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諡號)를 통한 延李精神 고찰
沙月 李 盛 永(2006. 12. 17)
  무릇 사람을 평가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도 있거니와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내재적(內在的) 가치를 보지 못하고, 외양이나 단편적 행실 등 극히 미미한 편린(片鱗)에 의지하여 자칫 그릇된 평가를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

● 시호는 선조들이 몸소 실천한 생활철학
  시호는 멀리 중국의 주(周)나라 때부터 시행되었던 것이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때 전래되었다고 한다. 제왕(帝王), 공경(公卿: 정승 판서급 고관), 유현(儒賢: 유학자), 충절(忠節) 등의 공덕을 기리어 죽은 뒤에 추증(追贈)하는 칭호이다. 비록 두 글자로 되어 있지만 그 사람의 일생을 통하여 몸소 실천한 생활철학이나 행실이 이 두 글자에 압축되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단순한 명예스러운 칭호를 넘어서 그 사람의 정신자세와 생활철학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다.

  사람의 호칭 중에 휘(諱, 名), 자(字), 호(號) 들도 소망(素望), 생활의 좌우명(座右銘), 의지(意志) 등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이에 비하여 시호는 그 사람이 한 삶을 끝낸 뒤 한 평생을 통하여 몸소 실천한 것이 제삼자인 시장관(諡狀官) 을 통하여 면밀히 평가하여 상주되고, 임금이 최종 낙점하여 하사하기 때문에 담고 있는 의미 뿐만 아니라 객관성(客觀性)과 공식성(公式性)을 더욱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유사한 칭호로 공신책록자(功臣策錄者)에게 부원군(府院君) 또는 군(君)의 칭호를 하사하는 봉호(封號)가 있는데 이는 하사 받는 것으로 명예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그 칭호 자체가 갖는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 사람의 성씨(姓氏) 본관(本貫)과 연관하여 임금이 작명하여 하사한다.

  우리 延李 선조들이 하사 받은 봉호로는 연천(延川), 연성(延城), 연안(延安), 연원(延原), 연양(延陽), 연릉(延陵), 연평(延平) 등과 같이 延李 본관의 첫 자를 연(延)자로 한다.

  시호는 그 사람의 일생을 가장 잘 알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시장관(諡狀官)을 지명하여 그 사람을 자세하게 평가한 시장(諡狀)을 제출하면 이를 바탕으로 태상각(太常閣)이라는 각의를 열어 검토하고, 이에 합당한 세 개의 시호안(諡號案)을 설정하여 상주하면 임금이 한 개의 안에 낙점(落點)하여 결정하고, 하사하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친다.

  시호는 이를 하사 받는 사람이 이미 국가나 사회에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서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좋은 점만 나타내기 때문에 장단점을 망라한 전체적인 인물평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나 선조들의 훌륭했던 점을 본받고, 계승발전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 후손으로서는 주옥 같은 보물이 아닐 수 없다.

● 延李선조는 학문을 가장 숭상하였다.
  우리 延李의 선조들이 시호를 하사 받은 분은 총 54인으로 파악된다. 이분들에게 하사 된 시호에 사용된 글자 수는 모두 108자이고, 낙점을 받지 못하고 채택되지 않은 2개의 불체택안에 사용된 글자수는 184자가 파악되었다.(총 54x4=216자 중 32자 미파악)

  비록 시호에 채택되지 않은 불채택안에 사용된 글자 일지라도 시장관이 평가하는 과정에서는 인물평에 합당한 글자라고 판단해서 시호 안(案)에 올린 것이기 때문에 선조들의 인품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글자들이다. 그래서 동등하게 생각하여 통계를 잡았다.

  이들 시호 밀 불채택안의 글자 수 순으로 보면 다음 표와 같이 文(문)자가 28인 63회로 가장 많고, 다음은 簡(간)자가 19인 22회, 靖(정)자가 19인 21회, 忠(충)자가 15인 28회, 憲(헌)자가 15인 18회, 孝(효)자가 13인 17회, 貞(정)자가 11인 14회, 獻(헌)자가 11인 11회, 肅(숙)자가 9인 9회, 定(정)자와 莊(장)자가 각각 7인 7회, 僖(희)자가 5인 6회. 敏(민)자와 穆(목)자가 각각 5인 5회 등의 순이다.

