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南漢山城)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삼부자(三父子)
沙月 盛永(2006. 6. 8)
남한산성 표석
◆ 남한산성의 역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해발 483m의 산으로 오랜 옛날에는 ‘하루 해가 긴 산’이란 뜻으로 일장산(日長山)이라 불렀고, 조선조 때는 ‘한수(漢水: 한강) 남쪽에 있다’ 하여 남한산(南漢山)이라 불렀다. 또 현 지형도 상에는 청량산(淸凉山)으로 표기되어있다. 남한산과 관련된 역사를 보면
  - 백제 시조 온조왕 13년(BC 6년) 백제가 이곳을 도읍으로 정했다가 백제 13대 근초고왕 26년(서기 371년)에 한산(漢山: 서울)으로 서울을 옮겼다.
  - 신라 24대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을 뺏은 후로 신라의 영역이 되었는데 산성을 고쳐서 한산주(漢山州) 또는 남한산주(南漢山州)라 불렀으며, 35대 경덕왕 15년에는 한주(漢州)라 하였고, 30대 문무왕 12년(672) 한주의 동봉(東峰) 위에 성진(城鎭: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함)을 구축하여 일장성(日長城) 또는 야장성(夜長城)이라 불렀다.
  - 고려 4대 성종 2년(983) 전국 12목(牧)의 하나를 이 곳에 두었다.
  - 조선 15대 광해군 13년(1621)에 남한산성을 수축하였다.
  - 16대 인조 4년(1626)에 이원익(李元翼)과 이귀(李貴)의 남한산성 수축을 주청 받아 이서(李曙)에게 명하여 남한산성을 개축하여 현재의 모양을 갖추었으며 여기에 수어청(守御廳)을 두고 수어사(守御使)를 상주시켰다.

  조선 철종 1년(1850)에 간행된 남한산성기(南漢山城記)에는 다음과 같은 남한산성 안에 건설된 모든 영조물(營造物)에 관 한 기록들이 편집되어 있다.
  - 서명응(徐命膺: ?-정조11년,1787,대구인,이판,대제학, 판중)의 남한신수기(南漢新修記)
  - 이기진(李箕鎭: 숙종13년,1687-영조31년,1755, 덕수인, 예/이판, 판의금, 판돈녕)의 무망루기(無忘樓記)
  - 김희순(金羲淳)의 침과정기(枕戈亭記)
  - 홍억(洪憶)의 한남루(漢南樓) 상량문(上樑文)과 황승은의 기문(記文)
  - 송시열(宋時烈)의 인화루기(人和樓記)
  - 심상규(沈象奎)와 김이교(金履喬)의 좌승당기(坐勝堂記)
  - 이만수(李晩秀: 延李)의 명(銘)
  - 김조순(金祖淳)과 박종훈(朴宗薰)의 유차산루(有此山樓)기문(記文)과 심상규(沈象奎)의 상량문(上樑文)
  - 남학명(南鶴鳴)의 지수당(地水堂) 기문(記文)
  - 김재찬(金載瓚)의 관어정(觀魚亭) 소지(小識)
  - 이조원(李肇源: 延李)의 우희정(又喜亭) 기문(記文)
  - 이만수(李晩秀: 延李)의 완대정(緩帶亭) 기문(記文)
남한산성 설명판
동 문
남 문
◆ 남한산성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諱) 귀(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남한산성은 최초 신라통일 직후 문무왕 때 처음으로 높이 24척, 둘레 86,800척의 석축을 쌓아 주장성(晝長城)이라 부르다가 일장산성(日長山城)으로 고쳐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석축의 산성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조선 인조4년(1626)에 쌓은 것이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영조 46년, 1770년 편찬) 성곽고(城郭考)에 따르면
  「仁祖四年築城南漢山(인조사년축성남한산) 一名日長山本百濟古都(일명일장산본백제고도) 距京四十里天作保障(거경사십리천작보장) 适變之後領議政李元翼延平府院君李貴建請築城(괄변지후영의정이원익연평부원군이귀건청축성) 遂命摠戎使李曙掌其至是乃城(수명총융사이서장기지시내성) 移廣州邑治于(이고앙주읍치우)
  즉 인조4년에 남한산에 성을 쌓았는데 일명 일장산으로 본래 백제의 옛 도읍이며, 서울에서 40리 거리에 천연적으로 성터가 이루어진 곳이다. '이괄의 난' 후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축성 건의에 따라 축성하게 되었으며, 총융사 이서가 명을 받아 그 일(축성)을 맡아서 완성하였고, 광주읍 관청을 이 곳으로 옮겨 다스리게 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 앞서 이미 연평부원군은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의 일환으로 남한산성 수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임금(인조)에게 건의한 바 있다.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이 쓴 묵제일기(墨齊日記) 비어변론(備禦辯論) 편에 따르면 계해년(癸亥年: 인조1년, 1623) 9월에 묵제공은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 서쪽 변방 즉 평안도 방비에 관한 대책)을 차자(箚子: 간략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1) 경기의 군사를 정(精)하게 훈련시켜 근본(根本: 수도)을 견고히 할 것(精鍊畿兵以固根本: 정련기병이고근본)
  (2) 남한산성을 수축하여 미리 보장(保障: 보루, 성채)을 정해둘 것(修築南漢 豫定保障: 수축남한예정보장)
  (3) 여러 보(작은 거점)의 군사를 합쳐 큰 진(鎭)을 이루어 고수할 것(合軍諸堡固守大鎭: 합군제보고수대진)
  (4) 서병(평안,황해도 군사)을 뽑아 훈련시키고, 남군을 들여보내지 말 것(初鍊西兵不入南軍: 초련서병불입남군)
  (5) 변지에 둔전(군 경작지)을 설치하여 변진의 군량을 대주게 할 것(屯田邊地以資軍糧: 둔전변지이자군량)
  (6) 다시 진관을 설치하여 전수(공격과 방어)에 편리하게 할 것(復設鎭管以便戰守:복설진관이편전수)
  (7) 압록강변의 공지는 부역을 면제하여 경작자를 모집할 것(江邊空地給複募耕: 강변공지급복모경)
  (8) 양서(평안,황해)의 인재를 수습하여 능력에 따라 등용할 것(兩西人才收拾器用: 양서인재수습기용) 등이다.

