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암(五子巖) 이업(肄業)
沙月 李盛永(2006. 11. 8)
경남 거창읍 동변리 죽동(竹洞)마을은 순수 우리 말로 ‘못질마을’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오자암(五子巖)’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글자 그대로 하면 ‘다섯 아들 바위’라는 뜻이다.
옛날 이말정(李末丁)이라는 선비가 서울에서 벼슬살이 하다가 퇴임하고, 이 마을로 낙향하여 다섯 개 바위가 있는 곳에 집을 짓고 다섯 아들을 그 다섯 바위 위에서 열심히 가르쳐 모두 훌륭한 사람으로 출세 시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섯 바위를 ‘오자암’이라 불러 왔다는 이야기다.
오자암 위치 지적도와 원위치사진

  연안이씨 부사공파(副使公派) 세보(世譜) 부사공 현손(玄孫) 末丁(말정) 난과 금릉군지(金陵郡誌) 명관(名官)편 李末丁(이말정) 난에 다음과 같이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世譜>
「公以學行屢薦爲少尹不仕退居知禮知品又居居昌矛谷庭植數梅優遊磐石使五子肄業其上世稱五子巖」
      (공이학행누천위소윤불사퇴거지례지품우거거창모곡정식수매우유반석사오자이업기상세칭오자암)

<郡誌>
「以學行德望(이학행덕망)으로 薦爲忠淸都事(천위충청도사)하고 陞水站判官禮賓少尹(승수참판과예빈소윤)하다. 卜退去知禮知品(복퇴거지례지품)하고 又移居昌矛谷(우이거창모곡)하여 庭植數梅(정식수매)하고 又遊盤石(우유반석)에 使五子(사오자)로 肄業其上(이업기상)하니 世稱五子巖(세칭오자암)이라 하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해서 해석하면 '공은 학행과 덕망으로 여러 차례 관직(충청도사, 수첨, 판관 등) 을 거쳐, 예빈시(禮賓寺: 국빈, 주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예조 아속의 관청), 소윤(少尹: 副正, 종3품)에 추천되었으나, 받지않고 지례현(知禮縣) 지품(知品)으로 물러나 살았으며, 또 거창(居昌) 모곡(矛谷: 현 거창읍 동변리 죽동)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정원에 여러 그루 매화를 심고 또 반석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다섯 아들로 하여금 그 바위 위에서 이업(肄業: 배우고 익힘)을 닦아 모두 출세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 바위들을 오자암(五子巖)이라 불렀다' 는 내용이다.

이 기록들과 이야기를 내용을 자세히 음미해 보자.
  이말정(李末丁)은 태조4년(1395) 남대(南臺: 사헌부) 장령(掌令: 정4품)과 지보주사(知甫州事: 보주는 경북 예천)를 지내면서 보주의 명환(名宦: 명관)으로 동국여지승람 보주군편에 올라 있는 이백겸(李伯謙)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름(末丁) 그대로 3남1녀 중 막내 아들이다.

이말정(李末丁)은 후에 장인이 되었고, 태종 14년 전국이 8도로 된 후 최초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평절공(平節公) 빙우(聘于) 한옹(韓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세종8년(1426) 사마시(司馬試: 생원과와 진사과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 생원과와 진사과에 급제 하면 성균관 사마에 입학할 자격을 주기 때문에 붙은 이름)에 급제하여, 학행과 덕망으로 추천되어 충청도 도사(道事: 정6품)와 판관(判官: 정6품)을 지내고, 예빈시(禮賓寺) 소윤(少尹: 副正, 종3품)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낙향한 것이다.

이말정(李末丁)이 최초 낙향한 곳은 지례현(知禮縣) 지품(知品: 현 김천시 구성면 미평리 지품)인데, 특별히 이 곳을 택하여 낙향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지만 장인 한옹이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말정(李末丁)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 숙황(淑璜), 2자 숙형(淑珩), 3자 숙규(淑珪), 4자 숙기(淑琦), 5자 숙함(淑 王咸)이다.
거창(居昌) 모곡(矛谷)으로 이사하여 이후 장자 숙황(淑璜), 장손 원례(元禮), 증손 국권(國權), 현손 소백(小白), 5대손 응경(應慶), 6대손 성재(成材), 7세손 수곤(壽崑), 8세손 동형(東亨)까지 8대에 걸쳐 200여년 동안 이 곳에서 살면서 이웃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서당집’ 이라 불리다가(오자암 옆에 지은 집이 공부하기 좋은 서당 구조라서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제5자 이숙함(李淑 王咸)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당상관)을 지낸 후로는 ‘사성집’이라 불리면서 고가로 유지되어 오다가 지금부터 십 수년 전에 헐렸다고 한다.