  시호에 사용된 글자들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글자별 의미와 延李 인원을 열거해 보면

[文(문) 28인]
  - 勤學好問(근학호문) 학문을 추구함에 있어 아무리 손아래일지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물어서 배웠다.(不恥下問)(石亨, 淑 王咸, 後白, 光庭, 好閔, 廷龜, 明漢, 一相, 天輔, 鼎輔, 福源, 性源, 始源, 肇源, 命植, 晩秀, 存秀, 鶴秀, 鐘愚, 若愚, 嘉愚, 明迪, 道宰 23인)
  - 博學多見(박학다견) 학문과 사리에 밝고, 식견이 높았다. (殷相, 翊相 2인)
  - 道德博問(도덕박문)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와 그 도리를 채득하는 행위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端相, 喜朝, 直輔 3인)

[簡(간) 19인]
  - 正直無事(정직무사) 한결 같은 마음으로 사곡(邪曲)됨이 없었다.(一相, 翊相, 喜朝, 得臣, 天輔, 敏輔, 福源, 觀徵, 始源, 文源, 命植, 鼎運, 益運, 龍秀, 若愚, 鐘愚 16인)
  - 居敬行簡(거경행간) 일상생활에 조심하고, 행동을 대범하게 했다.(崇元, 時白 2인)
  - 一德不懈(일덕불해) 한결 같은 마음으로 사곡(邪曲)됨이 없었다. (鼎輔 1인)

[靖(정) 19인]
  - 寬樂令終(관락영종) 성품이 너그럽고, 의리가 있으며, 선(善)으로써 일생을 마쳤다.(末丁, 淑琦, 後白, 時昉, 明漢, 沃, 觀徵, 得臣, 敏輔, 福源, 性源, 文源, 益運, 晩秀, 存秀, 鐘愚, 若愚,嘉愚, 明迪 19인)

[忠(충) 15인]
  - 臨患(亂)不忘國(임환불망국) 국난을 당하여 아무리 험지라 할지라도(險不辭難)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時稷, 惇五, 惇敍, 有吉, 述原 5인)
  - 廉方公正(염방공정) 청렴하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했다.(崇元, 光庭 2인)
  - 危身奉上(위신봉상) 국난을 당하여 아무리 위험해도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였다.(廷龜, 貴, 時白, 時昉, 時秀 4인)
  - 事君盡節(사군진절) 절개를 다하여 임금을 섬겼다.(示玄, 瑜, 祖淵 3인)

[憲(헌) 15인]
  - 行善可紀(행선가기) 선(善)과 악(惡)의 판별을 명확히 하여 사방의 기강(紀綱)이 되었다.(時稷, 惇五, 殷相, 翊相, 瑜, 得臣, 鼎輔, 文源, 肇源, 鼎運, 鶴秀, 龍秀, 鐘愚, 嘉愚, 祖淵 15인)

[孝(효) 13인]
  - 慈惠愛親(자혜애친) 부모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널리 친족까지 사랑하였다.(示玄, 王厚, 得臣, 性源, 始源, 鼎運, 益運, 存秀, 龍秀, 嘉愚, 祖淵, 喬翼 12인)
  - 五宗安之(오종안지) 위로는 고조, 아래로는 현손에 이르도록 사랑이 미쳐 세상에 배역(背逆)됨이 없이 지냈다.(敏輔 1인)

[翼(익) 12인]
  - 思慮深遠(사려심원) 항상 조심하는 마음으로 매사를 깊고 멀리 생각하였다.(貴,時白,沃,示玄,瑜,王厚,文源,肇源,時秀,鐘秀,龍秀,若愚 12인)

[貞(정) 11인]
  - 靑白自守(청백자수) 맑고 깨끗한 행실로서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端相,王厚,命植,鼎運,福源,文源,晩秀,龍秀,嘉愚,祖淵, 道宰 11인)

[獻(헌) 10인]
  - 嚮忠內德(향충내덕) 충성에 앞장서고, 임금에게 덕망을 보였다.(喜朝,瑜,直輔,敏輔,文源,命植,時秀,存秀,鶴秀, 晩秀 10인)

