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有備無患 安保意識 교육장>
남한산성(南漢山城) 성곽을 따라 걷다-1
沙月 李盛永(2013. 3. 20)
송파 남성대(南城臺)에서 바라보는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병자호란 남한산성 농성(籠城)전투 때 서성장(西城將) 이시백(李時白)의 주지휘소 서장대(西將臺)가
수어장대(守禦將臺)로 이름을 갈아 달고 있다.
남한산성 표석과 설명판
남한산성 내 주요시설 위치도
①남한산성행궁 ②수어장대 ③숭렬전 ④청량당 ⑤현절사 ⑥침제정 ⑦연무관 ⑧장수당
⑨장경사 ⑩망월사 ⑪개원사 ⑫제1남용성 ⑬제2남용성 ⑭남문(至和門) ⑮서문(右翼門)
(16)연주봉용성 (17)북문(全勝門) (18)동문(左翼門) (19)장경사신지용성
(20)동장대터(東將臺址) (21)봉암성 (22)벌봉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남한산성은 최초 신라통일 직후 문무왕 때 처음으로 높이 24척, 둘레 86,800척의 석축을 쌓아 주장성(晝長城)이라 부르다가 일장산성(日長山城)으로 고쳐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석축의 산성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조선 인조4년(1626)에 쌓은 것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때부터 있던 산성이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견고한 석축(石築)의 산성으로 태어나서 병자호란을 당하여 정치적으로는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기는 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엄청난 군사력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이 성의 농성전투(籠城戰鬪)에 임하여 47일 동안 악전고투하면서도 함락당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 그나마 일말의 자존심이나마 지킬 수 있게 한 것은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와 장자 연양부원군 이시백(李時白), 차자 연성군 이시방(李時昉) 삼부자(三父子)의 직, 간접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① 조선조 16대 인조 4년(1626)에 이원익(李元翼)과 이귀(李貴)의 남한산성 수축을 주청 받아 이서(李曙)에게 명하여 남한산성을 개축하여 현재의 모양을 갖추었으며 여기에 수어청(守御廳)을 두고 수어사(守御使)를 상주시켰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영조 46년, 1770년 편찬) 성곽고(城郭考)에 따르면 인조4년에 남한산에 성을 쌓았는데 일명 일장산으로 본래 백제의 옛 도읍이며, 서울에서 40리 거리에 천연적으로 성터가 이루어진 곳이다. '이괄의 난' 후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축성 건의에 따라 축성하게 되었으며, 총융사 이서가 명을 받아 그 일(축성)을 맡아서 완성하였고, 광주읍 관청을 이 곳으로 옮겨 다스리게 하였다.
  「仁祖四年築城南漢山 一名日長山本百濟古都 距京四十里天作保障 适變之後領議政李元翼延平府院君李貴建請築城 遂命摠戎使李曙掌其至是乃城 移廣州邑治于」

  그러나 이 기록에 앞서 이미 묵재(默齋) 이귀(李貴)는 인조1년(1623) 임금에게 올린 차자(箚子: 간략한 상소문)「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다음 8개 항목 중 두번째로 남한산성 수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이 쓴 묵제일기(墨齊日記) 비어변론(備禦辯論) 편에 기록되어 있다.
      (1) 경기의 군사를 정(精)하게 훈련시켜 근본(根本: 수도)을 견고히 할 것(精鍊畿兵以固根本)
      (2) 남한산성을 수축하여 미리 보장(保障: 보루, 성채)을 정해둘 것(修築南漢 豫定保障)
      (3) 여러 보(堡: 작은 거점)의 군사를 합쳐 큰 진(鎭)을 이루어 고수할 것(合軍諸堡固守大鎭)
      (4) 서병(西兵: 평안도와 황해도 군사)을 뽑아 훈련시키고, 남군을 들여보내지 말 것(初鍊西兵不入南軍)
      (5) 변지에 둔전(屯田: 군 경작지)을 설치하여 변진의 군량을 대주게 할 것(屯田邊地以資軍糧)
      (6) 다시 진관을 설치하여 전수(戰守: 공격과 방어)에 편리하게 할 것(復設鎭管以便戰守)
      (7) 압록강변의 공지는 부역을 면제하여 경작자를 모집할 것(江邊空地給複募耕)
      (8) 양서(兩西: 平安道, 黃海道)의 인재를 수습하여 능력에 따라 등용할 것(兩西人才收拾器用)

  연평부원군 이귀가 이원익과 함께 남한산성을 수축할 것을 건의한 것은 순간적인 발상이 아니라 당시 서북변 청나라의 위협이 고조되는 시점에 즈음하여 이에 대응할 전략(戰略)의 일환으로 최후의 보루로서 남한산성을 견고히 하여 확보해 두자는 고도의 전략적 차원의 주장이었다.

