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관련자료 모음

沙月 盛  永(부사공 22세손)

 

서언

우리 연안이씨 시조 중랑장공(中郞將公) 휘 무(茂)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340여년 전의 일이다. 기록이나 유적, 유물이 단 백년도 온전히 유지되기가 어려운데 천년을 지난 지금 정확한 사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상상력은 끝이 없어서 편린(片鱗)에 불과한 자료를 가지고 사람의 상상력에 의지하여 별의별 생각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칫 진실과는 동떨어진 지론이 진실로 둔갑해서 다른 사람을 호도하거나 혼란시키고 조상을 욕보일 수도 있다.

 

비근한 예로 「시조는 당 고종 현경5년, 서기 660년에 소정방을 따라 백제 정벌차 와서 백제 정벌 후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서 벼슬하여 태종무열왕으로부터 연안백(延安伯) 작위를 하사 받았다고 하는데  황해도 ‘연안(延安)’이란 지명이 생겨난 것은 고려 충선왕 2년, 서기1310년 이므로 우리 연안이씨의 본관 ‘연안(延安)’은 황해도 연안과는 무관하고, 시조의 연안백 작위에서 유래되었다」는 본관 연원에 관한 한 주장은 언뜻 보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진실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수히 많은 불확실한 사실들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시조 동래 당시 즉 신라시대부터 성씨에 본관(本貫)제도가 있었는가? 연안백(延安伯)의 ‘연안’은 어디에 연원하는가?  그러면 왜 많은 선조들이나 종합보서를 쓴 사람들이 연안이씨 사람들을 황해도 연안이 관향이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등등—

 

그래서 신뢰성 있고 명명백백한 사실 자료가 나오기 전에는 함부로 전통적인 지론을 바꾸어서는 아니된다. 다만 연구를 위한 가설(假說)의 제기는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고 탐구의 바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비록 과문하지만 내 나름대로 모아 본 시조(始祖) 관련 자료들을 시조 연구에 보탬이 되고자 종보에 게재합니다.

 

1. 연안이씨 시조에 대한 보서기록과 사적

. 종합보서(綜合譜書)

연안이씨(延安李氏) 시조(始祖)가 ‘이무(李茂)’라고 기록하고 있는 종합 보학서(譜學書)로는  

(1)    조선 현종 때(1660-1674) 정시술(丁時述)이 쓴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가 가장 먼저이고,

(2) 문헌비고(文獻備考, 영조46년 1770) 씨족고(氏族考),

(3) 전고대방(典故大方, 일제 1924) 만성시조편(萬姓始祖篇) 등이 있다.

 

전고대방 만성시조편의 경우 전주이씨(全州李氏), 경주이씨(慶州李氏) 다음에 이씨(李氏)로는 세 번째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고, 문헌비고 씨족고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延安李氏始祖唐高宗時以中郞將從蘇定方東來平百濟乃留仕新羅賜籍延安封延安伯

연안이씨시조무 당고종시이중랑장종소정방동래평백제내유사신라사적연안봉연안백

 

당 고종 때 중랑장으로써 소정방을 따라 동쪽(우리나라)으로 와서 백제를 평정하고, 이어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니 연안(延安)에 관적(貫籍)을 내리고, 연안백(延安伯)에 봉하였다.

 

. 족보(族譜) 기록

연안이씨(延安李氏) 부사공파(副使公派) 세보(世譜)에 수록된 시조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안이씨 부사공파 세보의 시조 기록

「始祖李茂唐高宗顯慶五年公以中郞將從蘇定方名烈伐百濟」

  (시조이무당고종현경오년공이중랑장종소정방[명열]벌백제)

 

시조 이무(李茂)는 당(唐: 중국 당나라) 고종(高宗: 3대) 현경(顯慶: 당 고종 때 연호) 5년(서기 660년)에 공은 중랑장(中郞將)으로써 소정방(蘇定方: 이름 烈)을 따라 백제(百濟)를 정벌하러 왔다.

 

「濟平仍留不歸着籍延安延之李氏自此始」

   (제평잉유불귀착적연안연지이씨자차시)   

 

백제를 평정하고 그대로 머물러 (당나라로)돌아가지 않고 연안에 관적을 두니 연안이씨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且流傳李氏譜派有三而皆失於三別抄之難其先隴西人云」

   (차유전이씨보파유삼이개실어삼별초지난기선농서인운)

 

또 세상에 전해 오는 바로는 (연안)이씨의 보파(譜派)는 3개가 있는데 모두 삼별초의 난(三別抄之難)때 분실되었다. (시조의)선계(先系)는 농서인(隴西人: 농서이씨, 唐 宗姓)이라 한다.

 

  按東京西岳誌新羅太宗七年卽顯慶庚申而以歷代傳世圖攷之則自庚申至我」

   (안동경서악지신라태종칠년즉현경경신이이역대전세도고지칙자경신지아)

 

동경서악지(東京西岳誌)를 살펴보면 신라(新羅) 태종(太宗: 29대 태종무열왕) 7년(서기660년)이 즉 현경(顯慶) 경신년(庚申年)이다. 역대전세도(歷代傳世圖)로써 고찰해 보면 곧 경신년으로부터 지금 우리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세보 기록은 다른 파도 대동소이하다.

 

. 봉 연안백(延安伯), 연안후(延安侯) 관련 자료

연안백(延安伯)은 신라 태종무열왕이 백제 정벌 후 시조 중랑장공에게 내린 작위로 당나라 때 작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백작(佰爵)으로 정4품에 해당하고, 식읍(食邑)이 700호로 알려져 있다.

 

또 다소 과장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신라 김유신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흥무왕실기(興武王實記)에 시조 중랑장공께서는 신라 문무왕에 의하여 연안후(延安侯: 侯爵, 종3품, 식읍 1000호)에 가봉(加封)되었다는 다음 기록이 있다.

 

「先生復奏曰唐將李茂救我新羅同滅百濟又使唐羅和合功不小今鎭守西藩宜加爵

以禮待之王曰此寡人之意也乃以李茂封延安侯食采邑一千戶盖欲賓之而不臣彦」

선생복주왈당장이무구아신라동멸백제우사당라화합공불소금진수서번의가봉

작이예대지왕왈차과인지의야내이이무봉연안후식채읍일천호개욕빈지이불신언

 

선생(김유신)이 주청하기를“당나라 장수 이무(李茂)는 우리 신라를 구하였으며, 함께 백제를 멸하였고, 또 당으로 하여금 신라에 화합하게 하여 그 공로가 작지 아니하며, 지금은 서번(西藩: 서쪽 변경, 지금의 황해도 연안 일원으로 추정됨) 진수(鎭守: 군사상 중요한 요지를 든든히 지킴)하고 있으니 의당 작위를 가봉하여 예우하소서” 하니. 왕(문무왕)이 말하기를 ”이는 과인의 뜻이라”하면서 이어서 이무(李茂)로써 연안후(延安侯)로 하고, 식읍 1천호를 내리고 대개 빈객으로 하고 신하라 하지 않으려 했다.

 

이로써 1954년 대전 유성 갑동에 복원한 묘소의 묘표(墓表)와 1981년에 건립한 시조 중랑장공 신도비에는 연안후(延安侯) 작위를 기록하고 있다.