  결국 연평부원군이 이원익과 함께 남한산성을 수축할 것을 건의한 것은 순간적인 발상이 아니라 당시 청나라의 서북변 위협이 고조되는 시점에 즈음하여 이에 대응할 전략(戰略)의 일환으로 최후의 보루로서 남한산성을 견고히 하여 확보해 두자는 고도의 전략적 차원의 주장이었다.

  인조는 연평부원군이 건의 한 여덟 가지 계책 중에서 다른 계책은 우유부단하여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다행히 남한산성의 수축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반군이 북쪽으로부터 도성으로 접근해 오는데 임금이 갈 곳이 없어 결국 공주까지 몽진했던 쓰라린 경험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연려실기술릐 연평부원군 장자 이시백(李時白)에 관한 기록 중에
  「인조27년(1649)년 공(時白)이 어수당(魚水堂)에서 임금과 마주 앉아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선친(휘 貴)에 관한 이야기 끝에 공(時白)이 말하기를
  “신(臣)이 수원(부사)을 맡았을 때 집에 돌아와 선신(先臣: 임금 앞에서 자기 선친을 부르는 말)을 뵈었더니 선신께서
  “어떻게 (수원을) 다스리느냐?”고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요즈음 듣건데 누가 아버님께 수원에서 밤낮으로 군사를 준비하는데 그 마음을 추측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니 인심이 이 지경이니 비록 나라 일에 정성을 다하고자 하여도 그 사세(事勢: 일이 되어가는 형세)가 또한 어렵습니다. 하였더니 선신(先臣:
임금 앞에서 선친을 지칭할 때 쓰는 호칭)이 이 말을 듣고 일어나 신(臣)을 뜰 아래 꿇어놓고 말하기를
  "임금께서 너의 무능함을 살피지 않으시고 중대한 일을 맡겼으니 소신껏 성의를 다할 뿐이지 어찌 네 몸을 돌보며 남의 허망한 말에 귀를 기울여 염려하여 제 직책 수행을 망치려 하느냐?'하면서 심히 노하여 매를 때리려 하다가 친척들의 만류로 그만 두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인조)이 한참동안 듣고 있다가 세자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들은 너의 팔다리와 같으니 뒷날 이들을 대하기를 내가 한 것과 같이 하라” 고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燃藜室記述, 延陽諡狀)
◆ 남한산성과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휘(諱) 시백(時白)
  세월은 흘러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있었고, 인조11년(1633) 연평부원군은 졸하였다. 이 때 장자 이시백(李時白)은 강화유수로 있었는데 친상을 마치고 인조 14년(1636)에 병조참판으로 호위대장(護衛隊長), 특진관(特進官: 경연에 參進하는 직무 수행)과 함께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고 있었다.

