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심원(思慮深遠), 참다운 충(忠)의 청백리
이시백(李時白)
沙月 盛永(2009. 11. 17)
이시백 영정
  이시백은 선조14년(1581)에 태어나 현종1년(1660)에 졸하니 80세를 수(壽)하였다. 자를 돈시(敦詩), 호를 조은(釣隱), 조암(釣巖)이라 하였고, 시호는 충익(忠翼), 봉호는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이시백은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아 선조와 광해군 때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1년(1623) 부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李貴)를 도와 인조반정의 공으로 정사(靖社) 2등공신에 책록되고, 이듬해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나이 44세에 수원 유수(留守:정3품)를 제수 받아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5년간 수원 유수(留守)에 있었다.

  인조7년(1629) 잠시 내직으로 들어와 장예원 판결사(判決事:정3품)로 있다가 다시 양주 목사(牧使:정3품), 이어 강화 유수(留守:종2품) 등 주로 외직으로 나갔다.

  선조11년(1633) 부친상을 입어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삼년상 치상을 마치고 병조 참판(參判;종2품), 다음해 경주 부윤(府尹:종2품)에 임명되었다가 인조14년(1636) 병자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다시 병조 참판 겸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에 임명되어 병자난 중 남한산성 농성전(籠城戰)에서 네 주장(主將) 중의 한 사람으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서성장(西城將)을 맡아 지금의 수어장대(守禦將臺)를 지휘소로 하여 분전하였다.

  병자난을 치룬 후 이시백은 공조를 시작으로 형조, 병조판서(정2품)를 연임하고, 인조19년(1641)에는 지금의 수도권 외곽사령부에 해당하는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 등의 진(鎭) 군무를 맡아보는 총융청의 총융사(摠戎使:정2품)가 되고, 이듬해는 다시 형조판서로서 연경(燕京)에 진하사로 다녀와서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인조22년(1644) 한성판윤(정2품,서울시장)과 형,공조판서를 연임하고, 이듬해는 병이 나서 사직했다가 쾌유된 후에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겸직하여 인조27년(1649) 1월 인조가 승하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에 청백리(靑白吏)에 녹선되었다.

  효종이 선위받은 후에도 공을 더욱 권대(眷待)하여 이조, 병조판서에 임명하였다가 효종1년(1650) 우의정(右議政:정1품)에 올랐고, 효종3년(1652) 4월 진주사로 연경에서 돌아와 일시 체직하였다가 다시 좌의정(左議政:정1품)에 올랐으며, 효종4년(1653) 다시 사은사로 연경을 다녀와서 효종6년(1655)에는 영의정(領議政:정1품)에 승차하여 잠시 사직하였다가 다시 영의정이 제수되어 효종이 승하할 때까지 10년 동안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이시백의 충정(忠情)과 청백검소(淸白儉素)한 생활 태도에 관한 많은 일화들이 여러 문헌에 전해오고 있는데, 우선 풍채와 효성과 우애, 겸손한 성품부터 찬사가 많다.
  조선명인전에는
  「그는 풍모와 위간(偉幹)이 절인(絶人)하였으며, 계곡(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포저(蒲菹) 조익(趙翼) 등이 그를 심히 추중(推重)하였다」고 하였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찬한 신도비문에는
  「공이 어려서 효성이 순독(純篤)하여 항상 효감(孝感)으로 응했고, 형제간에 화락(和樂)하였으나 동생들의 잘못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공의 용모가 웅위(雄偉)하고, 여력(旅아래月 력)이 과인(過人)하나 항상 자시(自恃)하지 아니하여 마치 의복도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고 하였다.