[肅(숙) 9인]
  - 剛德克就(강덕극취), 執心決斷(집심결단), 正己 (心변)攝 下(정기섭하) 자신을 바로잡고, 단정한 위의(威儀: 예법에 맞는 무게 있는 몸가짐)로써 아래 사람을 잘 다스렸다.(時白,一相, 瑜, 性源, 鼎運, 益運, 命植, 肇源, 龍秀 9인)

[定(정) 7인]
  - 危身奉上(위신봉상) 국난을 당하여 아무리 위험해도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였다.(貴, 時昉, 得臣, 示玄, 惇敍, 王厚, 祖淵 7인)

[莊(장) 7인]
  - 履正志和(이정지화) 항상 바르게 이행하고, 화합하였다.(淑 王咸, 後白, 鼎龜,惇敍, 一相, 端相, 有吉 7인)

[僖(희) 5인]
  - 小心畏忌(소심외기) 매사에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깊고 멀리 생각하였다.(好閔, 王厚, 觀徵, 明迪 4인)
  - 小心恭愼(소심공신) 널리 배워서 학문과 사리에 견식이 높았다.(翊相 1인)

[敏(민) 5인]
  - 好古不怠(호고불태) 옛 것을 좋아하며 게으르지 않고 익혔다.(好閔, 示玄, 鼎輔, 鶴秀, 鼎運 5인)

[穆(목) 5인]
  - 中情見貌(중정견모) 천성을 그대로 꾸밈없고 공평하게 드러냈다.(廷龜, 時稷 2인)
  - 布德執義(포덕집의) 언어와 동작이 아름답고, 훌륭하며 온화하였다.(天輔, 瑜, 始源 3인)

[毅(의),剛(강) 3인]
  - 剛而能斷(강이능단) 과감하고 결단성이 있었다.(淑琦. 有吉, 述原 3인)

[淸(청) 3인]
  - 避遠不義(피원불의) 아무리 곤궁하여도 불의는 멀리 하였다.(後白, 端相, 王厚 3인)

[愍(민) 4인]
  - 使民悲傷(사민비상) 백성으로 하여금 그의 죽음을 슬프게 하고, 마음 아프게 하였다.(惇敍, 有吉, 述原, 鐘愚 4인)

[景(경) 4인]
  - 由義而濟(유의이제) 의로운 행동으로 세상을 구제하였다.(好閔, 肇源, 鶴秀, 若愚 4인)

[正(정) 1인]
  - 以正服人(이정복인)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언행으로 사람들을 외복(畏服)시켰다.(時秀 1인)

[康(강), 胡(호) 2인]
  - 安樂憮民(안락무민) 나라의 사방에 우환(虞患)이 없게하여 백성을 편안케하였다.(貴齡 1인)
  - 彌年壽考(미년수고) 본인의 수는 물론 기애(耆艾: 60-70세) 에 이른 노인을 잘 보살폈다.(石亨 1인)

[襄(양) 2인]
  - 甲胃有勞(갑위유노) 외구(外寇)의 정벌에 공을 세웠다.(淑琦, 時昉 2인)

[敬(경) 2인]
  - 夙夜儆戒(숙야경계) 밤낮으로 자신을 삼가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喜朝, 直輔 2인)

[良(량) 2인]
  - 溫良好樂(온양호락) 성품이 온순하고, 선량하여 즐거운 것도 좋아하고, 좋은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明漢, 殷相 2인)

[顯(현) 1인]
  - 行見中外(행견중외) 뛰어난 행실이 적게는 조정에, 크게는 온 나라에 드러났다.(惇五 1인)

  ● 延李정신(결론)
  이상의 시호에 많이 사용된 글자의 의미를 새겨 봄으로서 자연히 延李정신이 부각된다.

  (1) 학문(學問)을 숭상하였다.(文)
  조선조는 문민(文民)우위의 사회였고, 학문을 하므로서 개인의 입신출세도 보장되고, 집안의 융성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延李는 연성군(延城君 휘 末丁)의 오자암이업(五子巖肄業)의 예로 보듯이 그 어느 가문보다도 교육열이 높았고, 면학에 힘 써 가세(家勢)에 비하여 많은 등과자를 배출하여 관직에 등용되었다.