 

. 시조 신도비문: 1981년 이병구 찬

始祖姓李諱茂 新羅延安侯 太宗武烈王七年卽西紀六六0年以唐中郞將與蘇定方來援新羅三國統一之業從戰有功定方謀反征新羅之計始祖諭  意爲羅唐和合之義德乃成羅代中興之基續偉乎大재不還本國留仕新羅太宗武烈王賜籍延安封延安伯因爲本貫至文武王八年元師金庾信奏請追封延安侯食邑一千戶以禮賓待之是爲我始祖也

 

시조성이휘무 신라연안후 태종무열왕7년즉서기660년이당중랑장여소정방

래원신라삼국통일지업종전유공정방모반정신라지계시조론 의위나당화합지

의덕급겅나대중흥지기속위호대재불환본국유사신라태종무열왕사적연안봉연안백인위본관지문무왕8년원사김유신주청추봉연안후식읍일천호이예빈대지시위아시조야

 

우리의 시조는 성은 이씨요 휘가 무이시고 작위는 신라 연안후이시다. 시조께서는 신라 태종무열왕 7년 즉 서기660년에 당나라 중랑장으로써 소정방과 함께 신라의 원군으로 오시어 삼국통일의 대과업을 이룩하려는 전진에 종군하시고 큰 공을 세우신 분이다.

 

그리고 소정방이 백제전의 승세를 몰아 신라까지 정복코자 밀계를 모의하므로 소정방을 경계하고 만류하여 반정의사를 번복시켜 두 나라가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의덕이 되고 신라 중흥의 기반이 되었으니 시조의 그 공적은 이토록 위대하셨도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여 태종무열왕이 연안을 사적하고 연안백에 봉하니 이로 인하여 본관을 삼았다. 문무대왕 8년에 김유신 원수가 연안후로 추봉하여 식읍1천호와 빈객의 예로써 대우할 것을 주청했으니 이 어른이 곧 우리의 시조이시다.

 

복원된 시조 묘소와 묘표 및 신도비

 

 

. 시조 묘지석(墓誌石)

지금부터 182년전인 조선 순조21년(1821) 충청도 괴산의 월계공(月溪公: 李文愚)이 수차 황해도 연안을 왕래하면서 연안부 서쪽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에서 ‘延安伯李茂’(연안백이무)라 음각된 묘지석을 굴득(屈得)하여 지금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고, 상세한 굴득일기(屈得日記)가 전해지고 있다.

 

묘지(墓誌)는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간단한 행적 등을 사기나 돌에 새겨 무덤 옆에 묻거나 관(棺), 호(壺)에 직접 새기기도 하는데 광지(壙誌) 또는 택조(宅兆)라고도 한다.

 

월계공이 굴득한 묘지석과 굴득일기

 

. 효령사(孝靈祠) 향사(享祀)

경북 군위 제동서원(濟東書院) 효령사(孝靈祠)에 김유신(金庾信),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延李 시조 이무(李茂)가 배향되어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효령사

 

제동서원 및 효령사의 안내판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때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정벌키 위해 경주-영천-소계를 거쳐 일선군(현 효령면 장군리)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이 곳에서 하룻밤 유숙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려말엽(1390년대)에 주민들이 옛 일을 추모하여 사당(祠堂)을 지어 속칭 장군당(將軍堂)이라 하고 3장군(金庾信, 蘇定方, 李茂)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치렀으며 1874년경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중건하고, 1846년경 제동서원(濟東書院)을 짓고 위패를 서원에 모심.    효령사는 맞배와가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였으며 효령사유지비(孝靈祠遺址碑)만 남아 있던 곳에 1988년 군(郡)에서 안동대학에 요청하여 완성한 장군당복원학술조사보고서에 근거하여 1994년-1995년에 걸쳐 복원하고 효령사(孝靈祠)로 개칭했다

 

2. 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벌 및 전후처리에 관한 역사

. 백제 멸망

이선근(李宣根) 저 「대한국사(大韓國史)」에서 신라와 당이 나당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 정벌에 나서기까지 신라, 고구려, 백제 3국과 당나라 간의 정세와 김춘추(金春秋)의 구국외교(救國外交)와 나당연합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전말을 살펴보자.

 

선덕여왕11년(642)은 신라에 있어 최대의 위기였다. 이해 7월에 백제 의자왕은 신라 서쪽 40여성을 빼앗아 갔고,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尹忠)이 대야성(大耶城: 현 陜川)을 함락시키고 도독 품석(品釋: 김춘추의 사위) 부부 등을 살해하였으며, 또 여-제 양국이 손을 잡고 신라의 대당교통로(對唐交通路)인 당항성(唐項城: 경기 화성 南陽)을 공격하려고 위협하였다.

 

김춘추는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를 잃은 사정(私情)도 없지는 않지만 그 보다도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군사력으로는 두 나라(고구려와 백제)를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외교로서 타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1단계로 고구려에 직접 가서 외교전을 벌리기로 마음먹었다.그것은 두나라 다 적대국이지만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를 만나면 타개책이 나올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왕(선덕)에게 승낙을 얻고 김유신장군과 60일간으로 기한을 정하고 그 기간이 넘을 경우 준비한 대비책을 시행하기로 피로써 맹세하고 떠났으나 고구려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냉대와 죽령 이북의 땅을 내 놓을 것을 요구하여 김춘추가 반대하자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그러나 비밀리에 사람을 신라로 보내 처해 있는 상황을 알렸고 김유신이 앞장 서 1만병을 모병하여 고구려 국경을 쳐들어가니 고구려는 중국의 당과 긴장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마당에 신라와 전면전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김춘추를 탈출할 기회를 주어 김춘추는 무사히 귀국하였다.

 

김춘추는 2단계로 당나라와의 외교전에 들어간다. 이듬해인 선덕여왕12년(643)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도 당나라에 와 있는 상태에서 사신이 당나라로부터 신라가 수용할 수 없는 모욕적인 3가지 제안을 받고 아무 소득 없이 귀국한다.

 

당태종이 안시성 싸움에서 패한 후 진덕여왕2년(648) 김춘추는 직접 당아라에 건너간다. 당태종은 김춘추의 의표가 당당함을 보고 호감을 가지고 후대하면서 자기의 저서 온양비(溫陽碑)와 진서(晉書)를 주자 김춘추는 더욱 접근하기 위해 '조정의 예복을 당의 제도에 따라 고치겠다'고 약속하고 동행한 아들 문주(文注)를 당에 숙위(宿衛)하게하였다. 귀국길에 고구려군과 조우하여 죽을 고비에 온군해(溫君解)가 대신 김춘추 행세를 하여 살해되고 김춘추는 무사히 귀국하였다.

 

서기654년 김춘추가 왕위(太宗武烈王)에 오르자 5월에 이방부령(吏方府令)을 고치는 등 국방력 강화에 착수하였으나 이듬해(655) 1월 고구려가 백제, 말갈 등과 연합하여 쳐들어와 북쪽변경의 33성을 빼앗아 가자 당에 급보를 띄우고 구원병을 요청하자 당은 연주도독 정명진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으로 고구려를 치게 하니 신성(新城: 지금의 무순 부근)의 서남쪽 귀단수에서 고구려군과 접전을 해 깨뜨리고 촌락을 불사르고 돌아갔고, 이듬해 또 정명진 등을 시켜 고구려의 적봉진(赤峰鎭)을 공격했으나 별 성과없이 돌아갔다.

