는 지금까지 발굴된 것으로 충신 7인, 효자 12인, 절부 4인, 열녀 3인 계 26인이며 그 중 6대에 걸쳐 13인이 연세 정려된 13정문이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13정문은 명종 원년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이언침(李彦?)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순창군수로 좌천되었다가 2년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사천으로 부처되어 이듬해 적소에서 죽었는데 그 부인 광릉안씨(廣陵安氏)가 절부에 정려된 것을 비롯하여 아들 이지남(李至男)이 효자, 며느리 동래정씨(東來鄭氏)가 절부, 손자 이기직(李基稷)과 이기설(李基卨) 그리고 손녀 연안이씨처자(延安李氏處子)가 각각 효자에 정려되면서 인조 임금으로부터 「孝子三世」(효자삼세)라는 어서사액(御書賜額)을 하사 받았다.

  이어서 증손 이돈오(李惇五)와 이돈서(李惇敍)가 각각 충신에 정려되자 사람들은 '팔홍문가(八紅門家)'라 불렀다. 팔홍문가에는 팔홍문으로 끝나지 않고, 이돈오 처 광주김씨(光州金氏)가 열녀, 이돈실 의 처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절부에 각각 정려되었고, 현손 이후성(李后晟)과 이후잠(李后潛)이 각각 효자에 정려되고, 5대손 이상기(李相琦)가 역시 효자에 정려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팔홍문가 집안에 6대에 걸쳐 충신 2, 효자 7, 절부 3, 열녀 1, 계 13개의 정문이 세워지니 이는 조선 개국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 되었다.

  이들의 정려각은 인조 12년에 김포에 처음 세워진 이후 병화로 소실되거나 이축하는 등 12번의 변화를 거듭한 끝에 1989년 김포읍 감정리에 13정려각으로 복원되어 13정려기와 「 孝子三世 」 어서사액이 봉안되고 있다.
13정려각 전경
13정려기(旌閭記)
인조 어필사액(御筆賜額)
열녀 효자 3정려문 (경기 가평 상면 태봉리 이정구 묘하)
  충의공(忠毅公) 이유길(李有吉)은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의 손자인데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수하에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기여한 공을 인정 받아 승진을 거듭하여 광해조 때 평안도 영유 현령으로 있었다. 후금의 명나라 침략으로 명나라에서 조선에 청병하자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1만의 군사가 출정할 때 우영장(右營將)으로 출정하여 심하(深河) 전투에서 혈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이유길이 죽기 전에 옷소매를 찢어 '三月四日四'(3월4일사) 다섯 글자의 혈서를 써서 말갈기에 매어주고 말고삐를 자르고 째찍질 하여 보낸후 최후까지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이유길의 말은 3일 동안 달려서 고향집까지 와서 크게 비명을 지르고 죽었다. 죽은 말갈기에서 혈삼을 찾아 그 동생이 압록강까지 가서 혈삼에 혼을 불러와 파주 탄천면 발랑리 선산에 장사 지내고 그 말도 이유길의 혈삼무덤 아래 묻어주니 사람들이 '말무덤'이라 불러 오다가 「義馬塚」(의마총)이라는 모지석을 세워 주었다.

  그 후 이유길은 인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등 5개 왕조에 걸쳐 증직(贈職)되어 영의정과 시호 충의(忠毅)이 내려졌으며, 숙종21년에 충신(忠臣)에 정려되었다.
혈삼무덤(위, 오른쪽)과 말무덤(아래)
(요약)
연안이씨 정려(旌閭)(발굴된 것)
구분 인원 인적사항
충신 7 숭원(崇元), 돈오(惇五), 돈서(惇敍), 시직(時稷), 보(寶), 유길(有吉), 술원(述原)
효자 12 지남(至男), 기직(基稷), 기설(基卨), 처자(處子), 가상(嘉相), 학우(鶴愚), 후성(后晟), 후잠(后潛), 상기(相琦), 시희(時凞), 시걸(時杰), 형국(馨國)
절부 4 광릉안씨(廣陵安氏:언침처),동래정씨(東來鄭氏:지남처) 전주이씨(全州李氏:돈실처),화순최씨(和順崔氏:정복처)
열녀 3 광주김씨(光州金氏:돈오처),여주이씨(驪州李氏:소한처),전주이씨(全州李氏:일상처)
팔홍문(八紅門)집에 13연세정려(十三連世旌閭)
연대별 총괄
연대(서기) 諱(휘) 정문
인조11년(1633) 廣陵安氏(광릉안씨)(언침처) 절부
至男(지남) 효자
東來鄭氏(동래정씨)(지남처) 절부
基稷(기직) 효자
基卨(기설) 효자
處子(처자) 효자
인조17년(1639) 光州金氏(광주김씨)(돈오처) 열녀
숙종 6년(1681) 后潛(후잠) 효자
숙종11년(1686) 惇五(돈오) 충신
숙종32년(1706) 惇敍(돈서) 충신
全州李氏(전주이씨)(돈실처) 절부
영조 7년(1731) 后晟(후성) 효자
영조18년(1742) 相琦(상기) 효자
충신 2,효자 7,절부 3,열녀 1,계13
연안이씨 녹훈(錄勳)
  조선조에는 왕조의 개국(開國)과 사직(社稷)의 보존에 공이 큰 사람을 공신(功臣)으로 책록하고 부원군(府院君: 정1품) 또는 군(君: 종1품이하)을 봉하는 봉군(封君)제도가 있었다. 공신책록은 1,2,3,4등으로 구분하며 이를 정공신(正功臣)이라 하고, 이에 버금가는 이른바 준공신에 해당하는 사람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하며, 정공신의 직계 선조 또는 후손에게 보조공신(補助功臣)을 책록하였다. 봉군은 정공신 뿐만 아니라 원종공신과 보조공신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조 때 공신 책록은 태조 때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비롯하여 총 27회 였으나 7회는 삭훈되고, 20회 671인이 정공신으로 녹훈되어 있는데 연안이씨는 모두 10명이 11회에 걸쳐 정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이숙기(李淑琦)가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 이석형(李石亨)이 좌리공신 3등, 이숭원(李崇元)이 좌리공신 2등, 이곤(李坤)이 중종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 이후백(李後白)이 선조 때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이광정(李光庭)과 이호민(李好閔)李 先祖 때 호성공신(扈聖功臣) 2等, 이귀(李貴)가 인조 때 정사공신 1등, 이시백(李時白)과 이시방(李時昉)이 정사공신 2등에 각각 녹훈되었다.


