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준도(八駿圖) 병서(竝書)
沙月 李盛永(2020. 6. 30 전재/엮음)
1.어승마 공마봉진 그림
2.저헌공 삼장원의 영광
3.저헌공의 팔준도 병서
4. 성삼문의 팔준도 병서
2020년 5월 11일자 조선일보
어승마(御乘馬)와 공마봉진(貢馬封進)
2020년 5월 11일자 조선일보 ‘신문은 성생님’ 난에 다음 만화식 그림과 함께 「뉴스 속의 한국사 어승마(御乘馬), 임금이 타던 말-태조 이성계는 여덟 마리 준마가 있었죠」라는 제목의 어린이 읽는 글이 올랐다.
어승마(御乘馬) 만화식 그림

<부제>
‘팔준마’ 중 가장 아꼈던 ‘유린청
화살 세 대 맞고도 31세까지 살아
돌로 만든 관으로 특별 장례 치러
「최근 한 TV드라마에서 가상의 대한제국 황제가 타고 다니는 백마 '맥시무스'가 인기를 끌고 있어요. 말은 우리 전(前)근대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역대 통치자들은 전쟁의 승패와 나라의 강약(强弱)이 말에 달렸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 왕들의 '말 사랑'은 상당한 수준이었어요.

◇'임금님의 말'은 제주도 백마
조선 시대 임금이 타던 말은 어승마(御乘馬)나 어마(御馬)라고 했습니다. 왕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기 위한 '내사복시'란 관청을 따로 둘 정도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어승마를 10필 정도 준비했다고 하네요.
지금도 말 목장으로 유명한 제주도에서 혈통 좋은 어승마를 많이 키웠다고 합니다. 어승마로는 권위와 위엄을 높이는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던 백마를 선호했다고 해요. 드라마의 설정에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셈입니다.

장차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할 때도 말타기는 중요 과목 중 하나였습니다. 세자 교육은 전통적 유교 교육인 육예(六藝)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전인교육이었는데요, 육예란 예절[禮], 음악[樂], 활쏘기[射], 말타기[御], 글쓰기[書], 수학[數]이었습니다.

◇돌로 만든 관에 장사 지낸 유린청
'사방의 오랑캐를 제압해 나라가 편안하니/
31년 내내 그 신령한 기운이 빛나도다/
죽어서도 돌로 만든 관 속에서 웅대한 이름을 전하니/
유린청의 덕을 어찌 칭송하지 않겠는가!'

조선 6대 왕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인 사육신 중 한 명이었던 성삼문이 쓴 시인데,
이렇게 극찬 받았던 '유린청'은 사실은 말의 이름이었습니다.

유린청(遊麟靑)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타고 다니던 여덟 마리 명마인 '팔준마(八駿馬)' 중 하나였어요.
홍건적과 전투 중 화살을 세 대나 맞고도 죽지 않고 31살까지 살았답니다.
태조는 가장 아끼던 말인 유린청의 죽음을 애통해한 나머지 돌로 만든 관에 시신을 장사 지낼 정도였습니다.
팔준마 중에서는 이 밖에도 1380년 황산대첩 때 왜구 장수 아기발도를 죽일 때 탔던 '사자황(獅子黃)',
<1388년 위화도 회군 때 탔다는 '응상백(凝霜白)'이 유명합니다.」
(2020. 5.11. 조선일보 전재)
< 탐라순력도의 공마봉진그림 속의 어승마 >
조선 숙종 28-29년간에 제주목사(濟州牧使) 겸 제주병마 수군절 제사(濟州兵馬水軍節制使)로 부임했던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제주에서 거행했던 순력(巡歷)과 여러 행사 장면을 화공(畵工) 김남길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남긴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의 세번 째 그림「공마봉진(貢馬封進)」하단 물목(物目) 에 임금이 탈 말 어승마(御乘馬) 20필(二十匹)이 맨 앞자리에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 한라산 서편 어리목에서 서쪽으로 오르는 해발1169m의 어승생악 오름 이름이 '어승마를 기르던 오름'이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다.
어승생악 위치
팔준마(八駿馬) 중에도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때 탔던 언 서리(凝霜) 같이 하얀 백마 응상백(凝霜白)도 제주도 산(産)이라 하니, 아마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이곳 어승생악 에서 길러진 말이라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成三問)이 팔준도(八駿도) 병서(竝書) 대책(對策: 答案)에서 극구 찬양한 것처럼 '크고, 강하고 또 슬기운'게 아닌가 싶다.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의 세번 째 그림「공마봉진(貢馬封進)」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제주시가 1994년 초판, 1999년 재판한 42폭의 그림책)
- 나라(임금)에게 진상할 마소(馬牛)를 징발하여 제주목사가 최종 확인하는 행사 그림.
-숙종28년(1702)에 6월 7일 시행 광경.
- 대정현감(大靜縣監) 최동제(崔東濟)가 차사원(差使員: 차출 책임자)으로 임명되어 시행.
- 말 433필, 검은소(黑牛) 20수
공마(貢馬) 433필 세부 내역.(그림 하단 기록)
- 어승마(御乘馬: 임금이 탈 말) 20필
- 연례마(年例馬: 매년 정기적으로 공납하는 말) 8필
- 차비마(差備馬: 특별한 용도로 준비 된 말): 80필
- 탄일마(誕日馬: 임금의 생일 축하용) 20필
- 동지마(冬至馬: 동짓달 중국에 보내는 사신과 함께 중국에 바치는 말); 20필
- 정조마(正朝馬: 정월 초하룻날을 맞아 바치는 말) 20필
- 세공마(歲貢馬: 연말에 각 목장에서 바치는 말) 200필
- 흉구마(凶咎馬: 凶變이 있을 때 使役하는 말) 32필
- 노태마(駑馬太 馬: 짐 싣는 말) 33필
- 계 말(馬) 433필(匹)
저헌공(樗軒公, 石亨)의 삼장원(三壯元)
沙月 李盛永(2020. 6. 30 엮음)
우리 延李 판사공(判事公 휘 賢呂) 9세손 저헌공(樗軒公 휘 石亨)은 태종15년(1415)에 탄생하여 세종10년(1428) 14세의 나이로 승보시(陞補試)(주1)에 장원급제 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주1) * 조선조 승보시(陞補試)는 소과(小科: 司馬試)의 초시(初試)에 해당, 사학 유생(四學儒生) 중에서 15세가 되어 성적이 우수한 자를 시험하여 합격하면 소과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성균관기재(成均館寄齋: 寄宿舍)에 입학시키는 제도이다.

세종22년(1440) 가을에 사마 양시(兩試:生員科, 進士科)와 문과(文科) 초시(初試)에 모두 장원(壯元)급제하였고, 이듬해(세종23년, 1441) 봄에 27세로 ,진사시(進士試), 생원시(生員試)에 모두 장원하였다.
여름에 또 문과(文科) 식년시(式年試: 子, 卯, 午, 酉年 3년마다 시행하는 定期시험)에도 장원급제하여 승의랑(承議郞: 정6품)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 정6품) 지제교(知製敎: 임금의 교서를 기초하는 직책)에 파격적으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아래 급제방(榜: 시험결과 발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해에 삼장원(三壯元) 이 되어 방의 위 맨 앞줄에 문과장원(文科壯元), 맨 끝줄에 생장(生壯), 진장 (進壯), 조선조 최초로 한 방 (榜)에 세번 이름이 오르는 전무후무한 영광스런 일이 되었다.
이 저헌공의 삼장원은 조선조에 내내 끝이 없이 이어지면서 우리 延李 가문의 영광 스런 일들이 이어졌고, 저헌공 자신에게는 견제와 위기도 있었지만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신유방(辛酉榜: 세종23년, 1441)
이 문과급제자 발표 방(榜) 맨 앞 文科壯元(문과장원)과 맨 끝 生壯(생원장원)과 進壯(진사장원),
세 번이나 司正(사정) 李石亨(이석형)의 이름이 올랐다.
司正(사정)은 정7품 무관직(武官職)으로 전 해에 생,진, 문과 초시에 모두 장원 했기 때문에
이 관직이 이미 주어졌던 것 같다.(저헌문집 年譜에는 기록이 없음).
* 무과, 생원과, 진사과 급제 방은 따로 발표되지만 그 해 문과가 있을 경우 문과방 끝에
무장(武壯: 무과 장원), 생장(生壯: 생원과 장원), 진장(進壯: 진사과 장원)이 함께 기록된다.
이 해 무과는 없었기 때문에 기록이 없다.
*(參考追記) 이 해(세종23년, 1441) 사마시(司馬試)에는 우리 延李의 부사공 (副使 公 漬) 6세손 직강공 (直講公 諱 淑璜)도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나, 바로 성균 관에 입학하지 않고, 오자암(五子巖) 전설의 장자로서 연로한 선친 (延城府院君 諱 末丁)을 모시고, 네 아우(淑珩, 淑珪, 淑琦, 淑咸)들의 학업을 뒷바라지 하며 문학(文學)에 심취하였다가 27년 후인 세조14년(1468)에서야 문과 춘장시(春場試)에 등과 하였다.
관직에 늦게 진출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정6품), 교리(校理: 정5품)를 거쳐 성균관 직강(直講: 정5품)으로 관직을 끝내고, 지례(知禮) 사월(沙月: 현 釜項面 沙等里 사드레)로 낙향하여 선친 묘소를 돌보고, 지례향교에 자문(공의 鄕校重建記文 보존)하며 유유히 노년을 살다가 고향에서 졸하여 묘소는 金泉 龜城 上院 선친(延城府院君 휘 末丁) 묘소 좌후방에 상하분(上下墳)이다.
성균관 현직에 있는 동안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로부터 ‘일대종사지수(一代宗師之首: 한 시대 으뜸가는 스승)'라 평가 받았고, 졸 후에는 교린문(交隣文)의 관청인 승문원(承文院) 수장 판교(判校: 정3품)에 증직(贈職)될 만큼 학문과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 받았던 것이다.
< 이어지는 저헌공의 삼장원(三壯元) 영광과 위기 >
○ 궁중연회(宮中宴會) 광화문(光化門)입장
세종23년(1441) 봄 저헌공(樗軒公 石亨)이 생원과와 진사과를 동시에 장원급제 하였을 때의 일이다.
등과자에게 궁 안에서 주연을 베풀 때 생원과 등과자는 광화문 왼쪽 협문, 진사과 등과자는 오른쪽 협문으로 각각 장원을 앞세우고 입장하게 되어 있는데 공이 생원과와 진사과에 동시에 장원을 했기 때문에 양쪽에서 서로 장원을 자기 줄 맨 앞에 세우려고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입장이 늦어졌다.
임금에게 사유를 고한즉 임금께서 무척 기뻐하며 가운데 문을 열고 장원은 가운데 문으로 입장하도록 명하여 공은 혼자 광화문 가운데 문으로 맨 먼저 입장하였다 한다.
원래 중앙의 光化門은 임금만이 출입하는 문인데 이석형이 삼장에 장원한 것을 기뻐한 나머지 이러한 전무후무한 조치를 하였던 것이다.
저헌공이 혼자 가운데 문으로 들어간 광화문 옛날과 지금 모습

(위는 조선조 말기, 아래는 현재)
이 이야기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과제편(過制編)에 다은과 같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세종 23년에 임금께서 삼관(三館: 弘文館, 藝文館, 成均館)에 명하여 궐문 밖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도록 하였다.
이석형은 전년도 생원과, 진사과 그리고 문과 삼장(三場) 초시(初試)에서 모두 장원(壯元)을 하였고, 이 해 본시(本試)에서도 연이어 세 방에 또 장원(壯元)을 하였다.
임금께서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며 즉시 좌정언(左正言: 정6품) 지제교(知製敎
: 敎書등을 기안하는 직책)에 겸직으로 임명하고 이와 같은 영광스런 큰 잔치를 베푼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관습에 따르면 생진과급제자가 발표되어 급제자들이 대궐문(光化門) 앞에 도착하면 장원을 앞세우고 생원과 급제자는 왼쪽 좁은문, 진사과 급제자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이번에 저한공이 생진과 모두 장원이 되었기 때문에 양쪽에서 서로 장원(이석형)을 자기쪽 문으로 들어가도록 끌어 당기면서 다투는 바람에 해가 지도록 입장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임금에게 사실을 고하였더니 임금께서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중앙의 광화문을 열라 하고 이석형(李石亨()을 중앙의 光化門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머지는 각각 좌우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명하였다.」


(增補文獻備考 原文) 『世宗二十三年 命三館宴闕門內時 李石亨拜魁前年生進文科初試 是年又連魁三榜 上喜其得人 卽拜左正言知製敎 命賜恩榮宴 舊例生進放榜時到闕門 生員由左挾門入 進士由右挾門入 各以榜次至是生進爭壯元互相援据 日 干 不入 上聞之 命開光化門壯元由光化門入 其餘生進各左右挾門』
○ 선호당(選湖堂) 진관사(津寬寺)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 세종20년(1438)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을 시켜서 권채(權採)등 글재주가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문관을 뽑아서 지금의 구기동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에서 독서(공부)하게 한 것을 시초로 사가독서(賜暇讀書), 독서당(讀書堂), 호당(湖堂)으로 이름이 바꾸어진 젊은 엘리트 양성제도가 생겼다.

호당에 선발되면 좋은 여건에서 공부 할 수 있고, 특진되며 장래 관직 진출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이에 발탁되면 등과 이상으로 명예스럽게 생각하였으며 이름이 호당록(湖堂錄)에 오른다.
조선조 전체를 통하여 호당에 선발된 사람은 39회 291명에 불과하다. 이렇게 적고 귀한 191명 중에는 우리 延李가 저헌공 석형(石亨)을 비롯하여 숙함(淑咸), 후백(後白), 호민(好閔), 명한(明漢), 소한(昭漢), 경의(景義), 은상(殷相), 단상(端相), 해조(海朝) 계 10인으로 전 성씨 본관 중에서 수위(首位)를 차지하고 있다.

저헌공의 삼장원(三壯元)을 한 이듬해인 세종24년(1442) 집현전 대제학 권제가 제 2회 호당으로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 인수(仁搜) 박팽년(朴彭年), 근보(謹甫) 성삼문(成三 問), 중장(仲章) 하위지(河緯地), 청보(靑甫) 이개(李塏) 그리고 우리 연이(延李)의 백옥(伯玉) 이석형(李石亨) 등 여섯 사람을 선발하여 북한산 비봉 북쪽 계곡에 있는 진관사(津寬寺)에서 함께 공부하게 한 것이다.
진관사 정문과 대웅전 모습
제2회 호당에 선발된 6분의 문과 급제는 박팽년 세종16년(8년전), 이개 세종18년(6년전), 성삼문과 하위지 세종20년(4년전), 신숙주 세종21년(3년전)에 등과한 고참인 반면, 이석형은 1년전인 세종 23년에 문과에 등과한 신참인데도 호당에 뽑힌 것은 삼장원(三壯元)에 따른 영광이 아닐 수 없다.
○ 익산동헌시(益山東軒詩)와 영시이헌시(詠詩以獻詩)
세종32년(1450) 정인지(鄭麟趾),·유효통(兪孝通),·이석형(李石亨) 등이 역대의 전쟁과 그것에 대한 선유(先儒)들의 평을 집성한 병서를 집필하였는데 임금이 친히 ‘역대병요’라고 책명을 붙였다.

이듬해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등극(1451)하여 차제(次弟)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지휘아래 김구(金龜)·김말(金末)·김담(金淡)·서거정(徐居正) 외 6인에게 기록들을 원전에서 확인하고, 음(音)에 대한 주(註)를 보완하도록 하였다.

문종1년(1451) 저헌공은 외간상(外艱喪: 父親喪)으로 휴직하였는데 단종1년(1453) 가을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難: 단종1년, 1453, 영의정 皇甫仁, 우의정 金宗瑞 등이 안평대군 瑢을 推戴한다는 핑개로 제거한 정변)에 일어난 후 겨울에 전직(前職: 集賢殿 直提學知製敎 經筵侍讀官 兼 春秋館記注官)에 복직하여 이듬해(단종2년, 1454) 여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下), 가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上), 단종3년(1455) 여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 겸 성균관사성(成均館 司成:종2품)으로 승진하였다.

