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河廻)마을과 병산(屛山)서원
沙月 李 盛 永(2007.10.21)
    아사달 동기회의 2007년도 가을 나들이는 가족포함 107명이 10월 18-19일 1박2일간 버스 3대로 포항과 안동 지역을 돌았다.
    포항에서는 포스코, 해군제1해병사단 의장대 열병과 강습상륙훈련장 견학 및 시승, 그리고 호미곶(虎尾串)을 구경했고, 안동에서는 하회(河回)마을과 병산서원(屛山書院)을 구경했다,
◆ 안동 하회(河回)마을
안동의 황금들녘
하회(河回: 낙동강 물이 회돌이치는 곳) 북안의 암벽산
하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상 전망대에 관광객이 올라가 있다.
하회마을 전경
솔밭식당에서 찜닭으로 점심
만송정(萬松亭) 송림
하회 파노라마
잘 생긴 보호수 소나무
하회원지정사(河回遠志精舍: 하회의 원대한 뜻을 다듬는 집)
북촌댁(北村宅) 화경당(和敬堂)
충효당(忠孝堂)
하회마을 역사관 영모재(永慕齋)
*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 중종37년(1542)-선조40년(1607)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자(字) 이현(而見), 호(號) 서애(西厓), 시호(諡號) 문충(文忠), 본관 풍산(豊山).
    - 일찍이 이퇴계(李退溪)에게 학문을 배워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명종22년(1567)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翰苑: 예문관)에 들어갔다. 선조2년(1569) 명나라 사신의 서장관(書狀官:
사신 3인-正使, 副使, 書狀官, 통상 글이 좋은 사람이 서장관으로 뽑힌다)으로 다녀와 이조(吏曺) 좌랑(佐郞: 정6품)이 되었다.
    - 인성대비(仁聖大妃: 仁宗 妃)가 죽자 예조에서는 기년설(朞年說:
상복을 1년 입음)을 주장하였으나 서애는 적손(嫡孫)의 예에 따라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여 그의 주장대로 시행되었다.
    - 직제학(直提學: 정3품 하), 승지(承旨: 정3품), 부제학(副提學: 정3품 상)을 거쳐 상주(尙州) 목사(牧使: 정3품)로 있다가 물러나 모친 병 간호 중 함경 감사(監使=觀察使: 종2품),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상)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앗다.
    - 예조(禮曺) 판서(判書: 정2품)으로 있을 때 의주 목사 서익이 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 탄핵하자 물러나기를 청하여 3년 동안 고향에 묻혀 있었다.
    - 형조(刑曹) 판서로 재기하여 대제학(大提學: 정2품)을 겸하였고, 예조 판서로 옮겨 있을 때 역옥(逆獄:
반역자를 처단하는 옥사)이 일어났을 때 그의 이름도 들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이조 판서로 얾겼다가 이어 우의정(右議政: 정1품)에 승진시키고, 광국공신(光國功臣: 중국의 祖訓條章, 大明會典 등 공식 문서에 이성계 조상의 계보가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재된 것을 바로잡는데 공을 세운 19인에게 내린 공신 책록, 태종-선조간 12대에 걸쳐 15회의 사신을 보내면서 186년이 걸렸다.) 3등에 책록되어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 좌의정(左議政: 정1품) 재직 중에 일본이 군사를 명나라로 들어가겠다고 길을 내노라는 내용의 국서를 보내왔을 때 영의정 이산해는 묵살하자고 하였으나 그는 명나라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하였기 때문에 훗날 조선을 의심하는 것을 해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戊戌辯誣)
    - 선조가 명장(名將)을 천거하라 하자 그는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여 훗날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는 간성(干城)이 되었다.
    -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왕이 피난 갈 때 송도(松都: 개성)에 이르렀을 때 영의정(領議政: 정1품)에 임명되었으나 신잡(申 石集)의 말에 따라 그날로 사퇴하였다. 평양에 이르러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조정에서 북행(北行: 함경도로 가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는 의주(義州)로 갈 것을 주장하여 시행함으로서 후에 명나라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 관서(關西: 평안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안주(安州)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진무하고, 군량을 준비하는 중 명나라 원군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만나 평양지역의 상황이 기록된 지도를 주어 평양 탈환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 삼남(三南: 충청, 전라, 경상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이여송이 후퇴하려는 것을 막고, 남진하게 하였으며, 훈령도감제(訓鍊都監制)를 두어 군사훈련을 강화케 하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정인홍 등의 무소(誣疏)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누차 소명하였으나 사절하였다.
    - 선조37년(1604)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하면서 국난을 극복한 86인의 문신들에게 책록한 공신, 임란극복에 공이 있는 무신 18인에게 책록한 공신은 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선조40년(1607) 졸하자 병산서원과 여산의 퇴계묘(退溪廟: 퇴계 이황의 신주를 모신 사당)에 함께 모셨다.
    - 예악교화(禮樂敎化), 치병이재(治兵理財)에 이르기까지 박식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국사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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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구경
가개에 진열된 하회탈
◆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 가는 길에 바라본 낙동강과 안동의 진산 학가산(870m)
학가산 통신중계소는 한국 통신축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병산(屛山: 병풍처럼 생긴 산)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이름은 이 산이름에서 유래된 듯
병산서원(屛山書院)
* 병산서원(屛山書院): 광해군5년(1613) 경북 안동에 건립한 서원. 조선 선조 때 명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세웠는데 후에 그의 아들 유진(柳診)을 배향(配享)하였다.(국사대사전)
복례문(復禮門: 예의를 되찾는 문)
만대루(晩對樓: 저녁 노을과 대하는 누각)
병산서원 강당 앞에서 일동
아래 사진은 찍사 사진을 삥땅한 것. 왜? 우리 마누라가 들어있으니까.
서원마루에서 내다보는 경치
만대루 지붕위로 병산을, 기둥 사이로 낙동강을 바라보는 지극히 자연 친화적으로 설계된 집이다
귀경하면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학가산
귀경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3호차 노래자랑
♪“충청도서 올라온 지 사흘 밖에 안돼유---낫놓고 ㄱ자도 모르면 어떼유---”♪

모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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