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사공(月沙公)의 무술변무주(戊戌辯誣奏)
沙月 李盛永(2006. 12. 13)
  ‘무술변무주(戊戌辯誣奏)’는 조선 선조31년, 서기 1598년 무술년에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원군으로 나온 명 나라 경략(經略: 군대를 감독하는 기관, 지금 한국군의 경우 보안부대)에 근무하는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鄭應泰)라는 자가 명군 장수들과 조선 조정을 싸잡아 명 황제에게 20여 가지 사항을 무고(誣告)하였는데, 조선 관련사항을 변론하기 위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이 상소문은 공모한 여러 글 가운데 우리 연리의 월사공(月沙公 諱 廷龜)께서 지은 글이 채택되었고, 또 월사공이 직접 사신의 일원이 되어 명 황제에게 가서 설명하고 바쳤을 뿐만 이니라 39개 명나라 조정 아문(衙門: 기관)에 각각 그 직무에 합당한 별도의 보조 설명문을 현지에서 단시간에 작성하여 돌렸다.

  이 무술변무주는 6년 여를 끌어 온 임진왜란 말기에 자칫 오해로 인하여 조-명연합이 깨어지고 조선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전쟁을 역전시켜 왜군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을 방지한 중요한 외교문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중국에서 월사공의 문장을 더욱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된 명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다음 해인 무술년(戊戌年) 1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간의 1차 울산성전투가 끝난 후 얼마 안돼서 명군 장수 양호(楊鎬)가 왜군에게 재편성의 시간을 주지 않고 압박하기 위하여 재차 공격을 계획하고 있을 때 명군의 전투를 감독하고 평가하는 소임을 가진 경략(經略) 형개(形 王介)의 수하에 근무하는 병부주사 정응태가 일부 불평 분자들의 말만 듣고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비롯하여 제독 마귀, 총병 이여해 등 당시 조선에 출병 해 있는 명군 지휘부의 핵심 요원들을 20조목이나 되는 죄목을 들면서 탄핵(彈劾) 상소문을 명 황제에게 올린데서 시작된다.

  양호군의 중군(中軍)을 맡은 팽우덕(彭友德)이 접반사 이덕형을 불러
  ‘응태의 탄핵 상소문에 있는 20조목의 죄목 중에서 5가지는 조선과 관계된 것이고, 또 이로 인하여 양호가 명 황제에게 소를 올리고 명 나라로 돌아 가기를 청하고 있으니 이는 곧 조선의 큰 불행이요 막바지에 온 전쟁을 조선에 유리하게 마무리 하는데 큰 차질을 초래할 것이니 조선이 적극 나서 이를 막도록 노력할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 갔다.

  정응태가 올린 탄핵상소에 들어 있는 20가지 죄목 중에 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5가지는
  ① 유왜입범(誘倭入犯) 왜국과 내통하여 ( 명나라를) 침범하려 했다.
  ② 우롱천조(愚弄天朝) 천조(天朝: 명나라 황제)를 우롱했다.
  ③ 교통왜적(交通倭賊) 조선이 은밀히 왜국과 교통하며 반명의지(反明意志)가 있다.
  ④ 칭조칭종(稱祖稱宗) 조선의 선왕들에게 중국의 천자와 같이 ○조(祖), ○종(宗)이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고 있으니 이 또한 반명의지다.
  ⑤ 붕기천자(朋欺天子) 양호와 조선이 결탁하여 ( 울산전투 결과에 대하여) 천자를 기만하였다. 등이다

  7월에 조선 조정은 진주사 최천건과 서장관 경성을 중국에 보내서 양호 등을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명 황제가 양호를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만세덕을 임명한 후인지라 별 성과 없이 귀국하였고, 8월에 다시 좌의정 이원익을 진주사로 보냈는데 도중에 정응태 일행과 조우하여 정응태가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고 먼저 황제에게
  초왜복지(招倭復地) 즉‘조선이 왜를 데려다가 중국 요하 이동의 옛 고구려 땅을 되찾으려 했다’면서 전의 유왜입범(誘倭入犯)보다 더 강하게 무고하여 조-명 간에는 더욱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이첨 등 대간들이
  ‘이 중대한 시국에 영의정 유성룡이 노모를 핑계 삼아 사신으로 가기를 피했다’고 하면서 탄핵하여 결국 유성룡은 물러나고, 영의정에 이원익, 좌의정에 이덕형, 우의정에 이항복으로 하는 개각이 단행되는 한편 선조는 약 1개월 동안 정사를 파하고, 궁궐 마당에 거적을 펴고 꿇어 앉아 석고대죄하면서 명 황제의 분부를 기다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10월 21일 다시 정사 이항복, 부사 이정구, 서장관 황여일로 하는 진주사(陳奏使)를 편성하여 명 황제에게 정응태의 무주(誣奏: 무고한 상소문) 중 조선과 관련된 위 5개항을 변론하기로 하였다.