단종3년(1455) 수양대군은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폐위, 강등시키고 스스로 즉위(1455,세조)하면서 저헌공을 외직 전라도 관찰사(觀察司:종2품)로 내보내면서 역대병요 발간작업의 임무를 주어 동료 조매(趙枚)·송임명(宋林明)등과 함께 세조2년(1456)에 광주(光州)에서 간행하였다.

세조2년(1456) 여름 사육신옥사(死六臣獄事)가 있었는데 저헌공은 전라도 관찰사로 익산(益山)을 순행하던 중 사육신(死六臣: 成三問, 朴彭年, 柳誠源, 李塏, 河緯地, 兪應孚)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 중 5인은 호당에서 함께 공부 하거나, 집현전에서 함께 근무하거나 중시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절 친한 친구로 지냈던 분들이 반역으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참담한 심경으로 이른바 아래 '익산동헌시'를 지었는데 이것을 ‘사육신을 두둔한 시’ 로 고변되어 세조 앞에 압송, 국문을 받고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 익산 동헌 운에 따라 짓다
虞時二女竹(우시이녀죽) 순(舜) 임금 때에는 이녀죽(二女竹 (주2) )이 있었고
秦日大夫松(진일대부송) 진(秦)나라 때에는 대부송(大夫松 )이 있었네
縱是哀榮異(종시애영이) 비록 비애(悲哀)와 영화(榮華)가 다르지만
寧爲冷熱容(영위냉열용) 어찌 차갑고(冷待) 뜨겁게(歡待) 대함이 용납되리
(주2) 이녀죽(二女竹)과 대부송(大夫松)
이녀죽(二女竹): 소상반죽(瀟湘班竹)이라고도 한다.
순(舜)임금이 남쪽 창오지방을 순행하다가 갑자기 돌어가셨는데 두 왕후(二妃: 娥皇과 女英, 모두 堯임금의 딸)가 소상강(瀟湘江 : 중국의 명승지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에 양자강 지류인 瀟水와 湘江이 만나는 곳)까지 와서 슬피 울었다.
이 때 두 왕비가 흘린 눈물이 강가에 무성한 대나무에 떨어져 얼룩무늬 가 생겨났는데 이를 사람들이 소상반죽이라 부르고, ‘슬픈 일’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대부송(大夫松): 진시황이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땅 맨 동쪽에 있는 泰山에 올라 하늘에 통일을 고하는 제사(封禪)를 지낼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주변에 있는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무사히 봉선을 마친 후에 소나무가 고맙다고 생각하고
오대부(五大夫: 중국 秦,漢나라 때에 시행된 二十等爵 가운데 하나. 9등급에 해당하는 작위)로 삼아 사람들이 '大夫松'라 불렀는데 여기서는 '영광스러운 일'을 의미하는 말이다.
(參考追記)* 延李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의 瀟湘八景 時調 의 하나
창오산(蒼梧山) 성제혼(聖帝魂)이 구름 조차 소상(瀟湘)에 나려
야반(夜半)에 흘러들어 죽간우(竹間雨) 되온 뜻은
이비(二妃)의 천년 누흔(淚痕)을 씻어 볼까 함이라
(청172, 890, 해54, 청련집)
(解) 창오산에서 돌아가신 순임금의 혼이 구름 따라 소상강에 내려와서
한 밤중에 비를 내려 소상반죽 대나무에 떨어지는 의미는
아황(娥皇), 여영(女英) 두 왕비의 천년 묵은 눈물 자국을 씻으려 하는가
국문이 시작될 때 세조는 바로 국문에 들어가지 않고 "정몽주는 고려조(高麗朝)에는 어떤 사람이고, 아조(我朝: 朝鮮朝)에는 어떤 사람인가?” [上問鄭夢周於麗朝何等人我朝何等人]
이에 저헌공은 또한 "시(詩)로써 답하겠다" [李石亨詠詩以獻]하여 즉석에서 시를 써서 바쳤다.
李石亨詠詩以獻 (이석형영시이헌) 이석형이 (답변을) 시로 읊어 올리다
聖周容得伯夷淸(성주용득백이청) 주나라 임금(武王)은 청렴한 백이숙제를 용서 해
餓死首陽不死兵(아사수양불사병) 군대 풀어 잡아 죽이지 않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게 내버려 두었네
善竹橋頭當日夕(선죽교도당일석) 선죽교(善竹橋) 머리 그날 저녁에
無人扶去鄭先生(무인부거정선생) 정선생(鄭夢周)은 부축해가는 이도 없었는데
세조가 저헌공의 시를 읽어보고 “당초의 시(益山東軒詩)는 시인의 영감을 읊었을 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관대한 해석을 내려 국문에 들어가지 않고 요즈음 법조용어로 ‘무혐의 처분’ 하였다.
(參考追記)* 이러한 세조의 조치를 두고 여러가지 생각 할 수 있으나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재들을 정난(靖難), 좌익(佐翼)이라는 이름으로 숙청하였다. (희생된 사람들: 세칭 三相, 六宗英, 五懿戚, 三宰, 生六臣, 死六臣, 이외 130여 忠臣, 義士, 賢人)
특히 전조 세종대왕이 앞서 호당, 중시, 집현전을 거쳐 애써 양성한 젊은 인재(사육신 등)을 처형한지도 얼마되지 않았는데 또 삼장원, 호당, 집현전 학사출신의 이석형을 처벌하기는 너무나 아까웠을 것이다.
특히 이석형은 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수양대군 자신이 주관하여 엮은 '역대병요'를 집필, 편집과 전라도 관찰사 재임중 발간까지 책임을 지고 깨끗이 끝마무리 하면서 단종복의 모의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또 위 여러과정에서 절친한 친구가 된 '死六臣에 대한 友情의 心境'을益山東軒 詩로 표현한 것을 '사육신두둔'이라 처벌 할 수는 인간의 양심에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일 세조 자신은 여러면에서 이석형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오히려 삼장원, 호당, 집현전 출신의 이석형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라 짐작이 간다.
* 삼정승(三政丞) : 황보인(皇甫仁,領相), 김종서(金宗瑞,左相), 정분(鄭?,右相)
* 육종영(六宗英): 안평대군(安平大君)용(瑢), 금성대군(錦城大君)유(瑜), 한남 군(漢南君)방(王放), 영풍군(永豊君)전(王泉), 화의군(和義君)영(瓔).
* 오의척(五懿戚): 송현수(宋玹壽,단종國舅), 권자신(權自愼,단종內舅), 정종 (鄭悰,단종妹夫),정효전(鄭孝全,태종駙馬),권완(權完,敦寧判官)
* 삼재(三宰): 민중(閔仲,吏判), 조극관(趙克寬,吏判), 김문기(金文起,吏判)
* 삼운검(三雲劒): 박중림(朴仲林,吏判), 성승(成勝,武,都換管), 박정(朴靖),
* 생육신(生六臣): 김시습(金時習,梅月堂), 조여(趙旅,漁溪,進士), 남효온(南孝溫,秋江), 이맹전 (李孟專,耕隱,正言), 성담수(成聃壽,文斗,校理), 원호 (元昊,觀?)
*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修撰) 이개(李塏,修撰), 박팽년(朴彭年, 刑參),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直集賢殿) 유응부(兪應孚,)(이상 典故大方)
세조는 곧 이석형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예조참의(禮曹參議: 정2품)로 영전시키고, 형조참의(刑曹參議: 정2품)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행적을 보면 세조의 후대와는 다른 행적을 볼 수 있다.
-세조3년(1457) 가선대부(嘉仙大夫: 종2품) 공주목사(公州牧使: 정3품下)
-세조4년(1458)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정3품)
-세조5년(1459) 호분위(虎賁衛) 대호군(大護軍: 종3품 무관직) 수문전(修文殿) 제학(提學:종2품)으로 명(明)에 사신(使臣) , 가을에 상호군(上護軍: 정3품), 한성부윤(漢城府尹: 정2품)
-세조6년(1460) 봄에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가정대부(嘉靖大夫: 종2품), 10월 세조 중궁(中宮)과 함께 황해도/평안도 순시 어가 구현(駒峴)에서 맞이, 11월 말(馬) 1필 하사, 12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종2품)
-세조7년(1461) 봄에 형조참판(刑曹參判), 여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종2품), 가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종2품) 경기도 관찰출척사개성유수(京畿道觀察黜陟使開城留守: 종2품)
-세조8년(1462) 가을에 가을 호조참판(戶曺參判: 종2품), 겨울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下)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2품)
-세조10년(1464)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上) 승진, (漢城判尹: 세조8년-11년 3년)
-세조12년(1466)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빈객(左賓客: 정2품)
-세조14년(1468) 세조 승하, 예종즉위, 부고승습사(訃告承襲使)로 명(明)에 사신(使臣)
-예종원년(1469) 봄에 사신 복명(復命),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승진, 겨울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정2품) 겸직, 11월 예종 승하, 성종 즉위.
-성종원년(1470) 봄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정2품), 여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종1품)
-성종2년(1471)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3等)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 성종7년(1476) 부원군(府院君) 실봉(實封: 食邑이 따름, 명예만의 封君은 虛封)
- 성종8년(1477) 2월 8일 졸(卒). 향녕63세. 시호(諡號) 문강(文康: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 文, 溫柔하고 樂을 좋아하는 것 康), 4월 용인현 동쪽 쇄포리 문수산(文秀山)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 夢周) 묘 왼쪽(雙乳穴)에 장사지냈다.
○ 삼장원사(三壯元詞)
세조연간 어느때 이석형을 궁중에 불러 연회를 베풀면서 중전으로 하여금 어의를 하사케 하고, 궁녀로 하여금 삼장원사(三壯元詞) 를 지어 노래부르며 술을 권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고, 延李 송촌(松村:孝承) 공이 노력 끝에 여주이씨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그 서(序)와 가사(歌辭)를 구하였다 한다.
이 역시 저헌공의 삼장원(三壯元) 명성의 여파(餘波)로 후대 임금과 궁중에서도 이를 기리는 영광스러움이 극에 달하고 있다.
삼장원사(三壯元詞) 서(序)
李判書石亨十四魁陞補聲名籍甚 (이판서석형십사괴승보성명적심) 판서 (주3) 이석형은 14세에 승보시 장원하여 명성이 드높았는데
二十六竝魁生進及文科初試及翌年辛酉三榜 (이십육병괴생진급문과초시급익년신유삼방) 26세에 생원/진사과와 문과 초시, 이듬해에 신유년(세종23년) 3방(생/진/문과)에 장원하였다.
世祖嘗於內殿宴公中殿親執御衣一襲以賜之 (세조상어내전연공중전 친집어의일습이사지) 세조 때 공(石亨)에게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 때 중전으로 하여금 손수 어의 한 벌을 하사하게 하고,
命宮女製三壯元詞歌以侑酒自是召飮必歌之 (명궁녀제 삼장원사가이유주자시 소음필가지) 궁녀에게 명하여 삼장원사(三壯元詞)를 지어 노래 부르면서 술을 권하게 하였는데 이로부터 함께 술 마실 때는 반드시 노래 부르게 하였다.

(주3) 이석형은 판서(判書) 직책을 맡은 적이 없는데 이렇게 호칭한 것은 세조 8년(1462) 겨울에 판서급인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2품) 에 승진했기 때문에 판서로 호칭한 것 같으며, 삼장원사가 작사된 것도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장원사(三壯元詞) 가사(歌辭)
三壯元詞九天上(삼장원사구천상) 삼장원 치하하는 구중천(王宮) 위에서는
三壯元臣拜稽首(삼장원신배계수) 삼장원 신하 머리 숙여 절하네
臣名九皐風徹響(신명구고풍철향) 구고(九皐: 지하 구층 언덕 밑, 으슥한 깊은 곳)에 떨친 명성 바람 타고 사무치는데
臣身一毛不自有(신신일모불자유) 신하의 몸 털끝 하나도 자신의 것 아니라네
王曰來餘文章骨(왕왈래여문장골) 임금 가로대 오라! 그대는 타고난 문장(文章)이로다
設我邊豆崇我酒(설아변두숭아주) 내 그대 위해 변두(안주)와 술 가득 채웠노라
設我邊豆崇我酒(설아변두숭아주) 내 그대 위해 변두(안주)와 술 가득 채웠노라
居然敎坊新(거연교방신결출) 교방에서 재빠르게 새 곡조 만들어 내니(: 門 안에 癸)
宮娥信口歌以侑(궁아신구가이유) 궁아(宮娥)들 멋 떨어지게 노래하네
宮娥信口歌以侑(궁아신구가이유) 궁아(宮娥)들 멋 떨어지게 노래하네
歌聲淸切上蒼蒼(가성청절상창창) 청아한 노래소리 하늘 높이 들려오니
紫皇廳之咨嗟九(자황청지자차구) 임금께서 들으시고 참탄 마지 않으시네
方丈蓬萊一時遍(방장봉래일시편) 방장산, 봉래산을 일시에 거니는 듯
五色雲間鸞鶴逗(오색운간난학두) 오색 구름 사이에 난학(鸞鶴)이 깃들인 듯
瀏瀏瑞旭度仙掖(류류서욱도선액) 맑고 밝은 상서로운 햇살 선액(궁중) 지나가고
細細和風動宮柳(세세화풍동궁유) 솔솔 부는 산들바람 궁권 버들가지 살랑이네
天香桂樹長三枝(천향계수장삼지) 천향 풍기며 우뚝 자란 계수나무 세 가지
月裏精神恩雨後(월이정신은우후) 달 속에 은우(恩雨) 내려 맑은 정기 받았다네
玉壺瓊漿十分醉(옥호경장십분취) 맛 좋은 술과 안주 마음껏 취하고는
晩下門扶左右(만화창문부좌우) 늦어서여 좌우 부측 받고 들창문 내려오네.(: 門 안에 昌)
君知筆力參造化(군지필력참조화) 임금께서 그대 조화 부린 필력 익히 아시고
嗟爾小兒八叉手(차이소아팔차수) 어린 나이로 능란한 팔차수에 감동 하셨네
(三壯元詞 歌辭는 松村 李孝承씨가 노력 끝에
여주이씨 李瀷의 星湖僿說에서 어렵게 구하였다 함-
연안이씨종보 제57호 抄 增補)
○ 삼한갑족(三韓甲族) 어원(語源)
조선조 때는 물론 오늘날 까지도 보학(譜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양반집안’을 이야기 할 때 ‘삼한갑족’이니, ‘연이광김(延李光金)’이니 하면서 우리 延李를 맨 윗자리에 놓고 이야기 한다.

여기 ‘삼한갑족’이란 말의 유래가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를 글로서 세상에 명확하게 전한 분은 조선조 21대 임금 정조대왕이다.
정조대왕은 다른 임금들과는 달리 스스로 ‘홍제 (弘濟)’ 라는 아호(雅號)를 썼고, ‘홍제전서(弘濟全書)’라는 문집(文集) 을 낸 분이다.

