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산(息山)의 원학동기(猿鶴洞記)
沙月 李盛永(2006. 8. 24)
‘猿鶴洞(원학동)’이란 빨간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
경남 거창군 위천면 남산리 위천 물가에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상향(理想鄕)에 대한 꿈은 같은 모양이다. 오랜 옛날부터 이상향을 서양에서는 ‘유토피아’라 했고, 중국에서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청학동(靑鶴洞)’이라 했다.
    요즈음 중국 곳곳에서는 '샹그리라(香格里拉)'란 말이 이상향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유토피아(Utopia)는 1516년 영국 런던 출생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모어(More)경이 간행한 정치적 공상을 담은 이야기 형식의 라틴어판 책인데, 원 제명은 <사회의 가장 좋은 정치체제에 관하여, 그리고 유토피아, 새로운 섬에 관한 즐거움 못지않게 유익한 황금의 저서> 이라고 한다.

    가공의 인물 히틀로다에우스가 신세계에서 보고, 들은 가공의 여러 나라들 특히 유토피아에 관해서 모어 자신과 이야기 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주로 당시 유럽 기독교사회를 비판한 제1권과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를 묘사한 제2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2권에서 묘사한 유토피아는 ‘시민은 평등하고, 화폐가 존재하지 않으며, 재산의 공유제가 시행되고 있다. 모든 인간이 함께 노동하기 때문에 적은 노동시간으로도 충분하여 여가는 각자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는데 사용한다’ 는 것이다.

    유쾌한 이야기 형식을 빌려서 당시 부패한 그리스도교사회의 개혁과 재생을 정치가, 지식인들에게 호소한 작품으로 큰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로 ‘유토피아’는 이상향을 말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유토피아’란 말의 뜻은 ‘어디에도 없는 곳’ 이란 뜻이라니 그가 묘사한 유토피아는 이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무릉도원(武陵桃源)도원경(桃源境) 또는 도원향(桃源鄕)이라고도 한다. 중국 진(晉)나라 때 귀거래사 (歸去來辭)의 작자로 널리 알려진 도연명(陶淵明)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비롯된다.

    무릉(武陵)의 한 어부가 곡천(谷川)을 거슬러 올라가다 복사꽃((桃花)이 만발한 숲 속의 동굴에 들어가 보니 진(秦)나라 때 학정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의 자손들이 별천지처럼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어부는 아주 환대를 받고 며칠 동안 꿈 같은 날을 보낸 후 마을로 돌아와 다시 그 곳을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중국에는 이와 유사한 산중타계(山中他界) 이야기로는 난가설화(爛柯說話)가 있는데 진(晉)나라 때 왕질(王質)이라는 사람이 석실산(石室山)에 나무하러 들어갔다가 선동(仙童)이 바둑을 두고 있어서 이를 관전하다 보니 대국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지고 와서 세워 두었던 도끼의 자루가 썩어버렸고,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마을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이미 200년이 지나버렸더라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천하 태평할 때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청학동(靑鶴洞)은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도인(道人)들의 이상향이다. 청학동 전설은 우리나라 전국의 이름난 산에는 두루 퍼져 있거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오대산 노인봉 아래 계곡을 율곡선생이 큰 바위에 ‘소금강(小金剛)’ 이라 새기고, 청학동기(靑鶴洞記)를 남겼다.

    근대 학자 유연집(柳淵楫, 1853∼1933)의 범암문집 (汎庵文集)에도 시문집 <청학동(靑鶴洞)>이 실려있다. 또 삼척부에 속했던 두타산 동쪽 계곡도 이름은 좀 다르지만 뜻이 같은 ‘무릉계(武陵溪)’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청학동’이라 하면 지리산을 연상한다. 속성(俗姓)은 윤씨(尹氏)이고, 자는 이눌(而訥), 호를 침굉(枕肱)이라고 한 조선 중기 승려 현변(懸辯)의 저서 침굉집(2권)에 가사 귀산곡(歸山曲), 태평곡(太平曲)과 함께 ‘청학동가(靑鶴洞歌)’가 실린 것을 시초로 지리산 청학동 이 대중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져 왔다.

    청학동가는 청학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보면서 느낀 감회를 3-4조 가사로 읊은 것인데 첫머리가 “지리산 청학동을 녜듯고 이제 보니/ 최고운(崔孤雲) 종적이 처처의 완연하다” 로 시작된다. 지금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학동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지금도 ‘청학동’이라 부르면서 현재 20여 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이 청학동 전설이 전해주는 이상향을 현실화 시키려 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갱정유도(更定儒道)라는 단군계(檀君系) 종교를 믿으며 상투를 틀고, 갓 쓰고 도포 입으며, 초가집에서 전통적 예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으나 전화, TV등 문화시설도 갖추고 있다.

    근래에 와서 중국에서는 ‘샹그리라(香格里拉)’란 말이 또한 이상향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중국 서남부 운남성(雲南省)의 띠킹주(迪慶州)의 주도가 중디엔(中甸)인데, 시중에 파는 지도상에는 샹그리라(香格里拉)로 표기되고 있고, 이 곳 사람들은 모두 ‘중디엔(中甸)’이라 하지 않고 ‘샹그리라’라고 부른다.
    띠킹주의 남쪽 여강시에도 가는 곳 마다 우리 말로 하면 ‘샹그리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프랑카드나 안내판이 서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말 ‘샹그리라’는 이상향(理想鄕)이란 뜻이란다.

    샹그리라는 1933년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내놓은 <잃어버린 지평선(The Lost Horizon)>에 그려진 티베트 산 속의 이상향의 이름으로 처음 나오면서부터 많은 여행가나 탐험가들의 마음 속에 꿈의 땅으로 자리 잡았고, 그런 이상향을 찾아 나선 돈키호테 같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샹그리라는 애초부터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작자 힐튼이 마음 속으로 그린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자기가 살고 있는 땅, 고향(故鄕)을 ‘샹그리라’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한 것은 현대 문명사회의 눈높이로 볼 때는 사람이 살기가 어려운 아주 척박한 고장일수록 샹그리라로 더 높이 찬양한다.