  (2) 매사에 정직하고, 겸손하였다.(簡, 翼)
  보통 ‘양반’이란 말은 벼슬이 높은 것 보다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경우가 많다. 延李는 저헌공(樗軒公 휘 石亨)의 계일정신(戒溢精神)을 예로 보더라도 항상 과한 것을 경계하고, 잘난체하며 남의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를 많이 배출한 집안이다.

  (3) 성품이 너그럽고(寬大), 선(善)하였다. (靖, 貞)
  延李人은 악인(惡人) 태어날 수 없는 핏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하나 같이 착하고, 너그러운 품성을 지녔다.

  (4) 충성심이 강하였다.(忠, 獻)
  延李는 나라의 위급한 상황에서 한 몸, 한 집안을 돌보기에 앞서 나라를 생각하였다.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그 외 많은 내환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몸을 아끼지 않았고, 사신이나 매사 공무를 처리 함에 있어서도 나라를 먼저 생각하였으며, 임금이 잘못된 길로 들지 않도록 충간을 아끼지 않았다.

  (5) 준법정신이 강하였다.(憲)
  延李는 선악(善惡)의 판별이 명확하고, 항상 선의 입장에 섰으며, 불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고 의기(義氣)로서 일어섰으며, 항상 지조(志操)를 지켰다.

  (6) 효도하였다(孝)
  장령공(掌令公 휘 언침) 집안의 13정문(十三旌門)을 예로 보듯이 延李 선조들은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로써 집안을 돈독히 하였다.

  이러한 延李정신은 조선조 오백년을 통해서 타인들이 우리 延李를'삼한갑족(三韓甲族)'이니, '오동갑족(吾東甲族)' 이라 칭송을 아끼지 않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적 기본 틀은 달라질게 없다. 우리 후손된 자, 선조들의 延李정신을 계승하고, 시대에 잘 적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첨부#1 <삼한갑족(三韓甲族)의 근거들>
  -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우암 송시열 문인, 유현)가 말하기를 “延李는 동방(東方)의 명문가(名門家)”라 하였다.
  - 정조대왕께서는 그의 저서 「홍제전서(弘齊全書)」에서 “延李는 벼슬만 많이 한 가문으로 알았는데 저헌집(樗軒集)을 비롯하여 월사집(月沙集)등 후손들의 문집을 보니 가히 ‘동방(東方)의 갑족(甲族)’이라”고 썼다.
  - 고종황제는 “延李甲族은 자타공지(自他共知)라” 하였다.

첨부#2 <弘齋全書日得錄(홍제전서일득록)>(저헌선생문집 483쪽)
  日得錄人物篇曰(일득록인물편왈)
  정종(正宗: 正祖)의 저서 홍재전서(弘齋全書: 弘齋는 정조대왕의 別號) 안의 일득록(日得錄)의 인물편에 이르기를

  樗軒早年魁科聲名籍甚而讀其遺集絶無浮華可想其爲醇厚君子也
  (저헌조년괴과성명적심이독기유집절무부화가상기위순후군자야)

  저헌(樗軒: 李石亨)이 이른 나이(早年)에 과거에 장원급제(魁科)하여 명성이 매우높았는데 그의 유집(遺集)을 읽어본다면 결코 부화(浮華: 실속은 없이 겉치레만 화려함)가 없으니 그 순후(醇厚: 순박하고 후함)한 군자가 됨을 생각할 수 있다.

  今其子孫亦世隆顯推爲吾東甲族餘慶之報豈無以也每置凡案時時披過
  (금기자손역세융현추위
오동갑족여경지보기무이야매치범안시시피과)
  이제 그 자손이 대대로 크게 현달(顯達: 벼슬, 이른, 덕망, 지위가 높아지고 세상에 알려짐)하여 우리나라(吾東)의 갑족(甲族: 문벌이나 가계가 아주 훌륭한 양반의 집안)으로 추대되니 여경(餘慶: 덕을 많이 쌓은 보답으로 뒷날 그의 자손이 받는 경사)의 보응이 어찌 까닭없는 것이랴. (내가) 매양 유집을 책상 위에 두고 때때로 펴 본다.