지례 지품에서 거창 모곡을 이사하게 된 동기는 잘 알려지지 않으나, 지품에 큰 홍수 때문이 아닌가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거창 모곡에서 이말정(李末丁)의 아들 훈육은 ‘오자암’전설이 생겨날 만큼 혹독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과는 대 성공적이었다. 다음도표에서 다섯 아들의 등과 현황과 그 다섯아들이 관직에 진출하여 나라를 위하여 활약한 것을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오자암 이업(肄業) 결과 다섯 아들(五子)의 과거 급제는 총 13회나 되며, 그 현황을 다은과 같다.
오자암 이업(肄業) 결과
연도(서기) 구분     성명        과거 종류/등급   
    세종23년(1441)        장자   
이숙황 사마시 등과
단종1년(1453) 4자 이숙기 진사과 2등
단종1년(1453) 5자 이숙함 생원과 장원
단종1년(1453) 4자 이숙기 무과 장원
단종2년(1454) 5자 이숙함 문과 식년시 2등
세조2년(1456) 4자 이숙기 무과 중시 등과
세조3년(1457) 5자 이숙함 문과 중시 등과
세조12년(1466) 5자 이숙함 문과 발영시 등과
세조14년(1468) 장자 이숙황 문과 춘장시 등과
미상 차자 이숙형 사마시및 문과 등과
미상 3자 이숙규 사마시및 문과 등과
5인 13회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5자 이숙함(李淑 王咸)이 문과, 중시, 발영시 세 번 급제한 것을 사람들은 삼중(三重)이라 칭송해 왔다. 이말정의 다섯 아들이 위와 같이 27년 동안에 13회의 각종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섰는데

장자 이숙황(李淑璜)은 사마시에는 맨 먼저 등과 했지만 장자로서 집안을 지키고, 일찍 유학에 물들어(早從儒染) 문과는 27년 후에 응시하였기 때문에 관직도 늦어졌다.
용궁현감으로 오래 동안 있었고, 장예원 사평(정6품), 홍문관 부수찬(종6품), 교리(정5품), 성균관 직강(정5품)을 지내다 지례로 낙향하여 선친의 산소를 지키며 만년을 시골에서 조용히 살았다. 지례향교 중수기문(重修記文)(첨부 #1)를 남겼고, 경북 군위 송호서원(松湖書院)에 배향되었다.

제2자 이숙형(李淑珩)과 제3자 이숙규(李淑珪)는 무후가 되어 자세한 경력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숙형(李淑珩)은 문과 급제후 사헌부 지평(정5품)을 지냈고,
이숙규(李淑珪)는 칠원(漆原: 경남 함안 칠원면)현감과 진위(振威: 경기 안성 진위면 일대)현감을 지내고 사헌부 감찰(정6품)을 지냈으며, 칠원현감으로 있을 때 택승정(擇勝亭)을 지었고, 진위현감 때 현청사(縣廳舍)를 우람하게 새로 지어 후에 대제학을 지낸 서거정(徐居正)이 이를 높이 찬양한 기문(記文)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제4자 이숙기(李淑琦)는 등과후 세조의 가전훈도로 뽑혔다가 평양과 영변 판관(정6품)으로 나가 있는 세조12년에 함경도에서 이시애난이 일어나자 맹패장(孟牌將: 현재의 소,중대장급 하급 지휘관)으로 출정하여 가장 치열했던 북청전투에서 남이장군과 함께 이 난을 진압하는데 전세의 분수령이 되는 큰 공을 세워 평난 중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당상관)에 특진하였고,
이시애난 평난 후에 적개공신(敵慨功신) 1등에 녹훈되고 가정대부(嘉正大夫: 종2품) 이조참판(吏祖參判: 종2품)에 올랐다.
  이 후에도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兵使, 종2품) 등 무관직에 있으면서 건주위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성종 2년(1471)에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또 녹훈되었다.
무관출신으로서 문관직으로는 호조판서(戶曺判書: 정2품)까지 올랐고, 좌참찬(左參贊: 정2품)에 증직되었으며, 시호 정양(靖襄)부조전(不조典: )이 내려졌다.

제4자 이숙기(李淑琦)가 무관으로 출세한 데 비하여 제5자 이숙함(李淑 王咸)은 문장으로 한 세대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단종1년(1453) 노사신, 임원준 등과 함께 제4회 사가독서(賜暇讀書: 湖堂)에 뽑혔고, 사헌부 감찰(監察: 정6품)전라도, 충청도, 함경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등 외직을 지냈고,
내직으로는 경연 사경(司經: 정7품)을 시작으로 홍문관 응교(應校: 정4품), 부제학(副提學: 정3품 당상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당상관) 등 문장력을 발휘하는 직책을 역임하면서 서거정과 함께 신증동국통감(新增東國通監: 법전), 노사신과 함께 방대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전국 지방의 지리와 역사 종합서)을 편찬하였으며, 많은 시문을 지었으나 문집이 산일되어 전하지 않고 주로 동국여지승람에 많은 기문(記文)과 시(詩)가 기록되어 전해진다.
최종 관직은 이조참판(吏祖參判: 종2품)에 이르렀고,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정2품)에 증직되었으며 시호 문장(文壯)이 내려졌고 함흥 문회서원(文會書院)과 지례 도동서원(道洞書院)에 배향되었다.