  김기동(金起東)저‘이조시대소설론(李朝時代小說論)’에서는 박씨전(朴氏傳)의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시백의 풍모와 성품을 다음 다섯가지로 요약하여 묘사하고 있다.
    ① 풍질위간(豊質偉幹) 풍채가 좋고 체격이 컸다.
    ② 완력절윤(腕力絶倫) 힘이 남보다 월등히 뛰어나게 컸다.
    ③ 지혜명심(智慧明沈) 지혜가 밝고 깊었다.
    ④ 겸허퇴탁(謙虛堆託) 겸허하고 허심탄회하며 청탁을 물리쳤다.
    ⑤ 애군우국(愛君憂國)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신이 투철한 지사요 영웅적 기상의 소유자였다.

  이시백의 기지(機智)와 애군우국(愛君憂國)을 칭찬한 일화도 많다. 송시열 찬 신도비문에서
  「공은 지려(智慮)가 명심하여 겸허퇴탁(謙虛堆託)하여 외면으로는 무능한 것 같았고, 어릴 적부터 인자한 품성이 천성이라 애군우국 하는 마음은 지성(至誠)에서 나오므로 시정(時政)에서 궐실(闕失)이 있으면 종일 걱정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군무(軍務)에 임하고 백성을 다스림에는 은의(恩義)가 두루 흡족하하여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의 사력(死力)을 얻고, 빙설(氷雪) 같은 지조(志操)가 있어 성세(聖世:효종조)에 원훈(元勳)으로 일곱 번의 서전(西銓)을 맡았고, 두 번의 동전(東銓), 세 번의 상부(相府)에 들어갔으나 재업(財業)은 숙연(肅然)하여 한사(寒士)의 집과 같았다.
  공이 어려서 우계문간공(牛溪文簡公)과 사계문원공(沙溪文元公)에게 수학하여 소학(小學)을 근본으로 하였고, 선배로 이백사항복(李白沙恒福), 제류(齊流)로 장계곡유(張谿谷維)가 다 배행(輩行)을 굽히고, 문지(門地)를 불고(不顧)하여 허여(許與)하였다 」
고 하였다.

  현종실록에도
  「어려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에게 배웠으며, 풍체가 당당하고, 힘이 세며, 지혜가 있었고, 너무 겸손하여 마치 무능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였으나 항상 우국지성(憂國至誠) 넘쳤고, 청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펑위공사문견록에는
  「광해14년(1622) 계해반정론(癸亥反正論)이 비밀리에 발의되고 있을 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은 여주에 귀양 가 있었다. 공이 부친의 명으로 오리의 의향이 어떤가 알아보라고 하였다.
  이시백은 이원익을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저녁밥을 먹은 뒤 오리는 공이 찾아 온 뜻을 짐작하고 잔깐 자리를 피하니 이시백이 문방구들과 요강, 타구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더니 오리가 돌아와서 둥레둘레 둘러보고는 잠자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시백이 오리의 의향을 알아차리고 드디어 반정의 의(議)를 결정하게 되었다」
고 전하고 있다.

  송시열찬 신도비문과 이종신(李鍾莘) 편역 「백사이항복일대기(白沙李恒福一代記)」에는 ‘공의 이름 석자가 근위대장을 설득’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인조반정 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큰 병대로서 궐내에서 대궐을 호위하고 있었으니 반정을 모의하는 제공(諸公)들은 이것이 근심거리였다. 그래서 그의 사위인 장유(張維)의 동생 장신(張紳)을 시켜서 설득하도록 하였는데, 이흥립은
  “이시백도 역시 모의에 참가하고 있는가?”하고 물었다. 장신이 “그러하옵니다” 하고 대답하니 이흥립은
  “그렇다면 이 의거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고 말하면서 드디어 허락하니 이시백이 남에게 신임을 받고 있음이 이와 같았다」
고 전하고 있다.

