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지(五承旨), 염방공정(廉方公正) 거경행간(居敬行簡)의 청백리
이숭원(李崇元)
沙月 盛永(2009. 11. 15)
    이숭원은 세종10년(1428) 한성부 명례방(현 필동)에서 태어나서 성종22년(1491) 64세로 그곳에서 졸했다. 자 중인(仲仁), 호 백봉(白峯), 시호 충간(忠簡), 봉호 연원(延原)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단종1년(1453) 생원시 3등, 2년 후에 문과 친시(親試)에 장원(壯元) 급제하여 사제감 주부(主簿:종6품)에 임용되었다.

    단종2년(1454) 사간원 우, 좌정언(正言:정6품)에 승차하고, 세조3년(1458)부터 예종1년(1469)까지 사헌부 감찰(監察;정6품), 지평(持平:정5품),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종5품), 이조 정랑(正郞:정5품),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정5품), 훈련원 첨정(僉正:종4품), 성균관 사예(司藝:정4품), 의정부 사인(舍人:정4품), 장예원 판결사(判決事:정3품)까지 올랐다.

    예종1년(1469)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하)를 시작으로 성종3년(1472)까지 우부승지(右副承旨:정3품하), 우승지(右承旨:정3품상), 좌승지(左承旨:정3품상), 도승지(都承旨:정3품상)에 승차하여 좌부승지(兵曹)를 제외한 5승지(五承旨)를 역임하면서, 공조(工曹), 형조(刑曹), 예조(禮曹), 호조(戶曹), 이조(吏曹) 등 조정의 거의 모든 분야 업무에 능통하였다.
    우승지 때 죄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 정난(靖難), 좌익(左翼), 적개(敵愾), 익대(翊戴), 좌리(佐理) 등 팔공신회맹(八功臣會盟)을 주관하여 처리하였다.

    성종5년(1474)부터 15년(144)까지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判書:정2품),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종2품),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종3품), 한성 판윤(判尹:정2품), 평안도 관찰사,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성종16년(1485)부터 19년(1488)까지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 우참찬(右參贊:정2품)과 좌참찬(左參贊:정2품)을 번갈아 수행하다가 성종20년(149)에는 다시 형조판서 겸 지경연사(知經筵事:정2품)가 되었고, 성종22년(1491)에 다시 좌참찬과 병조 판서 업무를 수행하다가 12월 갑자기 병이 나서 정침에 들었다가 졸하였다.

    이숭원이 병중에 있을 때 임금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진시(診視)케 하고, 그 병세에 따라 빠짐없이 고하라 명하고, 진수(珍羞)와 특미(特味)를 하사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성종 임금께서 이숭원을 총애함이 이와 같았다.

    임금이 공의 부음을 듣고 매우 진도(震悼)하시며 조회와 시정을 3일간 폐하고 예관으로 좌승지 허종을 보내 치상케 하였는데 그가 조사한바 내외 고위직을 역임하고, 공신책록을 받았는데도 집안에 장례를 치를 물품이 없다는 보고에 따라 미두(米豆) 20석, 정포(正布) 20필, 진미(眞味) 20두, 청밀(淸蜜) 6두, 진유(眞油) 등을 하사하여 치상케 하였다.

    이숭원은 연산조 혼란기를 지나 중종조에 이르러 그 청백함이 널리 알려져 청백리(靑白吏)에 녹선되었다.

    대제학을 지낸 홍귀달(洪貴達) 찬 신도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이숭원의 성품과 효도, 우애 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공이 총명정수(聰明精粹)하고, 온아화후(溫雅和厚)함은 천성이었다. 경술(經術)로써 근본을 삼고, 연식(緣飾)으로 이치(吏治)를 해서 재결(裁決)할 때는 객관적인 법(法)을 관대하게 적용하여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처리하는 것이 공의 재능이었다」

    「공은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롭게 지냈는데 동모제(崇允)가 부인과 함께 서거하였는데 그 아들과 딸들이 모두 어리고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공이 거두어 길러서 시집장가 보내서 가정을 이루게 하였으니 눈물겨운 인의(仁義)가 아닌가」

    「공은 평생 환락을 즐기거나 재산을 모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권병(權柄)의 고위에 있었지만 집은 비 독 같이 소연(蕭然)하여 마치 벼슬이 없는 사람과 같아서 아부하기 위해 문전에 들리는 사람도 없이 항상 단정히 앉아 편히 지냈다」

    「나는 공보다 후생이라 어찌 능히 연원(延原)을 알리요마는 소시(少時)에 일찍이 좌윤(左尹) 성사원(成士元)과 함께 놀 때 그가 말하기를 “금세(今世)에 희성자(希聖者)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나 꼭 그런 사람을 보고자 한다면 곧 연원(延元)이 아닐까 생각한다(今之世不聞希聖者然必欲目其人則如延原)”고 해서 나는 늘 곁눈으로 알고 흠모해 왔는데 마침 내가 이조참판이 되었을 때 연원이 판서로 있었기 때문에 매일 배종(陪從)하면서 비로소 성사원의 말이 맞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공이 형방(刑房)에 임직하여 제반 옥사를 처결함에 있어서 호리(毫釐) 만큼도 차질이 없으니 세상 사람들이 명판(明判)이라 불렀다」


    문호사(文豪社) 간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에는
    「이숭원은 성(性)이 효우(孝友)하고, 염정공검(廉靜恭儉)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았고, 관(官)에 있을 때 근밀(謹密)하여 권귀(權貴)를 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숭원의 품성 때문에 그게게 ‘충간(忠簡)’이란 시호가 내려진 것이다. 염방공정(廉方公正) 거경행간(居敬行簡) 즉 ‘청렴하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며, 일상 생활에 조심하고, 행동을 대범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이숭원은 예종1년(1469)과 성종2년(1471)에 각각 영정을 하사받았는데 한 때 행방이 묘연했다가 공이 종증손(從曾孫)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 명종8년,1553-인조12년,1634)에게 현몽하여 다시 찾게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예종조 영정은 익산 현동사(玄洞祠), 성종조 영정은 김천 상좌원 경덕사(景德祠)에 보존되고 있다. (影幀夢說)

    이숭원의 영정(影幀)과 어서(御書) 그리고 팔공신회맹록(八功臣會盟錄)등을 보관했던 어서각(御書閣)이 익산 현동사(玄洞祠)에 있었는데 조선조 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현동사는 철폐되고 어서각만 초라하게 유지되어 오다가 1978년 1책 20여점의 문헌이 국가보물로 지정되면서 1979년부터 1989년까지 국비, 도비, 군비와 연안이씨 종중 헌금이 투입되어 현동사를 복원하고, 영정과 문헌들이 보존하고 있다.
   
복원된 현동사 전경
복원된 현동사 영당
기존 현동사 어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