    중국 운남성 적경만 해도 그렇다. 땅에서 나는 작물이라고는 밀의 한 종류 뿐이고, 시장에 팔고 있는 채소도 모두 외지에서 들여 온 것이란다. 오직 흔한 것이 있다면 고원에 풀은 잘 자라니까 풀을 뜯어먹고 사는 양이니까 양고기와 양 젖으로 만드는 식품 이를 테면 치즈 등이다. 뿐인가 중디엔(中甸) 도시의 고도만 해도 해발 3,500m라 산소 부족으로 그 곳에 살면서 적응된 사람은 안 그렇겠지만 관광객에게는 산소통 신세를 지지 않으면 몹시 괴롭다.
    그 외 샹그리라라고 부르는 티베트, 인도, 파키스탄, 네팔의 왕국 등도 고산 산악지대로 기후와 토질이 척박하여 물산이 풍부하지 못한 곳이다.

    중국정부는 영국 작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이 그리는 샹그리라의 배경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고원인 청해성과 티베트고원의 남동쪽 끝 자락이라고 판단하고, 여러 번 답사를 거쳐 티베트와 운남성의 접경지대를 ‘샹그리라’라고 공식 지정 공표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 팔리는 지도에 중디엔(中甸)‘香格里拉’로 공식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원학동(猿鶴洞)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선생은 문집 제4권 지행록(地行錄)에 ‘猿鶴洞記(원학동기)’ 라는 기행문과 ‘猿鶴洞(원학동)’ 한시가 ‘愁送臺(수송대)’ 라는 한시와 함께 들어있다.

    ‘원학동(猿鶴洞)’ 의 어원이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청학동(靑鶴洞)’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싶다. 청학동은 ‘푸른 학이 깃드는 곳’이란 뜻으로 우리 선조들이 이상향을 지칭한 것이니, ‘원학동(猿鶴洞)’ ‘원숭이가 뛰놀고, 학이 깃드는 곳’이란 뜻이니 곧 이상향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식산선생의 원학동기의 ‘원학동(猿鶴洞)’ 은 덕유산 동남쪽, 지금의 거창군 위천면과 북상면 일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마침 나의 시골집과 멀지 않는 곳이라 둘러보며 사진을 찍어 온 것이 있기에 식산선생의 ‘猿鶴洞記(원학동기)’ ,‘猿鶴洞(원학동)’, ‘愁送臺(수송대)’를 함께 올려 본다.(청색 글씨는 식산선생의 지행록에 수록된 ‘원학동기’의 번역문과 한시이다)

▶식산선생의 猿鶴洞記(원학동기)
    德裕山(덕유산)의 동남쪽을 猿鶴洞(원학동)이라 한다. 이 洞(동)은 感陰縣(감음현: 고려 때의 지명, 거창군 위천면 일대)의 옛 境內(경내)이며, 桐溪翁(동계옹: 鄭蘊)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온 곳이다. 마을 서쪽은 높은 산인데 모두 삐죽 삐죽하게 솟아오른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따로 「金猿洞(금원동)」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돌들은 마치 창을 줄로 세워 놓은 듯하다.
원학동 대동여지도(위)와 현대지도(아래)
좌상 붉은 색 띠가 백두대간 덕유산 부분이다.
    이 글에 나오는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선조2년(1569)-인조19년(1641) 간의 사람으로 조선 인조 때 명신이다. 자를 휘원(輝遠), 호를 동계(桐溪),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며, 본관이초계(草溪)이다. 광해군2년(1610) 별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정6품)에 있을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관련하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상소하다가 10년간 대정(大靜: 북제주군 대정읍)에 귀양갔다.

    인조반정 후 다시 벼슬이 나아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화의를 적극 반대하였고, 이듬해 정월 화의가 성립됨에 따라 할복 자살을 기도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죽어 국은에 보답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덕유산에 들어가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

    선조31년(1598) 가을에 경북 구성면 상좌원에 있는 초당공(草堂公 휘 長源)의 초당(草堂) 놀러 와서 시 한수를 지었다.

            綠竹秋聲細(녹죽추성세) 푸른 대밭 가을 소리 속삭이고
            凡盆酒正濃(범분주정농) 항아리에 술이 잘 익었는데
            草堂來遠客(초당래원객) 초당에 먼데 손님 오니
            江路還漁童(강로환어동) 강 뚝 길에 고기 잡는 아이를 불러오네

    마을의 동편은 곧 큰 반석이 흐르는 개울물을 누르고 있는 듯한 곳이 세 곳 있는데 이곳을 「滌愁巖(척수암: 근심을 씻는 바위)」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돌아 개울을 따라 백 여보 가면 「無敵石(무적석)」이라는 큰 반석이 그 개울의 꼭대기를 메우고 있었으며, 數十人(수십인)이 그 위에 앉을 수 있다. 이곳의 소나무는 늙은 古松(고송)도 있고, 말라빠진 소나무도 있는데 老松(노송)은 두터운 그늘을 이루고, 말라빠진 소나무는 古色(고색)이 있다.
    그 앞으로 물이 구불구불돌아 모여 검푸르게 고인 곳이 있는데 이곳을 「愁松臺(수송대)」라 부르며 예전에 이퇴계(李退溪) 선생이 「搜勝臺(수승대)」라고 이름을 고쳤다 하며, 林葛川翁(임갈천옹: 林薰)이 이 臺(대)의 이름(愁送臺)을 풀이 하기를 ‘愁送春愁送君(수송춘수송군: 시름으로 봄을 보내고, 시름으로 그대를 보낸다)’이란 詩句(시귀)가 남아 있다 한다.
수승대(愁送臺) 안내 간판
    愁送臺(수송대)에서 五六里(5,6 리)를 들어가면 石門(석문)을 지나서 葛川洞(갈천동)에 들어선다. 이 동부는 겹으로 되어있고, 확 트인 곳인데 숲이 우거진 산이 洞口(동구)를 막아서 따로 一區(일구)의 別世界(별세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서 林葛川翁(임갈천옹: 林薰)이 그의 季氏(계씨)인 瞻慕堂(첨모당)과 더불어 세상을 피해 은거한 곳이며, 그분들의 行誼(행의: 행실이 올바름, 品行과 情誼)를 밝힌 두 개의 旌閭閣(정려각)이 마을 어귀에 있어 가히 본받을 만 한 곳이다. 이곳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屛潭精舍(병담정사)」가 있는데 이곳은 林氏(임씨)들의 別莊(별장)이다. (이곳은 현 거창군 농산리 일대를 말하며, 지금도 갈천서당 등 임훈선생의 유적이 남아있다)
갈천동문 표석
    이 글의 갈천(葛川)임훈(林薰)은 연산군6년(1500)-선조17년(1584) 간의 사람으로 명종 때 효자에 정려되었다. 자를 중성(仲成), 호를 자이당(自怡堂), 고사옹(枯査翁), 갈천(葛川)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중종35년(1540) 생원시 급제, 명종 때 제용감 참봉(參奉: 종9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아우(첨모당)와 더불어 80세의 아버지를 정성껏 모시다가 세상을 떠나니 3년 동안 지성으로 수묘(守墓) 하면서 한번도 수질(首?=首勁: 상복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짚에 삼 껍질을 감은 테두리) 벗지 않았다 한다.