 

태종무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비교한 후 백제를 먼저 정벌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고 백제정벌계획을 당나라에 알렸다.

 

그리하여 태종무열왕7년(660, 唐 高宗 顯慶5년) 3월에 당 고종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편성하고 본격적으로 백제쟁벌에 나서게 된 것이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지휘편성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소정방(蘇定方: 左武衛大將軍)

                부대총관(副大摠管): 김인문(金仁問: 태종무열왕의 왕자)

                        장군(將軍): 유백영(劉伯英: 左驍衛 將軍)

                        장군(將軍): 풍사귀(馮士貴: 右武衛 將軍)

장군(將軍): 방효공(龐孝公: 左驍衛 將軍)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 무열왕(武烈王: 新羅王)

* 나당연합군 지휘편성에 시조 중랑장공은 들어있지 않다.

 

「당군 13만은 내주(萊州: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6월 21일 덕물도(德勿島: 현 德積島)에 도착하여 마중 나간 신라 태자 법민(法敏)과 만나 연합작전에 필요한 기본적인 약속으로 7월 10일 백제의 남쪽에서 양국군이 만나 백제 의자(義慈)의 도성을 격파하자꽣 약속하고 수륙으로 협공하기로 한다.

 

이후 당군에 호응하여 신라의 김유신, 품일, 흠춘 등 장수와 정병 5만은 7월 9일 육상으로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의 계백 5천 결사대와 조우하여 상당한 고전을 하다가 흠춘의 아들 반굴과 품일의 아들 관창의 용맹스런 죽음에 힘입어 백제군을 전멸시키고 사비성(부여)로 진격하고, 당군은 백강(금강)을 따라 해로로 사비성에 이르러 나당연합으로 의자왕과 태자 효가 웅주로 도주하고 없고 대신 차자 태(泰)가 지키고 있는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사비성 함락 소식을 듣고 서기660년7월18일 백제 의자왕과 태자 효(孝)도 웅진으로부터 찾아와 항복하니 백제는 31왕 678년만에 망했다.」

 

. 당의 전후처리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12,807명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개선하고, 백제의 고토에는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를 설치하고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1만과 함께 사비성을 지키게 하였다. 당고종은 그 뒤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파견했는데 부임전 병사하여 다시 유인궤(劉仁軌)를 임명하였다.(이선근 저 대한국사)

 

최동(崔棟) 저 서울동국문화사 발행 「朝鮮上古民族史(조선상고민족사)」 의 ‘백제의 망국’편에 보면

「당은 또 유인궤라는 자를 ‘대방주자사(帶方刺使)’라는 새로운 직명으로서 백제 전국통치자로 임명하였으되 신라와는 사전 상의도 없었다.

이는 당이 백제의 땅을 『帶方州(대방주)』라는 신명칭 하에 영구 점령할 계획일 뿐만 아니라 신라본토를 공격하여 신라까지도 병합할 기세였다.

 

그것은 당고종이 본래 소정방의 백제 침입시에 혹 가능하면 소정방의 신라침입을 약속한 듯하니 즉 신라국까지 병탄(倂呑)하려던 의도였던 것이다.

 

그 증거로서는 金庾信傳(김유신전)에

「定方(정방), 旣獻 人孚 (기헌부). 天子慰藉之曰(천자위자지왈), 何不因而伐新羅(하불인이벌신라) 定方曰(정방왈)-(중략)-雖小不可謨也(수소불가모야)」

 

소정방이 가져 온 것을 바치니 천자가 위로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느냐?” 하니, 소정방이 대답하기를 -

(신라는 임금이 어질어서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아랫사람들은 웃어른 섬기기를 제 부모형제 섬기듯 하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하였다.」

 

. 당고종(唐高宗) 현경(顯慶)과 중랑장(中郞將)에 관한 자료

고종(高宗)은 당나라 제3대 황제이며 현경(顯慶)은 연호(年號)이다. 고종은 재위 34년 동안에 모두 14개의 연호를 갖는데 두 번째 연호가 현경이다.

당 고종의 연호

연호

永徽

영휘

顯慶

현경

龍朔

용삭

麟德

인덕

乾封

건봉

總章

총장

咸亨

함형

上元

상원

儀鳳

의봉

調露

조로

永隆

영융

開耀

개요

永淳

영순

弘道

홍도

기간

6

5

3

2

2

2

4

2

3

1

1

1

1

1

서기

650-

656-

661-

664-

666-

668-

670-

674-

676-

679

680

681

682

683

 

즉 고종 7년(신라 태종무열왕3년, 고구려 보장왕15년, 서기656년)부터 고종10년까지 5년간이다. 따라서 현경5년은 당 고종10년이고, 신라 태종무열왕7년이며, 서기660년이다.

 

중랑장(中郞將)은 당나라 무관의 계급으로 당나라 무관 직계(職階)를 구하지 못하여 정확한 직위를 알 수 없으나 참고로 소정방(蘇定方)의 계급과 인물 소개를 보면 대장군 바로 아래 계급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종 때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석형도 포함)이 문종1년(1451)-세조1년(1455) 간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며 국방부전사편찬위원화 역 군사문헌집 2호의 「동국병감(東國兵監)」상권‘신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다’는 제목의 글과 소정방에 관한 주해에는

 

“소정방은 당나라 초기 장군으로 이름은 소열(蘇烈)이며, 정방(定方)은 자(字)임. 수나라 두건덕의 휘하에 있다가 수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 귀순하여 당 태종4년(630) 이정의 선봉장으로 동투르크(동돌궐)을 정복한 후 자무위(左武衛) 중랑장(中郞將)에 올랐다."고 되어있다.

 

당 고종6년(永徽 6년, 서기655년) 고구려가 백제, 말갈 등과 함께 신라를 침공하여 서북쪽 변경 33성을 빼앗아 가자 신라는 급히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 고종은 영주도독 정명진과 소정방으로 고구려를 치게하였는데 이 때 소정방의 직위와 직계가 좌우위(左右衛) 중랑장(中郞將)이다.

 

위「동국병감(東國兵監)」상권 소정방에 관한 주해에 계속해서“고종8년(657)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 원정군사령관)으로 서투르크(서돌궐)을 격파한 후에 좌효위(左孝衛) 대장군(大將軍)에 오르고, 형국공(邢國公)에 봉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종10년(현경5년,서기660년) 나당연합으로 백제를 침공할 때 소정방의 직위와 직계는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좌무위(左武衛) 대장군(大將軍)이었다.

 

이를 종합하면 소정방은 당 태종4년(630)중랑장에 승진하였고, 고종6년(영휘6년, 655)경 중랑장으로서 고구려 침공에 나섰고, 고종8년(현경2년, 657)경대장군에 승진하였으며, 고종11년(현경5년, 660)에는 대장군으로서 신구도행군대총관(나당연합군총사령관)으로 백제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따라서 소정방이 중랑장-대장군 순으로 진급한 것으로 보아 당의 '중랑장'은 대장군 바로 아래 계급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요즈음 진행중인 KBS 1TV 주말 연속방송 ‘무인시대’에 나오는 고려 때 무관의 계급과는 차이가 있는 듯 하다. 고려 때 무관의 계급은 다음 표와 같이 장군 아래 중랑장이 이 있다.

