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하전투(深河戰役) 소고
沙月 李盛永(2014. 1. 22)
  우리 延李人으로서 선조에 대한 작은 관심만 가진 사람도 ‘심하(深河)’ 하면 청련공(靑蓮公諱後白)의 손자 충의공(忠毅公) 이유길(李有吉)선조를 생각하면서 파주 발랑리 연인이씨세장지에 있는 충의공의 혈삼(血衫)무덤과 말무덤(義馬塚)을 떠올릴 것이다.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충의공이 참전한 심하전투는 만주지역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의 후금(後金 후에 淸) 세력이 점점 커져서 남하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명나라가 출병을 하면서 조선에 원군(援軍)을 요청하여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는 13,000명을 파견하였는데, 심하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조명(朝明)연합군이 패하였다.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고(일설에는 광해군의 밀명이 있었다고도 한다), 좌영장 김응하와 우영장 우리 延李의 이유길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유길이 죽기 전에 옷소매를 찢어 피로써「三月四日死」다섯 자를 써서 말갈기에 매고 말을 채찍질하여 보내니 말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먼 길을 달려서 파주 고향집에 와서 비명을 지르고 죽었는데, 조사해 보니 말갈기에서 혈삼을 찾아내 공의 동생 별좌공(別坐公諱復吉)이 압록강까지 가서 초혼(招魂)하여 혈삼무덤을 만들고, 그 아래 충마(忠馬)도 묻어서 ‘말무덤’이라 불려오다가 언젠가 ‘의마총(義馬塚)’ 표석을 세워주었다.

  이상이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심하전투의 전말이다. 그러니까 심하가 어디에 있으며 무슨 전쟁에서 어떤 전투들이 어떻게 상황이 전개되었는지 자세한 사항을 알지 못하고 지나왔다.

  최근 종친들과 약속한 한 권으로 된 가칭 「延安李氏 綜合系譜集」(연안이씨종합계보집) 발간을 위한 원고 작업을 하는 중에 생각지 않은 판사공파 세보에서 「戊午三月四日殉節於深河」(무오년-광해10년, 1618년- 3월4일에 심하에서 순절함)라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지금까지 우리 延李의 심하순절(深河殉節)은 전술한 충의공(忠毅公諱有吉) 한 분만 알고 있었는데, 판사공 17세손 청인공(淸仁公) 이천수(李天壽)선조 역시 심하순절의 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연리 종원 여러분께 알리면서 아울러 심하전투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좀 더 깊은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정리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 청인공(淸仁公) 이천수(李天壽) 선조의 세보 기록과 계보
(譜記) 字淸仁, 萬曆元年癸酉生(계유: 선조6년, 1573), 毫聖原從三等功臣, 僉正(첨정: 훈련부 종4품), 戊午三月四日殉節於深河
(譯) 자는 청인, 선조6년(1573)생, 임진왜란 극복의 공으로 문관들에게 호성(扈聖) 원종(原從: 準) 3등공신이며, 훈련부 첨정으로 있다가 출병하여 무오년(광해10년, 1618) 3월에 심하전투에서 순절하였다.

  ○ (系譜) 小府監判事公(諱 賢呂) 17세손
○ 심하전투(深河戰役)의 역사적 배경
  건주(建州)) 여진(女眞)을 통일한 누르하치(奴兒哈赤)는 1616년에 한(汗: 皇帝)으로 즉위하여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고, 1618년 명나라에 대해 "일곱 큰 원한(?)"을 내걸고 선전 포고를 하여 요동의 명나라 거점인 무순(撫順)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이에 명나라는 양호(楊鎬: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 경략으로 참전하였다가,병부주 사 鄭應泰 무고로 사직한바 있음, 月沙 李廷龜의 戊戌辨誣奏와 관련)를 요동 경략으로 임명하고 여진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명군은 예산 부족으로 군사의 결집에 시간이 걸렸으므로, 양호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후금에 북쪽에 접해 있으면서 누르하치 를 반대하는 여진족 예허와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예허는 여진을 자기들이 통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즉시 응했고, 조선 국왕 광해군은 출병을 꺼렸지만, 임진왜란 때 명에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조선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1만3천의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넘게 하였다.([첨부1] 심하전투절 전후한 明-後金의 역사일지 참조)

○ 명군(明軍)의 작전개념
  광해 11년(1619) 여진 예허부와 조선군을 포함한 명군10만은 전군을 북로군(예허군포함), 서로군, 남로군, 동로군 (조선군 포함) 4개의 군으로 나누어 4개 진로로 후금 누르하치의 본거지 허투알라(赫圖阿砬)를 포위하기 위해 진격한다.