이렇게 아들들의 출세, 특히 제4자 이숙기(李淑琦)의 적개공신 1등 녹훈에 따라 이말정(李末丁)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에 녹훈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증직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좌찬성(左贊成: 종1품)과 시호 평정(平靜)이 내려졌다

공의 묘소는 경북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에 상하분으로 모셔졌고, 원터 앞 감천 북변 3번국도 변에 옥천인 전윤석(全胤錫)이 찬한 신도비가 있는데 전면에는 ‘永世淸風(영세청풍)’이라 새겼고, 비명(碑銘)에서는 아래와 같이 그의 생애를 칭송하고 있다.
  이 모두 오자암(五子巖) 이업(肄業)의 결과이다.
연성부원군 신도비
지금은 원위치에 있지 않고, 복원을 위해 확보 보관중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신도비명(神道碑銘)

志向淸高(지향청고) 뜻은 맑고 높은 곳을 향했고
行惇孝睦(행돈효목) 효도와 화목을 두텁게 행하였네
不願仕進(불원사진) 벼슬에 나가기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考槃梅軸(고반매축) 은거하며 좋은 자리 마다 하였네
琴書自娛(금서자오) 거문고와 서책을 혼자 즐기며
俯仰無壞(부앙무괴) 부끄러운 일은 쳐다보지도 않았네
誦討經旨(송토경지) 경서를 읽고 토론하면서
勉進來學(면진래학) 부지런히 학문을 닦으니
推思榮貴(추사영귀) 뒤늦게 영화롭고 귀함을 얻어서
贈諡封爵(증시봉작) 시호가 내려지고 작위가 봉해졌네
巖臺梅竹(암대매죽) 바위에 대를 짓고 정원에 매죽을 심으니
永世淸風(영세청풍) 길이길이 맑고 깨끗하게 살리로다
尨蔭垂裕(방음수유) 두터운 음덕 넉넉하게 내리시어
後祿無窮(후록무궁) 후손들에게 복록을 무궁하게 내렸도다.

연성군의 교육열은 우리 후손들이 두고두고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학부모들의 빗나간 교육열과는 그 유(類)를 달리하는 교훈이다.

1998년 거창군청에 근무하는 성산인 이종천씨가 그의 족숙인 향토사학가 이교형(李敎亨)씨가 쓴 「못질마을·茅谷」이라는 향토사료집 중에 오자암을 의인화(擬人化)한 동화형식으로 쓴 글 童話 「오자암(五子巖)」(첨부 #2)을 복사하여 대구 족질 이병화씨에게 제공하고, 족질은 이를 내게 우편으로 보내와서 오래 전부터 관심은 있으나 자료를 구하지 못했는데 좋은 자료를 얻게 되었다. 지면을 빌려 감사드립니다.

첨부 #1 이숙황(李淑璜)의 지례향교중건기문 「명룬당기(明倫堂記)」
지례향교 대성전(上)과 명륜당(中)명륜당기 현판(下)

鄒夫子有言曰設爲庠序學校以敎之皆所以明人倫也人倫明之於上小民親於下 然則 學校者人材之所自出人倫之所自明 國家之所倚重焉烏可以輕視也
(추부자유언왈설위상서학교이교지개소이명인륜야인륜명지어상소민친어하 연칙 학교자인재지소자출인륜지소자명 국가지소의중언오가이경시야)

<譯>추부자(鄒夫子: 孟子, 중국 추부지방 태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상서(庠序: 지방의 작은 학교)와 학교를 세워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인륜(人倫)을 밝히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니, 위에서 인륜이 밝아지고 아래서 소민(小民: 백성)이 친하게(새롭게) 된다면, 학교는 인재(人才)가 배출되는 곳이며 인륜이 밝혀지는 곳이니 나라가 의지할 중요한 곳이다. 어찌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

惟吾東方僻在海隅舊無學校之敎前朝光廟因雙冀制科擧臨軒策士儒風稍興自是以來內立成均外建鄕學置敎官聚生徒敎之以窮理正心相與切嗟琢磨作養人材禮樂文物彬彬可考矣
(유오동방벽재해우구무학교지교전조광묘인쌍기제과거임헌책사유풍초흥자시이래내입성균외건향학치교관취생도교지이궁리정심상여절차탁마작양인재예악문물빈빈가고의)

  생각컨데 우리나라는 동방의 한쪽 바다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학교교육이라는 것이 없다가 고려 광종(光宗: 4대, 서기950년-975년) 때 쌍기(雙冀: 後周人, 高麗에 歸化)가 과거제도를 제정함으로 인하여 임금이 직접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니 유풍(儒風)이 서서히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로 서울에는 성균관(成均館)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鄕校)을 세워 교관을 두고, 생도를 모아 궁리정심(窮理正心)을 가르치고, 서로가 더불아 절차탁마(切嗟琢磨)하면서 인재를 양성하여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빛나게 되니 볼만하게 되었다.

  * 대학8조목(大學八條目):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濟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吾桑鄕小邑在三韓時以知品川縣屬於甘文國統合之後移知品代此邑號稱知禮山川狹僻人物鮮少艸創未遑學校未建韋布之徒惑僧舍惑公解東移西遷靡未有定處
(오상향소읍재삼한시이지품천현속어감문국통합지후이지품대차읍호칭지례산천협벽인물선소초창미황학교미건위포지도혹승사혹공해동이서천미유정처)

  우리의 상향(桑鄕: 桑梓之鄕, 고향)은 소읍으로서 삼한시대에는 지품천현(知品川縣)으로 감문국(甘文國)에 속하다가 신라(新羅)에 통합된 후에는 지품(知品)을 바꾸어 지금의 읍(邑) 호칭인 지례(知禮)로 대신하였다.
  산천이 협벽(狹僻: 협소하고 궁벽함)하여 훌륭한 인물이 드물고(鮮少), 초창기에 여유가 없어 학교를 세우지 못하여 가난한 선비들(韋袴之徒)이 공부하려고 절간(僧舍)이나 공공건물(公解) 등으로 동이서천(東移西遷: 사방으로 떠돌아 다님)하면서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 감문국(甘文國):삼한시대의 변한(弁韓)의 한 제후국으로 현 경북 김천시 감문면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나라이다.

