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회(阿山會) 아차산(阿且山) 등산
<아산회가 다시 가는 아차산에 얽힌 이야기>
沙月 李 盛 永(2010.1.4)

  새해 경인년(음력으로 치면 아직은 기축년이지만) 1월 13일 아산회(阿山會; 阿斯達山岳會, 육사18기 등산동호회) 등산 목표가 서울의 동쪽 울타리 아차산(峨嵯山)으로 정해졌다고 홈페이지에 공시되었다.

  그런데 꼭 10년하고도 4일 전인 2000년 1월 9일(일)에 아산회 1월 정기 등산으로 아차산 용마봉(龍馬峰)을 올랐었다. 우연인지 회장단이 일부러 이렇게 정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의미가 있는 결정이라 생각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많이 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2000년 1월 9일 아산회 아차산 용마봉 등산(B조)

  그 때 내가 준비해 갔던 아차산 관련 이야기 팜프랫이 아직도 서가에 꽂혀 있어 읽어보니 작성했던 나도 다 잊어버린 내용이니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고 일부 추려 본다.
삼국 세력이 부디쳐 왕과 장수가 전사한 전략요충지
아차산(峨嵯山, 348m)

  한북정맥(漢北正脈)이 포천과 의정부 지경 축석고개에 이르러 고개를 건너가기 전에 남쪽으로 한 기맥(岐脈)을 벋어 서울 동쪽울타리를 치면서 수락산(水落山, 637.7m)을 솟구치고, 또 당고개 지나 불암산(佛巖山, 508m)을 솟구친다.
  불암산 봉화대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와 삼육신학원 뒤편으로 경춘철도를 건넌 다음 5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의 기억에 생생한 92고지를 지나 새우개고개, 망우리고개를 건너 한강 광나루 북안에서 마무리 한 산이 아차산이다.

  조선조 초기에 한양천도와 관련된 이야기에는 보통 북악산, 인왕산, 관악산, 남산 등이 등장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양천도를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차산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차산이 북한산이나 도봉산처럼 높이 솟았더라면 서울은 어둡고, 서울의 아침은 늦어 사람들은 게으러게 했을 텐데 동쪽 울타리 아차산이 나즈막 하니 서울은 밝고, 아침 해는 일찍 솟아 서울사람들을 부지런하게 만들어서 ‘한강의 기적’을 일군게 아닌가. (돌파리 도사 같은 생각?)

  아차산이 비록 낮지만 전략적 의미는 큰 산이다. 아차산 용마봉에 올라서 보면 동쪽으로 구리-금곡-덕소에 이르는 평야가 한눈에 훤히 내려다 보이고, 서로는 뚝섬 왕십리부터 행주산성-의정부까지 거칠 것이 없이 감제 할 수 있다.
  뿐인가, 여주, 이천, 광주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제1번 통로와 한강 뱃길이 합쳐지는 옛날 서울의 관문 격인 광나루를 가까이서 통제할수 있는 지세적 중요성 때문에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에부터 전략요충지로 인식되어 산성 등 군사적 유적과 기록과 전설이 많은 산이다.

  아차산에서 만나는 유적으로는 사적제234호인 아차산성(길이 1Km, 높이 10m), 온달샘,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의 공깃돌바위, 고구려가 만들었다는 정상 부근의 소규모 보루성(堡壘城), 의상대사가 수신했다는 천연 암굴, 삼국의 전사한 군인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古墳)들, 석곽분(石槨墳), 다비(茶毘: 火葬)터, 봉수대(烽燧臺), 강신(降神)샘 등이 있고, 해마다 구리시 아치울에서는 ‘온달장군 추모제’를 지낸다고 한다.

◆ 아차산(峨嵯山), 아차성(阿且城)
  ① 아차산(峨嵯山), 아차성(阿且城)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
  아차산의 아차성(阿且城)은 백제 초기나 그 이전부터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러왔는데 ‘아(阿)’자는 한강의 옛 이름인 아리수(阿利水)'阿(아)'자에서 따오고, ‘단(旦)’자는 ‘돈(頓), ‘탄(呑)’ 등과 같이 고구려의 지명 끝에 붙어 계곡을 말하는 ‘곡(谷)’과 같은 뜻이라 ‘아단(阿旦)’‘한강가의 계곡’이란 뜻이 된다.

  그런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이성계(李成桂)가 태조 임금에 등극한 후 이름을 ‘成桂(성계)’에서 ‘旦(단)’으로 개명하였기 때문에 ‘旦’자를 신성시하여 이 글자가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아단성(阿旦城)의 旦(단)자는 쉽게 비슷한 모양의 且(차)자로 고쳐 아차성(阿且城)이 되고, 산이름 아차산(阿且山)은 음은 그대로 두고 ‘산(山)’을 의미하는 글자로 고쳐 아차산(峨嵯山)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보이스카우트 발행 ‘한국의 성곽과 봉수’ 중에서)

  * 阿旦城(아단성)은 고구려 19대 광개토제(廣開土帝) 능비(陵碑)에도 다음과 같이 고구려군이 공격하여 탈취한 54개 백제성 중의 하나로 그 이름이 나오고 있다.
  「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 穴아래果 南功取 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于 氏아래一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 艸아래鳥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 王爾 城 奧利城 句□城 古模耶羅城 須鄒城 □□城 □而耶羅城 王篆(竹제외) 城 於利城 □□城 豆奴城 農賣城 沸城 比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漢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赤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종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杉(木제외)穰城 曾拔城 宗古盧城 仇天城 □□□□ 逼其國城」
  (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벌잔국 군지과남공취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우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미성 오리성 구□성 고모야라성 수추성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농매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적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종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승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 핍기국성)
  (해석)「(영락태왕) 6년 병신년(서기39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백제를 낮추어 부른 이름)을 토벌했다. 우리(고구려)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우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미성, 오라성, 구□성, 고모야라성, 수추성,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농매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적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종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 핍기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백잔(백제)의 도성에 접근하였다」

  ② 아차산성(阿且山城)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
  아차산성(阿且山城)은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을 때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아차산에 쌓은 성인데 일명 아단성(阿旦城)이라고도 하며, 9대 책계왕(責稽王, 서기286-297년) 1년에 중수하였다.

