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 우리나라에 들어 온 최초의 세계지도 -
沙月 李盛永(2007. 1. 13)(延李이야기 288쪽 게재, 增補)
  요즈음 신문 사설이나 칼럼 또는 기사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의 실력이 너무 떨어져 입시에 합격하여 대학에 입학한 학생도 수학능력이 모자라 과외 보충공부를 해야 한다는 기사들은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TV프로 중 일요일 저녁 때 방영되는 고등학교 학생을 상대로 한 ‘도전 골든벨’은 순진한 학생들의 재치와 유모가 넘쳐 흐르는 장면도 좋고, 최선을 다해서 한 문제 한 문제 풀어가는 과정도 진지해서 좋다. 그 무엇 보다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한 개 실수 없이 50개의 정답을 내 놓을 때면 보는 시청자도 정말 감격적이다.

  2003년 6월 12일 방영된 전남 영광 해룡고등학교에서의 ‘도전골든벨’의 마지막 50번 문제를 여학생이 맞혔을 때는 정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50번 골든벨 문제는
  우리나라는 격동의 세월이었던 조선 후기에 들어서 많은 부분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세계 지도 역시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1602년,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 명나라 학자 이지조와 함께 목판에 새겨 만든 이것은 당시 베이징에 파견되어 있던 이광정과 권희가 우리나라로 귀국할 때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사실상 한국에 전래된 최초의 세계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이 세계 중심이 아닐뿐더러 세계가 무척 넓다는 것을 깨닫고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으며, 중화 사상이 크게 동요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도는 무엇일까요?

  영광 해룡고등학교 최후의 도전자 이정주학생은 정답을 맞추고 32대 골든벨을 울렸다.
  정답은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이다.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국가보물 제849호)

  한국사대사전에서 곤여만국전도를 찾아보니
  「선조 17년(서기 1584년, 청 만력12년)중국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에서 이탈리아 선교사 리마두(利瑪두: Matteo Ricci)가 고국에서 가져 온 세계지도에서 중국을 지도의 중에 두고 지명을 한자로 번역하여 개각한 지도이다. 이보다 20년 후인 선조37년(서기 1604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되어있다.

  한국사대사전에는 없지만 ‘도전 골든벨’ 50번문제 설명에는 ‘당시 베이징에 파견되어 있던 이광정과 권희가 우리나라로 귀국할 때 가지고 들어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 이광정이 바로 우라 延李의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이다.

  해고공(海皐公 휘 光庭)은 첨사공 14세손이며 자를 덕휘(德輝) 호를 해고(海皐: 황해도 연안의 옛 이름을 호로 했다)라 하고,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임란 수행에 기여한 공으로 우리 延李에서는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과 함께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어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해고공의 경력을 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34년(1601) 공이 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그 청백함이 인정되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선조35년(1602) 호조판서, 예조판서, 를 거쳐 이조판서를 맡았고, 또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겨 가을에 인목왕후 책종 주청사로 중국에 갔다.

  이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 이민구(李敏求)가 찬한 해고공의 신도비문에는 공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이 지도(곤여만국전도)를 입수한 과정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록은 없으나 사신으로 가 있는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공은 가을에 표문(表文: 인목왕후 주청표문)을 받들고 연경(燕京: 당시 명나라 서울 , 지금의 북경)에 갔는데 청엄(淸嚴: 깨끗하고 기율이 엄함)하고 방직(方直: 바르고 곧음)하여 그 처신이 아래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보좌관 한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겨울용 겉옷을 샀다가 곧 후회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내가 사사로운 일로 우리 공에게 누를 끼칠 수 있겠는가?”하고 자탄하니 장사 속으로 자기들 이익만 추구하던 역관들도 이를 보고 서로 경계하면서 한 사람도 범한 일이 없었다」
고 하였다.

  공이 명나라에 가 있는 동안에 임금이 1자급(資級)을 올려주었고(資憲大夫→正憲大夫), 귀국한 후 또 1자급을 올려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승자하였다.
  선조37년(1604) 임란 수행의 공적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되고, 연원군(延原君)에 피봉되었다가 가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에 가자되면서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으로 가봉되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제위에 올라 난정이 시작되면서 공에게 호조판서가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받지 않고 두문(杜門: 문밖에 나가지 않음), 사객(謝客: 손님을 받지 않음), 염정(염靜: 조용히 지냄), 자수(自守: 스스로 자기를 지킴)하니 공에게는 위험이 미치지 않았다.

  인조1년(1623) 인조반정이 일어난 그날 밤에 인조는 공을 이조판서에 제수하였고, 이어서 공조,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 정2품이상, 70세 이상의 원로 자문회) 에 들어갔다가. 인조2년(1624) 이괄의 난 때는 73세의 노령에도 왕을 호종하면서 한번도 늙었다거나 병들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공은 세 번이나 정승의 물망에 올랐으나 정승이 되지 못하였으니 남들이 ‘관운(官運)이 없다’하였으나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청선고(淸選考)에도 ‘복상미배(卜相未拜: 정승에 추천되었으나 임명되지 못했다)에 우리 延李로서는 이광정(李光庭), 이귀(李貴), 이관징(李觀徵)이 올라 있다. 공은 인조4년에 개성유수를 마지막으로 인조5년(1627)에 정묘호란으로 강화에 들어갔다가 병을 얻어 76세를 수하고 졸하였다.