  이 때 정사 이항복은 선조에게 홍문관 응교 신흠(申欽: 후에 조선 4대 문장 중의 한 사람)이 글을 잘 한다고 서장관으로 삼을 것을 주청했으나 선조는
  “내 일찍이 신흠이 쓴 자첩(咨帖: 변무주 공모 때 응모한 글)을 보았는데 내용과 문장이 별로 좋지 않으며 사명문자(詞明文字: 명 나라에서 사용하는 말과 글자)에 능한 자는 이정구 이다. 그의 글은 폐부를 찌르는 성의가 나타나 있고, 그는 또한 전적(典籍: 고서)에도 통달한 능문지사(能文之士: 모든 글에 능한 선비)요 또 그의 글 속에는 이번 일을 능히 처리할 수 있는 계책이 들어 있으니 품계를 올려서 부사(副使)로 삼고 같이 가도록 하라”고 하명하였다.

  이정구는 당시 정3품의 참지(參知)에서 1계급 특진한 공조 참판(參判: 종2품)으로 승진하여 부사(副使)가 되고, 공모 때 써 냈던 글이 명 황제에게 바치는 주문(奏文)으로 채택되었는데 이 글이 후에 조선보다 중국에서 더 높이 평가된 무술변무주(戊戌辯誣奏)이다.

  정응태가 무고한 조선관련 5개 항목 중에서 ①, ②, ④, ⑤항은 특별한 물적증거 제시가 없고, 견해에 따라서는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는 항목인데 비하여 ③항의 교통왜적(交通倭賊) 즉 왜적과 은밀히 통교하면서 반명(反明)을 획책했다는 항목은 조선 조정의 공문서 모음집인「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실려 있는 조-일간 외교문서 중에 연호(年號)를 왜국연호(倭國年號)대서(大書: 크게 쓴 것)하고 명나라 연호분서(分書: 주해로 작게 쓴 것)로 쓴 것을 ‘반명의지(反明意志)’의 증거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변론이 가장 어려운 대목이었다.

  월사 이정구의 무술변무주는
  칭조칭종(稱祖稱宗) 문제에 대해서는 ‘신라, 고려 때부터 해왔던 관습을 그대로 답습했을 뿐 다른 뜻( 반명의지)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역설했고,

  유왜입범(誘倭入犯)또는 초왜복지(招倭復地) 문제는 그간의 해안지방에 왜적이 침범하거나 고기를 잡게 해달라고 청원 해 와서 그들을 달래는 뜻에서 삼포(三浦: 東來의 富山浦, 雄川의 乃而浦, 蔚山의 鹽浦)를 열어 왜인들이 일시 동안 머물면서 고기를 잡게 한 적이 있으나, 89년 전인 중종5년(1510)의 삼포왜란(三浦倭亂: 삼포의 일본 거류민들이 일으킨 폭동사건) 이후 일체 폐쇄하여 왜인들의 조선 땅 진입을 금지하였다는 등 왜인들이 조선 땅에 들어 왔던 경과를 설명하고
  “고금 천하에 어느 바보가 적군( 왜국, 임진왜란 중이므로 적국)을 자기 땅으로 끌어드려 스스로 자기나라를 적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하면서 군부(君父)의 나라( 명나라)와 땅을 다투려 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해명하고 있다.

  가장 핵심인 교통왜적(交通倭賊)과 관련한 연호(年號)문제에 있어서는
  '왜국이 바다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의 의도와 동태를 파악할 길이 없던 차 정통(正統: 명나라 英宗의 연호, 조선 세종18년, 1436-세종31년, 1449) 연간에 왜국이 사절을 요청하여 신숙주를 보내어 통론(通論: 일상적인 대화)하고, 피방정형(彼方情形: 그 곳의 정세와 형편)과 성쇄강약(盛衰强弱)을 험찰(驗察: 직접 살펴 봄)하고, 적정(賊情)을 탐지하여 명나라에 보고했던 사실을 들고, 해동제국기는 신숙주가 돌아오면서 왜국의 풍속세계지도(風俗世系地圖)를 기록한 것을 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왜인에 대한 관대사례(館待事禮)를 기록하여 첨부하면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라 이름 하였다'면서 문서 작성의 경위와 성격을 설명하고,