 

고려 무인 계급

계급

上將軍

상장군

大將軍

대장군

將軍

장군

中郞將

중랑장

郎將

낭장

長史

장사

別將

별장

錄事

녹사

散員

산원

隊正

대정

품계

3품

3품

4품

5품

6

6

7

8

8

9

9

 

. 당의 철군과 시조의 잔류관련 자료

위「동국병감(東國兵監)」에는

「소정방이 원정군의 주력을 정돈하여 귀국하자, 신라 무열왕 역시 제강, 천복 등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승전을 보고하였다」

補註 「소정방이 주력을 이끌고 급거 귀국한 원인은 중국 서부 변경에 있는 티베트족(吐番族) 세력이 당시 양주(凉州: 甘肅省)와 선주(敾州: 新疆省) 일대를 침공함으로써 이들 티베트군을 우선적으로 방어하라는 당 고종의 명을 받고 백제 땅의 치안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채 귀국한 것이었다. 이로써 신라는 소수의 당 나라 주둔 병력을 거의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전개하여 백제의 영토를 잠식할 수 있었다. 당시 소정방이 사비성에 잔류시킨 유인원의 당군은 1만 명 이었으며, 여기에 신라는 병력 7천 명을 함께 주둔시켜 당군을 지원하면서 백제의 부흥군을 격파하는 한편, 당군의 행동을 견제하여 사비성 이외의 지역을 신라군이 공취(攻取)하도록 방조하였다」고 보강해서 주해를 달고 있다.

 

* 이렇게 소정방이 불안하게 주둔군 1만 명을 잔류시키면서 ① 당 종실인으로 믿을 수 있고 ② 신라에 은혜를 베풀었고(무술대회), 신라와 우호적이며 외교적 수완이 있는 시조 중랑장공을 함께 잔류시켰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후 백제 부흥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당군이 열세로 몰린 상황과 개인적인 신라와의 친교에 따라 당 잔류군이 귀환할 때 중랑장공은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3.  기타 시조와 관향 관련 기록

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시대 인물지리서, 세종14년(1432) 신찬팔도지리지→성종12년(1481) 여지승람→성종17년(1486) 동국여지승람→중종25년(1530) 신증동국여지승람.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건치연혁(建置沿革)

「本高句麗冬音忽音一作 云 鹽城新羅改海皐郡高麗初稱鹽州成宗置防禦使顯

宗初廢防禦使屬海州後置監務高宗以禦丹兵有功陞永膺縣令後又以縣人車松祐有衛社功陞知復州事元宗又以李汾禧有衛社功改碩州忠烈王又陞溫州牧忠宣王汰諸牧降爲府改今名」

 

(본고구려동음홀음일작삼운시염성신라개해고군고려초칭염주성종치방어사현종초폐방어사속해주후치감무고종이어란병유공승영응현령후우이현인차송우유위사공승지복주사원종우이이분희유위사공개석주충렬왕우승온주목충선왕태제목강위부개금명)

 

  본래 고구려 동음홀인데 일명 시염성이라고도 함

  신라 때 해고군으로 개칭되고,

  고려 초에 염주라 불렀으며,

  성종 때 방어사를 설치하였다가

  현종 초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해주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고,

  고종 때 글안병의 침입을 막는데 공이 있어 영응현령으로 승격시키고,

  후에 또 이 현 사람 차송우가 위사공이 있어 지복주사로 승격시키고,

  원종 때 이분희의 위사공으로 석주로 개칭하고,

  충렬왕 때 온주목으로 승격시켰으며,

  충선왕 때 여러 목을 부로 강등할 때 지금의 이름(연안)으로 개칭하였다.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군명(郡名)

  冬音忽 豉鹽城 海皐 鹽州 永膺 溫州 五原 陽原 復州 石州

동음홀 시염성 해고 염주 영응 온주 오원 양원 복주 석주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성씨(姓氏)

  (本府) 宋   洪 高 康 田 全 鄭  車 盧 竝村     段 黃 崔 竝續

  (본부) 송   홍 고 강 전 전 정  차 노 모두 촌  단 황 최 모두 속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인물(人物) 본조(本朝)

(延李만 拔萃, 연안김씨12인 생략)

李貴齡官至右議政我太祖潛邸時有盧관之舊弟貴山官至觀察使

 

李石亨正統辛酉進士生員文科三榜皆居魁成宗朝爲佐理功臣官至領中樞府事封延城府院君諡文康

 

李補丁等第累歷臺閣官至禮曺參判

 

李崇元癸酉科壯元參佐理功臣官至刑曹判書封延原君

 

李淑琦再捷武擧參敵愾佐理功臣封延安君弟淑咸中甲戌科又擢重試拔英二科官至吏曹參議有文名

 

이귀령관지우의정아태조잠저시유노관지구제귀산지관찰사

 

이석형정통신유진사생원문과삼방개거괴성종조위좌리공신관지영중추부사봉연성부원군시문강

 

이보정등제누역대각관지예조참판

 

이숭원계유과장원참좌리공신관지형조판서

본연원군

 

이숙기재첩무거참적개좌리공신봉연안군제숙함중갑술과우탁중시발

영이과관지이조참의유문명

 

이귀령: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고, 우리 태조 잠저 때에 노관의 옛 정(盧관之舊)이 있었다. 아우 귀산은 관직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이석형: 정통 신유년(세종23년, 1441)에 진사, 생원, 문과 삼 방에 모두 장원으로 올랐고, 성종조에 좌리공신이 되고, 관직이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강이다. 

 

이보정: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간관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이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이숭원: 계유년(단종원년, 1453)과거에 장원하였고, 좌리공신에 참여하였으며 관직은 영조판서에 이르렀고, 연원군에 봉해졌다. 

 

이숙기: 두 번 무과에 합격하고 적개, 좌리공신에 참여하였으며 연안군에 봉해졌다. 아우 숙함은 갑술년(단종2년, 1454) 과거에 급제하고 또 중시, 발영시 두 과거에 선발되었으며 관직이 이조참의에 이르렀고 문명이 있었다.

* 이는 동국여지승람이 황해도 연안이 연안이씨의 본향임을 말해 주는 기록.