첨부#3 <시장(諡狀) 예> 靑蓮李公請諡行狀(청련이공청시행장)-譯文
  공의 휘는 후백(後白)이며 자는 계진(季眞)이니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다. 그 족보에 이르기를 당(唐)의 중랑장(中郞將)이던 이무(李茂)가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평정할 때 종군하여 와서 이곳에 머물러 신라에 벼슬하고, 적(籍)을 연안(延安)으로 받았다고 한다.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나왔으며, 고려 말에 계손(係孫)이란 분이 있었으니 벼슬이 공조전서(工曺典書)에 이르고,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위가 되었는데 이분이 공의 7대조이다.

  고조 말정(末丁)은 예빈(禮賓) 소윤(少尹)을 지내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증조(曾祖) 숙함(淑 王咸)은 이조참판(吏曺參判)과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고, 시호(詩號)가 문장공(文莊公)이며, 문장(文章)으로 성종조(成宗朝)의 명신이 되었고, 조(祖) 세문(世文)은 참봉(參奉)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추중받았으며, 고(考) 국형(國衡)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모두 공이 귀(貴)하게 된데 따른 것이다.

  정덕(正德) 경신(庚申: 1520) 4월 11일 진시(辰時: 08시)에 공이 태어났으니 어려서부터 침묵하고, 말이 적었으며 총명이 뛰어났다. 10세가 되기 전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니 내외종간 7,8인이 모두 큰아버지 댁에서 양육되었다. 애모(哀慕)하고 접상(執喪)하면서 한번도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말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종장댁(宗長宅)에 갔었는데 종장이 단술(甘酒)을 대접하자 물리치고 마시지 않았다. 종장이 까닭을 묻자
  “이것이 비롣 단술이기는 하나 이미 ‘술(酒)’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감히 마실 수 없습니다” 고 말하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나이 겨우 10세가 되자 옥계(玉溪) 노진(盧?), 목사(牧使) 양희(梁喜) 등과 더불어 표연(表演)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한 때 학도가 15인이었다. 나이 차례로 글을 배우는데 공은 나이가 가장 어려서 항상 끝자리에 앉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배우는 책을 득고도 하나같이 모두 등을 돌리고 앉아 외울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성리대전서(性理大全書)도 있었는데 공이 마치 익숙히 익힌 사람처럼 외우니 표공이 크게 경탄하여 말하기를 “예전에도 이런 아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일찍이 소상팔경가사(瀟湘八景歌詞)를 지었는데 그것이 서울 장안에 전파되어 혹은 여러 악부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명성이 더욱 떨치어 서울의 선배들이 그의 상경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 때 나이가 16세였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서울로 올라오니 유명하고 높은 벼슬아치들도 공의 명성을 소중히 여기어 많은 예로써 존경하였다.

  그러나 공은 일찍 부모를 여윈 슬픔으로 세상에 나아갈 마음이 없어 자취를 임천(林泉)에 묻었으니 집 뒤에 푸른 솔(松)이 있었기에 스스로 송소(松巢)라고 호를 짓고, 동은(?隱) 이의건(李義健),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등 여러 사람과 사귀었다.

  공이 젊었을 때 이기(李 艸밑己: 덕수인, 을사사화를 일으키는데 주동하여 保翼功臣과 衛社功臣 1등에 훈록되었으나 명종 때 삭훈, 영의정이 된 후 급사함)가 강진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기가 학문이 있다고 하여 공이 가서 그에게 글을 배우러 갔는데 며칠 후 돌아왔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무룻 털끝만한 일도 모두 숨기고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으니 군자의 태도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같은 고을 사람 중에 을사위훈(乙巳爲勳: 을사사화 공신 책록)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나 그래도 공의 명성이 높으니 한 번 만나보고자 하였다. 공이 산사에서 독서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사냥을 핑계로 마을 사람과 약속하고 공의 처소를 찾아왔으나 공이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곧 거처를 옮겨 피해버렸다.