  동년(1636) 이름을 후금(後金)에서 청(淸)으로 고친 청 태종은 한병(漢兵: 투항한 명나라 군사)과 몽고병을 포함하여 12만 8천의 대병으로 압록강을 넘어 임경업장군이 지키는 의주를 우회하여 한양으로 쳐들어왔다.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로 갈 계획이었으나 이를 간파한 청군은 왕실의 비빈들과 사대부의 가족들을 인솔한 선발대가 지나간 뒤 행주나루를 건너 강화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서 왕과 조정 신하들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니 열세한 병력으로 훨씬 우세한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남한산성 농성전투(籠城戰鬪: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남한산성 농성전투는 인조14년(1636) 12월(음력) 15일 추운 겨울에 청군의 선봉 마푸다(馬福塔)군의 기병 4천 여기가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로 도강하여 100 여기로 남한산성의 서문에 대한 최초 공격을 시작으로 이듬해 1월 28일 항례(降禮: 항복식)를 치룰 때까지 45일간 40여 회의 대소 전투가 벌어져 한때는 성 내에 청군이 진입하는 위험한 고비도 있었으나 수비군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고 성을 지켜냈다.

  지금 남한산성 가장 높은 곳에 남아 있는 「守御將臺」(수어장대) 라는 현판으로 고쳐 단 건물은 병자호란 남한산성 농성전투 당시 서장대(西將臺)로 서문수비대장의 지휘소였다.

  바로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휘 시백(時白)께서 이 서장대에서 서문수비군을 지휘하여 청군의 주공격과 맞서 농성(籠城)전투에 분전하여 끝까지 지켜낸 것이다.
남한산성내 청량산 정상에 남아있는 수어장대
  수어장대 설명판에 따르면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있다. 남한산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인조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 누각으로 지어 서장대(西將臺)라 불리던 것을 영조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2층 누각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守御將臺)라 편액하였다. 이곳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여 45일간 항전했던 곳이다.」

  조선국 조정이 본래 무장도 아닌 연양부원군을 가장 중요한 서문방어를 맡긴 것은 무엇보다 연양부원군의 충성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농성전투에서 연양부원군과 그 수하 군사들의 분전하는 장면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丙子胡亂史」 (병자호란사) 에서 옮겨본다.

  ○ 남한산성 농성(籠城)전투 개황과 실황
  병자년(인조14년, 1636)에 난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한 청(淸)나라는 만주 각지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들이 16세기 후반에 각 부족들을 통합하여 그 형세가 신장되어 나가다가 17세기 초에 융성기를 맞아 금(金)나라를 세우고, 인조4년(1626)에 정묘난을 일으켜 조선을 침범하여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한 적이 있다.

  인조14년(1636)에는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고쳤는데 그 세력은 이미 중원을 압도할 만큼 커졌으며, 장차 중원을 차지하기에 앞서 배후의 조선을 꺾어 후환을 없애고 오히려 그들의 지원세력으로 만들고자 난을 일으킨 것이 곧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병자난이 일어난 당시 양국의 군사력은 침공군 청군은 한병과 몽고군을 포함하여 12만 8천명인데 비해 조선군은 전국에 흩어진 군사를 모두 동원한 것이 6만 여명에 불과하니 수적으로도 그 반에 미치지 못하였고, 더구나 각 도의 근왕병들은 청군의 차단으로 실제 남한산성 농성전투에는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한산성 농성전투의 전투력은 수비군이 수적으로도 이미 5:1 이상의 열세에 있었고, 질적인 면에서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침공군은 정예 기병이 주축이고, 기병과 보병이 혼성한 한병 또는 몽고병이 보조를 이루고 있는 반면, 수비군은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농민을 동원한 것이 대부분이고, 정규군에 해당하는 어영청, 총융청, 훈련도감 등 경군(京軍)은 6천 여명에 불과하였다.
피아 병력 비교
  또 남한산성 성 내에는 쌀 1만 4천여석, 잡곡 3천 7백여석, 피곡 5천 8백여석, 장(醬) 110여독 등 1만여 군사가 1개월분의 식량 밖에 없었다.

  청군의 군세를 당시 관향사로 있던 나만갑은 그의 「병자록(丙子錄)」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청병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많이 내린 후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으므로 온 산야가 흰 눈으로 덮여 있는데, 청병이 도착한 뒤로는 땅 위에 흰 곳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수효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였다.

  남한산성 농성전투에서 청군은 초기에 선봉부대와 좌익군을 투입하여 완전 포위하였고, 본군은 몽고병 3만명을 서울과 북부 경기도 일원에 잔류시키고, 청태종이 직접 인솔하는 4만명이 각 진을 보강하면서 예비대로 운용되었다.

  남한산성 농성전투에서 조선군의 지휘편성을 보면
      도체찰사(都體察使): 김류(金 流아래 土)
          협수사(협수사): 유백증(兪伯曾)
          관향사(管餉使): 나만갑(羅萬甲)

      동문수비대장(東門守備隊長): 신경진(申景鎭),
          중군(中軍): 이영달(李潁達)

      서문수비대장(西門守備隊長): 이시백(李時白),
          중군(中軍): 이직(李稷)

      남문수비대장(南門守備隊長): 구굉(具宏),
          부장(副長): 구인후(具仁后),
          중군(中軍): 이곽(李廓)

      북문수비대장(北門守備隊長): 이서(李曙),
          부장(副長): 원두표(元斗杓)로 편성되었으며,

  각 문 수비대에는 3천의 군사와 약간의 노비가 할당되었다.