  이 문서에 왜국 연호를 대서(大書)하고, 명나라 연호를 분서(分書)한 것에 대해서는
  「春秋因魯史所作故大書 ( 춘추인노사소작고대서) 魯元年其下分註周平王幾年 ( 노원년기하분주주평왕기년) 亦可因此而有疑於尊周之義乎( 역가인차이유의어존주지의호) 況其國王關白皆書死尊奉者果若是乎( 황기국왕관백개서사존봉자과약시호)」
  “공자(孔子)가 쓴 춘추(春秋)는 노나라 사기(史記)인 고로 노나라 원년을 대서(大書)하고, 그 아래 주(周) 평왕(平王) 몇 년 이라 분주(分註
: 분서하여 주를 단 것)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존주(尊周: 황제국 주나라를 존경함)의 의리에 의혹이 있다 하겠습니까? 하물며 의혹 받는 그 문서에 즉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그 나라(왜국) 국왕과 관백의 이름까지 모두 사자(死字: 작게 쓴 글자)로 썼으니 이것이 과연 그들( 왜국)을 존봉(尊奉: 높이 받들음)한 것이라 하겠습니까?”라고 되묻고 있다.

  이 문제에서 월사는 우선 공자를 끌어들여 그가 한 대로 한 것이 명 황제를 우롱한 것이냐고 되묻고 있다. 이는 명 황제와 모든 관리가 공자의 가르침을 기본 행동강령으로 삼고 있는 점에 착안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선수를 친 것이다.
  정말 기발한 착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선조가 월사를 “전적(典籍: 고서)에도 통달한 능문지사’라 한 것을 뒷바침 하는 대목이다.

  이에 더하여 해동제국기에 왜왕과 관백의 이름을 사자로 쓴 문서를 놓고 왜를 높인 것이냐고 되 묻는다. 세심한 관찰력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 임금이 월사의 글을 평하여
  ‘이정구의 글 속에 폐부를 찌르는 성의가 있고, 이번 일을 능히 처리할 수 있는 계책이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을 두고 한 말이다.

  사신이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도착한 후 부사 이정구는 하룻밤 사이에 황제에게 올릴 이미 준비해 온 변무주 외에 39개 아문(衙門: 기관)에 보내는 39통의 문서를 초하여 각 아문에 보냈는데 이튿날 황제가 주재한 가운데 그 39개 아문의 합동회의에서 이구동성으로 이정구의 글을 칭찬하였다 한다.

  명 황제(神宗)도
  “조선은 참으로 예의 바른 나라이다. 국왕의 진주(進奏)함이 이처럼 명백통쾌(明白痛快)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 고 하면서 이어서 유지에 이르기를
  “어찌 일개 소신(小臣: 정응태를 말함)이 사념(私念)으로 망간(妄奸: 망녕되게 어지럽힘)되게 하고, 장사(將士: 군사)들의 장기간 전진(戰塵)의 고초를 생각하지 않고 속국(屬國: 조선을 말함)의 군신(君臣)으로 하여금 고정(苦情: 괴로운 심정)을 읍소(泣訴: 눈물 흘리며 말함)케 하였는고. 정응태의 거동이 요망스러워 대사(大事)를 그릇되게 할 뻔 하였도다. 정응태를 혁직(革職: 직무를 갈아 바꿈)하여 서민으로 만들고, 회적(回籍: 직첩을 반납)하여 그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무술변무주가 이룩한 통쾌한 성과이다.

  이 시대에 와서 혹자는 무술변무주를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이라 비판하는 부류도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낭만주의 문사가 아름다운 경치를 놓고 아무 부담 없이 이를 낭만적으로 묘사하여 쓴 글이 아니라 나라의 존망이 걸린 심대한 국익(國益)이 걸린 외교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외교문서(外交文書)이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왜적에게 짓밟힌 지 어언 6년, 조선 땅에 무엇이 온전히 남아 있었겠는가? 그래도 명나라의 원군으로 풍전등화 같은 국운을 겨우 살려 이제 역전으로 왜를 이 땅에서 몰아 내려는 마지막 단계에 와서 어처구니 없는 무고로 최악의 경우 명나라 군대가 돌아간다면 상황은 어떻게 또 역전될지 불을 보듯 뻔한 절박한 사태에서 무고를 변론하는 외교문서에 자주를 주장하는 글이 과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또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었겠는가?
  ‘꿩 잡는 게 매’라 하였다. 외교문서는 국내외 상황과 외교적 목표달성 즉 국익(國益)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6.25전쟁이 휴전 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 남북 또는 국제간 힘의 논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를 방위할 수 있는 군사적 힘과 경제적 힘을 갖추지도 못한 주제에 이국 만리에 와서 우리의 안전보장에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미군 부대가 훈련 중 사고로 두 여학생이 죽은 불행을 일부 좌익분자들이 앞장 서 불을 지르며‘자주’, ‘한미관계 재 조정’, ‘쏘파 개정’, ‘촛불시위’, 급기야 ‘미군 철수’를 외치는 반미 분위기가 지금 우리의 안보에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당시 절박한 나라의 위기를 구한 이 한 편의 글 무술변무주를 놓고 ‘사대주의적’운운하는 헛소리는 못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