  조모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주로 근신하면서 아침 저녁 무덤에 올라갔는데 비바람이 치는 날도 그만두지 않고 한결같았다. 이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만나 서로 말하기를
  “그의 효됴는 천성에서 울어 나오는 것이니 옛 효자라 하더라도 이에 더 할 수는 없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상을 마칠 때까지 반드시 소식(素食)으로 3년을 지냈다.

  청계(淸溪) 유몽정(柳夢井)과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등 당시 유명한 선비들도 예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곳이 있거나 경서의 뜻을 잘 모르고 의문 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왕복하면서 어려운 곳을 물어보고 늘 감탄해서 말하기를
  “그의 이론과 분석은 정확, 정밀하니 참으로 지금 사람들이 발 돋음을 해도 미치지 못할 인물이다”고 하였다.

  27세에 사마시(진사과)에 급제하고, 36세에 문과(文科) 식년(式年)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높고 좋은 벼슬을 두루 거치면서 기대승(奇大升)과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다. 위의(威儀)를 갖추고 조정에 서게 되면 천길 절벽이 우뚝 솟은 듯 빼앗을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그 이력을 살펴보면 처음 괴원(槐院: 承文院)에 보직되었다가 천거되어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주서(注書)가 되었고, 다음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사간(司諫), 병조좌랑(兵曺) 좌랑(佐郞), 정랑(正郞), 이조(吏曺) 좌랑(佐郞), 정랑(正郞), 의정부(議政府) 검상(檢祥), 사인(舍人),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전한(典翰)을 거쳤고, 또 일찍이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독서하였으며, 정묘년(丁卯년: 명종22년, 1567)에는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으로 나아가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였다.
  그 해 발탁되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이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병조 참지(參知), 참의(參議)가 되었고, 얼마 안되어 도로 승정원에 들어가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신미년(辛未年: 선조4년, 1571)에 문신(文臣) 정시(廷試: 重試)에 장원(壯元) 함으로써 품계가 올라서 예조(禮曺) 참판(參判)이 되었고, 이어서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이조 참판(參判)을 역임하였고, 계유년(계유년: 선조6년, 1573)에는 변무사(辯誣使)로 북경에 돌아와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고,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기록되어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되었다.

  갑술년(甲戌年: 선조7년, 1574)에는 대신의 천거로 형조판서를 배수 받았으며, 을해년(乙亥年: 선조8년, 1575)함경도 감사가 공석이 되었는데 그 때 그 지방에는 흉년이 들고, 또 국경지대에 경계를 요하는 일이 있어 상감이 적임자를 구하기 어려웠다. 당시 벼슬을 그만두고 있는 공을 상감이 특명을 내려 함경감사를 제수하니 함경도는 먼 변방에 위치하여 이름없는 세금과 법이 없는 일들이 함부로 저질러져도 다듬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부임하여 이 모든 것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득이 되게 고쳤고, 위엄과 혜택이 아울러 펴지니 온 도 내가 맑고 깨끗해졌다. 후녕에 전한 허봉이 어사가 되어 함경도를 순회할 때 산골 이름없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만나도 반드시 “이모가 잘 계시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허봉이 여러 책에 기록하여 찬미하였다.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양관(홍문관, 예문관)의 제학을 역임하면서 사람을 선임하는데 공평하니 선비들이 공을 중시하였다. 공은 오랫동안 문망을 얻고 있어 멀지 않아서 곧 대제학에 될 줄 알앗는데 당시 이 자리에 있던 사람이 오랫동안 교체되지 않아 끝내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기에 여론이 몹시 애석해 하였다.

  임신년(壬申年: 선조5년, 1572) 봄에 기근이 심하여 상감이 화공에게 명하여 유민도를 그리게 하여 10폭의 병풍을 만들게 하고, 또 공에게 명하여 폭마다 시를 지어 올리게 하여 그것을 보면서 그들의 처절함에 뜻을 기울였다.

  인성왕후(인종의 비)가 승하하여 조정에서 상복제도를 논의하는데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공이 상감에게 청하여 3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했는데, 경서를 인용하고 예문에 근거함이 분명하고 정당하여 모든 논의 중에 제일로 추대되니 상감이 마침내 공의 의견을 따랐다.