  송시열찬 신도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이괄의 난 토벌담을 전하고 있다.
  「서변사 이괄이 모반을 하자 임금이 상(喪) 중에 있는 공을 불러서 협수사(協守使)에 임명하니 공이 즉시 이천(伊川)으로 가서 향병을 모집하여 요지(要地)에서 방어 할 것을 정하였는데 반군이 다른 길로 직행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임금은 공주로 파천하였다.
  공은 병사들을 모아놓고 울면서 말하기를 “이미 이지경을 당하였으니 나는 당연히 적군과 사생결단을 할 것이니 장졸들 중에 부모가 있는 자들은 다 돌아가라” 하였는데, 장졸들이 또한 울면서 대답하기를 “사생을 같이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 때 원수 장만(張晩)이 파주에 진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 병졸들을 이끌고 찾아가니 장만이 공의 손을 잡고 “하늘이 나를 도움이라”하고, 정세와 대책을 상의하였다.장만이
  “반군을 토벌하기가 용이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남방의 군사와 합류하녀 만전지계(萬全之計)를 하리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적이 이미 서울을 점거하였으니 그(이괄)에게 붙는 자가 늘어나면 우리가 도리어 객이 되어 주객이 전도되는 형세가 될 것이 염려됩니다. 또 지금 날씨가 좋지않고 바람이 심한데 만약 비가 내려 사졸들이 피로하여 이산(離散)될 염려도 있습니다” 하고 곧바로 토벌작전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정충신(鄭忠信), 남이흥(南以興), 이수일(李守一) 세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북방에 머물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내가 정충신의 위인을 알고 있으니 그는 반드시 용진할 것이며, 이수일은 오랜 장수라 반드시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얼마 안 있어 세 장수들이 진군하여 안현(鞍峴)을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장만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과연 공의 말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다음날 전세는 역전되어 반군이 패주하는데 공과 장만이 합세하니 정충신이 공에게 함께 추격하여 이괄을 체포할 것을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괄이 얼마 안 있어 체포될 것인데 내거 어찌 다른 사람의 공(功)을 가로채리오” 하니 장만이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하였다.

  공이 행재소에 이르니 그 때 조정에서는 장만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론이 분분하고, 자못 심각하였다. 이에 공이 진주하여 당시 상황을 자세히 진달하니 임금이 공을 크게 신뢰하여 장만을 치죄되는 것을 면하였다.
  얼마 안 있어 공이 상을 마치자 수원 유수(留守)에 제수되었다」
고 기록하였다.

  또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은 이시백의 기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공이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수원부사로 나가 있을 때 수 천명의 군사와 말들이 각 마을에 흩어져 있어서 위급한 일이 생겨도 쉽게 모을 수가 없었다.
  공은 열 발쯤 되는 긴 깃대를 언덕 위에 꽂고 모든 군사들과 약속하기를 “위급하면 내가 이 깃대에 방색기를 달고 자호포를 세 번 쏠 터이니 깃발을 보거나 포성을 들으면 서로 알려서 아무도 때를 넘기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정묘난의 통지가 있자 공은 즉시 갑옷을 입고 정문에 앉아 깃발을 달고, 포를 쏘게 하였더니 오기(午時) 경에 모든 군사가 다 모였으므로 공이 거느리고 서울로 향했는데 동작나루에 도착하여도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임금(인조)이 공을 불러 이르기를 “어찌 귀신처럼 빠르느뇨?”하였다」
는 이야기다.