    - 적개공신은 이시애 난을 진압한 전공(戰功)이고,
    - 좌리공신은 태조 이후 성종 때까지 조선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데 공이 큰 사람들이며,
    - 정국공시은 폭군 연산주를 몰아내고 중종을 세운 이른바 중종반정에 공이 큰 사람이고,
    - 광국공신은 중국 명나라 공식 문서에 잘못된 종계를 바로 잡는데 공이 큰 사람들이며,
    - 호성공신을 임진왜란을 치르는 과정에서 임금을 호종하여 잘 보필한 공이 큰 문신들이고,
    - 정사공신은 광해주를 몰아내고 인조를 세운 이른바 인조반정에 공이 큰 사람들에 대한 공신책록이다. 적개와 호성은 전란을 극복한 공이고, 정국과 정사는 폭군을 몰아내는 반정의 공이며, 좌리와 광국은 평상 직무에 충실했던 공로이다. 당쟁 고변사건이거나 후에 삭훈된 공신 책록에는 한사람도 없다.

  인조반정을 주모하여 정사공신에 책록된 이귀, 이시백(장자), 이시방(3자) 삼부자(三父子)는 광해주의 도덕적, 인륜적 타락에 반기를 들고 입기명륜(立紀明倫: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인륜을 밝게 한다)의 기치 아래 일어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政)의 실질적인 주모자이며 반정이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이귀는 반정후 호위대장과 이조참판을 겸한 막강한 실권을 장악했지만 반정의 공과 맡은 직책을 이용하여 자기 관작을 높이거나 사욕을 채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마음만 먹으면 정승직에도 쉽게 오를 수 있었지만 문관출신의 다른 반정 1등 공신 이를 테면 김류, 신경진, 최명길, 김자점 등이 모두 영상에까지 올랐자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관직은 찬성에 머물렀다.

  대체로 1등공신에 책록되거나 권력을 쥐게 되면 곧 오만해지고 인심을 잃게되어 머지 않아 폐가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귀의 경우는 스스로 겸손하고 광명정대(光明正大)를 처신의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인조 이후 혹심한 당쟁이 이어졌지만 본인과 그 후손들은 9대에 이어지면서 11인이 부원군 또는 군에 봉해져 가문은 이른바 「9대봉군(九代封君)」의 영예를 얻었다.

  이숙기는 단종1년에 진사과에 2등으로 급제 하였지만 대과는 무과(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과 세조2년에 무과 중시에도 급제하여 문무를 겸한 닺다능한 인재로 무관으로 부국하여 판서의 직에 올랐다.

  세조12년에 함경도 지방의 강력한 토호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켜 그 세력이 관군을 능가할 정도로 막강하여 함경도지방 문무 수령들이 잇달아 수난을 당하자 조정에서 진압군을 편성하였는데 이숙기는 오위의 정5품직에 불과한 사직(司直)으로 있으면서 진압군의 말단 간부인 맹패장(猛牌將: 지금의 소대장급)에 편성되어 참전하였다.