 

. 고려사(高麗史): 고려 34왕 475년간의 정사. 세종 때 왕명으로 사국(史局)을 열고 정인지, 김종서등에 명하여 편찬을 시작하여 문종1년(1451)에 완성하고, 단종2년(1454) 간행하였다. (편찬에 저헌 이석형도 참여) 

 

第十二地理三 염주(鹽州)

鹽州本高句麗冬音忽音一作一云豉鹽城新羅景德王改爲海皐郡高麗初更今名鹽州成宗十四年置防禦使顯宗初廢防禦使來屬海州後置監務高宗四年以禦丹兵有功陞爲永膺縣今官四十六年以縣人將軍車松祐有衛社之功陞知復州事元宗十年又衛社功臣李汾禧之鄕改石州忠烈王三十四年又陞爲溫州牧忠宣王二年汰諸牧降爲延安府別號五原成廟行定有大堤號曰南大池州東氈城古祭天壇

염주본고구려동음홀음일작일운시염성신라경덕왕개위해고군고려초경금명염주성종십사년치방어사현종초폐방어사래속해주후치감무고종사년이어란병유공승위영응현금관사십육년이현인장군차송우유위사지공승지복주사원종십년우위사공신이분희지향개위석주충렬왕삼십사년우승위온주목충선왕이년태제목강위연안부별호오원성묘행정유대제호왈남대지주동전성고제천단

 

염주는 본래 고구려의 동음홀(일명 시염성)인데

신라 경덕왕 때 해고군으로 개칭하고,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염주)로 변경하였다.

성종14년 방어사를 설치하였다가

현종 초에 방어사를 폐하고 해주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감무를 설치하고,

고종4년에 글안병을 방어하는데 공이 있어 영응현으로 승격시켰고,

46년에 현 사람 장군 차송우의 위사지공이 있어 지복주사로 승격하였으며,

원종10년에 또 위사공신 이분희의 고향으로 석주로 개칭하였다.

충렬왕34년에 또 온주목으로 승격시켰고,

충선왕2년(서기 1310년)에 모든 을 없애면서 연안부로 강등하였다.

별호를 오원이라하고(성종때 정함),

큰 저수지가 있는데 남대지라 하며,

주 동쪽에 전성이라는 옛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단이 있다.

 

다.저헌공(樗軒公 휘 石亨)의 연안 취원루시(聚遠樓詩)

樓臺來自古(누대래자고) 누대(樓臺)는 예부터 전해오고

風物到于今(풍물도우금) 풍물(風物)은 지금까지 이르네

鏡瑩雲開浦(경영운개포) 구름 끼니 포구(浦口)는 거울처럼 빛나고

藍靑雨後岑(남청우후잠) 비 그치니 뫼는 쪽빛으로 푸르네

寒門玆籍貫(한문자적관) 우리 가문 이 고을이 관향(貫鄕)이라

暇日故登臨(가일고등임) 여가를 타서 짐짓 올라 보았도다

從有王公賦(종유왕공부) 비록 왕공(王公)의 노래는 있으나

寧懷感慨心(영회감개심) 차라리 감개한 마음 생기네

 

*저헌공은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황해도 ‘연안’의 지명이 시조 보다 훨씬 후에 생겨났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라.청련공(靑蓮公 휘 後白)의 청련집(靑蓮集) 목판본(木版本)

* 청련집(靑蓮集) 목판본(木版本) '청련선생이공행장(靑蓮先生李公行狀)'에 청련공의 본관(本貫)이 황해도(黃海道) 연안부(延安府) 임을 명기하고 있다.

]

. 야후백과사전

 연안부(延安府)

개요: 황해도 연백군에 있던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내용: 고구려 때 동음홀(冬音忽: 棺鹽城), 통일신라 때 해고군(海皐郡), 고려 초에 염주(鹽州), 고종 때 영응현(永膺縣), 복주(復州), 원종 때 석주(碩州), 충렬왕 때 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내려 오다가 충선왕 때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조선 태종 때는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로 올려 경기에서 황해도로 이관하고 1895년 연안군(延安郡)으로 되었으며 1914년 백천군을 합하고 평산군의 일부를 편입하여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 문헌비고(文獻備考) 씨족고(氏族考)-상권

「延安李氏始祖茂 唐高宗時以中郞將從蘇定方東來平百濟仍留新羅賜籍延安封延安君子孫分爲各派

(연안이씨시조무 당고종시이중랑장종소정방동래평백제인유신라사적연안봉

연안군 자손분위각파)

 

연안이씨 시조 이무는 당고종시 중랑장으로써 소정방을 따라 동쪽으로 와서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머무니 연안에 적을 내리고 연안군을 봉하였는데 자손이 여러 파로 갈라졌다. (각파 주요인물 열기)

 

. 연안에 본관을 둔 성씨 시조기록(典故大方 萬姓始祖篇)

①「延安李氏始祖茂 唐高宗時以中郞將從蘇定方東來平百濟乃留仕新羅賜籍延安封延安伯」(연안이씨시조무 당고종시이중랑장종소정방동래평백제내유사신라사적연안봉연안백)

 

延安金氏始祖暹漢 四門博士,新羅時有王子兄弟以直諫 主意謫遠地兄居北濱京今江陵弟居 鹽城今延安子孫因以爲鄕」(연안김씨시조섬한사문박사, 신라싱유왕자형제이직간오주의적원지형거북빈경금강능제거시염성금연안자손인이위향)

 

延安車氏始祖孝全 本姓柳氏文化人車達長子麗太祖賜姓車氏賜籍延安後孫原 我朝開國初鄭道傳所殺」(연안차씨시조효전 본성유씨문화인차달장자려태조사성차씨사적연안후손원부아조개국초정도전소살)

 

延安印氏始祖俠 輔佑功臣檢校政承平陽君莊惠公, 本蒙古人初名忽刺범從濟國公主東來高麗忠烈王命改今名又與大將軍印公秀善借其姓爲氏」(연안인씨시조협 보우공신검교정승평양군장혜공, 본몽고인초명홀자범종제국공주동래고려충렬왕명개금명우여대장군인공수선차기성위씨)

 

延安宋氏始祖光彦 高麗恭愍時以原州牧使戰亡」(연안송씨시조광언 고려공민왕시이원주목사전망)

 

延安高氏始祖宗弼 本朝文慈山郡守」(연안고씨시조종필 본조문자산군수)

 

延安가氏始祖由仁 本朝縣監鄭莊公弟叔 之後因以名爲氏」(연안가씨시조유인 본조현감정장공제숙하지후인이연위씨)

 

延安天氏 本朝正祖天命翊登進士」(연안천씨 본조정조천명익등진사)

 

延安炭氏(연안탄씨) 」, -시조기록 없음-

 

延安憚씨(연안탄씨) 」, -시조기록 없음-

 

延安呑氏(연안탄씨) 」  -시조기록 없음-

 

① 연안이씨 시조 무(茂)는 당나라 고종 때 중랑장으로써 소정방을 따라 동쪽(우리나라)으로 와서 백제를 평정하고, 이어 머물러 신라를 섬기니 연안(延安)에 적(籍)을 내리고, 연안백(延安伯)에 봉하였다.

 

② 연안김씨시조 섬한(暹漢)은 사문박사이다. 신라 때 왕자형제가 있었는데 직간하다가 임금의 미움을 사서 원지에 유배되었다. 형은 북빈경(北濱京)에 살게 되었는데 지금의 강릉(江陵)이고, 동생은 시연성( 鹽城)에 살게되었는데 지금의 연안(延安)이다. 자손들이 이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③ 연안차씨 시조 효전(孝全)은 본래 문화유씨였는데 고려 태조(918-943)가 차달의 장자에게 차씨 성을 내리고 연안에 적을 내렸다. 후손 차원부(車原부) 우리 조선 개국 초에 정도전에게 죽었다.