  인조14년(1636) 12월 15일부터 30일까지의 초기단계에 있어서 피아의 전투배치는 아래 요도와 같이 조선군은 산성내에 4개 수비군으로 배치되고, 청군은 성 밖 주요 부락을 중심으로 포위 배치하였다.
초기 피아병력 배치
  남한산성 농성전투는 인조 14년(1636) 12월 15일 청군의 선봉 마푸다(馬福塔)군 기병이 4천여기가 삼전도(三田渡) 지점으로 도강한 후 100여기로서 남한산성 서문에 접근하면서 화포(火砲)와 궁시(弓矢)를 쏘면서 최초공격을 하여 위력수색(威力搜索)을 한 이후 이듬해 1월 30일 정축화약(丁丑和約)이 성립되어 조선국왕 인조와 세자가 성을 나와 삼전도 나루터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림)의 굴욕적인 항례(降禮; 항복식)을 치룰 때까지 45일 동안에 40여회의 대소 전투가 있었는데, 수비군은 5백여명의 청군을 사살한 반면 4백여명이 전사하였으며 한때 성내에 청병이 진입하는 위험한 고비도 있었지만 성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고 지켜냈다.

  남한산성 농성전투기간 동안 성내와 성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상과 고충을 기록한 대목을 몇가지 옮겨 본다.
  「청군의 완전한 포위망 속에서 남한산선 성내에서는 날이 갈수록 군량과 마초 사정이 악화되어 많은 인원과 군마가 굶어죽거나 서로 꼬리를 뜯어먹기까지 하였으며, 죽은 군마의 고기를 군사들에게 식량 대신 지급하였다.」

  「12월 말부터 재산(宰臣)들의 양곡 지급 대상을 현직 관원과 군사들로만 국한시키고 전직 관원에게는 지급을 중지해야 한다는 논의가 거론될 정도로 양곡의 부족이 심각하였는데 왕(인조)은 “그들(전직 관원)이 나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 왔는데 있으면 같이 나누어 먹고, 없으면 함께 굶을지언정 어떻게 우리끼리만 먹을 수 있겠는가”하면서 그 논의를 중단시켰다.」

  「여러 군사들은 혹심한 추위 속에 노천에서 거처하였기 때문에 얼굴이 얼어터지거나 검푸르게 변색되기도 하였으며, 손과 발이 동상으로 살갗이 찢어지고 썩기도 하였다.」

  「왕(인조) 자신도 침구가 없어 옷을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으며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다. 어느날 수라상에 닭다리 하나가 올랐는데 왕은 “처음 입성하였을 때는 새벽에 닭 우는 소리가 제법 들리더니 이제 그 소리가 듣기가 어려워졌구나. 이는 필시 나에게만 바치는 것이리라. 차후로는 수라상에 닭고기를 올리지 말라.” 하였다」

  「성밖에는 조선군의 농성이 장기화 되자 청군은 군사를 풀어 주변 일대의 부락에 노략질을 자행하면서 부녀자들을 진중으로 끌고가고 그들에게 딸린 어린아이들은 진영 밖에 내다버리므로 청군진영 주변에는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으며, 많은 어린아이들이 얼어죽어 그 시체가 산과 들에 즐비하였다」


  남한산성 농성전투 개황에서 보듯이 비록 군세(軍勢)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세하였고, 군량부족, 혹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조건 하에서도 수비군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인 공세방어로 성내에 진입한 청군을 몰아내면서 끝까지 성을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청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은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병졸에 이르기까지 청군이 당할 수 없는 수성의지(守城意志)가 충만해 있었던 결과인데 이는 왕(인조) 자신이 몸을 돌보지 않고 독려하였으며, 장수들은 솔선수범하고 병사들은 인내와 불굴의 투지로서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 눈물겨운 대목들은 옮겨본다.
  「12월 18일 왕(인조)이 친히 동문의 망월대(望月臺)에 나와 남한산성 사수 의지를 천명하고, 도원수 김자점, 부원수 신경원에게 남한산성을 구원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12월 21일 왕(인조)이 유공 장병을 표창하고 주식(酒食)을 하사하여 노고를 격려하였다. 또 문무백관과 사대부를 독려하여 전투를 돕던 협수사 유백중이 담당 방어부서에 늦게 도착한 다섯명에게 태형을 처하고 퇴각하는 청군을 추격하는데 함께 나아가 싸우도록 하였다. 이 때 태형을 맞고 출성(出城)한 유학(幼學) 윤지원이 선두에 앞장서 달려가 철편으로 청군 기병 2명을 작살하니 모든 군사들이 이를 보고 일개 문사(文士)인 그의 용기를 장하게 여기고 서로 앞을 다투어 청군을 추격하였다.」