  반란 진압중에 혁혁한 공을 세워 평난 중에 이미 남이장군과 함께 정3품의 절충장군(折衝將軍)에 특진하였고, 평난 후에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며, 종2품의 이조참판에 특진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여진정벌에 나서 공을 세웠으며, 호조판서에 오르고, 성종2년에 좌리공신 3등에도 녹훈되었다. 시호 정양(靖襄)과 부조전(不 示兆 典: 영구히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낼수 있는 특전)이 내려졌다.
(요약)
연안이씨 녹훈 (錄勳)
조선조 공신 책록 연안이씨 공신 비고
20회 671인 10인 11회 상위
(연안이씨 공신)
숙기(淑琦): 세조13년 적개(敵愾) 1등 연안군(延安君)
성종 2년 좌리(佐理) 3등
석형(石亨): 성종 2년 좌리(佐理) 3등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숭원(崇元): 성종 2년 좌리(佐理) 2등 연원군(延原君)
곤(坤) : 중종 1년 정국(靖國) 4등 연성군(延城君)
후백(後白): 선조24년 광국(光國) 2등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광정(光庭): 선조37년 호성(扈聖) 2등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호민(好閔): 선조37년 호성(扈聖) 2등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귀(貴) : 인조 1년 정사(靖社) 1등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시백(時白): 인조 1년 정사(靖社) 2등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시방(時昉): 인조 1년 정사(靖社) 2등 연성군(延城君)
9대 봉군(封君) 세계도
조선조 녹훈(錄勳)
연도 공신명 1등 2등 3등 4등 연안이씨 공신
태조 1년(1392) 개국
開國
15 9 15 39
정종원년(1398) 정사
定社
7 10 17
태종원년(1401) 좌명
佐命
4 3 9 21 37
단종원년(1453) 정난
靖難
12 8 17 37
세조원년(1455) 좌익
佐翼
7 12 22 41
세조13년(1467) 적개
敵愾
6 23 12 41 李淑琦(1등) 延安君
예종원년(1469) 익대
翊戴
8 5 24 37
성종 2년(1471) 좌리
佐理
9 30 36 74 李崇元(2등) 延原君, 李石亨(3등) 延城府院君,
李淑琦(3등) 延安君
중종원년(1506) 정국
靖國
5 13 31 58 107 李 坤(4등) 延城君
중종 2년(1507) 정난
定難
1 1
선조24년(1591) 광국
光國
3 7 9 19 李後白(2등) 延陽府院君
선조37년(1609) 호성
扈聖
2 30 53 85 李好閔(2등) 延陵府院君,
李光庭(2등) 延原府院君
선조37년(1609) 선무
宣武
3 5 10 18
선조37년(1609) 청난
淸難
2 2 5
인조원년(1623) 정사
靖社
9 13 27 49 李貴(1등)延平府院君, 李時白(2등)延陽府院君,
李時昉(2등)延城君
인조 2년(1624) 진무
振武
3 9 20 32
인조 5년(1628) 소무
昭武
1 2 3 6
인조6년(1629) 영국
靈國
2 2 1 5
숙종7년(1681) 보사
保社
2 1 2 5
영조4년(1728) 양무
揚武
1 7 7 15
계(20회) 101 191 300 79 671
삭훈(削勳)
연도 공신명 1등 2등 3등 4등 연안이씨 공신
명종원년(1546) 보익(保翼) 4 5 16 25 선조10년 삭훈
명종 위사(衛社) 4 8 19 31
광해 4년(1612) 위성(衛聖) 10 17 53 80 인조 1년 삭훈
광해 익사(익사)
광해 형난(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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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 기사(耆社)
  조선조 때 정2품 이상의 고위 공직에 있다가 나이가 많아 공직에서 물러난 70세 이상의 원로들 중에서 국정을 자문케 하는 기로소(耆老所: 耆社)제도가 있었다. 오늘날의 국정자문위원회와 같은 것이다.

  기로소에 들어가면 이미 재직 당시의 공로와 능력을 인정 받는 것이고, 계속해서 나라의 원로로서 중요한 국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조선조 전 기간을 통하여 기로소에 든 사람은 692인인데 연안이씨는 모두 22인으로 성씨별로는 3위이다.
(요약)
연안이씨 기사(耆社)(淸選考)
조선조 기사 연안이씨 기사 비고
692 22 상위(3)
(연안이씨)
광정(光庭): 광해 4년 78세 졸. 호민(好閔): 광해 5년 82세 졸
귀(貴) : 인조11년 77세 졸. 정구(廷龜): 인조 2년 72세 졸
경엄(景嚴): 인조17년 74세 졸. 관징(觀徵): 숙종 3년 78세 졸
인징(麟徵): 숙종 년 세 졸. 철보(喆輔): 영조51년 80세 종
정보(鼎輔): 영조29년 74세 졸. 지억(之億): 영조35년 72세 졸
길보(吉輔): 영조30년 70세 졸. 복원(福源): 정조 3년 74세 졸
명식(命植): 정조 4년 81세 졸. 시수(時秀): 순조 5년 77세 졸
익운(益運): 순조 8년 70세 졸. 조원(肇源): 순조18년 75세 졸
약우(若愚): 철종 5년 79세 졸. 학수(鶴秀): 철종 7년 80세 졸
가우(嘉愚): 철종14년 70세 졸. 명적(明迪): 고종16년 78세 졸
풍익(豊翼): 고종21년 세 졸. 순익(淳翼): 고종24년 72세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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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 증시(贈諡)
  조선조에는 고위 관직을 지낸 현신(賢臣), 명유(名儒), 절신(節臣) 등에 대하여 죽은 후에 샌전의 행적에 따라 함당한 대명(代名) 즉 시호(諡號)를 내리는 증시(贈諡)제도가 있었다. 시호를 내릴 만한 사람이 죽으면 임금은 그 사람의 앵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시장관(諡狀官)을 임명하고, 시장관은 그 사람의 행적을 상세하게 서술한 시장(諡狀)과 3개의 시호안을 상주하면 임금이 1개 안에 낙점하거나 더 좋은 시호가 있으면 이를 시호로 내린다.