  강화 유수 때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인조10년(1632) 공이 강화유수로 부임하자 ‘강화는 보장(堡障)의 중지(重地)라’ 며 군사를 애휼(愛恤)하고, 비상시에 대비해 양곡의 저축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의 모획(謀劃)이 늘 조정의 의론에 반영되지 않아 한탄하였다」고 기록했는데 이 때문에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쉽게 함락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송시열찬 신도비문은 병자호란 초기 상황 남한산성 농성전(籠城戰)에서 이시백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조14년(1636) 12월 청군이 침입해 오자 공이 임금을 대좌하고 “적기(敵騎)가 매우 신속하오니 오늘 중에 대가가 서울을 피하여야 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공의 망대로 하지 않았다.
  다음날에야 임금이 강화도로 향하려고 출발하여 성문에 이르렀을 때 이미 적이 서쪽 교외를 압박하고 있어 공이 입금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경기(輕騎)로 나가고 대장으로 하여금 뒤를 맡게 하면 초저녁에 한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나 만약 또다시 망설이면 반드시 낭패할 것입니다” 하고 또 “남한산성의 일이 또한 구차하니 신은 하직을 고합니다”하고 윤허를 받아 즉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뒤따라 온 자가 급히 공에게 “대가(大駕)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자 공이 더욱 급히 달려가 남한산성의 군사를 정비하여 대가를 영접하였다.
  다음날 새벽 임금이 샛길로 강화도로 향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니 곧 남한산성을 지킬 것을 방략으로 정하고 임금이 공에게 말하기를 “성 중의 일을 다 경에게 위임하니 어떤 일을 급선무로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묻자 공이 말하기를
  “급히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격려하시는 것이 가장 급한 일입니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중심이 되었고, 신도비문은 이어서 남한산성 초기 농성전(籠城戰)에서 이시백의 활약상이 이어진다.
  「임금이 남한산성에 도착한 첫날 저녁 창졸 간에 공이 명을 받아 여러 군부대를 나누어 지킬 성벽을 분담케 하고 다음날 임금에게 진주하기를 청하여 남한산성의 일을 전담하는 것을 사양하면서
  “어제 밤에는 일이 급하여 감히 스스로 군병을 분수(分守)케 하였으나 다시 체부(體府)에 명하시고 신은 절판(節判) 받기를 청하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듣지 아니하므로 다시 힘써 진주하였다. 이에 임금이 체신(體臣)을 불러 방략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못하므로 공이 나서서 대답하기를
  “별다른 방략이 없으면 신경진(申景 示眞), 구굉(具宏), 이서(李曙) 그리고 제가 사문(四門)을 맡아 지키고, 체신이 총관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한 참 생각한 후에 허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은 휘하의 병력으로 서성(西城)을 지키게 되었는데 이는 임금이 처음 공에게 전담시키려는 생각과 일맥 상통하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공에게 맡긴 것이다.
  하루는 임금이 공을 불러서 밤을 이용하여 적을 치고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만일 불리하면 성중이 다 저상(沮喪)될 수 있으니 그 때 가서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그 후 북쪽을 지키는 군사가 출전하였다가 패한 이후로는 다시는 성을 출전하는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고 전하고 있다.

  역시 송시열찬 신도비문에는 남한산성 농성전투 중에 공이 부상당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인조15년(1637) 1월 19일 홀연 적진에서 화살이 서문에 와서 떨어졌는데 체부가 암문의 군졸을 서문으로 옮겨 서문의 방비를 강화토록 지시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적의 계교에 빠지는 것이다” 하고 암문을 굳게 방비하였다. 그날 밤 적이 단연 암문을 공격하거늘 공이 몸소 궁시를 잡고 성곽을 돌아다니면서 사졸들 보다 앞서 싸우니 군사가 함께 사력을 다하여 싸웠는데 공이 한 번 화살을 쏘면 수명의 적이 쓰러지니 적이 네 번이나 공격을 하다가 패퇴하였는데 공도 네 개의 화살을 맞았다.

  전투가 한참일 때 찬획사 황황(黃潢)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을 도왔는데 공이 말하기를
  “적병이 동쪽으로 달아나며 치지 않느냐? 공은 급히 가서 동쪽을 구하라” 하니 황황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시백공이야 말로 진정 인인(仁人)의 처사라” 하였다
  다음날 성내 사람들이 서문 쪽에 와서 간밤의 전장을 살펴보니 피가 흘러 내가 되고, 적이 버리고 간 기계가 산과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성을 공격하지 못했다.
  임금이 공이 부상당한 것을 들으시고 중사를 보내 하교하기를
  “경이 갑옷을 입지 아니하여 중상하기에 이르니 만일 경이 없으면 장차 나라를 어찌하리오” 하시고 어주를 사송(賜送)하여 위로하니 군중이 모두 감격하였다」
고 적고 있다.