저헌집(樗軒集) 부록에 따르면
정종(正宗: 뒤에 정조로 고쳤음)의 홍제 전서(弘濟全書) 안의 일득록(日得錄) 인물편에 이르기를 [日得錄人物 篇曰]

「저헌(樗軒)이 이른 나이로(早年)로 과거(科擧)에 장원급제(壯元及第) 하여 명성(名聲)이 매 우 높았으니 그 유집(遺集)을 본다면 결코 부화(浮華
: 실속은 없이 겉치레만 화려한 것)가 없으니 그 순후 (醇厚)한 군자가 됨을 생각할 수 있다.
[樗軒早年魁科聲名籍甚而讀其 遺集絶無浮華可想其爲醇厚君子也]

「이제 그 자손이 대대로 크게 현달 (顯達)하여 우리나라(吾東)의 갑족(甲族)으로 추대(推戴)되니, 여경 (餘慶
: 덕을 쌓은 집에 여경이 있다는 말이 예부터 전하여 내려옴)이란 어찌 까닭 없는 것이랴?」
[今其子孫奕世隆顯推爲吾東甲族餘慶之報豈無以也]

「매양 유집을 책상 위에 두고 때때로 펴 본다.」 [每置궤案時時披過]
(홍재(弘齋) 는 정종대왕의 별호이다)」


(參考追記)* 정조 임금(1752년생)은 저헌공(1415년생) 보다 337년 후의 분이지만 저헌공의 유집을 보고 '순후한 군자'라 하였다.
또 그 자손들이 현달하여 사람들이 ‘삼한 (三韓: 吾東) 갑족(甲族)’으로 추대 하는 것을 곧 저헌공의 여경지보(餘慶之報: 蔭德)라 인정하고,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이를 명확히 기록 하여 세상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이 아니었으면 앞으로 천추 만대를 두고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말은 '군중(群衆)에 떠 도는 믿을 수 없는 뜬소문'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책문중시(策問重試: 本試) 와 팔준도병서(八駿圖竝書) 재시(再試)
책문중시(策問重試) 의 책문은 과거(科擧)의 과목인 제술(製述) 의 하나로 계책을 묻는 시험(요즈음 말로 주관식문제), 중시(重試)는 문과(文科) 당하관(堂下官: 정3품下 이하 종6품까지)을 위한 승진시험으로 10년에 한번씩 실시했다.

영묘(英廟: 세종) 정묘년(丁卯年: 세종29년, 1447) 가을에 책문 중시(策問重試)를 베풀었는데 한꺼번에 합격한 자가 二十 여명(重試榜에는 19명)이고 그 중 우등한 자도 八명이나 되었다.
< 백옥(伯玉) 이석형(李石亨)의 중시대책(重試對策) >: (答案, 丁卯重試에 7人: 7등 *)
* 본 저헌공의 중시대책은 7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고관(考官)들이 우등자 8명에 대한 과차(科次) 결정을
임금(世宗)께 건의하여 팔준도병서(八駿圖竝書)를 과제로 재시험한 결과이고,
본 시험에서는 아래 8인이 모두 동등(同等)한 것이다.(공동1위)
成三問, 金淡, 李塏, 申叔舟, 朴彭年, 崔恒, 李石亨, 宋處寬.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법이 서면 폐단이 생기는 것이 예와 지금의 공통된 근심이다.」
[王若曰法立弊生古今之通患也]
(왕약왈법립폐생고금지통환야)
「동한(東漢: 後漢 수도 洛陽이 長安, 현西安의 동쪽에 있어 後漢을 東漢이라고도 부름) 은 도시기병(都試起兵: 관리들의 성적을 고시하고, 무사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제조, 후에 과거시험)은 폐단으로 인하여 군국(郡國)의 도위(都尉)를 없애고 거기재관(車騎材官: 兵車와 騎射를 맡은 軍官을 파(罷)하였다.」
[東漢因都試起兵之弊省軍國都尉罷車騎材官]
(동한인도시기병지폐성군국도위파거기재관)
「송태조(宋太祖)는 당(唐)나라 말기의 번진(藩鎭: 節度使) 의 강성(强盛)을 거울삼아 한 군사와 한가지 재물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조정(朝廷)에서 스스로 제재(制裁)하였다. 그러나 동한(東漢)은 안(內)이 무겁고(重) 밖이(外) 가벼운(朝廷의 權限이크고, 지방 官府의 힘이 미약한) 실오(失誤)가 있어 송나라믐 무략(武略)이 흥성(興盛)하지 못하는 근심이 있었다.」
[宋太祖覩唐末藩鎭之疆至一兵一財皆朝廷自制之然東漢有內重外輕之失宋有武略不競之患]
(송태조도당말진번지강지일병일재개조정자재지연동한유내중외경지실송유무략불경지환)
「한문제(漢文帝)는 가의(賈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음)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大臣)을 예우하여 형벌을 베풀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흐르는 폐단은 대신이 무함(誣陷: 없는 事實을 그럴듯하게 꾸미어서 남을 어려운 地境에 빠지게 함) 당해도 능히 스스로 호소하지(自懇) 못하였다.
[漢文納賈誼之言禮貌大臣不使施刑其流之弊大臣遭誣不能自懇]
(한문납가의지언예모대신불사시형디류지폐대신조무불능자간)
「당태종(唐太宗)은 신하를 예(禮)로써 대우하며 삼품(三品)이상은 세수(諸囚: 다른 罪囚) 와 함께 인접(引接:가까이 함)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제수는 인접할 수 있으나 귀신(貴臣)은 인접이 불가하여 오히려 손해가 많았다.」
[唐太宗待臣以禮三品以上不使與諸囚同引諸囚蒙引而貴臣反不見引所失多矣]
(당태종대신이례삼품이상불사여제수동인제수몽인이귀신반불견인소실다의)
「광무제(光武帝)는 전한(前漢)의 몇 대에 걸친 실권(失權: (임금이 권한을 잃고 권신이 국정을 좌지우지함) 을 거울로 삼아 삼공(三公)은 자라만 갖추고 정사(政事: 여기서는 任免權을 말함) 는 대각(臺閣)으로 돌렸다.」
「주의(注擬
: 官員을 임명할 때에 먼저 文官은 吏曹, 武官은 兵曹에서 임용예정자 수의 3배수[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하여 사람을 쓰고 버림은 예로부터 어려운 것이니 한(漢), 당(唐) 이후로는혹 재상이 이를 주관(主關)하고, 혹 전조(銓曹: 인사 銓橫을 담당하는 곳, 問官은 吏曹, 武官은 兵曹임) 가 이를 주관하여 서 득실(得失)이 능히 뒷 사람의 의논(批評)을 면치 못한다.」
[光武鑑前漢數世之失權三公備位政歸臺閣矣注擬用捨自古爲難唐以後惑宰相主之惑銓曹主之得失不能免後人之議]
(광무감전한수세지실숸삼공비위정귀대각의주의용사자고위수당이후혹재상주지혹전조주지득실불능면후지의)

「이 네가지 일은 모두 치도(治道: 나라를 다스리는 길) 에 관계가 있으니 그 상세함을 얻어 말할 수 있을까? 」(상세하게 답해주기 바란다는 뜻)
[此四事皆有關於治道其詳可得而言歟]
(차사사개유관어치도기상가득이언여)

「본조(本朝)는 고려의 사병(私兵)에 징계(懲戒)하여 이를 모두 혁파(革罷)하였는데 그 후에 대신이 사병의 이로움을 말하는 이가 있다.」
[本朝懲高麗私兵而盡革之其後大臣有言私兵之利]
(본조징고려사병이진혁지기후대신유언사병지리)
고려의 대신을 비욕(卑辱:: 얕보아 옥함) 한데에 징계하여 비록 죄과(罪過)가 있어도 그 몸에 추궁하지 말게 하고, 묻사람의 증언(證言)으로써 정하게 하였는데, 대신이 또 이르기를 뒷 세상에서 반드시 죄없이 무함을 입는자가 있다고 한다.」
[懲高麗卑辱大臣雖有罪過使不追身以衆證爲定大臣又云後世泌有無罪而被誣者]
(징고려비욕대싱수유죄과사불추신이중증위정대신우운후세비유무죄이피무자)
「고려 대신의 전정(專政: 專制政治) 에 징계하여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재결(裁決)하여 정부(政府)가 능히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대신이 말하기를 승정원(承政院)의 권한이 너무 무겁다고 한다.」
[懲高麗大臣之專政大小之事悉取裁決政府不能自斷大臣云承政院之權太重]
(징고려대신지전정대소지사실취재결정부불능자단대신운승정원지권태중)
「고려 정방(政房)의 외람(猥濫: 하는 짓이 分數에 넘침)의 폐단에 징계하여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이를 분장(分掌)하나 그 권한이 또한 무거우니 대신이 정방을 다시 설치하여서 제조(提調: 臨時職)가 임시로 낙점(落點)케 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
[懲高麗政房猥濫之弊而吏兵曹分掌之其權亦重大臣有欲復設政房提調臨時落點者所議]
(징고려정방외람지폐이이병조분장지기권역중대신유욕복설정방제조임시낙점자소의)

「의논하는 바 네 가지 계책이 옳은자? 그른가? 의논 할 만한 것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널리 사책(史策)에 통달하여 시조(時措: 그 때의 실정에 맞게 일을 행함)의 마땅함을 밝게 알 것이니 각각 그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四者之策然乎否乎抑有可議者歟子大夫博通史策深燭時措之宜其各悉心以對]
(사자지책연호부호억유가의자여자대부박통사책심촉시차지의기각실심이대)

「신은 들으니「때(時)는 고금(古今)이 있으나 이치(理致: 事物의 正當한 條理, 또는, 道理에 맞는 趣旨)>는 고금이 없으며, 세상(世)은 전후(前後)가 있으나 다스림을 전후가 없으니, 옛 사람의 득실(得失)의 까닭을 보면 오늘의 시대에 징험(徵驗: 어떤 徵候나 또는 徵兆를 經驗함)할 수 있고, 선세(先世)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보면 뒷 세상의 거울 삼고 하였습니다.」
[臣聞時有古今而理無古今世有前後而治無前候觀古人得失之由可以驗於今觀先世治亂之跡可以鑑於後]
(신문시유고금이리무고금세유전후이치무전후관고인득실지뉴가이험어금관선세치란지적가이감어후)
「그렇다면 어제 무슨 법이 존대(前代)의 다스림에 있지 않고 무슨 거울삼을 것이 전대의 어지러움있지 않았는지 그 다스림을 보아서 이를 행하고, 그 어지러움은 이를 버려서 오늘에 참작(參酌)하여 손익(損益: 버리고 보태고) 할 뿐입니다.」(耳: 뿐[따름]이다)
[然則今當何法不在前代之治乎今當何鑑不在前代之亂乎觀其治者而行之亂者而去之在今日參酌損益之耳]
(연즉금당하법부재전대지치호금당하감부재전대지란호관기치자이행지란자이거지재금일참작손익지이)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신등을 대궐 뜰로 나오게 하라, 옛 법의 폐단으로 하는 바로써 물으시고 시정(時政)의 의논 할 만한 것으로써 이에 이으시오며 이어 말씀하시기를 "그대 대부(大夫)들은 사적(史籍)에 널리 통달하였으니 그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하셨습니다.」
[恭惟 主上殿下進臣等于庭策之以古法之所弊繼之以時政之可議乃曰子大夫博通史籍其悉心以對]
(공유 주상전하진신등우정책이이고법지소폐계지이시정지가의내왈자대부박통사적기실심이대)
「성상(聖上)의 물으심이 이에 미치시니 신이 비록 우매(愚昧)하오나 감히 그 만분의 일이라도 성심(誠心)을 다하지 않으리까?」
[聖問及此臣雖愚昧敢不竭其萬一]
(성문급차신수우매감불경갈기만일) (: 聲 상부 아래 缶, 비다, 공허하다. 다하다, 보이다)

(1) 「성책(聖策)의 법이 새로서면 폐단이 생긴다」에서 「송나라 무략(武略)이 흥성하지 않은 근심이 있었다.」에 이르는 대문에 대하여
[聖策曰法立弊生止宋有武略不競之患]
(성책왈법립폐생지송유무략불경지환)
(對策) 「신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서한(西漢: 前漢)의 초기에 열군(列郡)에 도위(都尉)와 재관(材官)이 있어 해마다 가을에 각각 그 방면(方)의 익힌(習) 바로써 그 전최(殿最
: 성적의 優劣, 高下)를 고과(考課)하였는데, 광무제 때 이르러 적의(翟義)의 난(亂)이 도시(都試: 무사 선발을 위한 특별시험)의 군사에서 일으남에 깊이 징계하여 드디어 그 법을 파기(罷)하였습나다. 」
[臣謂西漢之初列郡有都尉材官每歲之秋各以其方之所習而課其殿最至光武深懲翟義之亂起於都試之兵而遂罷其法]
(신위서한지초열군유도위재관매세지추각이기방지소습이과기번최지광무심징적의지난기어도시기병이수파기법)
「송 태조는 이균(李筠: 후주의 장수로서 송태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음)과 이중진(李重進: 李筠과 同)을 죽이고 말하기를 「당(唐)나라의 참절(僭竊: 분에 넘치는 자리에 있음)이 서로 이음(相踵)은 모두 외방(外方)의 권력에 말미암은 것이다.」(由) 하고 그 조보(趙普: 宋 초기 名臣)도 또한 그 뜻을 미봉(彌縫)하여 그 전곡(錢穀)을 제약(制約)하고, 그 정병(精兵)을 거두어서 모두 조정으로 모았으니 이것이 어찌 징계로서는 너무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宋太祖誅李筠李重進而謂唐之僭竊相踪皆由外權趙普亦彌縫其意制其錢穀收其精兵而皆聚於朝廷是豈非懲羹之太甚乎]
(송태조주이균이중진이위당지참절상종개유외권조보역미봉기의제기전곡수기정병이개취어조정시기비징갱지태심호)
「대저(夫) 동한(東漢: 後漢)의 잃고 잃지 않음은 도시(都試)에 잃지 않고 내중(內重: 지방관의 권한을 깎아 조정의 권한이 무거워짐)의 폐단으로 잃게 되고, 조송(趙宋: 趙氏의 宋나라)의 위태로움은 번진(藩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략(武略)의 소루(疎漏: 소홀하거나 비밀이 새어나감)로 위태로워져 마침내 한(漢)나라로 하여금 암환(宦: 宦官)의 내홍(內訌)을 면치 못하고, 송나라는 두 임금이 구속 (흠종 때 금의 침략으로 홍종과 휘종이 잡혀감)당하였으니 탄식함을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夫東漢之失不失於都試而失於內重之弊趙宋之危不危於藩鎭而危於武略之疎卒使漢不免宦之內訌宋不免二帝之見拘可勝歎哉]
(부동한지실부실어도시이실어내중지폐조송지위불위번진이위어무략지소졸사한불면암환지내홍송불면이제지견구가승탄재) (돌: 水 삼점변에 突, 흐르다, 이르다.)(암: 門 안에 唵의 右部, 고자, 환관)