  시호는 그 자체로서 나라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고, 비록 두 자로 구성되지만 그 사람의 공식적인 행적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청선고(淸選考)에 따르면 조선조에 시호를 받은 사람은 모두 1,408인인데 연안이씨로서 시호를 받은 사람은 모두 59인으로 전체의 4.2%나 된다.
(요약)
연안이씨 증시(贈諡)(淸選考)
조선조 증시 연안이씨 증시 비고
1,408 59 4.2%
(연안이씨)
貴齡(康胡), 石亨(文康), 末丁(平靜), 崇元(忠簡), 淑琦(靖襄),
淑 王咸(文壯), 澍 (靖穆), 後白(文淸), 光庭(文忠), 好閔(문희),
廷龜(文忠), 貴 (忠定), 觀徵(文烈), 景義(文貞), 時白(忠翼),
時昉(忠靖), 時稷(忠穆), 明漢(文靖), 昭漢(文肅), 示玄(忠定),
惇五(忠顯), 惇敍(忠敏), 一相(文憲), 殷相(文良), 端相(文貞),
翊相(文敏), 喜朝(文簡), 海朝(文僖), 賀朝(文孝), 天輔(文簡),
鼎輔(文簡), 喆輔(忠憲), 直輔(文敬), 敏輔(孝貞), 王厚 (文翼),
瑜 (忠穆), 沃 (貞郞), 有吉(忠毅), 述原(忠剛), 福源(文憲),
性源(文肅), 文源(翼憲), 肇源(文景), 始源(文簡), 鼎運(貞敏),
益運(靖肅), 時秀(忠正), 存秀(文翼), 晩秀(文獻), 鶴秀(文獻),
龍秀(孝簡), 明迪(文靖), 命植(文貞), 祖淵(忠貞), 鐘愚(文憲),
若愚(文簡), 嘉愚(文貞), 敎翼(孝憲), 道宰(文貞)
연안이씨 서화(書畵)
  연안이씨 선조 가운데 글씨를 잘 썼다고 기록된 사람은 무수히 많다. 이시백(李時白)은 초서(草書)를 잘 썼고, 이정보(李鼎輔)는 사륙체(四六體), 이조원(李祖源)은 전자체(篆字體), 이만부(李萬敷)는 고전필분체(古篆必分體)와 종정체(鐘鼎體), 이종우(李鐘愚)는 독특한 글씨체를 개발하여 그의 호 석농(石農)을 붙여서 석농체(石農體)라 하였다.

  그 외에도 이명한(李明漢), 이시백(李時白), 이관징(李觀徵), 이단상(李端相), 이희조(李喜朝), 이옥(李沃), 이조원(李肇源), 이만수(李晩秀), 이만부(李萬敷), 이종우(李鐘愚), 이도재(李道宰) 등은 특출하게 글씨를 잘 써서 선서(善書)로서 이름난 사람들이다.

  연안이씨 선조 중에서 그림을 잘 그린 사람으로 이시담(李時聃)은 매죽연국(梅竹蓮菊)을 즐겨 그리면서 그의 호를 사우당(四友堂)이라 하였고, 이공우(李公愚)와 이복우(李福愚)는 사군자(四君子: 梅蘭菊竹)를 잘 그렸다. 이공우의 그림 「매도(梅圖)」는 덕수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교익(李喬翼)은 산수화(山水畵)와 인물화(人物畵)를 잘 그렸는데 그의 「호접도(湖蝶圖)」와「노승소요도(老僧逍遙圖)」가 역시 덕수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종우(李鐘愚)는 「강남춘도(江南春圖)」가 유명하였으며, 조선조 말 이도영(李道榮)은 산수화(山水畵), 인물화(人物畵), 화초(花草) 특히 묵사분재(默四扮材)를 잘 그렸는데 그의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와 「산수도(山水圖)」가 개인소장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는 홍익학원(弘益學院)을 창시하여 우리나라 회화의 선구적 존재가 되었다.
(요약)
연안이씨 서화가(書畵家)
구분 이름 비고
글씨 시백(時白) 초서(草書)
정보(鼎輔) 사륙체(四六體)
조원(祖源) 전자체(篆字體)
만부(萬敷) 고전필분체(古篆必分體)와 종정체(鐘鼎體)
종우(鐘愚) 석농체(石農體)
명한(明漢), 시백(時白), 관징(觀徵), 단상(端相), 희조(喜朝), 옥(沃), 조원(肇源), 만수(晩秀), 만부(萬敷), 종우(鐘愚), 도재(道宰) 선서(善書)
그림 시담(時聃) 매죽연국(梅竹蓮菊)을 즐겨 그리면서 그의 호를 사우당(四友堂)이라 함.
공우(公愚) 복우(福愚) 사군자(四君子: 梅蘭菊竹)를 잘 그림. 이공우의 그림 「매도(梅圖)」는 덕수궁미술관에 소장.
교익(喬翼) 산수화(山水畵)와 인물화(人物畵)를 잘 그림. 「호접도(湖蝶圖)」와「노승소요도(老僧逍遙圖)」가 덕수궁미술관에 소장.
종우(鐘愚) 「강남춘도(江南春圖)」 유명
도영(道榮) 산수화(山水畵), 인물화(人物畵), 화초(花草) 특히 묵사분재(默四扮材)를 잘 그림.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와 「산수도(山水圖)」가 개인소장으로 전해짐. 홍익학원(弘益學院) 창시.
연안이씨 시조(時調)
  조선시대는 한문학(漢文學)이 숭앙을 받던 시대라 국문학이 몹시 경시되던 때 특히 양반 가문에서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나 연안이씨는 자타가 양반 가문이라고 하던 집안인데 여러 사람의 시조 작가가 나왔고, 많은 시조 작품을 남겼다.