  ②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諱 貴)의 차자(次子)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昉) 역시 남한산성과 인연이 깊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크게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강화 할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 순검사(巡檢使) 이시방이 소임을 잘 수행하여 강화도 수비에 만전을 기한 덕분으로 생각하고 이듬해(1628) 임금은 이시방을 남한산성 수어사(守御使)를 겸한 광주목사(廣州牧使:정3품)로 보냈다.
  정묘난을 당하고 보니 유사시에 대비한 사전 준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그래서 축성한지 2년이 지난 남한산성을 잘 정비하고, 보강하여 유사시에 철저히 대비하라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시방은 인조 10년(1632)까지 4년간 남한산성 정비와 보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조 14년(1636) 한성부 좌윤(左尹: 종2품)으로 있다가 외간상(外艱喪: 부친상)을 치르고 광주목사겸 수어사 때 남한산성의 정비, 보강의 공적으로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종2품)로 승진하여 복직되었다.

  ③ 세월은 흘러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있었고, 인조11년(1633) 연평부원군은 졸하였다. 이 때 장자 이시백(李時白)은 강화유수로 있었는데 친상을 마치고 인조 14년(1636)에 병조참판으로 호위대장(護衛隊長), 특진관(特進官: 경연에 參進하는 직무 수행)과 함께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고 있었다.
  남한산성 농성전투는 인조14년(1636) 12월(음력) 15일 추운 겨울에 청군의 선봉 마푸다(馬福塔)군의 기병 4천 여기가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로 도강하여 100 여기로 남한산성의 서문에 대한 최초 공격을 시작으로 이듬해 1월 28일 항례(降禮: 항복식)를 치를 때까지 47일간 40여 회의 대소 전투가 벌어져 한때는 성 내에 청군이 진입하는 위험한 고비도 있었으나 수비군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고 성을 지켜냈다.
  지금 남한산성 가장 높은 곳에 남아 있는 「守御將臺」(수어장대) 라는 현판으로 고쳐 단 건물은 병자호란 남한산성 농성전투 당시 서장대(西將臺)로 서문수비대장 이시백(李時白)의 지휘소였다.
  바로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이 서장대에서 서문수비군을 지휘하여 13만 대군의 청군 주공격과 맞서 농성(籠城)전투에서 분전하며 47일간을 지켜낸 것이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諱貴) 삼부자(三父子) 진영(眞影)
좌로부터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諱貴), 차자 연성군(延城君諱時昉), 장자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諱時白)
  그러고 보면 남한산성은 우리 延李 후손들에게는 매우 뜻 깊은 곳이다.
  조선조 가장 어려웠던 고비의 하나인 병자호란을 당하여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諱貴)이 그 10년 전에 미리 ‘남한산성을 수축하여 미리 보장(保障: 보루채)을 정해둘 것(修築南漢 豫定保障)’을 주창하여 임금이 받아들여 지금의 산성을 쌓게 되었고, 남한산성을 쌓은 지 2년 후에 차자(次子) 연성군(延城君諱時昉)이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한 광주유수(廣州留守)로 부임하여 4년 동안 산성 보수(補修)와 보완(補完)에 심혈을 기울였고, 성을 쌓은 지 10년 후 병자호란을 직전에 장자(長子)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諱時白)이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여 그나마 미리미리 준비하였기 때문에 강화로 가려던 어가(御駕)가 불시에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서 13만 대군의 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남한산성 농성(籠城)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서쪽의 서성장(西城將)을 맡아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어장대(守禦將臺)를 서장대(西將臺) 지휘소로 하여 47일간이나 성을 지켜 비록 정치적인 이유로 임금이 출성하여 치욕적인 항복식을 치렀지만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는 ‘성은 끝까지 지켜냈다’는 일말의 자부심은 심어 주었다.