    명종19년(1564) 마을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후에 명종이 경사(經史)에 밝고, 행의(行誼)가 방정한 선비 6명을 승진 시킬 때 포함되어 언양현감(彦陽縣監: 정7품)을 제수 받고 6현이 함께 궐내에 들어가 임금이 정치도의를 하문한데 대하여 ‘먼저 수신(修身)이 제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선조 때 비안현감이 되었을 때도 편전에 들어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몸을 닦는데 있다’고 아뢰었다, 광주목사(廣州牧使: 정,종3품)에 보직되었다가 사퇴하고,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 정3품상)가 되어 군민의 폐를 들어 강력히 진언하고 사퇴하였다. 정여창 사당에 배향되었다.

    무주 덕유산 동북쪽 지금의 설천면 삼공리 일대를 '구천동(九千洞)'이라 한 것은 갈천(葛川) 임훈(林薰)선생이 명종7년(서기1552년)에 53세의 나이로 덕유산을 오르고 쓴 3000여자에 달하는 긴「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불성공자(佛成功者: 불공을 이룬자) 구천명이 머문 둔소(屯所)가 있었다 하여 구천둔곡(九千屯谷)이라 하였다'고 한 것이 처음이다.

    이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오르면 돌은 더욱 하얗게 변하고 물은 더욱 탕탕(蕩蕩)하고, 거세게 부딛치며 소리를 낸다. 여기는 아래 위로 몇 里(리)가 대체로 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 이름이 있는 곳은 제일 첫째가 「涯巖(회암)」이며, 회암의 남쪽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某里(모리)」라 부르며, 이곳에 桐溪(동계: 鄭蘊)의 오막살이 집이 있다.
    두 번째로 이름이 있는 곳을 「釜淵(부연)」이라고 하고, 세 번째는 「外筍巖(외순암)」이며, 네 번째가 「內筍巖(내순암)」이고, 다섯 번째가 「鐘淵(종연)」이며, 여섯 번째가 「松巖(송암)」이다. 이곳은 돌 層台(층태)가 淨潔(정결)하고 맑은 흐름이 뒤 감기며 흘러서 물보라가 완만하게 물꽃이 핀 것 같고, 날짐승들도 한가로움을 즐기다 고요함을 그리는 듯 놀이 온 사람을 따라 다니고 있다.

    또 하나의 산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면 「月城(월성)」이라 부르는 곳에 이른다. 이곳의 넓이는 葛川(갈천)의 겨우 三分(삼분)의 一(일)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이 사는 것 또한 그러하다.
    그 서쪽이 藍嶺(남령)인데 猿鶴洞(원학동)은 여기서 끝난다.
(원학동기 끝)

▶ 식산선생의 원학동(猿鶴洞) 시
                    猿鶴洞(원학동) 원학동에서
            德嶽아而東(덕악아이동) 큰 산 높고 높아 동으로 흐르고
            雲樹藏其谷(운수장기곡) 구름 같은 나무 숲은 골을 메웠네
            暄잠扶送我(훤잠부송아) 따뜻한 햇빛은 나를 도와 보내주고
            東風駕節?(동풍가절극) 짚신 막대는 봄바람에 실려가네
            仙府久無主(선부구무주) 신선 살던 마을에는 오래 동안 주인 없고
            猿鶴去不復(원학거불복) 원숭이와 학들은 한 번 간 뒤 다시 오지 않네
            초재上水臺(초재상수대) 높고 먼 수대에 올라
            洗我愁千斛(세아수천곡) 천 섬의 내 시름 씻어 보내리
            煙霞粧一壑(연하장일학) 자욱한 노을은 온 계곡을 물들이고
            山밑品 扉忽重闢(암비홀중벽) 바위 삽짝이 홀연히 겹으로 닫쳤구나
            稱是二連里(칭시이연리) 이 곳이 二連里(이연리)라 부르네
            過者雙旌式(과자쌍정식) 지나는 사람들아 두 旌閭閣(정여각) 본받아라
            石棧靑 山변章 合(석잔청장합) 돌 棧橋(잔교)는 푸른 산봉과 어우러져
            冥搜猶未息(명수유미식) 어둠에 쌓인 眞理(진리) 찾는 일
            矯首경遲回(교수경지회) 아직도 쉬지 않고 있는데
            指點仰측역(지점앙전력) 고개 들면 다시 우러러 높고 낮은 봉우리
            某里鳩巢荒(모리구소황) 某里(모리)의 오막살이 다 허물어져
            難追蹈海跡(난추도해적) 세상에 자취를 감춘 그 옛날 遺跡(유적) 찾기도 어려워라
            時序刺眼新(시서자안신) 때와 철은 자꾸 새로이 눈부신데
            高林春寂寂(고림춘적적) 깊은 숲 찾아 온 봄은 寂寂(적적)하기만 하네
            杳然玄圃想(묘연현포상) 아득한 神仙(신선) 世界(세계) 생각하면서
            歷險 土변突 弄劇(역험돌농극) 온갖 險地(험지)를 지나 그리도 찾고 그렸구나