  이후백(李後白), 이정구(李廷龜), 이명한(李明漢), 이정보(李鼎輔) 등이다. 이 중 이정구, 이명한, 이정보는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이후백은 김귀영과 함께 대제학 물망에 올랐으나 동점으로 김귀영에게 양보하고 양관 제학을 지냈고 사후에 양관 대제학이 증직(贈職)된 사람이다.

  한 시대의 한문학(漢文學)의 표상인 대제학이 시조를 지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가풍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연안이씨 시조 작품의 수를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각종 시조집에 작자가 명확히 기록된 수만 해도 이후백 11수, 이정그 1수, 이명한 10수, 이정보 103수 계 125수이며, 작자 미상이거나 타인의 이름으로 된 것도 연안이씨 시조라는 주장이 일고 있는 것고 있다. 예를 들면 남구만의 번방곡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동창곡(東窓曲)은 이명한의 작품이란 주장이 있다. 또 이정보의 작품 103수 외에도 작자 미상의 많은 시조가 그의 작품일 것이라 추정되는 것이 많다.

이후백의 시조 중에는 중국 소상팔경을 읊은 시조가 유명하고, 이정구의 시조 1수는 광해군의 난정에 즈음하여 신하로서 착잡하고 난처한 심경을 읊은 것이며, 이명한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지은 후국충정어린 시조와 농촌풍경을 실감나게 읊은 것이고 이정보의 시조는 소재의 범위가 무척 넓으며 특히 국화의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절개를 찬양한 시조가 유명하다.

연안이씨 시조는 현대에도 이어져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시조로 이어진다. 김희보 편저 「한국의 명시」에는 난초 2수를 비롯하여 40수의 시조가 실려있다.
청련공이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노래한 시조

                                       창오산(蒼梧山) 성제혼(聖帝魂)아 구름 조차 소상(瀟湘)에 나려
                                       야반(夜半)에 흘러들어 죽간우(竹間雨) 되온 뜻은
                                       이비(二妃)의 천년 누흔(淚痕)을 씻어 볼까 함이라


                                        (풀이) 창오산에서 돌아가신 순임금의 혼이 구름 따라 소상강에 내려와서
                                                  한 밤중에 비를 내려 소상반죽 대나무에 떨어지는 의미는
                                                  아황(娥皇), 여영(女英) 두 왕비의 천년 묵은 눈물 자국을 씻으려 하는가

                                        평사(平沙)에 낙안(落雁)하니 강촌(江村)에 일모(일모)이로다.
                                        어선(漁船)은 이귀(已歸)하고 백구(白鷗)는 다 잠든밤에
                                        어듸서 수성장적(數聲長笛)이 잠든 나를 깨우는고


                                        (풀이) 평평한 모래펄에 기러기 앉으니 강촌에 저녁이로구나
                                                  고기잡이배는 이미 돌아오고 흰 갈매기들도 다 잠든 밤에
                                                  어디서 부는지 여러 소리의 긴 피리소리가 나의 잠을 깨우는구나.

                                        동정호(洞庭湖) 밝은 달이 초회왕(楚懷王)의 넋이 되어
                                        칠백리(七百里) 평호수(平湖水)에 다 비치어 보이는 뜻은
                                        아마도 굴삼려(屈三閭) 어복충혼(魚腹忠魂)을 굽어볼까 함이라.