(2) 성상의 책문에「한문제(漢文帝)가 가의(賈誼)의 받아드려서 잃은 바(失)가 많았다」
[聖策曰漢文納賈誼之言所失多矣]
(성책왈한문납가의지언소실다의)
(對策) 「신은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의는 시폐(時弊
: 그 時代의 弊端, 나쁜 風習) 를 통곡하고, 대신을 매질하며 욕한 과실(過失)을 깊이 탄식하여서 당지염폐(堂地廉陛: 賈誼의 상소문에 나오는 말, 堂 즉 임금이 높으면 地 즉 衆庶가 멀어져 郡臣이 받들수가 없고, 堂이 낮으면 郡庶가 업신여긴디는 뜻)에 비유와 (보궤: 竹製品 祭器)를 닦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가의의 계책이 잘되지 않은 것(不善)이며, 문제(文帝)가 이 말을 받아드린 것이 좋지 않는 것(不美) 입니다.
[臣謂賈誼痛哭時弊深歎笞辱大臣之失至有堂地廉陛之喩보궤不修之說賈誼之策非不善也文帝之納不美也]
(신위가의통곡시폐심탄태용대신지실지유당지겸폐지유보궤불수지설가의지책비줄선야문제납불미야)
그러나 장사(長沙: 중국 湖南省 省都)에 내침을 당하였으니 가의의 말이 모두 행하여진 것입니까? 문제의 받아들임이 과연 진심(眞心)이란 말입니까? [然長沙見謫賈誼之言果眞行欽文帝之納果眞心歟]
마침내 대신으로 무함을 입고도 변백(辨白: 옳고 그름을 가리어 事理를 밝힘)함이 없이 원통한 마음을 품고 굴욕(屈辱)을 받아 한(恨)을 먹음어서 주륙(誅戮: : 죄로 몰아 죽임)당하였으니 양운(楊:: 前漢 左曹와 中郞將이 이르렀으나 선제가 폐서인하였다가 사이가 나쁜 戴長樂의 모함으로 요참형을 당함), 소만지(蕭望之: 전한 말 재상, 석현등의 무함으로 자살함)의 일 같은 것이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가생(賈生: 賈誼)의 허물(罪)이겠습니까?
[卒使大臣被誣而無有卞白含受屈飮恨就戮者有如楊望之之事宜矣是豈賈生之罪歟]
(졸사대신피무이무유변백함원수굴음한취륙자유여양운만지지사의의시기가생지죄여)
당태종이 대신을 높이 예우하여서 차라리 부끄럽게 이를 책할 지언정 형벌을 더함이 없었으며, 제수(諸囚)와 함께 인접(引接)하지 않았으니 그 뜻이 아름답고 이를만(可謂) 합니다.
[唐太宗尊禮大臣寧以恥責之而無以刑加之使不與諸囚同引其意可謂美矣]
(당태종존례대신녕이치책지이형가지사불여제수동인기의가위미의)
그러니 제수는 인접을 입어 스스로 변백하지만 대신은 인접하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유계(劉: 唐 初期 宰相), 장양(張亮: 唐 初期 大臣)의 일 같은 것이 있었으니 또한 탄식할만 합니다. 이것이 어찌 법의 허물이란 말입니까?
[然諸囚蒙引自白而大臣反不見如劉張亮之事亦可歎矣是豈法之過歟]
(연제수몽인자백이대신반불견여유계장량지사역가탄의시기법지과여)
태종은 대신을 높여 예우하는 이름만 있고, 대신을 높여 예우하는 실(實)이 없어서 곡직(曲直)을 분별하지 않고 함부로 형벌을 행하였으니 태종을 의논이 없었음을 얻지 못합니다.
[太宗有尊禮大臣之名無尊禮大臣之實不辨曲直妄施其刑太宗不得無議矣]
(태종유존례대신지명무존례대신지실불변곡직망시기형태종부득무의의)(보궤: 竹 아래 甫 아래 皿, 竹 아래 艮 아래 皿)(: 心변에 軍 )(: font size=2> 상부 점 일획 없음)(: 水 삼점변 自)

(3) 성상의 책문의「광무제(光武宰)가 전한(前漢) 몇대의 폐단을 거울삼아 정사를 대각(臺閣)으로 돌렸다. 」에 이르는 대문에서
[聖策曰 光武鑑前漢數世之弊止政歸臺閣矣]
(성책왈 광무감전한수세지폐지정귀대각의)
「신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서한(西漢) 때에 전분(田: 西漢 初期 사람)이 손(賓客)을 불러오게하고, 인재(人才)를 천진(薦進)하여 가산(家産)을 일으킴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른 것 같은 것은 진실로 전권의 실오(專權之失
: 임금은 권한이 없고 대신이 정권을 맘대로함) 가 있는 것이니, 광무제(光武帝)의 징계하는 바가 마땅합니다.
[臣謂西漢之時如田之招徠賓客薦進人才起家至二千石在當時固有專權之失光武之所懲宜矣]
(신위서한지시여유분지초래빈객천진인재기가지이천석재당시고유전권지실광무지소징의의)
그러나 삼공(三公)에게 맡기지 않고 정사를 대각(臺閣)으로 돌리어 해가 늦도록 일을 아뢰어 천자가 먹는 것을 잊고(忘食)), 대신(大臣)은 한 낱 빈자리만 차지하였습니다. 염철(鹽鐵)의 의논(鹽鐵之議: 서한 무제 때 劉僅, 桑興羊 등이 건의한 소금과 쇠의 專賣에 관한 토의)에 천추(千秋: 당시 승상 車千秋)) 는 입을 다물어 말하지 않았고, 창음왕(昌邑王: 서한의 昭帝의 뒤를 이었으나 無道하여 곧 廢位됨)의 일에 장창(張敞)은 묵묵부답하고 관여하지 않았으니 어찌 대각(臺閣)의 말이 그들(車千秋, 張敞 등) 보다도 심함(甚)이 있었음을 알겠습니까? 」.
[然不任三公而政歸臺閣奏事日天子忘食而大臣徒取充位鹽鐵之議千秋囊括不言昌邑之事張敞緘默不與豈知臺閣之言有甚於彼乎]
(연불임삼공이정귀대각주사일간천자망식이대신도취충위염척지의천추낭괄북언창읍지사장창함묵불여기지대각지언유심어피호) (: 蟲변에 分)

(4) 성상의 책문의「주의(注擬: 官員 임명 때 文官은 吏曹, 武官은 兵曹에서 3배수(三望)를 올리던 것.) 하여 쓰고 버리는 것에서부터 그 상세함을 얻어 들을 수 있을까? 에 이르는 대문에 대하여」
[聖策曰注擬用捨止其詳可得而言歟]
(성책왈주의용사지기상가득이언여)
「신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漢: 西漢)나라는 고조(高祖), 문제(文帝)에서부터 이천석(二千石: 太守級 祿俸) 이상은 승상(丞相)이 주의(注擬)이 오로지(專) 하여서 여러 경(卿: 尙書級)이 권한을 문란케 하는 폐단이 없었고, 한나라가 동쪽(洛陽)으로 옮기면서부터(光武帝, 東漢) 전선(銓選: 銓橫)의 임무가 오로지 상서(尙書)에게 있었으며, 당(唐)나라는 칙서(勅書: 임금의 명령서)로 관직을 임명하여서 재상이 임금에게 아뢰면서 의논 할 수 있었는데 개원(開元: 唐玄宗 年號) 이후는 기거(起居: 人材起用), 보유(補遺: 缺員補充)가 모두 전조(銓曹: 吏曹,兵曹)로 돌아가서 혹 득(得)도 되고, 혹 실(失)도 되어 서로 경중(經重)이 없게 되었으니 어찌 뒷사람들의 의논이 없겠습니까?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정권(政權)은 하루도 조정(朝廷)있지 않아서는 아니된다. 조정에 있으면 다스려지고, 대각에 있으면 어지러워진다"하였으니 진실로 바뀔 수 없는 의논입니다.
[臣謂漢自高文二千石以上丞相專之列卿無有紊權之弊自漢東銓選之任專在尙書唐有(勅)授而宰相奏議開元以後則起居補遺皆歸於銓曹或得或失互輕重寧無後人之議先儒有言曰政權不可一日不在朝廷在朝廷則治在臺閣則亂誠不易之論也]
(신위한자고문이천석이상승상전지열경무유문권이폐자한동전선지임전재상서당유칙(칙)수이재상주의개원이후칙기거보유개귀어전조혹득혹실호경중녕무후인지의선유유언왈정권불가일일부재조정재조정칙치재대각칙난성불역지논야)

(5)성상의 책문에「본조(本朝)는 고려(高麗) 사병(私兵)을 폐단을 징계하여 이를 모두 혁파(革罷) 하였는데 사병의 이로움을 말하는 자가 있다」에 이른는 대문 대하여」
[聖策曰本朝懲高麗私兵之弊止有言私兵之利者]
(성책왈본조징고려사병지폐제유언왈사병지리자)
「신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말기에 정권(政權)이 권신(권신)에게 있어서 각각 정병(精兵)을 거느려서 그 집을 보위(保衛)하고, 어진 신하와 굳센 병을 나누어 자기에게 붙이며, 굳은 굳은 갑옷과 예리한 병기를 집에 감추어 음(陰)으로 불궤(不軌)를 도모하여 방호(跋扈)하여서 제어하기 어려운 자가 있게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성인(聖人)의 집에 갑옷을 간직하지 않고, 고을에는 백 치(雉*)의 성(城)이 없다'는 교훈이 어찌하여 있는 것입니까?」
[臣謂高麗之季政在權臣各擁精兵以衛其門良臣勁卒分屬於己堅甲利兵各藏於家住住陰畜不軌至有跋扈難馭者是於聖人家不藏甲邑無百雉之城之訓爲何如哉]
(신위고려지계정재권신각옹정병이위기문양신경졸분속어기견삽리병각장어가주주음축궤지유발호난어자시어성인가부장읍무백치지성지훈위하여재)
하물며 문명(文明)하여 정치가 윤성(隆盛)할 때에 있어 전조(前朝)의 쇠미(衰微)한 폐법(弊法)을 뒤(발꿈치) 쫓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신은 사병의 계책을 드리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수레의 엎어진 바퀴 자국을 보고 이것을 밟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在 文明盛治之日重>前朝衰微之弊法而爲之可乎臣不知有獻私兵之策者是何意耶是無異見車之覆轍*而欲蹈之也]
(항재문명성치지일종전조쇠미지폐법이위지가호신부지유헌사병지책자시하이야시무이견거지복철이욕도지야)(: 두점변+兄).
신은 다만 망녕된 의경이 있으니 이제 경사(京師: 서울)의 숙위(宿衛) 군사는 정예(精銳)하고 숙련(熟鍊) 되었다고 이를 수 있읍니다만 저 변지(邊地)의 갑병(甲兵: 일반 병사)이 어찌 견리(堅利: 단단하고 예리함)하며, 사졸이 어찌 모두 정련(精鍊)하겠습니까?」
[臣但有妥意今京師宿衛之兵可謂精且鍊矣彼鄙之甲兵豈皆堅利士卒豈皆精鍊]
(신단유타의금경사숙위지병가위정차연의피비지갑병기개견리사졸기개정연)
오늘에 있어서는 비록 근심 할 것이 없다지만 옛 사람이 이르기를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쥐를 잡기 때문이다. 쥐가 없다고 하여 쥐를 잡지 못하는 고양이를 기를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제 비록 근심할 것 없지만, 어찌 근심이 없다 하여 정련(精鍊)하지 않은 군사로써 지킨단 말입니까?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 엎드려 빌건대 채택(採擇) 하소서.」
[在今日雖無可憂古人云養猫*所以捕鼠不可以無鼠而畜不捕之猫今雖無虞豈可以無虞而守以不精之卒乎此非細事伏惟採之]
(재금일수무가우고인운양묘소이포서불가이무서이축불포지묘금수무우기가이무우이수니부정지졸호치비세사복유채지)

* 백치의 성(百雉而城): 성곽(城廓)의 구분(春秋 公羊傳), 다섯 板을 堵(도: 담)라 하고(五坂而堵), 다섯 堵 를 雉(치: 성벽의 크기 단위. 길이 3丈, 높이 1丈)라고 하고.(五堵而雉), 百雉(백치: 길이 300丈 이상)를 城이라 한다(百雉而城).
* 覆轍(복철): 엎어진 수레바퀴. 전하여 옛 사람들의 실패한 자취를 뜻함.
*養猫(양묘)에 관한 다른 이야기: 정조5년(1781) 윤5월 26일 정조가 하교하기를 “도적을 체포하는 포도(捕盜) 관사(官司)를 설치하여 오로지 규찰하여 살피는 책임을 맡긴 것은 그 법의(法意)가 본래 긴중(緊重)한 것인데도 장신(將臣)이 된 자가 이를 하찮은 변모(弁?)로 여기는가 하면 포교나 포졸이 된 자들 가운데는 대개 성품이 못되어 예의와 염치를 모르며 함부로 행동하는 무뢰(無賴)들이 많은 탓으로 단속하여 체포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이에 도리어 숨겨주고 덮어주는 엄부(掩覆)하는 것이다.
고양이를 기르는 양묘(養猫)는 포서(捕鼠: 쥐를 잡음)하기 위한 것인데 쥐가 있어도 잡지 않는다면 그런 고양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지금의 포청(捕廳)이 실로 이와 비슷한 형국이다. 지금부터 반드시 도둑맞은 집에서는 먼저 즉시 해당 청(廳)에 가서 호소하는 한 편 해당 청에서는 또한 반드시 당 부(部)에 가서 고발하며 당 부는 한성부에 보고하게 하라.”하였다.


(6) 성상의 책문에「고려 대신을 비욕(卑辱)한 데에 징계하여」에서 「반드시 죄없이 무함을 입는 자가 있다」에 이르는 대문에 대하여
[聖策曰懲高麗之卑辱大臣止必有無罪而被誣者]
(성책왈징고려지비욕대신지필유무죄이피무자)
「신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의 대신을 비욕함은 족히 말 할 것 없습니다.우리 국조(國朝)께서는 그 몸에 추궁(追窮)하지 않게 하고, 혹 공문서(公文書)로 물어서 핵실(:사건의 실상을 조사함))하고, 혹 묻 사람의 증언(證言)으로써 변론(辨論)하니 이것이 우리국조의 아름다운 뜻입니다. 비록 죄 없이 무함을 입는 자가 있다 하여도 특히 백에 하나일 뿐이니 만일의 과실로써 좋은 법의 아름다운 뜻을 폐하여서는 안됩니다.?
이 계책을 드린 자는 발(足) 벤(
,자르다>) 을 보고 그 신을 폐하지(없애지) >않겠습니까?」
[臣謂高麗之卑辱大臣固不足言我 朝之不使追身或以公書問或以衆證辨論是我 朝尊禮大臣之美意雖有無罪被誣者特百中之一耳不可以萬一之失而廢其良法美意也獻是策者無乃見足之人而廢其구者乎]
(신위고려지비욕대신고부족언아 조지불사추신혹이공서문핵혹이중증변론시아 조존례대신지미의수유무죄피무자특백중지일이불가이만일지실이폐기양법비의야헌시책자무내견월족지인이폐기구자호)(: 西 아래 激 右部) (: 尸아래 人변에 樓의 右部)
「신은 망년된 의견이 있습니다. 형관(刑官)을 맡은 자는 심각(深刻: 일을 깊이 파고들어 생각하거나 追求)함)을 힘씀으로써 능함을 삼아서 한 번 그 관사(官司: 형옥을 맡은 관청)에 걸려들면 벗어나는 것이 드물고, 때로는 특별히 성상이 밝게 살펴 서 용서를 받는 자가 있습니다.이것이 어찌 다른 것이겠습니까? 유사(有司: 여기서는 지도자를 지칭)흔히 경(輕)한데에 책벌(策罰)을 입고, 중(重)한데서 견벌(譴罰: 허물을 꾸짖어 處罰함)을 받지 않기 때문임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옵니다. 엎드려 빌건대 살피소서」 [臣抑有妄意任刑官者務以深刻爲能一干攸司罕有得脫時有特蒙 聖上之明察而見其原宥者焉是豈哉有司多以失輕被責而無有失重而獲譴者也是非細故伏惟察之] (: 人변에 陀의 右部)

(7) 성상의 책문에「고려 대신의 전정(專政)에 징계하여」에서 「승정원의 권한이 너무 무겁다에 이르는 대문에 대하여」
[聖策曰懲高麗大臣專政止承政院持權大重]
(성책왈징고려대산전정지승정원특권대중)
「신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대신의 전정에 따른 잃음(失)을 말한다면 '한심스럽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신의 전정에 따른 잃음(失)은 성치(盛治: 정치가 융성한 것)의 시대에 있지않고 매양 쇠란(衰亂)의 세상에 나타났으니 이를 어거(馭車: 말부리기, 임금이 대신을 통솔함)함이 도리를 잃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일을 맡길 사람을 잃은 것입니까?」
[臣謂高麗大臣專政之失言之可謂於邑然大臣專政之失不在於盛治之時而每見於衰亂之世則豈馭之失其道耶抑任之失其人歟]
(신위고려대신전정지실언지가위어읍연대신전정지실부재어성치지시이매견어쇠란지세칙기어지실기조야억임지실기인여)
「옛 사람이 이르기를"어진이를 구하기에 부지런하고(勤於求賢), 사람을 얻음에 편안하다(逸於得人)"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의심나면 맡기지 말고(疑則勿任)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任則勿疑)" 하였으니 이미 대신의 지위에 두었으면 반드시 대신의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대신에게는 책무가 모이는 자리인데 어찌 일을 맡기지 않고 그 자리에 인원(員)만 채워서(備) 성상의 우슨(憂勤: 근심하여 마음이 고달픔)을 끼찬단 말입니까.」
[古人有言曰勤於求賢逸於得人又曰疑則勿任任則勿疑*旣置諸大臣之位則必有大臣之責矣大臣百責所萃則豈可不任以事而備員於其位以貽 聖上之憂勤也哉]
(고인유언왈근어구현일어득인우일의칙물임임칙뭉의기치제대신지위칙필유대신지책의대신백책소췌칙기가불임이사이비원어기위이태 성상지우근야재)
「승정원은 (성상의) 좌우에 가까이서 뫼시고 있으니 그 권한이 무거움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너무 지나친 잘못은 없으니 신은 말할 겨를(暇)이 없습니다.」
[政院近左右宜其權之重也然時無太過之失臣不暇言矣]
(정원일근좌우의기권지중야연시무태과지실신불가언의)

*疑則勿任任則勿疑(의즉물임임즉물의): 資治通鑑(자치통감)에 나오는 말, 이와 비슷한 말이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에도 있다. 疑人莫用(의인막용)用人勿疑(용인물의) 즉 사람을 의심하거든 쓰지를 말고, 사람을 쓰거든 의심하지를 말라.