歲在宣德丙子鄭侯雍分符玆縣悶鄕校之無定卜地於客舍東北隅重谷回勢可建學宮於是先構 大成殿次構校房東抹樓鹵齊房鄕校之制儀略具而無敎官講廳師生雜處禮儀蔑如何
(세재 선덕병오정후옹분부자현민향교지무정복지어객사동북우중곡회세가건학궁어시선구대성전차구교방동말누로제방향교지제의약구이무교관강청사생잡처예의멸여하)

  선덕(宣德) 병자년(丙子年)정옹(鄭雍: 默隱 鄭熙)후(侯)가 이고을에 원으로 부임하여 향교(鄕校)가 없음을 딱하게 생각하고, 객사(客舍) 동북쪽 변두리 두 계곡이 감싸 안는 형세의 자리에(重谷回勢) 터를 잡아 학궁(學宮)을 세웠는데 먼저 대성전(大成殿)을 짓고, 다음은 그 동쪽에 누각과 퇴폐한 재방(齋房)을 없애고 교방(校房)을 지어 향교(鄕校)의 제의(制儀)를 대략 갖추었으나 교관의 강청이 따로 없어 스승과 생도가 함께 섞여 예의를 가출수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幸 成化己巳秋野成金侯秀文 人卒于玆鄕弊祛化治民安物阜慨然有之於學校悶其制度之未周書糧之惑乏公務之暇乃設明倫堂數間衙前前堂後室師生區別禮儀可觀又給田二結擧皆沃饒之地也制度之未周者已周書糧之乏絶者可補 口于亦盛矣
(행 성화기사추야성김후수문쉬우자향폐거화치민안물부개연유지어학교민기제도지미주서량지혹핍공무지가내설명륜당수간아전전당후실사생구별예의가관우급전이결거개옥요지지야제도지미주서이주서양지핍절자가보우역성의)

  다행히 성화(成化) 을사년(乙巳年) 가을에 야성(野成) 김수문(金秀文)후(侯)가 이 고을의 원으로 부임하여 모든 폐습을 제거하고, 교화에 흡족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 물산을 풍부하게 하였다. 개연히 학교에 뜻을 두어 그 제도를 두루 갖추지 못하고, 간혹 서책과 식량이 결핍한 것을 딱하게 생각하여 공무 중에 짬을 내어 곧 관아 앞에 수간의 명륜당(明倫堂)을 지어 전당후실(前堂後室)로 나누어 스승과 생도를 구별하니 예의가 볼만하게 되었다.
  또 급전(給田) 2결(二結: 1결은 方 33步, 2결은 方47步)을 내놓으니 모두 비옥한 땅이더라. 제도를 두루 갖추지 못한 것을 갖추게 하고, 서책과 양식이 결핍(缺乏)한 것을 보완하니 이 또한 성대한 일이로다.

鄭侯創之於前金侯繼之於後後繼之功豈徒所比前創也況又給田資糧興所以養人材於萬世明人倫於無窮壽斯文比箕翼者功滿滿矣尤豈非吾鄕之大幸也哉
(정후창지어전김후계지어후후계지공기도소비전창야황우급전자량흥소이양인재어만세명인륜어무궁수사문비기익자공만만의우기비오향 지대행야재)

  정후(鄭侯)가 앞서 창건하고 김후(金侯)가 뒤네 계승하니 그 이은 공(功)이 어찌 앞서 창건(創建)한 공을 따르지 못하리오.
  또한 급전(給田)은 양식을 넉넉하게하였으니 만세(萬世)토록 인재를 기르고 무궁(無窮)토록 인륜을 밝혀서 사문(斯文)기익(箕翼: 별 이름)의 두 별처럼 오래도록 수(壽) 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공이야 말로 만만(滿滿)이로세.
  이 어찌 우리 고을의 크나큰 행운이 아니리오!

良在 成化乙丑余爲成卯館金侯指我錄名升諸司馬未幾又攀月桂今以襄老卦冠歸鄕則金侯謂余詳知學校之顚末屬之以記不敢叭拙辭略敍首尾以備後人之觀感云稱旨
(낭재 성화을축여위성균묘관김후지아록명승제사마미기우반월계금이쇠노괘관귀향칙김후위여상지학교지전말촉지이기불감팔졸사약서수미불비후인지관감운칭지)

  성화(成化) 을축년(乙酉年)에 내가 성균관 묘관(卯館)이 되었을 때 김후(金侯)가 나를 지적하여 여러 사마(司馬: 성균관 유생)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더니, 멀지 않아 또 문과에 급제 하였다.
  지금은 늙어서 괘관(桂冠: 退官)하여 귀향하였더니 김후(金侯)께서 내가 학교에 대한 전말(顚末)을 자세히 안다면서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나는 감히 졸렬한 문장이라고 사양하지 못하고(拙辭) 대략 수미(首尾)를 갖추어 기록하니 후세 사람이 직접 보고 느끼는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宣明弘治경午秋七月旣望(선명홍치경오추칠월기망) 성종17년,서기1486년 가을 7월 기망(旣望: 음력 16일)
通訓大夫行成均館直講 延安李淑璜識(통훈대부행성균관직강연안이숙황지)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성균관직강(成均館 直講) 연안인(延安人) 이숙황(李淑璜)