                                        (풀이)동정호에 뜬 밝은 달이 초나라 회왕의 넋이 되어
                                                동정호 칠백리의 평평한 호수 위를 구석구석 다 비치고 있는 뜻은
                                                아마 굴원이 멱라수에 빠져 고기 뱃속에 들어간 그 충성심을 굽어보려는 것이겠지

                                        소상강(瀟湘江) 세우중(細雨中)에 누엿삿갓 저 노옹(老翁)아
                                        빈 배 홀로 저어 향(向)하나니 어디메뇨
                                        이백(李白)이 기경비상천(騎鯨飛上天)하니 풍월(風月) 실러 가노라


                                        (풀이)소상강에 가랑비 내리는데 삿갓을 비스듬히 쓴 저 늙은이야
                                                빈 배 혼자 저어서 어디를 가느냐
                                                이백이 고래 타고 하늘로 날아 가버렸으니 대신 풍월 실러 간다오

                                        아미산(峨嵋山) 월반륜추(月半輪秋)와 적벽강산(赤壁江山) 무한경(無限景)을
                                        소동파(蘇東坡) 이적선(李謫仙)이 못다 놀고 남은 뜻은
                                        후세(後世)에 나 같은 호걸(豪傑)이 다시 놀게 함이라


                                        (풀이)중국 아마산애 뜬 수레바퀴 반쪽 같은 가을달과 적벽강의 무한한 경치를
                                                소동파와 이태백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놀지 않고 남겨 둔 뜻은
                                                뒷 날 나 같은 놀기 좋아하는 호걸들이 다시 놀 수 있게 한 것일 것이다.

                                        순(舜)이 남순수(南巡狩)하사 창오야(蒼梧野)에 붕(崩)하시니
                                        남풍시(南風詩) 오현금(五絃琴)을 누구 손에 전(傳)하신가
                                        지금(至今)에 문차성(聞此聲)하니 전차수(傳此手)인가 하노라


                                        (풀이)순임금이 남쪽지방을 순시하다가 창오의 들에서 돌아가시니
                                                그 좋아하시던 남풍시와 오현금을 누구에게 전하셨는가
                                                지금 이 거문고 소리 들으니 아마 이 손에 전했는가 싶구나

                                        악양루(岳陽樓) 상상층(上上層)에 올라 동정호(洞庭湖) 굽어보니
                                        칠백리(七百里) 평호수(平湖水)에 군산(君山)이 반이나 잠겼어라
                                        어듸서 일엽어선(一葉漁船)이 임거래(任去來) 하는고


                                        (풀이)악양루 맨 윗 층에 올라 동정호를 내려다 보니
                                                칠백리에 걸친 평평한 호수에 군산이 반이나 잠겼구니
                                                어디서 한조각 작은 고기잡이 배들이 오가는 구나

                                        황학루(黃鶴樓) 적소리 못듣고 고소대(姑蘇臺) 올라가니
                                        한산사(寒山寺) 찬바람에 취(醉)한 술이 다 깨겠다
                                        아이야 주가하처(酒家何處)오 전의고주(典衣高酒)하리라.


                                        (풀이)황학루에서 피리소리 못듣고 고소대에 올라가니
                                                한산사 찬 바람에 취한 술이 다 깨겠구나
                                                아! 술집이 어디냐 옷을 잡혀서라고 흡벅 취해 보겠다.

이정구(李廷龜) 시조 1수
                                        님을 믿을 건가 못 믿을 손 님이시라
                                        믿어 온 시절도 못 믿을 줄 알았어라
                                        믿기야 어려우랴마는 아니 믿고 어이리


                                        (풀이)님(임금)을 믿을 것인가? 믿을 수 없는 것이 님이로다
                                                옛 닐 믿어 온 시절에도 믿을 수 업는 님인 것을 알았었다.
                                                님을 믿기는 어렵지마는 그렇다고 믿지 않으면 어이 할 것인가.

이명한(李明漢)의 우국충정의 시조
- 청나라 불모로 잡혀가 있을 때 지은 것 -
                                        녹수청산(綠水靑山) 깊은 골에 청려완보(靑藜緩步) 들어가니
                                        천봉(千峰)에 백운(白雲)이요 만학(萬壑)에 유수(流水)로다
                                        이 땅이 경개(景槪) 좋으니 놀고 갈까 하노라


                                        (풀이)푸른물 푸른산 깊은 골짜기에 청려장 지팡이 흩어 짚고,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니
                                                봉우리마다 흰 구름 걸려있고, 골짜기마다 맑은 물 흐르네
                                                이 땅-나의 조국-이 경치 좋으니 놀고 갔으면 좋겠네

                                        서산에 일몰(日沒)하니 천지가 가이 없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니 님 생각 새로왜라
                                        두견아 너는 누를 그려 밤새도록 우나니


                                        (풀이)서산에 해가 지니 하늘과 땅이 끝없이 넓고 멀구나- 임금 계신 곳까지 갈 수 없을 만큼-
                                                배꽃이 달빛을 받아 더욱 하야니 님 -임금- 생각이 새롭게 나는구나
                                                두견새야 너는 누구를 그리워하여 밤새 그토록 우느냐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곳 날작시면
                                        님의 집 창 밖이 석로라도 닳을로라
                                        꿈길이 자취 없음에 그를 슬허하노라


                                        (풀이)꿈에 사람이 다니는 길에도 오간 발자국이 난다면
                                                임금이 계신 집 즉 궁궐로 가는 길이 돌길이더라도 다 닳았을 것이다
                                                그러나 꿈에 다니는 길은 발자국이 나지 않아 찾아간 흔적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 마소
                                                  초원 장제에 해 다 저물었다
                                                  객창에 잔등 돋우고 앉아보면 알리라


                                        (풀이)해어지기 싫어 울며 붙잡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지 마오
                                                까마득한 초원의 긴 뚝 길 멀리 해가 다 졌는데
                                                객주집 등잔 밝히고 앉아 밤을 지새어 보면 그 이별 한 심경을 알 것이다.