(8) 「 성상의 책문에 고려 정방(政房)의 외람(猥濫: 하는 짓이 分數에 넘침)이 폐단에 징계하여」에서「때에 임하여 낙점하는자」에 이르는 대문에 대하여」
[聖策曰懲高麗政房猥濫之弊止落點者]
(설책왈징고려정방외람지폐지낙점자)
「신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조(前朝)의 정방의 외람(猥濫)된 폐단은 가슴아프다고 말 할 만합니다.
오늘날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관권(官權)이 또한 무겁습니다. 그러나 직무(職務)에 따른 권한이 또 이에 따르니 비록 낙점제조(落點提調*)인들 어찌 그 폐단이 없으리까.」

[臣謂前朝政房猥濫之弊可謂痛心矣今吏兵之官權亦重矣然職之所在權亦隨之雖落點提調豈無其弊]
(신위전조정방외람지폐가위통심의금이병지관권역중의연직지소재권역수지수낙점제조기무기폐)
이조와 병조에 맡긴다면 오직 하나의 이조와 병조 뿐이지만 임시로 낙점한다면 무릇 점(點)을 받을 수 있는 자의 평상시 분경(競*)이 또한 이에 갑절이나 될 것이니 이는 무거운 권한을 뭇 재상에게맡기는 것입니다.」
[委諸吏兵則惟吏兵耳臨時落點則凡可爲受點者常時之競亦倍之是則委重權於衆宰相也]
(위제이병칙유이병이임시낙점칙범가위수점자상시지분경역배지시칙위중권어중재상야)(: 원문은 아래 2개)
>「하나의 이조와 병조의 권한이 싫어서 뭇 재상에게 권한을 나누어 맡기는 것이 옳단 말입니까. 하물며 전조에 이미 징험한 일을 다시 밝은 시대에 행하여서는 아니됩니다」
[惡一吏兵之權而委權於重宰相可乎況前朝已驗之事不可復行於明時也]
(오일이병지권이위권어중재상가호항전조이험지사불가복행어명시야)

*落點提調(낙점제조): 吏曹에서 추천한 3인의 후보자(備三望) 중에서 적임자에 낙점하는 고위관리 임용절차에 의거 임명된 잡무 및 기술계통의 당상관이 없는 관아에 겸직으로 통솔하는 직책, 경국대전에 따르면 承文院, 奉常寺, 內醫院, 內資寺, 內贍寺, 司도寺, 禮賓寺,司贍寺, 軍資監, 濟用監, 司宰監, 司譯院, 典設司, 典艦司, 典涓司, 昭格署, 宗廟署, 社稷署, 平市署, 氷庫, 掌苑署, 司圃署, 典牲署, 司畜署, 造紙署, 惠民署, 圖?署, 典獄署, 活人署, 瓦署, 歸厚署 등에 1인, 宗簿寺, 校書館, 尙衣院, 司僕寺, 軍器寺, 繕工監, 掌樂院, 觀象監, 典醫監, 修城禁火司, 文昭殿에 각 2인, 司饔院에 4인, 延恩殿, 문소전 등 에 다수가 있었음.
*奔競(분경): 제조는 임시직이고 재상중에서 이를 임명하게 되어 어느 재상이 제조에 임명 할 지 모르니 사람들이 먼저 알아서 손을 써려고 여러 재상들을 경쟁적으로 찾아 다님.

성상의 책문에「의논하는 바 네가지의 계책 」에서「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에 이르는 대문에 대하여」
[聖策曰所議四者之策止悉心以對]
(성책왈소의사자지책실심이대)
「신은 말씀드리겠습니다. 네가지는 모두 옛 사람이 이미 행한 자취이니 오늘 의논하는 바 일과 성책(聖策)의 물으신 바에 대하여 신이 이미 어리석은 말씀을 대략 올렸으나 능히 채납(採納)될 수 있을런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臣謂四者皆古人已行之跡而今日所議之事 聖策所問臣旣略獻說第未知能爲可採乎]
(신위사자개고인이행지적이금일소의지사 성책소문김기약헌고설제미지능위가채호)>(: 鼓 아래 目)
「소자(蘇子: 宋나라 蘇軾)가 말하기를 "천하에 일이 없으면 공경(公卿)의 말이 홍모(鴻毛: 기러기 깃털)보다도 가볍고 천하에 일이 있으면 필부(匹夫)의 말이 태산보다도 무겁다"고 하였으니 국가가 무사한 때에 이를 말 하는 것은모두 듣기 싫어함을 위하여 진술(陳述)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한 것입니다」
[蘇子有言曰天下無事公卿之言輕於鴻毛天下有事匹夫之言重於太山當國家無事之時言之者皆爲厭聞陳設固其宜也]
(소자유언왈천하무사공경지언경어홍모천하유사필부지언중어태산당국가무사지시언지자개위압문진설고기의야)
「신은 편(篇) 끝에 있어 감히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간언(諫言)에 쫓기는 한고조(漢高祖)와 같이 한다면 세상에 장자방(張子房)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고, 말을 좋아하기를 당태종(唐太宗)과 같이 한다면 시상에 위정공(魏鄭公: 魏徵)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습니다. 선비기 세상에 태어나서 그 누가 밝은 임금의 지우(知遇: 지기의 人格이나 學識을 남이 알고서 잘 待遇함)를 맺어서 당세(當世)의 일을 논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
[臣於篇終敢有獻焉從諫若漢高不患世無張子房好言如唐宗不患世無魏鄭公士生於世執不欲結明主知談當世事乎]
(신어편종감유언종간약한고불환세무정자방호언여당종불환세무위정공사생라세집불욕결명주지담당세사호)
「그러나 대정(大庭: 대궐의 뜰, 임금을 지칭)의 계책을 한 번 진술하여서 강도지명(江都之命)이 따라 내리고, 불골의 표(佛骨之表)를 올려서 조양(潮陽)의 견벌(譴罰)이 곧 이르러서 드디어 말을 하면 기휘(忌諱)에 저촉(抵觸)된다는 염려가 깊어져서 순종으로 남의 환심을 얻는 꽤에 더욱 익숙하게 만들었으니, 바른 의논이 들리지 않고 아첨하는 말이 날로 나오는 것은 결코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然大庭之策一陳而江都之命*隨下佛骨之表*一上而潮陽之譴施至遂使轉觸諱*之慮一深唯阿取容之計益熟論不聞而言曰進深非國家之福也]
(연대정지책일진이강도지명수하불골지표일상이조양지견시지수사전후촉휘지려일심유아취용지계익숙당논붕문이수언일진심베국가지복야)
「그렇기 때문에 신은 말씀드리기를 "천하의 일은 폐단을 제거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이를 구제할 방도(方道)가 없음을 근심하며, 이를 구제할 방도(方道)가 없음을 근심하지 않고, 말을 쓰지 않음(言之不用)을 근심한다"고 합니다. 신이 어찌 신이 말 한 바가 능히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며 능히 당시의 쓰임이 됨을 알겠습니까? 꼴꾼이나 나무꾼의 말도 옛 사람이 취한바 있으며, 미친 사나이의 말도 성인이 채택한 바 있아오니, 신의 의논 드림이 어찌 모두 보익(補益)됨이 없으리까. 엎드려 빌건대 성명(聖明)으로 재단(裁斷)하소서」
[臣故曰天下之事不患於弊之未去而患於救之無方不患於救之無方而患於言之不用臣豈知臣之所言能救當時之弊能爲當時之用也然芻之言古人所採狂夫之言聖人所擇臣之所獻豈盡無補哉伏惟 聖裁]
(싱고왈천하지사불환어폐지미거이환어구이무방줄환어구지무방이환어언지불용싱기지신지소언능구당시지폐능위당시지용연추요지언고인소채광부지언성인소택신지소헌기진무보재복유 성재)(: 艸 아래 堯)

* 江都之命(강도지명): 동중서(董仲舒) 한경제(漢景帝) 때 박사의 직위를 받아 처음으로 관직에 들어가 그 다음인 한무제 때 정치의 올바른 지침에 대해 널리 대책을 써 올리도록 한 데 응하여 그가 올린“천인삼책(天人三策)”이 채택되어 오경박사를 두고 명당과 태학을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유교 국교화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나중에 '대정지책(大庭之策)'이라는 표문을 올렸다가 강도(江都: 현 양주)로 좌천된 고사.
* 佛骨之表(불골지표): 당송팔대가(당송팔대가)의 첫째로 꼽히는 한유(韓愈: 서기 768-824)는 자 퇴지(退之), 당나라 문학가, 사상가, 철학가, 정치가로서 경조윤, 병부/이부시랑을 역임했다. 서기819년(당 憲宗12년)에 독실한 불교신자인 헌종이 불골(佛骨: 부처의 유골, 사리)을 궁중에 들이는 행사를 벌이자 당시 불교이 폐해가 심각함을 느낀 한유가 이를 극구 만류하는 간불rhf표(諫佛骨表)를 올렸다가 황제의 미움을 사서 조주지사로 좌천된 사건.
* 觸諱(촉휘): 휘자(諱字)는 기휘(忌諱), 피휘(避諱)라고도 하며, 기피하다. 꺼리다. 금하다. 금물로 여기다. 금기. 터부(taboo) 등의 뜻. 조선조 임금의 이름이나 높은 관직자 또는 선조의 이름자를 글로 쓰거나 말로 나타내기를 기피하는 관습. 휘자 대신 자(字), 호(號), 시호(諡號) 봉호(封號) 등 다른 호칭으로 대체하여 쓰거나, '○字 ○字' 와 같이 휘자의 글자에 '字'자를 붙여서 쓰는 관습이 전해져 왔다.
[조선조 임금의 이름(諱字): 태조: 旦(단), 정종: 日+敬(경), 태종: 芳遠(방원), 세종: 被의 左부+ 陶의 右부(도), 문종: 珣(순), 단종: 弘暉(홍휘), 세조: 柔(유), 예종: 晄(황), 성종: 徒의 右부+羽(혈), 연산군: 水(三点)변+隆(융), 중종: 心변+譯의 右부(역), 인종: 山+浩의 右부(호), 명종: 山+桓의 右부(환), 선조: 日+公(연), 광해군: 琿(혼), 인조: 悰(종), 효종: 淏(호), 현종: 木+淵의 右부(원), 숙종: 火+諄의 右부(순), 경종: 日+勻(균), 영조: 昑(금), 정조: 示+示(산), 순조: 王+公(공), 헌종: 奐(환), 철종: 日 아래弁(변), 고종: 熙상부 아래火(희), 순종: 拓(척)]
< 팔준도병서(八駿圖竝書) 재시(再試) >
팔준도병서(八駿圖竝書)를 과제로 우등한 여덟 분만 再試)
위 책문중시에서 고관(考官)들이 급제 순위의 고하(高下)를 나누기가 곤란하여 임금에게 과차(科次)를 정하는 문제를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여덟 사람에게 다시 시험을 치를 것을 명하였다.

임금은 팔준도(八駿圖
: 태조가 고려 장수 이성계로써 북으로 野人, 남으로 倭寇의 준동을 토벌하기 위해 타고 다닌 8마리 駿馬를 당시 도화서 畵員 安堅이 그린 그림, 見下) 를 과제(科題)로 삼아 병서(竝書: 여기서는 ‘그림에 나란히 이어 쓴 글’을 말함)전(箋), 부(賦), 시(詩), 명(銘), 송(頌) 중에서 각자의 취향대 로 짓게 하였다.
팔준도첩에 그려진 팔준마(八駿馬) 관련 자료
이름 산지 행적/이름의 의미 비고
1.橫雲
(횡운골)
여진
(女眞)
홍건적을 토벌할 때 탔던 말,
화살 2대 맞음
'구름을 가르는 솔골매'
갈기/꼬리 검은색
몸통 흰색
2.游麟靑
(유린청)
함흥
(咸興)
오라(兀剌) 잡고, 해주에서 싸우고,
운봉에서 왜구 토벌 승전 때 탔던 말
화살 3대 맞음, 31세로 죽을 때 석조관(石槽棺)
'기린처럼 노니는 푸른 말'
푸른색(靑)
3.追風烏
(추풍오)
여진
(女眞)
화살 1대 맞음
'바람을 쫓아가는 까마귀'
검은색(黑)
4.發雷
(발뢰자)
안변
(安邊)
'벼락을 내뿜는 붉은 말' 붉은흙색(赤)
5.龍騰紫
(용등자)
단천
(端川)
해주에서 왜구 토벌 때 탔던 말
화살 1대 맞음
'용이 날으는 듯한 자주빛 말'
자색(紫)
6.凝霜白
(응상백)
제주
(濟州)
압록강에서 위화도회군 때 탔던 말
'서리가 응결된 듯한 흰색 말'
서리흰색(白)
7.獅子黃
(사자황)
강화
(江華)
지리산에서 왜구 토벌 때 탔던 말
'사자처럼 사나운 황생마'
사자노란색(黃)
8.玄豹 함흥
(咸興)
토아동(兎兒洞)에서 왜구 토벌 때 탔던 말
'검은 표범 같은 말'
검은 표범색(玄)
팔준도첩(八駿圖帖) 쌤플(游麟靑,유린청 )
(인터넷에서 수집(蒐集), 전재(轉載)
팔준마 그림에 이어 八駿圖竝書의 序와 獻詩를 기재한 것을 모아 圖帖을 만든 것으로 추정됨.
팔준마(八駿馬) 그림
橫雲鳥(횡운골)과 游麟靑(유린청)

추풍오(秋風烏)와 발뢰자(發雷者)

용등자(龍騰紫)와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과 현표(玄豹)

○ 재시(再試) 중 일담(逸談)
이 때 성근보(成謹甫: 成三問)「여기 있는 자들 중에서 이모(李某) 보다 두려운 자는 없다」 하며 장단(長短) 십여 구를 초 잡아 와서는 이백옥(李伯玉 : 李石亨)에게 무슨 체(體)로 짓느냐고 물었다.

백옥이 전(箋)이라고 대답하자 근보는 웃으면서 「칡베()와 명주(繪,회) 따위의 대귀(對句)로 짓는 것은 노유(老儒)들이 하는 짓인데 그대 또한 그것을 본받는가? 내가 지은 것은 이와 같다.」하고는 자신이 초잡은 것을 꺼내 보여주고 이백옥의 것도 보여 달라고 하였다.(: 絲 실사변 +希)

백옥의 글 첫 련(頭聯)은 「하늘이 도와서 임금을 내셨으니 성인은 천 년의 운수에 응했고, 땅 위에서 쓰이는 것은 말(馬)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신물(神物)이 일시에 재능을 바치도다.[天佑作之君聖人應千齡之運地用莫如馬神物效一時之能]」 이었다.