▶ 식산선생의 수송대(愁送臺) 시
                    愁送臺(수송대) 수송대에서
            巖上滌得愁(암상척득수) 愁送巖(수송암) 바위 위에서 시름 다 씻었는데
            如何경愁送(여하경수송) 어찌하여 또다시 시름을 보내는가?
            別界尋幽興(별계심유흥) 別天地(별천지)에 그윽한 興趣(흥취) 찾는 길
            怯 心변白 春不共(겁파춘불공) 문득 두려워지노니, 아! 봄을 함께 하지 못할세라!
            攀援試拂衣(반원시불의) 한 번 옷자락을 훌훌 털어보라.
            旋疑換骨痛(선의환골통) 도리켜 의심함은 換骨(환골)하는 아픔이여
            玉流會其下(옥류회기하) 그 밑에 玉流(옥류)는 다 모여
            錦穀 尉밑火 影空(금곡위영공) 고운 비단 그림자 허공을 다림질 하는구나
            林鳥無宿期(임조무숙기) 숲속의 새들 옛 기약 있을 리 없는데
            那復恣淸弄(나복자청농) 어찌하여 또다시 해맑게 지저귀느냐?
            坐此掃百憂(좌차소백우) 무심코 앉아 있노라니 온갖 시름 다 쓸어버리는지
            去後應愁夢(거후응수몽) 나 떠난 뒤 누군가 또 시름어린 꿈 꾸겠지
◆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현종5년(1664)-영조8년(1732),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자 중서(仲舒), 호 식산(息山), 본관 연안(延安), 신기(神氣: 세상 만물을 만들어 내는 원기, 신비롭고 불가사의 한 운기)가 초월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글에 있어서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효우(孝友)에 독실하여 형제와 종당(종당)에 친목하였다. 만년에 주역(周易)을 더욱 많이 연구하였으며 필법(筆法)에 능하여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 예서 2분과 전서8분을 섞어서 쓴 옛 전자의 글씨체)와 종정체(鐘鼎體: 종과 솥 모양의 글씨체)를 잘 썼다.(국사대사전)
식산선생이 쓴 고전팔분체(왼쪽)와 주자의 서법을 본받아 쓴 서체(오른쪽)
▶ 식산선생의 가계(家系)
식산선생의 가계도
▶ 식산선생 연보(年譜)

    - 현종5년(1664) 서울에서 부 연안이씨 박천 이옥, 모 이수광 증손녀 전주이씨 사이에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남

    - 현종11년(1670, 7세) 때 부노(父老)가 장래희만능 묻자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겠다고 답하자 이 때부터 조부(芹谷 李觀徵)의 각별한 훈도를 받게 됨

    - 현종14년(1673, 10세) 조부를 따라 경상도에 왔다가 하양향교 대성전의 현판을 썼다고 함

    - 숙종4-7년(1678-81, 15-18세) 부친이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자 적소(선천, 정주, 가산, 안녕, 회령)에서 부친을 모심. 이 때부터 변방의 지리를 편력함

    - 숙종8년(1682, 19세) 4월, 의성김씨와 결혼

    - 숙종9년(1683, 20세) 4월, 모 전주이씨 졸

    - 숙종14년(1688, 25세) 과거 포기 글(上庭下稟廢擧書)을 부친에게 올려 허락 받음

    - 숙종15년(1689, 26세) 기사환국(기사환국) 발생. 서호(西湖: 현 西江) 족한정(足閒亭)으로 거쳐를 옮겨 태학성전(太學成典)을 저술하고, 중원(탄금대)에서 이잠(李?), 이서(李 水敍), 이익(李瀷) 형제들과 강론함

    - 숙종16년(1690, 27세) 성균관에서 강론하고, 검지산(黔智山) 기행. 8월 배 의성김씨 졸. 겨울에 교남(山喬 南) 서애선생 사당과 道南八賢書院 방문

    - 숙종17년(1691, 28세) 서애 유성룡 증손녀 풍산유씨와 재혼. 겨울에 상주 시리(柴里)에 머뭄

    - 숙종18년(1692, 29세) 늦가을 법천(法川)으로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예방. 겨울 가야산 유람

    - 숙종19년(1693, 30세) 영남일대 유람. 조부(芹谷 李觀徵)가 가학전수(家學傳受)의 뜻으로 내사본(內賜本: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 심경부주(心經副註), 태학연의(太學衍義), 계몽익전(啓蒙翼傳), 주역본의(周易本義), 논어집주(論語集註) 논어언해(論語諺解) 등의 책을 받음.

    - 숙종20년(1694, 31세) 서악사(西岳寺), 안동 일대 유람. 영태학기우생시(詠太學寄友生詩)를 지음

    - 숙종21년(1695, 32세) 2월 조부(芹谷 李觀徵) 졸

    - 숙종22년(1696, 33세) 유여중(유여중)과 함께 금보(琴譜: 가야금 악보)를 배워 경서왕고필첩갑(敬書王考筆帖匣)과 한사금보발(韓師琴譜跋)을 지음

    - 숙종23년(1697, 34세) 늦가을에 상주 노곡(魯谷)으로 이주. 겨울에 상주지역과 이외의 선비도 다수 참여하는 상락문회(上洛文會)를 개최함. 겨울에 풍산으로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을 예방.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과 서신 왕래.

    - 숙종24년(1698, 35세) 가을에 부친(博泉 李沃)을 따라 낙강시회(洛江詩會)에 참석. 9월에 부 상주에서 급서

    - 숙종26년(1700, 37세) 상주목사 이항복 증손 이세필(李世弼)과 만남. 사례종요(四禮綜要) 책정. 친지들에 의해 천운제(天雲齊) 완공. 시 남정(南征) 및 서양정편후(書養正篇後) 지음

    - 숙종27년(1701, 38세) 양자 빈출(彬出) 출생. 원조오잠(元朝五箴) 및 서이등제종유편후(書李登齊從遊篇後) 지음.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와 함께 산수도(山水圖)를 평론함.

    - 숙종28년(1702, 39세) 우리나라가 자주국임을 들어 만동묘(萬東廟: 화양구곡에 있음) 건립의 부당성을 지적함. 시 자득음(自得吟) 지음.

    - 숙종29년(1703, 40세) 화산(花山) 금양(錦陽)으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예방. 천도유경설(天道有敬說)을 입론(儒學史에 최초). 시 종약(種藥) 및 누항록(陋巷錄) 지음. 노론의 중진 달경(達卿) 성만징(成晩徵)과 만동사(萬東祠) 건립의 부당성을 토론한 결과인 만동사의(萬東祠議)를 지음

    - 숙종30년(1704, 41세) 갈암(葛庵: 李玄逸)으로부터 누항록(陋巷錄)에 대한 극찬을 받음. 송성달경(送成達卿: 成晩徵)과 유풍악서(遊楓嶽序: 金剛山)를 지음.