  이제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랐으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날도 멀지 않았다. 우리들 스스로는 남한산성을 <우리 민족의 有備無患 安保意識 교육장>으로 생각하고, 더욱 관심을 갖고 찾는 사람이 늘어나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남한산성 연평부원군 삼부자 이야기(詳細)바로가기(클릭): 남한산성과 연평군 삼부자
* 소설 「남한산성」속의 이시백 바로가기(클릭): 「남한산성」속의 이시백
남한산성(南漢山城) 성곽을 따라 걷기
  북한 산성은 대남문(大南門)부터 동장대(東將臺)까지 성(城)을 따라 힘겹게 걸어 본 적이 있는데, 남한산성을 몇 번을 갔지만 성벽을 따라 변변히 걸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2013. 3. 16. 우리 부부는 남한산성에 올라 작심하고 성곽을 따라 걸었다.
  작은 것 하나도 놓지지 않고 카메라에 담으면서 ⑭남문(至和門)-④②수어장대(守禦將臺)-⑮서문(右翼門)-(17)북문(全勝門)-북장대터(北將臺址)-(20)동장대터(東將臺址)까지 걷고 내려오면서 ⑤현절사(顯節祠)를 들리고, 도로에 내혀와 ⑦연무대(演武臺)를 먼발치에서 보고, 꼭 마음먹었던 ①행궁(行宮)을 관람했는데 대략 4시간 정도 걸렸다.
  찍은 사진이 너무 많기 때문에 행궁 구경 사진은 다른 파일로 만들어 올릴 생각이다.
남한산성 성곽따라 걷기 코스
⑭남문(南門: 至和門)
남문 문루에서 내다보는 밖과 안
목표 수어장대, 성곽 따라 출발
남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성남시가지
뒤돌아 본 남쪽 성곽
성곽 뒤로 높은 산이 검단산(534.7m)
성곽을 넘어다 보는 소나무
보병이 접근 용이한 능선적근로
성남쪽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도로가 있는 능선이다.
아파트 건립이 한창인 송파 개발지구
한국 군인 체력단련장(골프장) 남성대(南城臺)는 없어지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있으나, 미군 골푸장은 남아 두개 홀 코스가 보인다
저기 정자가 하나 보이는데---
와 보니 특별한 이름이 없다. 아마 서장대의 보조 지휘소로 이용했던 것 같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수어장대와 성내 중심부
성 밖에 고추를 재배했던 가보다.
성 안에서도 성 밖에서도 인가가 먼데 누가 여기까지 와서 밭을 일구었을꺼?
서장대 정면으로 가장 접근하기 용이한 능성접근로
아마 청군의 주력이 이 능선을 타고 올라왔을 것이다.
잘 생긴 소나무 한그루
수어장대 가까운 성벽에 이정표
②수어장대(守禦將臺)와 ④청량당(淸凉堂)과 설명문
수어장대 인증샷
무망루(無忘樓) 모조품과 설명문
무망루에 1박한 기념사진과 광나루 야영
1958년 8월 말경 혹서기에 육사 제18기에 입교하여 2개월 간의 기초군사훈련 휘날레 훈련으로서
남한산성에서 육사까지 장거리 행군훈련 때 전날 오후에 우중에 트럭으로 와서
이곳 남한산성 수어장대 2층(無忘樓)에서 1박을 했다.
다음날도 우중에 기념사진을 찍고 행군을 시작하여 광나루(광진교 부근)에서 1박을 야영하고
제3일에 육사에 도착하므로서 지긋지긋했던 기초군사훈련은 종료되었다.
비가 와서 더위가 좀 나았지만 두꺼은 고무 우의 속은 찜질통이었다.

우리 2중대 2구대 1분대: 분대장 3학년 박준(맨 우측, 1차 송응섭),
분대원: 우로부터 김선국(?), 최학용, 김종헌, 우종렬, 이성영, 여판술생도
무망루 옆 '리대통령각하 행차 기념식수' 젓나무 한그루
표석과 하와이 적소(謫所)에 세워져 있는 동상
이쁘게 잘 생긴 반송 한그루
아래로 더 처지지 말라고 받침 기둥을 세웠다.