  북로군은 개원총병관 마림이 예허원군과 함께 22,000의 병력으 로개원에서 출발하고, 서로군은 산해관총병관 두송이 29,000의 병력으로 심양에서 출발하여, 양군은 허투알라와 무순의 중간에 있는 사르후(薩爾滸)에서 합류하여 허투알라를 목표로 진격한다.

  또한 남로군은 요동총병관의 이여백이 20,500병력으로 요양에서 청하를 넘어 진격하고, 동로군은 요양총병관 유정이 조선군을 대동하고 단동에서 북상하여 각각 직접 허투알라라로 진격한다.

  총사령관 양호는 15,000의 예비병력과 함께 후방인 심양에서 대기하면서 전군을 총지휘한다.[첨부2] 명군 전투편성 및 진군계획
명군 작전개념 요도
○ 심하전투(深河戰役)
  명(明) 유정(劉綎)이지휘하는 명나라군과 강홍립(姜弘立)이 지휘 하는 조명(朝明) 연합의 동로군(東路軍: 명군1.2만, 조선군1.3만, 계2.5만)이 사르후(薩爾滸)로 북진하면서 명군은 아부달리, 조선군은 부차(富察: 현 桓仁 滿族 자치현)에서 홍타이지(후에 淸太宗)를 선봉으로 하는 후금군이 접촉하여 전투가 벌어졌는데, 부차전투를 훗날 조선의 정조대왕이 그 때 전사한 김응하(金應河)에게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추서하면서 ‘심하전투(深河戰役)’라 언급한 이후 조선에서는 심하전투라 불렀다.

[부차전투 (심하전투)개황]
  명군 동로군 사령관 유정이 아부달리전투에서 전사했을때, 조선군과 명나라 유정군 후방부대는 자금 부족으로 유정군 주력보다 늦게 출발하여, 아부달리 남쪽 부차(富察, 현재의 환런 만족 자치현)라는 지점에 머물고 있었는데 홍타이지를 선봉으로 하는 후금군이 역시 부차에도 육박하고 있었다.

  조선군의 강홍립은 조총과 장창으로 전면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를 맞아 싸웠으나, 강한 역풍으로 인해, 불이 꺼지고, 화기의 연기에 시야를 빼앗겼다. 그 틈을 이용해서 후금군 기병이 돌격하여 선봉부대를 돌파하였다. 이때 좌영을 방어하던 조선군 장수 김응하가 전사를 하였다.

  명군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밤이 되자 조선군 본영은 5000명만이 고립되어 포위되었다. 후금은 조선군에 항복을 권했고, 결국 이틀을 굶은 강홍립과 조선군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누르하치 에게 투항했다. 조선군의 투항 사실을 알게 된 명군의 장교들은 자살하고 동남로군은 소멸되었다. (기타전투 개황은 생략)

○ 결언
  명과 후금과의 첫 번째 전쟁인 사르후(薩爾?)전투를 비롯한 4개 군(軍)의 전투 결과는 후금군의 대승(大勝), 명군의 대패(大敗)였다.

  명군의 패인(敗因)은 여러 장수가 서로 떨어져 있어 완전히 연락을 취하지 못했고, 공을 다투다가 후금군에게 각개 격파 당한 것이 가장 중요한 패인이다.

  조선군은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병을 파병하여 왜군을 격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은(報恩)의 뜻에서 파병은 했지만 모든 여건이 대세는 이미 후금군 쪽으로 기울어진 전세에서 명군으로부터 물적 지원 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중과부적으로 고전하였는데 1만3천명의 병력 중 김응하 등 중간 제대 지휘관과 8천여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는가 하면,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등 최고 지휘관과 5천여 병사가 후금군에 투항하는 치욕을 치루었다.