  동평위공사문견록에 이시백의 대기만성(大器晩成)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인조24년(1646) 공이 공주에 성묘를 가던 길에 호서(湖西)의 니산(泥山)에 토적의 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즉시 성묘길을 돌려 돌아와 임금에게 초멸(剿滅) 할 것을 자청하니 임금이
  “이제는 근심이 없다” 하면서 허락해 시백이 토벌에 나섰다.
  시백이 왕명을 받들고 전지로 가기 위해 궐문을 나서면서 집에 들르지 안호 곧바로 토벌군 진지로 향했다.
  뒤에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가상히 여겨 포상을 내리면서
  “이연양(李延陽)이 근신근면하여 그 인물 됨을 늦게 서야 알게 되었다”고 중신들 앞에서 칭찬하고, “이시백과 같은 훌륭한 사람도 그 진가를 이처럼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이만 못한 사람이야 어찌 알게 될 것인가?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는 이야기다.

  송시열찬 신도비문과 인물고(人物考)에는 봉림대군의 세자책봉에 따른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병자호란 후 청에 불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돌아와 죽자 임금은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우려 하면서 다른 신하들은 찬동을 얻었으나 공과 이경여(李敬輿)는 세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임금은 공과 봉림대군을 함께 불러놓고 공에게 술을 따라 올리도록 하였다」
(송시열찬 신도비문)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임금(효종)으로 등극한 후 봉림대군의 세자책봉을 반대했던 공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이어서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십 여년을 삼공(三公)의 직에 있었다」(인물고)
  이는 이시백이 모든 공사에 사심이 없고 오직 우국충정으로 임하고 있음을 효종도 잘 알고 신뢰한 것이며, 효종 또한 큰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인조27년(1649) 임금이 어수당(魚水堂)에 나와서 공 등 두어
  사람을 입시하게 하였다. 술과 찬이 나오고 임금이 친히 잔을 잡고 공에게 묻기를
  “병판은 주량이 얼마나 되오?”하자, 공이 답하기를
  “신은 본래 술을 마실 줄 모르는데다가 항상 병을 앓고 있어서 더욱 마시지 못하옵니다”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병은 남한산성에서 너무 애써서 생겼다”하였다. 또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자손은 몇이나 되는가?”하여 공이 수를 들어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많은데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음은 왠 까닭인가? 만약 나라 일을 담당하고자 하려면 비록 무과라도 좋다. 경의 선친이 나라 일에 충성을 극진히 바쳤으므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수원을 맡았을 때, 집에 돌아와 선신(先臣)을 뵈었더니, 선신이 신에게 ‘어떻게 다스리려 하느냐?’고 묻기에 답하기를‘요즘 듣건데 누가 아버지에게 수원에서 밤낮으로 군사를 준비하는데 그 마음을 추축할 수가 없다 하였다니, 인심이 이 지경이니 비록 나라 일에 정성을 다하고자 하여도 그 세세가 또한 어렵습니다’ 하였더니, 선신이 그 말을 듣고, 일어나서 신을 뜰 아래 잡아놓고 말하기를 ‘임금께서 너의 무능함을 살피지 않고 너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겼으니, 네 분수에 맞게 오직 성의를 다 할 뿐이지 너의 몸을 어찌 돌아보며, 남의 말을 어찌 염려할 것이냐? 남의 허망한 말을 듣고 장차 네 직책을 폐하려 하느냐?’ 하고, 노함이 심하여 장차 매를 때리려 하다가 친척들의 만류로 그만 두었습니다 선신이 죽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받사오니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탄식하다가 세자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는 이들을 보기를 나의 고굉(股肱:팔다리)처럼 생각하니 너도 뒷날 이들을 대접하기를 나와 같이하라”하였다」
(연려실기술)