    - 숙종31년(1705, 42세) 시 의고(擬古)를 지음

    - 숙종32년(1706, 43세)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에 의하여 조정에 학천(學薦) 됨.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의 예방을 받음. 충효당기(忠孝堂記), 향약당기(鄕約堂記), 병낙재기(屛洛齋記), 서소재선생수서두시후(書蘇齋先生手書杜詩後) 등을 지음.

    - 숙종33년(1707, 44세) 두 자녀를 전염병으로 잃음. 향약제명록서(鄕約題名錄序)를 지음.

    - 숙종34년(1708, 45세) 당색을 초월하여 율곡, 사계, 등 서인의 이론도 수용한 조선의 유학 이론을 총 망라한 도동편(도동편) 20편 10문을 완성.(서인의 저술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는 남인의 밀암(密庵) 이재(李栽)를 비롯한 문하생들과 심각한 토론을 함). 노동서당기(魯東書堂記), 노동서당팔경기(魯東書堂八景記), 동애기(東記) 등을 지음.

    - 숙종35년(1709, 46세) 문경 화음산(華陰山) 답사. 최득기(崔得沂)의 군신언지록서(君臣言志錄序), 두류가(頭流歌: 지리산가)를 지음.

    - 숙종36년(1710, 47세) 문경 화음산(華陰山) 청화동(靑華洞)으로 이거(移居)하여 이곳에서 지서(志書) 15권, 노여론(노여론) 1권 등 많은 저술을 함. 연안세묵발(延安世墨跋), 독수우당실기(讀守愚堂實記), 우중차남추강운(雨中次南秋江韻), 누항부록(陋巷附錄: 華陰記, 雲山亭記, 詩 多數)) 등을 지음.

    - 숙종37년(1711, 48세) 청화동에서 저술활동을 계속하며 전휴보유원방시(全休甫遊遠訪詩)를 지음.

    - 숙종38년(1712, 49세) 11월 상주 노곡(魯谷)으로 돌아옴. 병와(甁窩: 李衡祥)와 학문을 논하고, 시를 주고 받음.

    - 숙종39년(1713, 50세) 천명잠(天命箴)을 지음.

    - 숙종40년(1714, 51세) 이른 봄에 거처하는 천운재(천운재)에 화재가 발생하여 4월 초 복구됨. 노곡후기(魯谷後記)를 지음

    - 숙종41년(1715, 52세) 조암준천기(槽巖浚泉記)를 지음.

    - 숙종42년(1716, 53세) 남인의 밀암(密庵) 이재(李栽)와는 도동편(道東編) 저작 이후 알륵이 계속됨. 문인(門人)들에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강의함. 여름에 노곡의 집이 무너짐. 청량산(淸凉山; 현 봉화군 명호면) 유람함. 소론계 남구만의 문제(門弟)로부터 시를 청탁 받아 차약천남상공서첨추별업운(次藥泉南相公徐僉樞別業雲)을 지음. 12월에는 상주 남장사(南長寺)의 노음산방(露陰山房)에 머물면서 경서(經書)를 강의하고, 경서시(經書詩) 21수, 남장사행(南長寺行), 남장사사적기(南長寺事蹟記), 노음산방록(露陰山房錄) 등을 지음.

    - 숙종43년(1717, 54세) 재배(再配) 풍산유씨(豊山柳氏) 졸. 유교관후상만시(柳敎官後常挽詩)를 지음.

    - 숙종44년(1718, 55세)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과 학문 교류,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과 서신으로 강론하고, 이강재기(二岡齋記)를 지음.

    - 숙종45년(1719, 56세) 상주성 북곽(北郭)으로 이사하여 가집(家집)은 시습재(時習齋), 실(室)은 승실(升室)로 명명함. 재진록(在陳錄)을 지음.

    - 숙종46년(1720, 57세) 손자 승연(承延) 출생.

    - 경종1년(1721, 58세) 일부의 퇴계학파(退溪學派) 선비들과 학문적 견해차이가 있어 오다가 늦봄에 금릉군(金陵郡) 섬봉(蟾峰)으로 이사함. 독서일기(讀書日記)를 남김. 10월 덕천서원(德川書院) 원장을 수락하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문하의 선비들과도 교류함. 지리산(智異山) 산행. 백씨(伯氏: 萬元)의 소재집(素齋集)을 발간함. 백회재제어(百悔齋題語), 서하상사응서락천지명설(書河上舍應瑞樂天知命說), 삼경첩서(三慶帖序), 백화재송서(白華齋頌序), 장암기(藏庵記), 서대동서법후(書大東書法後), 서금생고운첩(書金生孤雲帖), 서한석봉첩(書韓石峰帖), 서동현필적첩후(書東賢筆蹟帖後) 등을 지음.

    - 경종2년(1722, 59세) 상주 북곽(北郭)으로 돌아와 승실(升室)을 신축함. 퇴계학파 일부 선비들의 비학문적 자세를 염려하여 답황재수사서(答黃再?四書)를 지어보내 영남학계의 실정을 알려줌. 청천(淸泉) 신유한(申維翰)에게 해유견문(海遊見聞: 해와여행 이야기)을 들음. 승실기(升室記)를 지음.

    - 경종3년(1723, 60세) 8월에 관동(關東)을 유람하고, 명문(名文) 금강산기(金剛山記)와 다수의 시를 지음. 옥동(玉洞) 이서(李 水敍: 星湖 李瀷의 三兄)를 조상(弔喪)함.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다시 만나 사형(師兄)의 예를 받고, 학성문답(鶴城問答)을 기록하여 남김.

    - 경종4년(1724, 61세) 중춘(仲春)에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함. 4월 덕천서원(德川書院) 원장으로 알묘(謁廟: 임금을 알현함) 함. 삼장동(三藏洞)을 유람함. 여름에 성 내에 호랑이가 횡행하자 맹호행(猛虎行)을 지음. 성호(星湖) 이익(李瀷)으로부터 이형(二兄) 이중연(李仲淵)의 묘비문을 의뢰 받음. 남강시서(南江詩序) 중추(仲秋)에 강양군범주(江陽郡泛舟)를 지음. 운달산운봉사사적록서(雲達山雲峰寺事蹟錄序), 문경암유책서(文敬庵遺冊序), 활재집서(活齋集序), 고조(高祖: 北伯公 諱 昌庭)의 시서첩후(詩書帖後) 등을 지음.