근보가 이를 보고 웃으면서 「대(對)는 잘 되었지만 말(馬)과 우리 임금을 대로 지었으니 체모가 없지 않은가? 신하로서는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남에게 전해서는 안 될 듯하다」하고는 무심히 가버렸다.

백옥은 이 때문에 장률(長律: 漢詩에서 배율 五言이나 七言의 對聯을 여섯 개 이상 늘어놓은 시, 長詩)로 고쳐 지었는데 근보가 이 사실을 엿보아 알고는 공이 지은 연귀를 사용하여 전(箋)을 지어 바쳤다.
발표를 하니 근보가 장원(壯元)을 차지하였고 백옥(伯玉)은 칠등(七等)이었으며 다른 사람이 지은 것들은 전(箋), 명(銘), 송(頌) 등이었는데 신범옹(申泛翁: 申叔舟)은 부(賦)를 지어 四등을 하였다.

혹자는 「시(詩)는 여러 체 중에서 그 격(格)이 가장 낮다」하는데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이튿날 아침 백옥은 관례에 따라 근보를 보고는 인사를 하고 나서 「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는데」하니 , 근보가 응수 하기를 「남에게 굽히 지 않던 자네 무릎을 내가 굽혔지」하여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 이야기는 지금끼까지 널리 전해져서 사문(斯文)은 아주 우스운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 재시(再試) 중 일담(逸談)은 樗軒集 82면 註⑮에 있어서 올리기는 하는데 眞僞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4.성삼문의 팔준도 병서」전문에 보면 저헌공이 초안했다는 「天佑作之君聖人---」하는구절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逸話가 訛傳(와전)인 듯하다.
丁卯同年重試榜(정묘동년중시방)-題八駿圖
丁卯年(세종29년,1447) 책문중시후 팔준도 병서 재시결과 후 발표
세종29년(1447) 중시와 팔준도병서를 시제로 재시까지 열어 확정된 과차에 따른 위 중시방(重試榜)에는
장원을 한 성삼문을 비롯하여 이개, 박팽년, 유성원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중 4분,

세조편에 줄서서 3정승(三政丞), 4공신(四功臣)의 영화를 누렸으나 사람들에게 변질 잘하는 숙주나문(녹두싹나물)로 기억될 신숙주,

* 3정승(三政丞):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 영의정(領議政)
* 4공신(四功臣): 정난 2등(靖難-단종원년, 皇甫仁 金宗瑞 잡음), 좌익 1등(佐翼: 세조원년, 死六臣 잡음),
익대 2등(翊戴: 예종원년, 南怡 康純 잡음), 좌리 1등(佐理: 성종 2년, 조선조 國基 튼튼)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있는 사이에 벌어진 단종복위 모의사건의 사육신에도 가담하지 못하고 먼데서 사육신을 두둔한 시(益山東軒韻)을 지었다가 체포되어 세조의 국문장에 나가 세조의 첫 심문을 시(李石亨詠詩以軒) 답하여 무혐의처분 받아 석방된 이석형.

호당에 뽑혀 진관사에서 함께 공부했던 여섯 분중 다섯분이 들어 있어 이분들에 대한 간단한 행적을 모아 표를 만들었다.
진관사 호당 사육신 주요 자료와 행적
호칭/본관 현직 생년/당년 문과급제 졸년/관직 비고
성삼문(成三問)
謹甫/梅竹軒
昌寧
수찬
(修撰)
정6품
세종2년
1418
26세
세종20년
1438
式年試
세조2년
(1456)
修撰/정6품
湖堂
死六臣
이 개(李塏)
淸甫/白玉軒
韓山
수찬
(修撰)
정6품
태종17년
1417
30세
세종18년
1436
別試
세조2년
(1456)
修撰/정6품
湖堂
死六臣
박팽년(朴彭年)
仁搜/醉琴軒
順天
교리
(校理)
정5품
태종17년
1417
30세
세종16년
1434
別試
세조2년
(1456)
刑參/종2품
湖堂
死六臣
유성원(柳誠源)
太初/琅
文化
박사
(博士)
정7품
(미 상) 세종26년
1444
式年試
세조2년
(1456)
直集賢殿/정4품
死六臣
신숙주(申叔舟)
泛翁/希賢堂
高靈
부교리
(副校理)
종5품
태종17년
1417
30세
세종21년
1439
式年試
성종6년
(1475)
領議政/정1품
三政丞
四功臣
湖堂
이석형(李石亨)
伯玉/樗軒
延安
응교
(應校)
정4품
태종15년
1415
32세
세종23년
1441
式年試
성종8년
(1477)
判中/종1품
生/進/文科
三壯元
湖堂
< 중시(重試) 주요 급제자의 명암(明暗) >
그러나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7대 왕위에 오르는 조선조 두번째 정치적 물구비를 만나 진관사 우정(友情)도, 팔준도 병서 책문 중시 선의의 경쟁도 다 세갈레로 쪼개져 버렸다.
○ 사육신(死六臣)
인수(仁搜) 박팽년(朴彭年), 근보(謹甫) 성삼문(成三 問), 중장(仲章) 하위지(河緯地), 청보(靑甫) 이개(李塏)
그리고 태초(太初) 柳誠源(유성원)은 세조에 맞서 단종 복위에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까운 생을 마감했지만 '만고 충신 사육신(死六臣)'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신숙주(申叔舟)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는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서장관(書狀官)에 기용된 것을 계기로 세조의 편에 서서 우,좌 영의정 삼정승(三政丞)과 정난 (靖難 2등), 좌익(佐翼 1등), 익대(翊戴 1등), 좌리(佐理 1등) 사공신(四功臣)을 다 차지하면서
'당태종에게 정국공(鄭國公) 위징(魏徵)이 있다면, 세조에게는 신숙주(申叔舟)'라 할 만큼 세조의 신임을 받으면서 한 생을 영화 속에서 누렸지만
변질되기 쉬운 숙주나물이 그의 표상이 되었으니 숙주나물이 제사상에 오르거나 반찬으로 밥상에 오를 때면 ‘변절자 숙주나물 신숙주’ 로 기억을 되새기게 되었다.

○ 이석형(李石亨)
백옥(伯玉) 이석형(李石亨)은 호를 ‘저헌(樗軒)’이라 하였는데 자는 ‘가죽나무’ (경상도에서 가죽자반으로 만들어 먹는 ‘가죽나무’는 ‘참죽나무’가 와전된 이름) 인데 옥편에 ‘악목불재(惡木不材)’ ‘재목으로 쓸 수 없는 악재(惡材)’ 라는 설명이 붙어 있고, 자로 시작하는 단어로 樗木(저목), 樗樂 (저력), 樗材(저재) 등은 ‘쓸모 없는 나무’, ‘무능한 사람’, ‘쓸모 없는 재목’ 이란 뜻으로 모두 부정적 뜻이기 때문에 자를 아호(雅號)의 글자로 쓴 것은 의외다.

그러나 저헌공의 생애를 상고해 보노라면 금방 수긍이 간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과거시험 삼장원(三壯元) 후 사간원 좌정언(정6품)에 남들보다 2직급이나 높은 파격적으로 보임되어 화려한 출발을 했고, 다음해에 호당(選湖堂)에 선발되었으며, 5년 후 중시(重試)에도 등과하여 초년 시절이 화려하 고 쟁쟁했다.
이어 세종24년-32년(9년)과 문종 2년 간에는 주로 집현전에서 부교리, 교리, 응교, 직제학 등 학자로써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 요(歷代兵要), 고려사(高麗史) 편수에 참여하는 등 세종대왕의 문화창 달에 훌륭히 일익을 담당하다가 단종3년에 12년 만에 집현전을 떠 나 첨지중추부사 겸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옮겼다.
세조가 즉위하자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로 나가 근무하면서 역대병요의 인쇄 발행을 맡아 세조2년 3월에 초판간행에 온 정력을 쏟았다.
저헌공은 여기까지는 격에 맞는 일을 맡아 즐겁게 복무하였고, 승진 도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전라 관찰사로 나가 익산을 순행하던 중 호당에서 함께 공부 하고, 집현전에서 함께 근무하고, 중시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절 친한 친구로 지냈던 박팽년, 이개, 성삼문, 하위지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가 나서 반역으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참담한 심경으로 이른바 익산동헌시를 지은 것이 ‘사육신을 두둔한 시’ 라고 고변되어 세조 앞에 압송, 국문을 받고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세조의 심문에 '李石亨寧詩以獻' 시로 답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무혐의처분되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후 저헌공은 오히려 세조로부터는 후대를 받게 된다.
어느 날 세조가 내전에서 중궁(中宮: 王后)과 함께 저헌공에게 진작(進爵: 加資)을 명하고, 중궁이 친히 어의(御衣) 1습(襲)을 저헌공에게 내리며, 전술한 바와 같이 궁녀 에게 명하여 전왕 때의 일인 저헌공의 삼장원을 칭송하는 삼장원사 (三壯元詞)를 지어 노래 부르면서 술을 권하게 하였는데 이후에도 내전에서 인견할 때마다 이렇게 하였다.
가자(加資)의 승급이 빨라 말년에는 보국숭록대부(정1품)와 직책이 판중추부사(종1품)에 까지 오르고, 좌리공신 책록과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에 봉해졌다.

하지만 공의 능력을 시기하고, 사육신과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트집 잡는 한명회등 소인배들의 견제 때문에 실권이 있는 정승(政丞), 판서 (判書), 문형(文衡: 大提學) 등의 직에는 보직되지 못하고, 중추부등 한직(閑職), 공주목사, 명나라 사신(使臣), 전국을 순회 하며 국정을 살피는 체찰사(體察使) 등 외직(外職)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 서 항상 권력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역시 전술한바와 같이 세월이 300년도 더 흐른 후 정조임금도 문집(文集)을 보고서 저헌공을 순후(醇厚)한 군자라 하였고, 세상사람들이 延安李氏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추대하는 것도 인정하면서 다 저헌공의 여경지보(餘慶之報)라고 본인의 문집 홍제정서(弘濟全書)에 명확히 기록해서 지금까지 후세 사람들이게 알려주고 있다.
< 이백옥(李伯玉: 樗軒 石亨)의 중시(重試) 재시(再試) 대책(對策) >
팔준도(八駿圖) 병서(竝書) 서문(序文)
신(臣)이 삼가 생각하건대, 천도(天道)가 유행(流行) 할 때에는 천둥이 울리고 비와 이슬이 내리는 등 조화의 작용을 헤아릴 수 없으나 그렇게 하는 목적은 만물을 기르기 위한 것에 불과 할 뿐입니다.
성인(聖人)이 흥이 날 때에는 뛰어난 인재로 보좌를 삼고 병혁 (兵革)으로 다스려서 그 신묘한 무용(武勇)을 대적할 자가 없으나 그렇게 하는 목적은 만민(萬民)을 구제하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臣竊惟天道之流行也雷霆以動之雨露以潤之造化不測以所以爲之不過曰養萬物耳聖人之作興也賢俊以輔之兵革以靖之神武莫敵而所以爲之不過曰救萬民而]
(신절유천도지유행야뢰절이동지우로이윤지조화불측이소이위지불과왈양만물이성인지작흥야현준이보지병혁이정지신무막적이소이위지불과왈구만민이)

하늘이 만물을 기르는 데에는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서 물(物)이 그 공에 참여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름을 타고 비를 뿜어 내어 온갖 만물을 기름지고 윤택하게 하는 것은 용의 능력입니다.
성인이 만민을 구제하는 데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서 물(物)이 그 공에 참여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험한 곳을 뛰어 넘고 때로 힘든 일을 수행하는 것은 말의 능력입니다.

[天之養萬物無所不至而物不能與其功乘雲噴雨膏澤庶類龍之用也聖人之救萬民無所不至而物不能與其功然超危歷險服勞一時馬之用也]
(양만물무소부지이물불능여기공승운분우고택서류용지용야성인지구만민무소부지이물불능여기공연초위역험복노일시마지용야)

주역(周易)의 건괘(乾卦)에서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이라 한 것이나, 곤괘(坤卦)에서 “암말의 정(牝馬之貞)”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쓰임으로는 용보다 나은 것이 없고, 땅에서 쓰임으로는 말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늘이 만물에게 은택을 베풀 때에 신룡(神龍)에게 의탁하지 않은 수 없다면 하늘이 만민을 위해 성인을 내실 제 어찌 이러한 준마(駿馬)를 내어 성인이 하는 일을 돕게하지 않겠습니까.

[易之乾曰飛龍在天坤曰牝馬之貞以此也天用莫如龍地用莫如馬天之澤萬物不能不託於神龍之用則天爲萬民而生聖人曷不生此駿馬以贊其功也]
(역지건왈비룡재천곤왈빈마지정이차야천용막여용지용막여마천지택만뭉불능불탁어신룡지용칙천위만민이생성인갈불생치준마이찬기공야)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는 신성(神聖)한 자(資)품으로 쇠약한 고려(高麗) 말기에 천인(天人)의 뜻에 따라 사방(四方)을 정토(征討) 하셨는데, 그 혼란한 가운데서도 뛰어난 공을 세운 것은 여덟 필의 준마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하늘이 성조(聖祖)에게 상서로움 을 나타내심에 있어 어찌 신이(神異)한 기린이나 본황 혹은 상서로운 벼나 지초(芝草)같은 징표가 없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 징표 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성인을 도와 대업(大業)을 맡기심에 있어서 필시 이렇게 훌륭한 말을 주어 유용할 재목을 삼으려 하셨으니 하늘의 두터운 보살핌을 여기에서 더욱 알 수가 있습니다.
[哉惟我 太祖以神聖之資當麗運之季應順天人征討四方창회襄之際效力輸功奇偉不凡其駿有八噫天之瑞我 聖祖豈無麒麟鳳凰之異也嘉禾芝草之祥也必以是焉其天佑 聖人付大業錫其非常之物而必以有用之材眷佑之隆於此益可見矣]
(재유아 태조이신성지자당려운지계응순천인정토사방창회양지제효력수공기위줄범기준유팔의천지서아 성조기무기린봉황지이야가화지초지상야필이시언기천우 성인부비대업석기비상지물이필이유용지재궝우지융어차익가견이)
(창회: 手변 倉, 手변+懷의 右部), (: 田 아래 ㅠ)

우리 성상께서는 국가를 태평스럽게 다스리시면서도 창업(創業) 할 때의 어려움을 잊지 아니하시어 드디어 팔준도(八駿圖)를 그리고 찬(贊)을 지어 무긍한 후세에 전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성조(성조)의 하늘과 짝하는 공열(功烈)을 높이 드러내어 후손들에게 억만세토록 창업의 공을 보존케 하는 귀감을 삼아주고자 해서였습니다. 아, 그 뜻이 지극합니다.
[恭惟 聖上運撫熙洽不忘創業之艱難遂命作圖著贊垂諸罔極其所以顯揚 聖祖配天之烈而爲億萬世持守盈成之戒者嗚呼至哉]
(공유 성상운무희치불망창업지탄수수명작도저찬수제망극기소이현양 성조배천지열이위억만세지수영성지계자명호지재)