후면 하층 10개 기둥 구조
수어장대의 바깥 뒷모습
뒷쪽 의자에서 점심
수어장대 북쪽으로 성곽 모습
아직 폐쇄되지 않은 남성대(南城臺) 라이언코스가 뚜렷이 보인다. 만감 교차
내려다 보이는 송파 신 개발지구
잘 자란 소나무 숲속에 일부러 세운듯한 바위 2개
서문까지 성벽
중국 황산 명품소나무 72지송(七十二枝松)을 닮은 잣나무 한그루
⑮서문(西門: 右翼門)
서문 문루에서 바라보는 서쪽 능선과 송파지역(위)
연주봉 용성이 있는 서북 주능선(아래)
연주봉 정상을 계속 확보하기 위하여 용성을 쌓았다.
매탄터(埋炭址)
설명문이 훼손되어 뜻을 알수가 없다. 이름 글자 그대로 추정해보면
방어용 물을 끓이고 생긴 숯과 재를 묻은 곳인가?
뒤돌아 보이는 수어장대
갈길 목표 동장데터
본성에서 내대보고, 멀리서 바라보는 (16)연주봉 용성 모습
<북장대터까지 성곽 모습
북장대터(北將臺址)
북장대에서 바라보이는 연주봉용성
북장대에서 바라보이는 갈길 목표 동장대터
북장데터에서 묵문까지 성곽 모습
(17)북문(北門: 全勝門)
북문 문루에서 내다보는 성밖(현 하남시 교산동, 항동)
북문 문루에서 뒤돌아 보는 수어장대
북문에서 군포터(軍鋪址)까지 성곽 모습
군포터(軍鋪址)
설명문이 훼손돼서 알 수가 없다.
군포(軍鋪)는 순라꾼(초병 및 순찰병)들이 머무는 집이다.
군포터에서 바라보는 연주봉 용성 모습
군포터에서 내다보는 성밖 모습(현 하남시 교산동, 항동)
군포터에서 북암문(北暗門: 第4暗門) 까지 성곽 모습
북암문(北暗門: 第4暗門) 안과 바깥문 모습
군포터(軍鋪址)
북암문(제4암문)과 다음에 나오는 제3암문을 지키는 병졸들의 대기 장소인 듯
군포터에서 제3암문까지 성곽 모습
제3암문(봉암성 출입문)
(21)봉암성 과 벌봉용성
(20)동장대터(東將臺址)
남한산성 여장(女墻: 낮은 성벽)
동문(東門: 左翼門)까지 내려가는 성곽 모습
목표지에 왔으니 좀 쉬고 내려가자
공원관리사무소 쪽으로 지름길로 내려왔다.
남한산성 만큼이나 역사가 깊은 듯 이끼 낀 바위와 소나무 밑둥
⑤현절사(顯節祠)
병자호란의 대표적 충신이요 희생자인 삼학사(三學士: 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기리는 사당
⑦연무관(演武館)
비석숲(1群)
延李 선조 문경공(文景公諱肇源) 거사비(去思碑)
< 비석 전면에 작은 글씨로 쓴 치적(治積) >
① 積逋盡刷(적포진쇄) 누적된 범법자를 완전히 체포하여 민심을 바로잡아 쇄신함.
② 頹 (廣에서黃대신解) 畢修(퇴해필수) 허물어진 관아를 완정 수리함.
③ 城餉乃完(성향내완)성 내에 필요한 군량을 완비함.
④ 단벽개관(丹碧改觀) 관아 건물의 붉고 푸른 단청을 고쳐서 면모를 일신하였음.
⑤政專撫摩(정전무마) 정치는 오로지 백성을 어루만지는 데 두었음.
⑥ 德兼威惠(득겸위혜) 덕과 겸하여 위엄을 갖추고, 은혜를 베품.
⑦ 將士懷思(장사회사) 장수와 군졸이 모두 사모하였음.
⑧ 吏民胥欽(이민서흠) 관리와 백설이 모두 기꺼이 따르고 흠모하였음.
  * <이조원(李肇源)> : 조선 영조34년(1758)-순조32년(1832), 자 경혼(景混), 호 옥호(玉壺), 시호 문경(文景), 정조16년(1792) 장원급제, 충청도 암행어사,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 사간원 사간(司諫: 종3품)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정3품상), 홍문관 제학(提學: 종2품), 한성부 판윤(判尹: 종2품), 이조판서(吏曺判書: 정2품), 순조16년(1816)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옴, 순조20년(1820)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종1품), 진하사(陳賀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육조(六曺) 판서를 역임하고, 봉조하(奉朝賀: 퇴직후에도 녹봉을 받고, 주요 정사에 참여하는 특전)로 퇴직하였음.
2군(群) 비석군
돌탑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