    - 영조1년(1754, 62세) 덕유산(德裕山)을 유람함. 성호(星湖) 이익(李瀷)으로부터 이형(二兄) 이중연(李仲淵)의 묘비문을 완성함. 기민당집서(旣悶堂集序) 등을 지음. 사서강목(四書講目) 9권을 완성함. 12월 22일 회갑연.

    - 영조2년(1755, 63세) 동쪽을 유람함

    - 영조3년(1756, 64세) 경주 등 동해안을 유람 함. 늦봄에 전염병으로 2侄 1子 1女를 잃음. 초여름에 3일간 혼절(혼절)하고, 회생하여 사생음(死生吟)을 지음. 9월에 냉천(冷泉), 백화동(白華洞), 속리산(俗離山)을 유람함. 11월 문도(門徒)들과 남장사(南長死)에서 토론함.

    - 영조4년(1757, 65세) 초봄에 역통(易統) 8권을 완성함.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와병 중에도 소모사 황익재(黃翼再)와 상의하여 격문(檄文)을 지어 창의(創意)를 돕고, 아우와 아들을 창의에 가담토록 함.

    - 영조5년(1758, 66세) 7월 양자 지빈(之彬)이 사망함. 얼마간 노곡(魯谷) 천운재(天雲齋)에 거처함. 퇴도선생(退陶先生) 언행통록(言行通錄) 간행에 참여함. 가을에 좌의정 이태좌(李台좌)가 공을 이인좌의 난 창의 표저자(表著者)로 천거하여 장릉(長陵: 인조와 인열왕후) 참봉(參奉: 종9품) 및 빙고(氷庫) 별제(別提: 종6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음. 가을에 백운동(白雲洞)과 부석사(浮石寺)를 유람함. 추우당기(追尤堂記), 방화정기(傍花亭記)등을 지음.

    - 영조6년(1759, 67세) 3월에 선영(先塋) 산역(山役)차 상경함. 역대상편람(易大象便覽) 2권을 완성함. 6월 이후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과 서신으로 학문과 시사를 상론했는데 특히 낙육재(樂育齋: 교육기관) 설치에 관하여 깊이 상의함. 가을에 지행록(地行錄: 전 국토 기행문 5만 3천여자)을 완성함.

    - 영조7년(1760, 68세) 봄에 서호(西湖: 현 西江)의 가묘(家廟)에 참배함. 가을에 상주향교(상주향교) 도훈장(도훈장)으로 감사 조현명(趙顯命)과 함께 항론했는데 원근에서 많은 선비들이 참석함. 경상감영(慶尙監營)에 낙육재(樂育齋: 교육기관)를 설치함. 김효자행록후(金孝子行錄後)를 지음.

    - 영조8년(1761, 69세) 봄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에게 후사를 당부하고, 학자로서 대성할 것을 축원하는 마지막 편지를 보냄. 초가을 퇴도선생언행통록후(退陶先生言行通錄後)를 지음. 12월 18일 아침, 북곽(北郭) 승실(升室)에서 영면(永眠)함.

    - 정조10년(1786) 근암서원(近巖書院)에 배향(配享)됨

    - 순조13년(1813) 식산선생문집(息山先生文集)을 간행함

▶ 식산선생의 행적(行跡)
    선생의 고조는 함경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로서 증(贈) 이조판서(吏曺判書: 정2품) 휘(諱) 창정(昌庭)이요, 증조는 대군사부(大君師傅: 정1품) 증 좌찬성(左贊成: 종1품) 휘 심(衣尋)이요, 조고는 이조판서 치정(致政: 致仕) 봉조하(奉朝賀: 퇴임한 관리에게 종신토록 그 품계에 알맞은 녹을 받게 하는 예우) 휘 관징(觀徵)으로 청의(淸議: 높고 공정한 언론)를 주장하며 당도(黨塗: 權勢家)에 아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후덕중만(厚德重望: 두터운 덕행과 무거운 명망)을 말 할 때 반드시 공을 우선으로 삼았다. 선고(先考: 아버지)는 예조참판 휘 옥(沃)으로 호가 박천(博泉)이며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丁範祖 찬, 李益運 서, 墓碣碑文)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으로 전수 받아 지취(志趣: 의지와 취미)가 고상하였으며, 정주학(程朱學: 정자와 주자의 학)에 심취하였다. 숙종4년(1678) 15세 때 북청(北靑)에 유배된 부친을 따라가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시봉하며 학문을 닦았다.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공은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공은 누대에 걸쳐 서울에 살았으나 영남의 학자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하여 상주(尙主)로 이사하여 식산(息山) 아래 거처하면서 이곳에서 후진 양성과 풍속 교화에 힘쓰며 저술 활동을 하였다. (墓碣文 解說)

    이만부는 어릴 때부터 총명이 비범하고, 용모가 준수하여 보는 이마다 육골선풍(肉骨仙風: 신선 같은 외모)이라고 했다. 특히 눈빛이 형형(熒熒: 빛이 반짝거리는 모양)하여 밝은 별처럼 빛나 범상한 재목이 아니었다. 9살 때 그의 집 사랑방에 모여든 유생 중 한 사람이 “너의 장래 포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자(정자)와 주자(주자)의 높은 학문을 배우기를 원한다”고 대답 함으로서 그는 10세 이전에 벌써 학문에 높은 뜻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1983년7월18일자 영남학맥 117회 呂源淵기자)

    그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15세 때 당쟁이라는 정치 현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즉 그의 아버지 이옥(李沃)은 청남(淸南)으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온건론자인 탁남(濁南)에 밀려 북청으로 귀양 갔는데 이 때 아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겠다고 따라 나선 것이 이만부였다. 서북 변경지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이만부는 학문에 전념하면서도 백두산을 오르내리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1983년7월18일자 영남학맥 117회 呂源淵기자)

    20대 초반에 그는 집을 떠나 서호(西湖: 현 충주 탄금대)에 은거하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를 탐독하고, 사색에 잠기고, 틈이 나면 노래하고, 시를 썼다.