신(臣)은 외람되이 재필(載筆)의 직(職)에 있으면서 이와 같이 성대한 일을 보았으므로 감히 문장이 졸렬하다는 핑계로 사양할 수가 없어 머리 조아려 절하고 삼가 다음과 같이 시(詩)를 지어 바칩니다.
[臣職載筆伏覩盛事不敢以文拙辭謹拜手稽首而獻詩曰]
(신직도재필복도성사불감이문졸사근배수계수이헌시왈)
(樗軒集 중에서)
팔준도(八駿圖) 병서(竝書) 헌시(獻詩)
憶昔高麗季 (억석고려계) 돌아보니 고려 말기에
漠然王氣衰 (막연왕기쇠) 왕기가 쇠하여 버렸네
邦家方 (방가방올얼) 나라는 바야흐로 위태로운데(: 의 좌변+의 우변)
黎庶政瘡痍 (여서정창이) 백성들은 도탄 속에 괴로웠었네
妖霧聯雙闕 (요무연쌍궐) 궁궐에는 요기(妖氣)가 서려있고
驚塵暗四 (경진암사수) 어지러운 기운은 세상 드리웠네(: 의 좌변+)
皇天方厭亂 (황천방염란) 난리 싫어하신 황천(皇天)의 뜻에
聖祖自膺期 (성조자응기) 성조(聖祖)께서 저절로 부응하셨네
德協三千衆 (덕협삼천중) 덕성은 삼천리의 백성과 합했고
忠扶五百基 (충부오백기) 충의는 오백년의 기업 닦았네
北驅沙塞靜 (북구사새정) 북방(北方)에 나아가니 변경(邊境)이 조용하고
南顧海波夷 (남고해파이) 남쪽을 돌아보니 해파(海波)가 조용하네
大義軍初返 (대의군초반) 대의(大義)를 위해 회군(回軍)을 하였고
凶劍一麾 (군흉검일휘) 뭇 간신들 한 칼로 베어버렸네(: 아래 =)
攀鱗多俊傑 (반린다준걸) 어지신 분 뒤따라 많은 준걸(俊傑) 모여들어
亦權奇 (분만역권기) 말갈기 떨치듯 힘차게도 달리누나(: +의 우변 아래
霜白色純潔 (상백색순결) 하이얀 서리(霜白) 같은 순결한 그 색이며 (凝霜白)
雲橫光陸離 (운횡광육리) 구름이 드리운(雲橫) 듯 빛나는 그 광채여(橫雲鳥)
逸蹄凌電發 (일제능전발) 번개 치는(發雷) 듯 힘차게 달리고 (發雷者)
猛質廻風追 (맹질회풍추) 용맹스런 기질은 바람(風)보다 날쌔다네(追風烏)
迅如 (교신여분표) 재빠른 행동은 표범(豹)이 나르는 듯(玄豹)(: +)(: 아래 2개)
犬변寧 是老獅 (성령시노사) 사나운 풍채는 늙은 사자(獅) 같네 (獅子黃)
麟靑何 (인청하교교) 인청마(麟靑馬) 모습은 어찌 그리 날래며(游麟靑)
龍紫 (용자경규규) 용자마(龍紫馬)도 한결같이 씩씩하네)(龍騰紫)(: 丙 아래)
際會誠非偶 (제회성비우) 우리 임금 만남은 우연이 아니니
應將必有爲 (응장필유위) 아마도 반드시 장한 일 이루리라
槍攘暫靡 (창양잠미궐) 난리 중엔 잠시도 흔들리지 않았고
跋涉屢超危 (발섭누초위) 산과 물 헤치면서 모든 험난 거쳤다네
服力人無異 (복력인무이) 일을 하는 것이 사람과 똑 같으니
論勛理所宜 (논원리소의) 공훈(功勳)을 논함은 마땅한 일이라네
恭惟熙洽運 (공유희흡운) 삼가 생각컨대 태평한 새 운수는
緬想創垂時 (면상창수시) 아마도 멀고 먼 창업 때 세움일지라
著贊詔文士 (저찬조문사) 찬(贊)을 지으라 문사(文士)들에 분부하고
圖形命畵師 (도형명화사) 형용을 그림은 화사(畵師)들에게 명했다네
斯須展 (사수전초폭) 잠간 펼쳐서 비단폭 바라보니(: 변+)
煥赫起蛟 (환혁기교리) 교룡(蛟龍)이 일어난 듯 눈부시게 빛나네(: 변+좌변)
烈精猶活 (름열정유활) 늠름한 정채(精采) 살아서 움직이듯(: 변+)
軒昻勢欲馳 (헌앙세욕치) 드높은 기상은 치달리는 형세라네
瘢痕雜成錦 (반흔잡성금) 상처 자국 어우러져 문채를 이루었고
慘憺細入錐 (참담세입추) 상처난 흔적 너무도 참담(慘憺)하네
百戰功 (백전공류적) 싸움터 마다마다에 공적(功跡)을 남겼으니(=留)
童 日在玆 (중동일재자) 우리 임금 날마다 여기에 눈을 두셨네
佳 恩旣厚 (폐가은기후) 베푸신 은혜 이미 두터웁고
朽索戒常持 (후삭계상지) 후삭(朽索)의 경계 항상 지니시네
豈爲當今玩 (기위당금완) 이것이 어찌 이제 만을 위함이랴
要傳後世知 (요전후세지) 후세까지 영원히 알도록 함이라네
臣才鄙拙 (내신재비졸) 신(臣) 재주 촌스럽고 부족하나(: 西 아래 의 받침)
再拜獻蕪詞 (재배헌무사) 삼가 재배(再拜)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樗軒集 중에서)
丁卯同年重試榜(정묘동년중시방) 장원(壯元) 작품
성삼문(成三問)의 팔준도(八駿圖) 병서(竝書)
< 서문(序文) >
모진추위(寒)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있고, 격동하는 물굽이 아래는 반드시 깊은 못이 있나니, 치란(治亂)이 서로 잇대는 것은 고금이 동일하다.[寒之後,必有陽春, 激湍之下,必有深潭, 治亂相承,古今同然](: 水 삼점변에 互, 차다, 몹시 춥다 )

옛날 고려 운수가 강하지 못하여 천명(天命)이 떠나버렸으니 위 아래가 차서(次序)를 잃어 시랑(豺狼*)이 득세하게 되고 문무(文武)가 향락만은 일삼아 난리가 일어나고 말았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인다.
'진(秦)나라의 사슴을 잃었으니 조박(操搏)의 업이 다 되었는데 우(禹)가 아니면 우리는 고기(魚)가 되었다’는 격이라 제안(濟安)의 책임이 어디로 돌아가리오.
[昔麗祚之不競,而天命之已去 上陵下替,縱豺狼以當道 文恬武嬉,致戎馬之生郊 蠢蠢黎烝,*塗炭 失秦之鹿, 操搏之業將窮,微禹其魚 濟安之策疇歸]
*시랑(豺狼): 늑대와 이리, 龍飛御天歌에서는 野人 곧 女眞을 시랑이라 표현.
*,: 여럿이 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오직 우리 태조(太祖*) 강헌(康獻) 지인(至仁) 계운(啓運) 성문(聖文) 신무(神武) 대왕은 천 년의 기회에 응하시고 상성(上聖)의 자품을 지니셨으며 실로 하늘이 내린 덕이시라 귀신과 더불어 꾀를 하사와 한 번 성냄을 떨치어 요승(妖僧)을 몰아내니 사직이 빈 터가 되지 아니하였고, 만전의 계획을 짜내서 홍건적(紅巾賊)을 무찌르니 종묘(宗廟)는 예와 같으며, 납씨(納氏: 나하추)를 몰아내고, 올자(兀刺)를 쳐서 태산(太山)으로 알(卵)을 누르기 보다 쉽고, 지리산에서 싸우고 운봉에서 이겼으니 거센 바람이 가랑잎 하나 쓸어내기 어려우랴 [惟我 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應天齡之期,挺上聖之資,實天生德 與神爲謀,赫一怒驅蘖僧而社稷不墟,出萬全殲紅賊而廟貌如故 走納氏征兀刺 太山固易壓卵 戰智異捷雲峯 疾風(難掃葉](: 言+巨)
* 이성계의 태조(太祖)는 묘호(廟號), 강헌(康獻: 나라의 사방에 우환이 없게하여 백성을 편안케하였다 安樂撫民=康, 충성에 앞장서고 임금에게 덕목을 바쳤다 嚮忠內德=獻)은 시호(諡號)이고, 지인(至仁: 지극히 어질다), 계운(啓運: 운명을 개척하다), 성문(聖文: 훌륭한 文德, 임금의 文德), 신무(神武: 대단히 뛰어난 武勇) 등은 존호(尊號)들이다.

토동(兎洞: 평양시 상원군 식송리에 있는 마을. 지형이 토끼우리처럼 생겼다 하여 토끼울이라고도 함)에서 말 안장을 끌러 놓으니 해로운 기운은 해전(海?)에서 사라졌고, 압록강에서 고삐를 돌리니 대의는 하나 별보다 빛났으며, 수십회의 전장(戰場)을 출입하는 동안에 한고조(漢高祖)처럼 발을 몇 번이나 문질렀던고, 천만리를 발섭(跋涉)하노라니 촉선주(蜀先主) 같이 볼기 살이 빠진 적이 오래였으며, 남쪽을 치면 북쪽이 원망하고, 큰 무리는 두려워하며 작은 무리는 기다리고 있으니 가는 곳마다 서로 경사로 여기며 능히 그 공을 이룰 줄 알았었네. [兎洞解鞍,害氣霽於海 鴨江回 ,大義昭於日星 出入數十戰,漢高祖足幾 跋涉千萬里,蜀先之久銷 南征北怨,大畏小懷 在攸而相慶,諒厥勳之克成] (: 山아래 顚의 중국식 표기), (: 絲사이車 아래 口), (: 手변 門), (: 두인변+ 祖의 右部)

5백 년에 성인이 나시니 칠덕(七德: 尊貴, 明賢, 庸勳, 長老, 愛親, 禮新, 親舊.)은 이미 5백 년을 가름하였고, 3천 마리의 말(암컷,牝)에 신물이 나타났으니 한 마음은 3천 마리에 협동되네, 달리는 걸음은 법도에 합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순히(순하게) 하며 그리움은 영(營)에 돌아가기에 간절하고 지혜는 희미한 길에 익숙하여 오늘의 액(厄)은 노력을 신빙할 만하니 내 채찍을 가리키면 바로 곧 건널 수 있으리, 사생의 의탁이 가벼운 것 아니기에 문, 무의 공이 더욱 빛나며 방방(彭彭: 많은 모양이다)은 주원(周原*)에 병행 할만하고,경경경경: 말이 매우 살지고 건장하다)은 노모(魯牡: 魯나라 숫컷 말)에 어찌 뒤떨어지랴. [五百年聖人作,七德旣代於五百 三千牝神物出,一心允協於三千 聘跡以合道,宛柔心而順人,戀切還營 智老迷路,今日厄努力可憑 吾鞭指涇涉斯倚,死生之托非輕,文武之公益彰 彭彭可幷於周原 경경豈後於魯牡] (경경:馬변+坰의 右部,馬변+坰의 右部)
* 주원(周原): 고대 중국, 주왕조(周王朝)의 고지(故地). 서안(西安)의 서쪽 약 100km, 위하(渭河)의 북쪽 기산(岐山) 남쪽 기슭의 지역. B.C 12세기경, 고공단부(古公亶父)가 빈에서 그 일족을 이끌고 이주해 와서 궁실, 종묘를 세운 사실이 『시경(詩經)』 「대아편(大雅編)」 등에 기록되어 있다.

태일(太一: 天地 萬物의 출현 또는 成立의 根源. 宇宙의 本體. 太乙, 太一星)이 정기를 모으매 천보(天寶)의 아끼지 아니함을 알겠고, 구오(九五: 天子의 자리. 易卦의 六爻 중 陽爻가 임금의 벼슬자리에 해당되는 象이어서 하는 말)의 때를 얻으니 곤정(坤貞: 坤卦의 貞正한 德, 王后의 덕을 가리킴.)에 응부하여 다함이 없으며, 활과 화살을 걸어 놓은 활집(집탁: 화살보관자루)에 걷어들이고, 신음하는 소리가 노래로 변하게 하며, 남쪽 오랑케가 제향(梯航: 梯山航海의 준말. 사다리 놓고 험한 산 넘어가고, 배 타고 바다 건너간다는 뜻. 使行을 의미.)으로 길을 통하고, 북쪽 풍속이 관대(冠帶: 관리의 公服, 官服裝)를 알게 되었으며, 만대의 수의(垂衣: 옷을 늘어뜨린다는 뜻,, 아무 일도 하지 않음,. 帝王의 無爲의 다스림을 칭송하는 말)를 열었으니 하늘의 상서가 오늘에 이르고 삼한을 안정하여 편히 쉬게(高枕: 높은 베개 베다, 安樂하고 근심이 없는 생활) 하였으니 “임금의 힘이 무엇이 나에게 있으리오”라는 말과 같네. 이것이 신무(神武)의 사벌(駟伐: 駟馬 수례를 타고 정벌함)하신 위엄이나 또한 권기(權奇: 뛰어남.여기서는 ‘말이 잘 달리는 모양’)의 내달린 효력을 얻은 것이니 물(物)이 어찌 짐작이 없으리오. 대개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太一精鍾,知天寶之不愛 九五時乘,符坤貞而無疆 弓矢於建탁,變呻吟爲謳歌 梯航南蠻,冠帶北俗 開萬代之垂衣,天休式至于今,奠三韓而高枕,帝力何有於我 是雖神武駟伐之威,亦獲權奇駿奔之效 物豈無知,時盖有待]((輯의 右部+戈),(: 土아래 갓머리아래 石 아래 木)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주상전하는 하늘의 총명을 법받으시고 조상의 대명(大明)을 이으시고 크고 어려운 책임을 담당하오매 뒤를 열어 이지러짐이 없게 하기를 생각하시고 즉위(卽位)의 예를 행하오매 차례를 계승하여 길이 잊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시며, 우러러 치실(室: 묵밭이 된 거처)의 노고를 생각하시고, 매양 갱장(羹墻: 敬慕하고 追念함)의 사모가 간절하시며 “제왕의 운(運)을 일으키는 것은 단독으로 성공하기 어렵고 인물의 협력이 있은 연후에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셨으므로 대려(帶礪)의 맹서가 이미 깊고 개유(盖: 덮고 가리다)의 은혜가 또한 융숭하였다. [恭惟我 主上殿下,憲天聰明,紹祖丕顯,遺大投艱,思啓後以罔缺,踐位行禮,念繼序而不忘, 仰惟)室之勞,每切羹墻之慕,謂帝王之興運,功難獨成,有人物之協力,事然後就,故帶礪*之盟旣深,而盖之恩亦隆](:艸 아래 輜의 右部, 묵밭), (:巾+推의 右部),
*帶礪 : 永久, “황하가 띠(帶)와 같이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礪)과 같이 작아질 때까지”

그러므로 여러 공(公)들은 일찍이 운대(雲臺: 觀象監의 別稱)에 초상이 있었었지만 팔준(八駿)은 아직도 소릉(昭陵: 분명한 무덤이 있는 것)의 열(列)없었으매 이에 윤음을 내리어 화사(繪事: 八駿圖 그림 그리는 일)를 거행하니 호두(虎頭: 범의 머리. 貴人의 相.)는 방박(磅?: 기세가 드높다)하여 옷을 풀어놓고 용함(龍?: 용암, 經外奇穴. 任脈의 鳩尾穴에서 1.5치 위에 있다.)은 서로 밀려 바다를 떠다니며 등골에 붉은 즙(汁)이 흐르니, 한로(汗勞: 汗血馬 獅子黃의 괴로움)의 태도가 완연하고, 화살이 흰 살에 박혔으니 전쟁을 치르고도 늠름하네. 솜씨에 따라서는 사골(死骨: 죽은사람/동물 뼈)도 일으킬 수 있고 눈에 접하면 고삐를 단속하게 한다. 다행히 후손이 한가할 때 관람한다면 부귀가 마상(馬上)에 서 얻은 것을 알 것이며, 곂 방석 위에 앉아서도 바람에 빗질하고 비에 목욕하던 때를 상상할 것이요 팔진미(八珍味)를 앞에 벌려 놓아도 콩죽 먹고 보리밥 먹던 날을 생각할 것이매 반우(盤盂: 접시와 사발)의 잠계(箴戒: 깨우쳐서 訓戒함)에 비하고 산수의 그림과 바꾸지 말면 대동(大東: 우리나라)의 팔준도 한 폭이 마땅히 저 시경(詩經)의 빈풍의 칠월편(風의 七月篇*)과 더불어 같이 갈 것이니 편안하게 쉴(歟休) 것이다. [故群公曾有雲臺之畵而,八駿尙無昭陵之列,乃降論音,乃擧繪事,虎頭磅簿而解衣,龍雜遝而離海,溝走赤瀋,宛爾汗勞之態 矢在白肉,凜乎戰之餘 隨手而死骨可作,寓目則朽索是戒 庶子孫爲燕閑之觀,知富貴由馬上之得 處重茵之上則想櫛風沐雨之時 羅八珍於前則思豆粥麥飯之日,比飯盂之有箴 勿山水而易圖,則知大東八駿之一幅,當與風七月而幷駕,歟休哉](: 나라이름 빈,인터넷 글자 없음)(: 犬변에 倚의 右部)
*風의 七月篇: 詩經의 國風에 있는 篇名,. 周 周公이 섭정을 그만두고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성왕(成王)을 등극시킨 뒤, 백성들의 농사짓는 어려움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지은 것임.