< 참고 > 금릉군지(金陵郡誌)
  지례향교(知禮鄕校)는 지례면(知禮面) 교리(校里)에 있으며, 초창은 고려 17대 인종(仁宗) 5년 정미(丁未: 석/1127년)에 국령(國令) 시건(始建)하고, 조선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화가 교궁(校宮)이 화를 입어 은진인(恩津人)) 남촌(南村) 송천상(宋天祥)이 정신(挺身: 率선)하여 불을 끄고 공자의 영정을 손에 받들고 오성(五聖: 孔子, 顔子, 曾子, 子思, 孟子)의 위폐를 등에 지고 등곡정사(藤谷精舍)에 안치하고 8년 동안 삭망(朔望) 첨배(瞻拜)하고 봄 가을 정인(精 煙에서 火대신示: 정승스럽고 정결한 제사)을 하나같이 봉행하였다.
  일제 말기에 금산향교(金山鄕校)로 폐합(廢合)할 때 지례 유생 이현돈(李鉉墩)이 진정하여 이르기를(陳情曰) "근래 군청에서(近自郡廳) 향교폐합설이(有鄕校廢合之說) 온 고을에 전파되어(傳播鄕曲) 인심(人心)이 소란스럽습니다.(騷然) 우리들이 경악하여(始驚終愕) 말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莫知所謂) 하여(玆擧物論所歸) 진정으로 고하니(仰告衷困) 살펴주시기 바랍니다.(幸乘察焉)
  (夫聖人之道) (三綱五倫之道也) (與天地) (相終始) (不可一日不行) (不可一人不知) 한 사람이 행하면 한사람이 평안하고(一人行則一人安) 한 가정이 행하면 한 가정이 화합하게 되고(一家行則一家齊) 천하 국가가 행하면 천하 국가가 잘 다스려지고 또 태평하게 되는 겁입니다.(行之天下國家則天下國家治且平矣) (不以聖人之道) (治之而不至於危亡者古今未聞也)
  (在今如欲治平則當令國民) (益講聖人之道) (以助大東共榮之策) (自下不可援之急務) (奈之何廢其己存之校) (以弛人心而拂神理乎) (中略拂神理逆人情爲政之大戒也)
  (今이之擧決非敬神順民之事則勿爲定之而固執) (函停其令) (是何等寬典哉) (若不恤民隱) (抑而行之則古之錢塘之事) (安知不復生於今日) (苟至於기境) (不可使聞於隣國也) (千萬統察焉)

  (翌一九四六年丙戌春 (代表都有司文孟坤掌議金鎭永李鉉卓李鍾奎別有司李建和李中和諸人) (合議陳情於成均殿) (得出還安之通文) (復安于本校)

  (一千九百五十年庚寅動亂福及大成殿) (當時典校文孟坤與族命憲宗德孔夫影幀及二十七位板) (權安于護聖谷-知禮面道谷里-所在文氏齋室朔望焚香) (翌辛卯八月二十六日當時典校李建和與諸士復安于本校)(계속)

첨부 #2 향토사학자 이교형(李敎亨)씨의 童話 「오자암(五子巖)」
  우리들 오형제를 세상 사람들은 오자암이라고 부르지만 아주 옛적에는 이름도 가지지 못했지요,
  우리가 태어나 뒹굴다가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은 데가 못질마을이란 곳인데 우리들 오형제는 용하게도 나란히 자리를 잡았더군요.
  그 때는 허허 벌판이었는데 얼마 안되어 수목이 울창해지고 우리는 그 속에 파묻혀 버렸지요.
  세상 구경은커녕 하늘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암담한 속에 무던히도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 우리는 헤어날 수 없었지요.
  이대로 영영 매몰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니 서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하고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에 사람들이 이 근처에도 살게 되면서 농사를 짓는다고 논밭을 일구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들은 초목을 베어 없애거나 또는 불을 질러 태워 버리기도 했는데 요행히 우리 있는 곳에는 불태우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넓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으나 이젠 논밭에 방해가 된다고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게 되었지요.
  우리들의 몸집이 워낙 컸으니 망정이지 작았더라면 그들의 손에 파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음 논밭으로 넓은 들판이 되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는 집이 한 집, 두 집 들어서면서부터 사람 사는 마을이 형성되어 우리도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마을에는 많은 사람이 와서 살게 되고 또 떠나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양에서 내려왔다는 선비 한 분이 바로 우리 이웃으로 이사를 왔어요.
  이사 온 가족 중에는 보기에도 총명하고, 아주 귀여운 세 사람의 도련님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곧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집의 가장되는 어른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이제는 퇴임하고 시골로 낙향했는데 학문이 깊고 덕이 높아 참 의젓하고 훌륭한 어른이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서울 양반’이라 불렀습니다.
  이름은 이말정(李末丁)이라 했는데 그의 시조(始祖)는 당나라에서 귀화하여 신라가 3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연안백에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본관을 연안이라 한답니다. (注1)