            父子集京國(부자집경국) 부자가 함께 벼슬하니
            聖恩如海淵(성은여해연) 성은이 바다와 같도다.
            豈願析所居(기원석소거) 어찌 사는 곳을 가리리오
            聊爲免喧 耳변舌(료위면훤괄) 시끄럽지 않으면 다행이네
            時찬詩험庭(시찬시험정) 나아가 학문을 배우고
            歸來暗一室(귀래암일실) 돌아와선 서실에 묻히네
            歌 口변永 太平世(가영태평세) 태평 세상을 노래하니
            志意在손필(지의재손필) 마음은 오막살이에 있도다. (1983년7월18일자 영남학맥 117회 呂源淵기자)

    이만부는 26세에 태학성전(太學成典)을 저술하고, 명나라 선비들이 유교의 본질을 어지럽혔다 하여 엄격하게 옳고 그름을 따져서 비판하였다. 반대로 그는 주염계(周廉溪),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장횡거(張橫渠), 주자(朱子)의 사상을 바르게 연구하여 그 사상을 집대성한 이황(李滉)을 깊이 흠모하였다.
    그는 27세 때 도산서원과 유성룡사당을 찾아 참배하고, 상주 도남서원에서 얼마 동안 독서하였다. 전처와 사별한 그가 유성룡(柳成龍)의 증손녀를 재취로 맞은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영남지방과 한 번 인연을 맺은 그는 34세 때 전 식구를 데리고 상주읍 외답리로 이사하였다.
    이 때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이만부 부자가 숙종임금에게 나아가 낙남(落南)할 의사를 밝히자 숙종이
    “그대들이 낙남 이후 누구와 혼인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만부는
    “추풍령을 넘으면 발에 걸리는 것이 버들잎(柳)과 오얏잎(李)입니다”고 대답했다 한다.(1983년7월18일자 영남학맥 117회 呂源淵기자)

    영남지방은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한 조선왕조의 창건에서 패망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배경이 어떠했던 간에 성리학의 본고장과 사림(士林)의 근원지 역할을 담당해 왔다. 따라서 영남지방의 뜻 있는 선비와 곤경에 빠진 학자들은 영남을 찾아 안주하는 사례가 많았다. 인조반정(1636, 북인 몰락, 서인 득세)→예송전(禮訟戰, 1673, 서인 퇴각, 남인 득세)→경신사화(1680, 남인 몰락, 서인 재집권)→기사환국(1689, 서인 퇴각, 남인 재집권)→갑술옥사(1694, 남인 몰락, 서인 재집권)이란 정변의 악순환이 계속되자 기호지방의 남인 학자들이 추풍령을 넘어 낙남(落南)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이중 대표적인 학자가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와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다.(1983년7월18일자 영남학맥 117회 呂源淵기자)

    학문이 이미 이루어짐에 속수(束脩: 스승을 뵈올 때 가지고 가는 예물)의 폐백(幣帛: 윗 사람에게 보내는 예물)으로 입문하는 선비들이 가득하여 더불어 강송하는 소리가 넘쳐흘렀고, 향숙(鄕塾: 시골 서당)이 홍등(紅燈: 붉은 등불, 등불을 밝게 켬)하였다. 늦은 나이에 조정에 천거하는 자가 있어 장릉침랑(長陵寢郞: 인조 인열왕후의 능 참봉, 종9품, 파주 탄현면 갈현리에 있음)이 제수되자 숙명(肅命: 임금의 명령에 사례하고자 임금 앞에 나아가 공손히 절하는 것)하고 돌아왔다. 얼마 후 다시 빙고별제(氷庫別提: 빙고의 부 책임자, 정,종6품)로 승수(陞授: 승진하여 제수함)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丁範祖 찬, 李益運 서, 墓碣碑文)

    선생의 도는 마음에 근본하여 일을 행하는 데에 베풀어지고, 논하여 기술하는 데에 드러났으니 묵묵히 계합(契合: 符合)하고, 깊이 터득하는 것에는 조가이(鳥可已: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孟子의 ‘이루’에 나오는 말)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것을 어찌 구구한 외물(外物: 외계의 사물)로서 빼앗을 수 있겠는가?
    숙묘조(肅廟朝; 숙종 때) 기사(己巳: 1689년 己巳換局, 宋時烈 등), 갑술(甲戌: 1694년 甲戌獄事, 金春澤 등)에 조정의 형국이 거듭 변하여 진신대부(搢紳大夫: 지위가 높고 언행이 점잖은 사람)들이 문망(文網: 학맥)에 걸려 명절(名節: 명분과 절의)을 훼손당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으나 선생은 고니처럼 청명한 곳으로 벗어나 있어 좋지 않는 일이 몸에 미치지 않았다.
    성호(星湖) 이공(李公: 李瀷)이 행장에 쓰기를 「오학(吾學: 우리들의 학문, 당시 주자학을 말함)의 종장(宗匠: 유교의 경서에 능통하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이며, 처사(處士)로서 명절(名節)을 보전하였다」하였으니 참으로 잘 본 것이다. (丁範祖 찬, 李益運 서, 墓碣碑文)

    공은 이기(理氣)를 논하여 말하기를
    「이(理)」는 하나일 따름이나 기질(氣質)과 만나면 성(性)이 된다. 그러므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뉘고, 사단(四端: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 즉 仁,義,禮,智를 말한다)과 칠정(七情: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 즉 喜,怒,哀,樂,愛,惡,欲 또는 喜,怒,憂,思,悲,驚,恐)으로 나뉘어진다. 혹자는 나누지 않을 수 없는 것에 나아가 한 번도 나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 번도 나뉘지 않은 것에서 나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 뒤라야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묘(妙)를 알게 된다」
    또 하늘의 도(道)에 있어서는 경(敬)이 있음을 논하여 말하기를
    「 하늘의 도(道)는 성(誠)한데, 성(誠)은 경(敬)이 아님이 없으며, 하늘의 도(道)는 일(一)한 데, 주일(主一)한 것을 경(敬)이라고 하니 하늘의 도(道)는 진실로 경(敬) 아닌 적이 없다. 성인(聖人)은 하늘인데 성인의 학문이 경(敬)을 주로 하니 하늘의 도(道)에 경(敬)이 없다면 이는 성인(聖人)과 하늘의 도(道)가 서로 같은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이전 사람들이 말하거나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며, 공이 스스로 깨우친 것이다. 공은 주자(周子)와 장자(張子)가 지은 책들을 즐겨 보았으며, 정씨(程氏) 형제(程伯子와 程叔子) 및 주자(朱子)의 학을 독실히 믿어 귀의할 바로 삼았다. 그래서 이들 오현(五賢)의 진상(眞像)을 그려 벽에 붙여 놓고 사모하였으며, 동방(우리나라)에서는 이퇴계(李退溪) 선생을 추존하였다. 그리고 명(明)나라 선비들이 참(眞)을 어지럽히는 말들을 매우 싫어하였다. (丁範祖 찬, 李益運 서, 墓碣碑文)