  전투 이후 요동의 명군은 후금군에 밀리게 되어 개원, 선양, 요양 등 만주의 대부분이 후금군에게 탈취되어 후금은 날로 국세를 키워 명의 중원을 넘볼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혹자는 광해군이 명(明)-청(淸) 사이에서 먼 앞날을 내다보고 중립을 지향하면서 도원수 강홍립에게 ‘사세를 봐서 길을 선택하라’는 밀명을 주었기 때문에 강홍립, 김경서 등 지휘부 핵심이 밀명에 따른 올바른 처사였다는 궤변을 펴는 사람도 있는 듯 하다.
  전장에 보내는 군인, 특히 지휘관에게 사세를 봐서 적에게 항복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밀명을 내렸다면 그는 군주도 아니요, 이런 밀명을 받고 이행했다면 그는 군인도 아니다.
  차라리 그런 어려움을 예측하고, 중립을 지키는 것이 국익이라 판단했다면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주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를 물리치고 군대를 보내지 말아야 했을 것이 아닌가?

  제시된 자료들은 「위키백과」와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 기초한 것이라며 인터넷에 게재된 것을 간추린 것인데 여기에 우리 연리의 청인공(淸仁公諱天壽)은 물론 충의공(忠毅公諱有吉)도 등장 하지 않으니 좀 당황스럽다.

  그런 어처구니가 없는 군주 광해군이 반정으로 실각하고, 인조가 즉위한 후 충의공에게 교지를 내려서 ‘심하순절은 300년 역사의 조선이 금수(禽獸)의 나라를 면케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고,
  숙종21년(1695)에는 이조참판 (吏曺參判: 종2품)을 특증(特贈) 하고, 충신(忠臣)에 정려(旌려) 하였으며,
  순조조(1801-1820)에는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에 가증(加贈)하고, 충의(忠毅) 시호(諡號)내리고, 부조전(不祚典)을 특사(特賜)하였으니 그것이 사실들을 입증하므로 개의치 않는 것이 좋겠다.
  [첨부3] 국사대사전 기록에는 충의공도 기재되어 있고, [첨부4]와 같이 월사(月沙諱廷龜)께서 충의공의 혈삼무덤(虛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지난날 심하전투의 참상을 회상하며 슬픈 심경을 장문의 시로써 전하고 있다. 끝.

[첨부1] 심하전투를 전후한 명(明)-후금(後金) 역사 일지(韓國史大辭典)

1616년(明 神宗 萬曆44년, 後金 太祖 天命1년, 朝鮮 光海 8년)
  - 1월 만주의 누르하치(努兒哈赤)가 황제(皇帝) 태조(太祖)를 칭하고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 천명(天命)이라함.
  - 6월 하투모(하투부) 연수(연수)를 침범함.

1618년(明 神宗 萬曆46년, 後金 太祖 天命3년, 朝鮮 光海 10년)
  - 후금 태조 무순(撫順)을 빼앗음.
  - 윤4월 명 양호(楊鎬)를 요동(遼東) 경략(經略)으로 임명함
  - 7월 후금 군사 청화보(淸和堡)를 빼앗음.

1619년(明 神宗 萬曆47년, 後金 太祖 天命4년, 朝鮮 光海11년)
  - 1월 후금 태조 엽혁부(葉赫部)를 침.
  - 3월 살이허戰鬪(薩爾?: 深河戰鬪)에서 후금 군사가 명군을 패퇴시킴.
  - 6월 명 양호를 해임하고, 웅정필(?廷弼)을 요동 경략으로 임명함.

1620년(明 光宗 泰昌1년, 後金 太祖 天命5년, 朝鮮 光海 12년)
  - 7월 명 신종(神宗) 죽고, 광종(光宗)이 즉위. 9월 광종 폭사, 희종(熙宗) 즉위
  - 10월 명 원응태(袁應泰)를 요동 경략에 임명.
  - 11월 명-후금 백산(白山) 전투.

1621년(明 熙宗 1년, 後金 太祖 天命6년, 朝鮮 光海 13년)
  - 2월 후금 심양(瀋陽), 요양(遼陽) 탈취,
  - 명 경략 원응태 전사. 6월 웅정필(熊廷弼)을 요동경략에 임명.
  - 후금 요양(遼陽)으로 천도(遷都).
[첨부2] 명군 전투편성 및 진군계획


맨 마지막 줄 조선군 편성의 '우조방장 이일원'은 '이유길'의 오기인 것 같다.
[첨부3] 심하전투에 관한 한국사 대사전 기록
  심하의 싸움 深下- 1619년(광해11년) 명나라를 원조하고자 우리나라 군대가 만주 무순(撫順)까지 출병하여 후금(後金)과 싸운 전쟁. 만주에 있던 누르하치(奴阿哈赤)가 광해군 8년에 후금을 세우고 장차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자 남만주 지방으로 내려왔으므로 명에서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보내어 적과 대항하게 하였으나 적이 강대하여 조선에 원병을 청하여 1618년(광해군10) 7월에 조정에서는 참판(參判) 강홍립(姜弘立) 5도도원수로 봉하고 평안병사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명하여 2만명(?)의 군대로 원조하게 하였다.