  승상 유성룡이 당시 옥당에 있으면서 공의 글을 읽어보고 경복하여 말하기를
  “이 어른의 학문이 이 경지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며 한 통의 사본을 해서 책상에 놓아두었고, 아울러 공이 논의한 정안 등도 베껴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스스로 깊이 감상하였다.

  무인년(무인년: 선조11년, 1578) 호조판서로 휴가를 얻어 함양의 선친 묘소에 성묘갔다가 10월 초7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알려지자 상감은 몹시 슬퍼하면서 고인에게 특별한 영전을 더하고, 특별히 명하여 상여가 지나가는 고을에서 장례를 보살피도록 하고, 파주 광탄의 선영 옆 남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게 하였다. 강진의 선비들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며, 세상 사라들은 공을 청련선생(靑蓮先生)이라고 불렀다.

  부인 홍씨는 군수 처성(處誠)의 딸이다. 아들 선경(善慶)은 찰방이고, 세 딸은 각각 안선국(安善國), 기성헌(奇誠獻), 박거현(朴擧賢)에게 시집갔다. 찰방의 아들은 태길(泰吉), 유길(有吉), 복길(復吉), 익길(益吉), 정길(井吉)인데, 맏아들과 끝 아들은 모두 현감이고, 둘째와 넷째는 현령이고, 셋째는 별좌다. 네 딸은 가각 유희성(柳希成), 최기(崔 旣밑土), 이진선(李振先), 김접(金?)의 처가 되었다.

  증손은 수인(壽仁), 극인(克仁), 영인(榮仁), 우인(友仁), 호인(好仁)인데 수인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으로 잇다가 벼슬을 사직하였는데 학문과 덕행이 세상에 알려졌고, 극인은 문과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현손인 석고(碩 老밑句)는 감찰이며, 석형(碩亨)은 참봉이고, 석창(碩昌), 석신(碩臣), 석빈(碩賓), 석관(碩寬)과 서출을 아울러 모두 14명이다.

  공은 재능과 도량이 넓고 크며, 모습이 빼어낫으며, 견문과 학식이 투철하고, 말이 명백하여 한마디로 말하면 유유자적하고, 깨끗하여 고고한 분이었고, 공명정대하고, 조용하고, 엄숙한 분이었다.

  평소의 생활에도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한 뒤 팔장 끼고 단정히 앉아 경전을 연구하고, 그 깊은 뜻에 젖어 독실하게 실천하고,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범연히 지나치는 일이 없고, 사리가 진실한 곳을 보면 확고하게 그것을 스스로 지키고, 속인들을 따라 어긋난 일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착한 말을 듣거나 착한 행동을 보면 반드시 단숨에 그것을 따르며 의혹하는 바가 없었다.

  선조 임금이 처음 즉위하시자 문성공 이이선생 등 여러 명현들이 을사사화가 기묘사화보다 더 심하여 만약 당시 억울한 누명을 쓴 분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인심이 답답하고 뒤끓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드디어 공과 협심갈력하여 쟁론해 마지 않았는데, 당시 문순공 이황선생처럼 높은 식견을 가진 분도 진위를 가려내는데 의문이 없을 수 없었건만 마침내 선조 임금께서 공의 식겨에 다랐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마땅히 중앙과 지방에 알리는 글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제현들이 모두 공에게 글을 쓰도록 추대하니 공이 사양하지 않고 명에 따라서 사화가 일어난 원인고 화패의 언류를 소급해 밝히고, 뭇 간사한 무리들의 간교하고 기민함을 논하여 물리치고, 명종대왕의 형제간 우의를 밝히고, 봉성군이 원통하게 굴복한 정황을 파헤치니 그 문장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게 함은 비단 그의 문장만이 뛰어나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지지(志氣)가 뛰어남을 여기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이 때부터 세상의 논의가 크게 안정되어 선조의 청명한 덕화정치를 열었으니 공은 정말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선조 임금은 일찍이 공에게 명하여 국조유선록서(國朝儒先錄序)를 짓게 하니 공이 위로는 도학의 연원을 밝히고, 다음으로 전수한 계통을 서술하니 그 문장이 훌륭하고, 요점을 갖추어 아무도 이간질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공은 정말 지언(知言)의 군자였다. 참으로 알고 실천하는 공부가 없는 사람이면 어떻게 이와 같이 될 수 있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한 덩어리의 고기 맛만 보면 온 솥의 국맛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위에 말한 몇 건의 문자는 한 덩어리의 고기 맛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공이 도승지가 되었을 때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엄숙하고 깨끗함을 범할 수 없어 대청 안이 고요히 소리가 없고, 감히 떠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심지어 국중의 시녀들에 이르기까지 서로 타이르기를
  “오늘은 이모가 정원에 들어오셨다”고 하며 오직 말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두려워 하였다. 상감께서는 이 때문에 공에게 오랫동안 도승지 자리를 맡겼다.