    타고난 자태는 티없이 아름답고, 피부는 어름과 눈과 같이 맑고, 눈빛은 밝은 별과 같았으며, 의지와 취향은 굳세고 깨끗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동은 단정하고 아담하여 군자로서의 재능과 덕을 겸비하여서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이라고들 하였다. [生質粹美(생질수미) 肥膚氷雪(비부빙설) 目瑩瑩若明星(목형형약명성) 旣有志趣莊潔(기유지취장결) 擧止端雅(거지단아) 君子才德兼備(군자재덕겸비) 人已知其非器也(인이지기비기야)] (星湖 李瀷 찬 行狀)

▶ 정범조(丁範祖) 찬, 이익운(李益運) 서, 식산공(息山公) 묘갈비명(墓碣碑銘)
식산공 묘갈비 전면
경북 상주시 내서면 북장리 북장사 인근 천주산(天柱山) 중턱에 있음
‘徵(징)’은 成(성: 이루다)이니, ‘徵士(징사)’‘학문은 이룬 선비’라는 뜻
            利塗旣闢萬殼同 務밑馬(이도기벽만각동무) 이익을 향한 길이 열려지자 모든 사람들이 함께 치달았거늘
            孰 千변刀 芬華 책바침위西 返樸素(숙천분화내반박소) 누가 분화(芬華; 화려하게 꾸밈)를 버리고 소박한 곳으로 돌아가는가?
            有覺息老惟古是慕(유각식노유고시모) 훌륭하신 식산 노인께서 오직 옛날을 사모하였네
            衆艶軒불我褐而步(중염헌불아갈이보) 사람들은 높은 벼슬자리 바라지만 나는 갈옷을 입고 걸으며
            人도鼎 食束 我甘食芋(인도정속아감식우) 사람들은 귀한 음식 탐하나 나는 토란국을 달게 여기고 먹는다
            玩心墳典치 余아래田 學圃(완심분전치여학포) 삼분오전(三墳五典:삼황과 오륜에 관한 책) 즐기며 밭 일구고 농사 배우네
            師事古哲壹循軌度(사사고철일순궤도) 옛 철인들을 스승으로 섬겨 한결같이 법도를 따르며
            微辭默契奧理神悟(미사묵계오리신오) 은밀한 말을 묵묵히 이해하고 심오한 이치 깨달으니
            이爲述作脫略箋註(이위술작탈략전주) 글을 지어 술작(述作)하고, 전(箋)과 주(註)에는 뜻하지 않았네
            聲氣之會戶錯其구(성기지회호착기구) 의론하는 모임에는 문 밖에 신발이 뒤범벅 되었고
            목彼南 山변喬 有류桂주(목피남교유류괘주) 深遠(심원)한 저 남교(南嶠)에 은거하면서
            有山可陟有水可 水변斤(유산가척유수가소) 산이 있으면 오르고, 물이 있으면 거슬러 오르네
            我樂我道式蹈且舞(아요아도식도차무) 나는 나의 도를 즐겨 하여 이를 행하고 또 좋아하니
            存順沒寧全歸天賦(존순몰녕전귀천부) 살아서 순하고 죽어서는 편안하니 모든 것이 天賦(천부)로 돌아가네
            我筆非諛載銘堂斧(아필비유재명당부) 나의 글은 조금도 아첨하는 것이 아니니 이에 무덤에 명(銘)을 쓰노라

    식산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다방면에서 많은 유고(遺稿)를 남겼다. 식산문집(息山文集) 38권(原集 22권, 續集 10권, 別集 4권, 附錄 2권), 도동편(道東編) 20권(2권 失傳), 역통(易統) 8권, 예기상절(禮記詳節) 30권, 사서강목(四書講目) 7권, 지서(志書) 15권, 역대상편람(易大象便覽) 2권, 태학성전(太學成典) 13권, 노여록(魯餘錄) 1권, 독서법(讀書法) 2권(상, 하권), 독서일기(讀書日記) 1권, 규훈(閨訓) 2권(한글본 상,하권, 失傳), 잡록(雜錄) 1책 계 140권에 이른다. (地行錄 序文)
    식산문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각자(刻字)했던 판각(板刻)이 집필과 판각작업을 했던 북장사(경북 상주시 내서면 북장리) 사찰에 보관되어 있다.
신축 북장사 일주문
북장사 극락보전
용마루 양편에 황금색 기와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상징하는 치미(蚩尾)
식산문집 판각이 보관된 북장사 대웅전앞 창고
북장사에 보존된 식산문집 판각
▶ 식산 이만부에 관한 연구 논문
    - 權泰乙의 1988년 「息山 李萬敷의 文學年久」(박사학위 논문, 효성여대 대학원)
    - 權泰乙의 1983년「 息山 李萬敷의 記 硏究I」(상주농업전문대학논문집22집)
    - 權泰乙의 1984년「息山 李萬敷의 記 硏究II」(상주농업전문대학논문집24집)
    - 權泰乙의 1985년 「息山 李萬敷의 祭文考」(상주농업전문대학논문집26집)
    - 權泰乙의 1987년 「息山 李萬敷의 在東錄考」(한실 이상보박사華甲記念論總
    - 權泰乙의 1983년 「息山 李萬敷의 傅의 硏究」(영남어문학 11집)
    - 權泰乙의 1987년 「息山 李萬敷의 文學觀 考察」(국문학연구 10집)
    - 權泰乙의 1987년 「息山 李萬敷의 地行錄 硏究」(영남어문학 10집)
    - 權泰乙의 1988년 「息山 李萬敷의 書 硏究」(石霞 權寧徹박사 華甲記念論文集)
    - 權泰乙의 1983년 「息山 李萬敷의 雜書에 나타난 批判精神考」(영남어문학 15집)
    - 朴贊善의 1983년 「息山 李萬敷의 生涯와 思想 硏究」(영남대 대학원)
    - 金南馨의 1983년「李萬敷,李翼,丁若鏞을 중심으로 한 朝鮮後期 近畿實學派의 藝術論 硏究」(박사학위논문,고려대대학원)
◆ 수송대 경치
수송대의 하이라이트 무적석의 사주 경관
요수(樂水) 신권(愼權)선생 소개 비석
수송대 관수루(觀水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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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들여 다 본 수송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