 

④ 연안인씨 시조 협(俠)은 보우공신으로 검교정승을 지낸 평양군 장혜공이다. 본래 몽고인으로 초명이 홀자범으로 제국공주를 따라 동쪽(우리나라)로 와서 고려 충렬왕(1273-1308)이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도록 명하였다. 또 대장군도 내렸다. 인수선은 이를 성으로 삼았다.

 

⑤ 연안송씨시조 광언(光彦)은 고려 공민왕 때 원주 목사로 전사하였다.

 

⑥ 연안고씨시조 종필(宗弼)은 조선조 문과에 급제하고 자산군수를 지냈다.

 

⑦ 연안가씨 시조 유인(由仁)은 조선조 현감 정장공의 아주 숙가의 후손들이 이름자를 성씨로 삼았다.

 

⑧ 연안천씨는 조선 정조 때 천명익(天命翊)이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 위 기록에서 연안김씨, 연안차씨. 연안인씨가 우리 연안이씨처럼 황해도 연안 지명이 생기기 전에 시조와 성씨가 생겼다.

 

. 연안 지명이 개명(改名)된 고려 충선왕2년 전후 역사

황해도 연안 지명은 고려 충선왕 2년(서기1310년)에 온주목(溫州牧)에서

연안부(延安府)로 개칭되었다. 이를 전후한 역사를 이선근박사 저 「대한국사」에서 찾아보면 개명의 배경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1) 충선왕, 전지(傳旨) 만으로 나라를 다스리다(요약)

충선왕은 그가 즉위하기 석달 전인1308년 5월에 원 무종으로부터 그 전 해의 공로를 인정받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즉위한 지 두 달 뒤인 1308년 10월에 원 무종이 보낸 온 조서를 보면 충선왕을 가리켜「征東行中書省右丞相高麗國王開府儀同三司太子太師上柱國駙馬都尉瀋陽王(정동행중서성우승상고려국왕개부의동삼사태자태사상주국부마도위심양왕)」이란 호칭이 보인다.

 

충선왕은 그처럼 원 무종의 지지를 획득하자 그 해 11월에 우선 팔관회를 금하고, 전에 못다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때 교서를 보면 ‘조세를 균등히 하고, 부역을 정해 놓을 것’ 등 6가지였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 공주의 소생으로 그도 역시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며 세자 때부터 오랫 동안 원나라에서 생활하여 그 곳의 정치인이나 문사들과 많이 어울려 지냈으므로 본국보다 원나라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으며, 정치보다는 문학에 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개경에는 아직도 충선왕의 혁신정치에 불만이나 불안을 느끼는 자들이 적지 않아서 거추장스러웠다.

 

이에 충선왕은 위의 서정쇄신을 명한지 며칠 안되어 다시 원나라로 떠나며 뒷 일은 제안대군 숙(淑)에게 떠맡겼다. 이 때부터 서기1313년(충선왕5년) 3월까지 약 5년의 제위기간중 왕은 단 한번도 본국에 나와보지 않고 연경(燕京) 생활을 즐기면서 가끔 전지(傳旨) 만을 보내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2) 충선왕의 양위

그 때 홍다구의 아들 홍중희라는 자가 요양행성의 요직에 있었는데 원나라 중서성에 참소하기를 그 전해(1308) 충선왕이 본국에서 관제(官制) 또 개혁하여 원나라 것을 참월(僭越: 분수없이 뛰어 넘음)했다는 것이다.

 

이에 입장이 난처해진 충선왕은 1309년 3월 본국에 전지를 보내서 근시다방(近侍茶房), 3관(三官), 5군(五軍) 등의 관제를 이전(충렬왕 때)과 같게 환원하고, 4월에는 밀직중방(密直重房)도 복구시켰다.

 

1310년(충선왕 2년) 10월에도 전지를 보내서 ‘내외(內外) 관사(官司) 가운데 상국(上國: 원나라)의 관명(官名)과 같은 것은 모두 뜯어 고치라’ 하였다. 이 전지에 따라 지방관청의 하나인 목(牧)을 부(府: 都護府)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본국에서 그 사이 국정을 실제로 책임지고 있던 전승 최유엄, 유청선 등이 여러 차례 왕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은 귀국할 의사가 전혀 없는지 1310년 1월에 왕위를 아예 세자 감(鑑: 원나라 여자 懿妃 也速眞의 소생)에게 물려 주려 하였으나 주위의 반대로 양위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 해 연경에서 그 해 세자 감과 그 종자 김중의 등을 죽였다.

 

(3) 연경의 태위왕(太尉王)

충선왕은 앞서 1313년 3월 고려국의 왕위를 축숙왕에게 물려 줄 때 심양왕의 지위 만은 그대로 가지고 있어 심왕(瀋王)이라 불리고 그의 형 강양공 자(滋)의 아들 연안군(延安君) 고(暠)를 세자로 삼아 다시 원나라에 간 충선왕은 1316년(충숙왕 3년) 2월 심왕의 지위마저 세자 고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태위왕(太尉王)이라고 칭하였다.

 

* 연안 지명이 온주목에서 ‘연안부’로 개명된 것이 위 ‘연안군’봉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 각종 延李 비문(碑文) 중 시조관련 기록

비명

연대/찬

시조관련 기록 내용

의정공

李元發

신도비

1938

이병관

始祖唐中郞將諱茂從蘇定方平百濟封延安伯因留新羅鎭撫之子孫遂爲延安人

  시조는 당나라의 중랑장 휘 무이니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여 연안백에 봉해졌는데 이로 인하여 신라에 머물러 진무하였으므로 자손들이 드디어 연안인이 되었다

李白謙

묘표

세종31 (1449)

按公始祖諱茂以唐中郞將伐百濟留封延安伯 공의 시조 휘 무는 당나라 중랑장으로써 백제를 치고 머물러 있다가 연안백에 봉해졌다.

저헌공

李石亨

신도비

인조2

(1624)/ 이정구

世傳延安之李來自唐中郞將李茂以副將從蘇定方平百濟留仕新羅賜籍于延安是其鼻祖云 공의 가문인 연안이씨는 당나라 중랑장 이무가 부장으로서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머물러 벼슬을 하게 되자 연안의 적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공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연천군

李補丁

신도비

성종12 (1481)/이숙함

公延安人---系出於延安侯諱茂也 

공은 연안인이니----연안후 휘무로부터 계출되었다.

연성군

李末丁

신도비

서기1978

/전윤석

姓李氏始祖諱茂唐高宗顯慶五年以大司馬中郞將從蘇定方伐百濟濟平仍留未歸着籍於延安延安之李自此始爲東方著姓 성은 이씨인데 시조는 휘 무로 당나라 고종 현경5년에 대사마 중랑장으로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정벌하러 와서 백제 평정 후 돌아기지 않고 연안에 적을 두니 연안이씨는 이로부터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직강공

李淑璜

묘갈

순조23

(1823)/ 이명적

始祖中郞將諱茂唐高宗時從蘇定方征百濟因留着籍延安 시조는 중랑장 이무이니 당나라 고종 때에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정벌하러 왔다가 연안에 정착하였기에 이를 관향으로 삼았다

 

정양공

李淑琦

묘표

서기1922

/이찬영

始祖諱茂以唐中郞將從蘇定方伐百濟留仕新羅封延安伯子孫籍焉 시조휘무가 당나라 중랑장으로서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치고 머물러 신라에 벼슬하여 연안백으로 봉해졌으니 이곳이 자손들의 관적(관향)이 되었다.