  말정이란 이름자를 보니 형제 중 끝집인가 했더니 뒤에 알고 보니 과연 3형제 중 막내집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를 알아 볼 뿐만 아니라 아주 귀엽게 대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에 또 두 도련님이 태어났지요. 그래서 도련님 오형제와 우리들 오형제는 단짝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들 오형제를 오자암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注2)

  우리들은 환희에 넘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개구장이 도련님들도 글을 배울 때가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들 옆에다 서당을 지었습니다. 글방선생도 이웃에서 모셔왔지요. 이웃에서도 글 배울 아이들이 와서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변이 한층 분주해졌으나 전과 같이 무절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서당의 대청마루와 우리 오자암에서 열심히 공부 하였습니다. 틈틈이 재미있는 놀이도 계속하였습니다. 공차기도 하고, 연날리기와 맞치기(돌을 세워 놓고 넘어뜨리는데 던져서 넘기기, 밀어서 넘기기, 차서 넘기기 등 8가지 단계가 있는데 이 단계를 먼저 통과해야 이김)도 하였습니다.
  십오야 달 밝은 밤에 글 읽는 소리는 참 운치가 있었지요. 꿈 같은 세월이었습니다.

  배우던 책 한 권을 다 떼면 책씻이라 하여 선생과 동료들에게 한 턱 내는데 주로 떡을 해와 나누어 먹으면서 축하해 주지요. 이것을 마을 사람들은 책거리라 했고, 선생은 책례(冊禮)라 하더군요.

  이 글방 선생에게 다 배우면 향교에 가서 더 깊은 학문을 연마하지요.
  글읽기는 근 20년, 과거 볼 때가 되었습니다. 글공부의 목적은 과거(科擧) 보기 위함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과거에 급제해야만 벼슬길에도 나갈 수 있었고, 또 선비로서 대우도 받게 되니 누구나 과거보기에 온 정성을 다 바칩니다.

  과거는 문과, 무과와 잡고 세 종류가 있고, 문과는 다시 대과와 소과가 있는데, 소과는 사마시라고도 하였으며, 생원, 진사가 되기 위한 시험인데 초시와 복시 두 단계가 잇는데 초시는 각 도에서 실시하는 향시인데 여기 합격하면 서울에서의 복시에 응시할 수 있으며, 여기 합격해야만 생원 또는 진사가 되는데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지고 대과에 응시할 수 있으며 또 하급 관리에 등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대과는 초시인 각 도에서 실시하는 향시와 서울에서의 복시에 합격하고 또 임금이 임석하는 전시가 있는데 후대에 와서는 형식에 그치고 복시에 합격하면 최종 합격이 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중직을 내리는 등 우대하였고, 사회에서도 선비로서 그 지위가 높아집니다.
  이러한 과거를 거쳐야 출세 할 수 있었으니 그 경쟁은 이루 형언 할 수가 없었지요.

  도련님들도 지금까지 배운 학문을 시험해 볼 운명의 때는 왔습니다.
  세종22년(1440) 숙황 맏 도련님은 그 이듬해 있을 사마시에 응시하기 위하여 (거창)군수가 실시하는 예비시험인 조흘강(照訖講)에 합격하여 조흘첩을 받아 가지고 경상도 감영에 나가 향시에 응시하였습니다. 여기서도 무난히 합격하였습니다. 최종시험에 대비해서 밤낮없이 공부가 강행되었습니다.

  노력한 보람은 있어 드디어 사마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참 큰 영화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집안 초유의 일일 뿐더러 이 마을에서도 처음 있는 경사였습니다.
  마을어귀이자 집 앞인 길가에 솔대를 세웠습니다. 솔대란 솟대 또는 화주(華柱)라고도 하였는데 채색한 큰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는 한 쌍의 나무새를 앉히는데 문과 합격자이기 때문에 한 쌍의 을 앉혔습니다.(무과일 때는 봉황새 한 쌍)
  원근 각처에서 축하객이 연달아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푸짐한 음식 상이 차려졌습니다. 참 신바람이 났습니다. 우리들 이름인 오자암도 마을에서만 통하던 것이 이제 각처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잇달아 둘째 숙형(淑珩), 셋째 숙규(淑珪)께서도 소과에 급제하고, 또 위로 세 분 숙황, 숙형, 숙규는 차례 차례 문과(대과)에 급제하였습니다. 모두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지요. (注3)

  또 한꺼번에 두 경사가 겹치는 일이 있었으니 넷째 도련님 숙기(淑琦)무과에 합격하고, 다섯째 도련님 숙감(淑 王咸)(주4)은 증광 문과에 나란히 합격하였습니다.
  즉 단종1년(1453), 과(科)는 다르지만 한 해에 같이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숙기는 세조2년(1456)에 다시 무과 중시에 합격하여 벼슬이 더욱 높아졌고, 숙감은 세조3년(1457)에 문과 중시에 급제하고, 세조12년(1466) 5월에 실시한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니 사람들은 시위삼중(是爲三重)이라 칭찬하였습니다.

  이렇듯 남들이 선망하는 소과, 대과 모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선 이분들은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숙황(淑璜)의 첫 벼슬은 용궁(龍宮) 현감이 되었습니다. 용궁 하니 용왕님이 사는 곳이 아닌가 했더니 사실은 경상도의 한 고을인데 그곳 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을 원 하면 그 고을 제일가는 벼슬살이라 동헌에 나가 높은 자리에 정좌하면 계하에 6방 관속이 좌우에 두 줄로 배열하고, 구종 별배가 시위하는 가운데 "여봐라!” 하고 호령하면 산천초목도 벌벌 떨었다 하니 참 신나는 자리인가 봐요.
  우리도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어디 갈 수가 있어야지요.
  훗날에는 중앙으로 진출해서 성균관 직강 벼슬을 했는데 진사가 되어야 입학할 수 잇는 성균관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니 이것 또한 장한 일이지요.