  「12월 23일 자정무렵 왕(인조)이 각 성문을 순시하며 군사들을 격려하였는데 이 때 자신의 침구와 백관의 말 안장을 모두 거두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국난을 당하여 군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면서 성을 꼭 지키겠다는 왕의 수성의지와 정성어린 태도는 군사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성내의 모든 장졸들이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12월 24일 온종일 군사들은 안개 속에서 진눈깨비에 젖어 극심한 추위에 시달렸다. 왕(인조)도 세자와 함께 행궁 마당 한복판에서 진눈깨비를 맞으며 다음과 같이 하늘에 호소하였다.
  “나라의 일이 이지경에 이른 것은 저희 부자가 하늘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옵니다.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하늘이시여! 모든 재앙은 저희 부자에게 내리옵시고 불쌍한 백성들을 살려주옵소서”
  왕은 추위로 안색이 창백해지고 어조가 흐트러질 정도였으나 밤이 깊어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군사들과 같이 진눈깨비를 맞았다. 밤이 되자 진눈깨비가 그치고 날씨가 온화해지니 성안의 모든 군사들이 임금의 지극한 정성에 다시 한번 성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더욱 굳게 하였다」

  「정축년(인조15년, 1637) 1월 2일 어영청 제조 완풍부원군 이서(李曙)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농성 초기에 북문수비대장을 맡은바 있으나 그 때 이미 순찰사의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로 병세가 위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빈틈없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측근에서 병세를 근심하자 이서는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내 한 몸을 돌볼 것인가?” 하면서 군무에만 전념하다가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가 죽자 왕(인조)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으며, 온 성 안의 군민이 모두 그의 죽음을 못내 애석해 하였다.」


  인조 15년(1637) 1월 28일 합의 된 정축화약(丁丑和約)의 내용을 보면
      ① 조선은 청에 군신의 예를 지킨다.
      ② 조선국왕은 청국황제의 책봉을 받고, 청국 연호를 사용한다.
      ③ 조선은 명(明)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명으로부터 받은 금인(金印: 옥새)과 고명(顧命: 조선 국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명나라 국서)을 청국 황제에게 바친다.
      ④ 조선은 세자, 왕자 및 대신의 자제를 청에 인질로 보낸다.
      ⑤ 조선은 철병하는 청군과 협력하여 가도(暇: 日대신 木 島: 평안도 찰산 앞바다에 있는 섬, 명군이 점령하고 있었음)를 공략할 것이며 차후에도 청의 요청에 따라 수시로 병력과 군량을 지원항다.
  등으로 이를 보면 청이 병자난을 일으킨 저의가 명백하게 나타난다. 즉 장차 중원을 석권하기 위한 배후의 안정과 증원세력을 확보하고자 함이었다.