  ▶ 관직 요약
          - 선조6년(1573) 20세 때 진사시(進士試) 급제, 성균관에 유학
          - 선조23년(1590) 37세 때 문과 증광시(增廣試) 등과
              * 문과 등과가 늦은 것은 그간 연이어 재최(齋衰: 내간상)과 참최(斬衰: 외간상) 상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 선조24년(1591) 승문원 정자(正字:정9품), 사관직(?)에 천거
          - 선조25년(1592) (광해군)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정7품)가 되어 세자를 호위하고 서천,
            도중 홍문관 정자(正字: 정7품) 겸 지제교(知製校) 배수, 예조 및 병조 좌랑(佐郞: 정6품)
          - 선조26년(1593) 명군 접반사 이덕형의 종사관
          - 선조 년(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 병조 정랑(正郞: 정5품)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 하),
            이조, 예조, 병조참의(參議)
          - 선조29년(1596) 승정원 좌승지(左承旨: 정3품 상)로써 이몽학의 홍산(鴻山: 부여에 있음) 난 반역옥사를 다루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상)
          - 선조30년(1597) 정유재란으로 호남지방에 왜군에게 유린 당할 때 공은 군량조달을 담당하던 중
            명부사 심유경의 빈접을 맡아 영외(嶺外)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호조 참판(參判: 종2품),
            다시 영외(호남)로 나가 군량조달. 명군 양원이 남원을 버리고 후퇴하자
            공은 왜군의 포위망을 뚫고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군량조달 담당은 그대로 맡앗다.
          - 선조31년(1598)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명제독 마귀(麻貴)를 수행하여 울산으로 갔다.

              * 울산전투는 월사공의 무술변무주(戊戌辯誣奏)의 계기가 되었음
          - 선조32년(1599) 호조,공조 판서(判書:정2품), 한성 팡윤(判尹: 정2품), 다시 호남의 군향(軍餉: 군량조달)을 담당
          - 선조35년(1602) 호조, 예조, 이조 판서(判書:정2품), 가을에 인목왕후 주청사 정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연경에 있는 동안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귀국 후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대사헌(大司憲: 종2품)

              * 이때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지도를 가져옴.
          - 귀국 후 판돈영부사(判敦寧府事: 종1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종1품), 예조, 이조 판서(判書:정2품),
          - 선조37년(1604) 호성공신(扈聖功臣: 임난극복공로훈, 문신) 2등 책록, 봉(封) 연원군(延原君),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가봉(加封), 록(錄) 청백리(靑白吏)
          - 광해13년(1621) 호조 판서(判書: 정2품)에 제수, 병을 핑계로 관직을 받지 않고 봉조청(奉朝請)만 받음.
          - 인조원년(1623) 공조, 형조 판서(判書: 정2품), 곧 사면
          - 인조4년(1626) 개성 유수(留守: 종2품)
          - 기로소(耆老所: 정2품이상, 70세 이상의 원로 자문회)에 들어감


  공이 별세한 후 사람들은
  “세상에 어떻게 공과 같이 청명하고 온손(溫遜: 온순하고 겸손함)하여 (벼슬에) 어렵게 나가고 쉽게 물러난 사람이 있겠는가. 명리(名利)가 일세를 풍미하여 절조마저 빼앗기는 세상에 공은 아도(雅道: 바른 길, 떳떳한 길)를 깨끗이 닦아 이험(夷險: 평탄하고 험함)에 변함이 없었고, 작위는 높았으나 항상 머리 숙여 지냈으며, 세도(勢道: 權勢)를 보기를 겁부(怯夫: 겁이 많은 보통 사람)가 함정을 피하듯 하였다”고 하였다.

  또 후생(後生)들이 말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공처럼 인심(仁心: 어진 마음)이 바탕이 되어 근검하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광영은 피하고 아랫사람을 구제하여 말 한마디 하면서도 혹 사람을 다칠까 걱정하였고, 안으로는 강방(剛方: 굳셈)하면서도 남과 겨루지 않아 30년을 관직에 있으면서도 본심은 한결같았다.”하였다.

  향당(鄕黨: 동네 어른들)과 족족들은 말하기를
  “공은 내행(內行)이 독실하였으나 더욱 일가간에 자상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섬김에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고, 귀하게 된 후에는 미처 봉양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서러워 하였다. 아우 창정(昌庭)을 무애(撫愛)하기를 늙어서도 얼리 때처럼 하여 그가 죽었을 때는 매우 슬퍼하여 다섯 달 동안 상선(常膳)을 물리치니 종당(宗黨)에서 그 인자함을 우러러 보고 마을에서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하였다.

  또 여대(輿臺: 하인)나 마졸(馬卒: 마차꾼)들이 말하기를
  “우리 같은 천인들이 어떻게 공을 알겠는가 마는 권문 요로에서는 한번도 공의 수레를 보지 못하였고, 포저(苞 艸밑且: 선물 꾸러미)나 청탁이 공의 문전에 이르럼을 보지 못하였으니 우리들의 촉망은 공에게 있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