  둘째 숙형문과 급제사헌부 지평(持平) 벼슬을 살았습니다.

  셋째 숙규칠원 현감으로 도임하여 보람 있는 일을 하고자 택승정(擇勝亭)을 새로 세웠습니다.
  성종5년(1474)에 진위 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진위는 수원 동쪽(注5)에 있는 작은 고을인데 남북으로 통하는 큰 길이므로 사신과 빈객의 행차가 잇달아서 영접, 전송하고 공궤 하느라 넉넉치 못한 고을이라 관사가 폐사지경에 있어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현감은 고을 안의 부로와 의론하고 유휴인력을 동원하여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고 관사를 새로 지었는데 대청이 5칸이요, 동헌이 2칸인데 마루와 행랑이 잇달렸고 담으로 둘렸는데 단청이 새로워 본래보다 우람하여 고을의 장관이 되었다 합니다.
  그 뒤 중앙으로 들어가 사헌부 감찰을 지냈습니다.

  넷째 숙기무과와 무과 중시에 급제 후 훈련원 주부가 되고, 가전훈도(駕前訓導), 사온서령, 평양판관을 역임하였습니다.

  세조13년(1467) 북도 호족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고, 경관(京官) 출신의 수령 관리는 모두 살해하고, 반란은 한 때 확대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각 진영의 정규병도 상당히 있었고, 여진족의 증원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는 구성군 준(俊)을 북도병마도총사 임명하고,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장으로, 이숙기 등을 맹패장(孟牌將)으로 삼고,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반군을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이기지 못하다가 북청 만령(蔓嶺)에서 비로소 이시애 반군을 대파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는 반군의 소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이시애는 경성(鏡城)으로 퇴각하였으나 그곳에서 그의 당인 이주, 이운로 등에게 살해되어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이 공으로 조정에서는 이숙기는 절충장군에 특진되고 적개공신 1등훈과 연안군에 봉해졌습니다.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라는 하명이 내려졌는바 건주위는 압록강 건너 만주 땅에 있는 여진족의 본거지인데 여진족이 자주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행패가 심했으므로 명나라와 협력하여 여진 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답니다.
  때마침 이시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길주에 주둔하고 있던 강순, 이숙기, 남이(南怡)등에게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를 치게 하였습니다.
  토벌군은 건주위의 여러 성을 치고 이만주(李滿柱)와 그 아들을 죽이고 돌아왔는데 이 공으로 자헌대부에 가자 되었습니다.

  제2차의 건주위 정벌에도 참전하였습니다.
  황해도, 평안도, 경상도의 관찰사로 두루 거치고, 형조판서, 호조판서 벼슬도 지냈습니다. 지금의 장관 벼슬이지요.
  성종2년(1471) 임금을 잘 보좌하고 정치를 잘하여 국기(國基)를 튼튼히 한 공으로 좌리공신 4등에 녹봉되었습니다.
  성종20년(1489)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섯째 숙감은 세종11년(1429)에 출생하였습니다. 소위 시위삼중한 이래 경창부승이 되고, 세조 즉위를 도와 좌익원종공신이 되었습니다. 감찰 벼슬을 하고, 사경(司經)을 역임하였습니다. 임금님의 특별 배려로 사가독서하여 학문을 더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홍문관 응교, 사첨시정, 군기시정을 두루 거치고,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습니다.

  성종 임금은 대명일통지의 본을 따서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는 지리책을 노사신, 양성지, 이숙감 등에게 편찬케 하였는데 내용은 조선 8도의 연혁, 풍속, 산천, 누정, 인물 등을 총 망라한 문헌으로서 역사, 지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데 총 55권이라 합니다.

  세조 임금은 유신들에게 동국통감을 편찬하도록 명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성종15년(1484) 서거정, 이숙감 등이 왕명에 의해 편찬 완성된 문헌인데 내용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에서 고구려, 백제, 고려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1400년 동안의 국토의 이합성쇠, 절의(節義), 난적(亂賊) 등 사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총 56권이지요. 서당, 향교 등에서 교재로 많이 쓰였습니다.

  성종19년(1488)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충청도, 평안도 감사를 역임하였습니다.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못질마을에서는 그의 집을 사성댁이라 불렀습니다. 관리로서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상에서 오형제분의 업적을 대략 살펴보았거니와 오형제 모두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특히 끝으로 두 분의 공적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건흥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우리들 오자암에 지력이 맺혀 지기가 왕성한 곳인지라 여기에 터전을 잡았으니 자손이 흥성하고, 가운이 번창 발복했다고들 하였습니다.
  오형제 분들은 우리들 오자암의 정기를 받아서 어진 인물이 되었다는데 사실 우리들은 도련님들이 잘되기를 얼마나 축수했는지 모릅니다.