  ○ 서문수비군과 延陽府院君 휘 時白의 분전(奮戰)
  우리 延李의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휘 時白)께서 병자난 당시 남한산성 수어사로 있었고, 남한산성 농성전투 때는 서문수비군대장으로서 지금 남한산성 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장대(西將臺: 현 현판 守御將臺)를 작전지휘소로 삼아 청군의 공격이 가장 격심했던 산성의 서편 맡아서 분전하였다는 것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휘 時白)께서는 무장(武將)도 아니면서 이와 같이 중요한 방어 책임을 맡게 된 사실만 보아도 공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심이 투철하며, 책임감이 강하며, 신뢰를 얻고 있었는가를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서문수비군의 분전하는 모습과 공의 전투지휘 장면의 단편들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찬「丙子胡亂史(병자호란사)」에서 옮겨 본다.
  「인조15년(1637) 1월 23일 밤 3경(밤 11사-1시) 무렵 청군은 수어사 이시백이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산성의 서문에 야습(夜襲) 을 기도하였다. 야음(夜陰)을 타서 은밀하게 성벽에 접근한 청군은 수 십 개의 운제(雲梯)를 걸고 성벽을 기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성루의 수비군은 연일 계속된 전투의 피로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 때 수어청 군관 송의영(宋義榮)이 잠결에 눈 밟는 발자국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청군 공격부대의 선두가 운제를 타고 성루 위로 올라서려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깜짝 놀란 송의영은 재빨리 능장(稜杖)으로 선두의 청병을 쳐서 성밑으로 꺼꾸러뜨린 다음 “순찰하는 선전관이 온다. 빨리 일어나라” 하고 수비병들을 깨웠다. 송의영은 수비병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난 다음에야 비로소 청군이 성벽에 기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송의영의 이와 같은 침착한 행동에 의하여 서문수비군은 돌발적인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청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때는 이미 청군이 너무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한 뒤였으므로 수비군은 미쳐 총포와 궁시를 쏠 겨를도 없이 성벽 위에 쌓아놓은 큰 돌들을 굴려 떨어뜨려 청군의 등성(登城)을 저지하였다. 그런 다음 성 아래로 쇄마철(碎磨鐵)을 던지고 화포사격을 가하여 적을 살상하였다.
  서문수비군은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이 몸소 진두지휘하는 가운데 밤사이 세 차례나 반복된 청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결국 청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4경(새벽 1시-3시)무렵 퇴각하고 말았다.
  날이 밝은 뒤 수비군은 청군이 유기한 수십 개의 운제와 화포, 궁시, 창검 등 다량의 무기를 노획하였으며, 청군이 패퇴하면서 많은 전사자의 시체를 끌고 간 흔적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서문수비군이 분전했던 남한산성 서편 성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를 진두지휘한 수어사 이시백은 화살과 총탄을 몸에 맞아 중상을 입으면서도 끝까지 장대에서 물러서지 않고 군사를 독려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시백이 당초 서문수비의 임무를 맡았을 때 임금(인조)으로부터 갑주(甲胄: 갑옷과 투구)를 하사 받았지만 “군졸들은 의복조차 제대로 입지 못하고 헐벗어 떨고 있는데, 대장인 나 혼자 갑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하면서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평상복을 입은 채로 지휘하였다 그가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시 이시백이 거느리고 있던 병력의 대부분은 경기지방에서 동원된 농민 출신들로서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상태였다.
  그러나 대장인 이시백은 군졸들과 항상 함께 기거하면서 동고동락 하였기 때문에 부대의 사기는 다른 어느 수비대보다도 높았으며, 이것이 실전에 있어서 큰 힘을 발휘하게 하였던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 한 전투 실화만 해도 연양부원군의 인품을 능히 알 수 있다.
◆ 남한산성과 연성군(延城君) 휘(諱) 시방(時昉)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諱 貴)의 3자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昉) 역시 남한산성과 인연이 깊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크게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강화 할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 순검사(巡檢使) 이시방이 소임을 잘 수행하여 강화도 수비에 만전을 기한 덕분으로 생각하고 이듬해(1628) 임금은 이시방을 남한산성 수어사(守御使)를 겸한 광주목사(廣州牧使:정3품)로 보냈다.

  정묘난을 당하고 보니 유사시에 대비한 사전 준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그래서 축성한지 2년이 지난 남한산성을 잘 정비하고, 보강하여 유사시에 철저히 대비하라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시방은 인조 10년(1632)까지 4년간 남한산성 정비와 보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조 14년(1636)한성부 좌윤(左尹: 종2품)으로 있다가 외간상(外艱喪: 부친상)을 치룬후 광주목사 때 남한산성의 정비, 보강의 공적으로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종2품)로 승진하여 복직되었다.

  부친 연평부원군의 남한산성 축성건의에 따라 이서의 최초 축성이 수훈 갑(甲)이라면, 연성군의 남한산성 정비, 보강 또한 수훈 을(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성에 의지하여 농성전투를 벌릴 때 이시방은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다. 그 대신 형 이시백이 병조참판으로 수어사를 겸하였다가 서성장(西城將)으로 서문수비대 전투를 지휘하였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지난 4년간 아우 이시방이 성을 잘 정비, 보강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성군은 현종원년(1660)에는 판의금부사를 겸한 공조판서로서 역시 남한산성 개수에 힘쓰다가 이듬해 병을 얻어 졸하였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찬한 연성군 신도비문에 따르면
  「병자(丙子:인조14년,1936) 나주목사로 있다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떼 조정에서 남방의 군인을 조발하여 서쪽 지방에 파견하고자 하므로 공이 양서(평안도, 황해도)의 백성을 초모(招募: 의병을 모음)하여 군졸에 대비하고, 남방에서는 그 대가(代價)를 바쳐서 군향(軍餉: 군량)을 공급하기를 청하였다. - 이는 연평부원군의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의 하나이기도 하다 -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 때에 이미 노병(虜兵: 청)의 재침 기운이 태동하고 있었으므로 공은 입암산성(笠岩山城: 전북 정읍과 전남 장성 지경의 입암산)에 산성을 쌓아서 환란에 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노병(虜兵: 청)이 졸연(猝然)히 경읍(京邑: 서울)을 압박함으로 대가(大駕: 임금의 행차)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심에 공이 모든 군병을 다 병사(兵使: 병마절도사)에게 이속(移屬)하여 먼저 가게 하고, 공은 다시 기병(奇兵: 비정규전부대)과 영락(零落: 보잘것없는)한 토병(土兵: 토착민에서 뽑은 준군사부대)을 합하여 후원에 대비하니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본도에 남아 있어 병사에 성원이 되게 하고, 또 인심을 진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주상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차마 이런 말을 하리요. 마땅히 남한성 하에서 사생(死生)을 결단하리라”하고 출병하여 경기도 안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여러 도의 군병이 잇달아 패전하고 본도(전라도) 병사 김준룡이 비로소 험준한 곳을 이용하여 적병을 훼상하였으나 역시 패주하니 정축(丁丑: 인조15년, 1637) 정월에 공이 병마를 중군에게 주고 돌아와 공주에 주둔하여 산망한 군병을 수습하고, 두 원수(元帥: ?)가 양근(楊根: 지금의 양평 옥천) 미원(迷原)에 주둔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합세하고자 청주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성립되고 노병(虜兵: 청)이 물러갔음을 알았다」