현감공

李元禮

유허비

서기1978

/이기원

公之先自中國渡來諱茂唐中郞將伐百濟有功留籍延安封延安伯 공의 선계는 중국으로부터 건너 온 휘 무는 당나라 중랑장으로서 백제를 정벌하는데 공이 있어 머물러 연안을 관향으로 삼고 연안백에 봉해졌다.

참의공

李亨禮

묘갈

명종17 (1562)/퇴계

이황

---姓李氏昔蘇定方之伐百濟野公之先祖諱茂實從之來因留不去而寓籍于延安延之有李氏自此始---성은 이씨이다. 옛날에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에 공의 선조 휘 무가 임무를 띄고 따라와 그대로 머물러 연안에 적을 붙였으니 연안이씨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대호군공

李孝長

묘표

서기1922

/이겸재

延安之李世稱東方大族唐中郞將李茂從蘇定方平百濟留仕新羅封延安伯是爲鼻祖 연안이씨는 대대로 동방의 대족으로 당나라 중랑장 이무가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여 연안백에 봉해졌으니 이 분이 비조이다.

연선군

李國柱

묘갈

명종12

(1557)/ 정사룡

侯自出大唐鼻祖李茂從蘇定方伐百濟署職郎將百濟旣滅茂獨留不去著着延安延之有李氏寔自玆始 후의 가계는 대당에서 나왔으니 비조 이무는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정벌하고 서직낭장이 되었다. 백제가 멸망하자 이무는 돌아가지 않고 혼자 남아서 연안에다 적을 두었으니 연안에 이씨가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청련공

李後白

신도비

서기1770년/

황경원

其先中國人也唐高宗顯慶五年中郞將茂從蘇定方平義慈留事金氏家海皐海皐於今延安故子孫爲延安人 그 선조는 중국사람인데 당 고종 현경 5년에 중랑장 이무가 소정방을 따라 백제 의지왕을 평정하고 머물러 김씨(신라왕)를 섬기고 해고(海皐) 땅에 집을 이루었다. 해고는 지금의 연안이다 이로써 그 자손들이 연안이씨가 되었다.

(銘)李自中國始徒于延 이씨는 중국에서 건너와 처음 연안으로 옮겨 살았네

정헌공

묘갈

인조11 (1633)

/홍성민

延安之李來自唐中郞將李茂越其遠祖 연안이씨는 당나라 중랑장 이무에서 유래하였으니 원조요.

의정공

李廷華

신도비

인조14 (1636)

/송준길

世傳延安之李來自唐中郞將李茂以蘇定方副將平百濟留仕新羅賜籍于延安

 연안이씨는 당나라 중랑장 이무가 소정방의 부장으로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머물러 살면서 벼슬을 하여 연안에 본적을 하사받았다.

李廷顯

묘갈

광해10 (1618)

/이정구

我李出自唐世傳中郞將李茂以蘇定方副將平百濟留仕新羅封延安君□延安人是其鼻祖 우리 이씨는 당나라에서 나왓다. 세상에는 중랑장 이무가 소정방의 부장으로 백제를 평정하였으며 신라에 머물러 벼슬을 하여 연안군에 봉해져 연안인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미 분이 바로 시조이시다.

삼등공

李계

신도비

인조7

(1629)

/ 신흠

世傳唐中郞將李茂從蘇定方平百濟留仕新羅賜籍延安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나라 중랑장 이무가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고 머물러 신라에 벼슬하여 본적을 연안으로 하사받았다.

송오공

李軫

묘갈

순조9

(1809)

/ 김굉

---延安人唐蘇定方東征百濟以中郞將從之來因留延安者曰茂卽其鼻祖 공---본관은 연안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동으로 백제를 정벌할 때에 중랑장으로 따라왔다가 연안에 머무르게 된 무가 곧 그 비조이다

남계공

李輔

묘갈

숙종40

(1714)

/권두경

延安之李出中國上祖茂唐初從蘇定方東征留寬延安 연안이씨는 중국에서 나왓다. 상조는 무니 당나라 초기에 소정방을 따라 동방을 정벌하고 그대로 머물러 연안을 관향으로 삼았다.

 

해고공

李光庭

신도비

인조14 (1636)

/이민구

李氏出延安  이씨는 연안에서 계출하였다

오봉공

李好閔

신도비

인조13 (1635)

/이명한

唐中郞將副蘇定方伐百濟乃留延安遂爲延安人 당아라 중랑장 무가 부장으로 소정방을 도와서 백제를 정벌한 것으로 인하여 연안에 머무르게 되었고 마침내 연안인이 되었다.

李喜男

묘표

정조22 (1798)

/이의조

我李系出延安始祖諱茂以唐中郞將從蘇定方東來平百濟留仕新羅乃籍于延安

 우리이씨는 계통이 연안에서 나왔으니 시조 휘 무가 당나라 중랑장으로 소정방을 따라 동으로 와서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여 이에 연안에 적을 하게되었다

연평군

李 貴

신도비

효종1

(1650)

/여이징

其先中國人唐之平百濟中郞將茂以諸將來留仕新羅居延安 그 선조는 중국 사람이다.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할 때에 중랑장 무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와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여 연안에 살았다

월사공

李廷龜

신도비

효종7

(1656)

/김상헌

其先有中郞將茂者唐高宗朝從蘇定方平百濟留仕新羅貫鹽城後改延安子孫遂爲延安人 그 선조에 중랑장 무라는 분이있어 당나라 고종조에 소정방을 쫓아 백제를 평정하고 머물러 신에 벼슬하여 염성(鹽城: 고구려 때 이름  鹽城)을 본관하였다. 염성이 후에 연안으로 고쳐지니 자손들은 드디어 연안사람이 되었다.

석흥군

李척

1963

/이의식

---延安人始祖唐大司馬中郞將新羅延安伯---연안인이다. 시조 당나라 대사마 중랑장 신라 연안백의 후손이요

죽창공

李時稷

묘갈

효종4

(1653)

/김상헌

--延安人唐高宗時中郞將茂從蘇定方平百濟留仕新羅賜籍延安子孫蕃衍也

 공--연안인이다. 당나라 고종 때 중랑장 무가 소정방을 따라서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벼슬하여 연안으로 적을 하사 받았으니자손이 번성하여 대대로 벼슬이 이어왔다

방초정

李廷馥

묘갈

헌종11

(1845)

/홍직필

---系出唐中郞將諱茂平百濟封延安伯子孫仍貫焉---세계가 당나라 중랑장 휘 무가백제를 평정하고연안백으로 봉해진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자손들이 이 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매헌공

李景賢

묘갈

효종10

(1659)

/ 조경

李出延安唐中郞將李茂實鼻祖也

이씨는 연안에서 나왔는데 당나라 중랑장 이무가 실로 비조이다.

연양군

李時白

묘표

숙종44

(1718)

/김주신

李氏系出延安

이씨의 계보는 연안에서 나왔다.