  송시열찬 신도비문과 연려실기술에는 공의 청백한 생활 태도에 관한 여러 가지 일화들을 전하고 있다.
  「공이 살던 집은 선친 충정공(李貴)이 나라에서 하사 받은 집인데 뜰에 금사낙양홍(金沙洛陽洪)이라는 유명한 꽃나무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대전별감이 임금의 명이라면서 그 꽃나무를 캐어가려 하였다.
  공이 그 꽃나무로 가서 그 뿌리까지 뽑아 망가뜨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조석으로 보장 할 수 없는데 임금께서 어진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하시려는가? 내 차마 이 꽃을 가지고 임금에게 아첨하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모름지기 아뢰어라’ 하였다.
  이후로 임금이 공을 대접함이 더욱 두터웠는데 이는 이시백이 충성스럽게 간(諫)한 뜻을 임금이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다」
(송시열찬 신도비문과 연려실기술과 동평위공사문견록)

  「공의 집이 대대로 청렴 검소함을 지켜왔는데 어느 날 부인이
  비단 방석을 만들었다. 공이 그 말을 듣고 부인에게 뜰 아래 부들자리를 깔게 하고 부인과 함께 앉아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가 예로부터 깔던 것이오. 내가 풍운의 때를 만나 외람되이 공경(公卿)에 올랐으니 조심스럽고 두려운데 어찌 사치하여 스스로 망하기를 재촉한단 말이오. 부들자리도 불안한데 하물며 비단방석이야 말해 무엇 하오” 하고 한탄하니 부인이 부끄러워하며 사과하고 곧바로 비단방석을 뜯어버렸다」
(연려실기술)
  이 이야기는 공의 시호 중에 익(翼: 思慮深遠)자를 넣어 충익(忠翼)으로 하사한 뜻을 생각케 한다.

  「효종3년(1652) 공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갈 때 평양에 당도하니 대동문(大同門) 밖에 화려한 복색과 단장을 한 기생들이 일진을 이루고 있어 공이 말하기를
  “병자난 이후 서도(西道)가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다더니 이제 와서 보니 틀린 말이구먼”하였다. 평양서윤이 대답하기를
  “난리 후 기생이라고는 오직 늙고 병든 자만 남아 있어 사신의 행차에 체통을 이루지 못하므로 각 고을의 관비들 가운데서 자태와 재주가 있는 자를 뽑아 본부에 옮기고 그 친족들에게 의복과 비용을 맡게 하였습니다.” 하자 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서윤을 설치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사신에게 아첨하기 위함인가?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절에 이 짓을 하니 극히 놀랄 일이로다” 하고, 평안감사를 불러 책하기를 “
  지금이 어찌 기생놀이 할 때인가? 주상께 아뢰어서 치죄하고 싶지만 이번만은 그냥 두니 모름지기 기생들을 고을로 돌려보내시오”하였다」
(송시열찬 신도비문과 연려실기술)

  「효종10년(1659) 효종의 국상을 당한 후로 공은 애통해 하기를 친상과 다름없이 하였는데 이듬해 현종1년(1660)에 계제 시방(時昉)의 상을 당하여 너무 비통해 하다가 병이 더욱 심하여 그 해 5월 2일 태평방(太平坊)의 우사(寓舍)에서 수(壽) 80으로 고종(考終)하였다.
  공이 임종에 가까워지면서 구두로 유소(遺疏)를 남겼는데 “주상께서는 덕업(德業)을 진수(眞修)하고, 형벌을 신중히 할 것”을 말하며, 겨우 반부(半部)에 그침으로 공의 제자들이 그대로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보고 매우 슬퍼하였다.
  병이 더할 때부터 의문(醫問)이 그치지 않더니 상을 당함에 상장(喪葬)을 비호하고 은영(恩榮)에 천은이 보통 예보다 더하였고, 위로는 진신(縉紳)으로부터 아래로는 상민에 이르기까지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진 재상이 돌아가셨다”고들 하였다.
  7월 17일 천안군 자매곡(紫梅谷: 자무실)에 장사 지냈는데 출상할 때 횃불을 들고 따르는 사람이 십 여 리에 이어졌다」
(송시열찬 신도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