  「(병자호란 남한산성 전투 후) 임금이 서울로 돌아옴에 공이 달려가 죄를 청하니 상(上)이 특명으로 아직 소임에 돌아가라 하시고, 그 후 일계(壹啓: 일률적인 계도, 처벌)가 일어남에 정산(충남 청양 정산면)에 귀양 갔다가 경진(庚辰: 인조18년, 1640)에 사면되어 제주목사에 배(拜)하였다.
  광해주가 먼저 이 섬(제주)에 이송 안치되었다가 졸하니 공이 제관을 거느리고 소복으로 가서 몸소 염습하여 후하게 장사 지내고, 전천(專擅: 독단으로 처리함)한 죄를 청하니 이 때 조정의 의논이 처변(處變: 상황이 따라 처리함)하는데 능하다고 칭도(稱道: 칭송)하더라.
  임오(壬午: 인조20년, 1642)에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광주목사 겸 남한산성수어사 겸 형조참판을 배하였다가 일(?)로 인하여 면직하고, 다시 남한산성 수어사를 제수하였으나 그 때 백씨(伯氏: 이시백)가 기보(畿輔)의 융무(戎務)를 총관(摠管)하므로(摠戎使를 말함) 사체(事體: 일을 처리함)에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진정을 올려 사양하였다」
◆ 남한산성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산 교육장(결론)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역사에서 병자호란을 배우면서 누구나 ‘우리 민족사에서 지워버렸으면 하는 지극히 굴욕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 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곳 남한산성에 올라 그 때 이곳에서 벌어진 실제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알고 보면 ‘이곳 남한산성은 우리 역사에서 지울 곳이 아니라 자손 만대로 이어지면서 잘 보존하면서 참다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교육장으로 가꾸어 나가야 할 곳’ 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것은 나라의 방비를 미리 준비하지 아니하면 국난을 당하여 어떠한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교훈(敎訓)과 함께 국난을 당하여 상하가 한마음 한 뜻으로 뭉치면 비록 오합지졸일지라도 상상할 수 없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교훈도 함께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지금부터 370년 전에 이곳을 지키려고 악전고투 했던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특히 우리 延李된 자로서 이곳을 자주 찾으면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貴)의 선견지명과 용기,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휘 時白)의 인품과 우국충정의 정신, 그리고 연성군(延城君 휘 時昉)의 근면하고, 직무에 충실함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남한산성 안내 조감도
<증보(增補)>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남한산성기(南漢山城記)
  계곡집(谿谷集: 장유의 문집)에 전하는 남한산성을 쌓은 동기와 경과를 한 눈에 알수 있도록 적은 글 '남한산성기(南漢山城記)'를 조면희씨가 번역하여 1997년 1월 그의 저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글 백가지'에 올린 것을 옮긴다.

  남한성은 경성의 동남쪽 40리에 있으며, 한수(漢水)의 남쪽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는 광주(廣州)의 구청사(舊廳舍)에서 5리쯤의 거리에 위치하였는데 본래 백제의 옛 도읍지였다.
  『지지(地志)』에 의하면 백제의 온조(溫祚) 13년에 위례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와서 그 후 12대, 380여 년을 지내고, 근초고왕 26년에 남평양(南平壤)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고 하니, 남평양은 곧 현재의 경도(京都)이다.

  이곳은 근초고왕이 옮겨 간 뒤로 백제, 신라를 거쳐 고려를 지나는 동안의 천여 년 사이에는 그 흥폐의 역사를 알 길이 없다.
  우리 조선은 개국 이래로 나라가 크게 발전하고 전쟁이 일으나지 않아서 산이나 골짜기나 기타 자연의 요새가 거의 쓸모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었다.