  공이 전조(銓曺)의 장(長: 吏曺判書)이 되었을 때 친척 한 사람이 찾아와 공에게 청탁을 하니 공이 정섹을 하고 한 권의 책을 내 보이니 그 책은 인재들의 성명을 기록해 둔 책이엇고, 그 사람의 이름도 그 속에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이름을 이 책에 기록해 둔 것은 장차 물망에 올리려고 한 것인데, 아깝구나 그대가 만일 청탁의 말을 안 했던들 벼슬을 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니, 그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떠났다.

  공은 망기(望記: 벼슬아치를 발탁할 때 후보자 셋을 기록한 단자)에 주점(注點; 망기에 오른 사람 이름에 낙점하는 것)을 할 때마다 반드시 아래 삶들에게 두루 물어보고 모든 사람의 논의가 모아졌을 때에만 그를 등용하였는데 간혹 착오된 일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안 자면서 “내가 주상전하를 속였다”고 말하며 괴로워했다.

  공은 일찍이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었다. 문성공(文成公) 이율곡(李栗谷) 선생은 말하기를
  “이모는 관직에 있을 때 그 직분을 다하였고, 몸가짐이 청렴하였다. 벼슬이 육경(六卿: 判書)에 이르렀는데도 청빈하기 선비와 같았으며, 손님이 오면 술상이 차고 담박하였기에 사람들이 그의 결백을 탄복하였다”고 하였다.

  또 사암(思菴) 박상공(朴相公 名 淳)은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말하기를
  “이모는 ‘가히 어린(6척의) 고자(孤子)를 맡길 수 있고, 백리의 왕명(百里之命)을 기탁할 수 있는 사람’(可以託六尺之孤寄百里之命) 이란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였다.

  아! 공은 이와 같은 재능과 덕망으로 선조대에 한창 성평(盛平) 할 때 만약 한번 나라를 다스리는 큰 책임을 맡갸 보았더라면 반드시 후세에서 볼 만한 치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론이 조석간에 곧 조정에 들어가라고 하였는데 공은 병이 들었으니 어찌 아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나 세채(世采)는 젊은 때부터 선생의 이름과 덕을 추모해서 명종, 선조 년간의 제1의 인물로 생각하였고, 항상 선생이 지으신 글을 보고자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여 마음 속으로 은근히 애달프게 생각하였다. 지금 석형(碩亨)씨가 선생의 행적을 갖고 와서 나에게 보이면서 이로써 명호(名號)를 바꾸는 전고가 되게 해 달라고 하니 나는 마침 늙고 쇠약하여 혼미한 지경에 있는 사람이라 새로운 사실을 파헤쳐 밝혀낼 수는 없고, 오직 옛 글로 인해 서술하였을 뿐이니 바라건대 태상각(太常閣)의 고관들이 실상을 가려주기 빌 뿐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 겸 영경연사(領經筵事) 세자부(世子傅) 박세채(朴世采)가 삼가 행장을 쓰다.

  숙종 병자(丙子: 22년, 1696) 6월 초 7일 태상각(太常閣)에서 시호를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문청(文淸)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 의롭지 않은 것은 피하고, 멀리함을 청(淸) - 낙점(落點)
  문장(文莊) 상동(上同) 문(文), 바른 것을 실천하고, 뜻이 화평함을 장(莊)
  문정(文靖) 상동(上同) 문(文), 관대하고 안락하며 끝맺음이 있게 한 것을 정(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