                                        초강(楚江) 어부들아 고기 낚아 삼지 마라
                                        굴삼려(屈三閭) 충혼(忠魂)이 어복리(魚腹裏)에 들었으니
                                        아무리 정확(鼎?)에 삶은들 익을 줄이 있으랴


                                        (풀이)초나라 양자강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아 고기를 낚아서 삶지 말라
                                                그 강에 몸을 던져 죽은 삼려대부 굴원의 충성스런 넋이 그 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니
                                                아무리 솥가마에 넣고 삶더라도 익지(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한(李明漢)의 농촌풍경을 노래한 시조
                                        샛별 지자 종다리 떳다 호미메고 사립나니
                                        긴 수풀 찬 이슬에 베 잠방이 다 젖겠다
                                        아이야 시절이 좋을 세면 옷이젖다 관계하랴.


                                        (풀이)샛별이 지고, 종달세가 하늘에 뜨는 이른 아침에 밭 매러 가려고 호마 들고 사립문을 나서니
                                                긴 무성한 풀 잎에 내린 찬 이슬에 삼베 잠뱅이가 다 젖는구나
                                                아! (태평세월) 시절이 좋다면야 이까짖 옷이 젖는다고 상관하겠느냐.
오상고절의 시인 이정보(李鼎輔)의 시조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다 보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는가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 뿐인가 하노라


                                        (풀이)국화야 너는 왜 삼월 봄바람 부는 좋은 계절을 다 보내고
                                                나뭇닢 지고 하늘이 찬 이 가을에 너 홀로 피어 있느냐
                                                아마도 모진 서리(세상 풍파)에도 굽히지 않고 외롭게 절개를 지키는 것은 너 뿐이구나.

                                        산가에 봄이 오니 자연히 일이 많다
                                        앞 내에 살도 매고 울 밑에 외씨도 삫고
                                        내일은 구름 걷거든 약을 캐러 가리라


                                        (풀이)산골 집에 봄이 오니 자연히 할 일이 많아지는구나
                                                앞 냇물에 어살도 매고, 울 밑에 외씨도 뿌리고
                                                내일은 구름이 걷히거든 약초를 캐러 가리라.

                                        각시네 꽃을 보소 피는 듯 이우느니
                                        옥같은 얼굴인들 청춘을 매었을까
                                        늙은 후 문전 냉락하면 뉘우칠까 하노라


                                        (풀이)각시네들! 꽃을 보시오. 피자마자 곧 시들으니
                                                그대 얼굴 곡같이 곱다 한들 청춘을 붇잡아 매어 놓았을까
                                                늙은 후 문전이 쓸쓸해지만 그 때 가서야 뉘우칠 것이다.

                                        강호에 노는 고기 즐긴다 부러 마라
                                        어부 돌아간 후 엿보는 이 백로로다
                                        종일 뜨락 잠기락 한가한 때 없어라


                                        (풀이)강과 호수에 노는 고기가 즐겁게 논다고 부러워 마라
                                                어부들 돌아간 후 엿보는 이 백로가 있구나
                                                종일 뜨락 잠기락 하면서 한가한 때가 없구나.

                                        꿈에 님을 보려 베게에 지혔으니
                                        반벽 잔등에 앙금도 차도 찰사
                                        밤중만 외기러기 소리에 잠 못이뤄 하노라


                                        (풀이)꿈 속에 님을 보려고 벼게에 의지하여 잠을 청하니
                                                한 쪽 벽 꺼져가는 등불에 원앙 이불도 찬으로 차구나
                                                밤중쯤 외기러기 소리에 잠 못 이루어 하노라.

가람 이병기(李秉岐) 현대 시조 - 난초 -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며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연안이씨 독립운동(獨立運動)
  한말(韓末)과 일제(日帝) 기간 동안에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국내외에서 노력한 연안이씨는 매우 많지만 그 대표적인 사람은 이동녕(李東寧) 선생이다.

  그는 본국에서 안창호, 김구, 이시영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민중 속에 뿌리내리도록 노력하였고, 만주에서 서군의숙(瑞旬義塾),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등의 설립을 통하여 민중을 깨우치고, 무력적 실력을 기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블라디보스톡에서도 권업회(勸業會)라는 조직을 결사하였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여 초대 의정원의장(議政院議長: 국회의장)과 내무총장(內務總長), 국무총리(國務總理), 국무의원(國務委員), 주석(主席)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통합, 지도하고,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초대 당수를 겸하였다.

  그러나 광복 5년 전인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사하므로서 살아서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국 만리에서 서거하여 해방후 유해를 모셔와 지금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으며 건국훈장 북장이 추서되었다.