  임진왜란이 일으난 뒤로 성곽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이 이 남한성에 대하여 많이 의논했었지만 실권을 가진 신하들이 왕에게 건의하지 못하였으니, 도대체 무슨 때를 기다려 그렇게 하였던가?
  금상(今上: 지금의 임금, 인조)이 즉위한 다음해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니, 신하들 중에는 "서울 근처에 요새를 설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고, 그 결과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필두로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가 이 성을 수축하자고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으로부터 이 성을 축조하라는 전권을 받은 청원군(靑原君) 심기원(沈器遠)은, 우선 일정한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이 역사(役事)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맨 처음 도첩(度帖: 중의 신분증)을 주는 조건으로 중을 징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심기원은 친상(親喪)을 당하여 그 자리를 이임하게 되고, 총융사 완평부원군 이서(李曙)가 그 임무를 교대하게 되었다. 그는 명승(名僧)인 각성(覺性), 응성(應聖) 등을 불러 전국의 중들을 편대로 갈라 거느리게 하고 공사할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그리고 목사 문희성(文希聖)과 별장 이일원(李一元)과 비장 이광충(李光春)은 전체의 부역을 독려, 감독하게 하였다.

  이 성의 사방 둘레에는 예부터 성터가 남아 있었는데, 아마 옛날 온조가 쌓은 성터인 것 같다.
  그리하여 원래부터 있던 성터에 기초를 두고 새로이 설계하여 증축하였다. 낮고 평탄한 곳은 더 높여 적군이 함부로 발을 못 붙이도록 험하게 만들었다.

  이 성의 역사(役事)는 갑자년(1624년) 9월에 시작하여 2년 뒤인 병인년 7월에 완공되었다.
  성 둘레가 약간장척(若干丈尺: 몇길 몇자)이고, 여장(女墻: 성의 낮은 담, 밖을 내다보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곳)은 1,700곳이며, 문은 네군데를 설치하고, 암문(다락이 없이 만든 비밀통로)은 그 성문의 갑절을 만들었다.
  성 안에는 가람(伽藍: 중의 정사) 일곱 곳을 세우고, 관해(館해: 객사)와 창고 등을 모두 갖추어 놓았다.

  이 남한산은 가운데가 평평하고 바깥이 높이 솟아올라 둘레를 이루고 있어 성이 매우 튼튼하고 형세도 한층 웅장하다.
  성안에는 샘물이 매우 많아서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마르지 않았고, 산골짜기의 여러 물줄기가 한데 합쳐져 개울이 되어 동쪽의 수문(水門)으로 빠져 나간다. 수문 밖에는 벼랑과 골짜기가 꼬불꼬불 수십리까지 이어져 있다.

  또 사방의 산세가 높고 험하여 사람이 함부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오직 동남쪽 산기슭만이 조금 펑퍼짐하여 포루(砲樓) 세 곳을 만들었다.
  건유(乾維: 서북쪽 끝)에 조그마한 봉우리 하나가 있어서 성안이 전부 들여다 보이므로 거기에 누대를 하나 세우고 좁은 골목길을 만들어 성 안으로 통하게 하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 (광주)고을의 청사를 이 성 안으로 옮겼으니, 여기에 사는 백성들과 저축된 물건들로 인하여 이곳은 어느덧 하나의 훌륭한 요새가 되었다.

  아하! 우리 성상께서 천운에 부응하여 나라를 중흥시키고 다시 백성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화란을 경계하기 위하여 충신들을 시켜 이 성을 쌓게 하셨다.
  그리하여 지난 천 년 동안 가시밭으로 변한 성터를 고쳐 쌓아서 우리 서울의 요새를 만들었다. 이는 천운에 부응하고 동시에 하늘과 사람이 합치되는 기회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려는 의도가 역시 합당하다고 이르겠다.

  지금으로부터 안으로 조정의 신하들은 임금을 보필하고, 밖으로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은 마음과 힘을 합쳐 나라를 지켜 나간다면, 사람의 화합과 이 성곽의 지역적 이득이 골고루 갖추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성은 굳이 훌륭한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영원히 견고한 요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화(人和)기 뒤따르지 않고 험한 산만 믿는다면 전차(戰車)와 같은 견고한 성도 종국에는 쓸모없이 되고 말 것이다. 나라에서 이 성을 쌓았을 때에 어찌 이런 것을 기대했겠는가?

  나는 감히 이 글로써 이 성을 쌓는 데 노력한 여러 사람에게 고한다. 그리고 성을 쌓은 여러 사람의 명단은 아레에 따로 기재하기로 한다.

* 장유(張維): 선조 20년(1587)-인조 16년(1638).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 김장생의 문인, 1609년(광해1년) 문과 증광시 을과 급제, 광해 4년 김직재의 무옥 사건으로 파직,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조선 중기 4대문장가(月象谿澤)의 한사람, 대사헌, 대사성 등 역임, 다음 해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왕을 호종하여 신풍군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 로 왕을 호종하였고, 1631년 딸을 봉림대군에게 출가시켜 후에 효종의 왕후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최명길 등과 함께 화친을 주장했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