나르는 새가 치유(寺유:>날지 못하게 바뀌고)하고 충돌한 쥐가 패어(敗御: 패하여 통솔하며)하며 주목왕(周穆王*)이 서왕모(西王母)를 잔치하매 수레바퀴 자국이 온 누리를 두르고, 한나라가 이사(二師:釋迦如來와 多寶如來)를 포위하매 비만(飛輓:軍糧의 운반)이 국외에 도달하였으며, 말이 많다고 믿었으나 진(晉) 나라는 위태하지 않은 것 아니고, 사마(駟馬: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천 필이 되어도 제(齊) 나라 역시 칭송할 것이 없으며, 혹은 뜻을 상실하고 덕을 더럽히며, 혹은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병들게 하니,(일어날 수 없는 不可思議한 일들) 이는 다 제왕의 법칙을 황폐(荒廢)한 것이라 한갓 뒷날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飛鳥,突鼠敗御 周觴王母,轍迹遍於中 漢圍二師,飛輓達於域外 恃多馬而晉非不殆,富千駟而齊亦無稱 或喪志而累德,或勞民而病國 是皆 荒帝王之則,徒足爲後來之笑](:水 삼점변 兪),(: 갓머리 아래 環 右部)
* 주목왕(周穆王): 西周의 國君. 昭王의 아들. 55년 재위, 성은 姬, 이름은 滿. 일찍이 서쪽으로 犬戎을 쳐서 5王을 포로, 도읍을 太原으로 옮김. 楚를 시켜 동쪽 徐戎을 정벌. color=red>도山에서 諸侯들을 모음. 越을 공격하여 동쪽 九江까지 이름. 후세에 전하기를 그가 일찍 八駿馬를 얻어 천하를 周行했다고 전함. 『서경(書經)』『목천자전(穆天子傳)』에 그가 西遊할 때 西王母와 만난 일이 기록됨.(:水 삼점변 余).

아, 당(唐) 나라에서는 충성하고, 수(隋) 나라에서는 아첨하는 것을 보면 사람도 오히려 그렇거늘 쓰이면 범이 되고, 안 쓰이면 쥐가 된다 해서 물(物)을 어찌 족히 괴이하게 여기리오. 뒤의 임금이 (팔준도)그림을 보면 황조(皇祖: 태조)의 법을 받아 업(業)을 이을 것을 생각하고, 위에 말한 몇 임금을 보고 경계를 삼아 하루 가고 이틀 가도 이 마음을 잊지 않으면 실로 우리 조선은 만세의 복일 것입니다. [鳴呼忠於唐.於隨,人且猶然,用則虎不則鼠,物何足使後王觀此圖者,憲 皇祖而念厥紹 監數君而爲之戒,一日二日念玆在玆,則實我朝鮮萬世之福也](: 人변 二아래女),(: 心변 在)

신은 듣자오니, 선조를 현양(顯揚)하는 것은 효도의 극치요, 후세에 명시하는 것은 교화의 대도라 하옵니다. 착한 일이 있어도 알지 못하면, 밝지 못한 것이옵고, 알고서도 전하지 아니하면 어질지 못한 것이옵니다. 엎드려 뵈오니 전하는 공경을 다하여 조상을 높이시고, 은혜를 미루어 물(物)에 미치시며, 조상의 칭송하신 바를 좋게 여기시고, 또 조상의 위하신 바도 좋게 여기시와 오늘날 사모하는 마음을 품으시고, 한없는 아름다움(休)을 이뤘으나 또한 한없는 근심(恤)을 놓지 아니하여 후손들(後嗣들)이 지켜가는 것을 법규를 삼으시며, 효도(孝)와 공경(敬)과 함께 지극(隆)하시고 밝음(明)과 어지심(仁)을 모두 구비(俱全)하였으니, 가송(歌頌: 八駿圖竝書)의 제작이 정히 때를 만났을진대 찬양하는 말씀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臣聞 顯揚先祖孝之至,昭視後世敎之大 善而不知不明,知而 不傳不仁 伏覩 殿下,敬因尊祖,恩推及物,美所稱又美所爲寓,今日念慕之懷, 無彊休亦無彊恤,視後嗣持守之規,孝與敬而?隆,明且仁以俱全 歌頌之作, 維其時矣 贊敭之辭,惡可己乎]

신은 기술(技)이 검려(黔驢*)와 같이 짧고 학와노어(學訛魯魚*)의 잘못된 것도 밝힐 수가 없사오며 연대(燕臺*)의 어진이를 구함에 있어서는 천리의 재주가 아니어서 부끄럽사온데 한문(漢門)의 대조(待詔*)는 그릇되게 일고의 값을 올렸으나 노둔(駑鈍:미련하고 둔함)하여 비록 먼 곳을 갈 자격은 없사옵고, 닭의 울음과 개의 짖음이라도 제 기능을 다할 마음이 있사오며, 하물며 성공(聖功)을 포장하는 것은 직분상 당연히 할 일이옵기로 감히 우견을 다하여 효사(孝思)를 받들어 기술하오며, 말의 덕을 만에 하나나마 노래하여 큰 아름다움을 장래에 파전하려 하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올리는 것이옵니다.[顧臣技短黔驢,學訛魯魚 燕臺求賢,愧非千里之 漢門待詔,謬增一顧之價 駑鈍雖無資於致遠 鳴切有心於效能 鋪張於聖烈,是職之當爲 敢愚抱,奉述思孝 歌驥德之萬一,播鴻休於來今 謹拜手稽首而獻銘曰] (: 氷 두점변+兄),(: 수 삼점변+固)
*검려(黔驢): 보잘것없는 솜씨와 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옛 중국의 검주(黔州)에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나귀(驢)를 끌고 갔을 때, 그 울음소리가 크므로 범이 나귀를 보고 두려워하다가 유심히 살펴보니 나귀에게 별다른 힘이 없고 그 발길질도 신통하지 못함을 알고는 겁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나귀를 잡아먹어 버렸다는 데서 유래한다.
*학와노어(學訛魯魚): 學은 와전되고, 글은 魯자와 魚자를 구별하지 못할 만큼 서툴다.
*연대(燕臺): 燕昭王이 쌓은 坮=臺. 연 소왕이 어진 선비를 구하려 할 때 곽외(郭)가 말한 ‘선종외시(先從始) 해 보라는 권유에 따라 대를 쌓고 곽외를 스승으로 섬기니, 사방에서 어진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을 말함.( :人변 +畏)
*대조(待詔):①고려(高麗)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ㆍ한림원(翰林院)이 이속(吏屬), ②천자(天子)의 대명(大命)을 기다림
* 선종외시(先從始*): ①사물(事物)을 시작(始作)하려면, 우선 말을 꺼낸 자부터 착수(着手)해야 함. ②큰 일을 이루려면 먼저 작은 일부터 시작(始作)하여야 함)
< 헌전(獻箋) >
(횡운골)
橫雲鳥閑且佶(횡운골한차길) 횡운골이어! 익숙하고 건장하니
萬里血千金骨( (만리혈천금골) 만라의 한혈마(汗血馬)요 천금의 골품(骨品)이로세
驟度略滅若沒(취도약작멸약몰) 쏜살같이 약작(외나무다리)을 넘어 사라지는 듯이 하니(: 待의 左部 두인변+勺)
超攄四足無一蹶(초터사족무일궐) 네 굽을 들도 뛰어 한번도 고꾸리진 적 없네
我祖辛勤沐以節(아조신근목이절) 우리 임금 비바람 속에 분망하시던 날
乘危機時同倉卒(승위기시동창졸) 몇 번이나 함께 위태한 고비를 넘겼던가
基我丕丕有今日(기아비비금일) 우리의 큰 터전을 이뤄 오늘이 있으니
橫雲鳥功第一(횡운골공제일) 횡운골이어! 그 공 제일이로세
(유린청)
游麟靑體峯生(유림청체봉생) 유린청이여! 등에 봉(峯)이 솟았으니
地之類銅之英(지지유동지영) 땅 위에서는 동(銅)이요 영(英)이로세
振振之仁瑞聖明(진진지인서명성) 진진한 어짊이요, 성명(聖明)의 상서로다.
齒歷延長藝老成(치역연장예노성) 해가 오랠수록 기예(技藝)는 성숙하네
艱頑邦以寧(사북간완방이녕) 네 발굽에 힘입어 나라가 편안하니(: 足+培의 右部)
三十一祀耀厥靈(삼십일사요궐영) 三十一년 역사(史) 에 그 영(靈)이 빛났구려
死有石槽留雄名(사유석조유웅명) 죽어서도 석조에 웅장한 이름 남겼느니
游麟靑德焉稱(유린청덕언칭) 유린청이여! 그 덕을 어떻게 칭송하랴
(추풍오)
追風烏來自胡(추풍오래자호) 추풍오여! 호국 땅에서 들어오니
域中寶天下無(역중보천하무) 국중의 보배요 천하에 짝이 없네
乘聲逐日騰半虛(승성축일등반허) 바람타고 해를 쫓아 허공에 오르니
一見特荷乾心紆(일견특하건심우) 단번에 임금 사랑 입었구려
入險濟難與人(입험제난여<험한 곳을 사람과 함께 드나들어(:仁의 좌부 사람인 변 具)
贊揚神武淸坤隅(찬양신무청곤우) 신무를 도와 나라를 평정했네
昭陵白帝功爲徒(소릉백제공위도) 소릉과 백재의 공이 서로 비슷하니
追風烏生應圖(추풍오생응도) 추풍오여! 도참(圖讖)에 응해 태어났구려
(발뢰자)
發雷龍邪馬(발뢰자용여마) 발뢰자여! 용이냐? 말이냐?
藝之武匹邪寡(예지무필야과) 용감한 그 재주 실로 짝이 없네
顧影長鳴豆一 (고영장명두일아) 제 그림자 돌아보고 소리치며 고개 드니
冀北*萬匹材盡下(기북만필재진하) 기북의 만필이 모두 다 이 아래로세
馳驟合巨無偏頗(치취합규무편파) 치달림이 법에 맞아 빗나가지 않으니
一鞭攸指定稷社(일편유지정직사) 채찍 한번 휘두르니 사직이 안정되네
大東億載長帖妥(대동억재장첩타) 우리나라 억만년이 길이 편안하리니
發雷(발뢰자우경자) 발뢰자여! 참다운 말이로다.(: 坰의 우부)

*기북(冀北) : 직예성(直隸省) 준마 생산지
(용등자)
龍騰紫天馬子(용등자천마자) 용등자여! 천마의 새끼라
散電睛揷(산전정삽통이) 번개 같은 눈동자에 원통 같은 귀로다.(: 竹 아래 甬)
稟靈月窟*河聚氣(품령월굴하취기) 월굴의 정(精) 받고 하수(河水*)의 기(氣) 뭉치어
兄我眞龍化若鬼(황아진룡화약귀) 진룡을 우리에게 주니 변화가 귀신 같네
久矣臨陣托生死(구의임진탁생사) 전장에 다다르면 생사를 의탁하고
容與一(용여일렬니뇨지) 넌즈시 진흙 땅을 한번 뛰어 넘었다네(: 世 아래 道의 하부 책받침) (: 水 삼점변에 卓)
功符的盧躍檀水*(공부적노약단수) 적려마가 단수를 건넌 것과 공이 같으니
龍騰紫광만사(용등자광만사) 용등자여! 만년을 빛나리.

*월굴(月窟): 달 속에 있다는 굴, 달이 떠오르는 곳
*하수(河水): 은(殷)·주(周) 시대 황하(黃河)의 명칭.
*단수(檀水): 난하의 본명은 檀水 혹은 桓水이다.(하북성, 북경 근처)
(응상백)
凝霜白匪稱力(응상백비칭력) 응상백이여! 힘으로만 칭할것 아니라
大有剛且淑(대유옹강차숙) 크고, 강하고 또 슬기롭네(:偶의 우변+頁)
鴨水湯湯岸千尺(압수탕탕안천척) 압록강물 넘실넘실 기슭은 천척인데
白羽弓赫(백우절절동궁혁) 흰 화살 번쩍번쩍 붉은 활과 함께 빛이나네( :丹+杉의 우변)
照夜光景輝相燭(조야광경휘상촉) 밤에 비추는 광경이 휘왕창 밝으니
央央義 布 隨 宛 足(앙앙의패수원족) 줄지은 깃발이 발굽따라 가네
一回三韓骨而肉(일회삼한골이육) 단번에 삼한을 고통에서 구제하니
凝霜白而蕪(응상백이무두) 응상백이여! 네가 고맙다.(: 睾+文)
(사자황)
獅子黃行無疆(사자황행무강) 사자황이여! 가는 길 끝이 없네
丞相明將軍强(승상명장군강) 승상은 밝고, 장군은 강하네
天一翕聚呈厥祥(천일합취정궐상) 천일(天一) 별이 기운 모아 상스러움 바치니
龍媒闖然海之央(용매틈연해지앙) 용매(龍媒:駿馬)가 바다 한가운데 나타났네
頭流巖巖賊氣張(두류암암적기장) 높고높은 두류산에 도둑 떼 한창인데
一超奮武隨劍光(일초분무수검광) 번쩍이는 칼 따라 한번 뛰어 용을 썼네
坐見獻級如崇岡(좌견헌급여숭강) 적의 머리 높은 산같이 베어 놓으니
獅子黃思斯臧(사자황사사장) 사자황이여! 지혜가 매우 훌륭하네

*두류(頭流) : 지리산의 한 이름, ‘백두산에서 흘러온 산’이란 뜻, 사자황이 지리산 왜구 토벌 때 탔던 말임을 뜻함.
*천일(天一): 중국에서 북극 자미원 옆에 있는 별 이름, 천제(天帝)를 돕고, 전투를 맡으며, 사람의 길흉을 안다고 함.
*승상명(丞相明): 공민왕 5년(13 56)에 좌/우정승(左右政丞)을 문하시중과 수문하시중으로 고쳤는데, 공민왕 사후 한때 중앙 정계를 주름 잡던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가 수문하시중 (守門下侍中)에 승진한 것을 말함.
(현표)
維玄豹(유현표함이포) 현표여! 용감하고 사나워(: 門 안에 敢)
久無敵誰與校(구무적수여교) 적수가 없으니 누구와 비교하리
房星精潛邸耀(방성리정잠저요) 방성*의 정기가 잠저에 비추더니(:手변에 離 의 좌부)
胚胎逸蹄殊(배태일제수침탁*) 드디어 천리마를 내었구려
解鞍兎洞輸奇效(해안토동수기효) 토동에서 전투를 마치고 큰 공 세웠거니
島夷百無回櫂(도이백소무회도) 섬 오랑케 배 백척, 한 척도 돌아가지 못했네(: 舟+搜의 우부)
畵上丹靑凜惟肖(화상단청늠유초) 단청의 그림도 똑 같이 늠름하니
玄之豹之(현지표지교교*) 검은 표범인가 씩씩하구려.

*방성(房星): 28수(宿)의 하나로 마신(馬神)을 맡은 별. 청룡 7수(宿) 중 네 번 째 있는 4개의 별.
*침탁: 천리마 같이 한 발은 들고 한 발로만 뛰는 모양.
*교교: 강성한 모양, 씩씩한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