  막내둥이 숙감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여긴다는 문장공(文莊公)의 시호가 내렸다고 그 후손들이 흥청댔다던 소식을 듣고 우리들도 기쁘기 한량 없었습니다.
  그 소식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조용해졌습니다. 우리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잠결에 들으니 우리들 이름을 부르는 듯하여 어렴풋이 눈을 떴습니다.

  잠간 동안 잔듯한데 그사이 수 백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세상도 많이 변하여 딴 세상 같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위를 배회하면서 무엇을 찾는 듯 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아아 우리를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을 모르거니와 그분들도 우리를 알 까닭이 없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태고 적부터 이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형태만 보아도 알 일이고, 또 우리 이웃이고 아주 절친하게 지내던 서당이 있었으니 그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인데 무엇을 주저할 것 있겠어요. 서로 말이 통한다면 한마디 해주고 싶으나 우리 말을 못 알아 들으니 안타까웠습니다.
  끝내는 우리를 알아보는 것 같아서 퍽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서당이 십 수년 전에 헐려 없어지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지요. 우리가 잠을 자지 않았던들 헐리지 못하도록 했을 것인데 잠잔 것이 후회스럽지만 어디 잠잔 것은 우리만 탓할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옛날의 다정했던 오형제! 푸른 꿈을 안고 정열을 불태우던 아릿따운 도련님들 이제 그들이 가고 없으나 화려하고 즐거웠던 그 시절을 되새기면서 오늘도 우리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후손은 이 마을에서 오래 전에 다 떠났지만 온 나라 여러 곳에 많이 살고 있대요. 그들 중 몇 분이 우리를 찾아보고 가면서 우리 주위를 성역화 한다는 말을 남기고 갔는데 성역화란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몰라도 아마 우리 주위를 깨끗이 하고, 전과 같이 화려하고 정숙한 곳으로 만들 모양인데 그렇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래입니다.

  그 때는 그 후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구경꾼들이 몰려 올 것이니 우리는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

(注1) [이름은 이말정(李末丁)이라 했는데 그의 시조(始祖)는 당나라에서 귀화하여 신라가 3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연안백에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본관을 연안이라 한답니다. ]
  일부 사람들이 “시조가 소정방과 함께 당나라에서 출정하여 백제 평정에 공을 세우고 돌아가지 않고, 신라를 섬기면서 연안백(延安伯)에 봉해진 것이 당고종 현경 5년(서기660년)이고, 황해도 연안(延安) 지명이 생긴 것이 그보다 650년 후인 고려 충선왕 2년(서기1310년)이니 황해도 연안이 본관이 될 수 없다”는 지론을 펴고있으나,
- 우리나라 성씨의 본관이란 지명을 바탕으로 생겼다는 점,
- 본관(本貫)제도가 신라 때부터 시행되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도 극히 소수의 귀족에 국한되고, 상류층(과거시험 급제 수준)도 고려 말 (황해도 연안 지명이 생긴 후) 이후에 일반화 되었다는 점,
- 대부분의 조상들이 연안이씨가 황해도 연안에 적을 둔다고 많은 비석에 기록하였고, 종합 보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었다는점,
- 순조21년(1821) 괴산의 월계(月溪) 이문우(李文愚)가 연안을 수차 왕래하면서 연안부 서쪽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에서 ‘延安伯李茂(연안백이무)’라 음각된 묘지석을 굴득하여 기금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는 점.
- 특히 고려사 편찬에 참여한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이 황해도 연안부 취원루에 올라 지은 시에서 ‘寒門玆籍貫(한문자적관): 우리 가문은 이 고을이 관향이라’ 하였다는 점,
- 기타 많은 기록과 물증으로 볼 때 단순히 연대의 차이만을 가지고 ‘연안이씨 본관이 시조 봉호 연안백에서 기원되었다’는 주장은 고려 충선왕 2년(서기 1310년) 이전 즉 황해도 연안 지명이 생기기 전에 기록된 서적이나, 비문에 "延安李氏(연안이씨)"란 기록을 확보하기 전에는 신빙성이 없고, 지금까지는 ‘황해도 연안이 연인이씨의 본관이다’ 고 전해오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

(注2) [그래서 도련님 오형제와 우리들 오형제는 단짝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들 오형제를 오자암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가 아니라 도련님 오형제가 그 바위 위에서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肄業)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 하니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칭송하여 ‘오자암’이라 불렀다(世稱五子巖)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注3) [또 위로 세 분 숙황, 숙형, 숙규는 차례 차례 문과(대과)에 급제하였습니다. 모두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지요.]
맏형 숙황은 세종23년(1441)에 맨 먼저 사마시(소과)에 급제 했지만 문과(대과)는 세조14년(1468)에 마지막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는 장자로서 연로하신 부친(延城君)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돌보고, 일찍이 유학에 심취하여(早從儒染) 과거시험에 큰 관심을 갖지 않다가 동생들이 다 등과 한 후에 뒤 늦게 급제하였다.

(注4) [숙감(淑 王咸)] : 王咸 자는 요즈음 옥편에 ‘옥돌감’이라 되어있으나 옛 옥편에는 ‘감’과 ‘함’ 두 가지로 읽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조상들이 ‘숙함’으로 불러왔고, 한국사대사전 등에도 ‘이숙함’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인명은 옛 대로 ‘숙함’이라 쓰는 것이 타당하다.

(注5) [진위는 수원 동쪽] : 진위현은 현 안성시 진위면(오산 남쪽 지경) 일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