  고구려는 장수왕63년(서기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쳐서 21대 계로왕(蓋鹵王, 서기455-475년)을 사로잡아 성 밑에서 죽이니 백제는 웅진(熊津;공주)로 천도하였다. 백제가 빠져나간 한강유역은 고구려와 신라가 쟁탈전을 벌리는 전쟁터가 되었다.

  먼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이 지역을 신라 22대 진흥왕(眞興王,서기 540-575년)이 국세를 떨쳐 영토를 확장하여 북으로 함경도 황초령과 마운령, 서쪽으로 한양의 북한산 비봉 등에 순수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서기559-587년)의 사위 온달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의 땅을 탈환 하려고 이 아차산성(아단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한국사대사전)

  ③ 위례성(慰禮城) 관련 이야기
  백제 시조 온조가 위례성(慰禮城)을 근거로 백제(百濟)를 건국하였다고 전하는데 위례(慰禮)가 도읍지 이름인지 백제 초기의 나라 이름인지 명확하지 않다. 또 그 위치도 여러 설이 있지만 광주설(廣州說)이 가장 유력하다.

  광주설(廣州說)에 따른 백제의 전말
  백제가 최초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서울 강북 일대)에서 건국하였고,
  제9대 책계왕(責稽王) 때(서기 286년) 아차산성(아단성)을 중수하였고,
  제11대 비류왕 때는 고구려의 압력 때문에 도읍을 하남위례성(남한산성 북쪽)으로 옮겼으며,
  제21대 개로왕은 아차산에서 장수왕의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고,
  제22대 문주왕은 도읍을 멀리 웅진(공주)로 옮겼다.

  추론(推論)
  한강 유역에서 백제의 세력이 위축되어 남쪽으로 내려가자 이 지역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더 내려가서 죽령(竹嶺)-계립령(鷄立嶺; 하늘재) 선까지 확장하여 신라와 대치하면서 최일선을 평강공주의 남편이며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溫達) 장군이 지휘하였다.(단양의 온달산성과 온달굴 유적)
  그러나 신라 24대 진흥왕의 영토확장으로 한강유역은 물론 동쪽은 함경도까지 신라가 차지하자(서울비봉, 함경도 황초령과 마운령에 진흥왕 순수비)
  고구려 26대 영양왕 1년(서기590년)에 온달은 임금에게 “빼앗긴 죽령-계립령 이북의 땅을 찾기 전에는 돌아오자 않겠다” 고 청하여 출정하였다가 온달은 아차산성전투에서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다.

◆ 평강공주(平岡公主)와 온달(溫達) 설화
  삼국사기 평원제(平原제) 본기(本紀)에 ‘평강공주와 온달’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요지>
  고구려 제25대 평원왕 때 온달(溫達)이라는 용모가 기이하나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젊은이가 무척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평원왕(平原王)의 딸 평강공주는 어릴 때 잘 울어서 아버지가 늘 “너 그렇게 잘 울면 바보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하면서 달랬다.
  평강공주가 자라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온달과 결혼하겠다’ 며 고집을 부리다가 끝내는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궁에서 쫓겨난 평강공주는 장님인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온달을 찾아가 결혼하여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면서 온달로 하여금 무술공부와 단련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 나라에서 실시하는 전국무술대회를 열었는데 온달도 출정하여 최우수자로 뽑히고, 장수로 등용되었는데 임금의 사위라는 것도 알려지게 되었으나 평원왕은 인정하지 않았다.

  어느 때 중국 북주(北周; 後周) 무제(武帝)가 요동정벌로 고구려를 침범하였는데 온달이 선봉장으로 출전하여 배산원(拜山原) 싸움에서 온달이 초기에 순식간에 적군 십여명을 벤 것이 계기가 되어 고구려군이 기세를 올려 대승을 거두게 되니 그때서야 평원왕은 “이 사람이 나의 사위다”고 공포하고 제1의 전공자로서 ‘대형(大兄)’이라는 직위를 내렸다.

  고구려 제26대 영양왕(瓔에서王제외 陽王: 평강공주의 친오라버니) 1년(서기590년) 온달이 왕에게 청하여 신라(진흥왕)에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고 출정하면서 죽령(竹嶺)과 계립령(鷄立嶺: 현 하늘재) 서쪽의 땅을 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떠났는데 서울의 아차산성 싸움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계립령(鷄立嶺) 바로가기(클릭): 하늘재길 걷기

  싸움이 끝난 후 온달의 장례를 치루려 하나 아무리 해도 관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 소식을 듣고 평강공주가 달려와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生死)는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 아, 돌아가소서” 하자 마침내 영구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장사를 지냈다.

  * 사가(史家)들은 이 설화에서
  평강공주가 평원왕의 명을 거절하고 집을 나와 온달에게 시집 간 것은 어머니(제1왕후)가 죽고 들어 온 제2왕후와 이복형제간의 불화 때문에 평원왕에 대한 반항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보며,
  삼국지에는 온달이 ‘숯을 구워 파는 청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설화에서는 ‘용모가 기이하나 마음씨 착하고 장님인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바보온달’로 등장한 것이나, 아차산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평강공주가 와서 어루만지며 애원하니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등은 설화의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과장된 것일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