1920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가장 절실한 '단결(團結)'을 민중에게 웨친 어록비(語錄碑)가 천안 독립기념관 광장에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가로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내고,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대한독립군단 참모장을 지내다 일본이 사주한 마적에게 일가족이 몰살 당한 이장녕(李章寧)이 또한 연안이씨이다.

  경상도에서 한국독립운동 후원의용단을 조직하고 재무총장을 맡아서 전후 5차에 걸쳐 10만원을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고 발각, 채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 중에 죽은 이명균(李明均)도 연안이씨이다.

  이 외에도 기미 3.1운동 때 평안도 성천(成川) 지방의 시위를 주도했던 이병린(李炳麟), 전남 광주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했던 이순탁(李順鐸) 등이 있다.

  또한 1923년부터 26년 간에 3년 동안 서울 동소문, 안성, 이천, 수원 등에서 신출귀몰 하면서 일경 파출소를 습격하거나 매국노 부호들에게 독립군 자금을 뜯어 냈던 이른바 4대사건의 주인공 이수흥(李壽興) 도 연앙이씨이며, 미주지역에서 독립자금 모금책을 맡아 이승만박사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임정까지 송금했던 이원순(李元淳)도 연안이씨이며, 한일합방에 단식투쟁을 하다가 음독 자살한 이현섭(李鉉燮)도 연안이씨이다.
(요약)
연안이씨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행적
동녕(東寧) -본국: 안창호, 김구, 이시영 등과 신민회(新民會) 조직, 독립운동을 민중에 뿌리를 내리게 함.
-만주: 서순의숙(瑞旬義塾),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 무력적 실력 양성.
-울라디보스톡: 권업회(勸業會) 조직.
-상해: 임시정부 조직, 초대 의정원의장(議政院議長: 국회의장)과 내무총장(內務總長), 국무총리(國務總理), 국무의원(國務委員), 주석(主席)을 지내고,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결성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사, 건국공로훈장 복장 추서
장녕(章寧) -신흥무관학교 교관, 청산리전투 참전, 대항독립군단 참모장.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에게 일가족 몰살
-건국공로훈장 단장
명균(明均) -해인사를 방문한 일본 데라우치 총독 암살 시도, 실패
-3.1운동 때 경상도 만세운동 주도.
-한국독립운동 후원의용단 조직 재무총장, 5차에 걸쳐 임정에 10만원 송금. 채포, 옥고후 병보석 석방중 졍사
-건국공로훈장 단장.
기 타 병린(炳麟), 순탁(順鐸), 수흥(壽興), 원순(元淳), 현섭(鉉燮)
이동녕(李東寧) 어록비(語錄碑)- 천안 독립기념관 광장

동포여! 우리나라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굳건한 독립을 되찾는 데는
하나는 내 동지들의 단결이요
둘은 우리 동포들의 단결이며
셋은 모든 대한 민족이 대동단결함에 있으니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이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1923년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 (石吾 李東寧)
천안 독립기념관 마당에 세워진 석오 이동녕선생의 어록비
연안이씨 정신적기반(精神的基盤)- 결론
  가세(家勢)면에서 대족(大族)도 아닌 연안이씨가 조선조에 있어서 명가(名家)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었 때문이었을까? 그 원인은 정신적기반(精神的基盤)에서 찾아야 될 것 같다.

  첫째로 연안이씨는 학문을 숭상하고, 뜨거운 교육열(敎育熱)을 들 수 있다. 연성군(延城君) 이말정(李末丁)의 '오자암(五子巖) 이업(肄業)'을 그 예로 들 수 있듯이 조선조 초기부터 연안이씨 각 집안은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다른 어떤 집안보다 왕성하여 그것이 유학을 바탕으로 삼았던 조선조 사회에서 가문이 융성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로 청백(淸白), 검소(儉素)한 생활 태도를 가풍으로 견지하여 남들로부터 오만하다거나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세도를 부린다는 평을 듣지 않고 항상 겸손하여 그야말로 '양반'이라는 평을 받았다.

  셋째로 연안이씨 13정문을 비롯한 충효절열(忠孝節烈)의 정려(旌閭)가 말해 주듯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넷째로 중용(中庸)과 의기(義氣)를 함께 지녔다. 연안이씨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이 온순하여 과격하지 않으며,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였다.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의 계일(戒溢)의 가르침이 말해 주듯 중용(中庸)의 도(道)를 지켜 적을 만들지 않고, 좌우(左右) 화합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불의(不義)에 대해서는 분연히 일으나는 의기(義氣)를 지녔다. 광해군의 난정에 분연히 일어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政)'을 주도하였고, 일제에 항거하여 자기 몸과 집안을 헤아리지 않고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뛰어들었다.
(요약)
연안이씨의 정신적기반(精神的基盤)
              ● 학문(學問)의 숭상(崇尙)과 교육열                
● 청백(淸白) 검소(儉素)한 생활태도 
● 도덕(道德)과 인륜(人倫)의 중시    
● 중용(中庸) 그리고 의기(義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