연안군

李 현

신도비

현종14

(1673)

/ 조경

---延安人延之李其稱盖久---연안인이다. 연안이씨는  그 내력이 오래되었다

사우당

李時聃

묘갈

광무5

(1901)

/송준길

公延安人延安之李皆祖於唐中郞將茂 공은 연안인이다. 연안이씨는 당나라 중랑장 무로 시조를 삼고--

李大喜

묘갈

인조20

(1642)

/신경직

李氏系出延安於世爲族最 이씨의 세계는 연안에서 나와서 세상에서 가장 번성한 가문이 되었다.

현주공

李昭漢

신도비

숙종1

(1675)

/송시열

李氏來自中國世傳中郞將茂從蘇定方平百濟留仕新羅仍籍于延安云 이씨는 본래 중국에서 들어 왔는데 세상에서는 당나라 중랑장 무가 소정방을 따라와서 백제를 평정한 뒤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다가 그대로 연안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李聖徵

신도비

경종1

(1721)

/권중경

---延安人世傳延安之李來自中州有諱茂從蘇定邦定百濟有功封延安伯仍留不還子孫仍籍焉---연안인이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연안이씨는 중국에서 와서 휘 무가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여 공이 있어 연안백에 봉해졌는데 그대로 머물러 돌아가지 않아서 자손이 관향으로 삼았다

청호공

李一相

신도비

숙종29

(1703)

/박세채

系出唐中郞將茂實隴西人 이씨는 당의 중랑장 무에게서 계출하였다.

銘曰 顯允大姓肇自隴西. 명왈 현윤한대성은 농서에서 비롯했도다

동리공

李殷相

신도비

숙종41

(1715)

/이이명

銘曰 鹽州之李來自唐

명왈 염주의 이씨는 당으로부터 오니

동둔공

李有相

묘갈

숙종36

(1710)

/이희조

公延安人姓李氏唐中郞將茂從蘇定邦東來是爲鼻祖 공은 연안인이요 성은 이씨이니당나라 중랑장 무가소정방을 따라서 백제를 평정하기 위하여 동래하여 시조가 되었다.

정관제

李端相

신도비

숙종27

(1701)

/송시열

公延安人唐中郞將李茂從蘇定邦平百濟留仕新羅回籍于延 공은 연안인이다. 당나라 중랑장 이무가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면서 연안으로 적을하였다

야계공

李益泰

묘갈

일제

(1924)

/송치규

姓李-系出延安唐中郞將李茂從蘇烈東征百濟有功食采于延安延之李始於此

공은 이씨요-관향은 연안으로 당나라 중랑장 이무가 소열을 따라 동으로 와서 백제를 정벌한 공으로 연안을 채지로 받았으니 연안이씨는 이에서 비롯되었다.

이우당

李萬元

신도비

순조1

(1907)

/채제공

公延安人唐中郞將茂之後也

공은 연안인이니 당나라 중랑장 무의 후예다.

외암공

李  

묘갈

고종19

(1882)

/박용대

始祖諱茂唐中郞將從蘇定方平百濟留封延安伯子孫因貫焉 시조는 휘가 무니 당나라 중랑장으로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고 머물러서 연안백에 봉해졌다. 자손들이 인하여 관향으로 삼았다.

李道基

묘갈

1915

/박유형

系出延安唐中郞將茂是其鼻祖

세계는 연안에서 나왔으니 당나라 중랑장 무가 그 시조이다

송벽당

李正臣

묘표

영조40

(1764)

/이철보

延安之李肇自唐中郞將茂從蘇定方平百濟冠纓歷勝國不絶 연안이씨는 당나라 중랑장 무가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정벌함으로부터 벼슬이 고려를 지나 끊이지 않았다

동애공

李 浹

묘갈

영조26

(1750)

/ 이익

延安之李本與唐同姓在新羅中郞將茂始東仍留貫又延 연안이씨는 본래 당나라 종실과 동성으로 신라 때에 중랑장 무가 동쪽으로 와서 그대로 머물러 본이 연안이 되었다.

식산공

李萬敷

묘갈

헌종2(1836)

/정범조

其遠祖唐宗室中郞將茂從蘇定方東征有功食於延安延安之李始此 그의 원조인 당나라 종실의 중랑장 무가 소정방을 따라 동정하여 공이있었기 때문에 연안을 식읍으로 받았으니 연안이씨가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삼수헌

李賀朝

묘표

숙종30

(1704)

/권상하

延安之李起自唐中郞將茂爲東方甲乙族

연안이씨는 당 중랑장 무에서 일어나 우리나라 명망있는 집안이 되었다.

李崇臣

묘표

영조34

(1759)

/이민보

李系延安 

이씨는 계통이 연안에서 나왔다

李亮臣

묘갈 

순조2

(1802)

/조관빈

延安之李肇自唐中郞將茂

 연안이씨는 당나라 중랑장무로부터 시작하였다.

李朝一

묘갈

일제

(1912)

/윤명섭

延安人唐中郞將諱茂與蘇烈平百濟有功食采于延安延之李始於也

연안인은 당나라 중랑장 휘 무가 소열과 함께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연안을 채지로 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李吉輔

묘갈

정조15

(1791)

/이복원

我李肇自唐中郞將諱茂從蘇定方平百濟留仕新羅封延安伯 우리 이씨의 시조는 당에서 중랑장을 지낸 휘 무로 그는 소정방을 따리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에 머물면서 벼슬을 하여 연안백에 봉해졌다

李敏輔

묘표

 

/이시원

延安李氏系出唐中郞將諱茂 연안이씨의 가계는 당나라 중랑장 휘 무로부터 나왔다.

쌍계공

李福源

묘갈

정조24

(1800)

/이시수

始祖 唐中郞將延安伯諱茂 시조는 당나라 때 중랑장으로 연안백을 봉작 받은 휘 무이다

극옹공

李晩

묘갈

순조22 (1822)

/이시수

延安之李祖于唐中郞將延安伯諱茂 연안이씨는 당나라 중랑장 연안백 휘 무를 시조로 한다.

금계공

李奉秀묘표

고종7

(1870)

/이봉수

延安之李以唐中郞將諱茂爲鼻祖 연안이씨는 당나라 중랑장 휘 무를 비조로 삼는다.

李奎翼

묘표

서기(1919)

/이동재

我李自唐中郞將諱茂始籍延安 우리 이씨는 당나라 중랑장 휘 무로부터 비로소 연안에 적을 두게 되었다.

 

결언

선조에 관한 기록이나 유적, 유물은 그 어느것 하나라도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될 것이다. 반면에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 사람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여러 가지 가능성을 유추해 보는 것은 탐구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속단하는 것 또한 금물이다. 자칫 잘못된 사실로서 선조들을 욕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조에 관한 자료는 그 진실성에 있어 만분의 일에 해당 할지라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이를 기초로 새로운 자료를 탐구하여 기어코 진흙 속에 숨은 보물 즉 선조에 관한 사실을 찾아 내는데 진력을 다하는 것이 후손 된 자의 책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인이 그 동안 편편히 모았던 시조 중랑장공에 관련된 자료들을 소개하였으니 많은 종원들이 이에 관심을 기울여 더 많은 자료와 사실들을 찾아 내는데 효용 되기를 바랍니다. 2003년 9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