  1619년(광해군11) 정월 초전에서 명과 연합군이 승리하였으나 후에 부차(富車) 근처에서 적의 대부대를 만나 대패하였으며 명장 유정(劉綎)이 전사하였고, 조선군에서는 선천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 운산군수(雲山郡守) 이계종(李繼宗), 영유현령(永柔縣令) 이유길(李有吉), 천총(千摠) 김요경(金堯卿), 오직(吳稙) 김좌룡(金佐龍) 등이 전사하였다.

  그 당시 강홍립은 싸우기 전에 먼저 통사(通事) 군관에게 박종명(朴從命)을 보내어 타협하여 조약이 성립되었다. 강홍립의 일행은 포로가 되어 적진으로 들어갔다.
(李弘植博士 編 교육도서 발간 ‘한국사대사전’)
[첨부4] 이영유유길(李永柔有吉) 허장(虛葬)에 대한 애사(哀辭)
<영유현령 이유길의 허묘에 얽힌 슬픈 이야기>
月沙 李廷龜(월사집 56권에서)
[表獨立兮荒郊(표독입혜황교) 황량한 교외에 홀로 우뚝 서고
  철芳杜於湘澤 (철방두어상택) 상택(湘澤; 湘水의 물가)에서 향기로운 두약(杜若: 香草의 일종)을 땄어라
  攬 涕兮遠望 (람체혜원망) 눈물을 훔치며 멀리 바라보고
  弔國상於天之北 (조국상어천지북) 저 하늘 북쪽에 국상(國傷: 나라를 위해서 희생된 사람)을 조상하노라
  昔爾之去兮 (석이지거혜) 옛날 네가 떠나갈 때에
  訪我於河湄 (방아어하미) 한강 가로 나를 찾아왔었지
  佩郡綬之若若兮 (패군수지약약혜) 군수의 인끈을 길게 늘어뜨리고
  帶長劍之陸離 (대장검지육리) 흔들거리는 긴 장검을 차고서
  謂西方之有難兮 (위서방지유난혜) 말하기를 서방에 난리가 있어
  將余赴乎王師 (장여부호왕사) 내가 구원하러 간다고 했었지
  曾日月之幾何兮 (증일월지기하혜) 그리고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事大謬兮天不助 (사대류혜천불조) 불운하게도 일이 크게 잘못 되었어라
  領前茅兮當一隊 (영전모혜당일대) 선봉의 한 부대를 거느리고 앞장서서
  凌虜障兮越險阻 (능로장혜월험조) 험준한 오랑케 보루를 넘어가는데
  風埃捲地兮沙礫擊面 (풍애권지혜사력격면) 풍진이 땅을 휩쓸고 모래가 얼굴을 치니
  車錯곡兮矢墜輦 (차착곡혜시추련) 치열한 교전에 화살이 앞에 떨어졌어라
  三創兮飮血 (삼창혜음혈) 세 번 상처를 입고 피눈물을 흘렸으나
  賊騎如雲兮救兵不至 (적기여운혜구병불지) 적의 기병은 구름 같고, 구원병은 오지 않았지
  左 馬參 死壹 兮空拳張 (좌참에혜공권장) 타던 말이 죽어서 맨주먹만 남았고
  士伏 弓山밑又 兮鼓不起 (사복도혜고불기) 군사들은 쓰러져 북을 쳐도 일으나지 않았지
  力已竭兮心不 水변兪 (역이갈혜심불투) 힘은 이미 다했으나 마음은 변함없고
  身離原野兮骨暴沙 石責 (신리원야혜골폭사적) 들판을 진격하여 모래와 자갈밭에 해골이 누었어라
  悲先珍之不反兮 (비선진지불반혜) 선진(先軫: 晉 文公의 신하 장수)이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하고
  痛臧洪之同日 (통장공지동일) 장홍(臧洪: 중국 삼국시대 사람, 자 子源)의 같은 날 죽음을 가슴 아파 하노라
  彼 臣又밑豆 子與老奴兮 (피수자여노노혜) 저 간사한 소인과 늙은 놈(淸에 항복한 姜弘立과 金景瑞를 말함)이
  制中權兮擁後勁 (제중권혜옹후경) 중군을 장악하고 후군을 거느린 채
  仰凶酋之鼻息兮 (앙흉추지비식혜) 오랑케 추장(후금 누루하치를 말함)의 숨소리만 우러러 보며
  爭嚮風而趨命 (쟁향풍이추명) 앞 다투어 달려가 그 명을 따랐지
  驅七千之健卒兮 (구칠천지건졸혜) 7천의 건아들을 전장에 내 모는 게
  若群羊之交勁 (약군양지교경) 마치 양 떼를 몰고 가는 것과 같았나니
  束强弩兮解堅甲 (속강노혜해견갑) 강한 쇠뇌를 묶고 굳센 갑옷을 벗기니
  藏鹿拳兮斂長臂 (장녹권혜렴장비) 큰 주먹을 감추고 긴 팔뚝 걷우게 하고는
  壺漿迎兮款話言 (호장영혜관화언) 적이 잘 대접하며 은근한 말로 달래니
  忘厚渥兮背大義 (망후악혜배대의) 그만 두터운 성은을 잊고 대의를 저버렸지
  哀爾 目少 小之丈夫兮 (애이묘소지장부혜) 슬프도다 그대 작은 장부는
  一行間之校尉 (일행간지교위) 일개 대오 속의 한 장교일 뿐이라
  奔有路兮降有徒(분유로혜항유도) 도망 할 길도 있고, 항복하는 무리도 있었으니
  豈不知生之可樂兮死之可畏 (기부지생지가락혜사지가외) 사는 것이 좋고,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을 어찌 몰랐으랴
  臨大節義不 艸밑句 生 (임대절의불구생) 그러나 큰 절개에 임하여 구차히 살지 않는 것이
  實平生之所守 (실평생지소수) 실로 평생에 지켜온 지조였어라
  子能仕兮敎之忠 (자능사혜교지충) 아들이 벼슬할 수 있으면 충성을 가르쳤으니(晉나라 때 狐突과 아들 狐毛, 狐偃 이야기)
  吾知爾之有所受 (오지이지유소수) 내 그대 가정에서 받은 가르침이 있음을 알겠네
  念爾祖於先輩兮 (염이조어선배혜) 생각컨데 그대의 조부(靑蓮公 諱 後白)는 선배들 중에서
  詞華哲匠兮經綸大手 (사화철장혜경륜대수) 문장이 뛰어난 대신이요, 경륜을 갖춘 대가였지
  謂爾之妙年投筆혜 (위이지묘년투필혜) 그대가 젊은 나이에 붓을 던지는 것을 보고
  初若첨乎所生 (초약첨호소생) 처음에는 조상을 욕되게 한다고 여겼더니
  及今成就之若此兮 (급금성취지약차혜) 지금에 와서 성취한 바가 이와 같으니
  眞可謂不墜家聲 (진가위불추가성) 참으로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할 만하네
  縱不能立功異域 (종불능입공이역) 비록 이역 땅에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其視太祝奉禮僅持門戶者 (기시태축봉례근지문호자) 태축과 봉례나 되어 겨우 문호를 유지하는 이들(음덕으로 벼슬하는 사람들을 말함)과 비교하면
  奚 帝밑口 天壤 (해시천양)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뿐이겠는가?
  爲臣止忠兮以死報國 (위신지충혜이사보국) 신하가 되어 충성을 하여 죽음으로 보국하였으니
  亦乃祖所望 (역내조소망) 이것이 또한 그대 조부(靑蓮公 諱 後白)가 바라는 바일 것일세
  故山兮何許 (고산혜하허) 고향산천은 어드메인가?
  關塞長兮楓林杳杳 (관새장혜풍림묘묘) 관새는 멀어 단풍 숲은 아득하구나 (杜甫가 夜郞에 귀양간 李白을 생각하며 지은 <夢李白> 시의 '魂來楓林靑 魂返關塞黑'구절 인용)
  魂兮歸來千秋 (혼혜귀래천추) 넋이야 천추토록 고향에 돌아오리니
  판水兮應有雙廟 (판수혜응유쌍묘) 판수(深河를 말하는 듯)에는 응당 (李有吉과 金應河)한 쌍의 사당이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